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4호...
   2019년 1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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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62 피라미드/권서각 file
편집자
460 2019-01-24
피라미드 티브이 드라마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지만 요즘 ‘스카이 캐슬’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강남 부자동네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다. 드라마를 보기 전에는 그들은 그들 밖의 사람들을 개, 돼지로 여긴다는 정도로만 짐작할 뿐이었다. 코디라는 말도 연예인의 옷차림을 관리해 주는 사람 정도로 알았는데 그들의 코디는 자녀를 명문학교에 입학시켜주는 기획자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소도구 가운데 피라미드 모형이 있다.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차 교수는 피라미드 모형을 늘 책상에 두고 보면서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기를 소망한다. 자녀들에게도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를 것을 요구한다. 꼭대기에서는 누리고 아래에서는 짓밟힌다는 것이 그의 논리다. 그들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모두 이런 부류의 사람만 산다면 우리사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사회가 아직 온전히 망하지 않은 것은 자기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며 이웃을 배려하며 사는 선량한 다수, 곧 피라미드의 아랫부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일 것이다. 사회 모든 구성원이 모두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려고 온갖 부정과 불법과 편법을 저지르며 산다면 우리사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이 개, 돼지라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그들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다. 피라미드의 아래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지배계층에 짓밟히면서도 오히려 그들을 지지하는 모습이 그러하다. 우리는 OECD 국가 가운데 자영업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에 산다. 최저임금을 올리자 자영업자들이 살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최저임금을 올린 정부를 탓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건 우리 경제의 오래된 구조의 문제이지 누구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서로가 지혜를 모아 풀어야 할 어려운 과제다. 경제개발 시대에 우리는 대기업에 자본을 몰아주기 위해 강제로 저금을 하고, 우리의 어머니들은 머리카락을 잘라서 팔았다. 독일에 광부로 가고 간호사로 갔다. 베트남에 용병으로 가고 젊은이들은 공돌이와 공순이로 불리며 저임금 노동을 하며 기업을 키웠다. 그 희생이 모여서 대기업이 성장하고 통계상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런데 그 공은 어느 한 사람의 것이 되고 노동자들은 아직도 최저임금도 받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 사는 사람들은 밖에서 보면 우아하고 품위가 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꼭대기를 향한 천박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속은 병들었으나 겉만 멀쩡한 꼴이다. 어두운 과거를 숨기고 우아한 척 사는 드라마 속 인물인 한서진은 화가 치밀면 태도를 돌변하여 “아갈머리를 확 찢어 놓을라.”라는 비속어를 수시로 사용한다. 비속어는 대책 없는 상대를 만났을 때 가끔 필요하기도 하다. 주위에서 최저임금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비하하고 피라미드 꼭대기를 두둔하는 말을 들을 때는 한서진의 대사를 되돌려주고 싶을 때가 있다. 피라미드를 내동댕이치며 한 차 교수 아들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지구는 둥근데 왜 피라미드여야 해?”  
261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 (괴테) /고석근 file
편집자
549 2019-01-17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 (괴테) 그 희고 둥근 세계 고재종 나 힐긋 보았네 냇가에서 목욕하는 여자들을 구름 낀 달밤이었지 구름 터진 사이로 언뜻, 달의 얼굴 내민 순간 물푸레나무 잎새가 얼른, 달의 얼굴 가리는 순간 나 힐끗 보았네 그 희고 둥근 여자들의 그 희고 풍성한 모든 목숨과 신출神出의 고향을 내 마음의 천둥 번개 쳐서는 세상 일체를 감전시키는 순간 때마침 어디 딴 세상에서인 듯한 풍덩거리는 여자들의 참을 수 없는 키득거림이여 때마침 어디 마을에선 훅, 끼치는 밤꽃 향기가 밀려왔던가 말았던가 모 대안 고등학교에서 남학생들이 여학생 기숙사를 침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여학생들이 샤워하는 장면을 남학생들이 몰래 훔쳐보았다고 한다. 여학생 부모님들이 어찌 대안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분노했단다. 그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어머니는 어찌하면 좋으냐고 내게 물었다. 우리 어른들은 이 사건을 ‘음란’으로 생각할 것이다. 과연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고재종 시인도 청소년 시절에 ‘그 희고 둥근 세계’를 본 것 같다. ‘나 힐긋 보았네/냇가에서 목욕하는 여자들을//구름 낀 달밤이었지/구름 터진 사이로/언뜻, 달의 얼굴 내민 순간/물푸레나무 잎새가/얼른, 달의 얼굴 가리는 순간’ ‘나 힐끗 보았네/그 희고 둥근 여자들의/그 희고 풍성한/모든 목숨과 신출神出의 고향을’ 그 언뜻 본 숨 막히는 순간을 시인은 ‘모든 목숨과 신출神出의 고향을’ 보았다고 했다. 시인만 이런 눈을 가졌을까? 시대 때도 없이 음란을 조장하는 문화에 접하는 요즘 아이들은 이런 마음이 전혀 없을까? 도덕경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谷神不死 이를 현묘한 암컷이라고 하고, 현묘한 암컷의 문을 일러 천지의 뿌리라고 한다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之根’ 나는 강의 시간에 이 구절의 이해를 위해 프랑스 화가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을 핸드폰에서 검색하게 했다. 가끔 아저씨들은 ‘세계의 기원’을 검색해 놓고서도 지나치곤 했다. 설마 인문학 강의 시간에 이런 음란한 그림을 찾게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쿠르베의 ‘세계의 기원’은 여성이 누워 성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림이다. 나는 처음 그 그림을 보았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여성 성기가 세계의 기원이라니! 신도 아니고 하늘도 아니고...... 오! 맞네! 머리가 띵 했다. 나의 음란을 한순간에 날려 버리는 그림이었다. 헝가리의 철학자 루카치는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사물, 사람들을 물화(物化)한다고 했다. 우리의 원래 마음은 여성의 몸을 신성(神聖)하게 보는데, 자본주의는 자꾸만 우리에게 여성의 몸을 음란하게 보게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음란’을 통해 얼마나 많은 자본을 증식시키는가! 우리는 음란물을 즐기며 자신이 정말 즐거워한다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그건 루카치가 말하는 ‘허위의식’이다. 사람은 자신의 의식이 세상과 정직하게 만날 때 행복하다. ‘모든 목숨과 신출神出의 고향을’ 음란하게 보는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분열되어 있는가! 그래서 우리 사회엔 정신질환자가 이리도 많다. 모 대향병원에서 마음이 아픈 사람이 자신을 치유하던 의사를 살해했다고 한다. 조선 시대 화가 신윤복의 그림 중에 ‘목욕을 하는 여인들을 몰래 훔쳐보는 까까머리 동자승’이 있다. 이 그림은 음란한가! 나는 그 어머니에게 학교에서 먼저 ‘성과 사랑’ ‘인권’에 대한 심도 있는 교육을 하고 교사, 학생, 학부모가 함께 솔직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사건을 음란으로 몰아가지 말고 ‘인권’의 차원에서 다뤘으면 좋겠다. 그리하면 잘못한 아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정직하게 알고 반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허위의식에 젖을 때 우리는 얼마나 무서운 괴물이 되는가! 이 사건이 우리 모두 함께 성숙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60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라 /권서각 file
편집자
458 2018-12-25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라 한반도 북쪽에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다.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었다. 분단 당시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가 냉전체제를 확립하던 시기였다. 그런 열강들에 의해 우리는 남과 북으로 분단이 되었다. 이후 세계는 공산국가가 몰락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이념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분단 이후 남과 북은 같은 한 겨레이면서도 서로를 비방하며 군비를 증강하며 전쟁의 위험 속에 살아왔다. 남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미국의 도움으로 경제적 성취를 이루었다. 반면에 북은 사회주의의 붕괴와 계속되는 기근으로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수많은 인민들이 굶어죽었다. 게다가 국제사회에서 불량국가 혹은 악의 축으로 분류되어 유엔의 경제제재를 받으며 힘겨운 나날을 보네고 있다. 북은 살아남기 위해 핵무기 개발을 시작했다. 작년에는 핵을 장착하고 미국까지 갈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에 성공했다. 핵을 가진 나라끼리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말이 정설이다. 핵무기는 전쟁에 쓰기 위한 전술무기가 아니다. 핵을 쓰면 모두가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핵은 국제관계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무기다. 미국이 북미협상에 나오게 된 것도 북이 핵 개발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 자료에 의하면 지금 북의 식량 사정은 농업생산과 수입곡물을 합해도 88%를 넘지 못한다. 북의 식량사정을 말해주는 자료다. 김정은은 군사체제에서 경제체제로 북을 바꾸겠다고 선언했다. 북과 미국은 싱가포르 회담에서, 북은 핵을 폐기하고 미국은 북의 체제를 보장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진전은 순조롭지 못하다. 북미회담 이후 북은 풍계리 핵 실험장을 폭파했다. 그리고 다음 핵 폐기 계획을 제시했다. 남과 북은 휴전선의 방송시설을 철거했다. 비무장지대의 전방초소도 제거하고 상호비방을 중단했다. 남과 북은 평화를 향해 가고 있다. 남과 북은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이 북에 준 것은 한미군사훈련 잠정중단 하나다. 문제는 북미 관계에 있다. 북은 단계적으로 핵을 폐기하고 대북제재도 단계적으로 풀어달라는 것이다. 미국은 북이 핵을 완전히 폐기하기 전에는 계속 제재를 하겠다는 입장이다. 북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먼저 항복하라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미국이 어떻게 생각하든 북도 하나의 나라다. 북의 입장에서 보면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 아니다. 오바마 보좌관이었던 벤 로즈는 한반도 평화를 원하지 않는 세력으로 워싱턴 블로브(Blob), 즉 워싱턴의 패거리를 지목했다. 분단이 우리민족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듯이 분단의 해소도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통일이 아니다. 남과 북의 평화체제 구축이다. 평화협정이 이루어지고 전쟁의 위험이 사라지면 자유로운 교류와 협력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이게 통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의 나라가 되는 통일은 그 다음 문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진행을 강력히 지지한다고 말하면서 문 대통령에게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시라. 두려워하지 마시라.”고 하셨다.  
259 (서평) 어우동을 변호하다-고창근 서사시집 『사랑하다 죽은 여인 어우동』 /김재순 file
편집자
663 2018-12-17
어우동을 변호하다 ―고창근 서사시집 『사랑하다 죽은 여인 어우동』(문학마실, 2018) 김재순 『사랑하다 죽은 여인 어우동』은 고창근 작가가 아홉 번째로 펴낸 책이다. 그는 엄청난 문학적 에너지로 지금까지 소설집 세 권과 장편소설 네 권을 출간했고 서사시집도 두 권이나 냈는데 최근에 출간한 서사시집이 『사랑하다 죽은 여인 어우동』이다. 작가가 여러 작품에서 주창한 페미니즘 사상을 이번에는 서사시로 보여준다. 비디오 테이프 대여점이나 비디오방이 거리를 풍미하던 가까운 지난 시절 유리문에 붙어있던 어우동 영상물 광고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멈췄을까. 아름다운 여배우의 선정적인 차림과 요염한 자태, 남자배우와 엉겨있는 배경, 상업자본과 맞물린 그토록 매혹적인 도화를 똑바로 당당하게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힐끔거리면서 볼 것 다 보게 했을 것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우동을 어떻게 기억할까. 젊은 아가씨에게 어우동을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기생이라고 했다. 황진이처럼 예인인 기녀도 아니고, 홍랑처럼 절개가 있는 기녀도 아니요, 논개처럼 의로운 기녀도 아닌, 그냥 퇴폐적인 기생으로 기억하는 것 같다. 어우동을 알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그녀를 그렇게 기억할 것 같다. 어우동은 충북 음성 음죽현(현 경기도 이천)의 정3품 박윤창의 딸로 태어났다. 외숙부가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이며 세종대왕의 형 효령대군의 손부가 된 조선 최고의 신분이다. 신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온갖 잡설, 음녀의 불명예를 아직까지도 벗지 못한 어우동에 대해 고창근 작가는 반론을 제기한다. 그녀는 가부장제를 거부하고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녀에 대한 많은 기록이 권력의 검열을 거친 누명이라고 말한다. 그의 변론을 들어본다. 그렇다고 은장이한테 흑심을 품은 건 아니었다 다음 날 은기를 만드는 것이 신기해 차마 사대부가의 아녀자로서는 못 가고 장미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부엌으로 가 물 한 그릇을 들고 은장이한테 다가가 주곤 다시 앉는데 등에 꽂히는 독화살 하나 오호라 이제야 알았구나 소문으로만 들었다가 막상 두 눈으로 보니, 이 음탕한 년! ―「제2부 쫒겨나다, 제7장」 중에서 위의 장면들은 어우동이 쫓겨나게 된 경위를 보여준다. 어우동은 왕족과 혼인하여 해인이라는 작호를 받았고 장미는 그녀의 하녀 이름이다. 그러나 남편 이동은 첫날밤만 어우동을 찾았을 뿐 기생을 별채에 들여서 주색잡기에 빠져 어우동을 잊었다. 남편의 무관심으로 쓸쓸하게 지내던 어우동은 하녀복장을 하고 집안에서 은그릇을 만드는 은장이를 찾아가, 그냥 신기해서 물도 떠다주고 말도 나누며 옆에서 잠시 앉아 있는다. 은장이와 마음을 나누거나 간통을 한 것이 아닌데 다른 여자에게 빠져 어우동을 내쫓을 구실을 찾던 남편 이동에게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어우동은 가부장사회에서 사통한 천하의 음탕한 여인이라는 누명을 쓰고 친정으로 쫓겨난다. 아비와 오라비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활달하고 열린 생각을 지닌 어미의 도움으로 조금의 재산을 분배받아 분가한 어우동은 길갓집에 살게 된다. 그녀는 젊고 건강하다. 소박맞아 홀로지내는 심정이 어땠을까. 신열을 앓으며 누워 지내는 어우동에게 하녀의 권유로 신분을 속이고 중인이지만 사헌부 도리라는 직책에다 용모가 준수한 오종년이라는 사내를 만나 서로 몇 번의 탐색을 끝내고 사랑을 나눈다. 그들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정을 나눈다. 이후 어우동은 풍기문란 죄로 구속되기 전까지 많은 남성을 만난다. 시와 거문고 등의 재주가 뛰어나서 당대의 유명인사와 유생들이 찾아왔고 어우동은 가리지 않고 만났다. 신분의 귀천도 나이도 가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프리섹스였다. 그녀가 얼마나 많은 남성들과 만나 어떤 애정행각을 했는지는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다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세하게 열거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 시집에서는 잘 보여준다. 이 팔뚝에 그대의 이름을 새겨주시오 박강창이 머뭇거리다 현비의 팔뚝에 먹물을 먹인 바늘을 가져갔다 (중략) 현비는 낮과 밤을 구분 못하고 음식도 먹는 등 마는 둥 절벽에 서 있는 듯 지냈다 매일 죽은 사람처럼 말라가는 꼴을 보지 못한 장미가 이틀에 걸쳐 사연을 알아왔다 ―「제5부 열락의 세계에 빠져들다, 제21장」 중에서 어우동이 이런저런 남자들과 관계한다고 본능만 따르는 음탕녀가 아니라 그녀의 가슴은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할 줄 아는 순정한 여인이라고 고창근 작가는 대변하고 있다. 현비는 어우동이 길갓집에 살면서 사내들을 만날 때부터 바꾼 이름이다. 아무리 길갓집에서 여러 남자들을 상대하며 살고 있는 그녀라지만 그중에는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가슴속에 맺혀서 그리움에 눈물짓게 하는 한 사람의 이름이 있는데 박강창이라는 젊은이다. 스스로 팔뚝을 내밀어 박강창의 이름을 새겨달라고 했고 박강창이 집에 갇혀 못 오게 되자 절망하며 눈물로 밤을 새우고 말라갔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아녀자들만 있는 집이요 왜 이러셔, 다른 사내들에겐 넙죽법죽 잘 주면서 나도 그 구멍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 좀 합시다 치욕, 마비된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 전 일, 이 떠올랐다 장미가 없는 틈을 타 사내는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항할 틈도 없이 옷이 발가벗겨지고 이렇게 사내들의 쾌락의 종이 되느니 죽는 게 낫다 ―「제6부 사랑은 외로움이더라, 제27장」 중에서 이근지라는 자는 어우동과 가까이 지내는 사내의 이름을 팔고 어우동에게 접근해서 그녀를 희롱하고 능욕했다. 대문으로는 드나들지 못하고 얍삽하고 교활하게 몰래 들어와서 강제로 폭행하는 파렴치한 인간 말종도 있었다. 노류장화라고 소문난 어우동에게 달라붙는 잡것들이 많았다. 벌, 나비, 산들바람만 있었겠는가. 온갖 잡것들이 달라붙었지만 “사내들의 쾌락의/종이 되느니/죽는 게 낫다”는 말로 그녀는 맘에 드는 사내와 스스로 향유할 뿐, 자유롭고 주체적인 생활을 했을 뿐이라고 작가는 그녀의 편에 서서 강력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어우동의 행동이 한성부에 퍼지고 진상을 요구하는 공론이 형성되어 왕 성종은 어우동을 풍기문란 죄명으로 잡아들였고 상대 남자들도 잡혀왔다. 그녀를 탐하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어우동을 모른다고 했다. 자백을 않고 있던 어우동의 입에서 당대 유명 인사들 방산수 이난, 수신수 이기, 박강창, 오종년, 이승언, 홍창, 이근지, 구전, 어유소, 김휘, 김청……이라는 이름이 줄줄이 꿰어져 나왔다. 허위와 가식을 성리학으로 포장했던 사내들의 헛된 이름을 마구 불러내었다. 내 정신도 어쩌지 못하는 몸이다 정신과 몸이 쓰라린 갈등을 겪을 때 내 몸 어디에서 또 하나의 몸이 불쑥 나타났다 나는 그 또 다른 몸을 인정했을 뿐이다 그 몸 또한 내 몸이기 때문이다 내 몸을 툭, 내려놓을 때 나는 해방을 느꼈다 ―「제7부 사랑이 꺾이다, 제32장」 중에서 어우동은 감옥에 갇힌 죄인이 되었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다. 단지 위선 떨지 않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마음에 드는 사내와 즐기며 살았을 뿐인데 그것이 죄가 되는가. 도대체 제도와 관념이 무엇이기에 개인의 삶마저 통제한다는 말인가. 여성은 아무런 권리도 주장도 할 수 없었던 사회, 힘의 논리 즉 남성의 논리 권력의 논리로 지배되던 사회, 그들의 틀 속에 여자들을 가두고 숨도 못 쉬게 하던 사회에서 어우동은 너무도 절실하게 몸의 해방과 정신의 해방을 추구했다. 허울뿐인 비단 옷을 벗듯이 마음도 벗고 몸도 벗어 주체적으로 살아간 여인, 드디어 그것을 성취하고 인간의 본질을 찾았지만 그녀는 성리학의 사회를 뒤흔든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죄인은 그 사회라고 작가는 어우동을 변호한다. 어우동은 옥사에 갇히고 상관했던 남자들은 신분이 낮은 자들을 제외한 사대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되고 직책도 돌려받았다. 어우동을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은 장 백대에 이천 리의 유배가 합법적이지만 다른 비슷한 조문,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한 법에 적용하여, 즉 억지법을 적용하여 성종의 명에 따라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그녀는 왕가의 족보에서도 사라지고 그녀의 시, 서, 화 등 작품도 폐기되었고 현재 몇 작품만이 남아있다. 성종은 고려의 멸망을 교훈삼아 국가의 긴급한 사명은 인간의 본성을 순화하고 풍속을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에 대한 규범을 강화하였는데 우주론적으로 하늘에 해당하는 것이 남자고 여자는 땅이라 남자는 여자에게 군림하며 낮은 존재인 여성은 욕망을 억제해야 한다고 여겼다 특히 욕망 가운데 성은 경계의 대상이었다 여자들은 성리학에서 제시하는 부덕(婦德)을 요구했고 예에서 벗어나 욕망을 발산하거나 일탈된 행동을 하여 가정과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를 제약했다 그 제약은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 가문에까지 공동 책임을 지웠다 개인의 생명보다 국가의 풍속이 더 중요했고 왕권강화가 더 시급했다 ―「제8부 사랑에, 죽다, 제 38장」 중에서 성종은 왕이 될 수 있는 서열이 먼 사람이었지만 당시 최고의 권모술수를 가진 한명회를 장인으로 두었고 뛰어난 지략을 지닌 어머니(훗날 인수대비)의 합작으로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두고 기반을 잡아가던 시기, 인수대비는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로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우동이 처형되기 몇 년 전에 내훈을 발표하고 아직은 고려의 분방한 습성이 남아있던 조선 여인들의 삶을 더욱 더 통제했다. 그것이 지도적 역할을 하는 사람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종은 그런 어머니 의지를 꺾지 못해 어우동을 교수형에 처하고 비슷한 시기에 자신의 부인도 사사했다. 이 여인들을 비롯해서 조선의 모든 여인들은 남성우월주의, 남성중심주의, 유교사회의 질서에 희생되었고 그녀에 대한 기록도 그 권력의 기록일 뿐이라고 작가는 서사시로 말하고 있다. 이 서사시집 『사랑하다 죽은 여인 어우동』에는 어우동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만 노래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부정부패, 혼인의례, 품위로 포장된 이면에 썩어빠진 양반과 왕족들의 부도덕, 불법으로 법을 행사하는 성종의 모습 등 당시 사회를 알 수 있는 많은 자료를 볼 수 있다. 그리움이 밀려오는 계절이다. 대상에 대한 실체가 없는 그리움이다. 이런 계절에 보기 좋은 서사시집이 『사랑하다 죽은 여인 어우동』이다. (이 글은 2018년 <작가정신>에 실렸습니다) 김재순/경북 상주 출생. 2002년 『작가정신』으로 등단. 시집 『복숭아 꽃밭은 어디에 있을까』. nok9105@hanmail.net  
258 함석헌의 씨ㅇ·ㄹ사상/권서각 file
편집자
543 2018-11-26
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 어린 시절 아버지가 보시던 동아일보로 흙벽에 도배를 했다. 허연 수염을 기르고 한복을 입은 노인의 사진이 우리 식구가 밥 먹는 방의 벽에 붙어 있었다. 굵은 제목으로 쓰인 ‘정부에 들이대는 말’이라는 글자가 늘 내 눈에 들어왔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제목만은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짐작하건대 이승만의 독재를 비판하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한 노인이 이승만 정권에 들이댄 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분이 우리가 겨레의 스승으로 섬기는 한석헌 선생이시다. 함석헌 선생은 ‘씨ᄋᆞᆯ의 소리’라는 잡지를 발행하셨다. 그분의 사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늘 말씀하시는 ‘씨ᄋᆞᆯ’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며칠 전 영주의 시민단체인 ‘민본실천 시민연합(회장 김영모)’이 주관하는 ‘정도전의 민본사상과 함석헌의 씨ᄋᆞᆯ사상’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를 통해 함석헌 선생의 씨ᄋᆞᆯ에 대해 조금은 가까이 갈 수 있었다. 선생은 국민이나 민중이라는 말 대신에 ‘씨ᄋᆞᆯ’이라는 말을 쓰셨다. 씨ᄋᆞᆯ은 민중이나 국민과는 조금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씨는 종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생명의 근원이다. ‘ᄋᆞᆯ’의 ‘o’은 하늘을 ‘ㆍ’는 사람을 ‘ㄹ’은 운동과 생성을 뜻한다. 온전한 씨ᄋᆞᆯ은 생명을 품고 있어야 하며 봄이 오면 싹을 틔울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센 통치자가 이리 가라면 가고 저리 가라면 가는 사람은 씨ᄋᆞᆯ의 본분을 알지 못하는 자라 할 수 있다. 선생이 ‘씨ᄋᆞᆯ의 소리’를 줄기차게 발행한 것도 씨ᄋᆞᆯ을 씨ᄋᆞᆯ답게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가령 조선왕조가 망하고 일본제국주의가 침략했을 때 우리는 일본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일본에 저항해 보아야 이길 수 없음이 불을 보는 듯했다. 많은 사람들이 체념하거나 친일파로 돌아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의병활동이나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이 계신다. 우당 이회영이나 석주 이상용 같은 이는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에 거서 무관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나라가 완전히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독립군이 되거나 독립운동을 했다. 이육사의 시 ‘절정’이 있다. 일제 식민지 침탈로 나라를 빼앗겨 어디에도 발붙일 땅이 없는 상황을 절정이라 했다. 시의 마지막 연은 ‘이러매 눈감아 생각해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고 노래했다. 아무리 일제식민통치가 겨울의 추위처럼 견딜 수 없어도 시인의 마음은 광복을 뜻하는 무지개를 본다. 강철로 된 무지개는 사라지자 않는다. 강약은 부동이지만 광복의 의지는 꺾을 수 없다는 씨ᄋᆞᆯ 정신이 나타난 일제강점기 최고의 저항시다. 이러한 씨ᄋᆞᆯ사상이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이어오게 한 힘이었다. 지금 우리민족은 분단 극복이라는 역사의 고비에 서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어떤 나라도 한반도의 평화를 원하는 나라는 없다. 강대국들은 우리를 좋은 먹잇감으로 여기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무기는 씨ᄋᆞᆯ의 힘이다. 아무리 강한 자 앞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것이 함석헌 선생의 씨ᄋᆞᆯ사상이다.  
