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6호...
   2020년 0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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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북맹(北盲)/권서각 file
편집자
846 2018-06-25
북맹(北盲) 북한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쓰이는 말 가운데 북맹(北盲)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것은 보여도 글자만 읽을 수 없는 사람을 문맹(文盲)이라고 하는데 컴맹이나 북맹은 문맹이라는 말을 패러디해서 새롭게 만들어 쓰는 말이다. 다른 것은 다 볼 수 있는데 북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북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북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국가정보원 사람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민들은 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북은 남쪽에서 괴뢰도당이라 부르는 누구나 갈 수 없는 금단의 지역이다. 우리가 북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극도로 제한된 경로를 통해서 공급되는 것이 전부다. 텔레비전의 ‘남북의 창’이나 종편의 ‘모란봉 클럽’ 또는 ‘이만갑’ 관에서 주도하는 안보교육 정도가 고작이다. 그러면도 우리는 북에 대해서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심리학자 김태형 박사는 그 답을 분단 트라우마에서 찾는다. 트라우마(trauma)는 일반적인 의학용어로는 외상(外傷)을 뜻하나,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신적으로 심한 충격을 받으면 불안이 찾아오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한국전쟁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역사를 65년이나 이어왔다. 그 과정에서 북은 우리의 주적이 되었고 극단적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북에서 쓰는 말도 쓰지 못했다. 어릴 때 자주 쓰던 동무라는 말도 친구로 바꾸어 쓰며 노동자라는 말도 자유롭게 쓰지 못하고 근로자라고 한다. 운동회 때 청군 홍군으로 편을 나누던 것도 청군 백군으로 바뀌었다. 그간 남쪽 정권은 권력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였다. 민주화 이후 무고하게 희생된 사건들이 재심을 통하여 무죄 판결을 받고 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된 후다. 우리사회에서 가장 치명적인 말이 북과 관련된 말이다. 그래서 누구나 혹시 자기의 말이 북과 관련이 있을까 습관적으로 자기검열을 하며 산다. 공포는 트라우마를 형성한다. 분단 트라우마는 우리의 일상을 흔들어 놓고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게 한다고 심리학자들은 진단한다. 우리사회는 북한사람과 북한정권의 구분도 분명하지 못하다. 북한정권은 미워할지라도 북한동포는 미워할 필요가 없음에도 북이라면 무조건 미워한다. 우리는 공산당을 쳐부수자고 하지만 북에는 공산당이 없다. 없는 것을 미워하고 쳐부수자고 한다. 트라우마 현상이다. 시장에서 나물을 파시는 부동산도 없는 할머니가 ‘종부세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남북회담을 보도하는 텔레비전을 보시던 어떤 어른이 ‘또 얼마나 퍼 주어서 저러노.’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들었다. 왜 미워하는지, 누구를 미워하는지 모르고 미워한다. 이 또한 분단 트라우마다.  
246 내가 늘 생의 충동이기를 바란다 (사르트르) /고석근 file
편집자
943 2018-06-15
내가 늘 생의 충동이기를 바란다 (사르트르) 연(蓮) 허영자 꽃아 정화수(井華水)에 씻은 몸 새벽마다 참선(參禪)하는 미끈대는 검은 욕정(欲情) 그 어둠을 찢는 처절한 미소로다 꽃아 연꽃아. 모 중학교에서 한 남학생이 ‘거기’라는 말을 썼다가 한 여학생에게 ‘성적(性的)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학교폭력위원회에 제소되었다고 한다. 그 남학생은 학폭위 조사를 받으며 ‘맨붕’이 되었다고 한다. ‘엄마, 나 여학생들하고는 말도 하지 않을 거야! 거기라는 말이 왜 문제인 거야?’ 사춘기 아이들에게 ‘성적인 문제’는 워낙 예민하기에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큰 상처를 남길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사랑하는 소녀 베아트리체를 만나자 그의 삶이 180도 바뀐다. 방탕한 생활을 완전히 끝내게 된다. 서양의 전래 동화 ‘미녀와 야수’에서는 미녀가 야수를 사랑하자 야수는 왕자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사랑’은 이렇게 한 인간의 정신을 영적(靈的)인 성숙으로 이끈다. 낮은 차원의 인간을 벗어나 높은 차원의 인간으로 비약하게 한다. 그야말로 도교의 ‘우화등선(羽化登仙)’이다. 그런데 이 고매한 사랑은 성적인 욕망이 승화한 것이다. 연꽃이 진흙에서 피어나듯 한 인간의 ‘사랑’은 ‘성적(性的)인 욕망’에서 피어난다. 성적인 욕망은 사랑을 성취하고 완성해 가기 위한 근원적인 에너지인 것이다. ‘꽃아//정화수(井華水)에 씻은 몸/새벽마다 참선(參禪)하는//미끈대는 검은 욕정(欲情)/그 어둠을 찢는/처절한 미소로다//꽃아/연꽃아’ 그래서 우리는 숭고한 연꽃을 볼 때 뿌리가 내리고 있는 진흙도 함께 보아야 한다. 사춘기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남녀 간의 사랑’이 단지 육체적 욕망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의 ‘영혼의 깨달음’을 체험하는 ‘진리의 사건(바디우)’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은 온갖 ‘성 산업’에 노출되어 있다. 서구처럼 철저히 규제되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이 ‘성과 사랑’의 교육을 받으며 그들의 ‘성 충동’이 ‘고상한 사랑’으로 승화하는 진리 체험을 했으면 좋겠다.  
245 현장 휴머니즘 詩美學-김재순 시집 『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를 읽고 /박희용 file
편집자
1060 2018-06-01
현장 휴머니즘 詩美學— 김재순 시집 『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를 읽고 舞鶴山人 박희용 시집을 받고, 찬찬히 읽으며 한 구비 시의 회랑을 돌 적마다 잔잔한 감동이 쌓여갔다. 시집을 덮자, 그동안 『경북작가』와 『들문학』에 실린 몇 편의 시를 읽으며 피상적으로 알았던 시인의 내면세계가 드디어 내 마음의 창으로 환하게 보였다. 그냥 지나가기에는 뭔가 아쉬워,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내 카페 양백산맥의 「명시감상」 방에 올리기 위해 내 마음의 젓가락으로 고른 작품이 전체 55편 중 17편으로 삼분지 일이다. 널리 알려야지 이 좋은 시들을, 자발적 의무감으로 한 자 한 자 치노라니, 시인이 문득 발생하는 시취를 가다듬어 글자로 옮기고, 구절을 만들고, 행을 만들고, 연을 만들어 한 편의 시를 완성하던 마음이 두~웅 울려왔다. 그 울림소리를 타고, 시인이 불러낸 사람들이 초추의 따신 햇볕 아래 수줍어하고 있었다. 누가 수줍어하는 그들을 시집 속에 불러냈는가?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민중이니 서민이니 인민이니 갖가지 이름으로 불러냈지만, 이처럼 ‘사람’으로 불러낸 시인이 있는가? 모두 다 ‘인간’으로 불러내 자기 앞에 줄 세웠다. 줄 세워 자기의 시선으로 깎고 다듬었다. 그리하여 자기와 같은 인간상을 만들어 놓고 만족했다. ‘인간’은 사회적 명제이지만 ‘사람’은 개체적 명제이다. ‘인간’은 타자의 시선이지만 ‘사람’은 자기의 시선이다. 타자의 시선을 가진 인간은 구속받지만, 자기의 시선을 가진 사람은 자유롭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타자의 시선을 버리고, 자기의 시선을 최대한 투영한다. 언어를 시적으로 조립한다는 재주 하나만 다를 뿐, ‘그 사람들’과 조금도 다름없다. 그리하여 시인의 도움으로, 그들이 남이 붙여준 장식과 도구 없이 맨 사람으로 자기 몫의 삶의 현장에서 수줍게 웃고 선 것 만으로도 이 시집은 이 시대의 증언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김재순 시인의 관심은 사람이다. 시인이 하루 종일 생활하는 공간이 면사무소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시가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상의 앙금이다. 갖가지 경향, 유파, 이즘, 형식, 언어 등등으로 시를 나누어도 역시 시는 일상의 연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면 시인이 자기가 속한 일상의 연속에서 시를 앙금 짓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김재순 시인은 업무상으로나 일상으로나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왔다. 그래서 이 시집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질펀하다. 먼저 이 시집에 등장하는 사람들을 살펴보자. 「깃털을 무수히 뽑아놓고 날아간 당신, 슬픈 장미 여인, 전태일, 오라버니, 할배뻘 남자, 폐지리어카 아저씨, 비정규직 남자, 공사장 잡부, 김씨 할매, 낮술 할마시, 포장마차 아줌마, 노부부, 이삭 줍는 할머니, 공무도하가 이룬 사내, 할인 가극 보는 여자, 서민 아파트 사람들, 동네 어르신들, 명절날의 ㄱ씨, 클럽 ‘황태자’의 여자, 쪼그라진 어머니, 절필을 생각하는 시인, 가시 박힌 오라비, 열일곱 처녀, 늙은 딸, 혼자서 몸이 젖던 여인, 그 집 아지매, 단풍나무 여인, 라면 한 끼 그대, 우리 발바리, 나를 두고 떠난 당신」 등 30명이다. 그런데 모두가 낯익은 얼굴이다. 모습과 하는 짓만 봐도 생활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익숙한 사람들이다. 지위가 높거나 부자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기층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다. 시인 역시 속한 집단이 기층사회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익숙한 사람들을 불러냈을 것이다. 시인이 상류층에 속했다면 그들을 만날 인연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류층의 사람들 중에 자기 계급의 시를 쓴 사람들이 있는가? 과문하지만 그런 시는 전혀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시가 숨 쉬고 살아서 움직이는 곳은 기층사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은 기층사회에 속한 자로서의 시적 역할에 충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의 눈높이는 딱 정면이다. 위로 치켜보지도 않고 아래로 깔아보지도 않는다. 치켜보면 안달이 나고 깔아보면 오만해진다. 똑바로 봐야만 진솔하게 노래할 수 있다. 시인의 눈은 현실과 현장을 똑바로 본다. 물론 이 똑바른 시선을 시인만이 가진 것은 아니다. 세상의 시인들 중에도 똑바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김재순 시인과 다른 시인의 차이라면, 다른 시인들의 시선은 차가운 겨울처럼 냉엄하지만 이 시인의 시선은 복숭아꽃 피는 봄날처럼 따뜻하다는 점이다. 다른 시인들은 대상을 객관적 눈으로 관찰하는 입장이지만 이 시인은 관찰자가 아니라 대상과 동병상련하는 동반자이다. 등장인물들이 모두가 낯익은 얼굴이나, 대부분의 시인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겉만 보았지 속을 모른다. 그러나 이 시인은 대상의 겉을 뚫고 속에 들어가서 그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다. 