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우주를 읽고 답하다



   시를 읽는 독자로서, 함성호 시인의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는 시가 우주와 소통하는 아름다운

여정이 될 수 있음을 기뻐하고 또 즐길 수 있는 역할이 될 수 있음을 알게한다. 작년에 현장비평가들이 꼽은 시 중에서도

김사인 시인에 의해 선정된 시로서, 둔감할 수 있는 시읽기에 우주과학이 보태짐으로 시의 '프리즘'에 새로운 분광을

즐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마치,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 눈 앞에 어른대는 주인공의 대사 처럼 "어머니, 전 혼자예요" 는 오랫동안 울렁댄다.

많이 보태자면 울림이 오래간다는 거다.

  보이저 1호는 2호 보다 16일 늦게 미항공우주국 (NASA;나사)기지에서 미공군(USAF)이라는 이름 표를 달고 우주로 쏘아졌다. 필자가 대학에 다닐 무렵에 쏘아졌으니, 어연 33년 전이며, 함성호 시인의 '보이저'는 작년에 『문학과 사회』지에 발표되었다.


    시는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기도(祈燾)와 같다. 그러나 우주선 '보이저'의 할아버지뻘들은 냉전의 산물이며, 보이저 1호 또한 그 손자이다. 제이. 에프. 케네디도 가버렸고 흐루시초프도 실각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양대국의 최초 공동선점의 구두약속도 사라졌다.

    1998년이 되어서야 여러 강대국들의 연합형태로 '국제 우주 정거장'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우주에서 조차도 패권의 헤게모니의 선점을 진행하고 있는 형국이다.

 

    함 시인은 여러 우주선 중에 보이저 1호에 주목한다. 이유는 간명하다.  마치 당구대의 테두리에서 당구공이 튀기듯, 보이저 1호 만이 행성(별)들의 중력을 이용하여 가속하도록, 그 진행방향이 구성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년 여름에는 태양으로부터 111 에이유(AU; 약 166억 킬로미터)로 진입했다 할 정도로 그 신호가 지구에 도달하는 데 무려 31시간 후에나 도착한다는 먼 거리를 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우주에 겨울이 오고있어요

나는 우주의 먼지로 사라져 다시

어느 별의 일부가 될거예요

(중략)

나는 어디에 있나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누구에게든 알려주고 싶어요

(부분 인용)


 그러나, 어쩌랴. 발사체의 계획 자체도 무한대를 향해 날려 보냈다. 즉, 우리 태양계로 돌아오지 않도록 내 보낸 것이다. 인류인 '어머니' 가 만든 물체(시인에게는 아들 또는 딸) 중 가장 멀리 벗어난 물체가 되며, 그 또한 우주의 먼지가 될 운명임을 안다. 2007년에는 그의 밥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즈마 운용장치가 운명을 다했고, 재작년에는 전파 천문 장치까지 역할이 끝났으며, 올해는 자외선을 읽는 기계도 멈춘다고 한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2025년이 되어서야 모든 뇌기능이 멈춘다 한다. 그러나 시인은 돌아오길 기다린다.


 지구 또한 유한하며, 또 다른 행성을 찾는 꿈을 우주계발로 내세우기는 하면서, 또, 많은 과학 칼럼들은 과학기술과 교육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무한경쟁적 과목, 국영수를 뛰어 넘는 최우등반의 필수항목임을 강조한다. 무한대의 공간에 길없는 길을 과학이 나서지만, 정작, 우주에 길을 놓는 것은 시인이다. 사뭇 같은 논리로 댐과 보를 설치하고 쌓이는 모래를 계속 퍼 올린다는 원대한 계획의 추진은 일견 우주에다 쏟는 돈 보다 효율적일 듯 보일 수 있다.