257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 (에리히 프롬) /고석근 file
편집자
540 2018-11-15
사랑은 사랑을 일으키는 힘이고 무능력은 사랑을 일으키는 능력이 없다 (에리히 프롬) 세월의 강물 장 루슬로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 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모 고등학교에 강연을 가서 학생들에게 이 시를 읽게 했더니 한 학생이 묻는다. ‘그럼 다친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친 달팽이는 도와주지 말고 다친 사람은 도와 줘야 할까? 나는 그 학생에게 말했다. ‘네가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네가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해. 그래야 남들이 네게서 도움을 받게 돼. 네가 악취가 나는 사람이 되면 네가 아무리 남을 도와주고 싶어도 사람들은 네게서 악취를 맡게 돼. 도움을 줄 수가 없어. 남을 도와주고 싶을 때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해. ‘착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 건 아닌지?’ 태양은 스스로 뜨겁게 타오르며 신나게 살아간다. 삼라만상은 그 빛을 받으며 살아간다. 가을이 되면 밤나무는 잘 익은 밤을 툭툭 땅에 떨어뜨린다. 다람쥐는 그 밤을 먹으며 살아간다. 우주 차원에서 보면 누가 누구를 도와주지 않는다. 삼라만상 각자 자신의 길을 갈 뿐이다. 그 ‘자신의 길을 갈 뿐’으로 삼라만상은 서로 도움을 주며 살아가게 된다. 나는 그 아이에게 말했다. ‘사람도 각자 자신의 길을 가야 해. 자신의 길을 꿋꿋이 갈 수 있어야 해. 그러면 예수가 얘기하듯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남을 도와주게 돼. 이때 우리는 진정으로 남을 도와줄 수 있게 돼.’ ‘다친 사람은 도와 줘야 해!’라는 도덕을 갖고 살아가게 되면 마음 안에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다친 사람을 외면하며 살아가는가? 그때마다 깊은 마음속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생긴다. 그 그림자는 켜켜이 쌓이며 스스로 힘을 갖게 된다. ‘악마’가 된다. 자신은 하지 못하면서 다친 사람을 도와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같이 화를 내게 된다. 위선자, 이중인격자가 되어 버린다. 오래 전 TV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란 주제로 열강을 하는 마이클 샌델을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는 주로 특별한 상황 속에서 어떤 게 정의인가 하는 논의를 했다. 황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그런 특별한 상황을 몇 번이나 맞닥뜨리게 될까? 그가 정말 정의를 얘기하고 싶으면 미국이라는 제국(帝國)이 저지른 과거의 무수히 많은 불의들이 논의되어야 하고 지금 이 순간에 미국이 다른 나라에 대해 저지르는 불의들과 미국 내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불의들이 논의되어야 하지 않나? 눈에 뻔히 보이는 불의들은 외면하고 어떤 특별한 상황을 상정하고서 정의를 얘기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 논의를 자꾸 얘기하다보면 현존하는 불의들이 묻혀버리게 된다. 그래서 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많이 팔렸으면서도 정작 우리 사회의 정의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도덕, 정의’라는 너무나 좋은 말들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실제를 가려버리는 것이다. 정의, 의로움은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아닌가? 맹자가 말하듯 우리 마음 깊은 속에는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아는 본성이 있으니까. 그래서 철학자 니체는 ‘도덕은 비도덕적이다. 도덕 자체가 부도덕의 한 형식’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공정- 책임의 공포, 정의- 복수의 본능’인 것이다. 센델은 자신이 왜 그렇게 정의를 부르짖는지,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정의에 열광하는지를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진짜 자신들의 욕망을. 우리는 장 루슬로 시인처럼 ‘세월의 강물’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도우려 들지 말아라/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삼라만상을 보며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나’도 세월의 강물이 되어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256 사람과 사람 사이/권서각 file
편집자
564 2018-10-25
사람과 사람 사이 왜 사느냐는 물음에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한다. 행복하기를 바라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 당신은 행복한가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누구나 바라는 그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시인 칼 붓세(Carl Busse)는 산 너머 저쪽에 행복이 있다기에 사람들을 따라 갔다가 눈물만 머금고 돌아왔다는 시를 쓴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찾아 머나먼 인생길을 헤매고 있지만 행복을 찾았다는 이는 흔하지 않다. 어떤 이는 인생은 괴로움의 바다이니까 세상에 행복은 없다고 말한다. 지금 행복하다고 말하는 이는 없어도 지난날에는 행복했었노라고 말하는 이는 있으니 행복은 현재에 있지 아니하고 과거에 있다고 한다. 어떤 이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행복하지 않을까 라고 한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높은 점수를 얻어 원하는 학교에 합격하면 행복할까. 부지런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어 돈을 물 쓰듯 하면 행복할까. 자신의 능력을 계발해서 만인이 우러르는 높은 자리에 앉으면 행복할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연인이 되어 사랑을 나누면 행복할까. 세칭 일류학교를 나온 영재라 불리는 사람, 돈을 물 쓰듯 하는 부자, 지위가 높아 누구나 우러르는 자리에 오른 사람, 미인을 얻어 그와 결혼한 사람도 지금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바라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누구나 기뻐한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느끼는 기쁨이지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쁨은 소멸되고 만다.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루어도 행복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 헤매는 그 행복이라는 놈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원하는 것을 이루면 행복해야 마땅하리라고 여겨지지만 원하는 것을 이루어도 행복하지 않은 것은 무슨 연유일까. 오래 전에 봉화 구천에 사시던 전우익 선생이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라는 책을 써서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은 적이 있다. 책의 내용은 대략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것이었다. 바라는 것을 이루었다고 반드시 행복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은 그 성취가 혼자만의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구도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선이 나와 당신 사이뿐만 아니라 나와 여러 사람 사이에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어진 선이 많을수록, 그 선이 따뜻할수록 행복한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행복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어디쯤 있는 것은 아닐까.  
255 현명함을 높이 치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투지 않는다 不尙賢 使民不爭 (노자) /고석근 file
편집자
669 2018-10-15
현명함을 높이 치지 않으면, 사람들이 다투지 않는다 不尙賢 使民不爭 (노자) 행복 김종삼 오늘은 용돈이 든든하다 낡은 신발이나마 닦아 신자 헌 옷이나 다려 입자 털어 입자 산책을 하자 북한산성행 버스를 타보자 안양행도 타보자 나는 행복해도 혼자가 더 행복하다 이 세상이 고맙다 예쁘다 긴 능선 너머 중첩된 저 산더미 산더미 너머 끝없이 펼쳐지는 멘델스존의 로렐라이 아베마리아의 아름다운 선율처럼. 한 할머니가 푸념을 한다. 텃밭을 빌려 무더위를 무릅쓰고 잘 가꿔 놨는데, 어느 날 주인이 자금 마음대로 씨앗을 뿌려 놓았더란다. 항의했더니 ‘그렇게 되었어요.’ 한마디 하고 말더란다. 주인은 그렇게 할머니의 땅을 빼앗아버렸다. 할머니는 이제 어디 가서 항의해야 하나? 바로잡아주는 기관이 있나? 한 사람의 억울함이 쉽게 묻혀버리는 우리 사회가 너무나 무섭다(우리는 안다 크건 작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걸). 어쩌다 우리들 마음이 이리도 뻔뻔하게 되었을까? 뻔뻔함이 하나의 ‘삶의 양식’이 되어버렸을까? 철학자 칸트를 생각해 보았다. 그가 살았던 18세기 서양은 과학 혁명, 산업 혁명, 정치 혁명을 겪으며 인간은 중세의 신(神)을 벗어나 세상의 중심이 되는 시기였다. 인간이 이성(理性)으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오만감이 극에 달해 가던 시기였다. 칸트는 고민했다. 지식으로 무장한 인간이 어떻게 윤리적으로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안다. 인간은 지식을 많이 쌓으면 쌓을수록 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을. 우리 학교교육은 누구나 얘기하듯 ‘지식위주의 교육’이다. 지식도 대개 단편적인 지식들이다. 이런 지식으로 대학을 가고 직장을 구하고 결혼생활을 하는 우리들 마음은 어떻게 될까? 머리에 잔뜩 들어있는 지식들을 우리는 어떻게 쓸까? 드디어 우리는 남의 땅을 빼앗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우리는 자신들의 가족만 챙긴다. 가족은 ‘나’니까. 그래서 자식이 아무리 잘못해도 덮어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사랑은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자식들이 크면 이번엔 부모를 등쳐먹는다. ‘나’만 위하다가 우리는 ‘나’마저도 잃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이제 가족도 ‘나’가 아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각자 외로이 살길을 찾아 나선다. 칸트는 지식으로 세상의 중심에 선 인간이 윤리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하나의 대안으로 ‘미(美)적인 인간’을 생각했다. 우리의 학교교육에서도 예술 교육이 철저히 이루어졌다면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었을까? 어린이 집에 다니는 유아들이 주로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다룬다면? 초중고에서도 주로 예술 교육을 한다면? 그런 학생들은 어른이 되어 어떤 삶을 살아갈까? 김종삼 시인의 ‘행복’은 너무나 소박하다. ‘오늘은 용돈이 든든하다/낡은 신발이나마 닦아 신자/헌 옷이나 다려 입자 털어 입자/산책을 하자/북한산성행 버스를 타보자/안양행도 타보자’ 그는 아이처럼 설렌다. ‘이 세상이 고맙다 예쁘다//긴 능선 너머/중첩된 저 산더미 산더미 너머/끝없이 펼쳐지는/멘델스존의 로렐라이 아베마리아의/아름다운 선율처럼.’ 그는 미(美)에 기대어 한 세상을 ‘인간답게’ 살았다. 하지만 그는 한평생 고독하게 살아야 했다. 소위 선진국에서는 어릴 적부터 예술 교육을 많이 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나라 사람들은 우리보다는 훨씬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도 깊은 내면에서는 고독과 권태에 시달린다고 한다. 또 국가 차원에서는 다른 국가와 여러 차원의 전쟁을 하고 있다. 전체 인류의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지금은 전국시대(戰國時代)다. 인간의 마음은 황폐화되었고, 지구도 아사직전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인간이 행복했다는 ‘부족시대’가 그립다. 그 시대는 ‘지식 많은 인간을 높이 치지 않아 사람들이 다투지 않았다’고 한다.  
254 무엇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권서각 file
편집자
899 2018-09-23
무엇을 먹거나 먹지 않거나 동물보호단체에서 개고기 식용을 금지해 달라고 시위하는 장면이 보도되는 것을 보았다. 어떤 단체에서는 닭을 먹는 것도 동물학대라고 시위를 한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게도 살아있는 것을 찜통에 바로 넣으면 안 된다고 한다. 전기 충격기로 기절시켜서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물학대를 하지 말라고 해서 그리한단다. 그렇게 하면 게가 고맙다고 여길까? 이 이야기를 들으며 꼼수라는 단어가 떠올라서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동물학대라는 말을 들먹이려면 고기나 생선을 먹지 않아야 한다. 동물을 죽이지 않고 고기나 생선을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 이러다가는 식물 애호가가 나타날까 두렵다. 식물도 생명이 있다. 쌀알마다 귀한 생명을 품고 있는데 그것을 솥에 넣어 불을 지펴 익히는 것은 식물학대가 아닌가?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동물이나 식물을 재료로 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어야 한다. 생명이 없는 돌이나 흙을 먹고 살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은 먹어도 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은 개가 인간의 반려동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이 기르는 동물 치고 반려동물이 아닌 것이 어디 있는가? 유목민들의 양이나 우리의 소는 이름까지 붙여서 정을 주고 기른다. 우리의 소는 사람을 위해 평생 힘든 일을 하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소를 잡아서 불고기로 육회로 뼈까지 고아서 곰탕으로 먹는다. 사람이 무엇을 먹거나 먹지 않는 것은 그 집단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서 형성된 문화다. 이슬람문화권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힌두교 문화권의 사람들은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개를 집안에서 기르는 유럽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지구상에 그리 많지 않기는 하다. 중국의 한족, 베트남 민족, 우리민족 정도가 개고기를 먹는다. 중국도 한족은 개고기를 먹지만 만주족은 먹지 않는다. 만주족이 개고기를 먹지 않기 때문에 봉천(심양)에서는 쉽게 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봉천에는 한때 개장사가 많았다. ‘만주 봉천 개장사 할 때’라는 말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 동물 죽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백정의 손을 빌려 동물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백정(白丁)이라는 말은 세금을 면제받는 계급이라는 표면적으로 긍정적이지만 실은 사람 대접 받지 못하는 계급이다. 이 또한 꼼수다. 모든 생명체는 죽으면 음식으로 바뀐다. 사람들은 소를 먹는 것이 아니라 불고기라는 음식을 먹는다. 개를 먹는 것이 아니라 개장국이이라는 음식을 먹는다. 조장문화가 있는 지역에서는 사람도 죽으면 독수리에게 제 몸을 내어준다. 독수리에게 왜 사람을 먹느냐고 나무라지 않는다. 그것이 먹이사슬로 이루어진 자연의 질서이다. 무엇을 먹거나 먹지 않는 것은 개인이나 집단의 선택이다. 이슬람문화권 사람들은 우리가 삼겹살 먹는 것을 나무라지 않는다. 그냥 자기들만 먹지 않을 뿐이다. 자기가 먹지 않는 것을 먹는다고 그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게 사람에 대한 예의다. 111년 만에 처음 겪는 더위라 한다. 날씨도 더운데 허준 선생 지으신 동의보감에도 나오는 개장국(보신탕이 아니라 개장국이 원래 이름이다) 먹는다고 시비 걸지 않았으면 한다.  
253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다 (옥타비오 파스)/고석근 file
편집자
782 2018-09-15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다 (옥타비오 파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초경(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란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세,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모 정치인이 ‘이부망천’이라는 말을 했다. ‘이혼하면 부천에 살고, 망하면 인천에 산다’는 뜻이란다. 한순간에 부천에 사는 나는 ‘이부망천인(人)’이 되어버렸다. 아내의 고향이라 수 십 년을 부천에 살게 되었는데, 내 아이들은 부천이 고향이 되었는데, 아내의 모교에 강의를 갈 때는 처갓집에 가듯 즐거웠는데, 졸지에 이부망천이라는 괴물이 온 하늘을 검붉게 물들여 놓았다. 그래서 부천, 인천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분노했을 것이다. 다 자신들만의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데, ‘국민의 머슴’이라는 사람이 한순간에 이혼하고 망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정치인은 어디에 살고 있을까? 아마 마음속으로는 ‘강남’ ‘성북동’ ‘평창동’ ‘청담동’ 등 부자동네에 살고 있을 것이다. 지역구 때문에 몸은 비록 이부망천 비슷한 곳에 살고 있더라도. 소위 천민자본주의의 나라, 우리나라는 ‘성적’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모든 학생들을 한 줄로 세웠듯이 모든 국민들을 ‘경제, 돈’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한 줄로 세워 놓았다. 그 정치인은 지극히 ‘현실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아마 그는 ‘이부망천인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겉으로는 탈당하는 등 사죄하는 척했지만. ‘민중은 개돼지’라고 한 교육부의 한 간부도 ‘나의 말에 무슨 문제가 있어?’ 하고 속으로 외쳤을 것이다. 그들은 국민을 한 줄로 세워놓고는 맨 끝 줄에 속하는 사람들은 아예 개돼지만도 못한 ‘호모 사케르(벌거벗은 생명)’로 만들어 놓는다. 호모 사케르는 사회적 지위의 상징인 옷이 없다. 살아 있되 이 세상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다. 우리는 맨 끝 줄에 속한 ‘불가촉천민들’을 보고는 항상 공포감을 갖고 살아간다. 언제 저렇게 될지 몰라! 오로지 살아남아야 해! 생존이 삶의 목표가 된다. 우리는 삶을 누리는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간다. 이런 세상에서 삶을 누리려면 어떻게 살아야할까? 아예 줄서기에서 빠져 나오기! 아감벤이 얘기하는 ‘자발적인 호모 사케르 되기’가 아닐까?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천하를 주유하는 김삿갓. 높은 벼슬자리를 제사상에 쓰는 재물로 여긴 장자. 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스스로 호모 사케르가 된 멋있는 인간들은 많다. 아마 최고의 호모 사케르는 예수가 아닐까? 총독 빌라도는 예수에게 묻는다. ‘사람들이 당신을 왕이라고 하는데, 당신은 정말 왕이냐?’ 예수가 대답한다. ‘당신이 왕이라고 했다.’ 빌라도가 재차 묻는다. ‘그럼 당신의 왕국은 어디 있느냐?’ 예수가 대답한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왕국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의 어떤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인간으로 한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동학의 주문 맨 처음 글자는 시천주(侍天主)이다. 천주,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다. 가슴에 하느님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최고의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대역 죄인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갈지라도. 황지우 시인은 폐인이 되어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하고 울부짖는다. ‘초경(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란의 성금란을/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그는 집에서도 쉴 곳을 찾지 못한다. 그래서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인간으로 태어나 한 생(生)을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굴욕적인 일인가! 그래서 그는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생(生)이 버겁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예수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다. 그의 왕국엔 호모 사케르가 없다. 그래서 모든 양들이 평화로이 한 생을 누릴 수 있다. 이 세상은 일부러 한 마리 양에게 길을 잃게 한다. 모든 양들을 공포에 떨게 한다. ‘아, 언제 나도 길을 잃어버릴지 몰라!’ 한 평생 공포에 떨고 사느니 차라리 길을 잃어버릴 거야! 이 세상의 길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발길이 길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252 구지가가 뭐길래?/권서각 file
편집자
826 2018-08-27
구지가가 뭐길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가락국 건국신화가 실려 있다. 가락국을 다스리던 아홉 명의 부족장들이 나라에 임금이 없음을 근심하다가 구지봉에 올라 하늘에 빌면서 노래를 불렀다.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만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그러자 하늘에서 붉은 끈이 내려오고 그 끝에 보자기에 싸인 여섯 개의 알이 있었다, 알 가운데 하나에서 태어난 이가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이다. 이 노래 구지가(龜旨歌)에서 거북의 머리는 우두머리를 뜻한다. 아홉 족장들이 우두머리를 내려달라고 하늘에 기원하니 하늘이 우두머리 곧, 왕을 내려 보냈다는 이야기다. 구지가는 가락국의 건국설화와 같이 전해지는 고대가요로 분류된다. 문자가 없던 시대의 노래이기에 공무도하가, 황조가와 함께 우리 국문학에서는 매우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문학교과서에서 반드시 다루고 있다. 대개의 시가 그러하듯이 시는 그 해석이 다양한 것이 숙명이다. 비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구지가에서 거북의 머리는 ‘우두머리’ 즉, 왕을 상징하기도 하고 다산의 상징, 생명의 상징, 남근의 상징 등으로 여러 학자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더 풍성한 의미가 제시되기도 할 것이다. 그것이 시가 가지는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전 구지가를 가르치던 국어 교사가 거북의 머리는 남근상징이라는 설을 소개하자 학생들은 성희롱이라 하고 학교는 교사를 수업에서 배제했다고 한다. 그 교사는 자살을 생각했다고 SNS에 글을 쓰기도 했다. 구지가의 본질은 사라지고 성희롱이라는 것만 불거져 매스컴을 장식하는 우리사회의 모습을 모며 우리사회의 우려스러운 특성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들이 성희롱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지금 우리사회는 성희롱이 가장 뜨거운 이슈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수한 것을 많이 가진 나라다. 그와 동시에 부정적인 것도 세계적인 것이 한둘이 아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 보았다. 담배 피는 사람을 가장 멸시하는 나라 1위가 대한민국이다. 미투 운동도 세계 1위다. 지하철에서 노출이 심한 여성이 타면 시선 두기가 거북하다. 미투에 걸릴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음식 보신탕도 사라질 위기다. 개를 식용으로 여기던 우리문화는 개를 부모보다 더 위하는 문화로 바뀌었다. 이렇게 문화가 극에서 극으로 바뀐 나라는 세계에 유래가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것을 우리문화의 극단주의라고 여긴다. 아들선호사상 1위 국가에서 딸 선호로 돌아선 것도 극단적인 변화다. 극단주의는 문화의 뿌리를 흔들 수 있는 위험이 동반된다.  
