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4호...
   2019년 1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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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은 똑같다/고석근 [1]
관리자
2009 2010-04-11
사람은 똑같다 성철 큰스님에 대한 일화가 많다. 그 중에 가장 강하게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있다. 큰스님이 많은 스님 앞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데 두 스님이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고 있었단다. 큰 스님께서 대노하시면서 그 두 스님을 앞으로 나오라고 하시곤 두 스님의 뺨을 갈겼단다. 그리곤 다시 설법을 계속하다가 다시 그 두 스님을 나오라고 하시곤 또 두 스님의 뺨을 갈겼단다. “아니? 조용히 있었는데 왜 또 때리세요?” 하니까. “아직 분이 안 풀려서.” 했단다. 나는 이 일화가 가장 좋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정말 이런 모습이 우리들 ‘인간’ 아닌가? ‘큰스님’은 달라야 한다고? 그건 착각이다. 모든 인간은 똑 같다. ‘큰스님’도 ‘인간’이다. 성자와 범인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위인, 영웅, 성자’ 하면 근엄하게 앉아 있는 초상화를 연상한다. 얼마나 고귀한 모습인가? 하지만 일생 동안 그런 모습을 몇 번이나 했겠는가? 나머지 인생은 거의 쪼잔하고 후줄근하게 보냈을 것이다. 그들은 우리와 뭔가 다를 거라는 것은 착각이다. 우상숭배에 빠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만들어 낸 환상이다. 우리 자신한테 솔직해 보자. 우리는 사실 얼마나 초라한가? 그렇다! 모든 다른 인간도 그렇다! 왜 자신은 초라하게 보고 남은 위대하게 보는가? 자신에게 솔직할 때만이 자신(솔직하게 본)을 사랑할 때만이 우리 눈에 진실이 보인다. 우리가 기분 좋은 것은 남도 기분 좋고 자신이 기분 나쁜 것은 남도 기분 나쁘다. 우리가 뛰어나다고 알고 있는 사람도 우리와 종이 한 장 차이니까. 나는 30대 후반에 문학 공부를 했다. 그때 문학하는 사람은 뭔가 다르리라고 생각했다. 고매한 인격, 고상한 사상, 뭐 이런 것들을 연상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다. ‘아니? 이럴 수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나는 그들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그들도 똑 같은 인간이었다. 종이 한 장 차이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고뇌하고 있었다. 고뇌하며 자신을 뛰어넘으려 애쓰고 있었다. 이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서서히 알게 되었다. 그때 운동단체에 근무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 인사들을 많이 접했다. 이름만 대면 다들 존경해 마지않는 어느 운동권 인사가 우리 단체 짱이었다. 나는 가슴이 설레었다. 어떤 인물일까? 그런데 가까이서 본 그는 전혀 흔히들 알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회의 시간에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어리석긴!’ 하며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러곤 ‘혼자서 말을 많이 하는 건 독재’라며 혼자서 두어 시간을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한 활동가는 ‘언제 짓밟혀봐야 돼.’하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를 술자리서 보며, 집에서 보며, 나는 그의 뛰어난 점도 동시에 보았다. 항상 현재의 자신을 넘어서려는 자세. 자신을 넘어서 남에게 다가가려는 마음. 이런 것들을 나는 보았다. 나는 10 여 년째 성인 대상의 강의를 해 오며 많은 걸 느꼈다. 가장 힘든 건 ‘나를 존경한다는 수강생’을 만날 때였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다. 나를 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네! 나를 존경하면 뭔가 나에게 좋겠지 하고 막연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나를 미워했다. 존경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상을 보니 그게 아닌 것이었다. 아니면 그냥 지나면 좋겠는데 그 분풀이를 꼭 내게 했다. 자신이 사람 잘 못본 것을 왜 내게 화풀이를 하나? 나는 존경이라는 허상의 끝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사람은 똑같다. ‘존경’이라는 허울을 씌워 사람을 사람 아니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존경한다. 죽었으니까. 말이 없으니까. 아니 움직이지 못하니까. 밥도 못 먹고 대소변도 안하니까. 마음껏 존경한다. 존경해서 무슨 이득을 취한다. 진짜 존경한다고? 그건 아니다. 삼라만상을 보면 각자 자신대로 살지 누구를 존경하거나 우러러 받들지 않는다. 각자 똑같이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사람만이 허상 속에 산다. 자신이 텅텅 빈 사람은 남에게서 그것을 채우려 한다. 남을 존경한다면서 남을 이용하려 든다. 사람은 똑같다. 단지 종이 한 장 차이다. 종이 한 장 차이.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이 차이를 니체의 초인으로 해석해 본다. 끊임없이 자신을 가꿔가는 것. 다른 사람처럼 허점투성이고 쫀쫀하지만 자신을 넘어서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간. 이게 초인이다. 그렇다고 인간을 넘어서진 못한다. 인간의 한계를 인간이 어떻게 넘어서나? 넘어서면 인간이 아니지. 사실 진리는 간단한 것 같다. 저 삼라만상처럼 각자 자신 대로 살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게 확연히 잘 보인다. 그런데 인간은 살면서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 콤플렉스가 끼인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제대로 안 보인다. 자신의 눈이 문제인데 남을 탓한다. 저 바람에 살랑이는 풀잎처럼 생각하면 세상이 훤히 보일 것이다. 만일 풀잎이 큰 나무를 존경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끔찍하지 않는가? 그런 엽기도 없을 것이다.  
