출가(出家)를 위하여


 추석이 끝나고 강의실에 나타난 아줌마 수강생들, 다들 지친 얼굴들이다. 부모 형제들과 만나 따스한 위안을 받길 바랐을 텐데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들을 안고 왔다. 어느 집안이나 ‘악마의 금전’이 끼어들어 서로의 사이를 벌려놓는다.

 주로 남자 형제들이 문제다. 장남은 장남임을 내세워 경조사 때 들어온 돈들을 항상 다 가로채 간다고 한다. 남동생은 외로이 사시는 어머니 곁은 맴돌며 호소탐탐 재산을 노린다고 한다. 그럼 장남이 잘하는 집안은 평화로울까? 그런 집안은 장남에게 다들 의지해 문제가 생긴다.

 ‘가족’이 생기기 이전 인류는 참으로 평화롭게 살았다. 그때는 ‘소유’가 없었다. 산과 들에 널린 먹을거리를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그러다 먹을거리를 보관하는 법을 알게 되면서 ‘소유’가 생기고 소유를 향한 싸움을 하며 인간사회는 계급사회가 되었다. 평화(平和)는 입(口)에 들어가는 쌀(禾)이 공평(平)한 상태이다. 계급사회에서는 이 평화가 유지될 수가 없다. 이 ‘소유’로 인해 나타난 것이 가족이다.

 ‘가족’하면 사랑을 떠올리기 쉬운데 사실은 가족은 경제관계이다. 국가가 ‘사랑의 가족’을 내세우는 이유는 국민을 쉽게 통치하기 위해서다. ‘공정한 사회’가 되어야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는데 우리 사회의 지배자들은 이런 사회를 두려워한다. 국민들이 공정하지 못한 사회에 분노하고 분노를 행동에 옮기면 정말 공정한 사회가 오지 않겠는가? 그러면 부정부패로 인해 온갖 특혜를 누리던 그들의 특권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 그들은 국민을 ‘사랑의 가족’ 안에 가둬놓았다. 새장속의 새처럼 국민들은 사랑을 노래한다. 비명 지르고 울부짖는 소리도 밖에서 들으면 모두 노랫소리로 들린다.

 우리들의 가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체가 보인다. 어느 가족이나 다 힘겹게 산다. 사랑이 아니라 서로 물어뜯고 할퀴며 산다. 사랑의 아름으로 행하는 폭력은 얼마나 무서운가? 남 같으면 그렇게 하지 못할 행동도 가족이기에 쉽게 한다. ‘개인’이라는 존엄한 공간은 어디에도 없다.

 자본주의 이전의 봉건사회 같으면 그래도 가족이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가문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책임을 져주었다. 가족은 함께 살고 죽는 공동운명체였다. 그래서 며느리는 그 매운 시집살이를 견뎌냈다. 참고 참으면 ‘숭고한 어머니’의 자리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장남은 희생했다. 그러면 그 희생만큼 보상이 따라왔다.

 그런데 이제 그런 봉건사회는 갔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여전히 그런 봉건사회에 머물러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 여전히 ‘숭고한 어머니’를 내세워 권력을 휘두르는 시어머니가 있고 그런 시어머니를 힘으로 간단히 제압해버리는 ‘못된 며느리’가 있다. 부모 재산을 다 상속 받는 장남도 있고 희생만 하는 장남도 있다.

 이제 이런 가족 관계들을 끊어야 한다. ‘어머니’ ‘시어머니’ ‘며느리’ ‘장남’ 이런 단어들은 글자만 남고 내용은 다 사라져야 한다. ‘숭고한 어머니’가 어디 있는가? 그냥 여자일 뿐이다. ‘부모 대신의 장남’이 어디 있는가? 그냥 남자일 뿐이다.     

 강의를 바치며 나는 우리 모두 정신적으로 출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부도 서로 좋은 벗이 되고 부모자식관계, 형제관계도 좋은 벗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로 인격을 존중해 주며 삶을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과 우애는 커녕 보이지 않는 반목과 미움이 서려있는 관계들을 솔직히 인정하고 봉건제 사회가 묶어놓았던 밧줄들을 끊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의 가족’이라는 잔혹한 연극은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 인간은 배우가 아니다. 너무나 존귀한 각 개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