251 『소모일기와』『토비대략』으로 본 상주동학농민혁명/박찬선 file
편집자
813 2018-08-19
『소모일기와』『토비대략』으로 본 상주동학농민혁명 박찬선 1. 머리말 상주동학농민혁명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주 적다. 민보군(民堡軍)과 연관된 소모사 정의묵(鄭宜黙)의 『소모일기召募日記』와 유생(儒生)의 기록으로 유격장(遊擊將) 김석중(金奭中)의 『토비대략討匪大略』이 있다. 다스린 쪽과 다스림을 받은 쪽의 기록이 공존한다면 이상적이지만 한 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고정된 시각에서 불 수 밖에 없다. ‘대체로 상주는 나라의 한쪽 구석에 있으며 조령의 남쪽에 위치한다. 이곳은 낙동강의 상류이고 영남의 요충지이며, 경계가 양호(兩湖)와 접하고 서울로 가는 길과 통한다. 그러므로 조정이 특별히 하나의 소모영을 설치하여 방어하려는 것이다.’(1894, 12, 5 소모일기)에 나타나있듯이 당시 상주의 중요성이 잘 드러나 있다. “저물녘에 우산에 도착하니 노모는 문에 기대어 서 계시고 어린 아이들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위로가 되고 기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술 한 항아리와 곶감 1접을 내어서 데리고 온 병졸들을 먹여 추위를 녹이도록 하였다.”(‘94. 12. 8 소모일기) 기다림으로 피어나는 따뜻한 가족 사랑과 동행한 병졸에 대한 자상한 배려가 담겨있다. 그런가하면 “소모사가 적의 세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듣고 고립된 군사가 원조도 없는 것을 크게 염려하여 마침내 몸을 일으켜 출전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차라리 김 모와 함께 죽을지언정 여기 앉아서 위태한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라고 하였다”(1894. 12. 19 토비대략)에서 보듯이 위태롭고 절박한 때에 신뢰와 결의를 보여준 휴머니티의 사실적 기록이다. 동시대에 소모사와 유격장이라는 직무를 맡은 동지적 관계에서 공동의 적을 물리치려는 충의의 정신이 녹아있다. 일기의 시작과 마침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동일 사건의 기록에 약간의 시차는 있으나 같은 시기,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만큼 상호 보완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소모사와 유격장의 이러한 작전과 활동, 생각과 고뇌가 담긴 『소모일기』와 『토비대략』을 중심으로 상주동학농민혁명의 면모를 살펴볼까 한다. 두 자료에서 되도록이면 상주와 연관된 것을 몇 가지 주제별로 중요부분을 발췌 요약코자 했다. 따라서 이 글은 논문이라기보다는 독후감의 성격을 지녔다고 하겠다. 자료의 한계로 전 면모를 파악하는 데는 제한적일 터이나 사실의 기록에 근거한 만큼 상주를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파악하는 장점도 있겠다. 2.소모일기(召募日記) 『소모일기』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경상도 상주에서 소모사로 활동했던 정의묵이 남긴 일기이다. 1894년 10월 17일부터 1895년 1월 27일 소모사로 임명한다는 명령을 받고 말을 타고 떠난 날부터 군대를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100일 동안 그 날 그 날 일어난 사건의 경과와 소회를 기록했다. 특히 요점만을 간추려 기록하는 실무적 사실성을 보였다.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에 직면한 조정에서는 각 지방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기 위해 민보군을 결성하였다. 민보군의 지휘자에게 소모관이란 직함을 부여해서 그들의 활동을 뒷받침했다. 1894년 9월 29일 조정에서는 삼남의 요지에 각각 2인씩 소모사를 임명했다. 여기에 임명된 소모사는 모두 현직 지방관이었으나 상주 소모사인 정의묵은 상주의 실정을 잘 아는 사람이다. 여기에는 읍성을 빼앗겼던 상주의 정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상주지역의 명문대가에서 소모사를 선임함으로써 보수세력의 결속을 쉽게 다졌다. 정의묵은 『소모일기』를 통해 상주소모영의 설치과정, 상주면리지역의 민보군 조직, 낙동의 일본병참부와의 관계, 호남과 호서 농민군의 동정, 상주지방 방위망의 구축, 동학농민군의 처리, 소모사로서의 소회 등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소모일기』는 가장 치열 했던 갑오년의 상주 소모영의 활동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이를 바탕으로 한 체계적인 논문으로·는 申榮祐의 「1894년 嶺南 尙州의 農民軍과 召募營」이 있다.1) 지은이 정의묵(1847-1906)은 상주 巨族大家의 일원인 晉陽 鄭氏 21세 종손으로 상주시 외서면 우산에서 태어났다. 자 맹제(孟齊), 호 긍제(肯齊), 우복 정경세의 주손이며 윤우(允愚)의 손자로 가학의 정훈(庭訓)을 받아 경전에 정통하였다. 1879년(고종 16년) 기묘년 식년시(式年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였고 1885년(고종 22년) 을유년 증광시(增廣試) 병과 에 합격했다. 홍문관 교리(校理), 의금부 도사(都事), 통정대부에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1894년 갑오년농민혁명 때 영남소모사로 활약하였으며 1898년 안동군수로 부임하여 몇 개월 후 사직하고 향리로 돌아와서 세속과 인연을 끊고 시부(詩賦)로 자오(自誤)하면서 후진교육에 힘썼다. 유고가 전한다. 3. 토비대략(討匪大略) 김석중(金奭中)이 남긴 『토비대략』은 1894년 경북 상주와 충청도 보은 등지를 중심으로 전개된 보수양반 측의 동학농민군 진압 관련 기록이다. 1책 62면의 진중일기(陣中日記)이다. 1893년 4월 보은 장내와 금구 원평에서 열린 동학의 신원운동부터 기록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주와 청산 및 보은 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던 1894년 11월-12월의 사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해 봄부터 부분적으로 기포했던 상주와 예천 등 경상도 북부지역의 동학교도들은 여름에 대대적으로 기포했고 9월 하순에는 상주를 공격해서 점령하였다. 이에 대항해서 일본군이 진압에 나서자 상주의 보수양반들이 소모영을 설치하였다. 김석중은 11월 소모영의 유격장을 맡아 민보군을 이끌고 진압에 나섰고 그 활동 기록이 『토비대략』이다. 군중(軍中)에 내린 명령을 비롯해서 효유문, 이동 경과, 전투상황, 전과, 체포, 처벌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를 통해서 상주의 동학의 실상과 동학지도자와 동학근거지를 파악할 수 있다. 김석중은 11월 중순부터 활발히 진압작전에 나서서 상주의 북쪽으로 동학농민군을 추격해서 접주 등을 포살했다. 그리고 동학교도인 주민들의 동요와 기포를 막았다. 상주 화서와 화령을 넘어 충청도 보은군 장내로 들어갔고 청산군에서는 최시형을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영동군 용산에서 벌어진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전투에도 참가하였다. 또한 손병희가 이끌던 동학농민군이 전라도에서 북상해서 후퇴해 있던 보은군 종곡을 관군 및 일본군과 연합해서 기습하여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용산과 종곡 전투를 생생하게 기술하고 승리에 도취한 감상을 적었다. 끝부분에는 아들에게 서양서적을 가르치라는 일본군 장교와 나눈 필담과 서신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 『토비대략』은 1893년 4월과 1894년 4월, 5월, 6월, 9월, 10월, 11월의 월별 기록을 제외하면 1984년 11월 13일부터 시작한다. “이것은 비류를 토벌할 때 진중에서 기록한 것이다. 풍찬노숙하면서 초고를 잡거나 기록하였고 말 타고 채찍을 가하며 대략을 썼으니 귀가한 후 혼자 살피려고 준비한 것이지 여러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시 내용을 더하지 않으며 단지 그 사실을 보존할 뿐이다.” 이것이 1894년 2월 마지막 기록이다. 김석중(金奭中): 동학교인들을 진압한 상주출신. 상주목사에 의해 그의 전공을 감영과 의정부에 보고했으나 갑오군공록(甲午軍功錄)에는 누락되어 있다. 4. 동학농민혁명의 실상 1)동학, 동학혁명의 전개 동적(東賊) 40,000-50,000 명이 호서(湖西) 보은 장내(帳內)에 모이고, 한 무리는 호남 금구(金溝) 원평(院平)에 모여, 겉으로는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내세우면서 깃발을 세우고 성을 쌓아 몰래 반역을 도모하였다. 임금이 양호도어사(兩湖都御史) 어윤중(魚允中)에게 명하여 선유(宣諭)하여 해산시키도록 명령하였다. 최시형(崔時亨)이라는 자가 동학을 일으켜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며 부수(符水 부적과 청수)로 병을 치료하고 검무(劍舞)로 신을 내리게 한다는 말로 서울과 지방을 묶고 8도에 만연하게 하였다. 또 대접주(大接主) 해당 접주라는 명목을 세웠는데 대접주는 1만-7만 명을 소접주는 2천-3천명을 거느렸다.(1893. 4 癸巳 사월 『토비대략』. 이하 토비로 표기함) 그들의 술법은 부적과 주문으로 신을 내려오게 한다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었으며, 그들의 도는 하늘을 공경하고 덕을 베푼다고 하면서 백성들을 속이는 것이었다. 또 병을 치료하고 난리를 피하게 한다는 등의 말로 어리석은 민중들을 현혹시켰으며 결국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한다는 말로 반역의 마음을 드러내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품은 지는 오래되었고 그 뿌리도 매우 단단하였다. 저들이 기치를 세우고 군사들을 불러 모아 거리낌 없이 제멋대로 행동하게 되자 말류(末流)의 폐단이 드러나서 부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빼앗으며 시신을 욕보이고 사대부를 먼저 죽이는 데 이르렀다. 저들의 장기는 정당한 조세를 납부하지 않고 공공연히 패역(悖逆)을 자행하며 무기를 약탈하고 성을 함락시키고 임금이 임명한 관리들을 해치고 임금의 군대에 항거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회유하여 흩어지게 하여도 따르지 않고 그들을 위협하여 복종하게 하여도 잘못을 고치지 않아서 저들의 만행은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소모일기』 서두. 이하 소모로 표기함) 동학을 동적(東賊)으로 규정하고, 척왜척양을 내세워서 부적과 주문과 청수로 민중을 미혹하게 했으며, 반역을 꾀했다고 했다. 기울여져가는 말류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폐단과 패역을 들었다. 반역이기에 선유(宣諭)하여 해산을 명령한 것이다. 수운선생 「포덕문」에 나오는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본도에서 단지 척왜척양 만을 거론했다. 한울님이 내려주는 영부(靈符, 궁을형으로 되어 있고 태극부 궁을부라고도 함)인 부적의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서 재앙과 질병을 물리친다고 현혹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지성으로 위하는 사람에게 효력이 있다는 부적의 주술적인 것에서 종교적인 것으로의 전이를 생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동학의 기본 개념인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의 강령주와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의 본주 열 석자의 주문과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도모한다는 것을 봉건의 굴레에서 벗어나 만민평등의 새 질서 확립으로 보지 않은 시각의 차이를 보여준다. 적이 상주에 들어가자 목사 윤태원(尹泰元)은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일본병사가 진격하여 쳐부수었다.…토적문(討賊文)2) 을 지어 각 사에 돌려 보여 기한에 맞춰 거의(擧義)하도록 하였다.(‘94. 9월 토비) 그런데 지금 국운이 험난하고 사설이 횡행하여 일종의 요괴무리들이 동학이라고 일컬으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서 유혹하고 악한 사람들에게 그 법을 전파한 지가 여러 해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 무리들이 불어나서 세력이 커지자 도처에서 추종자를 불러 모아 1,000명 혹은 10,000명씩 무리를 이루어 우리의 성읍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무기와 군량을 빼앗아갔으며, 우리의 사족(士族)을 때리고 우리의 백성들을 흩어지게 하였다. 그밖에 분수와 법률을 어기며 윤상(倫常)을 어지럽히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팔도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 거의 조용한 지역이 없었는데 호남과 호서가 가장 심하였다. 관부가 정사를 집행할 수가 없고 조정이 명령을 시행할 수가 없으며 백성들은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수가 없고 국가는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참으로 유사 이래 처음 발생한 대변란(大變亂)이다.(‘94. 10. 21. 소모) 비류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바로 접주(接主)들이 난을 피할 수 있다거나 군역을 면제해 준다거나, 병을 치료해 준다거나, 내세에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등의 말로 유혹하기 때문이다..(‘94. 10. 21. 소모) 아, 우리나라는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여 온 나라가 두루 잘 다스려졌다. 그러나 오백년 동안 태평한 시대가 오래되어 문무관료들은 안일에 젖어있고 백성들은 무기를 알지 못하고 장수들은 전쟁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요사스런 비도들은 호미와 가래를 잡은 무리들이나 부적을 갖고 주문을 외는 요괴들에 불과하였으나 이들이 고부 한 고을에서 창기하자 나라(海東) 전역에서 대란이 일어났다. 다행히도 우리 성상께서 발끈 노하시어 장수에게 정벌을 명하시니, 1년 안에 온 나라가 평정되었다.(1895, 1. 27. 소모) 동학을 ‘요괴 무리들’로 ‘요사스런 비도(匪徒)’ ‘비적(匪賊)’ ‘비류(匪類)’로 파악했으며 동학농민혁명을 유사 이래 처음 일어난 대변란으로 규정했다. 1894년 9월 22일(양 10월20일)상주 동학농민군은 봉기하여 상주읍성을 점령, 상주목 객관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민정 실시의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9월28일(10월 26일) 일본군의 공격으로 패퇴 했다. 이때 100 여명이 희생되었다. 상주읍성을 점령한 실상과 총제적으로 기강이 마비된 정황을 엿보게 한다. 아울러 태평 시대 안일만을 추구했던 관료사회의 타성을 지적했다. 동학의 동(東)이 지닌 광명과 생명의 빛, 자주와 민주의 주체성과 서세동점(西勢東漸)과 삼정문란(三政紊亂)의 대내외적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던 동학농민혁명의 동기와 수운의 시천주(侍天主), 해월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의암의 인내천(人乃天)의 인간존중의 종지와 사회적 종교적 변화에 대한 원인 규명을 살펴보게 한다. 이것은 계층적 신분사회의 양상을 드러낸 결과였다. 2) 소모사, 소모영의 업무와 감회 “…이에 갑오, 1894년 8월에 마침 소모사로 차하(差下)한다는 명령이 내려서 나는 10월 17일에 비로소 본군 상주에 도착하여 명령을 받았다”고 소모일기의 서두에 적었다. 이렇게 하여 소모사로서의 직무 수행이 시작되는데 첫 일기는 1894년 10월 17일부터 시작된다. 20일 벽유당(碧油堂)에 소모영을 설치하였다. 나는 재주가 없고 능력이 부족하여 경상우도라는 중요한 지역을 맡는 것이 적절하지 않으나 임금이 근심하는 것은 신하에게 치욕이 되니 어찌 분골쇄신하는 것을 꺼리겠는가? 다만 이번 변란이 불행히도 선산(先山)이 있는 고향 가까이에서 발생하였다. 대의(大義)는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것이니 개인적인 사정만 고려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출행하여 장차 병사를 소집하고 군량미를 모아서 저들의 뿌리를 제거하려고 한다.(‘94. 10. 21. 소모) 소모사 정의묵이 상주에 영(營)을 두고서 의병을 불러 모아 충성과 의리를 격려하였다. 정의묵은 충성스럽고 중후하며 의지가 굳어 평소 영남에서 명망이 있었다.(‘94. 10월 토비) 소모영(召募營) 유격장(遊擊將)의 직책으로 한 부대를 맡아 적도를 섬멸하기를 청하였다.(‘94. 11월 토비) 소모사가 별포(別砲) 20명을 가려 붙여주고 전령(傳令)1장과 환도(還刀) 1자루를 주어 영(領)․초장(哨將) 이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제어하게 하였다. 이들을 집합시켜 군례(軍禮)3) 를 강講하였다.(‘94. 11월 13일 토비) 정의묵이 소모사를 맡게 되는 과정과 김석중이 유격장을 맡는 과정이 나타나 있다. 소모사는 충성과 의리, 대의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향 상주에서 발생한 난을 뿌리를 뽑아버리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소모사 정의묵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도와달라고 청하자 김석중이 소모사를 만나고 ‘저는 차라리 적에게 달려가 죽을지어정 생령이 도탄에 빠지는 것은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고 하는 말을 듣고 유격장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유격장은 적도(賊徒) 섬멸의 기개를 보였다. 소모영의 규모를 알게 했다. ‘94. 10. 21. 이날 일기는 길게 이어졌다. “마음속의 생각을 드러내어 효유(曉諭)하고 아래에 자신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조목별로 기록한다.”4) 고 밝혔다. 경내 비류들에게 알리어 잘못을 깨닫고 귀화하여 살아서는 선량한 백성이 되고 죽어서는 정의로운 귀신이 되도록 하면 다행이라고 했다. 그리고 “충신(忠信)을 갑옷으로 삼고 예의(禮義)를 방패로 삼으며 민심을 성곽으로 삼아 끝까지 소탕한 뒤에야 그만 둘 것”이라고 했다. 향내(鄕內)의 회원들이 번갈아가며 방문하여 소모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으나 이러한 어려운 형국에 또 난리까지 겪게 되니 도무지 좋은 계책이 나오지 않아 매우 답답하였다.(‘94. 10. 23. 소모) 국가가 판탕(板蕩)5) 의 사이와 같이 어지러운 때에 군사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별도로 신칙하지도 않고 또 순상도 협력하지 않으며 군량도 없고 병사도 없이 맨손으로 적과 싸워야하니 당연히 몸과 마음을 다 바쳐야 하는 것이 도리이지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창원 수령의 숙소로 가서 서로 근심하고 탄식하며 또 서로 격려하고 돌아왔다. 저녁에 도사(都事) 이동근(李東根)과 초관(哨官) 노애산(盧愛山)이 내방하여 함께 소모의 일이 어려움을 이야기하였는데 탄식이 그치지 않았다.(‘94. 11. 18 대구. 소모) 본목(本牧)에 도착한 순영의 관문을 보니 집강소를 소모영에 소속시켜 지휘를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또 공문을 보니 과연 여러 고을을 나누어서 관장하도록 하였다. 상주, 함창, 문경, 의성, 용궁, 예천, 예안, 안동, 풍기, 봉화, 순흥, 영천, 청송, 진보, 영양,의 15개 고을은 상주소모사 정의묵이 관할하고…(‘94. 11. 26. 소모) 앞서 소모사로서 중임을 맡아 비도들을 척결하고 안정을 되찾는 소임을 다하기 위해 효유(알아듣게 일러줌)하고 실천해야 할 방도를 조목조목 밝혔다. 오가일통(五家一統) 6) 과 오인일오(五人一伍)로 편성하여 통제와 감시의 기능도 살렸다. 이런 방법으로 헌종 때 천주교인들의 색출을 한 것처럼 범죄자와 역도(逆徒)를 색출하고 이탈자를 방지했다. 이를 활용하여 비류(匪類)들을 귀화시켜 선량한 백성이 되게 하는 선무의 기능도 살렸다. 끝까지 소탕한 뒤에야 그만둘 것이라는 사명과 굳은 의지를 지녔지만 그러나 조정, 순상, 군량, 병사 등 주어진 여건이 열악하여 좋은 계책이 나오지 않고 뜻대로 할 수 없음을 한탄하였다. 그리고 상주소모영의 관장고을과 집강소를 소모영에 소속시킨다는 내용이다. 보은에서 본부로 보낸 공문에서 말하기를 “유격대가 경내에 들어와서 폐단을 일으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94. 12. 2 소모) 300년 동안 훈련을 받지 못한 병졸들과 갑작스럽게 모인 오합지졸들이어서 장수는 병사를 알지 못하고 병사는 전투를 알지 못한다. 총을 들고 군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의병을 일으킨 선비들도 한갓 인의(仁義)만 떠들어대고 있다.…지방에서 독서하는 선비들이 지금 조정의 명령 아래에서 의분을 떨치며 충성을 바치는 것이 가상하기는 하지만 병졸들을 통솔하는 것이 숨바꼭질을 하는 것과 같으며… 전쟁을 어린아이놀이로 생각하고 와언(訛言)을 책략으로 여기고 있다.…의병을 일으킨 것은 소모사가 조정의 명령을 받아 효유한 데서 말미암았으니 의병으로써 창의(倡義)를 공격하는 것이 어찌 말이 되겠는가? 크게 부끄러워하고 스스로 돌이켜 반성할 따름이다.(‘94. 12. 5 소모) 병사, 장수, 선비들이 의분을 품고 충성을 다하는 것이 가상한 일이나 의병으로서 지휘 통솔과 임무 수행의 어려움을 실토하고 있다. 이것은 시대상황의 격변에 따른 적응이 어렵고 훈련되지 않은 서투름에서 온 것이다. 여기에 유격대 주둔지역의 폐단과 의병으로서 창의를 공격하는 경우에는 소모사와 유격장이 엄한 군율(軍律)로 다스리겠음을 강조한 바 있다. 소모사는 비류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은 의병이 되어야 한다는 규정을 비롯하여 8개의 구체적 항목을 발표하여 시행하였고 유격장은 “의병은 지나가는 곳을 조금도 침범해서는 안 된다. 만약 남의 물건을 탐하는 자가 있으면 죄가 동적(東賊)과 같으니 모두 군율로 다스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94. 12. 16 토비)라고하였다. 그리고…“유격장 김석중은 백면서생으로 적의 창끝을 무릎 쓰고 지금까지 공로를 세운 점은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운 바입니다. 병사들을 데리고 적도들을 체포하고 양식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추호도 양민들이나 귀화한 자들을 괴롭히지 않았으니 그에게 감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으며 한 지역이 그 덕택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제가 비록 사리에 어두우나 결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 때문에 국가의 대사를 그르치지는 않습니다.”(‘94. 12. 13 소모) 이어서 “상주목사의 편지에 “옛날에 한신(韓信)과 팽월(彭越)7) 이 있었다면 지금은 모某, 김석중이라고 하겠다”라고 하는 말이 있어 내가 보고 탄식하기를 “사람을 장려할 때 너무 지나치게 하면 사람을 무너뜨림이 지나치게 심한 것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나중에 발생할 근심을 두려워한다”라고 하였다.“(‘94. 12. 16 토비) 유격대가 저지른 폐단과 병졸들의 전투에 대한 무지, 선비들의 현실 대응 능력의 부재가 부끄러움으로 오는데 이런 문제는 동학농민군의 ’12개조 기율‘8) 을 떠올리게 한다. 아침에 의병장 어른과 함께 객사에 출좌(出座)하여 별포(別砲) 200명과 관포(官砲) 100명 그리고 영관, 초장(哨將), 집사(執事), 전병(典兵), 장재(掌財), 서기, 종사리(從事吏) 21명을 청(廳) 아래로 불러서 월료미(月料米)를 나누어 주었는데 쌀은 도합 3,814되, 전(錢)은 1,334냥, 그리고 짚신은 300켤레였다.(‘94. 12. 1 소모) 순무영(巡撫營. 한성부에 설치)의 회제에 “군량미가 없으면 병사들을 모집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면서 부호들에게 곡식을 빌리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또 ‘담박(澹泊)하지 않으면 뜻을 밝힐 수가 없고, 영정(寧靜)하지 않으면 원대한 목표를 달성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오늘날 힘써야 할 말이다.”라고 하였다. …소모사의 책무는 오로지 의병을 불러 모으는 것이며 의병의 파임은 이른바 조방장과 좌우부장(左右部將) 및 유격장 등의 명색이 있으며 이 또한 선배들의 기존의 규례임은 임진년과 병자년 이래 영남의 여러 창의록(倡義錄)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순무영(巡撫營)의 회제에 ‘군량미가 없으면 병사들을 모집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병사가 없으면 어떻게 적도들을 막을 수 있습니까? 적도들이 물러나지 않고 쳐들어오면 관부와 민간에서 축적해둔 것들이 적도들을 위해 축적한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리석은 백성들도 이 도리를 알고 있는데 대원융(大元戎 도순무사)의 식견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는듯하니 매우 의혹스럽습니다.…과연 순무영의 말대로 하여 군량이 없으면 병사들을 모집하지 않는다면 소모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동학의 난 이후에 상주에는 집강소가 생겨났으니 이는 성 안팎의 인민과 이서(吏胥)들이 조직한 것입니다. 군사들은 부르지 않아도 저절로 모였습니다.(‘94. 12. 13 소모) 재물이 어찌 부족하지 않고, 백성들이 어찌 궁핍하지 않으며, 나라가 어찌 위태롭지 않겠는가? 나랏일을 걱정하며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못 이루었다. 비류들은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며 이는 본디 천벌이다. 그러나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어 고향에 머물러 있는 자들은 군수물자를 수송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고 전쟁터에 나간 자들은 전투를 해야 하는 괴로움이 있으니 더욱 걱정이 되고 답답하였다. (‘94. 12. 14 소모) 소모사로서 순무영의 회제에 군량미와 병사의 상관에 대한 예리한 비판과 반론은 소모사의 탁견임을 알겠다. 자발적 자율적 참여에 의한 집강소의 결성은 지역 주민과 이서들의 의식이 깨어있음을 보여준다. 있어도 늘 부족한 것이 재물일진데 백성들의 궁핍을 안타까워하고 나아가 전란 속에 수송과 전투에 나가야하는 괴로움과 나랏일을 걱정하는 소모사의 심회가 아리게 다가온다. 그런 가운데에도 월료미와 전(돈)과 짚신을 지급했다는 것은 사기진작과 목숨을 내건 충정에 보답하는 특단의 조치로 보여 진다. 내가 헤아려보니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까닭이 다섯입니다. 우리는 도리에 따르고 저들은 거역한 것이 첫 번째요, 그들이 생각지 않았을 때 나가는 것이 두 번째요, 날씨를 보니 서북풍이 불어 기쁨이 있을 조짐이니 세 번째요, 양쪽에 달무리가 약간 검은 것은 적이 패망할 조짐이니 네 번째요, 도참설에 이르기를 ‘속리산에 흰옷을 입은 적이 있으면 마고성(麻姑城) 아래 땅이 피로 가득 찬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도참설은 믿을 것이 못되지만 이치로 미루어보아도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공들이 우리나라를 위해 힘을 내었으니 감사할 길이 없습니다.(‘94. 12. 17 토비) 선무사 이중하가 내무협판(內務協辦)으로 소환되어 한양으로 가다가 지나는 길에 본영을 방문하였다. 이때 그에게 소모의 전말에 대하여 대충 설명을 하였다. 그는 서울로 올라간 뒤에 응교사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서 김유격장의 북곡(北谷 보은 종곡(鐘谷)의 오기. 마을 사람들은 보통 북실이라 부름)의 승리는 그 공적이 과오를 덮기에 충분하다고 말하였다.(‘94. 12. 18 소모) 보은 수령 이규백이 청주에서 돌아와 소 1마리를 끌고 승리한 병사들을 위로하기를 청하며 말마다 치사하기를 “공의 힘을 입어 근처 지역의 백성이 집안을 보전하고 죽은데서 다시 살아났으니 공의 은혜를 논하면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습니다. 하물며 극악한 적을 크게 쳐부수어 삼남이 평안해졌으니 공의 공은 비록 역사에 실리더라도 고인에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94. 12. 18 토비) 북정에 당도하자 본 목사 이만윤이 나와 맞이하였고, 토성에 이르자 진장(鎭將) 유인형이 나와 맞이하였다. 마침내 진남루(鎭南樓)에 오르니 소모사 장락(張樂)이 군사들을 위로하였으며 본군의 부모는 일어나 춤추며 말하기를 “즐겁고 통쾌하다. 통쾌하고 즐겁다. … 너는 숟가락을 팔고 나는 솥을 팔아 집집마다 비를 세워 공의 장수를 빌자”라고 하였다.(‘94. 12. 19 토비) 군대를 돌려 북정(北亭)에 이르자 성주(城主)가 육방(六房)과 삼현(三絃)을 데리고 와서 유격대를 보고는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한 뒤에 출발하였다. 악기와 기치가 전후에서 호위하였으며 사이사이에 마을의 장정들이 창을 들고 북을 치며 춤을 추었으니 마치 태평성대와 같았다. 토성(土城)에 도착하자 진장(鎭將)이 일행을 인도하여 남문을 통해 들어갔다. 태평루(太平樓)에서 잔치를 베풀고 군사들에게 따뜻한 술을 내어주었으며 군사들은 모두 기뻐서 춤을 추었다.(‘94. 12. 20 소모) 객사(客舍)에서 군사와 백성들을 대대적으로 소집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안동, 용궁, 함창의 군대를 돌려보내었으며 각각 노문을 지급하였다.