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3호...
   2019년 11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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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1 담배씨만치만 보고 가소 /고석근
편집자
2970 2010-08-14
담배씨만치만 보고 가소 전철역 계단을 헉헉 올라간다. 몇 계단 앞에서 풍만한 몸의 한 처녀가 올라간다. 그녀는 자신의 엉덩이를 가방으로 가리고 있다. 뒤에서 누가 볼까봐 가리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내 눈은 시야를 잃는다. 눈앞을 똑바로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옆을 볼 수도 없고, 내 자세가 어정쩡해진다. 허적허적 간신히 계단을 다 올라가자 그 처녀는 가방을 옆으로 내린다. 이제 마음 놓고 봐도 된다는 건가. 복작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죄스러워진다. 초라해진다. 다른 여자들도 본다. 가지가지의 옷들, 옷을 보면 그 여자가 자신의 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보인다. 자신들의 몸값(?)을 여자들은 정확히 알고 있다. 남자들도 그 몸값을 정확히 알고 있다. 엉덩이를 가린 처녀는 자신의 높은 몸값을 그렇게 은근히 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나 보지 마! 그 처녀가 자신의 몸을 ‘합법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남자’는 따로 있을 것이다. 시선이란 보이는 것들을 장악한다. 그래서 함부로 보면 ‘눈 내리 깔아!’라고 명령한다. 세상엔 보는 사람들과 보이는 것들(사람을 포함하여)로 나눠진다. 보는 사람들은 강자고 보이는 것들은 약자다. 그래서 ‘마주보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마주볼 수 있을까? 길을 가다 마주치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과 마주 보고 있는 걸까? 분명히 한 사람은 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시선을 피할 것이다. 나무를 봐도 우리는 마주 보지 못한다. 온 몸을 무장해제하고 서 있는 나무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시선은 다를 수밖에 없다. TV에서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을 보면서 나는 원시인들의 눈을 주로 봤다. 그들의 눈은 한없이 아름답다. 하늘의 해처럼, 달처럼, 별처럼, 그들의 눈은 그냥 보고 있다. 삼라만상 모두 평등하게 보고 있다. 그들의 눈앞에서 모두 평등하다. 그들은 나무를 볼 때나 벌거벗은 사람을 볼 때나 눈빛이 똑같다. 남녀노소를 볼 때도 똑 같다. 그들의 세상에서는 모두 ‘누드’이기 때문일 것이다.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처자야 연밥 줄밥 내 따 줄게 이내 품에 잠자 주오 모시야 적삼에 반쯤 나온 연적 같은 젖 좀 보소 많이야 보면 병 난단다 담배씨만치만 보고 가소 우리 민요 '상주 모내기 노래' 중에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나날들이다. 우리가 시원한 옷차림의 서로를 담배씨만치만 보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고석근
편집자
2022 2010-08-09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어제 마신 술로 정신이 몽롱하다. 자전거가 비틀비틀 한 24시 편의점 앞에 닿았다. 파란 파라솔과 의자들 옆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베지밀 한 병을 사왔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베지밀을 홀짝이며 주위를 둘러본다. 어젯밤의 환락이 지나간 자리. 다들 분주하다. 청소를 하고 밖에 내놓은 탁자와 의자들을 정리하고 있다. 모두 각자의 생각과 아픔을 갖고 살아갈 것이다. 한 식당으로 들어가는 아줌마를 본다. 주방에서 일하는 아줌마 같다. 저 ‘아줌마’를 그냥 ‘아줌마’로 볼 수 있을까? ‘아줌마’라는 단어에는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 산이 산으로 보이고 물이 물로 보이기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딸이 여자로 보여 딸을 성폭행하는 아버지들도 있다. 그렇게 되면 딸은 무엇으로 보일까? 계속 여자로 보일까? 딸로도 보일까? 딸은 아버지가 무엇으로 보일까? 아버지와 딸은 얼마나 좋은 사이인가? 그런데 그 많은 걸 잃어버리고 ‘남녀’가 되어도 괜찮은 건가? 그 아버지들은 이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실상이 아닐까? 너무나 고귀한 것을 잃어버리기도 태연하게 사는 사람들. 남들이 잃어버린 것만 선명하게 보이는 사람들. 얼마 전엔 연로한 어머니를 살해한 50대 남성도 있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무엇으로 보였을까? 무엇이 그를 어머니가 다른 무엇으로 보이게 했을까?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다른 무엇으로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가끔 어머니가 다른 무엇으로 보여 그는 자신의 눈을 비벼보았을 것이다. ‘눈에 티가 들어갔나?’ 그러다 세월이 흐르며 그는 자신의 ‘환영’에 익숙해지고 어머니를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죽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어머니로 안 보였으니 그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사람들은 그를 존속 살인죄로 처벌하고 싶어 하나 그게 가능한가? 그의 눈에 헛것을 씌운 것에 대한 죄는 왜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가? 다들 자신들도 그런 죄가 있어 서로 무죄의 알리바이가 되고 있는가? 4대강을 개발하는 자들은 강이 무엇으로 보였을까? 그들도 처음에는 굽이굽이 흐르는 거대한 강 앞에서 경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어찌하여 겁도 없이 그 강을 마구 파헤치게 되었을까? 앞으로 그들에게 엄청난 재앙이 뒤따라올 텐데 그들은 어쩌다가 그런 재앙 앞에서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버렸을까? 그들을 비난하고 가엽게 여기는 우리는 그들과 과연 얼마나 다를까? 우리는 다른 무엇에게서 경외감을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외교통상부 장관이 ‘젊은 애들 북한 가서 살아라’라고 했단다. 그의 눈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무엇으로 보였을까? 젊은이들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들풀처럼 싱싱한 젊은이들이 그에게는 도대체 무엇으로 보인단 말인가? 한 나라의 장관의 눈이 이렇다는 게 이 나라의 수준이다. 그런 사람이 그런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 만큼 우리의 눈들은 망가져 있을 것이다. 두렵다. 언제 어디서 내가 나 아닌 다른 무엇으로 보여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나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이 몸뚱이일 텐데 이 몸뚱이가 다른 무엇으로 보이는 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군가의 눈에 내가 다른 무엇으로 ‘변신’했다면 나는 무엇으로 나를 증명해야 한단 말인가? 소리치고 발버둥 칠수록 그에겐 내가 다른 무엇으로 보일 텐데. 자전거에 오른다.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는 저 아줌마, 말갛게 보인다. 순간 햇살이 눈부시다. 가로막고 있는 사람을 간신히 피한다. 눈을 가늘게 뜨고 희뿌연 길을 간다.  
19 그의 죄는 무엇인가? - ‘강용석 의원 성희롱 사건’을 보며 /고석근
편집자
1985 2010-07-30
그의 죄는 무엇인가? - ‘강용석 의원 성희롱 사건’을 보며 강용석 국회의원의 성희롱 발언이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가 했다는 발언들을 살펴보면 ‘토론할 때 패널을 구성하는 방법을 조언해주겠다’ ‘못생긴 애 둘, 예쁜 애 하나로 이뤄진 구성이 최고다. 그래야 시선이 집중된다. 못생긴 애 하나에 예쁜 애 둘은 오히려 역효과다’ ‘아나운서를 하려면 다 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나운서 할 수 있겠느냐’ ‘그때 대통령이 너만 쳐다보더라’ ‘남자는 다 똑같다. 예쁜 여자만 좋아한다. 옆에 사모님만 없었으면 네 번호도 따갔을 것’ 등이다. 그의 발언으로 인해 그는 사회의 공분을 사고 있다. 그는 어떤 심정일까? 이 분노들이 수긍이 될까? 아마 되지 않을 것 같다. ‘평소에 하던 말들을 했을 뿐인데...... .’ 이렇게 생각하며 억울해 하지 않을까? 평소에 함께 이런 ‘대화’를 하던 동료들이 갑자기 분노하는 모습들을 보며 그는 이 사회가 무섭게만 느껴지지 않을까? 그의 문제는 무엇일까? 술자리서 할 얘기를 공식적인 자리서 한 게 문제일까? 그렇다면 그의 발언은 문제가 없단 말인가? 그가 공인이라 문제가 되는 걸까? 그가 말한 것들을 곰곰이 따져보면 우리 사회의 문제가 고스란히 보인다. 그의 발언들에서 우리 사회의 ‘여성의 상품화’ ‘가부장 사회의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우리 사회 문제를 그가 얘기했을 뿐인데 그가 공분을 사야 하는 걸까? 그는 대학생들 앞에서 문제의 발언들을 했다. 그런 발언들을 하면서 대학생들이 받았을 마음의 상처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못했을 것 같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소위 ‘엘리트 코스’만 밟아오며 언제 남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가 있었을까? 이게 우리 교육의 가장 심각한 문제다. 옆에 있는 급우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단순 지식을 달달 외우며 ‘명문학교’에 진학하고 그 후에는 ‘사회 지도층’이 되는 엘리트 코스, 이걸 고쳐야 한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 지도층들이 이런 교육의 ‘피해자’일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이런 본능을 왜곡시켜 버린다. 후안무치한 사람이 되게 한다. 이런 사람은 지도층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의 가장 큰 죄는 이것이다. 그 문제의 발언들을 술자리서 했으면 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그런 발언을 어디서든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은 사회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그 발언들이 담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순들을 고쳐야 할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사회의 모순들을 고칠 생각은커녕 그 모순들을 희롱의 소재로 삼는단 말인가? 그는 억울할 것이다. 맞다. 억울하다. 다른 지도층들도 그와 비슷하지 않은가? 죄도 공평하게 받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형태든지 그들은 최소한 공직에서 물러나는 죗값은 치뤄야 할 것이다. 그가 자신의 죄를 아는 기적이 일어날 순 없을까? 자신이 받은 교육, 사회 환경들이 그를 자신도 모르게 죄인이 되게 했으니 그가 우리 교육의 개혁에 앞장서고 사회 정의를 위해 앞장선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일까? 그런데 그들은 기득권이 워낙 커 스스로 회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예수가 ‘다 버리고 내게로 오라’는 말은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본 진리일 것이다.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사회 지도층인가?’하고 놀랄 때가 많다. 그들도 우리 사회 모순의 피해자라는 걸 생각하면 불쌍하기 짝이 없지만 그들은 ‘지도층’이기에 단죄를 면할 수 없다. 우리 사회의 문제들은 산적해 있다. 어서 빨리 고쳐야 한다. 그런데 개혁에 앞장 서야 할 지도층들이 지도층답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국민에 의해 퇴출되는 것이 그들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될 것이다. 앞으로의 선거들은 이런 부적격 지도층들의 퇴출의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8 다래끼가 약이다/ 강태규
