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복숭아 꽃밭을 찾아서

                                                                              -김재순 시집 『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

                                                                                                                                                                   고창근


1

요즘은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한다. 시인이 독자이고 시인 지망생이 독자인 기막힌 세상이다. 그러니까 시인이나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느 시인은 페북에서 자신에게 시집을 많이 보내주는데 앞으로 보내지 말라고 선언했다. 읽지도 않는 시집을 왜 보내느냐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미디어의 발달이나 다른 이유를 들어 시가 독자로부터 멀어진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준이 되지 않는 시들을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무분별하게 시집으로 내는 일부 출판사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수준 낮은 시집을 본 독자가 다음에 시집을 사 볼 엄두가 나겠는가. 하지만 무엇보다 시인의 책임이 제일 크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독자가 시를 안 읽게 한 범인은 바로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웃지 못할 현실인 것이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는 시를 쓰는 시인들. 그들이 시로부터 독자를 멀어지게 한다. 시인과 독자가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또한 현실을 무시하고 공중에 붕 뜬 얘기를 하는 시인들, 그들 또한 독자를 무시하고 시로부터 독자들이 달아나게 한다. 인간의 삶이 녹아있지 않은 시, 힘든 하루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도저히 공감되지 않는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은 시로부터 독자를 멀어지게 한다.


김재순 시인의 시집『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의 미덕이라면 쉬이 읽힌다는 것이다. 걸림이 없이 술술 읽힌다. 하지만 결코 가볍다는 말이 아니다. 주제는 깊되 시는 어렵지 않다는 말이다. 그만큼 습작을 오랫동안 치열하게 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살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굳건히 밟고 서서 시를 썼다는 것이다.


내 시가 부끄럽다

시인이란 이름표 장미처럼 달았거나

국어사전 눈 감고도 복사하듯 베끼거나

시어가 수정처럼 빛나는 시, 그

앞에서가 아니라네

오라버니, 내 오라버니

농투성이 둘째 오라버니

그 앞에서, 시 쓴다고

내 시가 부끄러워, 시 쓴다고 말 못하네

노모의 틀니 값도 아슬아슬한 배밭에서

폭염의 몰매를 맞던 오라버니, 나

시냇가 버드나무 아래, 물놀이를

거침없이 써내려가 부끄럽네

쳐들어오는 어둠을 향해 전조등을 쏘아대며

자정까지 탈곡기를 밀고 가던 오라버니, 나

달맞이꽃의 기다림만 노래해서 부끄럽네

추곡 수매하던 날, 해장술 몇 잔에 휘감겨

멱살잡이 주먹질로 피멍든 오라버니 ,나

왜 저 지랄이냐 소리쳐 부끄럽네

빈 우렁이 껍질 같아, 누런 거품만 일어

부끄럽네


- 「절필을 생각하다」전문



시가 얼마나 쉬운가. 초등학생이 읽어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시다. 현실을 외면한 시가 아니라 온 몸으로 껴안은 시다. 또한 김재순 시인의 문학관이 잘 드러난 시라고 할 수 있다.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봤자 “노모의 틀니 값도 아슬아슬”하게 나오는 농사꾼 오라버니 앞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꽃 얘기며 구름 얘기며 바람 얘기며 사랑 얘기를 쓰겠는가. 위선적인 시 때문에, 현실을 외면하는 아편 같은 시 때문에 시는 오래 전부터 독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위 시에서 오라버니는 생물학적인 오라버니보다는 이 척박한 땅의 농민 노동자 서민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시집에서는 이러한 오라버니가 자주 나온다. 농사꾼 오라버니에 대해 쓴 “NO FTA/NO FTA/깊은 그늘에 열매 곪아터지고”(「오라버니」). 농촌의 현실을 다룬 “웃옷을 풀어헤친 더벅머리 중년 사내/그라목손 병을 들고 비틀비틀 강가로 가고”(「예언의 노래」). 사는 지역이 수몰된 사람 이야기 “저기 갑판에 서 있는 사람/그 때 보상금 받아 도시로 떠날/꿈에 부풀었을 사람일까”(「충주호 물길을 따라가다」). 농사꾼 이야기 “작은 짐승처럼 얼진대던 오라비는”(「감」). 아픈 누이를 걱정하는 가난한 오라비 이야기 “소주 두어 병 홀로 마신다”(「가시가 박히다」). 시인은 이런 무수한 오라버니들 앞에서 허황된 시를 쓴 것이 부끄럽다고 절필을 생각하는 것이다.