김재순 시인이 ‘수줍어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지 살펴보자. <그에게 가다>에 등장하는 ‘깃털을 무수히 뽑아놓고 날아간 당신’은 이 시집에서 유일하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인물인데, 아마 시인이 생각하는 가상의 당신은 뮤즈가 아닐까? 또는 ‘재웅의 가슴에 바늘을 꽂게 하는 당신’일수도 있다. 하여튼 시인의 잠재의식에 깊숙이 찍힌 어떤 당신은 시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임은 분명하다. 그가 누구일까? <슬픈 장미>의 여인을 보는 남성들의 눈은 얼마나 칙칙한가. 그러나 이 시인의 눈은 ‘작고 빵빵한 궁디’를 흔드는 여인의 심정을 통찰하고 있다. 생활을 위하여 꽃잎을 활짝 열지만, ‘거대한 아가리’로 ‘잡것’들을 잡아먹어 버린다는 상상으로 간들대는 자존심을 유지하는 여자. 일상의 밤에 피어나는 캐피탈리즘, 자본주의의 생리를 난도질해버린다. ‘그때의 순이 분희 영자’ 등 수많은 노동의 은행잎과 그 은행나무 전태일, ‘고요히 손 모으는 한 여자’가 이루는 <은행나무의 분신>은 48년 전의 과거와 현재 풍경을 비장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전태일’에 대한 시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시인은 결코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요란하게 전태일의 의미를 천년을 산다는 은행나무에 옮겨놓고 있다. <오라버니>는 국가경제가 발전할수록 버림받는 정도가 심해지는 이 시대 농촌의 현실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낸다. 국민경제가 발전하면 농촌경제도 덩달아 발전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농촌경제는 언제나 도시경제의 시다바리이다. 지난 날 경제개발계획 기간에는 공업노동자들의 식비를 낮추는 저미가와 저채소가 정책에 희생되었고, 지금은 여러 나라와의 FTA에서 희생물로 전락하였다. 외국산 쌀 수입 때문에 항상 쌀이 남아도니 쌀값이 오를 까닭이 없고, 흉년이라서 돈 좀 될 만하면 온갖 채소, 과일, 양념 등을 수입해서 상승세를 꺾어 버린다. 그러니 ‘어린 미루나무 그윽하게 바라보던 오라버니’는 그만 ‘더벅머리 충혈된 눈 머리띠 붉게 묶는 사람’이 되어 ‘가속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심각한 비극은 ‘오라버니’가 도시가 아니라 자기가 꽂은 ‘미루나무 숲’으로 쳐들어가는 것이다. 시인은 개화기 귀화목인 미루나무를 FTA의 상징으로 본다. 한때는 ‘칠월의 미루나무 이파리처럼 자신의 앞날도 반짝이리라’ 믿었던 미루나무가 이제는 ‘회창거리는 가지 무수히 뻗어 목을 옥죄려는 미루나무 숲’으로 변신하여 한국농촌을 피폐하게 하는 원흉이 되어버렸다. 한 때의 기대이든 FTA이든 미루나무가 모든 죄를 덮어쓰고 충돌 사고를 기다린다. 이 시대의 농민들은 탈출구가 없다. 거대한 콘크리트 벽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고 막막하고 억울한 울화뿐이다. 차라리 도시를 향하여 가속 페달을 밟으면 속이나 시원하지 자기가 꽂던 미루나무 숲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거대한 자학이다. “우리 오라버니 살려주세요!”하며 이 시인은 절규한다. 양심 있는 도시인이라면 ‘오라버니’가 핸들을 돌려 도시로 쳐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농산물이 비싸다고 투정하지 말아야 한다. 문화생활비를 조금만 줄이면 이 땅 농촌의 수많은 ‘오라버니’들이 가속 페달을 밟다가 미루나무와 충돌하는 사고를 피할 수 있다. <뿌리를 내리다>에는 이 시대 농촌의 현실을 조용히 소화시키는 시인의 숨결이 있다. 도시인들은 농촌의 노총각들의-그것도 혼기를 훨씬 넘긴-동남아 아가씨 선택을 비판하며 농촌의 미래를 걱정한다. 그렇다고 자기 딸은 절대로 농부에게 시집보내지 않는다. 농촌의 미래를 걱정하는 정도는 그래도 양반이다. 오만한 자들은 “농촌 노총각들이 오죽 못났으면 장가도 못가서 후진국의 아가씨를 사 오냐”라며 비아냥댄다. 그러나 어차피 다른 방도가 없지 않는가. 성인도 시속을 따른다고, 농촌 총각에게 시집 올 처녀가 전무하니 대안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기의 할배뻘은 될 것 같은 이 남자’도 한 때는 ‘요 이쁜 것 이쁜 것’ 하며 군침을 삼켰다. 그러나 이젠 ‘아기와 색시에게 보내는 그윽한 저 눈빛’이 되었다. 무엇이 그의 눈빛을 그윽하게 만들었을까? 그 의미를 도시사람들은 모른다. 뿐만 아니라 같은 농촌 사람들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안다. 그래서 ‘나직하고 또렷한 우리말’을 하는 여자는 ‘동네 앞 느티나무처럼 굳건하다’며, 세상이 도도하게 부정과 비판으로 흘러도, 시인은 혼자만의 따뜻한 가슴을 열어 그들 부부로 대표되는 한국 농촌의 행복을 기원한다. 이 시인만이 피폐한 농촌에 돋아나는 새싹을 예언하고 있다. 누가 이 시인만큼의 애정 어린 시선으로 농촌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가. 참여시를 쓰는 모든 시인들은 장가 못 가는 농촌 노총각들의 애환 정도까지를 시화 했을 뿐, 이국의 여성이 한국의 모성이 되고 흔들리던 눈빛의 ‘이 남자’가 ‘그윽한 저 눈빛’이 되는 경지를 모른다. <이십만 원의 힘>에 등장하는 ‘저 아저씨’를 누구 눈여겨 본 시인이 있는가? 드물 것이다, 아니 없을 것이다. 하물며 시인들이 그러할 진데 대중들은 전혀 눈길을 주지 않을 것이다. 흔히 말해서 동정심, 측은지심이라고 하자. 물론 이 동정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무시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무관한 사람으로 스쳐 지날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인은 ‘폐지 아저씨’의 면사무소 출입의 시작과 끝을 유심히 본다. 기초생계비 수급대상자로 뽑히기를 이 시인은 진심으로 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한턱 쏘겠습니다”하는 ‘저 아저씨’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덥석 받아들인다. 부자들에겐 한 달 이십만 원이 하찮을 것이지만, 하루 종일 쏘다녀도 몇 천 원 폐지뿐인 리어카아저씨에겐 한 달에 이십만 원이 하늘만큼 높은 돈이다. 그래서 리어카는 감격한다. 그 옆에서 시인은 그 감격을 생생하게 현장보도 한다. 당사자보다 더 감격한 시인의 현장보도로 밑바닥 삶이 비로소 우리사회의 삶에 포함되고 있다. 시인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저 혼자만의 감정 도취인가? 저 혼자만의 지적 유희인가? 패를 지어 경쟁하는 시단에 적응하여 유명해지기 위함인가? 아니다. 기초생계 수급비 이십만 원에 독수리 날개를 달고 힘이 펄펄 나는 한 민초의 삶의 모습을 진솔하게 옮겨주는 것 하나 만으로도 이 시인은 시인이 이 시대에 할 일을 너끈하게 했다. <붉은 어깨 도요새>에서는 ‘머리털이 뭉치고 빠진 늙은’ 노가다, ‘낡은 민소매 셔츠’가 못다 덮은 ‘얇고 붉은 어깨’를 가진 늙은 노동자를 본다. 하지만 그는 ‘수척한 몸’이지만 ‘시베리아까지는 꼭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진 강골이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과 같은 우리 사회 너머에는 ‘찌질한 하천’과도 같은 변두리가 있다. 변두리 인생들은 사회 축에도 끼지 못하고 사람 축에도 끼지 못한다. 스물 몇 번째 하천을 기웃거리는 도요새처럼 그저 그렇게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그러나 이 시인의 눈 속에서는 그들에게도 인생이 있고 사회가 있다. 소리 소문 없이 스러져가는 것들에게도 내재한 의지가 있음을 간파하고, 그것을 일으켜 세우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이 시인의 역할은 장엄하다. ‘직원 명부에 이름이 없는 비정규직 그 남자’는 ‘불씨 하나 받으러’ <동학교당에 간다>. 먹고 사는 일이 늘 위태롭지만, 눈빛이 형형했던, 가죽신을 만들어 군용금을 대던 할아버지를 둔 후손답게 이제 자신이 불을 일으켜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동학교당에 열심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 곳곳에는 빈부귀천을 초월해서 한 가지 뜻을 세우고 용맹정진 하는 사람들이 박혀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이 시인의 눈에 발견되어 삶의 현장에 불려 나왔다. 비정규직이라고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많은 차별과 무시를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는 결코 좌절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자기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간다. 이런 사람이 많아야 우리 사회가 든든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비정규직이라 하여 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인은 이 비정규직 남자를 시의 무대에 올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외면보다 내면을 보기를 청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인은 우리 사회에 샘물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시인의 눈은 비정규직보다 삶이 고달픈 어느 홀아비에게로 옮겨진다. 채용 시 스펙보다 성품을 보겠다는 현대그룹 광고는 한갓 달콤한 <채용의 조건>일 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그에겐 ‘어차피 꿈’이다. ‘소월과 휘트먼 우암과 플라톤 박헌영과 애덤 스미스의 얼굴이 자정까지 너울거리는’ 그의 내면세계 풍경은 여느 보통직장인의 경지보다 더 화려하지만, 역시 세상은 외면이 화려해야만 채용이 된다. 그러나 새벽부터 시작되는 밥벌이가 비록 고단하지만, 이미 ‘마음 한 곳을 절단’했기 때문에 세상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기만의 화려한 내면세계를 계속 지켜나갈 수 있다. 시인은 엄숙한 목소리로 삶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물음을 세상에 던지고 있다. 고학력과 고스펙으로 좋은 직장에 채용되어 풍족하게 살아가는 일상과, 전자고 졸업 정도여서 채용되지 못해 날품을 팔며 근근이 살아가지만 자기 나름대로의 아름다운 내면세계를 가꾸는 일상 중에서 과연 어느 것이 유의미한 인생이냐고. 마음 한 곳을 절단하지 않고서는 신비로운 내면세계를 열지 못하는가. 비구와 비구니, 신부와 수녀들이 결혼을 거부하고 독신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까닭은 마음에서 ‘가정의 행복’을 절단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온 마음으로는 내면세계 신비의 극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 한 곳을 절단하기 위하여 얼마나 모진 결심을 했을 것인가! 그러나 한 곳이 절단된 마음은 온전한 마음이 아니다. 온전한 몸과 온전한 마음을 함께 했을 때 비로소 온전한 인간이 된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모진 결심을 해서 마음 한 곳을 절단하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모두가 비구와 비구니, 신부와 수녀가 된다면, 곧 생산이 멈추어져 세상이 끝맺음 할 것 아닌가. ‘새벽마다 고물 트럭에 시동을 거는’ 그에게 꿈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정주영이 나타나 채용을 허락한다면, 그는 당장에 달려갈까 아니면 자기만의 화려한 내면세계를 가꾸기 위해 현재의 일상을 계속할까 궁금하다. 위안부 할머니와 소녀상 문제가 계속해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일본이 진정한 사죄를 할 턱이 없으니 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위안부 할머니들의 아픈 삶에 대해 동정하는 시선과 말은 많지만, 정작 그들의 삶을 깊이 있게 파고든 글들은 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글들은 그들의 아픈 상처보다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비인도적, 반인륜적 만행을 규탄하는 것들이다. 