무궁화
2610 2010-07-27
다래끼가 藥이다 -유순예 시인의 <다래끼>를 읽다가 고단한 열에 뜬 여행길에 돌아와 멱을 감기도 하고, 동네 음악잔치를 보고 돌아와도 역시 글밥을 채우지 못해 허전한 밤이 되었다. 딱히, 지친 허리 휴식 삼아 한주먹 쥔 최근 발간된 문집에서 <다래끼>를 읽는다, 생각한다, 꼬집어본다, 아니다 그냥 읽히는대로 본다. 글을 또닥이는 지금, 허리님이 고단하다. 여독이기도 하지만 오늘 용을 쓴게다. 다래끼를 읽어내는 저 내공은 도인의 경지이다. 도인의 글을 읽는 흉내라도 내는 것도 도인 먼발치 쯤에 자리잡고 있다는 으스댐도 있는거다. 그러니 뻔뻔이 글을 쓰기도 하고 부끄러운 채 하기도 한다. 많이 잃고, 잊고, 까먹고, 생까고 사는 오십대의 인생이 기실 내놓을게 있을 턱이 없다. 교회다니고, 대중한 기업체를 가지고, 대학별 고향별 연줄까지 있다면, 기업프랜드리 청와대에 일할 수도 있는 나이지만, 그리 날렵하지도 않고, 남의 머리 속을 들락대는 잔머리는 더더구나 잼뱅이다. 자랑이 아니라 내 무능을 고백하는거다. 권력의 학문을 마다한 아름다운 영혼을 숭앙하는 우리 시인들이여, 이야기꾼들이여. 고단한 학문에 홀린 지난 젊음을 떠올려 볼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다래끼다. 다래끼를 읽다가 놀란 것은 그 비밀을 꽤고 있다는 강렬한 동의다. 온갖 의학지식이 지천으로 늘려있고, 또, 가진자를 위한 고급치료가 거대한 돈의 흐름을 간파하고 상품으로 확대생산의 역량이 모아지고 있는, 거대한 음모가 진행되는 이 때, 다래끼를 들여다보는 가치는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옛것의 가치를 너무 업수이 보는 경향 또한 다반사이다. 이유는 문화, 경제, 교육, 사상의 헤게모니를 놓쳐버린 근대사에 있다고 본다 . 교육지도자를 비롯해서, 정책입안 또는 소위 싱크탱크 집단에 made in USA 가 너무 많다. 치우친 생각이라 되집히기도 하지만, PL480 의 신대륙 잉여농산물혜택으로 목숨부지한 세대나, 그 후예쯤인 우리니까 딱히 부정할 소지는 없을 수도 있다. 문제는 동란중이나 직후에 미국으로 가서 미국식 사고와 선망을 가지고 돌아온 군사분야, 교육분야, 종교분야, 행정분야, 경제분야의 브레인들이 해놓은 화려한 계보 탓이 대부분일 것으로 생각한다. 의학분야도 그러하다. 모든분야 중에 똘똘뭉친 세계적 이익집단이 남한의 의약분야가 되어버렸다. 다행하게도, 민주 의사회, 민주 한의사회, 민주 약사회 등이 제목소리를 내고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전문교과서 교육에 충실한 탓으로 유순예 시인의 다래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마음의 지혜는 , 정작, 그들, 의약 엘리트들에게는 없다고 본다. 다시, 다래끼다. 집안의 자녀들이 안경을 많이 쓴다. 인터넷 게임들과, 테레비와 만화영화 때문이라고 믿는 어른은 역시 유시인의 다래끼를 다시 읽어야 한다고 감히 생각해 본다. 모태에서 부터 온갖 양의학의 혜택이 빚은 결과로 독해한다면 성공적 독법이다. 다래끼는 지진을 막는 작은 화산분출이기도 하다. 그 흔한 작은 분출을 통해서 아이들의 눈건강이 악화되지 않았다는 비밀을 이 시에서 읽기를 바라는 욕심이면 욕심이다. 도처에 다래끼가 사라졌다. 도처에 안경잽이 학동들 천지다. 도처에 안경점이다 곰곰이, 다시 우리의 몸을 읽는 지혜를 유시인의 다래끼에서 만난다. 참으로 기쁘다. 우리는 너무 많은 사리돈과 판피린 코프와 신종 해열제들로, 콧물치료제로, 다래끼 약으로 젊은 어미들의 몸을 더렵혔고 우리의 아동들에게서 다래끼를 약탈했으며 긴 수명을 갖는 대신 거룩한 죽음을 박탈 당했고, 골골대며, 비싼 의료비를 다 탕진해야만 하는 이 더러운 의료자본주의 문턱에 이미 걸려 넘어지고 있다는 억울한 현실이 복장(腹腸)을 터지게 한다. 의료는 철저한 사회주의식이어야 한다. 다시 아이들에게서 다래끼가 만연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사실적 요구이다. 저절로, 생태적으로, 몸의 "火氣"를 밖으로 분출시켜 더 큰병을 달고 살지 않는 순리적 몸으로 제스스로 복구되는 기능이 회복되어야한다. 논에 약을 치지 말고 농사하듯, 우리의 몸도 그러해야 한다. 더 나아가 수의사인 시각에서도, 양의학적 치료를 피해도 되거나 대체적 처방으로 치유시킬 수있는 동물의 질병이 태반을 넘는다. 나는 그다지 돈을 잘버는 수의사는 못된다. 농부들은 제 밭작물 대하듯, 제 짐승의 몸도 잘 들여다 본다. 게으른 농부만이 수의사를 부른다. 의원을 많이 찾는 현대인은 게으르다. 제 몸 돌보기가 게으르단 말이다. 그러니, 헛개비에 홀린 채, 덜컥 암보험에 의지하며 사는 부류에 다름아니다. 이미 보험장수, 약장수, 병원장수들이 똘똘 뭉쳐 아이에게 갈 유산의 반 이상을 삼킬 준비가 다 된줄 보인다. 국가가 돌봐 주어야 할 우리의 몸을 방기(당)한 채로 스스로 챙겨 악다구니로 경쟁하며 옹졸하고 치졸하게 만드는 아주 나쁜 정치 구조에 갇힌지 이미 오래다. "뜬것의 속내 삭혀준/ 자네,/ 자네 왼손에 연꽃피네 알약 몇 알로 날 잡을 생각 접어주시게" ( 유순예 詩 다래끼의 종연에서 부분 인용-시에티카 3호) 시의 힘, 또는 서로를 위로하는 힘들이 詩 속에 있음으로 고단한 이시간 편히 자 볼, 잘 수 있을, 못된 귀신(뜬것)을 피하는 밤이 될 듯하다. - 시 <다래끼> 가 오늘 밤 내 藥이다 -  
17 달팽이 略傳 /권형하
편집자
2247 2010-07-26
달팽이 略傳 / 서정춘 내 안의 뼈란 뼈 죄다 녹여서 몸밖으로 빚어 낸 둥글고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들쳐업고 명부전이 올려다 보인 뜨락을 슬몃슬몃 핥아 가는 온몸 이 혓바닥뿐인 生이 있었다 (전문) 달팽이는 느리게 이동하는 동물이다. 마찰을 생기게 하기 위해 배 부분에 점액을 분비한다. 점액은 달팽이를 보호하기도 하는데, 점액 때문에 달팽이는 면도날 위도 기어갈 수 있다. 머리에는 늘었다 줄었다 하는 뿔처럼 생긴 두 쌍의 촉각이 있고 그 끝에 시력은 없으나 명암을 판별하는 눈이 있다. 암수한몸으로 알을 낳아서 번식하며, 외부온도에 따라 체온이 바뀌기 때문에, 겨울에는 잠을 잔다. 피부호흡을 하기 좋은 때인 습기가 많은 때나 밤에 나무나 풀 위에 기어올라가 세균, 식물의 어린잎,채소 등을 치설이라고 부르는 입으로 갉아먹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달팽이는 먹은 식물의 색상에 따라 대변의 색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 실례로 달팽이를 사육할때 녹색채소인 양상추를 주면 녹색 대변을, 주황색 채소인 당근을 주면 주황색 대변을 눈다. 천적으로는 딱정벌레와 대만반디의 유충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에스카르고라는 요리로 식용 달팽이를 기르기도 한다. 달팽이는 피부호흡을 하기 때문에,날씨가 덥거나 먹이가 마르면 몸을 껍데기속에 집어넣은뒤 얆은 막으로 자신을 보호하다가, 축축해지면 다시 몸을 끄집어낸다. 달팽이는 복족류 연체동물 가운데 나선형의 껍질을 가진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달팽이’는 달팽이과에 딸린 한 종(Fruticiola sieboldiana)만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껍질이 없는 육상 복족류는 보통 민달팽이라 한다. 서정춘의 시 <달팽이 약전>은 마치 달팽이가 흘리고 간 흔적처럼 시 한 편이 한 행이다. 고달픈 삶의 여정처럼 쉼표 하나 없이 이어져 있다. 달팽이 한 마리를 기억한다. 나선형의 둥근 집, 집이 아닌, 짐이 되곤 하던 그, 가엾은 집 한 채를 기억한다. 배춧단에 딸려온 달팽이 한 마리, 한동안 내 말벗이었던. 물기가 마르면 금세 유골단지가 되어버리는 달팽이의 집. 나는 분무기로 그의 등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슬픔이 마르지 않도록 그에게 슬픔을 부어주었다. 어느 날 그의 슬픔은 동이 났고 달팽이는 비로소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달팽이는 복족류(腹足類)다. 배가 발바닥인 셈이다. 배를 문지르며 바닥을 기다보니 굼뜨고 느리다. 등에는 평생 지고 가야할 짐도 있다. 가히 '혓바닥뿐인 生'이다. 분명 혀가 아닌 '혓바닥'이다. 혀는 손이나 팔처럼 신체의 일부이지만 드러나지 않는다. 일부러 내밀지 않고는 쉽게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혀다. 대개 몸의 중요한 부위는 은밀한 곳에 숨어있다. 달팽이는 그 혓바닥 같은 몸뚱어리를 내밀어야 한 발짝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 부드러운 혀로 거친 바닥을 슬몃슬몃 건너가야 한다. '슬몃슬몃'속에는 조심조심이란 뜻이 들어있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 달팽이는 뿔처럼 생긴 두 개의 눈을 탐지기처럼 쉬지 않고 움직인다. 무거운 짐을 지고 죽음을 향해 가는 우리의 삶도 달팽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등에 얹힌 껍데기는 이미 한 채의 유골. 혼령의 집엔 골조가 없다. '뼈란 뼈 죄다 녹여'버리고 육체와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달팽이가 평생을 들쳐업고 다녔을 그 집이 이젠 동그란 항아리가 되었다. 유골 한 채가 명부전(冥府殿) 앞에 놓여진 것이다. 명부전이란 염라대왕이 다스리는 유명계(幽冥界)다. 지상에선 명토(冥土)라고 하여 지장보살 염라대왕 등 시왕(十王)을 안치한 전각(殿閣)이다. 명부전의 뜨락에 엎드려 달팽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죽은 넋의 영생을 위해 극락왕생을 비는 것인가. 시인은 달팽이가 지고 온 무거운 짐을 운명이라 했다. 그 어떤 거부의 몸짓도 없이 고통마저 달게 받아들였다. 시인은 달팽이의 짐을 유골이라 하였고 그 유골을 아름답다고 하였다. 달팽이가 뼈를 녹여 만든 것은 한 채의 유골, 곧 詩이다. 골수를 짜내듯 시를 짓다보니 뼈란 뼈는 다 녹아서 詩라는 아름다운 유골 한 채를 이루었을 것이다. 略傳이란 사적(事績)을 간략히 적어서 뒷세상에 전하는 기록인데 시에 표현된 시점이 죽은 뒤의 기록이다. 몸은 삶, 곧 현실에 아직 놓여 있는데 굳이 약전이라고 붙인 까닭이 무엇인가. 저승 세계는 이미 시인의 가시권(可視圈)에 들어와 있다. 詩에게 살과 피를 내주는, 시에 대한 지독한 사랑으로 시인은 껍질만 남은 존재를 확인한다. 시로 인한 깊은 상처로 인해 시인은 살아갈 힘을 얻는다. 시로 인한 불행이 시인에게는 아름다운 행복인 것이다. 시인은 자기 세계(뜨락)를 슬몃슬몃 핥으며 살아 왔던 달팽이, '온몸이 혓바닥뿐인' 달팽이를 등장시킨다. 여덟 글자로 달팽이의 전 생애를 요약하고 '뿐'이라는 한정어를 덧붙여 보잘것없는 삶을 강조해 놓았다. 이것은 연체동물인 달팽이의 생애 뿐 아니라 평생을 포복하며 사는 인간의 삶을 함축하는 말로, 달팽이의 생이 돌연 인간의 생으로 변하는 접점이 된다. 혀가 하는 일 중 하나는 말을 고르는 일. 평생 언어를 고르고 다듬어야 했던 시인은 혓바닥뿐인 삶이었다. 시인의 삶은 말, 즉 로고스(Logos)와 관계가 깊다. 로고스는 고대로부터 철학이나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존재를 가리킨다. 이 시에서는 사상으로서의 존재보다는 시장바닥처럼 질펀한 존재를 말하고 있다. 혀가 아니고 ‘혓바닥’이기 때문이다. 결국 달팽이의 집은 존재의 집이요 영혼의 집이다. 이렇게 단어 하나하나를 꼭꼭 뭉쳐 엮는 것이 서정춘 시의 특징이다. 그래서 시는 짧아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시인은 등단 28년 만에 첫 시집 『죽편』을 냈다. 시집 한 권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이렇게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달팽이처럼 더딘 걸음인 것이다. 그러나 느린 것들은 집요하다. 서두르지 않으므로 포기 할 줄도 모른다. 그 느림 속에 보이지 않는 단단한 힘이 숨어있다. 그 힘으로 달팽이는 담을 타고 벽을 넘는다. 서정춘의 시에는 한 마디로 단정지을 수 없는 옹골찬 힘이 숨어있다. 고은 시인은 좋은 시에는 시적 불운이 필요하다며 시인을 일컬어 "뼈 속에 무덤 기운이 가득하다.“ 고 했다. 그렇다. 「달팽이 略傳」에도 무덤 기운이 넘치지 않는가! 실로 시인과 달팽이가 자웅동체가 된 듯하다. -출전 <시평 2000년 가을호. ‘아름다운 불행’(마경덕 글을 일부 인용)  