1 어머니 살해/고석근 고창근 1697 2010-03-02
어머니 살해 입에 담기에도 끔찍한 ‘어머니 살해’가 요 몇 달 사이 연속해서 일어났다. 돈이 필요해서라거나, 게임에 중독되어 사리분별을 못해 저질렀다는 기사의 해설이 뒤따랐다. 어머니...... 속으로 말없이 불러 봐도 가슴이 에이는 이름. 그런데 어찌해서 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순간 자식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나는 어머니에 대한 가슴 저린 기억들이 많다. 지금도 자주 꾸는 꿈 중에 어떤 마을을 헤매는 꿈이 있다. 이집 저집 다녀 봐도 다 빈집이다. 분명히 기억에 선명한 집들인데, 아무도 없다. 빈방들을 바라보다 잠을 깬다. 잠을 깨서도 그 마을이 선명하다. 나는 이 마을이 내가 태어난 마을이라는 걸 안다. 내가 세 살 때까지 산 집.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지었다는 초가집,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골목이 되어 있다. 그 마을에 가서 그 빈터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나의 어린 시절이 가슴 아리게 느껴졌다. 부모님은 너무 가난해서 아침 일찍 나를 이웃집에 맡겨두고 일을 나가셨단다. 아마 나는 혼자 집에 가 보았을 것이다. ‘엄마가 있을까’ 몇 번을 가보아도 빈집, 그 아득한 기억이 꿈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이다. 그 아픔은 내 일생의 열쇠가 되어있다. 빈집, 이사, 이방인, 이런 단어들이 내 머리위에 먹구름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눈이 언제나 무엇을 갈구하는 눈빛이라고 한다. 세 살 때 그 마을을 떠나 소읍 변두리로 이사를 왔다. 여기서 나는 중학교 시절까지 보냈다. 어머니는 항상 아프셨다. 학교에 갈 때마다 어머니는 머리에 수건들 두르고 이불을 쓰고 누워계셨다. 나는 집에 올 때마다 겁이 났다.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지?’ 학교에서 주는 급식빵을 반만 먹고 반을 가져와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가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얀 무명저고리와 검은 무명치마를 입으신 어머니의 초췌한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 고등학교를 외지에 가서 한 달에 한 번씩 다녀갈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골목에 서 계셨다. 그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진다. 내가 어른이 되어 어머니께 효도를 하려 했을 때는 어머니는 이미 늙으셨다. 항상 누워 계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왜소한 모습이 내 가슴 깊숙이 박혀 있다. 누구에게나 나만큼의 아픈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처럼 가난하지 않아도 어머니는 항상 힘드셨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힘겨운 어머니를 살해한단 말인가? 어머니는 아이와 한 몸이다. 한 몸이기에 혼자 둘 수 없어 함께 자살하는 어머니들이 많다. 아이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살해한다는 게 어머니를 살해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런 일들이 숱하게 일어난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지극히 본능적이고 감성적인 존재다. 인간에게 어떤 본성과 감성이 있기에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단 말인가? 신화나 역사, 소설에서 보면 어머니 살해 사건이 많다. 아마 실제로 일어났기에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을까? 그런데 문명화된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 마음이 우리 마음 깊숙이 남아 있기에 그렇지 않을까? 인간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어머니 품으로부터 떠나야 한다. 옛이야기에 보면 아이들은 부모 품을 떠나 영웅이 된다. 독립된 한 인간이 되기 위해선 어머니 품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이 떠남이 제대로 되지 않는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어머니를 떠나지 못하고 항상 어머니 치마폭을 붙잡고 있다. 다 큰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해 그 시신을 방에 두고 아이 노릇을 한다는 내용의 영화(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싸이코)를 본 적이 있다. 그 마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일 것이다. 단지 그 마음이 큰가 작은가의 차이일 뿐일 것이다. 어머니를 살해하는 아들의 깊은 마음속에는 어머니와 분리되지 못하는 ‘아이 마음’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를 죽여 스스로 독립하고 싶은 마음이 그런 살인마가 되게 했을 수도 있고, 세상에 나가기가 너무 두려워 어머니 곁에 있고 싶어(어머니는 세상에 나가기를 독려하고) 그렇게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독립해서 살기 힘든 구조다. 그 힘든 구조 속에서 평소에 독립심을 기르지 못한 나약한 인간들은 이런 살인마가 되어 자신의 돌파구를 찾았을 것이다. 이런 나약한 인간에게 강건한 이성을 기대해선 안 된다. 이성의 빛은 감성을 세심하게 가꾼 사람에게 내리비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한 인간을 독립된 존재로 키우지 못하면 이런 비인간적인 살인 사건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어머니 살인의 추억은 너무나 깊은 우리 마음의 근원적인 곳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으로 살아야 하는 존재다. 이성을 깨워 이성적으로 살 수 있는 힘을 주지 않으면 비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가슴 저리게 그립다. 어머니를 살해하는 아들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 간절한 사랑은 극단적인 미움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