 우주(태양계)는 어차피 10억년 후면 태양이 팽창하며, 종국에 태양계의 모든 물질들은 다시 먼지로 돌아 간다고 한다. 우주로부터 왔다가 우주로 돌아가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 때까지 지구를 깨끗하게 사용할 의무와 책임은 모두에게 있고, 지도자에게는 그것은 소명이기도 할 것이다. 어디에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큰판을 벌여야 고물도 많이 떨어지고, 시장에 돈이 잘 풀린다고는 한다. 진나라 황제 시대에도 만리장성의 무거운 돌 하나를 산까지 옮기는 일거리의 값어치는 성인 두 사람의 일년 노역비에 해당했다고 한다. 패권도 마찬가지다. 스푸트니크 1호에 놀란 미국 정치계가 케네디의 애국주의의 인정에 호소하는 명연설로 큰판을 벌이며, 그 패권을 지금도 유지하는 것처럼.


 진나라 왕이 고민한 것처럼, 진나라 국민들도 동의하였을까. (사실, 문화사의 견지에서 보면, 당시는 주체가 없었으므로 동의란 게 있을 수 없는 시대였다. '동의'란 개념 조차 근대의 시작과 같이 태어난 이념임으로) 노동의 댓가라기 보다 살려주는 댓가로, 산과 계곡 위로 돌을 밀며, 끌어 올리는 진나라 예속하의 민중 또는 노예들의 삶은 배고픔을 면하며 감사했을까. 어찌하였던, 여러 천년 뒤 후예들은 관광수입으로나마 살 수 있는 장관이 되었다.

 

강대국의 우주계발은 이른바 '무한대' 의 경쟁욕망 속에 무한대로 써먹을 수 있는 그들의 레퍼토리가 된다. 하늘과 우주를 따를 폭이 못된다면, 땅 위에 무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만들고 허물기", 모래밭의 아이들 모래성 쌓기 놀이이다. 낙동강을 바라볼라치면, 위험해 보인다. 누가 좀 말릴 수는 없는가. 또, 우리의 후손들이 결국 허물어야만 할 것 같은 걱정이 앞서는 것은 나 혼자만의 기우(杞憂)인가.


 우주의 또 다른 사람이 살 만한 곳의 기준은 결국 물이 있는 별인 것이고, 이 지구에 있는 물을 잘 관리하는 것도 우선 중요한 일이다. 결국은 '돈놀이' 게임에 걸려든 것이다. 나는 좀 더 저렴한 값에 좋은 물을 접하며 살고 싶다. 마당을 깊이 파면 먹을 만한 물이 나오는 땅이 아직도 좋은 땅이라 믿고 있다. 우리는 이미 걸려 들었다. 정수기 장사꾼의 계획에 이미 중독되었고 넘치는 중장비가 놀 곳을 끊임없이 찾는 구조 속에 걸려 들었다.


 낙동강이나 한강이 맑고 풍부하게 잘 관리된다 한들, 이미 바가지로 퍼 먹을 세대는 못될 것이다. 돌고래 만한 로봇물고기 떼가 수질을 관리할 것이며, 그 기계가 송신해 오는 신호에 따라 온 강물을 정수기에 돌리는 일거리가 산업이라는 명분으로 번성할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물길을 따라 지고 피었다. 범람 자체도 바다의 태풍역할과 똑 같이 모든 생명에게 천연 비료역할을 해왔다. 사람이 하는 것은 그 자연과 타협하며, 때로는 순종하며 같이 가는 것이 제대로 가는 것이다. 온 땅과 들녘이 인공물질 들과 화학비료 들에서 유기적 환경과 농법으로 환원하자고 하는 대세 속에 다시 와있다.


 잘 산다는 것이 배 불리 사는 것이 이십세기였다면, 이제 잘 산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삶이라는 것을 함 시인으로부터 쉽게 독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도

아름다움은 있을까요?


거기에, 거기에 고여 있을까요?

존재가 없는 연기(緣起)처럼

검은 구멍처럼


어머니 전 혼자예요

쇠락하고 있지요



*더 볼만한 자료: 비비씨(BBC) 다큐멘터리 6부작 "우주의 신비"

카나다 디스커버리 채널 "화성 여행"

http://en.wikipedia.org/wiki/Voyager_1

http://en.wikipedia.org/wiki/Heliopause



강태규(2010.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