녹두꽃은 전봉준 장군의 이미지와 겹쳐 민중의 꽃이 되었다. 또한 녹두꽃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하게 피어나기 때문에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우리나라 백성들의 근성과 부합된다. 그 녹두꽃이 김씨 할매네 다랑논 논둑마다 자욱하게 피었다. 열세 살에 이국의 정글까지 끌려갔다 왔지만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 천지였다. 그것이 우리나라 농촌사회의 현실이요 인성이었다. 그러나 김씨 여성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정글의 지옥에서도 살아왔는데, 내 나라 내 고향에서 어찌 못살까’ 정말 모진 마음 하나에 의지하여 살아서 결국 다랑논을 이루었다. 풀뿌리 나무껍질 따라서 이어진 김씨 할매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상이다. 여느 여성들처럼 좋은 가문에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아 유명해진 여성들보다 훨씬 삶의 궤적이 인간적이다. 김씨 할매를 일으켜 세워 오늘이 있도록 한 힘은 무엇인가. 바로 녹두꽃이다. 비록 작고 흔하지만 앙징스런 모습은 바로 우리 땅 여성들의 마음 그대로이다. 시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녹두꽃의 의미를 현실화 했다. 전봉준의 녹두꽃이 투쟁의 꽃이었다면 김씨 할매의 녹두꽃은 생존의 꽃이다. 생존 앞에 만물이 경건하다. 그러므로 김씨 할매의 녹두꽃 앞에 독자들은 옷깃을 여며야 한다. 시인은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과는 달리 이웃 김씨 할매의 삶에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그리고는 가슴에서 솟아나는 눈물로 김씨 할매의 상처를 치유해 준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꼴을 수없이 당한 위안부 할머니와 녹두꽃을 결합함으로써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강인하게 살아나는 조선의 여성상을 완성했다. 휴머니즘이 따로 있는가, 이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바로 휴머니즘 아닌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진심으로 운 사람들, 시인들 있는가? 어쩌면 위안부 할머니들을 앞 세워 개인이나 조직의 이익을 취하지는 않는가? 그러므로 소녀상 백 개 세우는 것보다 이 한 편의 시 <녹두꽃, 만발하다>가 김씨 할매와 동료들의 깨어진 몸과 마음을 동여매는 끈이 될 것이다. 층층 다랑논을 지키려고 올해도 논둑마다 녹두꽃이 만발이다, 고맙다 녹두꽃! 할마시, 꽃미남 총각, 백수 아들이 등장하는 <낮술의 힘>은 면사무소 부근에 사는 민초들의 힘든 삶의 모습 한 장면을 절실하게 그리고 있다. 공공근로권을 가진 면사무소 직원 총각에게 ‘우리 아들’ 공공근로 취직을 청탁하는 할마시, 그것도 맨 정신으로는 차마 하지 못하고 낮술 소주 두어 잔의 힘을 빌려야만 할 수 있는 시골 늙은 모성의 징징 우는 모습에서 농토가 없는 농촌 무산자들의 현실을 볼 수 있다. 도시는 그래도 노가다들이 입에 풀칠은 할 정도의 일거리가 있다. 하지만 농촌은 농번기 말고는 노가다들이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없다. 그래서 할마시에게는 낮술의 힘과 애원, 아부를 동원해서라도 ‘우리 아들’의 공공근로 취직 성사가 절박하다. 공공근로라고 해도 항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생계에 큰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워낙 벌이할 데가 없으니 공공근로라도 해야만 근근이 목숨 줄을 버틸 수 있다. 임용권을 쥔 꽃미남 총각은 “할머니, 왜 그려셔요” 질색이고, 행인들은 ‘할마시 낮술 먹고 총각에게 징징데네, 보기 추하네’ 써늘한 눈길로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아들을 취직시키기 위한 늙은 모성의 분투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이 촉촉하다. 낮술의 힘과 시인의 눈길 도움을 받아, 어머니의 보증대로 ‘휴지 줍는 거 잘하고, 풀 뽑는 거 잘 하고, 공중변소 청소도 잘하는’ 아들은 분명 공공근로 취직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유한 사람들에겐 지극히 하찮아 보이는 이 장면이 시인의 눈길에 의해 우주의 한 장면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부유한 물질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만. 우리나라 도시 구석 곳곳에 서 있는 <포장마차 아줌마>마다 사연이 있다. 장만한 포장마차 앞에서 얼마나 모진 결심을 했겠는가. 그리고 하루하루를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는가. 그 중에 한 아줌마는 ‘늘 아득한 어딘가를 더듬던 그 눈빛의 홀아비’에게 ‘스물한 살을 내주었던 처녀’는 ‘홀아비의 아이’를 ‘그녀만 한 처녀’로 곱게 키웠다. 모진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는 여태 ‘스물하나의 얼굴’이다. 시인은 포장마차 아줌마의 순정을 깊이 들여다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사연을 아는 사람들마다 어리석은 눈먼 사랑이라고 뒷말을 하지만 시인은 그녀의 사랑을 순정 차원에서 이해한다. 그리고는 세상엔 많고 많은 사랑이 있지만, 이런 순정의 사랑도 있음을 세상에 알리며 포장마차 아줌마의 일생을 위로한다. 사람이 한 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곳은 활력소이다. 제아무리 풍요한 물질을 누리며 살더라도 마음에 활력소, 즐거움이 없다면 그냥 몸만 삐치는 것이다. 그에 비해 포장마차 아줌마에게는 스물하나의 순정이 평생의 활력소이다. 그래서 삶은 미록 남루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스물하나가 뱅뱅 돌며 활력을 일으킨다. ‘홀아비의 아이’는 어머니의 활력을 이어받아 이 땅의 좋은 모성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시란 게 무엇인가, 시인은 무엇을 써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이 시가 다시 묻고 있다. ‘어설픈 콧소리와 웃음’에 혹한 남정네들 몇이 겨우 술김에 관심할 뿐, 어느 누가 이 포장마차 아줌마의 삶을 눈여겨 볼 것인가. 이 땅 대부분의 시인들은 ‘아 이 포장마차 아줌마 생활력이 대단하구나’ 정도이다. 그러나 시인의 섬세한 눈길은 아줌마의 과거 현재 미래를 깊이 본다. 시인의 눈길에 따라 포장마차 아줌마의 순정이 화사하게 꽃으로 피어났다. 그 순정이 한 사람의 삶을 아름답게 하고 한 생명을 반듯하게 키워냈음을, 그리하여 우리 사회가 순행하고 있음을 시인은 증언하고 있다. <어떤 노부부>에는 가난 속에서도 한평생 정성스레 살아온 노부부의 늦복이 소박하게 담겨있다. 젊은 날의 일꾼 부부는 소 돼지 똥치며 살아도 금슬이 좋았다. 늙어서도 할아버지는 끌고 할머니는 ‘한 수족 끌며’ 민다. 때는 ‘온몸에 땡볕을 꽂고’이다. 아들딸이 있지만, ‘막 실뿌리 내리기’ 때문에 더위 먹으면서 폐품을 모은다. 그런 노부부의 마음 때문에라도 아들딸의 뿌리는 반드시 굵어질 것이다. 또 그래야 세상이 공평하다. 조그만 임대아파트가 노부부에겐 천국이다. 폭염 속 호박잎이 되었던 몸과 마음이 ‘하얀 타일 깔린 욕실에서’ 다른 것 아무것도 없어도 ‘찬물 한 번 끼얹으면’ 금세 ‘펄펄 기운이 솟는’다. 그들에게 오만 원짜리로 가득 한 007가방을 주면 받을까? 분수에 넘친다고 펄펄 뛰며 사양할 게 분명하다. 그들이 한탕 불로소득을 노리며 평생을 살았다면 ‘조그만 임대아파트’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인심은 아파트 평수를 따지며 더 큰 평수 아파트를 향하여 평생 동안 질주한다. 같은 단지라도 평수의 차이에 따라 목에 힘주는 각도가 다르다. 그러니 세상인심에는 열 몇 평 임대아파트는 아파트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러나 자기 몫의 인생을 성실하게 산 노부부에겐 임대아파트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 그들만의 순수한 행복이다. 세상인심에는 폐품리어카를 끌고 미는 노부부는 하찮은 것들일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다시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무엇이 인생의 행복인지 말한다. 누가 있어 시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 “참된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정신적 만족입니다”라는 종교가나 유명인사의 말 백 마디보다 이 시 <어떤 노부부> 한 편의 울림이 더 깊지 아니한가? 시인의 눈길을 따라 함께 바라보고, 시인의 목소리를 진심으로 듣는 세상인심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아름다워질 것이다. 이 시 앞에서 나 자신 마음의 옷깃을 여민다. <이삭 줍는 할머니>에서 시인은 절규한다. “국민소득 삼만 달러 시대란 겉으로만 번쩍이는 시대가 아니냐”고. 이 할머니들의 현재는 ‘그때 그날’과 다름이 없다. 물론 성장한 자녀들은 삼만 달러 시대에 얼추 가까울 거다. 그러나 세상에서 출세한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새 집을 장만해주었다는 소문은 귀하다. 말로만 “우리 집으로 오시지요”이다. 또한 어머니들도 짐이 될까봐 도시의 자녀들 집에 얹혀 사는 것을 극구 사양한다. 그러면서도 주운 지전의 이삭을 모아두었다가 손주들에게 용돈을 준다. 그래서 농촌에 남은 늙은 어머니들의 삶은 속을 다 내준 우렁껍질처럼 변함이 없다. 도시의 자녀들이 우렁껍질처럼 변함이 없는 모성을 기억하라고 시인은 절규한다. 시인이야 ‘공무도하가를 다 이루었네’라고 <예언의 노래>를 불러주지만, ‘서마지기 다랑논’과 ‘돌담 위 해바라기’와 ‘어린 것들 재롱’을 버리고 ‘그라목손’을 마신 ‘저 추레한 사내’가 낙동강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장면은 참혹하다. 물가에 가지런히 놓인 낡은 운동화와 꼬부랑꼬부랑 그의 어미가 엎어진 고무신이 만드는 풍경은 우리나라 농촌의 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마을이 왜 패총이 되었으며, 중년 사내는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국민소득 삼만 달러라고 광고치는 이 시대에 왜 농촌은 붕괴되어야만 하는가. 아마 중년 사내는 감당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빚을 짊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자기 혼자만의 빚이라면 어떻게 하든지 살려고 발버둥 쳤을 것이다. 그러나 ‘마을은 패총’이 되고를 보니 혼자만 망한 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쫄딱 망한 것 같다. 요즘은 덜하지만 한 때 축산 바람이 불어 너도나도 농협에서 거액을 빚내어 축산에 매달린 적이 있다. 근데 농협에서 거액을 빚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증이 필요한데, 농협에서는 그 보증을 마을 농민들이 서로서로 보증을 서는 ‘상호연대보증’제도로 하였다. 서로 보증만 서면 거액을 빌려서 축산업을 할 수 있으니 대부분의 농민들이 거기에 매달리고 말았다. 근데 축산업이 순조롭게 발전되었으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과잉 시설 투자에다가 한미 FTA 등으로 외국산 축산물이 싼값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축산물가가 폭락하고 말았다. 축산농들은 폐업 당하고 결국 거액의 농협 빚만 남게 되었다. 그것도 마을 상호연대보증을 섰으니, 한 농가가 무너지면 온 마을 농가가 무너지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누구의 잘못인가? 거액 융자가 쉽다고 마구 축산업에 나선 농민의 잘못인가? 아니다, 농협을 앞세운 정부의 농촌정책이 잘못이다. 축산물 가격이 높으니 축산을 하고 싶은 것은 농민의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뛰어들었다. 그러나 농협에서, 정부에서 축산정책을 치밀하게 준비하고 추진하며 상호연대보증 제도만 시행하지 않았다면 거액을 빚내기 어려운 농민들 다수가 포기하였을 것이다. 