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학생의 방화사건 비틀어 보기-

(하늘의 재능 속에 숨은 그림 들여다보기/ 학생에 대한 시인의 변호) 


   신문기자들은 “가족들 끔직하게 태워 죽인 중학생” 등으로 표현한다.

거두절미하고, 학생의 잘못은 선생에 책임을 물을 수 있고, 아들의 잘못은 아비에게 물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중학생은 면책의 상당부분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극명한 현재의 세태를 포괄하는 상징적 사건임에도 기사는 “썬데이” 수준이다. 우리는 “르몽드” 수준의 심층기사 까지 원하진 않는다.  일간지 대부분의 사건담당(사회부) 기자들은 젊고 스펙도 좋은 푸른 지식인층이다. 이 사건의 무대 바로 뒤, 천막가리개를 재끼면, 현재 대한민국의 자화상이 그대로 있다.


   이제, 우리 모두, 사건의 안팍에서 우리 자신들을 대위시켜보자.

   첫째, 우리가 중학생이 되어보자.

타고난 재능 너머로 춤과 음악, 이른바, 온갖 안방의 황금대 시간에 장식되는 예능프로 전성시대의 공중파의 이미지들을 보라. 이승기를 흠모하고, 투엔이를 흠모하며, 가능한 모든 웃음거리와 잘 노는 우상들을 주입시키며, 찌든 신자유주의의 노예로 안주하게 한다. 당신도 너도 1% 가 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계급이동의 기회는 모두 박탈당하고 내 집과 내 가족의 안위에 급급하다.  향후 10년 후라도 나아지리라는 희망도 없다. 절망이다.

마약이 필요한 단계이며, 음주와 흡연이 지속될 수 있는 모든 환경이 완벽하다.

미륵도, 메시아도 너무나 멀리 있다.

  서울농대 동문인 이수만은 예능의 황제로 등극하여 예능제국을 가동하고 있다.  모든 자본의 유통에는 이토록 예능과 공생하는 시대가 되었다. 중학생인 나는 미륵도 메시아도 아버지도 구원자가 되지 못하고 예능으로 스타가 되고 대중의 우상이 스스로 구원하는 길임을 확신하게 된다.  나의 입장에서는 나의 예술의 길을 위해 아버지가 없어야 구원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어른들은 많은 불꽃을 보여주었다.  심리학자는 극렬한 (자기)분노의 표출이라고도 한다. 그렇다. 우리는 너무 가득한 분노 속에 있다. 소년인 나 또한 예민한 안테나로 그 분노를 쉽게 수용하고 표출하게 된다. 멘토가 어른이었기에 멘토의 수준을 초월할 수도 없다.


    둘째, 우리가 아버지가 되어보자.

허망한 예능의 세계를 너무나 잘 안다.  그것은 모닝커피 처럼 소비되고 마는 허상임을 잘 안다.  예능감독이나 PD 집단들에 수억 들일 돈이 없다. 아버지인 나 또한 적지 않은 예술작품과 인문서적의 감동으로 청춘의 힘을 소진하던 때를 떠 올린다.  동료 예인들이 월 백만원의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힘겨운 살림살이를 보며, 두세 가지 일거리를 찾는 가장노릇들도 보았다.  노동기술이 없건 있건 정의와 공정한 세상이 아님을 체험으로 알아온 약육강식의 정글이 된 세상을 보았다.  모아둔 돈이 별반인 아버지로, 아들에게 권하는 유일한 최선의 선택이 판검사이다. 맞다. 예전처럼 일년에 이삼십명 뽑는 시험이 아니라 수백명을 뽑는 시험이며, 자본주의 정점들에게 가장 필요한 인력이 법노동자 아니던가.  세상은 이토록 더럽게 바뀌었다.  법이 가장 필요한 시대가 가장 더러운 시대라고 옛 성현들이 예습, 복습 시킨 대목이기도 하다.   여전히, 예능은 돈이 많이 든다. 게으른 아버지로서는 그냥 고시 1차 시험인 말하는 능력, 상황판단하는 능력, 머리 굴리는 능력에다가 영어능력 시험을 통과하여, 헌법, 행정법, 공법, 상법을 잘 외어서 2차 시험에 붙어주길 원한다. 얼마나 저렴한가 말이다.


    셋째, 우리가 민중이 되고 변호하는 시인이 되어보자.

프랑스의 중학생은 분노를 표출할 줄도 안다. 68혁명을 떠 올린다.

미안하다. 너에게 프랑스의 청소년처럼 건강한 지식을 주지 못했다.

너에게 광장을 주어야 했건만, 겨우 나를 태움으로서 너의 혁명을 완수 하는구나.

우리가 불꽃되지 못함을 너로 인해 불꽃되게 하였구나.

미안타. 기자들은 너를 욕한다. 나는 너를 용서한다. 고맙다.

하늘은 불타는 제물을 원하는 이 시대가 그러함을 안다.

이 세상을 욕하지 마라. 그러나 저항해라. 그러하면 너는 승리자다.

세상이 그렇다. 삼천년 전에도 그랬다.

큰 사랑은 일순 잔혹해 보여도 불 속에서는 숭고하다.

스스로 태우는, 태울 수 있는 주체는 차라리 건강하다

비록, 거짓말, 틀린 말이라 하더라도.(끝)

 

- 드디어 우리의 중학생이 분노하기 시작했다.  징조다. -

 

(곁붙이는 글)

오래전이다.  항공기가 전남 어디 산중턱에 추락하여 선한 분들이 죽었다.

여러 추도 글 중에서 기억나는 대목이 있다.  그 글을 통하여 착하고 선하게 산 사람에게

닥치는 불행을 신앙을 가진 자로서 위안하는 대목을 기억한다.

"살아 남은 자에 주는 경고" 의 역할이,  라는 것이었다.

누가 죽음을 원하겠는가마는, 죽어야 할 때에는, 때로는 참혹한 과정을 통한 죽음은

이렇게도 신앙의 세계에서도 그 역할이 "선한 삶" 에게도 부여된다는 설명.

내 아들에게, 내 아내에게 적용하거나, 설명할 수 있으려면, 이 죽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만하는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죽음에도 명분세우기를 좋아하는 남정네 세계에서의 크고 작은 영웅들.

여전히 江의 분노를 지울 수 없는 지금, 글쓰기를 통하여 스스로 다독이거나 생각을 나누어 보는 시간.

미물로서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경지는 요원하기만 한데.

또 가을이다.  가을을 탄다.  괴롭다.  시가 될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