2

장자는 『장자』「내편」<거협>편에서 도덕이나 지식은 일반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위정자라는 큰도둑을 위해 있는 것이라며 성인이나 지식인은 큰도둑을 위한 파수꾼에 불과하다고 했다. 도덕이나 지식, 문명 등을 백성에겐 억압과 수탈의 도구로 본 것이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도 이와 결단코 다르지 않다. 많이 배우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큰도둑이며 일반 서민들은 큰도둑에게 억압당하며 살아간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공감’이라고 한다. 인간은 타인에게 공감을 느끼는데 비해 동물들은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억압당하고 소외되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공감한다. 결코 안타깝게 바라보거나 감싸주지 않는다. 그냥 공감하는 것이다.



형광등 불빛으로

모여드는 친구들

저 너울거리는 얼굴들

 

가시덤불 속

먹이 찾은 흔적 없어

옥토에 뿌리 내린 듯 

푸른 잎 무성한데

아이들 용돈도

큰 손으로 주는데

 

아비가 쓰러지고

쟁기보다 키가 작던 그 해 봄부터

논 갈고 밭 갈고 몇 십 년

땅뙈기에 아무리

육수를 쏟아 부어도

농자금에 학자금도 모자란다고

 

쑥쑥 크는 새끼들

카시미론 새 잠바 하나 못 입히고

팔순의 어미에게

틀니 한 번 선뜻 못 해 준다고

 

서울, 서울

서울은 아직도

그리웁다고

소주잔 부딪칠 때마다

조금씩 작아지는 ㄱ 씨


- 「명절날의 ㄱ씨」전문



김재순 시인은 “논 갈고 밭 갈고 몇 십 년/ 땅뙈기에 아무리/ 육수를 쏟아 부어도/ 농자금에 학자금도 모자란다고” “쑥쑥 크는 새끼들/카시미론 새 잠바 하나 못 입히”기는 커녕 “팔순의 어미에게/ 틀니 한번 선뜻 못해” 주는 농촌의 현실을, 농민의 현실을 공감한다. 하지만 시인의 공감은 농촌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기초수급비 이십만 원으로”(「이십만 원의 힘」) 거나하게 쏘겠다는 아저씨. “주민등록표에 등재된/그의 전입지는/이곳이 스물 몇 번째” (「붉은 어깨 도요새」)인 그. “직원 명부에 이름이 없는 비정규직”(「동학교당에 간다」)의 그 남자. “폐기물 스티커가 붙은 책상서랍에는/이십 대 초반에 쓴/ 이력서가 잡동사니들과 쌓”(「채용의 조건」)인 그에게도 공감한다. 또한 “열세 살에 이국의 정글까지 끌려갔던 김씨 할매/깨어진 몸과 마음 얼기설기 동여매고 돌아왔지만/손을 잡는 사람보다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 천지에서/김씨, 할매 정글의 지옥에서도 살아왔는데/ 내 나라 내 고향에서 못 살까/겉보리 한 됫박에 종일 호롱기를 밟았고/장리송아지가 새끼를 낳고 낳아/저 다랑논 되었다네”(「녹두꽃, 만발하다」)의 위안부 할머니와 “일흔 넘은 할마시 징징 웁니다”(「낮술의 힘」)의 할마시, “폐품을 높게 실은 리어카 할아버지가 끌고/한 수족 끌며 할머니가 밀고 가” (「어떤 노 부부」) 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공감한다. 많이 배우고 돈 많은 사람들이 망쳐놓은 이 땅에 시인은 본능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공감하는 것이다.