적정한 시설 투자가 이루어졌다면, 또한 외국으로부터 오는 수입 축산물을 어느 정도 차단했다면 축산물 가격이 안정되었을 것이다. 그 축산장려자금, 이율? 거의 공짜 아니었나? 떡밥에 달려드는 피라미 떼처럼 농사 짓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 수밖엔. 그 피해가 고스란히 축산 농민에게, 마을을 뒤덮어 버렸다. 오죽해서 ‘낡은 운동화 가지런히 물가에 벗어놓고’ 중년의 사내가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 갔을까. 누가 ‘그라목손’으로 한살이를 마친 축산업자의 영혼을 위로해 줄까? 다만 한 시인이 비장한 목소리로 공무도하가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선언한다. 마을 입구에 서서 선량한 농민이 죽어나가는 비극과 통째로 무너지는 농촌마을의 현실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발한다. 세상은 시인의 목소리를 똑똑하게 듣고, 중년 사내의 입수를 강제한 농협과 정부의 거대한 정책적 폭력을 비판해야 한다. <가극을 보다가>의 나는 시인 자신일 수도 있고 지방 소도시의 평범한 사람일 수도 있다. 사실 지방 소도시에 사는 서민들은 가극 보기가 어렵다. 기회도 없지만, 설혹 있다 해도 할인 받지 않고서는 보기가 어렵다. ‘나도 한번 보리라’ 작심하고 ‘할인 받은 S석에 앉아’ 가극을 본다. 수많은 사람들은 무대와 선율에 넋이 풀리지만 시인의 마음은 오히려 뒤돌아 고향의 들판으로 향한다. ‘보이지 않는 채찍’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산밭에서 엉금거리는 팔순의 어머니와 서푼짜리 과원에 꽁꽁 묶인 남루한 오라비 내외가 실재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대로 천민인 그들의 노역’과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통속’의 가극, 그리고 빅또를 쪼이를 생각하는 나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서양문화와 동양문화 사이에 선 나의 의식은 긴 머리칼, 거친 목소리, 단순한 멜로디로 사랑과 고독과 자유를 노래한 빅또르 최에 공감하며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그러나 시인의 현실은 어디까지나 ‘할인 받은 S석’이고 고향의 들판이다. <네온의 꽃밭을 보다>에서는 같은 거리인데도 낮과 밤이 반대인 도시의 모습을 시인은 어두운 낯빛으로 깊이 신음한다. ‘저 거리’ 낮의 모습은 마음 한 곳이 절단된 어머니와 눈물 가득 머금은 어린이, 보행기에 몸을 기댄 노인들, 담요를 두른 중년의 남자, 맨발의 주정꾼이 잠을 자는 곳이다. 그러나 밤이 되면 낮의 풍경은 싹 사라지고, 목말을 탄 아이, 젊은 커플, 웨딩카 같은 자동차들이 계속 지나가는 형형색색 네온꽃이 만발하는 행복한 곳이 된다. 유리창에 기대선 사람이 어두운 낯빛으로 ‘저 거리’의 낮과 밤에 교대하는 가난과 부유, 고난과 행복을 염려하지만, 그 혼자만의 염려일 뿐, 사람들은 ‘꽃들의 축제장’에서 밤을 즐긴다. 시인이 관찰자로서만 끝날까? 그건 아니다 시인 역시 배우와 함께 ‘짓’ 하는 존재일 뿐이다. 시인이나 배우나 바깥사람이 볼 적엔 함께 군중이다. 다만 시인과 군중의 차이점은, 군중은 처음부터 끝까지 취하지만, 시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취하지만까지는 똑같으나 마지막 순간에는 냉큼 돌아선다. 돌아서서 이전의 모든 행위에 대해 구역질한다. 그러나 군중은 낮에 달게 자고 밤이 되면 다시 <네온의 꽃밭을 보다>의 주인공이 된다. 좁혀 말한다면 관중과 배우의 차이는 시각의 차이라고 할까. 관중과 배우의 차이는 어디쯤일까, 무엇일까. 누가 관중이고 누가 배우인가. 서로, 내가 관중이고 너는 배우이다 하며 자위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면 배우는 단순한 연기뿐이지만 관중은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빌미를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나 배우보다는 관중이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실은 인간 모두가 배우인데도 말이다. 하여튼 즐기면서도 불만하는 시인의 시선을 군중들은 느끼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하다. 일단 시인의 시선은 도덕률의 흐름이고, 군중의 즐거움은 세월의 흐름이기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면 <서민 아파트>. 평당 가격이 고공인 아파트 고급아파트는 품위를 논하지만, 저공인 아파트 <서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비슷하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살고 싶은 대로 산다. 사람들은 내용이 형식보다 중요하다고 흔히 말하지만, 실제에서는 내용보다 형식을 더 중요하게 친다. 그래서 비싼 아파트 고급 아파트는 단정한 형식을 항상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산다. 하지만 서민 아파트 사람들은 준수해야 할 형식이 없기 때문에 내용을 스스럼없이 내놓는다. 방울토마토와 옥수수, 칸나가 창을 두드리고 키를 높이고 붉게 피고, 백발의 할머니와 좀 젊은 아낙들이 서로 의지하며, 두런두런 저녁 늦도록 사람 소리가 들리는 이곳이야 말로 사람 사는 세상임을 시인은 소박한 목소리로 세상에 내놓는다. ‘몇 십 년 후, 이 마을은 무엇으로 불릴까요/ 산이 마을을 덮어 만든/고려장골일까요’, 시인의 예언이 아니라도 농촌의 붕괴는 이제 상식이다. 아이 울음소리 끊어진지 이미 오래이고 학교는 면소재지에 불과 전교생이 이삼십 명 뿐인 초등학교 하나뿐이다. 읍소재지라도 변두리에는 빈집이 듬성듬성하고, 면소재지는 도로 가에 집들만 사람 사는 기척이 날 뿐이다. 산골마을은 혼자 사는 노인네들만 엉금엉금 기는 집 몇 채 말고는 빈집이 수두록 하다. 수십 년 후의 우리나라는 산업구조와 생활환경의 고급화 그리고 인구감소로 인해 대도시-중도시-소도시-읍소재지에만 사람이 살고 면소재지는 이하는 다시 산이나 골짜기로 환원될 것이다 그 전조로 이미 ‘산은/참나무와 자목 덤불/ 골목까지 내려보내/ 마을 정탐’ 중이다. 아니 정탐 중이 아니라 이미 반 쯤 점령했다. 무너지는, 아니 무너진 이 마을을 보며 <산이 준비하다>라고 시인은 예언하고 있다. 다음으로, 서울 친구들은 ‘아이들 용돈도/ 큰손으로 주는데’ <명절날의 ㄱ씨>는 ‘땅뙈기에 아무리/육수를 쏟아부어도’ 농자금에 학자금이 모자라고 새끼들 새 잠바 한 벌 못 사 입히고 팔순 어미 틀니 한 번 선뜻 못 해준다. 세상 사람들은 ㄱ씨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못났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처럼 도시로 진출하지도 못하고 땅만 파는 농투성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상이 모두 잘 난 사람만 살 곳인가? 못난 사람도 끼여 살아가는 곳이 세상이다. 그리고 공평한 세상이라면, 수십 년 동안 땀 흘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ㄱ씨는 수십 년 동안 땀 흘려 일했어도 사는 형편이 남루하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시인은 ㄱ씨의 삶을 통해 농촌 경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열심히 일해 거둔 농작물이 제값을 받지 못하므로 빈곤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농산물 값은 그대로인데 공산품인 비료, 농약, 농자재, 잠바 값은 해마다 오르고, 틀니 등 의료비는 아득히 고가이다. 그러니 농사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다. 해결방법은 농산물 값이 오르는 것뿐이다. 그러나 농산물 값이 조금만 오르면 도시 소비자들은 물가가 비싸다고 난리를 친다. 도시사람들 자기들은 수십 수백만 원짜리 상품을 척척 사면서도 말이다. 그러면 정부는 곧 알아서 외국 농산물을 대량 수입해서 시장 가격을 떨어뜨린다. 농촌인구보다 훨씬 많은 도시인구들의 입과 손에 정권의 명운이 달렸기 때문이다. 누가 있어 우리나라 농촌의 수많은 ‘ㄱ씨’를 눈여겨보고, ‘조금씩 작아지는 ㄱ씨’가 더 이상 작아지지 않도록 하자고 외치는가. 이 시인이 있어 바로 가까이에 있는 ㄱ씨의 아픔을 대신 호소하고 있다. 클럽 ‘황태자’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자는 사내들에게는 한갓 유희의 대상이지만 시인에게는 <복숭아 꽃밭을 찾던 여자>로 보인다. 무릉도원, 복숭아 꽃밭이 갖는 이미지는 ‘행복’이다. 클럽의 접대부로서 병술과 줄담배, 남자들 가슴팍을 유랑하지만, 여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복숭아 꽃밭’ 이 이 황폐한 여인의 가슴 속에도 숨어 있음을 시인의 예리한 눈은 보았고, 또 그것을 자신 있게 증언하고 있다. 특히 ‘어린 것들 떼어놓고’ 유랑할 수밖에 없는 여인의 고달픈 삶의 원인을 직시하고, 반드시 ‘어린 것들’과 재회할 수 있을 거라는 강한 믿음을 투사하고 있다. 그리하여 모성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다. 이렇게 세상은 다시 따뜻해지는 것이다. 황폐한 삶을 혐오하지 않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시인의 마음이 일파만파가 됨으로써 말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은 시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오묘한 부분이 어디에나 있는 법, 클럽 황태자에 가는 사내들이여 후회 없이 즐기되, 거기에도 한 삶이 뜨겁게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자. 시는 정에 뿌리를 둔다. 그 정은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시인이다. 그런데 인간 중에서 시인은 희귀하다. 왜일까? 그것은 인간의 정은 본능의 것이지만 시인의 정은 본능의 시련을 거쳐 한 숨 돌린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은 철광석이다가 갓 제련된 무쇠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의 정은 그 무쇠덩이를 계속해서 정련한 강철과 같은 것이다. 이 시인이 클럽 황태자의 여자를 보는 눈은 몇 번의 정련을 거친 강철 눈이다. 이 시인의 눈은 시공을 넘나든다. 시도 때도 없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지금까지 나타난 사람들하곤 빛깔이 다른 사람들이 떼로 나타나 꿈자리를 어지럽힌다. 귀신도 양반은 4대조가 현신하고 백성은 2대조가 현신한다. 그런데 더 유명한 양반은 불천위라고 5백 년 전 귀신도 또렷하게 현신한다. 그러나 동학의 귀신들은 자손이 없어 현신할 데가 없다. 그런데 상주의 한 여류시인이 쓴 <축제문(祝祭文)>을 듣고는 흐릿하게나마 현신한다. 그들은 ‘머리 풀어헤치고/ 창백한 얼굴 검은 입술 긴 손톱’이다. 아직 ‘영원한 안식처’를 못 찾아 가끔 시인의 꿈에 나타나 “네 이년!” 고함을 지르며 목을 조인다. 그러나 시인은 시 한 편 올리면서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이다. 그들은 무지렁이였음을 시인은 고백한다. 그러나 꿈은 ‘태풍이 되어/ 새로운 하늘을 펼치는 것이었지요’라며 확실하게 추인한다. ‘칠월의 나무, 넉넉한 상, 분향, 선녀보살’, 더구나 ‘달과 별’에다 ‘망초꽃들도 저렇게 손을 흔듭니다’로 막 내리니, 1894년 호남벌에서 ‘찢긴 육신들’은 충분히 해원하지 않았을까. 동학, 참 가슴 아픈 말이다. 동학혁명, 동학농민혁명, 동학운동 등 좋은 말 많지만 ‘동학난’이란 말이 실감난다. ‘동학난’에 대한 말과 글이, 지금까지도 무성했듯이 앞으로 우리민족사가 계속되는 한에는 남과 북에서 계속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가 있었다면, 쓰여진다면, 그 귀신들이 누구의 길을 안내 받을까? ‘선녀보살들이 길고 흰 명주수건을 감았다 풀면서 안내하는 길을’ 가지 싶다. 3부부터는 나와 나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첫째는 어머니다. ‘지팡이 소리’가 이 시인의 어머니일 뿐일까? 아니다, 이미 시에 등장하였음에 개인을 넘어 만인의 어머니이다. 왜냐? 시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며 가장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에. ‘쪼그라진 어머니’가 왜 하필 ‘주차된 차량 무리 속으로’ 들어가는가. 그것은 현실이다. 