(‘94.12. 21 소모) 보은 종곡에서 동학농민군을 궤멸시킴으로써 사실상 소모사와 유격장의 임무는 끝이 난 셈이다. 왜 보은인가? 탄압받고 억눌리고 무시당했던 수 만 명의 백성들이 살기 좋은 새 세상을 열기 위해 모인 곳이 보은 장내리였다. 이름 하여 ‘보은취회’ 이른바 민회(民會)9) 가 열린 곳. 보은은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요,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적 요충지이다. 그래서인지 해월은 1887년 보은에 법소(法所) 곧 동학교단의 중앙본부를 설치했다. 여기서는 동학의 핵심간부들 가운데 육임(六任-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의 직책을 맡은 사람들이 수련을 했다. 이러한 내력을 가진 동학의 성지에서 혹한 속에 궁지에 몰렸던 2,600여 명의 많은 동학군이 살육 당했다. 선무사와 수령의 말은 유격장의 전공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유격장 김석중의 판단대로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을 이기고 돌아온 개선장군의 환대와 잔치가 태평성대를 구가하듯 성안 태평루와 객사에서 있었다. 3) 동학농민군의 전말 전에 집강소에서 체포한 비도 9명을 장날에 태평루(太平樓)에 형장을 설치하여 엄하게 형을 가하여 위엄을 보이고 다시 진심으로 귀화하라는 뜻을 원근에 효유하였다.(‘94. 10. 22, 소모) 집강소의 병사 800여 명을 데리고 북장대(北將臺)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죄인 5명의 죄를 다스렸다.(‘94. 10. 23. 소모) 죄인 김경준(金景俊)을 잡아와서 엄하게 곤장을 친 뒤에 칼을 씌워 가두었다.(‘94. 10.29. 소모) 임곡(壬谷)의 동학의 괴수 강선보(姜善甫)와 가리(佳里)의 강홍이(姜弘伊) 그리고 영수(靈水)의 김경준은 거접(巨接)으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그래서 강선보는 태평루 앞에서 효수하였고, 강홍이와 김경준 2놈은 남사정(南射亭) 아래에서 총살하였다.…상사 강춘희의 편지를 받고, 청산, 황간, 영동, 보은 등지에서 경군과 일본군들이 소탕작전을 벌인 덕분에 저들 무리들 중에 죽은 자가 600-700명에 달하였으며…·(‘94. 11 .7 소모) 적의 괴수인 접주 남진갑(南震甲), 이화춘李化春), 접사(接司) 구팔선(具八善), 김군중(金軍仲) 및 상주에서 군기를 약탈한 적 유학언(劉學彦) 등을 중모 장터에서 총살하였다. 방문(榜文)을 내어 백성들을 안심시켰다.(‘94. 11. 14 토비) 죄인 신두문을 잡아들여 무덤을 파헤치고 사람을 헤치며 무리를 모다 성을 함락시키려는 죄로서 남문 밖에서 총살하였다.(‘94. 11 .15 성주. 소모) 밤 오경(五更)에 이른바 편의장(便義將) 조왈경(趙曰京)이라는 큰 괴수를 왕곡(旺谷)에서 생포하였다.(‘94. 11. 15 토비) 조왈경을 판계점에서 총살하였다.(‘94. 11. 16 토비) 화동면 덕곡(德谷)에 들어가 분수를 범하여 강상을 어지럽힌 적 안치서(安致瑞)를 사로잡고 그곳에 사는 백성을 타일러 귀화하게 하였다. 접주 신광서(辛光瑞), 정기복(鄭奇福) 등을 쫓아가 잡게 하였다.(‘94. 11. 17 토비) 병력을 인솔하여 화동면으로 갔다. 밤중에 대곡(岱谷)에 가서 청주 대접주 김자선(金子先) 및 접사 서치대(徐致大) 접주 정수여(鄭須汝)를 사로잡았다.…김자선은 원래 보은 장내에 거주하였는데 이른바 대접주로 10월 17일 그 무리 4,500명을 거느리고 청주를 함락하려고 세교(細橋) 장터에 이르렀으나 일본 병력에 패하였다.…상주에 잠입하여 다음 기포를 도모하여 앞서의 치욕을 씻으려 하였다.(‘94. 11, 18 토비) 김자선, 정수여, 서치대를 화령 장터에서 총살하였다.…밤중에 거괴 김민이(金民伊), 원성팔(元性八) 등을 장내 후동(後洞)에서 잡았다. 이 밤에 하늘은 얼음 같았고 달은 서리 같았다.(‘94. 11. 19 토비) 새벽에 병력을 3개부대로 나누어 평원동(平原洞)에서 김철명(金哲命) 강만철(姜萬哲) 김달문(金達文) 등 세 적을 사로잡았다. 오시 정각에 난을 일으킨 괴수 원성팔, 김달문, 김철명, 강만철을 광주원에서 거괴 김민아는 봉암세서 총살하였다.(‘94. 11. 20 토비) 유격장 김석중의 첩보를 처음으로 보니 ‘군대를 통솔하여 중모 땅을 출발하여 동도 5명을 시장에서 총살하고 판계(板溪)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또 김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중모에서 화령으로 가서 동괴(東魁) 8명을 시장에서 총살하고 사곡(思谷)에 주둔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순영에 다녀온 열흘 동안에 본부에서 또 포졸을 동원하여 6명을 잡아 가두었다. (‘94. 11. 22. 소모) 식사 후에 본목(本牧)의 진장(鎭將)과 함께 태평루에 올라 비적의 괴수 6명(손덕녀, 최선장, 이의성, 장판성, 남융일. 억손이)을 총살하였다. 김유격장의 첩보를 통하여 그가 임곡에 도착하여 1명을 총살하였음을 알게 되었다.(‘94. 11. 24.소모) 진군하여 와지(瓦池)로 가서 접사 여성도(呂聖度)를 사로잡았다. 밤에 병력을 네 부대로 나누어 청산과 보은의 네 마을로 들어가 최시형이 왕래하는 소굴의 우두머리를 사로잡았다. 여적(呂賊)은 기포하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성주로 가서 성을 함락하고 무기와 군목을 탈취했으며 상주의 변란 후에 다시 기포하려고 꾀한 자이다.(‘94. 11. 27 토비) 월남 전점에서 다시 남진갑을 총살하고 청산 효림(孝林)에 들어가 굶주린 사람들 20호를 구제하였다. 남적의 몸을 자세히 검시하니 네 곳에 총을 맞았으나 모두 옆으로 맞고 명중하지 않아 도망쳐 살았다.(‘94, 11. 28 토비) 병사 5명을 보내 거괴인 운량도총관(運糧都總管) 배학수(裵學秀), 팦로도집강(八路都執綱) 김경연(金景淵)을 청산읍에서 사로잡게 하였다. 청산읍 본관 조만희가 배적(裵賊)을 관아의 안채에 숨겨두고 유격장에게 편지를 보내 목숨을 구걸하였다.(‘94.11.29 토비) 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지난날에는 포위망을 뚫고 빠져 달아난 남진갑을 다시 청산에서 체포하여 그 자리에서 총살하였으며 최적(崔賊최시형)의 소재지를 탐색하고자 청산과 영동 지역에서 머물면서 기미를 살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탄약을 보충해 주시고 병정을 추가로 보내주십시오”라고 하였다.(‘94. 11. 28 소모) 다시 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또 적괴 4명을 총살하였으며 청산의 거괴를 진중에 잡아두었다고 하였다. (‘94. 11. 30. 소모) 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청산으로부터 영동으로 가서 동학의 무리 김경연 등 4놈을 총살하니 호서 사람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94. 12. 6. 소모) 아침을 먹은 뒤에 군사와 백성들 1,000여 명을 소집하여 남사정에 나가서 2놈을 효수하고 4놈을 총살하여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또 적을 방어할 의지가 확고함을 보여주었다. (‘94. 12. 12. 소모) 남촌(南村)의 거괴 4놈이 9월의 변고 이후에 호서로 도망가서 최적(崔賊) 및 이괴(李魁)와 함께 몰래 무리를 모아 무주로 가서 오늘의 화를 조성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몰래 남촌으로 들어와서 기포하여 내응하고자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그래서 즉시 정예 포수를 출동시켜 이들을 잡아다가 엄히 조사하여 승복을 받아내었다. 그래서 당일 오시에 문루(門樓)에서 개좌(開座)를 하여 이들을 모두 효수하자 온 경내가 썰렁하고 부중(府中)이 숙연해졌다.(‘94. 12. 14 소모) 신촌(新村)에 도착하여 잠시 쉬면서 마을의 장정들을 효유하였다. 율원에 도착하여 또 신촌에서처럼 효유하였다. 저녁에 화서시(化西市)에 도착하여 회군하는 유격장 김석중과 만났다. 그가 보고하기를 “16일에 청산에서 군대를 출발하여 보은, 수피(水陂), 원암, 신전리(新田里)에 도착하니 적도 수만 명이 보은읍으로 가는 길에 공해를 부수고 민가 2채를 불사르고 한 부(府)를 분탕질한 뒤에 풍취점에 머무르고 있는 적도들과 합세하여 종곡촌으로 들어가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94. 12. 19 소모) 김제홍, 성걸, 김상오, 유우석 등이 날카로운 칼을 뽑아 목을 자른 것이 10여 명이었고 어지러운 총에 맞아 죽은 것이 2,200여 명이었고 야간 전투에서 살해한 것이 393명이었다. 포획한 우마 60여 두, 깃발과 북 수십 면(面)은 모두 일본 병사들에게 주어 서로 구해줬던 공을 사례하였다.(‘94.12.18 토비) 이 전투에서 적의 괴수 이른바 대접주 임국호, 이원팔, 김군오, 정대춘 등의 목을 베었고 그 외에도 죽은 자가 있지만 그 이름을 알 수 없었다.(‘95.12.18 토비) 종곡의 동구에 이르자 적도 4명이 불을 피워놓고 경계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먼저 칼로 3명을 찌르고 이어서 한 놈을 묶은 뒤에 일일이 취초(取招)하자, 적도들이 청산에서 이 동(洞)으로 와서 머무르고 있으며 지금 금소촌(金召村)의 촌가에 있는 자들은 바로 동학의 괴수 4․5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집을 포위하고 일제히 총을 쏘았더니 총에 맞아 즉사한 자가 3명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임국호와 정대춘이 그 안에서 죽었다고도 하였으나 확실히는 알 수 없습니다.…총에 맞아 즉사한 자들이 전후하여 모두 395명이었으며 그 밖에 뒷 골짜기의 시내와 숲속에서 죽은 자들이 골짜기와 계곡을 가득 메웠는데 이들은 서로 뒤엉켜 그 숫자가 몇 백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94.12.19 소모) 남사정에 가서 1명을 효수하고 9명을 총살하였다. 이어서 들으니 적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청천(靑泉)으로 달아나고 혹은 괴산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94. 12. 22 소모) 사정에 나가서 사격훈련을 하고 동학의 괴수 3놈을 죽였다. (‘94. 12. 24 소모) 정무정(鄭茂亭)과 이이당(李二堂)의 편지를 보고 호남의 전봉준과 손화중이 이미 체포되고 호남과 호서가 평정되어 전쟁이 끝나 조정에서 군대를 철수하려는 논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95. 1. 5 소모) 모서 약정(約正)의 품목(稟目)을 보니 “비도들이 여전히 영동과 옥천 등지에서 선동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즉시 정탐을 하도록 하였더니 경군과 일본군이 비도들을 토벌하기위하여 용산시장에 모였는데 그 숫자가 400여 명이 된다”고 하였다.(‘95.1.12 소모) 1862년 12월 황문규가 상주 접주로 임명되면서 비롯한 상주동학농민혁명은 동학인들의 연이은 죽음의 기록이다. 상주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펴낸 『동학농민혁명 제116주년 전국기념대회 자료집』의 사건일지를 보아도 거의 전부가 죽음에 대한 기록이다. 『소모일기』와 『토비대략』에 기록된 것을 발췌하여 동학농민군의 전말이라고 했지만 전과에 있어서는 과장되거나 축소될 소지도 없지 않다고 본다. 대충 헤아려도 상주와 보은 종곡과 인근에서 동학농민군이 약 2,760 여명이 희생되었다. 검시가 어려워서 그리고 갑질의 입장에서 파악된 희생자가 이처럼 많았던 상주동학농민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느 시각에서 보아도 아프고 슬픈 기록이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을 하면서 처음으로 모신 해원의 자리가 새삼스럽다. 4) 민심과 사회상 소모에 관한 일이 아득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백의로 의병을 일으키는 일은 옛날부터 어려웠지만 이러한 때의 이러한 거사는 더욱 답답하였다. 이 때문에 지역의 인사들도 모두 자기 집으로 흩어졌다10) .(‘94, 10. 28. 소모) 향원들이 이따금 찾아왔으나 의병을 일으키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대책 없이 머리를 숙이고 관망만 하며 나서서 일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94. 11. 2 소모) 향원들이 의병을 일으키는 일을 게을리 하며 나서려 하지 않았으며 조방장은 사임하는 글을 올렸다.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94. 11. 4., 소모) 귀화한다는 소장(訴狀)이 날마다 관청에 접수되어 가득 찼다. 그런데 얼핏 들으니 중화(中和) 등지에서 동학을 옹호하는 무리들이 몰래 호서의 적들과 호응하려 한다고 하였다. 왕명이 지엄하고 각처에서 의병들이 막 일어나려고 하는데 옛 습성을 바꾸지 않고 거기에 미혹되어 정도로 돌아올 줄을 모르니 슬프고 또한 애통하다.(‘94. 11. 4., 소모) 상주와 선산 및 주천(酒泉예천)의 아전들이 제멋대로 집강소를 결성하여 동학의 비적들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도리에 맞지 않는 못된 짓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94. 11. 18. 소모) 1863년 9월과 12월에 우산서원과 도남서원에서 각각 동학을 배척하는 통문(通文)이 발송되었다. 도단이 통문에“…저희들이 듣기에는 양호의 비류들이 근래에 더욱 늘어나서 성을 공격하고 백성들을 약탈하여 난리의 형세가 이미 드러났다고 합니다.…국가의 안위가 달린 시기에 목숨이 붙어 있는 자들이라면 이를 소홀히 보아 넘기면서 적들이 오지 않기만을 바랄 수 없습니다. 저희들은 타고난 천성을 지키면서 교화가 행해지는 곳에서 살고 있으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적개심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에 우선 통문을 발송하고 두루 알립니다. 바라건대 모든 군자들은 분연히 일어나 …” 두 서원의 유사는 이렇게 동학의 실상을 알리고 분연히 일어날 것을 설득 권유했다. 동학 발생 초기에 빠르게 대응한 셈이다. 그러나 2십 년이 지나서 일까 지역인사들이 외면하고 향원들이 수수방관 관망만 하며 정도에서 이탈한 귀화의 소장이 날라드는 현실에 답답함과 애통함을 토로하고 있다. 민심의 이탈과 집강소의 행패가 드러났다. 큰눈이 왔다. 사곡(沙谷)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본동 사민(士民)이 의연금을 내고 나와서 맞이하여 소를 잡아 대접하니 병사들이 기뻐하였다.(‘94. 11. 21 토비) 10월의 공첩(公牒)을 보니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시전상인들이 모두 정도를 떠받치고 동학을 배척하고자 의를 드러내서 재산을 덜어내어 순무영의 군수에 보태었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윗사람에게 충성하고 임금을 사랑함이 이와 같다.(‘94’. 12. 3 소모) 군대가 이르는 곳에서 군량은 어떻게 조달하였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율계를 떠난 뒤로는 상주에서 출연한 곡식을 조달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나는 마을에서 모두들 의로운 마음으로 출연하여 도와주었으며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종곡에서는 적도에게 획득한 군수물자 가운데서 큰 소 2마리를 동중(洞中)에 내어놓아 난리가 끝난 뒤에 경작할 때 사용하라고 하자 길 가던 사람들도 모두들 숙연해 졌습니다”라고 하였다.…화시(化市)에 있던 군사 400여 명과 종군색리(從軍色吏)에게는 의연곡식을 특별히 지급하였다.(‘94.12.19 소모) 평부소(平賦所)에서 별포(別砲)의 정월 급료와 관포 및 여러 집사들의 급료를 이전의 수량과 같이 지급하였다.(‘94. 12. 25 소모) 본영(本營)에서 200금을 내어서 서쪽으로 전투를 하러 나갔던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을 주었다.(‘94. 12. 26 소모)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의 후손인 참판 송도순(宋道淳)의 편지를 보니 “그의 동생인 진사(進士)형이 화북의 광정리(光亭里)로 우거하였는데 동학의 무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군사들에게 학대를 당하여 편안할 날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특별히 전령을 보내어 별도로 그를 지키고 보호하도록 하였다.(‘94. 12. 27 소모) 향약이 발달된 상주, 상부상조(相扶相助)와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정신이 충일한 상주인의 정신이 드러나 있다. 사민이 의연금을 내고 시전상인들이 재산을 덜어내어 군수에 보탰으며, 군량의 조달도 의로운 마음으로 출연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종군색리에게 준 의연곡식이나 급료와 상을 주는 이러한 사례는 어려웠을 때 함께하는 공동체의식의 발로임을 잘 반증하고 있다. 농경사회의 두레에서 각종 계(위친, 상포, 송아지, 금가락지)로 뒤이어 친목계로 이어지는 모임이 유독 상주가 많음도 이해가 간다. 그리고 동춘당 송준길의 후손에 대한 배려는 당파로 보아서는 서인이지만 인인애에 바탕을 둔 포용력을 보여준 사례라고 하겠다. 당시 본읍에는 각지에서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문서가 한꺼번에 몰려 마치 눈 조각 같았으며 성 안이 소란한 것이 솥에 물이 끓는 것보다 더하였다.(94.12.10 토비) …그런데 가장 급박한 것은 온 성내의 인심이 새와 물고기가 놀란 것처럼 마치 끓는 솟과 같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직접 다니면서 효유하고 또 일을 잘하는 노련한 아전들을 뽑아서 4곳 성문을 지키도록 하였다.(‘94. 12. 12 소모) 당시 청산 수령은 성을 버리고 먼저 도망가서 금백(錦伯)을 만나 유격장이 와서 청산의 백성들을 학대한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또 정부에 유언비어를 흘렸다.…영영(嶺營)에서는 상주목사에게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소모영의 모든 사람이 이 때문에 두려워하였으나 나는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은 명예와 이익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충의로 하는 것이다. 지나는 촌과 집을 조금도 범하지 않은 것을 하늘이 위에서 살피시고 귀신도 촘촘히 늘어서 알고 있다. 조금이라도 죄를 범하였다면 만 번 죽어도 오히려 가벼울 것이다. 마음으로 돌아봐도 꺼릴 것이 없으니 다만 천명을 기다릴 뿐이다. 어찌 두려워하며 어찌 염려하겠는가”라고 하였다.(‘94.12.14 토비)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사람이 포의로 공을 세운 사실은 이제까지의 문첩(文牒)을 통하여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공을 덮어두고 그 죄를 나무라는구나. 이는 맹영재와 선봉장 이규태가 앞장서서 적을 토벌하여 임금께서 그 공적을 칭찬하셨는데도 사람들의 비방을 받아 그를 소환하여 논죄하라는 의논이 생겨나기에 이른 것과 같다.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94. 12. 14. 소모) 각지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문서가 눈 조각같이 쏟아지고 물 끓는 것보다 더한 소란스런 사회상의 비유가 생생하다. 그런 와중에 유격장의 백성 학대와 소모사의 비애가 감지된다. 소모사가 하는 일이 명예와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충의로 하며 죄를 범했다면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했다. 비방과 모함이 사람을 여리게 하고 의욕을 저하시킨다. 사격시합을 한 뒤에 큰 소 한 마리와 쌀 50되를 내어서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다.(‘94. 12. 7 소모) 운곡(雲谷)에 사는 황민과 지산동 사람이 술, 떡, 담배, 과일을 가지고 와서 군인들을 위문하였다.(‘94,12.15토비)- 12월 8일 일기에도 “영관에게 고을로 돌아간 뒤에 소를 잡아서 사졸들을 먹이라고 하면서 이들을 위로해 주었다.”고 했으며 12월 17일 일기에도 “안동에서 온 300여명 군사에게 소를 잡아 먹이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잘 먹어야 힘이 나는 법, 소는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하여 온몸을 바친다. 우덕송을 읊을 만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짐을 꾸렸다. 문 밖에는 눈이 3자나 내렸다. 하인들과 병정들이 모두 눈이 많이 쌓여 길이 험하다고 백방으로 만류하였다. 그러나 난리가 조용해진 이때에 어머니를 모시고 새해를 맞아하는 것은 당연한 정리였다. 그래서 옷을 털고 말을 탔다.…위로는 임금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아래로는 노모의 마음을 위로하였으니 금년 한 해를 헛되이 보낸 것은 아니었다. 밥짓기를 재촉하여 데리고 온 병정들을 먹이고 또 노자를 주어 떠나보냈다.(‘94. 12. 29 소모) 새벽에 선조의 사당을 배알하였다. 진시에 수령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이 편지를 통하여 군대를 파한 뒤에 관부(官府)와 양반가의 하인들이 민촌(民村)에서 폐단을 일으키는 일이 있어서 엄히 주의를 주었음을 알았다. 여러 부로(父老)들을 배알하였다. 노친을 모시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떡을 굽고 술을 마시면서 밤새도록 즐겼다. 전쟁으로 쌓였던 피로가 오늘 한꺼번에 풀렸다.(‘94.12.30 소모) 술과 안주를 마련하고 본영 아래에 있는 여러 이졸들을 객사로 불러 모았다. 진장과 유격장도 합석하였다. 자리가 파한 뒤에 이졸들을 불러 무기를 반납하고 귀농하여 각자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라고 하였다. 간혹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떠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병졸생활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비바람을 맞으며 삶고 죽음을 넘나들며 5-6개월 동안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였기 때문이니 그 사정이 또한 측연하였다.(‘95.1.24 소모) 소모사로서 진력하다가 세모에 노모를 위로해드리고 선조의 사당에 참배하며 부노들을 배알하고 아이들과 떡을 구워 먹으며 밤 이슥도록 즐겼단다. 한 집안의 아들이자 아버지로서 평범한 생활인으로 돌아간 장면이 정겹다. 산다고 하는 것이 이런 소소한 가정생활에서 보람과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만남과 헤어짐의 아쉬운 석별의 자리, 이졸과 유격장이 함께한 숙연함이 묻어난다. 흔히 말하듯이 생사고락을 같이한 사람들이니 쉽게 잊힐 리가 있겠는가? 순사(巡使) 가사가 상주목에 대단히 화가 나서 수리(首吏)를 잡아들이라고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전에 순영의 군사들이 이 고을에 왔을 때 겉으로는 구원하러 왔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폐단을 일으켰으며 종곡에서의 위기상황을 먼 산 쳐다보듯이 하며 시장에서 한가롭게 지냈다. 그래서 수령이 태평루에서 이들을 꾸짖었는데 이는 공분(公憤)을 표출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영(棠營)에서 이런 조치를 취하였으니 매우 의아스럽다.(‘95. 1. 1 소모) 상사(上舍) 종제의 편지를 보고 종곡에서의 전투 이후에 경향각지에서 사람들이 지나치게 모함을 하여서 염찰사(廉察使)가 이를 조사하기 위하여 떠나기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세상일이 태항산(太行山)처럼 험준하여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95. 1. 19 소모) 구원이 폐단으로 나타나서 공분을 표출한 일에 도리어 수리를 잡아들이라니 분통 터지는 일임에랴. 공이 따르고 명예가 따르는 일에는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윗 기관의 처사가 온당치 못하고 정실에 싸여 고통과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 어이없다. 모함은 병이다. 서로를 아프게 한다. 사실이 전도된다면 황당하고 분통이 터질 일이 아닌가? 꽈배기처럼 꼬인 심보가 얄밉지 않은가? 5) 일본인, 일본군에 대한 기록 동학의 난이 사방에서 일어나 무리들을 거느리고 성을 차지하여 그 위세가 매우 장대하였다. 그런 까닭에 조정에서는 크게 놀라 군대를 파견하고 또 일본군대를 빌려서 사방으로 출정하게 하니 그 모습이 늠름하였다. 일본군 80명이 서울에서 호서를 지나 진주로 향하였다. 이들은 지나면서 본군의 성으로 들어왔는데 그들의 기치와 무장은 햇빛에 번쩍이고 그 위풍은 서릿발 같아서 매우 두려웠다. (‘94 .11. 3. 소모) 달성산(達城山) 아래에 이르자 참에 머무르거나 행상을 하는 일본인들이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참과 옥(屋)을 개설해 놓은 것이 서울의 이현(泥峴진고개)과 흡사하였다.(‘94. 11. 17. 대구. 소모) 유격장의 첩보를 보니 “적도들은 청산에 머물고 있으며, 청주의 군대는 퇴각하여 원암(元巖)에 주둔하고 있고 일본군은 황간에 있으면서 김산 소모영의 군대와 서로 연락을 하고 있는데 그 위세가 상당하다고 하였다.(‘84. 12, 14. 소모) 이날 밤에 황간에 머무는 일본 육군 보병 소위 구와하라(桑原)가 병력 16명을 인솔하고 와서 만났다.…구와하라씨는 나이 27새로 성실하고 신중하며 엄중하고 꼼꼼하며 두루 살펴 한 번 보았는데도 오랜 친구 같아서 함께 죽기를 다짐하였다.(‘94. 12. 15 토비) 새벽에 유격장이 편지를 보니 “황간에 온 일본군이 16명이며 또 추후에 65명이 더 왔습니다.…(‘94.12.15 소모) 유격장의 편지를 보니 “일본군 16명이 다시 율계에 모여 있는데 장차 성현(星峴)으로 옮겨서 주둔하려고 합니다.… 또 군관 차재형이 올린 고목(告目)을 보니 “유격대는 보은의 마로시(馬老市)로 이동하여 주둔하고 있습니다. 일본군과 우리 군사를 합한 숫자가 231명이고 용궁과 함창의 포수가 도합 270명입니다.…(‘94.12. 16 소모) 밤중에 구와하라를 돕는 부대로 일본 육군 보병 대위 미야케(三宅武義)가 병력 13명을 인솔해 왔고 탭봉에 있던 일본 병력 8명도 뒤이어 왔다. ('94.12.16 토비) 오시에 유격장이 보낸 편지를 보았다. 이것은 군관 차재행이 가지고 온 것이다. 그 편지에는 “지금 일본군과 함께 청산에 주둔하고 있는데 내일 보은의 원암으로 가서 적을 토벌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94.12.18 소모) 이날 새벽에 보니 적도는 산 위에 늘어서서 이미 포위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이에 미야케씨가 오른쪽 산 아래 엎드려 위로 공격하고 구와하라씨는 왼쪽 산 아래 엎드려 위로 공격하며 나는 가운데 길의 텅 비어 있는 땅을 끼고 마주하여 공격하였다.(;94.12.18 토비) 일본장교들과 서로 작별하였다. 미야케씨는 우마 7두를 보냈고 구와하라씨는 은화 20원을 노자로 주면서 말하기를 “제가 동양을 두루 다녔지만 대인처럼 뛰어난 공적이 있는 분은 처음 봅니다. 임금께 아뢰는 날 저희들의 공을 치사할 것은 없습니다. 우마는 비록 보잘 것 없으나 군사들을 위문하고 은화는 약소하지만 정표로 보냅니다.”라고 하엿다.(‘94.12.19 토비) 그래서 17일 밤 삼경에 귀인교(貴人橋)에서 식사를 하고 의병포수 200명, 일본군 43명, 저의 동생 김직중, 성귤, 성걸, 김제홍, 황교택 등과 약속을 하고 출발하였습니다. …우리 군사들은 좌대(左隊)와 우대(右隊)로 나누었으며 일본군이 가운데에 위치하고 우리 군사들은 좌우를 맡아 협력하여 총을 쏘았습니다.…우리군사들이 정상을 탈환하자 일본군들도 봉우리의 좌측에서 올라왔으며 늘어서서 총을 쏘아대자 마침내 적도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였습니다.…마을에 들어간 뒤에 적도들의 군수물자(輜重)를 획득하였는데 우마(牛馬) 100여 필과 양총(洋銃), 약환(藥丸) 및 상당수의 집물(什物) 등을 이루 셀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일본인들이 가져가고 우리 군대가 얻은 것은 단지 우마 112필, 환도(還刀) 15자루, 철창(鐵槍) 42개, 기치 10면, 나팔 한 쌍 뿐이었습니다.(‘94.12.19 소모) 미야케씨를 낙동 병참사령부로 돌려 보냈다. 이날 저녁 구와하라씨가 편지를 보내 문안하였다. 그 편지에 “처음 제가 공을 율계에서 만났을 때 모습은 온화하고 말은 신실하여 한 번 보았는데도 오래 된 것 같았으며, 며칠을 같이 있으매 간절함이 더욱 절실했습니다. 제가 비록 노둔하지만 어찌 감히 느끼지 못하겠습니까? 대개 공이 삼군을 지휘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오호라! 공의 덕은 가히 우러를 만하고 공의 의는 가히 사모할만합니다. 비록 옛날의 손자 오자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직책을 보전하고 후에 상주를 지날 때 공에게 절하고 싶은 마음이 밤낮으로 솟구치는 것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이처럼 매우 추운 계절에 임금과 나라를 위해 부디 몸을 아끼십시오”라고 하였다.(‘94. 12. 22 토비) 구와하라씨가 내방하여 함께 포정(浦亭)의 고향 집에 함께 갔다. 밤에 구와하라씨가 아들 규수를 불러 더불어 필담을 나누고 감탄하며 칭찬하여 말하기를 “어린 나이인데도 재주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12세 소년이 이처럼 일찍 공부가 밝은데 어찌 구미 각국의 책을 가르치지 않으십니까?…(‘94. 12. 28 토비) 일본군의 참전과 참전 병사의 수와 역할 및 작전상황을 알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청나라 지원군이 조선에 들어왔음을 빌미로 조선에 일본군을 주둔시키게 된다. 두 나라의 세력 다툼으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승리했다. 