16 이건, 성폭행이에요/고석근
편집자
1992 2010-07-21
이건, 성폭행이에요 초등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분에게서 들은 얘기다. 그분은 스킨십을 좋아해서 학생들이 좋은 글을 쓰면 어깨도 쓰다듬어 주고 엉덩이도 두드려준다고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아이들을 지도해 왔는데, 요즘 들어서서는 남자 아이들이 엉덩이를 두드려주면 ‘이건, 성폭행이에요!’ 하고 소리친단다. 내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해맑은 웃음의 글쓰기 여선생님을 보며 쓴웃음부터 나왔다. 요즘 아동 성폭행 사건이 자주 터져 나오니까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성폭행에 대한 교육을 많이 시킨단다. 아이들은 ‘남이 자신의 특정 부위를 만지는 것’은 성폭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식iN에 보면 한 초등학생이 아빠가 가슴을 만졌는데 이게 성폭행이냐고 묻는 것도 있다. 어디선가 읽은 얘기다. 한 초등학교 선생님은 하교 시에 아이들을 한명씩 안아준다고 했다. 나는 ‘아, 정말 참교육을 하시는 분이로구나.’하고 생각했었다. 그 글을 쓴 분도 그런 생각을 피력했다. 그 초등학교 선생님은 지금도 아이들을 안아줄까? 사람의 몸이 ‘쉽게 만지면 안 되는 무슨 물건’처럼 되어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사람은 마음이 오가듯이 몸이 오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몸을 무슨 물건처럼 다루면 사람들은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해리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쉽게 만지는 것과 함부로 만지는 것은 다르다. 마음이 오가듯 ‘쉽게’ 오가는 몸은 아름답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시켜버린다. 사람의 몸이야말로 얼마나 자본가들에게 군침거리인가? 몸을 요리저리 뜯어고치고 비틀어 돈을 짜낸다. 우리 몸은 돈을 짜내는 물건이 되어버린다. 순진무구한 아이 때부터 몸을 물건으로 보게 만드는 이 자본주의야말로 얼마나 ‘위대’한가? 사람은 몸이 성숙하면서 성도 함께 성숙한다. 몸만큼 성이 따라갈 때 성은 아름답다. 그런데 포르노는 이런 발전단계를 일거에 부숴버린다. 몸이 성숙하기도 전에 아이들은 포르노를 본다. 9세 아이가 포르노를 보면 그 아이는 어떻게 남자(여자) 몸을 만날 수 있나? 신비로운 사람의 몸을 그는 잃어버린다. ‘머릿속의 몸’은 그를 신비로운 현실의 몸을 못 만나게 한다. 이 아이가 몸이 성숙한 뒤에 상대 성을 만날 때 ‘우주의 반쪽과 반쪽이 만나는 신비의 극치’를 맛볼 수 있을까? 그는 사랑이 아니라 폭력을 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포르노를 왜 안 막나? 못 막는 건가? 안 막는 건가? 포르노는 첨단 산업이다. ‘친 기업 권력’으로서 ‘반 기업 행위’를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포르노를 보는 건 성폭행만큼이나 위험하고 사악하다. 그리고 나는 돈이 없어 성매매에 뛰어드는 여대생들 얘기를 들을 때면 이 ‘반인간 사회’에 치가 떨린다. 그녀들을 누가 사나? 이런 반인간적인 행위에 대해선 다들 눈을 감는다. 아동 성폭행보다 이런 성매매들은 덜 반인간적이라는 건가? ‘아동 성폭행’은 우리 사회의 천박한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이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아동 성폭행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증가할 것이다. 그때마다 가진 자들은 성폭행범들을 잡는 척 숨바꼭질 놀이를 하겠지. 사람의 몸은 그 자체로 사람의 혼이다. 사람의 혼이 자유롭듯 사람의 몸도 자유로워야 한다. 마음이 가면 몸도 간다. 마음이 가지 않는데 몸을 가게 하는 모든 행위들은 폭력이다. 아동 성폭행범이나, 성을 돈으로 사고파는 자들이나 다 똑같은 폭력범들이다. 아이들이 마음이 오가는 몸과 몸만 오가는 것을 구별하지 못할까봐 나는 너무나 두렵다. 특정 부위를 만지는 것을 성폭행으로 보는 아이들 시각에 나는 전율한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아름다운 ‘성생활’을 할 수 있을까? 상대의 성을 만날 때 아이들은 ‘머릿속의 관념’으로 만날 것이다. 마음이 담긴 몸이 만나는 신비를 아이들은 경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성을 경험하지 못한 영혼은 타락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아동 성폭행범이 되거나 눈에 안 보이는 성매매자범이 될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성은 아름다운 삶의 필수조건이다. 아동 성폭행범이 아무리 난무하더라도 우리는 아름다운 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의 혼이기 때문이다.  
15 진정한 진보주의자들의 출현을 위하여 /고석근
편집자
1896 2010-07-15
진정한 진보주의자들의 출현을 위하여 -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의 외고생 아들 사건’을 보며 진보 교육감으로 알려진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에게 외고 다니는 아들이 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곽노현 교육감은 ‘아들이 공부 잘하고 가고 싶어 해서 외고 보냈다.’고 했단다. 나는 일련의 사건 전개 과정을 보며 대체로 무덤덤했다. 나는 곽 교육감이 우리 교육의 폐해를 줄이려는 노력을 할 것이라는 것에 전적인 지지를 보낸다. 그에게 외고 다니는 아들이 있다는 게 그 노력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물론 내가 진정으로 그를 진보 교육감으로 생각했다면 그에게 외고 다니는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나는 진짜 진보 교육감에게 외고 다니는 아들이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주의자다. 우리 사회는 수구세력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자유주의자들이 진보로 통하고 그들은 엄청난 ‘진보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하지만 절대로 진보로는 보지 않는다. 진보는 진보의 가치를 몸으로 증언해야 한다. 말로만 하는 진보는 진보가 아니다. 자유주의자 곽 교육감에게 외고 다니는 아들이 있건 없건 그건 전적으로 그의 자유다. 자유주의란 기본적인 민주적 가치를 소중히 한다. 자식과 부모는 다른 인격체이기에 다르게 봐야 한다. 하지만 ‘진보’는 다르다. 나도 한때 운동 단체에 몸담았었다. ‘운동’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던 시절이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다들 ‘신선’처럼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그들을 가까이 접하며 수없이 놀랐다. 그들의 해박한 지식에 놀랐고, 뜨거운 열정에 놀랐고, 지행 불일치에 놀랐고, 그들의 강고한 엘리트 의식에 놀랐고, ‘잘난 자식들’이 많다는 것에도 놀랐다. 멋있는 운동가도 있었고 우스꽝스러운 운동가도 있었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다. 그때는 그것에 대해 분노하고 슬퍼했지만 지금은 그대로 받아들인다. ‘운동’은 완벽하게 아름답지만 ‘운동하는 사람’은 다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디 사람이 완벽한가? 나는 적어도 진정으로 진보주의자라면 절대로 아들을 외고에 보내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외고에 보내려면 공부를 잘해야 하는데, 어떻게 잘했겠는가? 아이를 ‘아이답게’ 기르지 않고 공부에 몰입하게 했거나 적어도 ‘남들처럼’ 공부시켰기에 가능한 게 아니었겠는가? 머리가 워낙 월등해 펑펑 놀아도 공부 잘하는 걸 어떡하냐고 질문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진정한 진보주의자라면 외고가 어떤 덴지 잘 알 것이다. 그런 입시 지옥에 아이를 보낼까? 아니, 아이가 그런 데를 가길 원하도록 내버려뒀을까? 진보의 가치가 몸에 배어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를 어떻게 길렀을까? 아이는 부모를 보고 배운다. 부모가 진보의 가치를 일상에서 구현하고 있는데 아이가 어떻게 외고를 가겠다는 의식을 갖게 되겠는가 말이다. 적어도 대안학교를 가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아니면 고등학교를 안가겠다고 하든가. 진정한 진보주의자는 진보가 몸에 밴 사람이다. 지행합일이 되지 않는 사람은 진보주의자가 아니다.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사실 자유주의자들이다. 연대를 얘기하며 낮은 사람에겐 친절하지 않는 사람, 평등을 얘기하며 항상 잘난 사람들과만 상대하는 사람, 낮은 곳을 얘기하며 항상 앞에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이런 사이비 진보주의자들이 무수히 많다. 나는 그들이 진보주의자들인 줄 알았을 때는 너무나 힘들었다. 이제는 그들의 정체를 안다. 그들은 자유주의자들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가지고 자유롭게 사는 데 뭐가 잘못인가? 그들이 연대, 평등을 얘기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를 위해서인 것이다. 그들의 말에 속을 필요는 없다. 그들의 행동만이 그들이다. 인간은 몸이 행할 수 있는 것 만큼이다. 나는 이제 서서히 자유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이 분리되길 바란다. 얼마나 많은 민중들이 가짜 진보에 속에 진짜 진보를 지지하지 않고 있는가? 자유주의자들도 고백을 했으면 좋겠다. ‘사실 나는 자유주의가 좋다. 기본적인 민주적 가치가 통하는 자유로운 사회는 얼마나 좋은가? 나는 이런 사회를 진정으로 원한다. 아들을 외고, 명문대에 보내고 싶은 게 뭐가 잘못인가? 내 돈 갖고 잘사는 게 뭐가 잘못인가? 내 잘난 학벌, 지식 갖고 잘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뭐가 잘못인가?’ 이렇게 말이다. 그렇다! 다 맞다! 당신의 말을 나는 전적으로 존중한다. 하지만 당신은 진보주의자는 아니다! 진보주의자만은 자처하지 말라! 사람들을 오도 할 수 있기에 말이다! 나는 진짜 진보의 모습을 사람들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그들이 진보를 지지할 게 아닌가?  