시골 노파가 조심성도 없이 죽 늘어선 자가용들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바로 오늘을 사는 자식과 어머니의 관계를 나타내는 캇! 한 장의 사진이다. 오늘날 도시에서 안락한 일상을 즐기는 사람들의 다수는 ‘쪼그라진 어머니’가 사는 시골이 고향인 부모를 둔 도시 태생들이다. 그들은 현재의 삶하고는 전혀 다른 고향을 경원한다. 일상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현재의 자기 모습에다가 가치를 부여할 따름이지,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가용을 주차시키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그들에게, 자기 차에 근접하는 노파는 위험인물이다. 혹여나 차가 다치지나 않을까 아내나 친구와 하하호호 웃고 지껄이면서도 눈은 힐끗힐끗이다. 그들에게 부모의 고향 시골을 얘기해준들 알 것인가 이해할 것인가. 이미 그들과 시골은 정서적 단절이 확연하다. 그러므로 ‘주차된 차량 속으로 들어갑니다’는 그들에겐 한갓 위험 요소일 뿐이다. ‘쪼그라진 어머니’를 너무 확대 해석 하는가? 의미를 지나치게 부하하는가? 그러나 ‘쪼그라진 어머니’는 이 시인 개인의 어머니가 아니라 만인의 어머니다. 가정에서는 시인 한 사람의 어머니였지만 시의 대상이 되면서 만인의 어머니가 되어버렸다. 금태 안경에 메이커로 쫙 빼입은 어머니를 상상하는가? 그것은 서양식 상상이다. 조선의 어머니는 ‘삐걱거리던’이다가 ‘낡은 목덜미까지’ 보이다가 ‘거뭇거뭇한 뒷머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쪼그라졌다. 왜? 누구나 늙으면 쪼그라지고 지팡이를 짚는다. 어디 죽을 때까지 탱탱한 사람 있는가. 허리 꼿꼿한 사람 있는가. ‘쪼그라진 어머니’도 한 때는 ‘맨 아래 꽃그림으로/ 애인의 마음을 읽고’, ‘내 마음도 당신과 같다고/ 꽃잎 뜯어 편지에 붙이던’ 청춘시절이 있었다. 콩 콩 ‘지팡이 소리’가 하루 종일 먹고살기에 바쁜 일상인들에게 생로병사의 본질을 잠시 생각하게 한다. 고향에 살면서도 ‘고향은 지상에 없다’라고 시인은 이를 악문다. 고향이 왜 사라졌는가. 우선 시인 자신이 성장했다. 성장한 눈으로 보는 고향은 무언가 허전하다. 자연환경이 변하고 사람들이 변했다. 동심을 함께 하던 친구들이 떠나고 동네 오라버니와 이웃 아주머니들도 도시로 떠나거나 늙어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결코 고향을 버리지 않는다. ‘환삼덩굴까지도 그리워라 그리운’, ‘내 심중에 들어찬 고향’이다. 그러나 고향을 다시금 생각하는 시인은 ‘내 시가 부끄럽다’며 <절필을 생각>한다. 지금까지 쓴 시와 시인이란 이름표가 ‘농투성이 둘째 오라버니’ 앞에 부끄럽다. 추곡 수매하던 날, 오라버니가 ‘해장술 몇 잔에 휘감겨’, ‘멱살잡이 주먹질로 피멍 든’ 모습을 보며 ‘왜 저 지랄이야’ 소리쳤던 것이 이제야 부끄럽다. 왜냐면, 폭염의 몰매를 맞으며, 어둠을 향해 탈곡기 전조등을 쏘아대며 농사일에 골몰하는 오라버니와 현장에서 함께 했고, 나이 들어 세상 물정을 넓게 접하며, 추곡 수매가가 농업노동의 강도에 비해 터무니없음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도시 소비자들은 쌀값이 오르면 싫어한다. 싸고 맛있는 쌀을 원한다. 폭염의 몰매를 맞으며 익은 배가 고가이면 비싸다고 불평한다. 굵고 시원한 배가 고급 커피 한 잔 값보다 못한 데도 말이다. 레저에는 십만 원 단위로 돈을 쓰면서도 말이다. 과거 산업화 초기와 중기에 걸쳐서, 벼농사는 농민들이 하지만 추수한 벼의 가격은 정부가 매겼다. 저곡가정책이 연속되었다. 저임금을 주며 산업노동자들을 부리기 위해서는 농산물 가격이 낮아야만 했다. 농산물 중에서도 중심인 쌀은 반드시 정부의 통제 하에 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쌀값이 조금 오를 만하면 저가의 외국쌀을 수입해서 곡가 상승을 막았다. 경제가 발전하고 삶의 질이 풍요해지기 시작하면서 정부는 슬슬 추곡 수매 양을 줄였다. 농민들이 수매하고 남은 쌀을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해도 쌀 소비가 줄어든 시장에서는 헐값일 뿐이었다. 한미 FTA 후부터는 값싼 미국 쌀이 밀려들어오면서 시장에서 경쟁이 안 된다. 그래서 농민들은 해마다 11월이면 생산한 전량 추곡 수매와 수매가 인상을 요구하며 상경 시위를 한다. 그러나 도시소비자들은 농민들의 추곡 수매 투쟁을 불평한다. ‘까짓 거 농민들이 벼농사를 안 지으면 미국 쌀 수입해다 먹으면 되지 뭐’하며 단순하게 생각한다. 도시소비자들은 자기들의 원뿌리, 부모들의 고향이 시골임을 잊어버렸다. 기억해도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여긴다. 시대가 바뀌면서 농업도 바뀌고 있다. 과거 할 게 벼농사뿐이었던 시대가 가고 농업도 다양한 형태를 띄게 되었다. 이제 추곡 수매가 때문에 ‘멱살잡이 주먹질’을 하거나 상경 투쟁하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 하지만 농업의 본질인 벼농사만큼은 소중하게 지켜나가야 한다. 농촌이, 농업 현실이 좋아지면, 시인은 절필 생각을 접고 다시 ‘시인이란 이름표’를 달고 ‘시어가 수정처럼 빛나는 시’를 쓸 것인가? 이어서 등장하는 <그 집 아지메>와 <위층에는 누가 살까>, 너무 흔해서 심드렁한 이웃 사람들도 일단 시의 무대에 등장하면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는다. 사회 속의 한 존재로 나타난다. 하지만 ‘갖가지 음담을 펴놓고 흐물거리던 아낙네들’도 ‘바람 없는 숲처럼/ 물소리만 내려 보내는 위층’의 존재도 세월이 가면 ‘조금씩 소멸’한다. 시인의 시선은 <그리운 화개리>를 거쳐 <오늘의 스타>에 머문다. ‘머리카락의 서캐 범벅, 부스럼 딱지’ 흔하던 친구가 국민학교 동창 모임에서 스타가 된다. 그녀의 춤은 우리들이 ‘펄쩍펄쩍 뛰며 와와 소리를 지를’ 정도로 요란하다. 어린 날의 가난을 딛고 일어서 ‘공작의 날개처럼 활짝 펼친’ 친구의 성장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에 촉촉한 물기가 맺힌다. 다음 시선은 ‘멍자’에게 머문다. ‘나처럼 홀로 늙어가는’ 멍자는 시인의 유일한 동거생물이다. 상상임신을 할 정도로 뜨거운 암컷 발바리의 목줄을 풀어놓으며 ‘너처럼 뜨거울 때 있음을 고백하는’ 시인은<새로운 주민등록표>를 생각한다. 그리하여 비로소 한 마리 애완견이 완전한 가족이 된다. 시집 전편에 흐르는 현장 휴머니즘이 동물에게까지 넘친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춘정은 같다. ‘봄비 줄줄 흐르던 밤, 그만/ 남정네를 다락방에 숨기고 말았다는’ ‘그 집 아지매’나 ‘자신의 다리를 깨물다가 목줄을 물어뜯으며 발광하는’ 발바리나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한갓 생물일 뿐이다. ‘첫사랑이 고개 돌리지 않았다면 이만한 딸아이 내게도 있을지 몰라 벙그는 목련꽃 같은 스물하나 눈 내리는 창가에 처연하던 스물하나’ -뿌리를 내리다- 시인은 시로 말한다. 시인의 일생은 한 권의 시집에 담긴다. 해마다 시집 한 권 너끈히 묶어내는 시인들이 숱하지만, 이 시인은 습작기 거쳐 문학지 발표 이십 년 가까운 세월 지나 이 한 권 시집, 그것도 백을 넘지 못하는 55편으로 평생 시업을 일단은 정리한다. 그래서 여러 편 곳곳에 ‘첫사랑의 아픔’을 고백하고 있다. ‘그대여/ 라면 한 끼처럼 간단하게 끝낸 그대여/ 그래도, 저 나무에/ 마음 한 잎 달아두었나// <느티나무 그늘>, ‘사람이라면 중년이 넘었겠지만/ 나처럼 홀로 늙어갑니다// <새로운 주민등록표>, ‘인숙이 집은 아직 그대로네/ 허름한 나무대문 희미한 갓전등/.../담배나 캔맥주 사러 나갔다가/ 슈퍼가 너무 멀어 인숙이 집 골목이/미로라서/ 미아처럼 헤매다 그곳에 흘러들었겠지// <어느 골목을 지나다>. 스물한 살의 첫사랑을 평생토록 기억의 창고에 넣어두고 사는 사람은 마음이 늙지 않는다. 늙음이 저만치 오면 문득 기억의 창고 문을 열고 첫사랑의 아픔으로 늙음을 물리친다. 그래서 시인의 눈은 늘 스물한 살의 아픔으로 촉촉이 젖어있다. 시인은 ‘첫사랑의 아픔’을 ‘포장마차 아줌마’처럼 반평생 지금까지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다. ‘오뉴월 서릿발 내리게 하는 당신/ 빠진 송곳니를 다시 돋게 하는 당신/ 제웅의 가슴에 비늘을 꽂게 하는 당신/ 나를 두고 떠난 당신/ <어느 골목을 지나다>’이지만, 저주하는 만큼 첫사랑은 심연이다. 그것은 순정이다. 남자들에겐 전혀 없지만, 여자들 중엔 아주 드물게 청춘의 순정을 가슴에 묻고 키우며 사는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꽃잎이/ 돌부리와 마주쳐 멈칫하다가/ 곧 흘러갑니다/ 내 마음 옛일에 걸려 휘청하다가/ 곧 흘러갑니다’. 다시 이어서, ‘작은 꽃송이/ 연어가 아니어서 돌아오지 못하듯/ 내 마음 거꾸로 선 비늘 하나 없어/ 돌아오지 못합니다/ 흐르고 흘러갑니다// <풀꽃을 냇물에 던지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처럼 연륜이 쌓이면서 ‘첫사랑의 아픔’을 한갓 추억으로 풀어버린다. 그러나 그에게서 그 아픔을 ‘시간의 묘약’으로 치유시키거나 빼앗았다면, 그는 시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시인은 집요하다. 입으로는 ‘흐르고 흘러갑니다’라고 했지만, 연륜이 쌓일수록 다시 ‘거꾸로 선 비늘 있는 연어’가 되어 ‘첫사랑의 아픔’을 스스로 치유하기 위하여 무섭게 거슬러 오른다. 그러면서 개인의 아픔과 사회의 아픔이 연계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들을 감추지 않고 시문학의 지평 위에 노출하는 방법을 통하여 그 둘을 함께 치유하고 있다. 이 힘이 바로 이 시집을 관류하고 있다. 그래서 이 시집의 시들은 온실 속 화초가 아니라 시문학의 아득한 지평에 실하게 뿌리 내린 들꽃들이다. 양어장의 식용 물고기가 아니라 강물 속 날물고기이다.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노동자는 많지만 노동시인은 귀하다. 마찬가지로 농민은 많지만 농민시인은 귀하다. 생활인은 많지만 생활시인은 귀하다. 풍경과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는 음유객은 많지만 음유시인은 귀하다. 서정인은 많지만 서정시인은 귀하다. 지식인은 많지만 지식시인은 귀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귀한 그들로 하여금 ‘시인’이란 말을 뒤에다가 붙이도록 하는가. 원론적인 정의이지만, ‘시인’이란 노동자, 농민, 생활인, 지식인들 가운데에서도 관찰력과 표현력이 우수한 사람들이다. 물론 그 사이를 연결하는 언어 조립 능력이 우수하고.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펴 본 바대로 김재순은 ‘시인’이란 말을 뒤에 붙여도 될 만하다. 그렇다면 ‘무슨 시인’이라 붙일까? 김재순 시인은 생업이 면사무소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어서 다양한 생활시를 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면소재지 사람들의 생활의 현장 눈높일 수밖에 없다. 또한 시골마을 출신이고, 농업에 종사하는 오라버니를 늘 보기 때문에 농촌사회의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다. 그러니 관찰의 각도가 맞아 쓴 생활 현장시가 최단거리로 독자들에게 전해진다. 현장에 몸담지 않은 시인들이 피상적으로 관찰하여 쓴 생활시나 농촌시들 과는 달리 진정성이 뭉클 만져진다. 시인의 장기이자 본령인 관찰과 묘사 차원을 넘어 대상과 합체가 됨으로써 진정한 생명을 얻었다. 해방 전후 프로시인들이나 산업화시대 민중시인들이 노동현장이나 농업현장 등의 생활전선에서 오래 생활하지도 않고서 쉽게 쓴 노동시와 농민시, 민중시가 갖는 작위성과 허구성에 비해 이 한 권의 시집은 이 시대의 간고한 민중생활을 증언하는 실제실감의 시적 생명력을 확보하고 있다. 고은의 30권짜리『만인보』가 비록 방대하지만 초점이 흐리다. 그러나 김재순 시인의 한 권『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는 비록 작고 소박하지만 알차고 값지다. 고은은 관념으로 만인을 훑었지만, 김재순은 가슴으로 이웃 수십 명과 함께 서로 안고 울었다. 다른 시인들이 쉽게 들어갈 수 없는 시적 영역이다. 그러므로 김재순에게는 일상생활 속에서 시를 건져 올렸으니 ‘생활시인’이요, 농업에 직접 종사하기도 하면서 시를 쓰기에 ‘농민시인’이요, 이 시집에 등장시킨 사람들을 통틀어 ‘민중’이라 부르기 때문에 ‘민중시인’이란 말을 붙이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그런데 또 하나, 내가 민중과 생활의 관점에서만 보았기 때문이지, 서정의 관점에서 보면 ‘서정시인’이란 말을 붙여도 괜찮을 만한 시들이『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 이 시집에도 여러 편 들어있다. 