제1차 동학농민혁명은 아래로부터의 개혁으로 폐정개혁안을 정부로부터 받아낸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2차 봉기는 항일투쟁으로 척왜척양의 기치를 걸었으나 조선군과 일본군에 의해서 섬멸당하고 만다. 위세가 당당한 일본군, 그들의 기치와 무장은 햇빛에 번쩍이고 그 위풍은 서릿발 같아서 두려운 존재로 위압감을 느낀 모양이다. 낙동병참사령부의 육군 보병 대위 미야케(三宅武義)와 보병 소위 구와하라(桑原 27세)의 역할이 드러나 있다. 특히 구와하라의 인간적인 면이 퍽 감동 깊게 젖어온다. 전쟁 속에서 전쟁을 초월한 교분. 승전을 일궈낸 작전에 따르고 유격장의 덕을 높이 칭찬하고 사모의 생각을 가진다는 솔직한 심경의 토로와 소박한 인간성이 친밀감을 일게 한다. 나아가 유격장 김덕중의 고향집에 동행하여 아들에게 외국어를 가르쳐야한다는 청소년에 대한 교육 얘기는 120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 맞닿은 절실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군과 일본인에 대한 우리가 가진 막연한 선입견이 잘 못된 견해임을 자인케 한다. 이것은 새로운 교훈이다. 5. 맺음말 이상으로 『소모일기』와『토비대략』으로 본 상주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살펴보았다. 『소모일기와』『토비대략』에 대한 간단한 해설과 지은이 소모사 정의묵과 유격장 김덕중의 인물소개를 간단히 곁들였다. 본론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1)동학,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2) 소모사, 소모영의 업무와 감회 3) 동학농민군의 전말 4) 민심과 사회상 5) 일본인, 일본군에 대한 기록의 순으로 간추려 보았다. *동학은 척왜척양을 내세우고 부적과 주문으로 민중을 미혹하게 했으며 반역을 꾀했다. 동학도들을 요괴무리, 비도로 보았으며 동학농민혁명을 유사 이래 처음 일어난 대변란이라고 했다. *동학을 배척하는 통문이 배포되어 동학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했으며 수취제도와 신분질서상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충의의 정신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소모사 정의묵은 충성과 의리, 대의를 중시하고 비도를 척결하기 위해 군문규획(軍門規劃)을 정하여 효유하고 실천할 방도(오가일통 오인일오)를 밝혔으며 과단성 있는 실천으로 평정을 되찾고 ‘위로는 임금님의 근심을 덜어드리고 아래로는 노모의 마음을 위로한’(‘94.12 29소모) 성과를 거두었다. *유격장 김석중은 적도 섬멸의 기개를 보였으며 빼어난 작전으로 보은 종곡에서 북접동학농민군을 전멸시킴으로써 큰 전공을 세웠다. *일본군 참전으로 농민군이 점거한 읍성 탈환과 보은 종곡에서의 유격병대와 협력 으로 부접농민군을 궤멸시킨 상주지역에서 벌린 활동과 규모를 알게 했으며 구와하라의 인간미를 보았다.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전쟁의 총망중에도 일일이 기록한 『소모일기』와『토비대략』은 상주의 동학농민혁명을 이해하는데 귀한 자료적 가치를 지녔다. 두 자료를 남긴 정의묵과 김덕중은 북접농민군의 명맥을 끊고 잠재웠다는 점에서 진압군으로서 큰 업적을 성취했다. 따라서 상주는 동학농민혁명의 종언을 고하는 중심역할을 한 고을이라고 하겠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이 글은 두 자료를 읽고 주제별로 발췌한 기록이다. 거기에 동학과 상주와 연관된 사항을 언급하고 필자의 견해를 첨가한 것이다. 가급적이면 표제에 맞게 상주를 중심으로 전개된 사항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파급된 사항도 일부 언급했다. 이 글에 다루지 않은 것으로 작전과 연계된 상황 전개 부분이 남았음을 밝히고 그 외에도 더 세분하여 감춰진 의미를 간취한다면 상주동학농민혁명을 보는 시각도 그만큼 다양해지리라고 생각한다. 1) 이 논문의 차례를 보면 소모일기의 내용을 쉽게 조감할 수 있다. 1.머리말 2. 資料에 대하여 3.尙州農民軍의 세력증대와 邑城점거 4.상주소모영의 설치와 농민군 진압방침 !)설치과정 2)조직 3)농민군 진압방침과 소모영 軍門規劃 5.상주소모영의 농민군 진압과정 1)民堡軍 조직과 歸化者의 증가 2)관하 각읍의 농민군 진압 통재 3)소모영 유격병대의 활동 4)北接농민군의 궤멸과 종곡전투 5)상주소모영의 운영경비 6.맺는말 2) “동적이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無君無父) 것처럼 윤리와 의리를 능멸하는 것은 부녀자와 어린이들도 모두 아는 바이니 귀신들도 반드시 벌하여 죽일 것이니 이에 우리 의로운 선비는 함께 힘을 합쳐 괴수를 섬멸하고 따르는 자들을 풀어주어, 위로는 나라의 근심을 풀고 아래로는 사대부와 부녀자의 원한을 씻어 충의를 다하기로 한 맹약을 깨뜨리지 않기를 맹세한다. 그러므로 이에 돌려 보이니 생각건대 모두 잘 알도록 하라“ 3) 一.지나는 마을들은 감히 조금이라도 침범하지 말 것.一.대장의 명령이 한 번 나가면 감히 망령되이 시비를 가리지 말 것. 一. 대오를 정렬하여 행군하면서 감히 귀엣말 하거나 서로 소리치지 말 것.一. 지명하여 적을 잡되 감히 다른 사람을 오인하여 범하지 말 것. 一. 이미 잡은 적의 괴수는 감히 정에 끌려 멋대로 풀어주지 말 것.一. 적과 맞서 공격할 때에는 감히 뒤를 돌아보고 물러나지 말고, 명령을 어기는 자는 군율로 다스릴 것. 4) 一. 소모사의 임무는 오로지 의병을 모집하여 비류들을 소탕하는데 있으니 비류에 들어가지 않은 자들은 의병이 되어야 한다. 5가家를 1통統으로 만들고 5인을 1오伍로 편제하여 용맹하고 위풍 있는 자를 골라서 정의군正義軍으로 차출하며 정의영관正義領官과 정의무사正義武士로 차출하여 인첩印帖을 성급成給하는 것을 표준으로 삼는다. 一..지금부터 비류에 들어가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명첩名帖과 염주念珠 등의 물건을 가지고 본 군문軍門으로 와서 정의로운 대오隊伍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자는 지난 일을 허물하지 않을 것이다. 一자신들이 처신해야할 바를 알아서 용감하게 귀화해야 할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끝까지 추적하여 붙잡아 머리를 효수하고 그의 집을 불태우고 그의 전택과 재산을 몰수하여 그의 이웃과 친척들을 연좌할 것임을 밝힌다. 一.귀화한 비류들이 접주의 은닉처를 밀고하거나 잡아 바친다면 별도로 상을 내린다.一.거괴를 잡아서 바치는 자는 임금에게 아뢰어 상을 내릴 것임을 약속한다. 一.사족士族과 관속官屬들이 잘못된 것에 물이 들었어도 뉘우치고 돌아오면 재능에 따라 임무를 맡길 것이다. 一.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고 본 군문의 절제節制에 따라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一 본 읍에서 무기를 잃어버린 것이 10에 7-8이었다. 창검과 총등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니 절대로 처벌을 걱정하지 말라 발각되면 중벌을 면하기 어렵다. .一.본 군문이나 본 진영鎭營 혹은 본부本府의 관속을 막론하고 외촌으로 나가서 귀화한 백성을 동요시키고 토색질을 하려는 자는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 5) 판탕板蕩 :판板과 탕蕩은 모두 시경 대아大雅의 편명으로 주의 려왕이 무도하여 나라를 어지럽힌 것을 풍자하는 내용이다. 6) 오가일통(五家一統)은 오가작통五家作統을 연상케 하는 것으로 오가작통은 조선시대 범죄자의 색출, 세금징수, 부역의 동원, 인보隣保의 자치조직을 위하여 다섯 집을 1통으로 묶은 호적의 보조조직이다.1485(성종 16)년 한명회의 발의에 의해 채택되어 경국대전에 등재되었다. 한성부에는 방坊을 두고 방 밑에 5가작통의 조직을 두어 다섯 집을 1통으로 하여 통주統主를 두었다. 방에는 관령管領을 두었다. 지방은 5통을 1里로 하고 몇 개의 里로 面을 형성 면마다 권농관을 두었다. 헌종 때 통의 연대책임을 강화하여 천주교도를 적발하는데 이용하였다. 7) 한신과 팽월 한의 공신으로 초의 항우를 멸하는 공을 세웠다. 8) 동도東道 대장이 각 부대장에게 명령을 내려 약속하였다. “매번 적을 상대할 때 우리 동학농민군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아니하고 이기는 것을 으뜸의 공으로 삼을 것이며, 어쩔 수 없이 싸울 때라도 간절히 그 목숨을 해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길 것이며 매번 행진하며 지나갈 때에도 간절히 다른 사람의 재산이나 물건을 상하게 하지 말 것이며,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이름난 사람이 사는 동네 10리 안으로는 주둔하지 말 것이다.(東道大將下令於各部隊長約束曰 每於對敵之時 兵不血刀而勝者爲首功雖 不得已戰 切勿傷命爲貴 每於行陣所過之時 孝悌忠信人所居村十里內 勿爲屯住) 12개 군호(軍號: 紀律-인용자 주) 항복하는 자는 사람으로 대하라(降者愛對) 곤궁한 자는 구제하라(困者救濟) 탐관은 추방하라(貪官逐之) 따르는 자는 공경 복종하라(順者敬服) 굶주린 자는 먹이라(飢者饋之) 간사하고 교활한 자는(그짓을)그치도록 하라(姦猾息之) 도망가는 자는 쫓지 말라(走者勿追) 가난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貧者賑恤) 충성스럽지 못한 자는 제거하라(不忠除之) 거스르는 자는 잘 타이르라(逆者曉諭) 병자에게는 약을 주라(病者給藥) 불효하는 자는 벌을 주라(不孝刑之) 주 6은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박맹수 지음 P.71-72에서 재인용. 9) 보은취회에 참가한 동학교인들을 해산시키는 명령을 받고 내려온 양호도어사 어윤중(魚允中)이 민회(民會)란 말을 써서 장계를 올렸다. 10) 선교仙橋의 이상사李上舍 어른이 노병으로 직임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며 추천서를 돌려보내 왔으며 도곡道谷의 조승선趙承宣은 비도들이 있는 곳으로 부모님을 뵈러 가야한다고 핑계를 대었고 유자인 어른은 성 밖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84, 10. 28)  
250 우리는 모두 한데 모여 북적대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고독해서 죽어 가고 있다 (슈바이처) /고석근 file
편집자
645 2018-08-15
우리는 모두 한데 모여 북적대며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고독해서 죽어 가고 있다 (슈바이처) 비 백석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 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아랫집 담배 냄새 때문에 창문을 못 열겠어요- 모 신문 기사의 제목이다. 아랫집에서 담배 냄새가 솔솔 올라오고, 속에서는 부아가 들끓고. 같은 주택에 사는 이웃인데,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데, 도움을 청할 수 없다니! 우리는 그런 이웃들과 데면데면 만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우리 가족은 무작정 시골로 내려갔다. 두 아이에게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내게 하고 싶었다. 나도 시골에서 다시 한 번 살아보고 싶었다. 90년 대 초라 시골이 시골다웠다. 큰 아이를 전교생 46명의 작은 초등학교 분교에 입학시키고 작은 아이는 옆 마을의 어린이 집에 보냈다. 아이들은 항상 신나게 지냈다. ‘아빠, 오늘은 집에 올 때 아이들과 경운기 타고 왔어.’ 걸어올 때는 이웃집 아이들과 모여 함께 왔다. 20분이면 오는 거리를 두세 시간씩 놀면서 천천히 걸어왔다. 길에 핀 들꽃들을 보고, 기어가는 벌레들을 보고, 계절마다 바뀌는 시골 풍경은 아이들에게 얼마나 신기했을 것인가! 그 때는 시골에서는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은 마을 아이들과 하루 종일 어울려 놀았다. 산에 몰려가고, 썰매를 타고, 강에서 물장구를 치고, 나는 까르르대며 뛰어노는 두 아이를 눈시울이 뜨겁도록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평생 시골 추억을 잊지 못할 거야! 평생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뒷집에 사시는 할머니는 가끔 울타리 너머로 전이나 떡을 주셨다. 웃으시는 얼굴표정이 어릴 적 본 외할머니를 빼닮았다. 어린 시절은 얼마나 빨리 지나갔는가! 문득 커서보니 정겨웠던 얼굴들이 다 사라졌다. 내 고향 마을엔 아카시아가 많았다. 늦봄 초여름에 피는 아카시아향기가 온 마을에 자욱했다.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방석을 깔었나/어데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나는 개비린내가 좋았다. 어릴 적에는 집에 개를 길렀다. 개에게서는 묘한 비린내가 났다. 나는 그 비린내가 좋았다. 항상 개를 데리고 다니며 아이들과 놀았다. 추운 겨울 날 엄마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면 개는 바들바들 떨면서 곁을 지켰다. 1 언젠가는 마루에서 밤새 비명을 지르는 개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자야 했다. 개가 쥐약을 먹었다고 했다. 그 소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카시아 꽃들이 내려앉은 지리에서는 물쿤 개비린내가 났다. 지금은 사라진 고향 마을, 낯선 사람들이 사는 고향 마을, 빈집 투성이의 고향 마을. 큰 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가족은 다시 도시로 왔다. 시골 마을을 떠나며 다시는 시골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지금은 시골에서도 아이들을 학원에 보낸다. 예전처럼 아이들이 모여 뛰어 놀지 않는다. 적막한 시골이다. 아직 우리 아이들은 시골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아이들은 이럴 적 시골 생활을 떠올릴 것이다. 한 때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고, 함께 일을 하고, 서로 서로 먹을 것을 나누고, 서로 서로 도우며 살았다고. 아이들은 전설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는 옛 마을을 기억할 것이다. 그 기억으로 아이들이 항상 건강하게 살아가길...... . 이제 우리는 어릴 적 보았던 마을을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개인은 각자 고독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 다른 사람들을 간절히 찾을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이다. 과거의 공동체는 ‘개인이 없는 공동체’다. 고도로 발달한 탈산업 시대에는 자유로운 개인이 탄생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지유가 보장되는 공동체. 아직 우리는 그런 공동체를 경험한 적이 없다. 꽤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개인들. 우리는 사무치는 외로움을 혼자서 버틸 것이다. ‘소비의 향락’에 취해. 그러다 결국엔 버티지 못하고 외로운 다른 사람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증오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 죽어가야 할 것인가?  
249 美國과 米國/권서각 file
편집자
857 2018-07-25
美國과 米國 장님의 코끼리 코 만지기 이야기가 있다. 장님은 코끼리 코만 만져보고 코끼리는 뱀처럼 길게 생겼다고 한다. 코끼리의 모습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코끼리의 총체적인 면을 살펴야 한다. 어떤 대상의 한쪽만 보아서는 그것에 대해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사회의 많은 분들은 미국을 공산주의로부터 우리를 지켜준 은인의 니라, 우리와는 혈맹의 관계인 나라로 알고 있다. 물론 옳은 말이다. 미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아메리카를 한자어로 亞美利加로 표기한데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미국을 美國으로 쓰지만 중국에서는 米國이라 쓴다. 이 표기를 통해서 미국을 대하는 태도를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아는 미국과 중국이나 북한이 알고 있는 미국이 다르다는 뜻이다. 한반도의 비극적 근대사를 살펴보면 미국은 우리에게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면이 있다. 1905년 미 국방장관 테프트와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가 맺은 이른바 가쓰라-테프트 밀약이 있다. 필리핀은 미국이 지배하고 한반도는 일본이 지배도록 양해한다는 그들만의 밀약이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일에 미국이 일정부분 관여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대목이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얄타회담이 있었다. 미국은 소련에게 한반도에 소련군이 참전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소련군은 북에 미군은 남에 진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해방 후 미군은 총독부 건물에 일장기를 내리고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를 올렸다. 사실상 점령군으로 남한에 진주한 것이다. 미군이 소련군보다 늦게 한반도에 도착하게 되자 소련에 38도선 남으로 내려오지 말 것을 제안했다. 38선을 처음 그은 것이 미국이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임시정부 자격으로 입국하지 못하게 했다. 김구 선생 일행은 그해 늦가을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미국은 이승만을 앞세워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한 달 뒤에 북한도 북한 정권을 수립했다. 사실상 38도선을 사이에 두고 분단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반도의 식민지화와 분단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미국은 결코 美國이 아니다. CVID, 요즘 매스컴을 통해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북미회담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것이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즉,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다. 북도 요구하는 것이 있다. CVIG(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Guarantee) 즉,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체제보장이다. 북은 핵을 완성하고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북미 회담을 앞두고 있다. 핵을 버리고 체제보장과 경제를 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코 아래 노루궁둥이버섯을 단 백악관 안보보좌관 볼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매우 유감스럽다. 전쟁에서 승리한 점령군이 패전국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을 쏟아내고 있다. 북이 요구하는 것은 대등한 협상일 것이다. 북은 CVID의 시작으로 풍계리 핵 실험장을 파괴하고 억류된 미국인을 석방했다. 그런데 미국이 북에 대 대해 한 것은 무엇인가? 경제 제재는 입을 다물고 비핵화만 말한다. 4.27 판문점 선언에서 남북 정상은 서로 비방하지 않기로 했다. 휴전선의 방송시설도 철거했다. 남과 북은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미국은 핵 폐기만을 주장하고 있다.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굴복을 요구하고 있다.  
248 인간은 유희적 존재이다 (호이징거) /고석근 file
편집자
866 2018-07-19
인간은 유희적 존재이다 (호이징거) 일 요시노 히로시 정년으로 회사를 그만둔 사람이 -잠깐 놀러 왔어 하며 나의 직장에 얼굴을 내밀었다. -심심해서 말야 -팔자 좋군 그래 -그게 글쎄, 혼자 있자니까 엉덩이가 굼실거려서 예전 동료의 옆 의자에 앉은 그 뺨은 여위고 머리에 흰 것이 늘었다. 그가 위로를 받고 돌아간 다음 한 친구가 말한다. 놀랍군, 일을 하지 않으면 저렇게 늙어버리는 건가 맞은 편 동료가 잘라 말한다 -인간은 역시, 일을 하게 돼 있는 걸세 듣고 있던 내 안의 한 사람은 수긍하고 한 사람은 부정한다. 그런 그가 다른 날 싱글벙글 웃으면서 나타났다. -일자리를 찾았어 -조그만 가내공장인데 이것이 현대의 행복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나는 한때의 그의 여위었던 얼굴이 그리워서 아직껏 내 마음의 벽에 걸어놓고 있다. 일자리를 얻어 되젊어진 그 그건, 무언가를 잃어버린 뒤의 그가 아닌가 싶어서. 진정한 그가 아닌 것만 같아서. 한 아주머니가 전동차를 타고가다 ‘봉변’을 겪었단다. 앞자리에 앉은 사람이 일어나기에 자리에 앉으려하는데 옆에 있던 대학생인 듯한 아가씨가 잽싸게 자리에 앉더란다. 어이가 없어, ‘아니 앞에 사람이 있는데 자리에 앉으면 어떻게 해요?’라고 하자 그녀 왈 ‘아주머니, 이 자리 맡아놓으셨어요?’ 하더란다. 그리고는 킬킬거리며 스마트 폰만 들여다보더란다. 그녀는 왜 그랬을까? 그녀의 삶의 신조는 이것이 아닐까? ‘쪽팔리는 것은 짧으나 편한 것은 길다.’ 그녀는 자리에 편하게 앉아 가기 위해 전동차 안의 싸늘한 시선들,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올라오는 얌심의 소리,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매슬로가 얘기하는 가장 낮은 단계인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고 있는 것이다. 매슬로는 이 단계를 충족하고 나면 인간은 다음 단계인 ‘신체적 정서적 안전의 욕구’를 추구하게 된다고 한다. 다음 단계는 ‘사랑의 욕구’다. 다른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사랑을 알게 되면 인간은 다음 단계인 ‘자아 존중’으로 올라간다. 자신이 소중해지는 것이다. 자신이 소중해지면 인간은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을 향해 살아가게 된다. 그녀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오로지 잘 먹고 살기!’ 이 한 길을 향해 가정교육, 학교교육을 받아오지 않았을까? 그녀는 1단계의 욕구만 추구하는 인간으로 길러져 왔을 것이다. 그녀는 가끔 2단계인 ‘신체적 정서적 안전의 욕구’에 목마름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그녀를 다그쳤을 것이다. ‘고통은 쓰나 열매는 달다!’ 그녀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고 파편적인 지식들을 달달 외우게 했을 것이다. 잘 할 때마다 맛있는 것을 사주고 좋은 옷을 사주고 편하게 잠자게 해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긴 시간 훈련되어 드디어 지금의 그녀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녀는 3단계인 ‘사랑의 욕구’를 상상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이성異性을 포함하여)과 마음을 나누는 기쁨이 얼마나 큰 지, 마음을 나누지 못하면 얼마나 마음이 공허한지 상상할 수 있을까? 그녀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한평생 ‘생리적인 욕구’가 인생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갈지 모른다. 우물 밖에는 무한한 삶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살아갈지 모른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이것이 우리 사회의 지상 명령이다. ‘일 잘하고 잘 먹는 인간’ 우리의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인간은 역시, 일을 하게 돼 있는 걸세/듣고 있던 내 안의/한 사람은 수긍하고 한 사람은 부정한다.’ 네덜란드의 인류학자 호이징거는 ‘인간은 유희적 존재’라고 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놀이를 추구한다.’ 것이다. 원시인들은 거의 모든 시간을 춤추고 놀았다. 그러다 농경사회가 되며 일하기 시작했다.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정의한 것은 200여 년 전의 산업사회부터이다. ‘그런 그가 다른 날/싱글벙글 웃으면서 나타났다./-일자리를 찾았어/-조그만 가내공장인데//이것이 현대의 행복일지도 모르겠지만/어쩐지 나는/한때의 그의 여위었던 얼굴이 그리워서/아직껏 내 마음의 벽에 걸어놓고 있다.//일자리를 얻어 되젊어진 그/그건, 무언가를 잃어버린 뒤의 그가 아닌가 싶어서./진정한 그가 아닌 것만 같아서.’ 우리 사회는 ‘진정한 그’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 사회에 ‘의식주’가 넘쳐나는데 우리는 왜 일벌레가 되어 한평생 꼬물거리며 살아야 하나? 앞으로 ‘인공지능 시대’가 된다는데, 기계가 일을 다 한다는 데, 우리는 계속 일만하다 죽어야 하나? 어릴 적 시골에서 자라며 ‘노는 어른들’을 많이 보았다. 일을 하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그늘에 쉬며 농담을 주고받고 주막에서는 항상 왁자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명절에는 마을 전체가 들썩거렸다. ‘딱딱한 표정의 어른’이 등장한 것은 언젠가부터 외치게 된 구호 ‘잘살아 보세!’ 이후부터인 것 같다. 6.13 선거에서는 개혁세력이 압도적 승리를 이루고 북미회담으로 한반도가 빙하기를 끝내고 있다. 우리들의 얼굴 표정에 웃음이 왔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의 가슴에서 흥이 강물처럼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247 북맹(北盲)/권서각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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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 2018-06-25
북맹(北盲) 북한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쓰이는 말 가운데 북맹(北盲)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것은 보여도 글자만 읽을 수 없는 사람을 문맹(文盲)이라고 하는데 컴맹이나 북맹은 문맹이라는 말을 패러디해서 새롭게 만들어 쓰는 말이다. 다른 것은 다 볼 수 있는데 북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북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북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국가정보원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민들은 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북은 남쪽에서 괴뢰도당이라 부르는 누구나 갈 수 없는 금단의 지역이다. 우리가 북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극도로 제한된 경로를 통해서 공급되는 것이 전부다. 텔레비전의 ‘남북의 창’이나 종편의 ‘모란봉 클럽’ 또는 ‘이만갑’ 관에서 주도하는 안보교육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면도 우리는 북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심리학자 김태형 박사는 그 답을 분단 트라우마에서 찾는다. 트라우마(trauma)는 일반적인 의학용어로는 외상(外傷)을 뜻하나,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신적으로 심한 충격을 받으면 불안이 찾아오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역사를 65년이나 이어왔다. 그 과정에서 북은 우리의 주적이 되었고 극단적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북에서 쓰는 말도 쓰지 못했다. 어릴 때 자주 쓰던 동무라는 말도 친구로 바꾸어 쓰며 노동자라는 말도 자유롭게 쓰지 못하고 근로자라고 한다. 운동회 때 청군 홍군으로 편을 나누던 것도 청군 백군으로 바뀌었다. 그간 남쪽 정권은 권력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였다. 민주화 이후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들이 재심을 통하여 무죄 판결을 받고 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된 후다. 우리사회에서 가장 치명적인 말이 북과 관련된 말이다. 그래서 누구나 혹시 자기의 말이 북과 관련이 있을까 습관적으로 자기검열을 하며 산다. 공포는 트라우마를 형성한다. 분단 트라우마는 우리의 일상을 흔들어 놓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한다고 심리학자들은 진단한다. 우리사회는 북한사람과 북한정권의 구분도 분명하지 못하다. 북한정권은 미워할지라도 북한동포는 미워할 필요가 없음에도 북이라면 무조건 미워한다. 우리는 공산당을 쳐부수자고 하지만 북에는 공산당이 없다. 없는 것을 미워하고 쳐부수자고 한다. 트라우마 현상이다. 시장에서 나물을 파시는 부동산도 없는 할머니가 ‘종부세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남북회담을 보도하는 텔레비전을 보시던 어떤 어른이 ‘또 얼마나 퍼 주어서 저러노.’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왜 미워하는지, 누구를 미워하는지 모르고 미워한다. 이 또한 분단 트라우마다.  