14 부동산 공화국/고석근
편집자
2244 2010-07-07
부동산 공화국 - 점촌에서 나는 자전거를 타고 따르릉 시골길을 달린다. 뙤약볕 아래 헉헉대는 풀들을 보며 나도 헉헉대며 달린다. 언제나 농촌은 평화롭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면 슬픔이 짙게 배어 있다. 쇠락해진 마을을 보며 한때 떠들썩했을 풍경들을 상상해 본다. 수백 년 된 느티나무들이 서 있는 마을 입구, 나는 한켠에 앉아 땀을 식힌다. 저쪽에선 촌로 몇 분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아이들처럼 대화가 쾌활하다. 농사지은 얘기들을 주로 나눈다. 못자리한 이야기를 판소리하듯 큰 소리로 말한다. 옆에선 추임새를 넣어준다. 나는 눈을 감고 몽롱한 상태에서 그들의 얘기 속으로 빠져든다. 내가 어릴 적 많이 듣던 정겨운 목소리들이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들길을 달린다. 코에 스쳐가는 논 냄새가 좋다. 수로를 들여다 본다. 옛날엔 온갖 물고기들이 살았는데, 고요하다. 시내로 들어왔다. 오늘은 어느 식당에서 순대국밥을 먹을까. 매번 다른 식당에 간다. 새로운 세상, 작은 식당엔 항상 다른 세상이 있다. 길가에 자리 잡은 식당으로 들어가 본다. 물잔을 가져온 아줌마에게 순대국밥과 막걸리 한 병을 시킨다. 잠시 후 왁자하게 들어온 넥타이 부대. 나는 순대국과 막걸리가 어우러지는 느낌을 입 안 가득 느끼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은 큰 소리로 땅 얘기를 한다. 이 식당 근처는 수십 년 전에는 불모지였다고 한다. 기름진 땅들은 다 장남에게 물려주던 시절, 이 근처 땅을 물려받은 막내들은 다들 땅 부자가 되었단다. 나는 상상해 본다. 기름진 땅을 물려받은 장남들은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을까. 불모의 땅을 물려받아 졸지에 부자가 된 막내들은 지금 뭐하고 있을까. 그들 사이는 어떨까. 맞아, 내가 아는 사람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다. 장남이 땅 부자가 된 아우에게 은근히 손을 벌린다고 했다. 부모님이 나눠주신 재산을 다시 정의롭게 재분배하는 형제들이 있을까. 사람 사이에 돈이 끼면 모든 사이들이 비틀어진다. 항상 서먹하게 지낼 형제들이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을까. 그들은 속으로 중얼댈 것이다. ‘돈이 뭔데......’ 하지만 돈의 위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우애가 있을까. ‘마음은 원이로데 육체가 약하도다’ 성경 구절이 떠오른다. 넥타이 부대들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시골 촌로들 이야기의 흥겨움이 없다. 하얀 와이셔츠처럼 이야기들이 표백되어 있다. 색깔이 사라진 이야기들은 무미건조하다. 헛웃음을 한참 웃다 그들은 사라졌다. 얼근히 취한 나도 식당을 나온다. 자전거를 비틀비틀 타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오늘 강의를 생각해 본다. 내 얼굴엔 웃음이 가득해진다. 이렇게 술에 취해 강의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하얗게 빛나는 햇살 아래 사람들이 분주하다. 술에 취해 보는 세상은 참 아름답다. 오늘 강의도 ‘명강의’를 할 것이다. 술기운이 만드는 기적. 초등학교가 보인다. 나는 교문으로 들어갔다. 재잘대는 초등학생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덩굴나무 그늘 아래 앉아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이들만큼 위대한 인간은 없다. 그들은 언제 봐도 신비롭다. 그들은 쉼 없이 무슨 주문들을 외운다. 눈은 한없이 깊다. 그들을 보면 안심이 된다. 그들이 있는 한 세상은 무사하다. 우리나라 30억 이상의 부자들은 다 부동산으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그들은 복을 받은 듯이 얘기한다.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어느 곳의 땅 값이 천정부지로 오를 때 다른 곳의 땅 값은 땅 속 깊이 떨어져야(실질 가치가) 하니까. 사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와 다를 바 없다. 그렇게 번 돈으로 그들은 어떻게 살까.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 불로소득들(사실은 강도 짓한- 자신이 알건 모르건 관계없이)을 국가가 세금으로 거둬 모든 사람들을 위해 쓰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우리나라는 하루아침에 복지국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삶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가난하지만 신나는 농촌 촌로들과 하루하루 지루하게 사는 월급쟁이들은 진정으로 누가 더 행복할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나? 땅이 부린 요사스런 요술 때문이다. 내가 알고 부동산 부자들은 다 행복하지 않다. 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다가 평생을 골방에서 지내다 간 사람들도 있고, 항상 부동산을 생각하다 머리가 굳어버린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잠시 후 나는 ‘문학의 향연’을 벌일 것이다. 하지만 시골 마을의 촌로들이 벌이는 ‘일상의 향연’을 따라갈 수 있을까. 부동산을 정의롭게 하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매일 매일 향연을 벌이고 살 텐데. 거리에 로봇처럼 걸어가는 사람들. 아, 저 사람들은 ‘향연의 기쁨’을 모른다.  
13 내 안에 악마가 사는 것 같다./고석근
편집자
2238 2010-06-28
내 안에 악마가 사는 것 같다 초등학생 납치, 성폭행 사건의 범인 김수철은 현장 검증 도중에 ‘내 안에 악마가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마음 안에서 어떻게 악마가 살게 되었을까?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을 에로스(삶의 본능)와 타나토스(죽음의 본능)로 설명한다. 에로스는 ‘살맛’이다. 인간의 성(사랑) 에너지, 즉 생명 에너지가 충만해지는 삶이다. 우리 안에서 약동하는 에너지를 느낄 때, 우리는 ‘에로스’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에너지가 약해지면 타나토스가 우리 몸을 휩싸게 된다. 사는 게 ‘죽을 맛’이다. 사는 게 죽는 것만 못하다면 차라리 죽어서 다른 무언가로 다시 태어나는 게 ‘우주의 한 존재’로서 이익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은 죽음의 본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타나토스에 빠지면 이 죽음의 에너지는 자신에게 향하든지 남에게 향하게 된다. 자신에게 향하면 자살하게 되고 남에게 향하게 되면 타살하게 된다. 이때 사람은 ‘내 안에 악마가 사는 것 같다’고 느끼게 된다. 범인 김수철은 이런 타나토스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비난하고 저주하고 사형시키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와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을까? 그런 마음의 소유자들을 다 죽여야 할 텐데, 과연 남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남은 사람이라고 해서 이런 마음을 안 지니게 된다는 보장이 있는가? 그래서 나는 이런 흉악한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엄한 처벌’을 얘기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도대체 범죄를 막자는 거야? 범죄를 계속 일어나게 하자는 거야?’하고 한탄하게 된다. 정말이지 ‘펑펑 울다 지구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된다. 나는 이런 흉악한 범죄를 막고 싶다! 머잖아 우리 아이들에게서 손자, 손녀들이 태어나게 될 것이다. 나는 내 손주들을 키워보고 싶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 대한 너무나 많은 신비로웠던 기억들을 갖고 있다. ‘어린 왕자. 어린 공주’에 대한 신비로움을 다시 느껴 보고 싶다.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를 사진으로 찍고 그들이 하는 말을 모두 기록하려 한다. 그만한 문학이 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그런데 그런 손녀들이 성폭행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자녀들이 성폭행 당한 분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한다. 그래서! 나는 막고 싶다! 그 ‘악마들’을 엄벌에 처한다고 해서 그 악마들의 손아귀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는 없다. 그 악마들은 ‘우리 사회가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철이 살아온 사회 환경이 그의 마음에 악마를 키운 것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악마들이 사람들 속에서 자라고 있을까? 그런데 왜? 해결책이라는 것들이 초등학교에 순찰을 강화한다느니, 범인 신상 공개를 한다느니 하는 것들만 나오는가? 그래서 해결된다고 믿는가? 그런 것들도 당장엔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우리 사회가 그런 악마들을 마음속에 기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김수철에게 우리 사회가 따뜻한 사랑을 주었다면 그가 그런 악마가 되었을까? 우리는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 사회의 희생물이라고. 그렇다면 그 희생물에게 최소한 선진국 같은 치유의 과정이 필요하지 않는가? 우리 속에 악마를 키우는 건, 우리 사회의 양극화이다. 일해도 먹고 살 수 없는 절망은 우리 안에 악마를 자라게 하는 것이다. 사회 곳곳의 비리, 불의는 가장 좋은 악마들의 자양분이다. ‘스폰스 검찰들’은 얼마나 많은 악마들을 양산하고 있을까? 또 ‘4대강 개발’은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악마들을 키우고 있을까? 우리 자녀들, 손자손녀들이 안전하게 자라게 하는 길은 간단하다. 이런 ‘악의 축들’을 척결하는 것이다. ‘6.2 지방 선거’는 그 척결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었다.  
12 유난함과 손잡고 싶다/조재학
편집자
2125 2010-06-23
유난함과 손잡고 싶다 학생들의 교복 치마가 짧아지고 있다. 며칠 전 덕수궁 근처 야외 까페에서 본 호리호리한 몸매의 아가씨가 입은 스커트도 그랬다. 가느다랗고 높은 뒤축 구두에 쭉 뻗은 탄력 있는 다리의 곡선이 이쁘고 시원했다. 그 곡선을 따라 올라가던 내 시선이,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당황하며 흔들렸다. 지금 생각해도 참 아슬한 치마의 길이였다.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돌아온 가수 윤복희가 입었던 유난스런 치마, 미니스커트. 그 것은 곧 유행했고 그 유행의 물결은 당시 여고생들에게도 전해져서 교복치마의 허릿단을 한 겹 두 겹 접어 입었다 지금은, 교복 치마를 미니스커트로 아예 치맛단을 잘라 입는다. 그 용감함이 궁금해서 며칠이 지난 후 아이들에게 간략한 설문 조사를 해보았다. 아이들은 이렇게 답변한다. ‘짧은 치마가 다리를 좀더 날씬하게 보이게 해서. 치마가 길면 계단을 오르내릴 때 불편해서, 걸리적거려서, 치마가 길면 다리가 짧아 보여서, 교복이 똑 같으니 개성을 살리고 싶어서, 연예인들이 TV에서 짧은 교복을 입은 것이 예쁘게 보여서... . 대체로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의 발현이 많았다. 그렇다면 공동체 생활의 규정도 어기면서까지 추구하는 ‘예쁘게 보이고 싶고, 개성을 살리고 싶은’ 욕구는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 자기표현의 욕구를 실존에 대한 인식이고 자기창조라고 한다면 과장된 말일까, 인간에게는 생명의 기운을 발산하고 싶은 창조의 욕망이 있다. 문학을 하는 것도,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고, 춤을 추는 것도 자기창조의 욕구라면, 이 또한 존재에 대한 사랑이고, 생명의 외경일진데, ‘한 가지 일을 경험하지 않으면 한 가지 지혜가 자라지 않는다’ 명심보감에서 말하고 있다. 미니스커트를 입는 일도 아이들에겐 제 세상의 한 가지를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겠다. 사실 교복을 미니스커트로 변형시켜 입는 아이라면 누가 봐도 문제아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어쩌면 자기표현의 욕구를 가지고 삶에 도전하는 지혜를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전하는 아이들, 무릎보다 깊은 물에 들어가려고 하는 아이들, 이 아이들의 고집스러움이, 그 특이함이 어쩌면 그들을 위대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처럼, 학교에서도 고집 센 아이들이 야단을 더 맞는다. 예, 죄송합니다 하고 지나가도 좋을 것을 굳이 고집을 부리다가 작은 일을 크게 만들기도 한다. 며칠 전에도 고집을 부리는 통에 더 혼줄이 나는 혜준이를 보았다. 지난 해 그 아이의 동아리 지도교사였던 나는 무던히 속을 썩였던 경험이 있다. 그러나 또 한편 그런 아이들에게 막연한 기대를 걸어본다. 그것은 무서움이 없는 아이, 뻗댈 수 있는 아이, 그런 아이들이 마음 한 번 달리 먹으면, 제 삶에 신념을 가지고 한 꿈을 이루어가고자만 한다면, 숨은 힘을 발휘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에서 얼마 전 총동창회를 열었다. 중년이 된 옛 제자들은 오랜 스승들 앞에서 즐겁고도 아팠던, 서럽고도 행복했던 옛날 일들을 떠올리며 활짝 웃고 있었다. 제 분야에서 이름을 올리며 살고 있는 이야기, 저마다 제 삶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옛 스승들 앞에서 풀어놓았다. 돌아와서는 낮에 있었던 일들을 찬찬히 떠올리자, 생각나는 인물이 있었다. 키 155㎝의 오은선 대장! 여성 산악인,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4좌 완등에 성공한 사람. 그래서 세계를 놀라게 한 사람, 그녀는 말하고 있었다 ‘특별한 능력보다 산에 대한 열망과 열정이 다른 사람보다 좀 유난했다’ 고. ‘좀 유난했다’ 고 그녀의 환한 사진은 말하고 있었다.  