내 눈맛에 맞게 고른 시가 17편이지, 두 배나 되는 나머지 38편은 보는 사람 각자마다의 눈맛과 입맛에 따라 새롭게 조명될 수 있다. 후인들의 시각이 기대된다. 다음에 소개하는 시들은 여타의 서정시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는 수작들이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연애편지 그 처녀 열일곱 불 때서 밥하다가 애인의 편지를 받았지 양은솥처럼 달아오른 마음, 뒤란 꽃그늘서 편지 뜯었지 애인도 편지지에 꽃들을 잔잔하게 그렸고 그러나 몰라, 그녀는 잘 몰라 빽빽하게 쓴 글씨가 무언지 낱말 몇 개 건너뛰고 또 건너뛰고 맨 아래 꽃그림으로 애인의 마음을 읽은 그녀는 코흘리개 아우 불러 답장을 쓰고 글자로는 잘 못하지만 내 마음도 당신과 같다고 꽃잎 뜯어 편지지에 붙이던 검은 치마 귀밑머리 바람에 날리던 그 처녀 내 어머니 봄 6 가슴 속 꿈틀거림 치밀어 온몸에 노란 꽃이 피는 저 할마시 이젠 사뿐사뿐 흐드러진 개나리꽃 꺾어들고 돌담에 기대서서 애마르게 부르던 그 옛날처럼 점 찍어둔 영감 이름 부를 것인가 휘영청 달 밝은 시냇가 낮은 버드나무 아래서 물새처럼 열 오를 것인가 뿌연 거울에 얼룩진 얼굴을 들이밀며 처진데 쓸어 올리며 어쩌자고 전신에 달걀노른자 찍어 바르는가 아아. 고목 둥치에 움이 돋았네 느티나무 그늘 저 고목의 느티나무 이파리 왜 저렇게 많은지 이제는 알 것 같아 수령 오백 년, 저 나무 아래 빗물처럼 머물던 사람들 가면서 떠나면서 마음 한 쪽 베어서 걸어놓은 것이야 그대여 라면 한 끼처럼 간단하게 끝낸 그대여 그래도, 저 나무에 마음 한 잎 달아두었나 나 자꾸만 저 그늘에 이끌리네 유명한 서정시인들 중에는 평생 동안 목숨이니 사랑이니 고향이니 하면서 순수서정을 내세우는 시인들이 많다. 서정의 승화랄까, 발전과 확장이 정체 되었다. 그에 비해 김재순 시인의 서정시들은 그들의 도시서정적인 표현법에 비해 세련되지는 못했겠지만 기층생활민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표현하기 때문에 싱싱하게 살아있다. 하여튼 비교적 작은 이 한 권의 시집이 품고 있는 성격이 여러 갈래이다.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무릉도원, 따뜻한 봄날 복숭아꽃 활짝 피어있는 풀밭에서 하루 종일 소요하는 즐거움을 누구나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활인들에게는 어디까지나 꿈이요 환상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 팔자가 아무리 좋다 해도 해도 순간에 지나가는 형식이다. 인간이 즐길 수 있는 무릉도원은 없다. 그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복숭아 꽃밭’은 없다. 유토피아일 뿐이다. 그러나 김재순 시인의 ‘복숭아 꽃밭’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실재 한다. 어디에? 일상인들이 발견하지 못할 따름이지, 이미 현실 속에 들어 있다. 그가 가리키는 ‘복숭아 꽃밭’은 상상의 세계 멀리 아득히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일상의 현실 속에 감춰져 있다. 일상 속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 만드는 따뜻한 관계, 견권지정繾綣之情 속에 ‘복숭아 꽃밭’이 있다. 그 일상의 현실에서 톡톡 발견한 인간의 진실이 현장 휴머니즘으로 흐르는 시인의 세계가 바로 복숭아 꽃밭이다. 그 ‘복숭아 꽃밭’으로 다 함께 가기 위해 시인은 세상사람 모두 들으라고 시를 쓴다. 또 하나, 시인 혼자서 가야할 길이지만 함께 할 여러 일행을 청한다. 그 중에서도 ‘잃어버린 사람’ 노무현을 먼저 부른다. 이 글을 쓸 처음엔 내가 아둔해서 누군지 몰랐다. 나중에 시인이 봉하 마을 노무현 묘소에 갔다 와서 쓴 시라고 알려줬다 숨이 막혀, 숨이 막혀 숨 막히는 곳에서 훨훨 날아올라 당신이 그토록 꿈꾸던 곳에 가셨겠지요 - - - 또 만나고 싶어요, 노무현. -그에게 가다- <그에게 가다>는 이 시집 맨 앞에 자리한다. 권두시이다. 뜬금없이 정치 얘기라서 좀 의외이지만, 노무현이란 사람을 통해서 정치를 보는 시인의 관점을 알 수 있다. 흔한 말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즉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백 사람의 시인보다 한 사람의 정치인이 사회를 좀 더 유연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물론 형식적인 면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형식이 내용을 지배할 수도 있는 법, 시인은 노무현 같은 정치인이 ‘복숭아 꽃밭’으로 민중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이 시집에서 갈파한 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가장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정치에서 나올 수 있다. 리어카 아저씨가 ‘이십만 원의 힘’을 낼 수 있었던 원천은 ‘저소득층 복지정책’이 아닌가. 또한 ‘붉은 머리 도요새’를 이제 철새가 아니라 텃새가 되도록 하고, 내세울 것 별로 없는 젊은이들이 ‘채용의 조건’에서 해방되어 제각기 소질을 마음껏 발휘하도록 하고, ‘김씨 할매네 다랑논 논둑마다 자욱하게 핀 녹두꽃들’이 활짝 웃도록 하고, ‘낮술 마신 할마시’의 아들이 공공근로에 뽑혀 어머니께 낮술을 자주 대접하도록 하고, ‘포장마차 아줌마’의 아이가 마음 어둡지 않게 자라도록 하고, 세상의 모든 ‘폐품 노부부들’이 조그마한 임대아파트라도 마련하도록 하고, 축산정책을 제대로 시행하여 ‘패총의 마을’을 다시 인정이 흐르는 마을이도록 하고, 그리하여 면소재지에 사람 냄새가 그득하도록 하고, ‘ㄱ 씨’가 땀 흘려 일한 만큼 살도록 하고, 1894년 동학항쟁에서 쓰러진 목숨 값이 21세기에는 비로소 고귀하도록 하고, 생명의 근원인 쌀이 제값을 받도록 하는 방법 중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효과적인 게 바로 정치가 아닌가. 그래서 기대가 컸다. 그러나 그는 ‘숨이 막혀, 숨이 막혀/ 숨 막히는 곳에서 훨훨 날아올라/ 당신이 그토록 꿈꾸던 곳에 가셨겠지요’가 되어버렸다. 정치적 희망이 졸지에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시인은 ‘피 묻은 깃털 하나/ 가슴에 꽂고/ 포석들을 어루만지며/ 저도 돌 하나 놓습니다’를 맹서하며, 후일을 기약하며 더욱 더 사람들 내면의 자각을 호소하기 위하여 눈 부릅뜨고 세상 사람들을 기록하였다. 하루를 이어 사는 호모 사피엔스의 꿈을 형상화 한 말, ‘무릉도원’은 절이나 교회, 성당에 가면 고승대덕님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하기 쉬운 말이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표현하기 쉬운 시 화법이다. 그러나 이 시인이 이 시집에서 내는 목소리는 그들의 목소리보다 한결 생생하다. 그들은 인간의 목소리로 인간을 말하지만, 이 시인은 사람의 목소리로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말은 머리로 생각하도록 만들지만 이 시인의 말은 가슴에서 가슴으로 단박에 점염되는 느낌이다. 서정이든 지성이든 고발이든, 가짜와 꾸밈이 허다한 시단에서, 김재순 시인의 시집이 울리는 진정성의 목소리는 동심원을 그리며 일파만파 퍼져 나갈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유명의 바람을 타면 들풀의 속삭임을 하찮게 여긴다. 그러나 심심산골 산꽃과 들꽃은 인간들이 봐주지 않아도 홀로 곱게 피었다가 조용히 진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산꽃이고 들꽃이다. 인간들은 그들을 통틀어 ‘잡초’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은 잡초가 아니라 저마다 귀하고 고운 존재의 표상이다. 누가 그들에게 한 줄기 따뜻한 시선을 보냈는가, 함께 희로애락하는가. 시인들? 하많은 시인들 중에 유독 김재순 시인만이 그들이 ‘귀하고 고운 존재의 표상’임을 조용히 언어로 기록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깊은 산사에서 울리는 저녁범종소리처럼. 시인은 시집으로 한 시절 한 평생을 매듭 한다. 뻥튀기하여 수십 권 시집을 낸다고 대단한가? 아니다, 단단하게 압축된 단 한 권의 시집으로도 충분히 시인의 소명을 다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집을 내는 즐거움을, 독자는 좋은 시들을 읽는 즐거움을 가진다. 그것이 바로 정신의 무릉도원, ‘복숭아 꽃밭’이 아니겠는가. 한 권 좋은 시집을 읽게 해 준 김재순 시인께 고개 숙여 옷깃을 여민다. 하여튼 이 글을 읽는 사람은 그 시집을 한 번 읽어 볼 일이다. 2018년 5월 5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쓰다  
244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권서각 file
편집자
941 2018-05-27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오월이다. 5월을 가리키는 말은 여럿이다. 계절의 여왕이라고도 하고 신록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어린이이날과 어버이날이 있어 가정의 달이라고도 한다. 오월에는 소만(小滿)이 있는 달이기도 하다. 소만(小滿)은 이십사절기의 하나로 입하(立夏)와 망종(芒種) 사이에 들며, 만물이 점차 생장(生長)하여 천지에 가득 찬다고 한다. 눈을 들어 어디를 둘러보아도 시리도록 푸른 신록이다. 어떤 시인은 눈이 시리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했다. 우리고장에도 가로수가 잘 심어져 있다. 벚꽃이 지고 잎이 푸름을 더했다. 이팝나무에는 쌀밥 같은 하얀 꽃이 한창이다. 우리 꽃 이름에는 슬픔이 묻어 있다. 산은 많은데 들은 적어서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나뭇가지에 하얗게 핀 꽃이 마치 이밥처럼 보였으리라. 그래서 이팝나무가 되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꽃 이름을 그렇게 붙였을까. 쌀밥을 아직도 이밥이라 부르는 이가 있다. 이씨 왕조가 들어서서 처음으로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어서 쌀밥을 이밥이라 불렀다 한다. 이팝꽃 조팝꽃 슬프도록 하얀 꽃이다. 누가 사는지 모르는 어떤 집의 담장에는 넝쿨장미가 붉게 피어서 지나는 사람을 보고 웃고 있다. 장미,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다. 꽃은 더할 나위 없이 이름답지만 치명적인 가시를 숨기고 있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비록 죽음에 이를지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사랑할 만큼 아름다운 꽃이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장미를 사랑해서 결국 장미 가시에 질려 죽었다고 한다. 신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수로부인이었다. 수로부인은 강릉 태수 순정공의 부인이다. 경주에서 강릉으로 부임해 가는 길에 가는 곳마다 사건이 일어난다. 역사는 미인이 있는 곳에 전쟁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클레오파트라가 그러했고 양귀비가 그러했다. 순정공 일행이 동해안을 따라 강릉 가는 길에 잠깐 쉴 때였다. 수로부인의 눈에 벼랑에 핀 진달래꽃이 들어왔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열어 흰 이를 드러내며 꽃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아무도 벼랑에 올라갈 엄두를 내지 못할 때 소를 몰고 가던 어떤 노인이 이 광경을 보았다. 노인은 고삐를 놓고 벼랑에 올라가 꽃을 꺾어서 노래를 부르며 수로부인에게 바쳤다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 노인으로 하여금 벼랑에 오르게 했다. 사랑의 힘이다. 수로부인, 그녀도 오월의 장미와 같은 아름다움을 지녔으리라. 오월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소녀에서 성숙한 여자의 중간 어디쯤이리라. 잎에 비유한다면 신록이요 꽃에 비유한다면 장미꽃이리라. 비록 이루어질 수 없을지라도, 혹은 치명적인 가시에 찔려 죽을지라도 무릎을 꿇고 고백하고 싶은 계절이다. 오월이시어, 계절의 여왕이시어, 소 몰고 가다가 고삐를 놓고 무릎 꿇고 고백하노니, 부디 미투(Me too)라 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마시라.  