246 내가 늘 생의 충동이기를 바란다 (사르트르) /고석근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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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6 2018-06-15
내가 늘 생의 충동이기를 바란다 (사르트르) 연(蓮) 허영자 꽃아 정화수(井華水)에 씻은 몸 새벽마다 참선(參禪)하는 미끈대는 검은 욕정(欲情) 그 어둠을 찢는 처절한 미소로다 꽃아 연꽃아. 모 중학교에서 한 남학생이 ‘거기’라는 말을 썼다가 한 여학생에게 ‘성적(性的)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학교폭력위원회에 제소되었다고 한다. 그 남학생은 학폭위 조사를 받으며 ‘맨붕’이 되었다고 한다. ‘엄마, 나 여학생들하고는 말도 하지 않을 거야! 거기라는 말이 왜 문제인 거야?’ 사춘기 아이들에게 ‘성적인 문제’는 워낙 예민하기에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큰 상처를 남길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사랑하는 소녀 베아트리체를 만나자 그의 삶이 180도 바뀐다. 방탕한 생활을 완전히 끝내게 된다. 서양의 전래 동화 ‘미녀와 야수’에서는 미녀가 야수를 사랑하자 야수는 왕자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사랑’은 이렇게 한 인간의 정신을 영적(靈的)인 성숙으로 이끈다. 낮은 차원의 인간을 벗어나 높은 차원의 인간으로 비약하게 한다. 그야말로 도교의 ‘우화등선(羽化登仙)’이다. 그런데 이 고매한 사랑은 성적인 욕망이 승화한 것이다. 연꽃이 진흙에서 피어나듯 한 인간의 ‘사랑’은 ‘성적(性的)인 욕망’에서 피어난다. 성적인 욕망은 사랑을 성취하고 완성해 가기 위한 근원적인 에너지인 것이다. ‘꽃아//정화수(井華水)에 씻은 몸/새벽마다 참선(參禪)하는//미끈대는 검은 욕정(欲情)/그 어둠을 찢는/처절한 미소로다//꽃아/연꽃아’ 그래서 우리는 숭고한 연꽃을 볼 때 뿌리가 내리고 있는 진흙도 함께 보아야 한다. 사춘기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남녀 간의 사랑’이 단지 육체적 욕망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의 ‘영혼의 깨달음’을 체험하는 ‘진리의 사건(바디우)’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은 온갖 ‘성 산업’에 노출되어 있다. 서구처럼 철저히 규제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성과 사랑’의 교육을 받으며 그들의 ‘성 충동’이 ‘고상한 사랑’으로 승화하는 진리 체험을 했으면 좋겠다.  
245 현장 휴머니즘 詩美學-김재순 시집 『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를 읽고 /박희용 file
편집자
984 2018-06-01
현장 휴머니즘 詩美學— 김재순 시집 『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를 읽고 舞鶴山人 박희용 시집을 받고, 찬찬히 읽으며 한 구비 시의 회랑을 돌 적마다 잔잔한 감동이 쌓여갔다. 시집을 덮자, 그동안 『경북작가』와 『들문학』에 실린 몇 편의 시를 읽으며 피상적으로 알았던 시인의 내면세계가 드디어 내 마음의 창으로 환하게 보였다. 그냥 지나가기에는 뭔가 아쉬워,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내 카페 양백산맥의 「명시감상」 방에 올리기 위해 내 마음의 젓가락으로 고른 작품이 전체 55편 중 17편으로 삼분지 일이다. 널리 알려야지 이 좋은 시들을, 자발적 의무감으로 한 자 한 자 치노라니, 시인이 문득 발생하는 시취를 가다듬어 글자로 옮기고, 구절을 만들고, 행을 만들고, 연을 만들어 한 편의 시를 완성하던 마음이 두~웅 울려왔다. 그 울림소리를 타고, 시인이 불러낸 사람들이 초추의 따신 햇볕 아래 수줍어하고 있었다. 누가 수줍어하는 그들을 시집 속에 불러냈는가?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민중이니 서민이니 인민이니 갖가지 이름으로 불러냈지만, 이처럼 ‘사람’으로 불러낸 시인이 있는가? 모두 다 ‘인간’으로 불러내 자기 앞에 줄 세웠다. 줄 세워 자기의 시선으로 깎고 다듬었다. 그리하여 자기와 같은 인간상을 만들어 놓고 만족했다. ‘인간’은 사회적 명제이지만 ‘사람’은 개체적 명제이다. ‘인간’은 타자의 시선이지만 ‘사람’은 자기의 시선이다. 타자의 시선을 가진 인간은 구속받지만, 자기의 시선을 가진 사람은 자유롭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타자의 시선을 버리고, 자기의 시선을 최대한 투영한다. 언어를 시적으로 조립한다는 재주 하나만 다를 뿐, ‘그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다. 그리하여 시인의 도움으로, 그들이 남이 붙여준 장식과 도구 없이 맨 사람으로 자기 몫의 삶의 현장에서 수줍게 웃고 선 것 만으로도 이 시집은 이 시대의 증언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김재순 시인의 관심은 사람이다. 시인이 하루 종일 생활하는 공간이 면사무소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시가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상의 앙금이다. 갖가지 경향, 유파, 이즘, 형식, 언어 등등으로 시를 나누어도 역시 시는 일상의 연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자기가 속한 일상의 연속에서 시를 앙금 짓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김재순 시인은 업무상으로나 일상으로나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 시집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질펀하다. 먼저 이 시집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깃털을 무수히 뽑아놓고 날아간 당신, 슬픈 장미 여인, 전태일, 오라버니, 할배뻘 남자, 폐지리어카 아저씨, 비정규직 남자, 공사장 잡부, 김씨 할매, 낮술 할마시, 포장마차 아줌마, 노부부, 이삭 줍는 할머니, 공무도하가 이룬 사내, 할인 가극 보는 여자, 서민 아파트 사람들, 동네 어르신들, 명절날의 ㄱ씨, 클럽 ‘황태자’의 여자, 쪼그라진 어머니, 절필을 생각하는 시인, 가시 박힌 오라비, 열일곱 처녀, 늙은 딸, 혼자서 몸이 젖던 여인, 그 집 아지매, 단풍나무 여인, 라면 한 끼 그대, 우리 발바리, 나를 두고 떠난 당신」 등 30명이다. 그런데 모두가 낯익은 얼굴이다. 모습과 하는 짓만 봐도 생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익숙한 사람들이다. 지위가 높거나 부자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기층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다. 시인 역시 속한 집단이 기층사회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익숙한 사람들을 불러냈을 것이다. 시인이 상류층에 속했다면 그들을 만날 인연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류층의 사람들 중에 자기 계급의 시를 쓴 사람들이 있는가? 과문하지만 그런 시는 전혀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시가 숨 쉬고 살아서 움직이는 곳은 기층사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은 기층사회에 속한 자로서의 시적 역할에 충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눈높이는 딱 정면이다. 위로 치켜보지도 않고 아래로 깔아보지도 않는다. 치켜보면 안달이 나고 깔아보면 오만해진다. 똑바로 봐야만 진솔하게 노래할 수 있다. 시인의 눈은 현실과 현장을 똑바로 본다. 물론 이 똑바른 시선을 시인만이 가진 것은 아니다. 세상의 시인들 중에도 똑바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김재순 시인과 다른 시인의 차이라면, 다른 시인들의 시선은 차가운 겨울처럼 냉엄하지만 이 시인의 시선은 복숭아꽃 피는 봄날처럼 따뜻하다는 점이다. 다른 시인들은 대상을 객관적 눈으로 관찰하는 입장이지만 이 시인은 관찰자가 아니라 대상과 동병상련하는 동반자이다. 등장인물들이 모두가 낯익은 얼굴이나,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겉만 보았지 속을 모른다. 그러나 이 시인은 대상의 겉을 뚫고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 김재순 시인이 ‘수줍어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지 살펴보자. <그에게 가다>에 등장하는 ‘깃털을 무수히 뽑아놓고 날아간 당신’은 이 시집에서 유일하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인물인데, 아마 시인이 생각하는 가상의 당신은 뮤즈가 아닐까? 또는 ‘재웅의 가슴에 바늘을 꽂게 하는 당신’일수도 있다. 하여튼 시인의 잠재의식에 깊숙이 찍힌 어떤 당신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임은 분명하다. 그가 누구일까? <슬픈 장미>의 여인을 보는 남성들의 눈은 얼마나 칙칙한가. 그러나 이 시인의 눈은 ‘작고 빵빵한 궁디’를 흔드는 여인의 심정을 통찰하고 있다. 생활을 위하여 꽃잎을 활짝 열지만, ‘거대한 아가리’로 ‘잡것’들을 잡아먹어 버린다는 상상으로 간들대는 자존심을 유지하는 여자. 일상의 밤에 피어나는 캐피탈리즘, 자본주의의 생리를 난도질해버린다. ‘그때의 순이 분희 영자’ 등 수많은 노동의 은행잎과 그 은행나무 전태일, ‘고요히 손 모으는 한 여자’가 이루는 <은행나무의 분신>은 48년 전의 과거와 현재 풍경을 비장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전태일’에 대한 시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시인은 결코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요란하게 전태일의 의미를 천년을 산다는 은행나무에 옮겨놓고 있다. <오라버니>는 국가경제가 발전할수록 버림받는 정도가 심해지는 이 시대 농촌의 현실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낸다. 국민경제가 발전하면 농촌경제도 덩달아 발전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농촌경제는 언제나 도시경제의 시다바리이다. 지난 날 경제개발계획 기간에는 공업노동자들의 식비를 낮추는 저미가와 저채소가 정책에 희생되었고, 지금은 여러 나라와의 FTA에서 희생물로 전락하였다. 외국산 쌀 수입 때문에 항상 쌀이 남아도니 쌀값이 오를 까닭이 없고, 흉년이라서 돈 좀 될 만하면 온갖 채소, 과일, 양념 등을 수입해서 상승세를 꺾어 버린다. 그러니 ‘어린 미루나무 그윽하게 바라보던 오라버니’는 그만 ‘더벅머리 충혈된 눈 머리띠 붉게 묶는 사람’이 되어 ‘가속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심각한 비극은 ‘오라버니’가 도시가 아니라 자기가 꽂은 ‘미루나무 숲’으로 쳐들어가는 것이다. 시인은 개화기 귀화목인 미루나무를 FTA의 상징으로 본다. 한때는 ‘칠월의 미루나무 이파리처럼 자신의 앞날도 반짝이리라’ 믿었던 미루나무가 이제는 ‘회창거리는 가지 무수히 뻗어 목을 옥죄려는 미루나무 숲’으로 변신하여 한국농촌을 피폐하게 하는 원흉이 되어버렸다. 한 때의 기대이든 FTA이든 미루나무가 모든 죄를 덮어쓰고 충돌 사고를 기다린다. 이 시대의 농민들은 탈출구가 없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고 막막하고 억울한 울화뿐이다. 차라리 도시를 향하여 가속 페달을 밟으면 속이나 시원하지 자기가 꽂던 미루나무 숲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거대한 자학이다. “우리 오라버니 살려주세요!”하며 이 시인은 절규한다. 양심 있는 도시인이라면 ‘오라버니’가 핸들을 돌려 도시로 쳐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농산물이 비싸다고 투정하지 말아야 한다. 문화생활비를 조금만 줄이면 이 땅 농촌의 수많은 ‘오라버니’들이 가속 페달을 밟다가 미루나무와 충돌하는 사고를 피할 수 있다. <뿌리를 내리다>에는 이 시대 농촌의 현실을 조용히 소화시키는 시인의 숨결이 있다. 도시인들은 농촌의 노총각들의-그것도 혼기를 훨씬 넘긴-동남아 아가씨 선택을 비판하며 농촌의 미래를 걱정한다. 그렇다고 자기 딸은 절대로 농부에게 시집보내지 않는다. 농촌의 미래를 걱정하는 정도는 그래도 양반이다. 오만한 자들은 “농촌 노총각들이 오죽 못났으면 장가도 못가서 후진국의 아가씨를 사 오냐”라며 비아냥댄다. 그러나 어차피 다른 방도가 없지 않는가. 성인도 시속을 따른다고, 농촌 총각에게 시집 올 처녀가 전무하니 대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기의 할배뻘은 될 것 같은 이 남자’도 한 때는 ‘요 이쁜 것 이쁜 것’ 하며 군침을 삼켰다. 그러나 이젠 ‘아기와 색시에게 보내는 그윽한 저 눈빛’이 되었다. 무엇이 그의 눈빛을 그윽하게 만들었을까? 그 의미를 도시사람들은 모른다. 뿐만 아니라 같은 농촌 사람들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안다. 그래서 ‘나직하고 또렷한 우리말’을 하는 여자는 ‘동네 앞 느티나무처럼 굳건하다’며, 세상이 도도하게 부정과 비판으로 흘러도, 시인은 혼자만의 따뜻한 가슴을 열어 그들 부부로 대표되는 한국 농촌의 행복을 기원한다. 이 시인만이 피폐한 농촌에 돋아나는 새싹을 예언하고 있다. 누가 이 시인만큼의 애정 어린 시선으로 농촌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가. 참여시를 쓰는 모든 시인들은 장가 못 가는 농촌 노총각들의 애환 정도까지를 시화 했을 뿐, 이국의 여성이 한국의 모성이 되고 흔들리던 눈빛의 ‘이 남자’가 ‘그윽한 저 눈빛’이 되는 경지를 모른다. <이십만 원의 힘>에 등장하는 ‘저 아저씨’를 누구 눈여겨 본 시인이 있는가? 드물 것이다, 아니 없을 것이다. 하물며 시인들이 그러할 진데 대중들은 전혀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 흔히 말해서 동정심, 측은지심이라고 하자. 물론 이 동정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무시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무관한 사람으로 스쳐 지날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인은 ‘폐지 아저씨’의 면사무소 출입의 시작과 끝을 유심히 본다. 기초생계비 수급대상자로 뽑히기를 이 시인은 진심으로 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한턱 쏘겠습니다”하는 ‘저 아저씨’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덥석 받아들인다. 부자들에겐 한 달 이십만 원이 하찮을 것이지만, 하루 종일 쏘다녀도 몇 천 원 폐지뿐인 리어카아저씨에겐 한 달에 이십만 원이 하늘만큼 높은 돈이다. 그래서 리어카는 감격한다. 그 옆에서 시인은 그 감격을 생생하게 현장보도 한다. 당사자보다 더 감격한 시인의 현장보도로 밑바닥 삶이 비로소 우리사회의 삶에 포함되고 있다. 시인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저 혼자만의 감정 도취인가? 저 혼자만의 지적 유희인가? 패를 지어 경쟁하는 시단에 적응하여 유명해지기 위함인가? 아니다. 기초생계 수급비 이십만 원에 독수리 날개를 달고 힘이 펄펄 나는 한 민초의 삶의 모습을 진솔하게 옮겨주는 것 하나 만으로도 이 시인은 시인이 이 시대에 할 일을 너끈하게 했다. <붉은 어깨 도요새>에서는 ‘머리털이 뭉치고 빠진 늙은’ 노가다, ‘낡은 민소매 셔츠’가 못다 덮은 ‘얇고 붉은 어깨’를 가진 늙은 노동자를 본다. 하지만 그는 ‘수척한 몸’이지만 ‘시베리아까지는 꼭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강골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과 같은 우리 사회 너머에는 ‘찌질한 하천’과도 같은 변두리가 있다. 변두리 인생들은 사회 축에도 끼지 못하고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한다. 스물 몇 번째 하천을 기웃거리는 도요새처럼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러나 이 시인의 눈 속에서는 그들에게도 인생이 있고 사회가 있다. 소리 소문 없이 스러져가는 것들에게도 내재한 의지가 있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일으켜 세우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이 시인의 역할은 장엄하다. ‘직원 명부에 이름이 없는 비정규직 그 남자’는 ‘불씨 하나 받으러’ <동학교당에 간다>. 먹고 사는 일이 늘 위태롭지만, 눈빛이 형형했던, 가죽신을 만들어 군용금을 대던 할아버지를 둔 후손답게 이제 자신이 불을 일으켜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동학교당에 열심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 곳곳에는 빈부귀천을 초월해서 한 가지 뜻을 세우고 용맹정진 하는 사람들이 박혀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이 시인의 눈에 발견되어 삶의 현장에 불려 나왔다. 비정규직이라고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많은 차별과 무시를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는 결코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간다. 이런 사람이 많아야 우리 사회가 든든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비정규직이라 하여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인은 이 비정규직 남자를 시의 무대에 올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외면보다 내면을 보기를 청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인은 우리 사회에 샘물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시인의 눈은 비정규직보다 삶이 고달픈 어느 홀아비에게로 옮겨진다. 채용 시 스펙보다 성품을 보겠다는 현대그룹 광고는 한갓 달콤한 <채용의 조건>일 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에겐 ‘어차피 꿈’이다. ‘소월과 휘트먼 우암과 플라톤 박헌영과 애덤 스미스의 얼굴이 자정까지 너울거리는’ 그의 내면세계 풍경은 여느 보통직장인의 경지보다 더 화려하지만, 역시 세상은 외면이 화려해야만 채용이 된다. 그러나 새벽부터 시작되는 밥벌이가 비록 고단하지만, 이미 ‘마음 한 곳을 절단’했기 때문에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기만의 화려한 내면세계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다. 시인은 엄숙한 목소리로 삶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물음을 세상에 던지고 있다. 고학력과 고스펙으로 좋은 직장에 채용되어 풍족하게 살아가는 일상과, 전자고 졸업 정도여서 채용되지 못해 날품을 팔며 근근이 살아가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내면세계를 가꾸는 일상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유의미한 인생이냐고. 마음 한 곳을 절단하지 않고서는 신비로운 내면세계를 열지 못하는가. 비구와 비구니, 신부와 수녀들이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까닭은 마음에서 ‘가정의 행복’을 절단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온 마음으로는 내면세계 신비의 극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 한 곳을 절단하기 위하여 얼마나 모진 결심을 했을 것인가! 그러나 한 곳이 절단된 마음은 온전한 마음이 아니다. 온전한 몸과 온전한 마음을 함께 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진 결심을 해서 마음 한 곳을 절단하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모두가 비구와 비구니, 신부와 수녀가 된다면, 곧 생산이 멈추어져 세상이 끝맺음 할 것 아닌가. ‘새벽마다 고물 트럭에 시동을 거는’ 그에게 꿈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정주영이 나타나 채용을 허락한다면, 그는 당장에 달려갈까 아니면 자기만의 화려한 내면세계를 가꾸기 위해 현재의 일상을 계속할까 궁금하다. 위안부 할머니와 소녀상 문제가 계속해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일본이 진정한 사죄를 할 턱이 없으니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픈 삶에 대해 동정하는 시선과 말은 많지만, 정작 그들의 삶을 깊이 있게 파고든 글들은 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글들은 그들의 아픈 상처보다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비인도적, 반인륜적 만행을 규탄하는 것들이다. 녹두꽃은 전봉준 장군의 이미지와 겹쳐 민중의 꽃이 되었다. 또한 녹두꽃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하게 피어나기 때문에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우리나라 백성들의 근성과 부합된다. 그 녹두꽃이 김씨 할매네 다랑논 논둑마다 자욱하게 피었다. 열세 살에 이국의 정글까지 끌려갔다 왔지만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 천지였다. 그것이 우리나라 농촌사회의 현실이요 인성이었다. 그러나 김씨 여성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정글의 지옥에서도 살아왔는데, 내 나라 내 고향에서 어찌 못살까’ 정말 모진 마음 하나에 의지하여 살아서 결국 다랑논을 이루었다. 풀뿌리 나무껍질 따라서 이어진 김씨 할매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상이다. 여느 여성들처럼 좋은 가문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아 유명해진 여성들보다 훨씬 삶의 궤적이 인간적이다. 김씨 할매를 일으켜 세워 오늘이 있도록 한 힘은 무엇인가. 바로 녹두꽃이다. 비록 작고 흔하지만 앙징스런 모습은 바로 우리 땅 여성들의 마음 그대로이다. 시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녹두꽃의 의미를 현실화 했다. 전봉준의 녹두꽃이 투쟁의 꽃이었다면 김씨 할매의 녹두꽃은 생존의 꽃이다. 생존 앞에 만물이 경건하다. 그러므로 김씨 할매의 녹두꽃 앞에 독자들은 옷깃을 여며야 한다. 시인은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웃 김씨 할매의 삶에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는 가슴에서 솟아나는 눈물로 김씨 할매의 상처를 치유해 준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꼴을 수없이 당한 위안부 할머니와 녹두꽃을 결합함으로써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강인하게 살아나는 조선의 여성상을 완성했다. 휴머니즘이 따로 있는가, 이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바로 휴머니즘 아닌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진심으로 운 사람들, 시인들 있는가? 어쩌면 위안부 할머니들을 앞 세워 개인이나 조직의 이익을 취하지는 않는가? 그러므로 소녀상 백 개 세우는 것보다 이 한 편의 시 <녹두꽃, 만발하다>가 김씨 할매와 동료들의 깨어진 몸과 마음을 동여매는 끈이 될 것이다. 층층 다랑논을 지키려고 올해도 논둑마다 녹두꽃이 만발이다, 고맙다 녹두꽃! 할마시, 꽃미남 총각, 백수 아들이 등장하는 <낮술의 힘>은 면사무소 부근에 사는 민초들의 힘든 삶의 모습 한 장면을 절실하게 그리고 있다. 공공근로권을 가진 면사무소 직원 총각에게 ‘우리 아들’ 공공근로 취직을 청탁하는 할마시, 그것도 맨 정신으로는 차마 하지 못하고 낮술 소주 두어 잔의 힘을 빌려야만 할 수 있는 시골 늙은 모성의 징징 우는 모습에서 농토가 없는 농촌 무산자들의 현실을 볼 수 있다. 도시는 그래도 노가다들이 입에 풀칠은 할 정도의 일거리가 있다. 하지만 농촌은 농번기 말고는 노가다들이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없다. 그래서 할마시에게는 낮술의 힘과 애원, 아부를 동원해서라도 ‘우리 아들’의 공공근로 취직 성사가 절박하다. 공공근로라고 해도 항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생계에 큰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워낙 벌이할 데가 없으니 공공근로라도 해야만 근근이 목숨 줄을 버틸 수 있다. 임용권을 쥔 꽃미남 총각은 “할머니, 왜 그려셔요” 질색이고, 행인들은 ‘할마시 낮술 먹고 총각에게 징징데네, 보기 추하네’ 써늘한 눈길로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아들을 취직시키기 위한 늙은 모성의 분투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이 촉촉하다. 낮술의 힘과 시인의 눈길 도움을 받아, 어머니의 보증대로 ‘휴지 줍는 거 잘하고, 풀 뽑는 거 잘 하고, 공중변소 청소도 잘하는’ 아들은 분명 공공근로 취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에겐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이 장면이 시인의 눈길에 의해 우주의 한 장면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부유한 물질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우리나라 도시 구석 곳곳에 서 있는 <포장마차 아줌마>마다 사연이 있다. 