11 시, 우주를 읽고 답하다/강태규
무궁화
2439 2010-06-21
시, 우주를 읽고 답하다 시를 읽는 독자로서, 함성호 시인의 「보이저 1호가 우주에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는 시가 우주와 소통하는 아름다운 여정이 될 수 있음을 기뻐하고 또 즐길 수 있는 역할이 될 수 있음을 알게한다. 작년에 현장비평가들이 꼽은 시 중에서도 김사인 시인에 의해 선정된 시로서, 둔감할 수 있는 시읽기에 우주과학이 보태짐으로 시의 '프리즘'에 새로운 분광을 즐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마치,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 눈 앞에 어른대는 주인공의 대사 처럼 "어머니, 전 혼자예요" 는 오랫동안 울렁댄다. 많이 보태자면 울림이 오래간다는 거다. 보이저 1호는 2호 보다 16일 늦게 미항공우주국 (NASA;나사)기지에서 미공군(USAF)이라는 이름 표를 달고 우주로 쏘아졌다. 필자가 대학에 다닐 무렵에 쏘아졌으니, 어연 33년 전이며, 함성호 시인의 '보이저'는 작년에 『문학과 사회』지에 발표되었다. 시는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기도(祈燾)와 같다. 그러나 우주선 '보이저'의 할아버지뻘들은 냉전의 산물이며, 보이저 1호 또한 그 손자이다. 제이. 에프. 케네디도 가버렸고 흐루시초프도 실각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양대국의 최초 공동선점의 구두약속도 사라졌다. 1998년이 되어서야 여러 강대국들의 연합형태로 '국제 우주 정거장'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우주에서 조차도 패권의 헤게모니의 선점을 진행하고 있는 형국이다. 함 시인은 여러 우주선 중에 보이저 1호에 주목한다. 이유는 간명하다. 마치 당구대의 테두리에서 당구공이 튀기듯, 보이저 1호 만이 행성(별)들의 중력을 이용하여 가속하도록, 그 진행방향이 구성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작년 여름에는 태양으로부터 111 에이유(AU; 약 166억 킬로미터)로 진입했다 할 정도로 그 신호가 지구에 도달하는 데 무려 31시간 후에나 도착한다는 먼 거리를 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우주에 겨울이 오고있어요 나는 우주의 먼지로 사라져 다시 어느 별의 일부가 될거예요 (중략) 나는 어디에 있나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어딘지 누구에게든 알려주고 싶어요 (부분 인용) 그러나, 어쩌랴. 발사체의 계획 자체도 무한대를 향해 날려 보냈다. 즉, 우리 태양계로 돌아오지 않도록 내 보낸 것이다. 인류인 '어머니' 가 만든 물체(시인에게는 아들 또는 딸) 중 가장 멀리 벗어난 물체가 되며, 그 또한 우주의 먼지가 될 운명임을 안다. 2007년에는 그의 밥이라고 할 수 있는 플라즈마 운용장치가 운명을 다했고, 재작년에는 전파 천문 장치까지 역할이 끝났으며, 올해는 자외선을 읽는 기계도 멈춘다고 한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2025년이 되어서야 모든 뇌기능이 멈춘다 한다. 그러나 시인은 돌아오길 기다린다. 지구 또한 유한하며, 또 다른 행성을 찾는 꿈을 우주계발로 내세우기는 하면서, 또, 많은 과학 칼럼들은 과학기술과 교육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무한경쟁적 과목, 국영수를 뛰어 넘는 최우등반의 필수항목임을 강조한다. 무한대의 공간에 길없는 길을 과학이 나서지만, 정작, 우주에 길을 놓는 것은 시인이다. 사뭇 같은 논리로 댐과 보를 설치하고 쌓이는 모래를 계속 퍼 올린다는 원대한 계획의 추진은 일견 우주에다 쏟는 돈 보다 효율적일 듯 보일 수 있다. 우주(태양계)는 어차피 10억년 후면 태양이 팽창하며, 종국에 태양계의 모든 물질들은 다시 먼지로 돌아 간다고 한다. 우주로부터 왔다가 우주로 돌아가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 때까지 지구를 깨끗하게 사용할 의무와 책임은 모두에게 있고, 지도자에게는 그것은 소명이기도 할 것이다. 어디에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큰판을 벌여야 고물도 많이 떨어지고, 시장에 돈이 잘 풀린다고는 한다. 진나라 황제 시대에도 만리장성의 무거운 돌 하나를 산까지 옮기는 일거리의 값어치는 성인 두 사람의 일년 노역비에 해당했다고 한다. 패권도 마찬가지다. 스푸트니크 1호에 놀란 미국 정치계가 케네디의 애국주의의 인정에 호소하는 명연설로 큰판을 벌이며, 그 패권을 지금도 유지하는 것처럼. 진나라 왕이 고민한 것처럼, 진나라 국민들도 동의하였을까. (사실, 문화사의 견지에서 보면, 당시는 주체가 없었으므로 동의란 게 있을 수 없는 시대였다. '동의'란 개념 조차 근대의 시작과 같이 태어난 이념임으로) 노동의 댓가라기 보다 살려주는 댓가로, 산과 계곡 위로 돌을 밀며, 끌어 올리는 진나라 예속하의 민중 또는 노예들의 삶은 배고픔을 면하며 감사했을까. 어찌하였던, 여러 천년 뒤 후예들은 관광수입으로나마 살 수 있는 장관이 되었다. 강대국의 우주계발은 이른바 '무한대' 의 경쟁욕망 속에 무한대로 써먹을 수 있는 그들의 레퍼토리가 된다. 하늘과 우주를 따를 폭이 못된다면, 땅 위에 무한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만들고 허물기", 모래밭의 아이들 모래성 쌓기 놀이이다. 낙동강을 바라볼라치면, 위험해 보인다. 누가 좀 말릴 수는 없는가. 또, 우리의 후손들이 결국 허물어야만 할 것 같은 걱정이 앞서는 것은 나 혼자만의 기우(杞憂)인가. 우주의 또 다른 사람이 살 만한 곳의 기준은 결국 물이 있는 별인 것이고, 이 지구에 있는 물을 잘 관리하는 것도 우선 중요한 일이다. 결국은 '돈놀이' 게임에 걸려든 것이다. 나는 좀 더 저렴한 값에 좋은 물을 접하며 살고 싶다. 마당을 깊이 파면 먹을 만한 물이 나오는 땅이 아직도 좋은 땅이라 믿고 있다. 우리는 이미 걸려 들었다. 정수기 장사꾼의 계획에 이미 중독되었고 넘치는 중장비가 놀 곳을 끊임없이 찾는 구조 속에 걸려 들었다. 낙동강이나 한강이 맑고 풍부하게 잘 관리된다 한들, 이미 바가지로 퍼 먹을 세대는 못될 것이다. 돌고래 만한 로봇물고기 떼가 수질을 관리할 것이며, 그 기계가 송신해 오는 신호에 따라 온 강물을 정수기에 돌리는 일거리가 산업이라는 명분으로 번성할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물길을 따라 지고 피었다. 범람 자체도 바다의 태풍역할과 똑 같이 모든 생명에게 천연 비료역할을 해왔다. 사람이 하는 것은 그 자연과 타협하며, 때로는 순종하며 같이 가는 것이 제대로 가는 것이다. 온 땅과 들녘이 인공물질 들과 화학비료 들에서 유기적 환경과 농법으로 환원하자고 하는 대세 속에 다시 와있다. 잘 산다는 것이 배 불리 사는 것이 이십세기였다면, 이제 잘 산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삶이라는 것을 함 시인으로부터 쉽게 독해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다음에도 아름다움은 있을까요? 거기에, 거기에 고여 있을까요? 존재가 없는 연기(緣起)처럼 검은 구멍처럼 어머니 전 혼자예요 쇠락하고 있지요 *더 볼만한 자료: 비비씨(BBC) 다큐멘터리 6부작 "우주의 신비" 카나다 디스커버리 채널 "화성 여행" http://en.wikipedia.org/wiki/Voyager_1 http://en.wikipedia.org/wiki/Heliopause 강태규(2010.06.21)  
10 부실 공화국 /고석근
편집자
2017 2010-06-21
부실 공화국 ‘천안함 사고’가 드러낸 군의 총체적 부실을 보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놀랄까? 아니면 예상했지만 충격적이라고 할까? 우리는 군에 대한 이런 저런 비리들을 많이 들어왔다. 가장 썩은 곳이 군이라는 말도 들었다. 그런 풍문들이 사실임을 이번 사고는 선명히 보여주었다. 나는 몇 가지 직업을 가져 봤다. 그때마다 너무나 튼튼하게 얽히고설킨 비리의 고리들을 보아왔다. 어디를 어떻게 끊어야 비리의 사슬이 끊어질지 막막했다. ‘나’라는 미약한 존재는 자연스레 그 비리의 사슬에 편입되어 갈 뿐이었다. 얼마 전에 교사나 교수가 되기 위해 수 천 만원 내지 수 억원을 써야한다는 시사 프로를 봤다. 누구나 알고 있는 비리라는 멘트도 나왔다. 누구나 알고 있는데 그 비리들을 왜 지금까지 수사당국은 숨기고 있었을까? 그 사슬을 끊어야 할 검찰, 경찰의 칼이 비리의 사슬에 꽁꽁 묶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오래 전 어느 술자리에서 모 고등학교 교사의 어처구니없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교육청에서 감사가 나온다고 해서 성적 답안지를 다시 검토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지난해의 답안지에서 채점을 잘못한 것이 발견되었단다. ‘어떡하지? 채점을 다시 해야 하나?’ 그 교사는 머리가 풍선처럼 마구 부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단다. 답안지 채점을 다시하게 되면 학생들의 성적이 다시 매겨져야 하고, 그러면 석차가 다시 정해져야 하는데, 모든 성적 기록부를 다시 써야 하나? 성적 통지표도 다시 나가야 하나? 석차가 달라지면 이미 대학에 간 학생들은 어떻게 되나? 내신 성적이 달라져 입학 사정을 다시 해야 하나? 이미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떨어질 수도 있나? 그 교사의 난감한 상황을 선배 교사 한 분이 간단하게 해결해 주었단다. 답안지를 고치는 것이었다. 너무나 간단했단다. 정답 2번을 쓴 것을 오답 3번이라고 고쳐 쓰게 되면 채점을 정확하게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 교사는 마법을 보는 듯 했을 것이다. 수많은 악마, 괴물들이 작은 손짓 하나에 일거에 사라지는 기적. 이 기적을 아무나 일으킬 수는 없다. 한 분야에서 오랜 세월 ‘짬밥’을 먹어가며 몸으로 익히는 비급이기 때문이다. 말에서 말로 은밀히 전해지는 이 비급을 익히는 데는 짬밥을 먹으며 하냥 세월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머리를 굴리며 선배들 눈치를 보며 고된 묵언 수행의 길을 걷는 길밖에 없다. 이런 것을 알려주는 책도 없고 학원도 없고 대학원도 없다. 그래서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한 사람들을 보면 도사의 풍모가 풍긴다. 어떤 경악할 사고에도 그들은 빙긋이 웃는다. 마하가섭의 염화시중의 통달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 앞에서 진실을 말할 수가 없다. 입을 떼려다 그들의 금강불괴의 몸 앞에서 우리들 입은 얼어붙게 된다. 그들의 공력은 이미 수십 갑자에 달해 한 갑자를 사는 우리 보통사람들은 그들의 속내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얼굴 가죽은 여러 겹으로 겹쳐 있어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하는 말은 선문답이라 중생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저 그들의 처분을 기다리는 수밖에. 이렇게 우리는 부실 공화국에서 서서히 ‘사이비 종교’에 빠져든다. 잘못된 종교란 얼마나 무서운가? 한 사람이 미치면 정신병자인데 모든 사람이 미치면 종교라고 하지 않는가? 믿음이 굳건할수록 우리는 ‘행복’해진다. 우리 사회는 다종교가 아니라 부실신을 유일신으로 모시는 일신교 나라이다. 며칠 전 깊은 밤에 택시를 탔다가 택시 기사에게서 ‘한 소식’을 들었다. 이제 우리는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같은 진보적인 정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재벌에 퍼주는 돈의 일부만 풀어도 모든 국민이 의료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택시 기사들은 부실 공화국의 경전을 읊조렸는데. 나는 이 희소식에 마구 가슴이 뛰었다. 부실 공화국이 아무리 견고해 보여도 사실은 모래성이다. 우리들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어느 날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 내리게 된다.  