243 생각하지 말고 보라! (비트겐슈타인)/고석근 file
편집자
827 2018-05-21
생각하지 말고 보라! (비트겐슈타인) 부두 위 흄 한밤중 고요한 부두 위 밧줄 드리운 높다란 돛대 끝에 달이 걸려 있다. 그렇게 멀어 보이던 것은 놀다가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풍선뿐이다. 임신하여 배가 불러오는 엄마에게 이제 막 말문이 트인 아기가 어눌한 발음으로 ‘내 동생 없어.’ 하더란다. 병원에 갔더니 정말 가상 임신이었다고 한다. 아기 눈에는 세상만사가 그냥 보이나 보다. 그래서 왕양명은 누구나 타고 나는 이 마음, ‘양지(良知)’를 잘 가꾸면 누구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소식이 뜸했던 중학교 동창이 카톡을 보내왔다. 처음에는 ‘유머’를 몇 개 보내더니 ‘좌빨’ ‘월남 패망’ ‘북침’ 이런 말들이 들어 있는 남북정상회담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아, 가짜 뉴스구나!’ 척 봐도 조악한 합성 사진으로 보이는데, 공무원으로 퇴직한 그의 눈에는 사실로 보인단 말인가? 이런 경우 경험상 어떤 말, 논리로도 그와의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만일 그가 아예 공부를 하지 않고 일자무식으로 살았다면 이런 가짜 뉴스에 놀아날까? 경험만이 지식의 전부인 그의 눈은 ‘가짜다!’ 벌거숭이 임금님을 본 아이처럼 소리치고 말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내노라하는 지식인들을 찾아다녔다.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질문을 하자 현란하게 답변을 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계속 질문을 던지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스스로 자신들의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무식한 사람은 용감하다.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끝내 죽여 버렸다. 지금 이 땅의 지식인들은 어떨까? 나는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과 얘기하며 대개의 경우 ‘교언영색(巧言令色)’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들보다 못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그들의 글과 말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내 안의 ‘동심(童心)’을 키우고 싶다. 이탁오는 말했다. ‘동심(童心)은 마음의 처음이다... 자라면서는 도리(道理)라는 것이 견문(見聞)을 좇아 들어오고, 그것이 마음의 주인이 됨으로써 동심을 잃게 된다. 오래되면 도리와 견문이 나날이 많아지고... 그로 인해 훌륭한 이름을 떨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아 이를 떨치는 데 힘쓰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심을 잃게 되고, 좋지 않은 명성이 추하다는 것을 알아 이를 감추는 데 힘쓰려고 하는 과정에서 동심을 잃게 된다.’ 고등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강의하며 그들 앞에 서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지금처럼 공부하면 너희들은 아예 공부하지 않는 것만 못해!’ ‘그렇다고 내가 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제대로 인문학을 가르쳐줄 수 있나?’ 나는 아이들에게 내 얘기를 해주었다. ‘내가 만일 지금 중학생이라면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농사를 배워 고향에서 농사짓고 살 거야. 공부는 여기저기 다니며 배우고 글을 쓰고 벗을 사귀며 신나게 살아갈 거야!’ 내 머리는 온갖 지식들로 와글거린다. 그래서 ‘생각’이라는 것들이 내 마음에 항상 와글거린다. 도대체 나는 삶을 사는 것인가? 생각을 살고 있는 것인가? ‘한밤중 고요한 부두 위/밧줄 드리운 높다란 돛대 끝에/달이 걸려 있다. 그렇게 멀어 보이던 것은/놀다가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풍선뿐이다.’ 노자는 말했다. ‘마음을 비우고 배를 가득 채우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하라(허기심虛其心, 실기복實其腹. 약기지弱其志, 강기골强其骨.)’ 내 마음 속에 아득히 보이는 ‘놀다가 잃어버린 어린아이의 풍선’을 항상 잊지 않고 싶다. 이제 제대로 공부하는 법도 알고 삶의 비의도 어슴푸레 알 것도 같은데, 60이 훌쩍 넘어 버렸다. 너무나 오랫동안 매트릭스 속에 있었다. 세상이 너무나 낯설다. 왕양명은 죽을 때 유언을 해달라는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환하다.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했단다.  
242 2%가 모자라/권서각 file
편집자
918 2018-04-24
2%가 모자라 별명이 ‘모지리’라는 선생님이 있었다. ‘모지리’는 ‘모자라다’의 고장 말이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복장이 단정하지도 못했고 언행도 세련되지 못했다. 그래도 학생들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방과 후에는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만나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했다. 그런 선생님을 학생들은 ‘모지리’라 불렀고 본인도 그 별명을 싫어하지 않았다. 학급별 체육대회가 있는 날 그 반 아이들은 등에 ‘모지리’라고 써 붙인 티셔츠를 입었다. 흔히 교사는 보람을 먹고 산다고 하는데 졸업 후에 졸업생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선생님도 그였다. 오래 전에 ‘바보네 가게’라는 수필이 낙양의 지가를 올린 적이 있다.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는 주인은 2%가 모자라는 사람이었다. 계산을 잘 하지 못해서 늘 거스름돈을 틀리게 내주는 일이 잦았다. 집에 와서 거스름돈을 세어보면 늘 얼마씩 남곤 했다. 사람들은 그 가게를 바보네 가게라고 불렀다. 이상한 것은 그 바보네 가게엔 늘 손님이 붐빈다는 것이다. 손님이 많으니 매출도 늘고 장사도 잘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 아이들은 요즘처럼 놀이기구가 없어서인지 유난히 악동이라 불리는 개구쟁이가 많았다. 아이들은 고무줄 놀이하는 여학생의 고무줄을 끊고 도망하기도 했다. 등하굣길에 죄 없는 개구리를 잡아서 똥구멍에 밀짚을 박아 바람을 넣기도 했다. 자기네 또래와 조금이라도 다른 대상을 지목하여 집요하게 놀리기도 했다. 아주 오래 전에 아이들이 ‘떠중이’라고 부르는 선생님이 계셨다. 길을 가다다 그 선생님이 보이면 ‘떠중이’하고 소리치고는 골목으로 도망을 하곤 했다. 그래도 그분은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얼마 전에 옛 친구를 만나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그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연세는 높으신데 아직도 건강하시고 온화한 표정을 한 노신사가 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이 ‘떠중이’라 부르던 그분은, 실은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정이 많으시고 성품이 너그러우신 분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 후일담을 듣지 못했다면 내 맘에는 아직도 그분이 ‘떠중이’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복장이나 언행이 너무 완벽하여 빈틈이 없으면 그에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넥타이라도 조금 삐뚤면 다가가서 바르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어딘가 한곳이 비어 있다는 것은 타인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여유의 공간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일이다. 타인과 맺어진 좋은 관계의 끈이 많을수록 행복지수도 높아지는 것은 아닐까.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타인이 쉴 수 있는 2%의 공간은 마련해 두는 것이 어떨까.  
241 (서평)김재순 시집 『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희망, 복숭아 꽃밭을 찾아서/고창근 file
편집자
1089 2018-04-10
희망-복숭아 꽃밭을 찾아서 -김재순 시집 『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 고창근 1 요즘은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한다. 시인이 독자이고 시인 지망생이 독자인 기막힌 세상이다. 그러니까 시인이나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느 시인은 페북에서 자신에게 시집을 많이 보내주는데 앞으로 보내지 말라고 선언했다. 읽지도 않는 시집을 왜 보내느냐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미디어의 발달이나 다른 이유를 들어 시가 독자로부터 멀어진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준이 되지 않는 시들을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무분별하게 시집으로 내는 일부 출판사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수준 낮은 시집을 본 독자가 다음에 시집을 사 볼 엄두가 나겠는가. 하지만 무엇보다 시인의 책임이 제일 크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독자가 시를 안 읽게 한 범인은 바로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웃지 못할 현실인 것이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는 시를 쓰는 시인들. 그들이 시로부터 독자를 멀어지게 한다. 시인과 독자가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또한 현실을 무시하고 공중에 붕 뜬 얘기를 하는 시인들, 그들 또한 독자를 무시하고 시로부터 독자들이 달아나게 한다. 인간의 삶이 녹아있지 않은 시, 힘든 하루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도저히 공감되지 않는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은 시로부터 독자를 멀어지게 한다. 김재순 시인의 시집『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의 미덕이라면 쉬이 읽힌다는 것이다. 걸림이 없이 술술 읽힌다. 하지만 결코 가볍다는 말이 아니다. 주제는 깊되 시는 어렵지 않다는 말이다. 그만큼 습작을 오랫동안 치열하게 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살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굳건히 밟고 서서 시를 썼다는 것이다. 내 시가 부끄럽다 시인이란 이름표 장미처럼 달았거나 국어사전 눈 감고도 복사하듯 베끼거나 시어가 수정처럼 빛나는 시, 그 앞에서가 아니라네 오라버니, 내 오라버니 농투성이 둘째 오라버니 그 앞에서, 시 쓴다고 내 시가 부끄러워, 시 쓴다고 말 못하네 노모의 틀니 값도 아슬아슬한 배밭에서 폭염의 몰매를 맞던 오라버니, 나 시냇가 버드나무 아래, 물놀이를 거침없이 써내려가 부끄럽네 쳐들어오는 어둠을 향해 전조등을 쏘아대며 자정까지 탈곡기를 밀고 가던 오라버니, 나 달맞이꽃의 기다림만 노래해서 부끄럽네 추곡 수매하던 날, 해장술 몇 잔에 휘감겨 멱살잡이 주먹질로 피멍든 오라버니 ,나 왜 저 지랄이냐 소리쳐 부끄럽네 빈 우렁이 껍질 같아, 누런 거품만 일어 부끄럽네 - 「절필을 생각하다」전문 시가 얼마나 쉬운가. 초등학생이 읽어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시다. 현실을 외면한 시가 아니라 온 몸으로 껴안은 시다. 또한 김재순 시인의 문학관이 잘 드러난 시라고 할 수 있다.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봤자 “노모의 틀니 값도 아슬아슬”하게 나오는 농사꾼 오라버니 앞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꽃 얘기며 구름 얘기며 바람 얘기며 사랑 얘기를 쓰겠는가. 위선적인 시 때문에, 현실을 외면하는 아편 같은 시 때문에 시는 오래 전부터 독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위 시에서 오라버니는 생물학적인 오라버니보다는 이 척박한 땅의 농민 노동자 서민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시집에서는 이러한 오라버니가 자주 나온다. 농사꾼 오라버니에 대해 쓴 “NO FTA/NO FTA/깊은 그늘에 열매 곪아터지고”(「오라버니」). 농촌의 현실을 다룬 “웃옷을 풀어헤친 더벅머리 중년 사내/그라목손 병을 들고 비틀비틀 강가로 가고”(「예언의 노래」). 사는 지역이 수몰된 사람 이야기 “저기 갑판에 서 있는 사람/그 때 보상금 받아 도시로 떠날/꿈에 부풀었을 사람일까”(「충주호 물길을 따라가다」). 농사꾼 이야기 “작은 짐승처럼 얼진대던 오라비는”(「감」). 아픈 누이를 걱정하는 가난한 오라비 이야기 “소주 두어 병 홀로 마신다”(「가시가 박히다」). 