장만한 포장마차 앞에서 얼마나 모진 결심을 했겠는가. 그리고 하루하루를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는가. 그 중에 한 아줌마는 ‘늘 아득한 어딘가를 더듬던 그 눈빛의 홀아비’에게 ‘스물한 살을 내주었던 처녀’는 ‘홀아비의 아이’를 ‘그녀만 한 처녀’로 곱게 키웠다. 모진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는 여태 ‘스물하나의 얼굴’이다. 시인은 포장마차 아줌마의 순정을 깊이 들여다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사연을 아는 사람들마다 어리석은 눈먼 사랑이라고 뒷말을 하지만 시인은 그녀의 사랑을 순정 차원에서 이해한다. 그리고는 세상엔 많고 많은 사랑이 있지만, 이런 순정의 사랑도 있음을 세상에 알리며 포장마차 아줌마의 일생을 위로한다. 사람이 한 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곳은 활력소이다. 제아무리 풍요한 물질을 누리며 살더라도 마음에 활력소, 즐거움이 없다면 그냥 몸만 삐치는 것이다. 그에 비해 포장마차 아줌마에게는 스물하나의 순정이 평생의 활력소이다. 그래서 삶은 미록 남루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스물하나가 뱅뱅 돌며 활력을 일으킨다. ‘홀아비의 아이’는 어머니의 활력을 이어받아 이 땅의 좋은 모성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시란 게 무엇인가, 시인은 무엇을 써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이 시가 다시 묻고 있다. ‘어설픈 콧소리와 웃음’에 혹한 남정네들 몇이 겨우 술김에 관심할 뿐, 어느 누가 이 포장마차 아줌마의 삶을 눈여겨 볼 것인가. 이 땅 대부분의 시인들은 ‘아 이 포장마차 아줌마 생활력이 대단하구나’ 정도이다. 그러나 시인의 섬세한 눈길은 아줌마의 과거 현재 미래를 깊이 본다. 시인의 눈길에 따라 포장마차 아줌마의 순정이 화사하게 꽃으로 피어났다. 그 순정이 한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하고 한 생명을 반듯하게 키워냈음을,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순행하고 있음을 시인은 증언하고 있다. <어떤 노부부>에는 가난 속에서도 한평생 정성스레 살아온 노부부의 늦복이 소박하게 담겨있다. 젊은 날의 일꾼 부부는 소 돼지 똥치며 살아도 금슬이 좋았다. 늙어서도 할아버지는 끌고 할머니는 ‘한 수족 끌며’ 민다. 때는 ‘온몸에 땡볕을 꽂고’이다. 아들딸이 있지만, ‘막 실뿌리 내리기’ 때문에 더위 먹으면서 폐품을 모은다. 그런 노부부의 마음 때문에라도 아들딸의 뿌리는 반드시 굵어질 것이다. 또 그래야 세상이 공평하다. 조그만 임대아파트가 노부부에겐 천국이다. 폭염 속 호박잎이 되었던 몸과 마음이 ‘하얀 타일 깔린 욕실에서’ 다른 것 아무것도 없어도 ‘찬물 한 번 끼얹으면’ 금세 ‘펄펄 기운이 솟는’다. 그들에게 오만 원짜리로 가득 한 007가방을 주면 받을까? 분수에 넘친다고 펄펄 뛰며 사양할 게 분명하다. 그들이 한탕 불로소득을 노리며 평생을 살았다면 ‘조그만 임대아파트’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인심은 아파트 평수를 따지며 더 큰 평수 아파트를 향하여 평생 동안 질주한다. 같은 단지라도 평수의 차이에 따라 목에 힘주는 각도가 다르다. 그러니 세상인심에는 열 몇 평 임대아파트는 아파트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 몫의 인생을 성실하게 산 노부부에겐 임대아파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그들만의 순수한 행복이다. 세상인심에는 폐품리어카를 끌고 미는 노부부는 하찮은 것들일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다시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무엇이 인생의 행복인지 말한다. 누가 있어 시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 “참된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정신적 만족입니다”라는 종교가나 유명인사의 말 백 마디보다 이 시 <어떤 노부부> 한 편의 울림이 더 깊지 아니한가? 시인의 눈길을 따라 함께 바라보고, 시인의 목소리를 진심으로 듣는 세상인심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다. 이 시 앞에서 나 자신 마음의 옷깃을 여민다. <이삭 줍는 할머니>에서 시인은 절규한다. “국민소득 삼만 달러 시대란 겉으로만 번쩍이는 시대가 아니냐”고. 이 할머니들의 현재는 ‘그때 그날’과 다름이 없다. 물론 성장한 자녀들은 삼만 달러 시대에 얼추 가까울 거다. 그러나 세상에서 출세한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새 집을 장만해주었다는 소문은 귀하다. 말로만 “우리 집으로 오시지요”이다. 또한 어머니들도 짐이 될까봐 도시의 자녀들 집에 얹혀 사는 것을 극구 사양한다. 그러면서도 주운 지전의 이삭을 모아두었다가 손주들에게 용돈을 준다. 그래서 농촌에 남은 늙은 어머니들의 삶은 속을 다 내준 우렁껍질처럼 변함이 없다. 도시의 자녀들이 우렁껍질처럼 변함이 없는 모성을 기억하라고 시인은 절규한다. 시인이야 ‘공무도하가를 다 이루었네’라고 <예언의 노래>를 불러주지만, ‘서마지기 다랑논’과 ‘돌담 위 해바라기’와 ‘어린 것들 재롱’을 버리고 ‘그라목손’을 마신 ‘저 추레한 사내’가 낙동강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은 참혹하다. 물가에 가지런히 놓인 낡은 운동화와 꼬부랑꼬부랑 그의 어미가 엎어진 고무신이 만드는 풍경은 우리나라 농촌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마을이 왜 패총이 되었으며, 중년 사내는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국민소득 삼만 달러라고 광고치는 이 시대에 왜 농촌은 붕괴되어야만 하는가. 아마 중년 사내는 감당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빚을 짊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혼자만의 빚이라면 어떻게 하든지 살려고 발버둥 쳤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은 패총’이 되고를 보니 혼자만 망한 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쫄딱 망한 것 같다. 요즘은 덜하지만 한 때 축산 바람이 불어 너도나도 농협에서 거액을 빚내어 축산에 매달린 적이 있다. 근데 농협에서 거액을 빚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증이 필요한데, 농협에서는 그 보증을 마을 농민들이 서로서로 보증을 서는 ‘상호연대보증’제도로 하였다. 서로 보증만 서면 거액을 빌려서 축산업을 할 수 있으니 대부분의 농민들이 거기에 매달리고 말았다. 근데 축산업이 순조롭게 발전되었으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과잉 시설 투자에다가 한미 FTA 등으로 외국산 축산물이 싼값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축산물가가 폭락하고 말았다. 축산농들은 폐업 당하고 결국 거액의 농협 빚만 남게 되었다. 그것도 마을 상호연대보증을 섰으니, 한 농가가 무너지면 온 마을 농가가 무너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누구의 잘못인가? 거액 융자가 쉽다고 마구 축산업에 나선 농민의 잘못인가? 아니다, 농협을 앞세운 정부의 농촌정책이 잘못이다. 축산물 가격이 높으니 축산을 하고 싶은 것은 농민의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그러나 농협에서, 정부에서 축산정책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추진하며 상호연대보증 제도만 시행하지 않았다면 거액을 빚내기 어려운 농민들 다수가 포기하였을 것이다. 적정한 시설 투자가 이루어졌다면, 또한 외국으로부터 오는 수입 축산물을 어느 정도 차단했다면 축산물 가격이 안정되었을 것이다. 그 축산장려자금, 이율? 거의 공짜 아니었나? 떡밥에 달려드는 피라미 떼처럼 농사 짓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 수밖엔. 그 피해가 고스란히 축산 농민에게, 마을을 뒤덮어 버렸다. 오죽해서 ‘낡은 운동화 가지런히 물가에 벗어놓고’ 중년의 사내가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 갔을까. 누가 ‘그라목손’으로 한살이를 마친 축산업자의 영혼을 위로해 줄까? 다만 한 시인이 비장한 목소리로 공무도하가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선언한다. 마을 입구에 서서 선량한 농민이 죽어나가는 비극과 통째로 무너지는 농촌마을의 현실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발한다. 세상은 시인의 목소리를 똑똑하게 듣고, 중년 사내의 입수를 강제한 농협과 정부의 거대한 정책적 폭력을 비판해야 한다. <가극을 보다가>의 나는 시인 자신일 수도 있고 지방 소도시의 평범한 사람일 수도 있다. 사실 지방 소도시에 사는 서민들은 가극 보기가 어렵다. 기회도 없지만, 설혹 있다 해도 할인 받지 않고서는 보기가 어렵다. ‘나도 한번 보리라’ 작심하고 ‘할인 받은 S석에 앉아’ 가극을 본다. 수많은 사람들은 무대와 선율에 넋이 풀리지만 시인의 마음은 오히려 뒤돌아 고향의 들판으로 향한다. ‘보이지 않는 채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산밭에서 엉금거리는 팔순의 어머니와 서푼짜리 과원에 꽁꽁 묶인 남루한 오라비 내외가 실재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대로 천민인 그들의 노역’과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통속’의 가극, 그리고 빅또를 쪼이를 생각하는 나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서양문화와 동양문화 사이에 선 나의 의식은 긴 머리칼, 거친 목소리, 단순한 멜로디로 사랑과 고독과 자유를 노래한 빅또르 최에 공감하며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그러나 시인의 현실은 어디까지나 ‘할인 받은 S석’이고 고향의 들판이다. <네온의 꽃밭을 보다>에서는 같은 거리인데도 낮과 밤이 반대인 도시의 모습을 시인은 어두운 낯빛으로 깊이 신음한다. ‘저 거리’ 낮의 모습은 마음 한 곳이 절단된 어머니와 눈물 가득 머금은 어린이, 보행기에 몸을 기댄 노인들, 담요를 두른 중년의 남자, 맨발의 주정꾼이 잠을 자는 곳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낮의 풍경은 싹 사라지고, 목말을 탄 아이, 젊은 커플, 웨딩카 같은 자동차들이 계속 지나가는 형형색색 네온꽃이 만발하는 행복한 곳이 된다. 유리창에 기대선 사람이 어두운 낯빛으로 ‘저 거리’의 낮과 밤에 교대하는 가난과 부유, 고난과 행복을 염려하지만, 그 혼자만의 염려일 뿐, 사람들은 ‘꽃들의 축제장’에서 밤을 즐긴다. 시인이 관찰자로서만 끝날까? 그건 아니다 시인 역시 배우와 함께 ‘짓’ 하는 존재일 뿐이다. 시인이나 배우나 바깥사람이 볼 적엔 함께 군중이다. 다만 시인과 군중의 차이점은, 군중은 처음부터 끝까지 취하지만,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취하지만까지는 똑같으나 마지막 순간에는 냉큼 돌아선다. 돌아서서 이전의 모든 행위에 대해 구역질한다. 그러나 군중은 낮에 달게 자고 밤이 되면 다시 <네온의 꽃밭을 보다>의 주인공이 된다. 좁혀 말한다면 관중과 배우의 차이는 시각의 차이라고 할까. 관중과 배우의 차이는 어디쯤일까, 무엇일까. 누가 관중이고 누가 배우인가. 서로, 내가 관중이고 너는 배우이다 하며 자위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면 배우는 단순한 연기뿐이지만 관중은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빌미를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배우보다는 관중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 모두가 배우인데도 말이다. 하여튼 즐기면서도 불만하는 시인의 시선을 군중들은 느끼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하다. 일단 시인의 시선은 도덕률의 흐름이고, 군중의 즐거움은 세월의 흐름이기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면 <서민 아파트>. 평당 가격이 고공인 아파트 고급아파트는 품위를 논하지만, 저공인 아파트 <서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하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살고 싶은 대로 산다. 사람들은 내용이 형식보다 중요하다고 흔히 말하지만, 실제에서는 내용보다 형식을 더 중요하게 친다. 그래서 비싼 아파트 고급 아파트는 단정한 형식을 항상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산다. 하지만 서민 아파트 사람들은 준수해야 할 형식이 없기 때문에 내용을 스스럼없이 내놓는다. 방울토마토와 옥수수, 칸나가 창을 두드리고 키를 높이고 붉게 피고, 백발의 할머니와 좀 젊은 아낙들이 서로 의지하며, 두런두런 저녁 늦도록 사람 소리가 들리는 이곳이야 말로 사람 사는 세상임을 시인은 소박한 목소리로 세상에 내놓는다. ‘몇 십 년 후, 이 마을은 무엇으로 불릴까요/ 산이 마을을 덮어 만든/고려장골일까요’, 시인의 예언이 아니라도 농촌의 붕괴는 이제 상식이다. 아이 울음소리 끊어진지 이미 오래이고 학교는 면소재지에 불과 전교생이 이삼십 명 뿐인 초등학교 하나뿐이다. 읍소재지라도 변두리에는 빈집이 듬성듬성하고, 면소재지는 도로 가에 집들만 사람 사는 기척이 날 뿐이다. 산골마을은 혼자 사는 노인네들만 엉금엉금 기는 집 몇 채 말고는 빈집이 수두록 하다. 수십 년 후의 우리나라는 산업구조와 생활환경의 고급화 그리고 인구감소로 인해 대도시-중도시-소도시-읍소재지에만 사람이 살고 면소재지는 이하는 다시 산이나 골짜기로 환원될 것이다 그 전조로 이미 ‘산은/참나무와 자목 덤불/ 골목까지 내려보내/ 마을 정탐’ 중이다. 아니 정탐 중이 아니라 이미 반 쯤 점령했다. 무너지는, 아니 무너진 이 마을을 보며 <산이 준비하다>라고 시인은 예언하고 있다. 다음으로, 서울 친구들은 ‘아이들 용돈도/ 큰손으로 주는데’ <명절날의 ㄱ씨>는 ‘땅뙈기에 아무리/육수를 쏟아부어도’ 농자금에 학자금이 모자라고 새끼들 새 잠바 한 벌 못 사 입히고 팔순 어미 틀니 한 번 선뜻 못 해준다. 세상 사람들은 ㄱ씨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못났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처럼 도시로 진출하지도 못하고 땅만 파는 농투성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이 모두 잘 난 사람만 살 곳인가? 못난 사람도 끼여 살아가는 곳이 세상이다. 그리고 공평한 세상이라면, 수십 년 동안 땀 흘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ㄱ씨는 수십 년 동안 땀 흘려 일했어도 사는 형편이 남루하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시인은 ㄱ씨의 삶을 통해 농촌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열심히 일해 거둔 농작물이 제값을 받지 못하므로 빈곤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농산물 값은 그대로인데 공산품인 비료, 농약, 농자재, 잠바 값은 해마다 오르고, 틀니 등 의료비는 아득히 고가이다. 그러니 농사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 해결방법은 농산물 값이 오르는 것뿐이다. 그러나 농산물 값이 조금만 오르면 도시 소비자들은 물가가 비싸다고 난리를 친다. 도시사람들 자기들은 수십 수백만 원짜리 상품을 척척 사면서도 말이다. 그러면 정부는 곧 알아서 외국 농산물을 대량 수입해서 시장 가격을 떨어뜨린다. 농촌인구보다 훨씬 많은 도시인구들의 입과 손에 정권의 명운이 달렸기 때문이다. 누가 있어 우리나라 농촌의 수많은 ‘ㄱ씨’를 눈여겨보고, ‘조금씩 작아지는 ㄱ씨’가 더 이상 작아지지 않도록 하자고 외치는가. 이 시인이 있어 바로 가까이에 있는 ㄱ씨의 아픔을 대신 호소하고 있다. 클럽 ‘황태자’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자는 사내들에게는 한갓 유희의 대상이지만 시인에게는 <복숭아 꽃밭을 찾던 여자>로 보인다. 무릉도원, 복숭아 꽃밭이 갖는 이미지는 ‘행복’이다. 클럽의 접대부로서 병술과 줄담배, 남자들 가슴팍을 유랑하지만, 여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복숭아 꽃밭’ 이 이 황폐한 여인의 가슴 속에도 숨어 있음을 시인의 예리한 눈은 보았고, 또 그것을 자신 있게 증언하고 있다. 특히 ‘어린 것들 떼어놓고’ 유랑할 수밖에 없는 여인의 고달픈 삶의 원인을 직시하고, 반드시 ‘어린 것들’과 재회할 수 있을 거라는 강한 믿음을 투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성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다시 따뜻해지는 것이다. 황폐한 삶을 혐오하지 않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시인의 마음이 일파만파가 됨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시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오묘한 부분이 어디에나 있는 법, 클럽 황태자에 가는 사내들이여 후회 없이 즐기되, 거기에도 한 삶이 뜨겁게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자. 시는 정에 뿌리를 둔다. 그 정은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시인이다. 그런데 인간 중에서 시인은 희귀하다. 왜일까? 그것은 인간의 정은 본능의 것이지만 시인의 정은 본능의 시련을 거쳐 한 숨 돌린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은 철광석이다가 갓 제련된 무쇠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의 정은 그 무쇠덩이를 계속해서 정련한 강철과 같은 것이다. 이 시인이 클럽 황태자의 여자를 보는 눈은 몇 번의 정련을 거친 강철 눈이다. 이 시인의 눈은 시공을 넘나든다. 시도 때도 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지금까지 나타난 사람들하곤 빛깔이 다른 사람들이 떼로 나타나 꿈자리를 어지럽힌다. 귀신도 양반은 4대조가 현신하고 백성은 2대조가 현신한다. 그런데 더 유명한 양반은 불천위라고 5백 년 전 귀신도 또렷하게 현신한다. 그러나 동학의 귀신들은 자손이 없어 현신할 데가 없다. 그런데 상주의 한 여류시인이 쓴 <축제문(祝祭文)>을 듣고는 흐릿하게나마 현신한다. 그들은 ‘머리 풀어헤치고/ 창백한 얼굴 검은 입술 긴 손톱’이다. 아직 ‘영원한 안식처’를 못 찾아 가끔 시인의 꿈에 나타나 “네 이년!” 고함을 지르며 목을 조인다. 그러나 시인은 시 한 편 올리면서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이다. 그들은 무지렁이였음을 시인은 고백한다. 그러나 꿈은 ‘태풍이 되어/ 새로운 하늘을 펼치는 것이었지요’라며 확실하게 추인한다. ‘칠월의 나무, 넉넉한 상, 분향, 선녀보살’, 더구나 ‘달과 별’에다 ‘망초꽃들도 저렇게 손을 흔듭니다’로 막 내리니, 1894년 호남벌에서 ‘찢긴 육신들’은 충분히 해원하지 않았을까. 동학, 참 가슴 아픈 말이다. 동학혁명, 동학농민혁명, 동학운동 등 좋은 말 많지만 ‘동학난’이란 말이 실감난다. ‘동학난’에 대한 말과 글이, 지금까지도 무성했듯이 앞으로 우리민족사가 계속되는 한에는 남과 북에서 계속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가 있었다면, 쓰여진다면, 그 귀신들이 누구의 길을 안내 받을까? ‘선녀보살들이 길고 흰 명주수건을 감았다 풀면서 안내하는 길을’ 가지 싶다. 3부부터는 나와 나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첫째는 어머니다. ‘지팡이 소리’가 이 시인의 어머니일 뿐일까? 아니다, 이미 시에 등장하였음에 개인을 넘어 만인의 어머니이다. 왜냐? 시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며 가장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쪼그라진 어머니’가 왜 하필 ‘주차된 차량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가. 그것은 현실이다. 시골 노파가 조심성도 없이 죽 늘어선 자가용들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바로 오늘을 사는 자식과 어머니의 관계를 나타내는 캇! 한 장의 사진이다. 오늘날 도시에서 안락한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의 다수는 ‘쪼그라진 어머니’가 사는 시골이 고향인 부모를 둔 도시 태생들이다. 그들은 현재의 삶하고는 전혀 다른 고향을 경원한다. 일상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현재의 자기 모습에다가 가치를 부여할 따름이지,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가용을 주차시키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그들에게, 자기 차에 근접하는 노파는 위험인물이다. 혹여나 차가 다치지나 않을까 아내나 친구와 하하호호 웃고 지껄이면서도 눈은 힐끗힐끗이다. 그들에게 부모의 고향 시골을 얘기해준들 알 것인가 이해할 것인가. 이미 그들과 시골은 정서적 단절이 확연하다. 그러므로 ‘주차된 차량 속으로 들어갑니다’는 그들에겐 한갓 위험 요소일 뿐이다. ‘쪼그라진 어머니’를 너무 확대 해석 하는가? 의미를 지나치게 부하하는가? 그러나 ‘쪼그라진 어머니’는 이 시인 개인의 어머니가 아니라 만인의 어머니다. 가정에서는 시인 한 사람의 어머니였지만 시의 대상이 되면서 만인의 어머니가 되어버렸다. 금태 안경에 메이커로 쫙 빼입은 어머니를 상상하는가? 그것은 서양식 상상이다. 조선의 어머니는 ‘삐걱거리던’이다가 ‘낡은 목덜미까지’ 보이다가 ‘거뭇거뭇한 뒷머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쪼그라졌다. 왜? 누구나 늙으면 쪼그라지고 지팡이를 짚는다. 어디 죽을 때까지 탱탱한 사람 있는가. 허리 꼿꼿한 사람 있는가. ‘쪼그라진 어머니’도 한 때는 ‘맨 아래 꽃그림으로/ 애인의 마음을 읽고’, ‘내 마음도 당신과 같다고/ 꽃잎 뜯어 편지에 붙이던’ 청춘시절이 있었다. 콩 콩 ‘지팡이 소리’가 하루 종일 먹고살기에 바쁜 일상인들에게 생로병사의 본질을 잠시 생각하게 한다. 고향에 살면서도 ‘고향은 지상에 없다’라고 시인은 이를 악문다. 고향이 왜 사라졌는가. 우선 시인 자신이 성장했다. 성장한 눈으로 보는 고향은 무언가 허전하다. 자연환경이 변하고 사람들이 변했다. 동심을 함께 하던 친구들이 떠나고 동네 오라버니와 이웃 아주머니들도 도시로 떠나거나 늙어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결코 고향을 버리지 않는다. ‘환삼덩굴까지도 그리워라 그리운’, ‘내 심중에 들어찬 고향’이다. 그러나 고향을 다시금 생각하는 시인은 ‘내 시가 부끄럽다’며 <절필을 생각>한다. 지금까지 쓴 시와 시인이란 이름표가 ‘농투성이 둘째 오라버니’ 앞에 부끄럽다. 추곡 수매하던 날, 오라버니가 ‘해장술 몇 잔에 휘감겨’, ‘멱살잡이 주먹질로 피멍 든’ 모습을 보며 ‘왜 저 지랄이야’ 소리쳤던 것이 이제야 부끄럽다. 왜냐면, 폭염의 몰매를 맞으며, 어둠을 향해 탈곡기 전조등을 쏘아대며 농사일에 골몰하는 오라버니와 현장에서 함께 했고, 나이 들어 세상 물정을 넓게 접하며, 추곡 수매가가 농업노동의 강도에 비해 터무니없음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도시 소비자들은 쌀값이 오르면 싫어한다. 싸고 맛있는 쌀을 원한다. 폭염의 몰매를 맞으며 익은 배가 고가이면 비싸다고 불평한다. 굵고 시원한 배가 고급 커피 한 잔 값보다 못한 데도 말이다. 레저에는 십만 원 단위로 돈을 쓰면서도 말이다. 과거 산업화 초기와 중기에 걸쳐서, 벼농사는 농민들이 하지만 추수한 벼의 가격은 정부가 매겼다. 저곡가정책이 연속되었다. 저임금을 주며 산업노동자들을 부리기 위해서는 농산물 가격이 낮아야만 했다. 농산물 중에서도 중심인 쌀은 반드시 정부의 통제 하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쌀값이 조금 오를 만하면 저가의 외국쌀을 수입해서 곡가 상승을 막았다. 경제가 발전하고 삶의 질이 풍요해지기 시작하면서 정부는 슬슬 추곡 수매 양을 줄였다. 농민들이 수매하고 남은 쌀을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해도 쌀 소비가 줄어든 시장에서는 헐값일 뿐이었다. 한미 FTA 후부터는 값싼 미국 쌀이 밀려들어오면서 시장에서 경쟁이 안 된다. 그래서 농민들은 해마다 11월이면 생산한 전량 추곡 수매와 수매가 인상을 요구하며 상경 시위를 한다. 그러나 도시소비자들은 농민들의 추곡 수매 투쟁을 불평한다. ‘까짓 거 농민들이 벼농사를 안 지으면 미국 쌀 수입해다 먹으면 되지 뭐’하며 단순하게 생각한다. 도시소비자들은 자기들의 원뿌리, 부모들의 고향이 시골임을 잊어버렸다. 기억해도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여긴다. 시대가 바뀌면서 농업도 바뀌고 있다. 과거 할 게 벼농사뿐이었던 시대가 가고 농업도 다양한 형태를 띄게 되었다. 이제 추곡 수매가 때문에 ‘멱살잡이 주먹질’을 하거나 상경 투쟁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하지만 농업의 본질인 벼농사만큼은 소중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농촌이, 농업 현실이 좋아지면, 시인은 절필 생각을 접고 다시 ‘시인이란 이름표’를 달고 ‘시어가 수정처럼 빛나는 시’를 쓸 것인가? 이어서 등장하는 <그 집 아지메>와 <위층에는 누가 살까>, 너무 흔해서 심드렁한 이웃 사람들도 일단 시의 무대에 등장하면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는다. 