9 흥부 부부상/박재삼 //권형하
편집자
3605 2010-06-18
흥부 부부상 / 박재삼 흥부 부부가 박덩이를 사이하고 가르기 전에 건넨 웃음살을 헤아려 보라 금이 문제리, 황금 벼이삭이 문제리. 웃음의 물살이 반작이며 정갈하던 그것이 확실히 문제다. 없는 떡방아 소리도 있는 듯이 들어내고 손발 닳은 처지끼리 같이 웃어 비추던 거울면(面)들아. 웃다가 서로 불쌍해 서로 구슬을 나누었으리. 그러다 금시 절로 면(面)에 온 구슬까지를 서로 부끄리며 먼 물살이 가다가 소스라쳐 반짝이듯 서로 소스라쳐 본(本) 웃음 물살을 지었다고 헤아려 보라. 그것은 확실히 문제다. ................................................................................................ 박재삼 선생의 「흥부부 부부상」시는 고전소설 <흥부전>의「흥부 부부」를 주요 인물로 인유하였지만, 물질보다는 외려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상을 현대적으로 재창조해 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인간의 정신보다는 물질을 숭배하거나 배금사상에 젖은 오늘날의 세태 속에서는 더욱 값진 작품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시 속에는 가난한「흥부 부부」가 박을 얻어 와서 끼니를 이우려는 애틋한 부부애가 담겨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흥부 부부가 박이라도 타먹으려고 톱을 댑니다. 그래도 뿌듯하여, 가난하다고 사랑마저 가난한 것은 아니니 서로 아끼는 마음으로 배고파도 마주봅니다. 이때 ‘마주보는 웃음의 물살’은 금보다도 황금 벼 이삭보다도 소중한 사랑입니다. 서로 마주보아도 낯설지 않고 정겨운 모습은 사랑의 거울입니다. 서로의 못남을 제 탓으로 돌리며, 못남 앞에 진정어린 미소를 지어주고, 서로의 일체감을 느끼며 말로만이 아닌 진정한 눈물이라도 나누는 일입니다. 그런 사랑 앞에 불행은 발을 붙일 수 없고 행복만이 걸어오지 않을까요. 구슬은 눈물을 은유할 것입니다. 눈물을 서로 부끄러워하며 놀라서 다시금 웃음 짓는 흥부 부부의 사랑 가득한 행동을 통해 가난한 생활에서 오는 한을 극복하고자 하는 서민의 애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슬픔을 극복하고 난 뒤에 짓게 되는 웃음, 진짜배기 웃음이겠지요. 그것을 본웃음 이라고 하였네요. 이러한 흥부 부부의 자세는 단순히 소박한 생활에 만족하는 차원이 아니라 가난한 삶의 한(恨)까지도 진정한 사랑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삶의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임을 <그것은 확실한 문제다>라고 단정적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가난을 사랑으로 극복해 내는 서민들의 삶의 애환을 박 타는 ‘흥부 부부’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부부가 가난으로 인한 삶의 고통 속에서도 소박한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면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할 줄 아는 삶의 가치에 소중한 가치를 잘 부여하고 있는 시입니다. 시 한 편을 읽고 생각한다는 것은, 인생을 깊이를 명찰하게 하고, 삶의 에너지를 공급해 주어 삶에 약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란, 언제나 우리의 삶을 새로이 출발하도록 고무하며, 그 삶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할 것입니다. 권형하 시집 「새는 날면서도 노래한다(1990)」, 「바다집(1997)」,「꿈꾸는 섬(2005)」. 경북문학상 수상(2005).  
8 '6.2지방 선거'를 보며/고석근
편집인
1988 2010-06-12
‘6.2지방선거’를 보며 선거 직전엔 정말이지 절망적이었다. ‘이만가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세상이 미쳐가는 듯 했다. 빅 브라드의 가벼운 손짓 하나가 일으킨 북풍은 세상을 다 휩쓸어버리는 듯 했다. 싫었다. 이 땅이 싫었다. 내게 너무나 많은 한이 서린 이 땅이 싫었다. 하지만 북풍한설에도 이 땅 가장 밑바닥에서는 새싹들이 움터 나오고 있었다. 진리는 항상 세상 맨 밑바닥에서 솟아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증명해 주었다. 벅찬 가슴으로 선거 방송을 지켜보았다. 벅찬 희열 - 이것이 이번 6.2 지방선거 결과에 대한 느낌이었다. 북풍한설을 뚫고 나온 꽃들은 아름다웠다. 세상이 꽃으로 만발했다. 민주주의 꽃만큼 아름다운 게 있을까?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일반민주주의’라고 한다. 우리는 일반민주의의 건재함을 이번 선거를 통해 확인했다. 서울 광장의 경찰의 군홧발과 곤봉은 안 된다고 국민이 확인해 주었다. 빅 브라드의 말 한마디가 법이 되는 제왕적 정치도 이제는 안 된다고 국민이 확인해 주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이뤄져온 일반민주주의는 이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임을 국민이 확인해 준 것이다. 이제 ‘수구반공세력들’은 서서히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갈 것이다. 발버둥치고 아우성치겠지만 준엄한 국민의 명령 앞에 그들은 어찌할 것인가? 당분간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들의 추한 몰골을 대하는 우리들의 심정은 참담할 것이다. 저러면 죽어도 중음천을 떠돌 텐데. 고이 죽지 못하는 그들이 너무나 서글프다. 당분간의 혼란은 아름다운 민주주의의 질서를 잉태하기 위한 혼란이기에 우리는 이 혼란 속에서 자유로운 공기를 만끽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공적인 질서를 세워 나갈 것이다. 집을 하나 지어도 아는 사람을 찾던 발길을 관공서를 믿고 찾아갈 것이다. 최소한의 인간의 양심을 믿고 공무원을 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번 선거를 보며 벅찬 희열과 동시에 ‘깊은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반민주적인 수구세력들에 대한 단호한 응징의 기운은 느껴졌지만, ‘진보 세력’에 대한 신뢰는 느껴지지 않았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당선된 교육감들도 사실은 보수주의자들이다. 그들의 공약은 일반민주주의의 범주에 속한다. 진정한 진보의 공약이라면 교육에 대한 국가의 전면적인 의무가 명기되어야 한다. 하지만 무상 교육(대학까지)에 대한 공약이 우리 국민들에게 수용될 수 있을까? 이번 선거에서 우리 국민들이 확인해 준 건 ‘일반 시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것이지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등 기층 민중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불안하다. 수구세력들은 역사의 장에서 퇴장해 가겠지만, 그 자리를 메우는 건 보수 세력이 아닐까 하고. 미국처럼 자본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당들이 이끌어가는 나라가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자본주의의 진정한 ‘주인’은 자본가다. 정치권력도 이들의 하수인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막강한 재벌들은 어떤 정치권력을 원할까? 미국 같은 정치 형태가 아닐까? 미국 같은 보수 세력이 지배하는 나라는 어떤가? 기본적인 사회복지가 되어있지 않아, 권총 난사 같은 흉악한 범죄가 끊이지 않고 흑인 등 약자들은 대학보다 감옥에 더 많이 간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모습이 우리의 미래일 수는 없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진보의 깃발을 세워야 할 때다. 지금까지 진보라고 불렸던 사람들은 보수가 되고, 그 자리를 기층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진보세력이 차지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적어도 유럽처럼 보수와 진보의 양 날개로 날아가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이번 선거가 확인해 준 일반민주주의의 장은 이런 공간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었다. 이 공간을 채워나가는 건 진보 세력의 책무이다. 언제나 진리는 맨 밑바닥에서 솟아오른다. 이번 선거에서 기적을 일으킨 푸른 싹처럼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에게 기대를 건다.  