3

『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에 흐르는 또 다른 결이 있다면 그건 욕망이다.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욕망이 아니라 장자가 말한 ‘자연적인 본성’으로서의 욕망이다. 그래서 시인의 욕망은 추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냥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들어온 지 여섯 해인 우리 발바리

사람이라면 중년이 넘었겠지만

나처럼 홀로 늙어갑니다

 

홍살문을 세우겠다는 욕심도 없으면서

나의 시야에 발바리를 묶어두고

뒷집에서 컹컹거리는 멍돌에게 마음 줄까 닦달합니다

분방한 혈통의 발바리 정말 환장하지요

자신의 다리를 깨물다가 목줄을 물어뜯으며 발광하더니

유방이 통통하고 누르면 흰 액이 나오는 거 있지요

 

산책 가서 내가 공중변소 갔을 때

늘어진 벚꽃가지 아래서 멍돌이와 어우러졌을까

다리를 깨물어도  삭지 않는 춘정이

안으로 뭉쳐 병이 된 걸까

문제아 딸을 둔 어미처럼 나는 불안한데

상상임신이라는 의사선생님 말씀

나는 개의 뒤통수를 두 대 갈기고

너처럼 뜨거울 때 있음을 고백하면서

목줄을 풀어놓습니다, 새로운 주민등록표를 생각합니다

 

세대주; 재순

자    ; 발바리

손    ; 멍자


- 「새로운 주민등록표」전문



이 세상에 누군들 ‘뜨거울 때’가 없었겠는가. 시인은 비록 자신의 그림자인 개의 뒤통수를 치는 것으로 자신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담벽에 가지 한 개  확 그으면/화락/화락花樂/화락和樂/그대의 중년도 타오르겠다”(「봄7」)는 속마음을 얼마나 솔직히 자연스럽게 표현했는가. 한 때 농부의 아내였던 여인의 “꽃잎를 활짝 여는 장미”(「슬픈 장미」)나 척박한 환경에서도 ‘화들짝 깨어나는’ 꽃 “네 입술에 꽃이 피네”(「패랭이꽃」), 먹고 살기 위해서 클럽 ‘황태자’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자 “어린 것을 떼어놓고/남자들 가슴팍을 유랑하던 여자, 저 여자” (「복숭아 꽃밭을 찾던 여자」)의 욕망은 아름답다.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에 따른 웃음이 아니라 자연스런 본성에서 우러나기 때문이다. “저 혼자 흔들리던 여인 하나”(「반야사에서」)나 “근질거리던/꽃멍울/툭 터지고”((「그 집 아지매)」),의 그 집 아지매의 ‘속 마음’. “내 마음 그를 좇았네”(「그리운 화개리」)와 “제 안에 광폭한 바람 일어 몸부림치는 단풍나무”(「오늘의 스타」), “가슴 속/꿈틀거림 치밀어/온몸에 노란 꽃이 피는/저 할마시”(「봄6」)의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어쩔 수 없는 욕망도 아름답다. 타고난 자연적 본성이기 때문이다.



4

어쩌면 시인이 찾고자 하는 복숭아 꽃밭은 오라버니를 비롯해 이 땅의 노동자 농민들의 꿈이 있는 곳,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밀려나 주변부로 살아가는 서민들의 희망이 펼쳐지는 곳이 아닐까. 아니다. 어쩌면 “가슴에/처음으로 당신을 들여놓았던/내 낯빛도 저랬을 거야”(「벚꽃」) 의 그 당신인지도 모르겠다.


고창근/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소도(蘇塗)』장편소설『신윤복, 욕망을 욕망하다』서사시집 『아리랑 아라리요』외 다수


<사람의 문학>2018 봄호 통권8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