사회 속의 한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갖가지 음담을 펴놓고 흐물거리던 아낙네들’도 ‘바람 없는 숲처럼/ 물소리만 내려 보내는 위층’의 존재도 세월이 가면 ‘조금씩 소멸’한다. 시인의 시선은 <그리운 화개리>를 거쳐 <오늘의 스타>에 머문다. ‘머리카락의 서캐 범벅, 부스럼 딱지’ 흔하던 친구가 국민학교 동창 모임에서 스타가 된다. 그녀의 춤은 우리들이 ‘펄쩍펄쩍 뛰며 와와 소리를 지를’ 정도로 요란하다. 어린 날의 가난을 딛고 일어서 ‘공작의 날개처럼 활짝 펼친’ 친구의 성장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 촉촉한 물기가 맺힌다. 다음 시선은 ‘멍자’에게 머문다. ‘나처럼 홀로 늙어가는’ 멍자는 시인의 유일한 동거생물이다. 상상임신을 할 정도로 뜨거운 암컷 발바리의 목줄을 풀어놓으며 ‘너처럼 뜨거울 때 있음을 고백하는’ 시인은<새로운 주민등록표>를 생각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한 마리 애완견이 완전한 가족이 된다. 시집 전편에 흐르는 현장 휴머니즘이 동물에게까지 넘친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춘정은 같다. ‘봄비 줄줄 흐르던 밤, 그만/ 남정네를 다락방에 숨기고 말았다는’ ‘그 집 아지매’나 ‘자신의 다리를 깨물다가 목줄을 물어뜯으며 발광하는’ 발바리나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한갓 생물일 뿐이다. ‘첫사랑이 고개 돌리지 않았다면 이만한 딸아이 내게도 있을지 몰라 벙그는 목련꽃 같은 스물하나 눈 내리는 창가에 처연하던 스물하나’ -뿌리를 내리다- 시인은 시로 말한다. 시인의 일생은 한 권의 시집에 담긴다. 해마다 시집 한 권 너끈히 묶어내는 시인들이 숱하지만, 이 시인은 습작기 거쳐 문학지 발표 이십 년 가까운 세월 지나 이 한 권 시집, 그것도 백을 넘지 못하는 55편으로 평생 시업을 일단은 정리한다. 그래서 여러 편 곳곳에 ‘첫사랑의 아픔’을 고백하고 있다. ‘그대여/ 라면 한 끼처럼 간단하게 끝낸 그대여/ 그래도, 저 나무에/ 마음 한 잎 달아두었나// <느티나무 그늘>, ‘사람이라면 중년이 넘었겠지만/ 나처럼 홀로 늙어갑니다// <새로운 주민등록표>, ‘인숙이 집은 아직 그대로네/ 허름한 나무대문 희미한 갓전등/.../담배나 캔맥주 사러 나갔다가/ 슈퍼가 너무 멀어 인숙이 집 골목이/미로라서/ 미아처럼 헤매다 그곳에 흘러들었겠지// <어느 골목을 지나다>. 스물한 살의 첫사랑을 평생토록 기억의 창고에 넣어두고 사는 사람은 마음이 늙지 않는다. 늙음이 저만치 오면 문득 기억의 창고 문을 열고 첫사랑의 아픔으로 늙음을 물리친다. 그래서 시인의 눈은 늘 스물한 살의 아픔으로 촉촉이 젖어있다. 시인은 ‘첫사랑의 아픔’을 ‘포장마차 아줌마’처럼 반평생 지금까지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다. ‘오뉴월 서릿발 내리게 하는 당신/ 빠진 송곳니를 다시 돋게 하는 당신/ 제웅의 가슴에 비늘을 꽂게 하는 당신/ 나를 두고 떠난 당신/ <어느 골목을 지나다>’이지만, 저주하는 만큼 첫사랑은 심연이다. 그것은 순정이다. 남자들에겐 전혀 없지만, 여자들 중엔 아주 드물게 청춘의 순정을 가슴에 묻고 키우며 사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꽃잎이/ 돌부리와 마주쳐 멈칫하다가/ 곧 흘러갑니다/ 내 마음 옛일에 걸려 휘청하다가/ 곧 흘러갑니다’. 다시 이어서, ‘작은 꽃송이/ 연어가 아니어서 돌아오지 못하듯/ 내 마음 거꾸로 선 비늘 하나 없어/ 돌아오지 못합니다/ 흐르고 흘러갑니다// <풀꽃을 냇물에 던지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처럼 연륜이 쌓이면서 ‘첫사랑의 아픔’을 한갓 추억으로 풀어버린다. 그러나 그에게서 그 아픔을 ‘시간의 묘약’으로 치유시키거나 빼앗았다면, 그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은 집요하다. 입으로는 ‘흐르고 흘러갑니다’라고 했지만, 연륜이 쌓일수록 다시 ‘거꾸로 선 비늘 있는 연어’가 되어 ‘첫사랑의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하여 무섭게 거슬러 오른다. 그러면서 개인의 아픔과 사회의 아픔이 연계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감추지 않고 시문학의 지평 위에 노출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 둘을 함께 치유하고 있다. 이 힘이 바로 이 시집을 관류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집의 시들은 온실 속 화초가 아니라 시문학의 아득한 지평에 실하게 뿌리 내린 들꽃들이다. 양어장의 식용 물고기가 아니라 강물 속 날물고기이다.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노동자는 많지만 노동시인은 귀하다. 마찬가지로 농민은 많지만 농민시인은 귀하다. 생활인은 많지만 생활시인은 귀하다. 풍경과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는 음유객은 많지만 음유시인은 귀하다. 서정인은 많지만 서정시인은 귀하다. 지식인은 많지만 지식시인은 귀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귀한 그들로 하여금 ‘시인’이란 말을 뒤에다가 붙이도록 하는가. 원론적인 정의이지만, ‘시인’이란 노동자, 농민, 생활인, 지식인들 가운데에서도 관찰력과 표현력이 우수한 사람들이다. 물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언어 조립 능력이 우수하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 본 바대로 김재순은 ‘시인’이란 말을 뒤에 붙여도 될 만하다. 그렇다면 ‘무슨 시인’이라 붙일까? 김재순 시인은 생업이 면사무소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어서 다양한 생활시를 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면소재지 사람들의 생활의 현장 눈높일 수밖에 없다. 또한 시골마을 출신이고, 농업에 종사하는 오라버니를 늘 보기 때문에 농촌사회의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다. 그러니 관찰의 각도가 맞아 쓴 생활 현장시가 최단거리로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현장에 몸담지 않은 시인들이 피상적으로 관찰하여 쓴 생활시나 농촌시들 과는 달리 진정성이 뭉클 만져진다. 시인의 장기이자 본령인 관찰과 묘사 차원을 넘어 대상과 합체가 됨으로써 진정한 생명을 얻었다. 해방 전후 프로시인들이나 산업화시대 민중시인들이 노동현장이나 농업현장 등의 생활전선에서 오래 생활하지도 않고서 쉽게 쓴 노동시와 농민시, 민중시가 갖는 작위성과 허구성에 비해 이 한 권의 시집은 이 시대의 간고한 민중생활을 증언하는 실제실감의 시적 생명력을 확보하고 있다. 고은의 30권짜리『만인보』가 비록 방대하지만 초점이 흐리다. 그러나 김재순 시인의 한 권『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는 비록 작고 소박하지만 알차고 값지다. 고은은 관념으로 만인을 훑었지만, 김재순은 가슴으로 이웃 수십 명과 함께 서로 안고 울었다. 다른 시인들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시적 영역이다. 그러므로 김재순에게는 일상생활 속에서 시를 건져 올렸으니 ‘생활시인’이요, 농업에 직접 종사하기도 하면서 시를 쓰기에 ‘농민시인’이요, 이 시집에 등장시킨 사람들을 통틀어 ‘민중’이라 부르기 때문에 ‘민중시인’이란 말을 붙이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그런데 또 하나, 내가 민중과 생활의 관점에서만 보았기 때문이지, 서정의 관점에서 보면 ‘서정시인’이란 말을 붙여도 괜찮을 만한 시들이『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 이 시집에도 여러 편 들어있다. 내 눈맛에 맞게 고른 시가 17편이지, 두 배나 되는 나머지 38편은 보는 사람 각자마다의 눈맛과 입맛에 따라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 후인들의 시각이 기대된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들은 여타의 서정시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는 수작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연애편지 그 처녀 열일곱 불 때서 밥하다가 애인의 편지를 받았지 양은솥처럼 달아오른 마음, 뒤란 꽃그늘서 편지 뜯었지 애인도 편지지에 꽃들을 잔잔하게 그렸고 그러나 몰라, 그녀는 잘 몰라 빽빽하게 쓴 글씨가 무언지 낱말 몇 개 건너뛰고 또 건너뛰고 맨 아래 꽃그림으로 애인의 마음을 읽은 그녀는 코흘리개 아우 불러 답장을 쓰고 글자로는 잘 못하지만 내 마음도 당신과 같다고 꽃잎 뜯어 편지지에 붙이던 검은 치마 귀밑머리 바람에 날리던 그 처녀 내 어머니 봄 6 가슴 속 꿈틀거림 치밀어 온몸에 노란 꽃이 피는 저 할마시 이젠 사뿐사뿐 흐드러진 개나리꽃 꺾어들고 돌담에 기대서서 애마르게 부르던 그 옛날처럼 점 찍어둔 영감 이름 부를 것인가 휘영청 달 밝은 시냇가 낮은 버드나무 아래서 물새처럼 열 오를 것인가 뿌연 거울에 얼룩진 얼굴을 들이밀며 처진데 쓸어 올리며 어쩌자고 전신에 달걀노른자 찍어 바르는가 아아. 고목 둥치에 움이 돋았네 느티나무 그늘 저 고목의 느티나무 이파리 왜 저렇게 많은지 이제는 알 것 같아 수령 오백 년, 저 나무 아래 빗물처럼 머물던 사람들 가면서 떠나면서 마음 한 쪽 베어서 걸어놓은 것이야 그대여 라면 한 끼처럼 간단하게 끝낸 그대여 그래도, 저 나무에 마음 한 잎 달아두었나 나 자꾸만 저 그늘에 이끌리네 유명한 서정시인들 중에는 평생 동안 목숨이니 사랑이니 고향이니 하면서 순수서정을 내세우는 시인들이 많다. 서정의 승화랄까, 발전과 확장이 정체 되었다. 그에 비해 김재순 시인의 서정시들은 그들의 도시서정적인 표현법에 비해 세련되지는 못했겠지만 기층생활민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표현하기 때문에 싱싱하게 살아있다. 하여튼 비교적 작은 이 한 권의 시집이 품고 있는 성격이 여러 갈래이다.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무릉도원, 따뜻한 봄날 복숭아꽃 활짝 피어있는 풀밭에서 하루 종일 소요하는 즐거움을 누구나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활인들에게는 어디까지나 꿈이요 환상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 팔자가 아무리 좋다 해도 해도 순간에 지나가는 형식이다. 인간이 즐길 수 있는 무릉도원은 없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복숭아 꽃밭’은 없다. 유토피아일 뿐이다. 그러나 김재순 시인의 ‘복숭아 꽃밭’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실재 한다. 어디에? 일상인들이 발견하지 못할 따름이지, 이미 현실 속에 들어 있다. 그가 가리키는 ‘복숭아 꽃밭’은 상상의 세계 멀리 아득히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일상의 현실 속에 감춰져 있다. 일상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만드는 따뜻한 관계, 견권지정繾綣之情 속에 ‘복숭아 꽃밭’이 있다. 그 일상의 현실에서 톡톡 발견한 인간의 진실이 현장 휴머니즘으로 흐르는 시인의 세계가 바로 복숭아 꽃밭이다. 그 ‘복숭아 꽃밭’으로 다 함께 가기 위해 시인은 세상사람 모두 들으라고 시를 쓴다. 또 하나, 시인 혼자서 가야할 길이지만 함께 할 여러 일행을 청한다. 그 중에서도 ‘잃어버린 사람’ 노무현을 먼저 부른다. 이 글을 쓸 처음엔 내가 아둔해서 누군지 몰랐다. 나중에 시인이 봉하 마을 노무현 묘소에 갔다 와서 쓴 시라고 알려줬다 숨이 막혀, 숨이 막혀 숨 막히는 곳에서 훨훨 날아올라 당신이 그토록 꿈꾸던 곳에 가셨겠지요 - - - 또 만나고 싶어요, 노무현. -그에게 가다- <그에게 가다>는 이 시집 맨 앞에 자리한다. 권두시이다. 뜬금없이 정치 얘기라서 좀 의외이지만, 노무현이란 사람을 통해서 정치를 보는 시인의 관점을 알 수 있다. 흔한 말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즉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백 사람의 시인보다 한 사람의 정치인이 사회를 좀 더 유연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물론 형식적인 면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형식이 내용을 지배할 수도 있는 법, 시인은 노무현 같은 정치인이 ‘복숭아 꽃밭’으로 민중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이 시집에서 갈파한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가장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정치에서 나올 수 있다. 리어카 아저씨가 ‘이십만 원의 힘’을 낼 수 있었던 원천은 ‘저소득층 복지정책’이 아닌가. 또한 ‘붉은 머리 도요새’를 이제 철새가 아니라 텃새가 되도록 하고, 내세울 것 별로 없는 젊은이들이 ‘채용의 조건’에서 해방되어 제각기 소질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하고, ‘김씨 할매네 다랑논 논둑마다 자욱하게 핀 녹두꽃들’이 활짝 웃도록 하고, ‘낮술 마신 할마시’의 아들이 공공근로에 뽑혀 어머니께 낮술을 자주 대접하도록 하고, ‘포장마차 아줌마’의 아이가 마음 어둡지 않게 자라도록 하고, 세상의 모든 ‘폐품 노부부들’이 조그마한 임대아파트라도 마련하도록 하고, 축산정책을 제대로 시행하여 ‘패총의 마을’을 다시 인정이 흐르는 마을이도록 하고, 그리하여 면소재지에 사람 냄새가 그득하도록 하고, ‘ㄱ 씨’가 땀 흘려 일한 만큼 살도록 하고, 1894년 동학항쟁에서 쓰러진 목숨 값이 21세기에는 비로소 고귀하도록 하고, 생명의 근원인 쌀이 제값을 받도록 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게 바로 정치가 아닌가. 그래서 기대가 컸다. 그러나 그는 ‘숨이 막혀, 숨이 막혀/ 숨 막히는 곳에서 훨훨 날아올라/ 당신이 그토록 꿈꾸던 곳에 가셨겠지요’가 되어버렸다. 정치적 희망이 졸지에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시인은 ‘피 묻은 깃털 하나/ 가슴에 꽂고/ 포석들을 어루만지며/ 저도 돌 하나 놓습니다’를 맹서하며, 후일을 기약하며 더욱 더 사람들 내면의 자각을 호소하기 위하여 눈 부릅뜨고 세상 사람들을 기록하였다. 하루를 이어 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꿈을 형상화 한 말, ‘무릉도원’은 절이나 교회, 성당에 가면 고승대덕님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하기 쉬운 말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표현하기 쉬운 시 화법이다. 그러나 이 시인이 이 시집에서 내는 목소리는 그들의 목소리보다 한결 생생하다. 그들은 인간의 목소리로 인간을 말하지만, 이 시인은 사람의 목소리로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말은 머리로 생각하도록 만들지만 이 시인의 말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단박에 점염되는 느낌이다. 서정이든 지성이든 고발이든, 가짜와 꾸밈이 허다한 시단에서, 김재순 시인의 시집이 울리는 진정성의 목소리는 동심원을 그리며 일파만파 퍼져 나갈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유명의 바람을 타면 들풀의 속삭임을 하찮게 여긴다. 그러나 심심산골 산꽃과 들꽃은 인간들이 봐주지 않아도 홀로 곱게 피었다가 조용히 진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산꽃이고 들꽃이다. 인간들은 그들을 통틀어 ‘잡초’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은 잡초가 아니라 저마다 귀하고 고운 존재의 표상이다. 누가 그들에게 한 줄기 따뜻한 시선을 보냈는가, 함께 희로애락하는가. 시인들? 하많은 시인들 중에 유독 김재순 시인만이 그들이 ‘귀하고 고운 존재의 표상’임을 조용히 언어로 기록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깊은 산사에서 울리는 저녁범종소리처럼. 시인은 시집으로 한 시절 한 평생을 매듭 한다. 뻥튀기하여 수십 권 시집을 낸다고 대단한가? 아니다, 단단하게 압축된 단 한 권의 시집으로도 충분히 시인의 소명을 다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집을 내는 즐거움을, 독자는 좋은 시들을 읽는 즐거움을 가진다. 그것이 바로 정신의 무릉도원, ‘복숭아 꽃밭’이 아니겠는가. 한 권 좋은 시집을 읽게 해 준 김재순 시인께 고개 숙여 옷깃을 여민다. 하여튼 이 글을 읽는 사람은 그 시집을 한 번 읽어 볼 일이다. 2018년 5월 5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쓰다  
244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권서각 file
편집자
823 2018-05-27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오월이다. 5월을 가리키는 말은 여럿이다. 계절의 여왕이라고도 하고 신록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어린이이날과 어버이날이 있어 가정의 달이라고도 한다. 오월에는 소만(小滿)이 있는 달이기도 하다. 소만(小滿)은 이십사절기의 하나로 입하(立夏)와 망종(芒種) 사이에 들며, 만물이 점차 생장(生長)하여 천지에 가득 찬다고 한다. 눈을 들어 어디를 둘러보아도 시리도록 푸른 신록이다. 어떤 시인은 눈이 시리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했다. 우리고장에도 가로수가 잘 심어져 있다. 벚꽃이 지고 잎이 푸름을 더했다. 이팝나무에는 쌀밥 같은 하얀 꽃이 한창이다. 우리 꽃 이름에는 슬픔이 묻어 있다. 산은 많은데 들은 적어서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나뭇가지에 하얗게 핀 꽃이 마치 이밥처럼 보였으리라. 그래서 이팝나무가 되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꽃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까. 쌀밥을 아직도 이밥이라 부르는 이가 있다. 이씨 왕조가 들어서서 처음으로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쌀밥을 이밥이라 불렀다 한다. 이팝꽃 조팝꽃 슬프도록 하얀 꽃이다. 누가 사는지 모르는 어떤 집의 담장에는 넝쿨장미가 붉게 피어서 지나는 사람을 보고 웃고 있다. 장미,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다. 꽃은 더할 나위 없이 이름답지만 치명적인 가시를 숨기고 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비록 죽음에 이를지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할 만큼 아름다운 꽃이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장미를 사랑해서 결국 장미 가시에 질려 죽었다고 한다.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수로부인이었다. 수로부인은 강릉 태수 순정공의 부인이다. 경주에서 강릉으로 부임해 가는 길에 가는 곳마다 사건이 일어난다. 역사는 미인이 있는 곳에 전쟁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클레오파트라가 그러했고 양귀비가 그러했다. 순정공 일행이 동해안을 따라 강릉 가는 길에 잠깐 쉴 때였다. 수로부인의 눈에 벼랑에 핀 진달래꽃이 들어왔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열어 흰 이를 드러내며 꽃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아무도 벼랑에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할 때 소를 몰고 가던 어떤 노인이 이 광경을 보았다. 노인은 고삐를 놓고 벼랑에 올라가 꽃을 꺾어서 노래를 부르며 수로부인에게 바쳤다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 노인으로 하여금 벼랑에 오르게 했다. 사랑의 힘이다. 수로부인, 그녀도 오월의 장미와 같은 아름다움을 지녔으리라. 오월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소녀에서 성숙한 여자의 중간 어디쯤이리라. 잎에 비유한다면 신록이요 꽃에 비유한다면 장미꽃이리라. 비록 이루어질 수 없을지라도, 혹은 치명적인 가시에 찔려 죽을지라도 무릎을 꿇고 고백하고 싶은 계절이다. 오월이시어, 계절의 여왕이시어, 소 몰고 가다가 고삐를 놓고 무릎 꿇고 고백하노니, 부디 미투(Me too)라 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마시라.  
243 생각하지 말고 보라! (비트겐슈타인)/고석근 file
편집자
770 2018-05-21
생각하지 말고 보라! (비트겐슈타인) 부두 위 흄 한밤중 고요한 부두 위 밧줄 드리운 높다란 돛대 끝에 달이 걸려 있다. 그렇게 멀어 보이던 것은 놀다가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풍선뿐이다. 임신하여 배가 불러오는 엄마에게 이제 막 말문이 트인 아기가 어눌한 발음으로 ‘내 동생 없어.’ 하더란다. 병원에 갔더니 정말 가상 임신이었다고 한다. 아기 눈에는 세상만사가 그냥 보이나 보다. 그래서 왕양명은 누구나 타고 나는 이 마음, ‘양지(良知)’를 잘 가꾸면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소식이 뜸했던 중학교 동창이 카톡을 보내왔다. 처음에는 ‘유머’를 몇 개 보내더니 ‘좌빨’ ‘월남 패망’ ‘북침’ 이런 말들이 들어 있는 남북정상회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아, 가짜 뉴스구나!’ 척 봐도 조악한 합성 사진으로 보이는데, 공무원으로 퇴직한 그의 눈에는 사실로 보인단 말인가? 이런 경우 경험상 어떤 말, 논리로도 그와의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만일 그가 아예 공부를 하지 않고 일자무식으로 살았다면 이런 가짜 뉴스에 놀아날까? 경험만이 지식의 전부인 그의 눈은 ‘가짜다!’ 벌거숭이 임금님을 본 아이처럼 소리치고 말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내노라하는 지식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질문을 하자 현란하게 답변을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계속 질문을 던지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스스로 자신들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식한 사람은 용감하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끝내 죽여 버렸다. 지금 이 땅의 지식인들은 어떨까? 나는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과 얘기하며 대개의 경우 ‘교언영색(巧言令色)’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보다 못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그들의 글과 말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내 안의 ‘동심(童心)’을 키우고 싶다. 이탁오는 말했다. ‘동심(童心)은 마음의 처음이다... 자라면서는 도리(道理)라는 것이 견문(見聞)을 좇아 들어오고, 그것이 마음의 주인이 됨으로써 동심을 잃게 된다. 오래되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많아지고... 그로 인해 훌륭한 이름을 떨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아 이를 떨치는 데 힘쓰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심을 잃게 되고, 좋지 않은 명성이 추하다는 것을 알아 이를 감추는 데 힘쓰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심을 잃게 된다.’ 고등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강의하며 그들 앞에 서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처럼 공부하면 너희들은 아예 공부하지 않는 것만 못해!’ ‘그렇다고 내가 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제대로 인문학을 가르쳐줄 수 있나?’ 나는 아이들에게 내 얘기를 해주었다. ‘내가 만일 지금 중학생이라면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농사를 배워 고향에서 농사짓고 살 거야. 공부는 여기저기 다니며 배우고 글을 쓰고 벗을 사귀며 신나게 살아갈 거야!’ 내 머리는 온갖 지식들로 와글거린다. 그래서 ‘생각’이라는 것들이 내 마음에 항상 와글거린다. 도대체 나는 삶을 사는 것인가? 생각을 살고 있는 것인가? ‘한밤중 고요한 부두 위/밧줄 드리운 높다란 돛대 끝에/달이 걸려 있다. 그렇게 멀어 보이던 것은/놀다가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풍선뿐이다.’ 노자는 말했다. ‘마음을 비우고 배를 가득 채우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하라(허기심虛其心, 실기복實其腹. 약기지弱其志, 강기골强其骨.)’ 내 마음 속에 아득히 보이는 ‘놀다가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풍선’을 항상 잊지 않고 싶다. 이제 제대로 공부하는 법도 알고 삶의 비의도 어슴푸레 알 것도 같은데, 60이 훌쩍 넘어 버렸다. 너무나 오랫동안 매트릭스 속에 있었다. 세상이 너무나 낯설다. 왕양명은 죽을 때 유언을 해달라는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환하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