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지 말고 보라! (비트겐슈타인)


부두 위


한밤중 고요한 부두 위
밧줄 드리운 높다란 돛대 끝에
달이 걸려 있다. 그렇게 멀어 보이던 것은
놀다가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풍선뿐이다.


임신하여 배가 불러오는 엄마에게 이제 막 말문이 트인 아기가 어눌한 발음으로 ‘내 동생 없어.’ 하더란다. 병원에 갔더니 정말 가상 임신이었다고 한다.

아기 눈에는 세상만사가 그냥 보이나 보다. 그래서 왕양명은 누구나 타고 나는 이 마음, ‘양지(良知)’를 잘 가꾸면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소식이 뜸했던 중학교 동창이 카톡을 보내왔다. 처음에는 ‘유머’를 몇 개 보내더니 ‘좌빨’ ‘월남 패망’ ‘북침’ 이런 말들이 들어 있는 남북정상회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아, 가짜 뉴스구나!’  

척 봐도 조악한 합성 사진으로 보이는데, 공무원으로 퇴직한 그의 눈에는 사실로 보인단 말인가? 이런 경우 경험상 어떤 말, 논리로도 그와의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만일 그가 아예 공부를 하지 않고 일자무식으로 살았다면 이런 가짜 뉴스에 놀아날까? 경험만이 지식의 전부인 그의 눈은 ‘가짜다!’ 벌거숭이  
임금님을 본 아이처럼 소리치고 말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내노라하는 지식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질문을 하자 현란하게 답변을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계속 질문을 던지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스스로 자신들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식한 사람은 용감하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끝내 죽여 버렸다. 지금 이 땅의 지식인들은 어떨까? 나는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과 얘기하며 대개의 경우 ‘교언영색(巧言令色)’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보다 못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그들의 글과 말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내 안의 ‘동심(童心)’을 키우고 싶다. 이탁오는 말했다. ‘동심(童心)은 마음의 처음이다... 자라면서는 도리(道理)라는 것이 견문(見聞)을 좇아 들어오고, 그것이 마음의 주인이 됨으로써 동심을 잃게 된다. 오래되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많아지고... 그로 인해 훌륭한 이름을 떨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아 이를 떨치는 데 힘쓰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심을 잃게 되고, 좋지 않은 명성이 추하다는 것을 알아 이를 감추는 데 힘쓰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심을 잃게 된다.’

고등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강의하며 그들 앞에 서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처럼 공부하면 너희들은 아예 공부하지 않는 것만 못해!’ ‘그렇다고 내가 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제대로 인문학을 가르쳐줄 수 있나?’

나는 아이들에게 내 얘기를 해주었다. ‘내가 만일 지금 중학생이라면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농사를 배워 고향에서 농사짓고 살 거야. 공부는 여기저기 다니며 배우고 글을 쓰고 벗을 사귀며 신나게 살아갈 거야!’  

내 머리는 온갖 지식들로 와글거린다. 그래서 ‘생각’이라는 것들이 내 마음에 항상 와글거린다. 도대체 나는 삶을 사는 것인가? 생각을 살고 있는 것인가?

‘한밤중 고요한 부두 위/밧줄 드리운 높다란 돛대 끝에/달이 걸려 있다. 그렇게 멀어 보이던 것은/놀다가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풍선뿐이다.’

노자는 말했다. ‘마음을 비우고 배를 가득 채우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하라(허기심虛其心, 실기복實其腹. 약기지弱其志, 강기골强其骨.)’

내 마음 속에 아득히 보이는 ‘놀다가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풍선’을 항상 잊지 않고 싶다. 이제 제대로 공부하는 법도 알고 삶의 비의도 어슴푸레 알 것도 같은데, 60이 훌쩍 넘어 버렸다.

너무나 오랫동안 매트릭스 속에 있었다. 세상이 너무나 낯설다.

왕양명은 죽을 때 유언을 해달라는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환하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