7 나는 전쟁 날까 너무나 두렵다/고석근
관리자
1974 2010-06-07
나는 전쟁 날까 너무나 두렵다 ‘전쟁이 두렵지 않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에겐 가까운 사람 중에 군대 간 사람이 없나? 군대에 갔어도 전쟁이 일어나도 안전한 곳에 있는가? 아니면 가까운 사람이 전쟁 통에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그들은 ‘애국심’이 투철한 건가? 그것도 아니면 죽음에 무심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일까? 이 모든 것도 아니면 타나토스(죽음의 본능)에 깊이 취해 버린 사람들일까? 내 두 아들은 지금 군대에 가 있다. 자식을 군대에 보내놓으면 온 몸의 감각기관들이 항상 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 조금이라도 큰 소리가 나면 두 귀가 쫑긋해지며 화들짝 놀란다. ‘천안함 사건’ 때는 가슴이 항상 콩닥거리며 온 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아마 군대에 자식을 보낸 모든 부모들은 내 심정과 같으리라. 이런 부모 마음으로 전쟁 운운 할 수 있을까? 정말 이런 부모 마음이 아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아들들에 대한 기억들은 너무나 생생하다. 큰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때였다. 나는 2층 내 방에서 대문 앞에 서서 어린이집 선생님을 기다리는 큰 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두 여자 아이가 큰 아이에게 다가왔다. 다가오더니 한 여자 아이가 큰 아이의 가슴을 쾅 쳤다. 나는 어이없는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런데 또 다른 여자 아이가 또 큰 아이의 가슴을 쾅 쳤다. 큰 아이는 “안 아프다.”고 말하고는 그 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여자 아이들은 나를 보더니 재빨리 가던 길을 갔다. 나는 순간 큰 아이를 도와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씩 웃어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상황을 자주 떠올린다. ‘여자 아이들에게 큰 소리라도 쳤어야 하나?’ 큰 아이가 받았을 상처를 내가 제대로 어루만져 주었을까? 하지만 나는 지금도 그냥 씩 웃어준 게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야 하는 것! 큰 아이는 나를 닮아 마음이 너무나 여렸다. 여린 마음으로 이 정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혼자 터득하기만을 빌었다. 어린이집에서도 힘겨워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 힘겨운 상황을 돌파해 낸 건 그의 그림 재주였다. 큰 아이는 아이들 얼굴 그림을 그려서 아이들에게 나눠 주었다고 했다. 그 후 큰 아이는 즐겁게 어린이집 생활을 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아, 큰 아이가 해냈구나!’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그 뒤 큰 아이는 군대에 가서도 이 방법으로 어려운 신병 생활을 견뎌냈다. 고참들에게 초상화를 그려 주었더니 다들 고마워하더라고 했다. 앞으로도 큰 아이는 그림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작은 아이는 큰 아이와 달리 외향적이고 쾌활했다. 사회 적응력이 빨랐다. 그래서 그 기질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가끔 얼굴에 상처를 내고 오지만 큰 탈은 없었다. 두 아이 모두 학교 다니는 동안 학교 선생님들과 식사 한번 하지 않았다. 나는 교직에 있어 봤기에 안다. 교사는 한번이라도 학교에 찾아온 학부모 자식들에게 어떤 형태든지 특별대우를 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우리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특별대우를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것이 부당한 대우로 이어질지 모르나 그것마저 아이들이 헤쳐 나가기를 바랐다. 그렇게 기른 아이들이 이제 대학생이 되고 군대에 갔다. 나는 우리나라의 군대 제도를 찬성하지 않으나 남들처럼 하기를 바랐기에 아이들이 군대에 가는 것을 그냥 지켜보았다. 군대를 빼거나 좋은 보직에 앉히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 땅에 태어났기에 이 땅의 모든 것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요즘 전쟁 운운 하는 소리들이 들린다. 큰 아이는 곧 제대하지만 작은 아이는 이제 막 전방으로 배치되었다. 작은 아이가 훈련소에 간 며칠 후 옷, 운동화 등이 집으로 부쳐왔다. 박스를 보니 왈칵 눈물이 나왔다. ‘아, 나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전쟁 운운 하는 이 시대에 아이를 전방으로 보내다니? 살면서 백 하나 만들지 않고 살아온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거야?’ 작은 아이를 생각하며 한참 동안 울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면 나 작은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 자식 하나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는 아빠가 제대로 된 아빠인가? 어제 작은 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나 이제 훈련 끝났어.” 일부러 큰 목소리로 얘기하며 속으로 울었다.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저 아이에게 죄 지으면 안 되는데...... .’ 나와 같은 심정인 부모들이 이 땅엔 너무나 많을 것이다. 아,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죄 짓지 않게 해 주소서! 편집자: 고석근 편집고문의 글은 리얼리스트100에 게재했던 글을 매 주 다시 게재합니다.  
6 황량한 고비 사막을 가는 낙타 한 마리는 문수스님/박희용
관리자
2046 2010-06-04
황량한 고비 사막을 가는 낙타 한 마리는 문수스님 몽골, 쓰나미 만큼 무서운 ‘조드’에 초토화. 계곡마다 악취 나는 가축 시체 더미, 수십 년 만의 혹한에 가축 5분의 1 몰사, 820만 두의 소, 양 염소. 20여 년 전 시장 경제로 전환, 가축 수 4200만 마리로 2배 이상 급증, 엄청난 식성으로 물과 다른 식물들을 먹어치워, 토양을 지탱해 사막화를 막아주는 식물들의 뿌리까지 없애버려. 2010년 6월 1일자 언론에서 ‘조드’란 말을 처음 들었다. 그러잖아도 지난 4월쯤에 이동순 시집 『발견의 기쁨』을 읽고, 직접 가보진 않았지만 황량한 고비 사막과 끝없는 초원이 펼쳐진 지평선에 사는 몽골 사람들과 가축들의 삶의 모습을 생각하며 애잔했는데, 820만 두나 되는 가축들이 5월 혹한으로 몰살했단다. 그 기사를 쓴 기자는 ‘쓰나미 만큼 무서운’이라는 말을 썼지만 ‘쓰나미 보다 훨씬 무서운’이란 말을 써야만 하지 않을까. ‘조드’가 직접적인 원인이라면 ‘몰사’는 결과이다. 비참한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직접적인 원인인 ‘조드’에게 물을 수 있지만 그것은 덤터기일수도 있다. 왜냐하면 혹한이든 혹서든 자연 현상은 자연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외려, 기사에 있듯 ‘시장 경제’가 몰살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시장 경제’란 말이 갖는 빛과 어둠의 간격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한다면, 몽골에서 벌어진 참혹한 ‘몰사’가 지구 위에 붙어사는 생물들에게 언제 어디에서 누구들에게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리처드 도킨스의 『조상 이야기 -생명의 기원을 찾아서』에서 제시된 대로, 약 40억 년 전 ‘진정세균’에서부터 시작 된 생명 계통사의 끝인 2010년 6월 초 현재를 살고 있는 영장류들, 그 중에서 가장 진화가 발달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종인 우리 인간들에게 그 불벼락이 떨어질 확률이 가장 높다고 누구나 말한다. 왜 진화가 가장 발달했다고 하는 우리 인간들이 그 불벼락을 맞아야 하는지는 이제 엔간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한 걸음 ‘몰사’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인간이 갖는 상식 한 구석엔 맹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서 “인간의 자손이여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한대로 이제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되어 한껏 문명을 발전시키며 호사를 누리고 있다. 지구에 사는 인간 모두가 갖는 욕망의 색깔과 냄새, 먹고 마시고 싸고 토하는 모습은 동일하다. 그러면서도 대중들은 더 호사하기 위하여 서로 시샘하고 경쟁한다. 많이 배우거나 권위가 높아 고귀한 사람들 -엘리트들은, 대중이란 항상 평범하며 추하고 탐욕스럽기 때문에 가르침을 베풀어 교도할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인간의 추하고 탐욕스러운 모습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고귀하다고 여기는 존재인 내 속에 똬리 틀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하는 게 바로 지식인 -엘리트들의 맹점이다. 지구의 삼라만상은 얼마나 조용한가. 나무는 나무대로 풀은 풀대로 바위는 바위대로 벌레는 벌레대로 새는 새대로 저마다의 영역에서 조용히 살아간다. 태양이 멀리서 비춰주는 가운데 삼라만상의 모체인 지구가 저절로 돌아가 바람이 일고 구름이 일고 비가 내려 길게 흘러가며 뭇 생명들을 일으켜 세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날이 갈수록 저절로 돌고 도는 자연의 섭리가 헝클어지는 듯 하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종의 번성이 정도를 넘어서일까 아니면 인간에 내장된 폭력성이 발호하기 때문일까. 지구가 몸살을 앓으며 내뿜는 신음소리와 상처가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가까이에선 평은강과 낙동강이 내상을 당하며 신음하는 소리가 들린다. 시장 경제의 번성과 인간의 호사를 위한다며, 5년 동안이란 한시적 권력을 가진 엘리트들이 자연이 내리는 비를 담아 흐르는 수만 년 물길을 막고 끊어대려 하니 어찌 조국의 산하가 아파하지 않을 것인가. 그 속에 담겨 사는 수중 생물들이 불안하지 않을 것인가. 그 유역에 사는 평범한 백성들의 삶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엘리트들이 갖는 맹점을 뚫어주기 위해서일까 몽골의 ‘조드’로 몰사 당한 가축들을 애잔해 해서일까 낙동강 한강 금강 영산강에 사는 수중 생명들의 의지를 대변해서일까 며칠 전에 군위 지보사의 문수스님이 소신공양을 올렸다. 황량한 고비 사막을 가는 낙타 한 마리는 문수스님, 그 다음에 펼쳐지는 초원은 무수한 생명들의 터전, ‘시장 경제’와 ‘인간의 탐욕’을 잘 조절하는 엘리트들은 북두칠성.  
5 좋은 유권자 되기/권석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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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2010-05-31
좋은 유권자 되기 권석창(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장) 6월 2일, 지역단체장과 지자체 의원, 정당의 비례 대표, 그리고 교육감과 교육위원을 뽑는 선거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후보자들은 늘 친애하는 유권자, 혹은 존경하는 유권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당선 되면 친애하지도 존경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친애하는 유권자들은 섭섭해져서 괜히 표를 주었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다음 선거 때 똑같은 투표를 계속합니다. 이런 유권자 좋은 유권자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사회의 선거 풍토는 오랜 세월 지역 갈등 양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공천만 받으면 부지깽이를 갖다 놓아도 당선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거는 하나마나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선거, 하나마나가 아닙니다. 우리 대표를 우리 스스로 뽑는 이 한 표의 권리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민주의 제단에 몸을 바쳤는가를 생각하면 나의 한 표는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민주주의에서의 선거는 유권자가 정치에 참여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권리를 포기하면 민주시민의 자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찍을 만한 사람 없다고 선거 날 등산가면 엄한 사람 당선되어 속된 말로 개고생 합니다. 어떤 유권자는, 사람은 좋은데 당선될 것 같지 않아서 당선될 사람에게 투표한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성씨가 같기 때문에 찍어준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동문이기 때문에 찍는다, 학벌이 좋아서 찍는다, 똑똑해서 찍는다, 인물이 좋아서 찍는다, 불쌍해서 찍는다. 공평하게 다 찍어주겠다, 합니다. 선거 때마다 들을 수 있는 유권자의 소리입니다. 이런 유권자 좋은 유권자 아닙니다. 흔히 공약을 보고 투표하라고 하는데 공약은 지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유권자 되기 그리 쉬운 거 아닙니다. 지금까지 친애하는 유권자들 투표하는 풍경을 보면 왕조시대의 관념을 버리지 못한 면이 있습니다. 나보다 학벌이 좋은 사람, 나보다 경력이 화려한 사람,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 나보다 더 똑똑한 사람에게 표를 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거 아직 왕조 시대의 생각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나보다 똑똑한 사람 뽑으면 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와 같은 사람 위해 일합니다. 우리 한두 번 당한 거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어떤 자리에 적합한 인물일까를 생각하지 맙시다. 그건 대통령이 장관 뽑을 때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유권자이니까 유권자로서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그럼 누구를 뽑아야 할까요? 당연히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 생각이 정책에 반영될 것입니다. 내가 찍은 사람이 당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당선 걱정은 후보자들이 하는 것이고 유권자는 내 생각을 표로 나타내면 그만입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유권자가 많으면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될 것입니다. 내가 찍은 후보가 낙선한다고 해도 나의 표는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민심이 되어 좋은 세상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찍을 만한 사람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거짓말 하지 않을 사람, 공약 잘 지킬 사람, 착한 사람이라도 찾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착한 사람이 대접 받는 풍속이라도 만들 게 아닙니까? 누가 착한 사람인지 어떻게 알까요? 그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 보면 됩니다.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고스럽지만 그의 이력에 대해 조사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 정도 수고 없이 좋은 유권자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찍을 사람이 없으면 정당 투표라도 해야 합니다. 권석창 kweon51@chollian.net 시집<눈물 반응><쥐뿔의 노래>  
4 아, 광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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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 2010-05-25
아, 광주여! 어느 소년 망령의 노래 문병란 저는 그냥 죽었어요 이유도 모르고 어느 날 갑자기 죽었어요 저 만큼 친구들이 보이고 그리고 우리 엄마가 우시네요 자꾸만 자꾸만 우시네요 1979년 10월 27일 아침, 어렴풋이 잠이 깬 내 귀에 청천벽력 같은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박정희가 죽었다는 거였다! 아, 나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 좋은 세상이 오겠구나! 나는 하늘 위에 검게 드리워진 먹구름이 말끔히 걷히리라는 예감에 온 몸이 마구 떨리는 환희를 느꼈다. 내 학창 시절은 박정희와 함께 시작하고 함께 마감했다. 그의 그림자는 갈수록 짙어지고 나는 그 안에서 숨 쉬기도 버거웠다. 나는 꿈속에서 박정희가 죽는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정말 그가 죽은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듯 했다. 캠퍼스는 출렁거렸고, 감히 다시는 독재가 발을 붙이지 못할 듯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흉흉한 소식들이 들려오고,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유령처럼 우리들의 입에 오리내리면서 우리들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캠퍼스는 얼어붙어 갔고 나는 다음 해 5월에 교생실습을 나갔다. 독재자만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았다. 그의 뒤에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버티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국의 거대한 실체가 우리 앞에 드러났을 때 우리들의 맨몸뚱이가 고스란히 보였다. 우리들의 이 맨몸뚱이로 헤쳐 나가야 할 철조망의 숲이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교생실습 간 모 여고에서 수업시간에 내가 무심결에 “김재규 장군이...... .” 하는데 한 아이가 질문을 했다. “왜 김재규에게 장군이라고 하세요?”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그 사람 별 단 장군 아냐?” 하고 어물쩍 넘어갔다. 하지만 등줄기에선 진땀이 흘러내렸다. 저 남녘 광주에서는 이따금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콩알만 해진 가슴으로 간신히 견디고 있는 사이에 ‘광주의 불꽃’은 활활 타올랐다가 꺼졌다. 돌아온 캠퍼스는 거짓말처럼 조용해져 있었다. 다들 말이 없었다. 그 뒤 나는 평범한 일상에 젖어갔다. 나는 자꾸만 작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 귀는 세상을 향해 크게 열려 있었다. ‘광주’는 내 귀에 세상소리를 들려주었다. 한 소년이 이유도 모르고 죽었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아가기 시작했다. ‘광주’는 우리에게 세상의 얘기를 다 들려주었다. 거대한 압제에 맞서 싸운 사람들 이야기를 우리는 다 듣게 되었다. 그들이 해방구에서 만든 공동체는 인간이 얼마나 고매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현재의 삶이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전쟁터에서도 그렇게 아름다운 공동체 사회를 만드는데, 이 태평스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못 만들겠는가? 사람들은 곳곳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해방구는 우리가 하찮게 여겼던 사람들이 잘나 보이던 사람들보다 얼마나 더 고상한지도 보여주었다. 앞으로의 거대한 역사의 강물은 ‘광주’를 시원으로 한다. 모든 것이 확연하다. 강물이 흘러가는 길이 선명히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한 점 의혹도 없이 이 강물에 몸을 던진다.  
