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사랑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인류를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입센)


꽃가루 속에
이용악  

배추밭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
숨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것은
어디서 네가 나즉히 부르기 때문에
배추꽃 속에 살며시 흩어놓은 꽃가루 속에
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


중학생이 되자 내게도 ‘사랑’이 왔다. 한 단발머리의 여학생을 보면 ‘배추밭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숨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기분이 되었다.

어릴 적 우리 집에서는 채소밭을 가꿨다. 봄이 되면 채소밭에서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났다. 아지랑이 사이로 나비들이 날고 종달새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 숨 막히는 느낌. 바로 ‘사랑’이었다.

나를 보며 하얗게 웃던 그 여학생은 지금껏 내 가슴에 생생하게 새겨져있다.

지금도 봄이 오면 가끔 그 여학생이 생각난다. ‘어디서 네가 나즉히 부르기 때문에/배추꽃 속에 살며시 흩어놓은 꽃가루 속에/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에서는 사랑(에로스)이 둘이다. 하나는 태초의 대모신(大母神) 가이아의 아들이다. 또 하나는 바다에서 태어난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프시케를 사랑한다. 아프로디테는 프시케에게 네 가지 과제를 주고 그 과제를 풀면 사랑을 허용하겠다고 선언한다. 프시케는 ‘인간의 정신’이라는 뜻이다.  

가이아의 아들 에로스가 ‘원초적 사랑’이라면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인간 문명사회의 사랑’일 것이다. 사회와 문명을 이룬 인간은 ‘원초적 사랑’을 넘어 정신(프시케)이 고양되어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인류의 집단적 지혜일 것이다.

봄 들판의 숨 막혔던 ‘내 첫사랑’은 그 뒤 더 이상 피어나지 못했다. 나는 여학생들을 멀리서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무협지의 허황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여학생들은 ‘하이틴 로맨스’의 허황한 세계에 들어갔다. 현실은 누추하고 사랑은 ‘아가페, 플라토닉의 세상’에 있었다.    

우리의 사랑(에로스)은 그리스 신화대로 둘로 선명하게 나눠져버렸다. 하지만 그 둘은 하나일 것이다. 인간 사회가 변화, 발전하며 하나의 사랑이 둘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사랑은 여전히 둘로 선명하게 나눠져 있다. 어느 작가는 플라토닉 사랑을 ‘플라스틱 사랑’이라고 비꼬았다.

‘육체적 사랑’ 없이 어찌 ‘정신적 사랑’이 있을 수 있는가? 하지만 우리 사회의 실상은 얼마나 슬픈가! 우리의 육체적 사랑은 정신적 사랑으로 피어나지 않는다. ‘적나라한 육체만의 사랑’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다. ‘정신적 사랑’은 육체가 없이 유령이 되어 허공을 떠돈다.

한때 ‘성 교육’이 유행했다. 이제 ‘사랑 교육’이 유행했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가면 우리 사회에 ‘사랑’이 사라질까 두렵다.

인간은 오랫동안 ‘종교’를 통해 거룩함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종교 시대’가 끝나고 ‘사랑’이 왔다. 인간은 사랑으로 거룩함을 경험했다. 근대 문학은 거의 다 ‘거룩한 사랑 이야기’다.  

‘사랑 없는 이 시대’는 얼마나 공허한가! 수많은 테러, 총기 사건, 묻지 마 범행은 사랑 없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