3 '전교조'를 위하여/고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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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9 2010-05-06
‘전교조’를 위하여 아내가 퇴근하자마자 “자기야, 나 인터넷에 떴어.” 한다. “응?” 내가 의아스럽게 쳐다보자 한 친구가 어느 요리 사이트에서 자기 이름을 봤단다. 전교조 명단에 이름이 올라있더란다. “영광이네.”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지만,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치욕감에 온 몸이 휩싸였다. 남의 이름을 이렇게 함부로 올려도 되는 건가? 그 이름들에 사람들이 어떻게 대했을까? 길바닥에 내팽개쳐진 채 마구 짓밟혀지는 이름들. 사람의 이름을 이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건가? 우리 사회의 야만성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다. 벌써 20여 년 전이다. 나도 교직에 있을 때 전교조 활동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부모님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있음을 느꼈다. 새마을 어머니 회원들이었다. 그분들과 함께 다방에서 만났다. ‘선생님이 전교조하시다면서요?’ ‘네, 그런데요?’ 전교조에 대해 교육청에서 빨갱이라는 식으로 교육을 했단다. 나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말없이 듣고 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 이 말씀만 드릴게요. 지금 이대로 아이들을 교육시키면 아이들이 효자가 될까요? 불효자가 될까요?” 다들 가만히 있었다. 나는 이어 말했다. “저는 우리나라 교육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이 다들 불효자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입시위주의 교육에 내몰려 옆 친구도 생각할 수 없어요.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요? 부모님을 어떻게 볼까요? 힘없고 늙으신 부모님을 어떻게 대할까요?” 나는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누르며 그 자리를 떠났었다. 지금 그 부모님들은 어떻게 살고 계실까? 그리고 그때의 내 반 아이들은? 성인들 강의를 다니며 그때의 부모님들 연배의 수강생들도 만나고 그때의 학생들 또래의 수강생들도 만난다. 수강생들을 보면 답답해 한숨이 나온다. 명문대학을 나와서도 이 세상을 보는 눈들이 없다. 나는 강의 시간에 가끔 얘기한다. “저는 서울대를 나온 사람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서울대마저도 제대로 된 커리큘럼이 안 되어 있거든요.” 강의하다 보면 서울대를 나온 수강생도 있고 대학원 나온 수강생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학교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는가? 내가 강의할 수 있는 자그마한 실력도 학교 밖에서 공부한 것들이지 정말이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은 거의 없다. 나는 전교조 활동을 하며 내가 새로 태어나는 체험을 했다. 전교조를 하기 전에는 출근할 때면 교문을 들어서며 내가 왠지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허리가 자꾸만 앞으로 구부려졌다. 결제 맡아야 할 서류들이 눈앞에 어른거렸고, 결제 해주실 교장 선생님은 어디 계실까 그 생각부터 났다. 아이들이 결석을 해도 교감 선생님에게 한 소리를 들을 걱정을 했지 학생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이런 내가 전교조 활동을 하며 달라졌다. 교장, 교감 선생님, 장학사는 겁나지 않았다. 학생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결석한 아이를 내내 생각했다. ‘무슨 일일까?’ 아침 조회 시간에 표정이 어두웠던 아이들도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전교조 명단 공개가 불법이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명단 공개를 주도했던 국회의원이 불복한다는 선언을 했다. 그를 다른 여당 국회의원들이 동조하고 나섰단다. 아, 이래서 전교조가 있어야 한다! 그 국회의원은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들이 받은 학교교육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마저도 사람의 소중함을 이다지도 모르는 게 우리 교육의 실상이다! 성경 구절이 생각난다. ‘주여, 이들은 자신들의 죄가 뭔지 모르고 있나이다.’ 나는 전교조를 반대하고 불순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이 한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제발 전교조 선생님들을 만나보시고 판단해 보시라고.  
2 사람은 똑같다/고석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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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2010-04-11
사람은 똑같다 성철 큰스님에 대한 일화가 많다. 그 중에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있다. 큰스님이 많은 스님 앞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데 두 스님이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단다. 큰 스님께서 대노하시면서 그 두 스님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시곤 두 스님의 뺨을 갈겼단다. 그리곤 다시 설법을 계속하다가 다시 그 두 스님을 나오라고 하시곤 또 두 스님의 뺨을 갈겼단다. “아니? 조용히 있었는데 왜 또 때리세요?” 하니까. “아직 분이 안 풀려서.” 했단다. 나는 이 일화가 가장 좋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정말 이런 모습이 우리들 ‘인간’ 아닌가? ‘큰스님’은 달라야 한다고? 그건 착각이다. 모든 인간은 똑 같다. ‘큰스님’도 ‘인간’이다. 성자와 범인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위인, 영웅, 성자’ 하면 근엄하게 앉아 있는 초상화를 연상한다. 얼마나 고귀한 모습인가? 하지만 일생 동안 그런 모습을 몇 번이나 했겠는가? 나머지 인생은 거의 쪼잔하고 후줄근하게 보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뭔가 다를 거라는 것은 착각이다. 우상숭배에 빠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만들어 낸 환상이다. 우리 자신한테 솔직해 보자. 우리는 사실 얼마나 초라한가? 그렇다! 모든 다른 인간도 그렇다! 왜 자신은 초라하게 보고 남은 위대하게 보는가? 자신에게 솔직할 때만이 자신(솔직하게 본)을 사랑할 때만이 우리 눈에 진실이 보인다. 우리가 기분 좋은 것은 남도 기분 좋고 자신이 기분 나쁜 것은 남도 기분 나쁘다. 우리가 뛰어나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우리와 종이 한 장 차이니까. 나는 30대 후반에 문학 공부를 했다. 그때 문학하는 사람은 뭔가 다르리라고 생각했다. 고매한 인격, 고상한 사상, 뭐 이런 것들을 연상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다. ‘아니? 이럴 수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는 그들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그들도 똑 같은 인간이었다. 종이 한 장 차이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고뇌하고 있었다. 고뇌하며 자신을 뛰어넘으려 애쓰고 있었다. 이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때 운동단체에 근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 인사들을 많이 접했다. 이름만 대면 다들 존경해 마지않는 어느 운동권 인사가 우리 단체 짱이었다. 나는 가슴이 설레었다. 어떤 인물일까? 그런데 가까이서 본 그는 전혀 흔히들 알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회의 시간에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어리석긴!’ 하며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곤 ‘혼자서 말을 많이 하는 건 독재’라며 혼자서 두어 시간을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한 활동가는 ‘언제 짓밟혀봐야 돼.’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를 술자리서 보며, 집에서 보며, 나는 그의 뛰어난 점도 동시에 보았다. 항상 현재의 자신을 넘어서려는 자세. 자신을 넘어서 남에게 다가가려는 마음. 이런 것들을 나는 보았다. 나는 10 여 년째 성인 대상의 강의를 해 오며 많은 걸 느꼈다. 가장 힘든 건 ‘나를 존경한다는 수강생’을 만날 때였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다. 나를 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네! 나를 존경하면 뭔가 나에게 좋겠지 하고 막연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나를 미워했다. 존경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을 보니 그게 아닌 것이었다. 아니면 그냥 지나면 좋겠는데 그 분풀이를 꼭 내게 했다. 자신이 사람 잘 못본 것을 왜 내게 화풀이를 하나? 나는 존경이라는 허상의 끝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사람은 똑같다. ‘존경’이라는 허울을 씌워 사람을 사람 아니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존경한다. 죽었으니까. 말이 없으니까. 아니 움직이지 못하니까. 밥도 못 먹고 대소변도 안하니까. 마음껏 존경한다. 존경해서 무슨 이득을 취한다. 진짜 존경한다고? 그건 아니다. 삼라만상을 보면 각자 자신대로 살지 누구를 존경하거나 우러러 받들지 않는다. 각자 똑같이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사람만이 허상 속에 산다. 자신이 텅텅 빈 사람은 남에게서 그것을 채우려 한다. 남을 존경한다면서 남을 이용하려 든다. 사람은 똑같다. 단지 종이 한 장 차이다. 종이 한 장 차이.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이 차이를 니체의 초인으로 해석해 본다. 끊임없이 자신을 가꿔가는 것. 다른 사람처럼 허점투성이고 쫀쫀하지만 자신을 넘어서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 이게 초인이다. 그렇다고 인간을 넘어서진 못한다. 인간의 한계를 인간이 어떻게 넘어서나? 넘어서면 인간이 아니지. 사실 진리는 간단한 것 같다. 저 삼라만상처럼 각자 자신 대로 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게 확연히 잘 보인다. 그런데 인간은 살면서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 콤플렉스가 끼인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제대로 안 보인다. 자신의 눈이 문제인데 남을 탓한다. 저 바람에 살랑이는 풀잎처럼 생각하면 세상이 훤히 보일 것이다. 만일 풀잎이 큰 나무를 존경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끔찍하지 않는가? 그런 엽기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