시인은 이런 무수한 오라버니들 앞에서 허황된 시를 쓴 것이 부끄럽다고 절필을 생각하는 것이다. 2 장자는 『장자』「내편」<거협>편에서 도덕이나 지식은 일반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위정자라는 큰도둑을 위해 있는 것이라며 성인이나 지식인은 큰도둑을 위한 파수꾼에 불과하다고 했다. 도덕이나 지식, 문명 등을 백성에겐 억압과 수탈의 도구로 본 것이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도 이와 결단코 다르지 않다. 많이 배우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큰도둑이며 일반 서민들은 큰도둑에게 억압당하며 살아간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공감’이라고 한다. 인간은 타인에게 공감을 느끼는데 비해 동물들은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억압당하고 소외되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공감한다. 결코 안타깝게 바라보거나 감싸주지 않는다. 그냥 공감하는 것이다. 형광등 불빛으로 모여드는 친구들 저 너울거리는 얼굴들 가시덤불 속 먹이 찾은 흔적 없어 옥토에 뿌리 내린 듯 푸른 잎 무성한데 아이들 용돈도 큰 손으로 주는데 아비가 쓰러지고 쟁기보다 키가 작던 그 해 봄부터 논 갈고 밭 갈고 몇 십 년 땅뙈기에 아무리 육수를 쏟아 부어도 농자금에 학자금도 모자란다고 쑥쑥 크는 새끼들 카시미론 새 잠바 하나 못 입히고 팔순의 어미에게 틀니 한 번 선뜻 못 해 준다고 서울, 서울 서울은 아직도 그리웁다고 소주잔 부딪칠 때마다 조금씩 작아지는 ㄱ 씨 - 「명절날의 ㄱ씨」전문 김재순 시인은 “논 갈고 밭 갈고 몇 십 년/ 땅뙈기에 아무리/ 육수를 쏟아 부어도/ 농자금에 학자금도 모자란다고” “쑥쑥 크는 새끼들/카시미론 새 잠바 하나 못 입히”기는 커녕 “팔순의 어미에게/ 틀니 한번 선뜻 못해” 주는 농촌의 현실을, 농민의 현실을 공감한다. 하지만 시인의 공감은 농촌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기초수급비 이십만 원으로”(「이십만 원의 힘」) 거나하게 쏘겠다는 아저씨. “주민등록표에 등재된/그의 전입지는/이곳이 스물 몇 번째” (「붉은 어깨 도요새」)인 그. “직원 명부에 이름이 없는 비정규직”(「동학교당에 간다」)의 그 남자. “폐기물 스티커가 붙은 책상서랍에는/이십 대 초반에 쓴/ 이력서가 잡동사니들과 쌓”(「채용의 조건」)인 그에게도 공감한다. 또한 “열세 살에 이국의 정글까지 끌려갔던 김씨 할매/깨어진 몸과 마음 얼기설기 동여매고 돌아왔지만/손을 잡는 사람보다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 천지에서/김씨, 할매 정글의 지옥에서도 살아왔는데/ 내 나라 내 고향에서 못 살까/겉보리 한 됫박에 종일 호롱기를 밟았고/장리송아지가 새끼를 낳고 낳아/저 다랑논 되었다네”(「녹두꽃, 만발하다」)의 위안부 할머니와 “일흔 넘은 할마시 징징 웁니다”(「낮술의 힘」)의 할마시, “폐품을 높게 실은 리어카 할아버지가 끌고/한 수족 끌며 할머니가 밀고 가” (「어떤 노 부부」) 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공감한다. 많이 배우고 돈 많은 사람들이 망쳐놓은 이 땅에 시인은 본능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공감하는 것이다. 3 『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에 흐르는 또 다른 결이 있다면 그건 욕망이다.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욕망이 아니라 장자가 말한 ‘자연적인 본성’으로서의 욕망이다. 그래서 시인의 욕망은 추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냥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들어온 지 여섯 해인 우리 발바리 사람이라면 중년이 넘었겠지만 나처럼 홀로 늙어갑니다 홍살문을 세우겠다는 욕심도 없으면서 나의 시야에 발바리를 묶어두고 뒷집에서 컹컹거리는 멍돌에게 마음 줄까 닦달합니다 분방한 혈통의 발바리 정말 환장하지요 자신의 다리를 깨물다가 목줄을 물어뜯으며 발광하더니 유방이 통통하고 누르면 흰 액이 나오는 거 있지요 산책 가서 내가 공중변소 갔을 때 늘어진 벚꽃가지 아래서 멍돌이와 어우러졌을까 다리를 깨물어도 삭지 않는 춘정이 안으로 뭉쳐 병이 된 걸까 문제아 딸을 둔 어미처럼 나는 불안한데 상상임신이라는 의사선생님 말씀 나는 개의 뒤통수를 두 대 갈기고 너처럼 뜨거울 때 있음을 고백하면서 목줄을 풀어놓습니다, 새로운 주민등록표를 생각합니다 세대주; 재순 자 ; 발바리 손 ; 멍자 - 「새로운 주민등록표」전문 이 세상에 누군들 ‘뜨거울 때’가 없었겠는가. 시인은 비록 자신의 그림자인 개의 뒤통수를 치는 것으로 자신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담벽에 가지 한 개 확 그으면/화락/화락花樂/화락和樂/그대의 중년도 타오르겠다”(「봄7」)는 속마음을 얼마나 솔직히 자연스럽게 표현했는가. 한 때 농부의 아내였던 여인의 “꽃잎를 활짝 여는 장미”(「슬픈 장미」)나 척박한 환경에서도 ‘화들짝 깨어나는’ 꽃 “네 입술에 꽃이 피네”(「패랭이꽃」), 먹고 살기 위해서 클럽 ‘황태자’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자 “어린 것을 떼어놓고/남자들 가슴팍을 유랑하던 여자, 저 여자” (「복숭아 꽃밭을 찾던 여자」)의 욕망은 아름답다.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에 따른 웃음이 아니라 자연스런 본성에서 우러나기 때문이다. “저 혼자 흔들리던 여인 하나”(「반야사에서」)나 “근질거리던/꽃멍울/툭 터지고”((「그 집 아지매)」),의 그 집 아지매의 ‘속 마음’. “내 마음 그를 좇았네”(「그리운 화개리」)와 “제 안에 광폭한 바람 일어 몸부림치는 단풍나무”(「오늘의 스타」), “가슴 속/꿈틀거림 치밀어/온몸에 노란 꽃이 피는/저 할마시”(「봄6」)의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어쩔 수 없는 욕망도 아름답다. 타고난 자연적 본성이기 때문이다. 4 어쩌면 시인이 찾고자 하는 복숭아 꽃밭은 오라버니를 비롯해 이 땅의 노동자 농민들의 꿈이 있는 곳,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밀려나 주변부로 살아가는 서민들의 희망이 펼쳐지는 곳이 아닐까. 아니다. 어쩌면 “가슴에/처음으로 당신을 들여놓았던/내 낯빛도 저랬을 거야”(「벚꽃」) 의 그 당신인지도 모르겠다. 고창근/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소도(蘇塗)』장편소설『신윤복, 욕망을 욕망하다』서사시집 『아리랑 아라리요』외 다수 <사람의 문학>2018 봄호 통권87호  
240 아모르 파티/권서각 file
편집자
1042 2018-03-25
아모르 파티 수학의 공식은 어떤 수를 대입하면 주어진 공식에 따라 연산되어 일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성과나 법칙도 일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 사는 일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목표를 정하고 목표를 향하여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면 누구나 목표에 도달해야 하겠지만 현실에서는 누구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를 운명이라 생각한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용어로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말이다. 흔히 운명애(運命愛)라고 한다. 운명을 사랑하라니? 얼핏 들으면 사람마다 주어진 운명이 있으니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이나 어려움에 굴복하거나 체념하라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니체에 따르면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힘들더라도 도피하지 말고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 파티’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고난이나 어려움까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즉,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고난을 극복하려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태도를 말한다. ‘아모르 파티’라는 말에는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태도, 세계에 대한 긍정을 통해 허무를 극복하는 적극적 삶에 태도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긍정이라는 말, 많이 들어본 말이다. 지난 시절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따가운 시선이 있었다. 현실비판적인 사람들에 대해 사람들은 ‘삐딱하다’고 말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충고를 하곤 했다. 니체의 긍정과 여기에서의 긍정은 같지 않다. 여기에서의 긍정은 옳든 그르든 대세에 순응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니체의 긍정은 자기 앞에 놓인 운명에 대한 긍정이다. 평창올림픽에 북측을 초청하면서 남북대화 가능성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다. 북측에서 우리 대통령을 초청하는 친서를 보내왔다. 우리는 70년 동안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다. 우리의 아픈 운명이다. 종편은 하루 종일 남북대화와 화해 협력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올림픽이 끝나면 북은 또 핵실험을 할 것이다. 한미 군사훈련을 해야 한다. 북은 평화를 위장하고 있다. 남북 대화를 미국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올림픽 폐회식에 오는 북측의 아무개를 총살해야 한다.” 모두 부정적인 말들이다. 어쩌란 말인가? 대화도 통일도 하지 말자는 것인가? 만약 니체가 분단시대를 사는 우리민족의 일원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분단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전쟁이 아닌 화해협력을 통해 분단의 비극을 해소하려는 긍정적 모색을 하지 않았을까?  
239 사람도 사랑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인류를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입센)/고석근 file
편집자
919 2018-03-16
사람도 사랑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인류를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입센) 꽃가루 속에 이용악 배추밭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 숨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것은 어디서 네가 나즉히 부르기 때문에 배추꽃 속에 살며시 흩어놓은 꽃가루 속에 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 중학생이 되자 내게도 ‘사랑’이 왔다. 한 단발머리의 여학생을 보면 ‘배추밭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숨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기분이 되었다. 어릴 적 우리 집에서는 채소밭을 가꿨다. 봄이 되면 채소밭에서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났다. 아지랑이 사이로 나비들이 날고 종달새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 숨 막히는 느낌. 바로 ‘사랑’이었다. 나를 보며 하얗게 웃던 그 여학생은 지금껏 내 가슴에 생생하게 새겨져있다. 지금도 봄이 오면 가끔 그 여학생이 생각난다. ‘어디서 네가 나즉히 부르기 때문에/배추꽃 속에 살며시 흩어놓은 꽃가루 속에/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에서는 사랑(에로스)이 둘이다. 하나는 태초의 대모신(大母神) 가이아의 아들이다. 또 하나는 바다에서 태어난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프시케를 사랑한다. 아프로디테는 프시케에게 네 가지 과제를 주고 그 과제를 풀면 사랑을 허용하겠다고 선언한다. 프시케는 ‘인간의 정신’이라는 뜻이다. 가이아의 아들 에로스가 ‘원초적 사랑’이라면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인간 문명사회의 사랑’일 것이다. 사회와 문명을 이룬 인간은 ‘원초적 사랑’을 넘어 정신(프시케)이 고양되어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인류의 집단적 지혜일 것이다. 봄 들판의 숨 막혔던 ‘내 첫사랑’은 그 뒤 더 이상 피어나지 못했다. 나는 여학생들을 멀리서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무협지의 허황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여학생들은 ‘하이틴 로맨스’의 허황한 세계에 들어갔다. 현실은 누추하고 사랑은 ‘아가페, 플라토닉의 세상’에 있었다. 우리의 사랑(에로스)은 그리스 신화대로 둘로 선명하게 나눠져버렸다. 하지만 그 둘은 하나일 것이다. 인간 사회가 변화, 발전하며 하나의 사랑이 둘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사랑은 여전히 둘로 선명하게 나눠져 있다. 어느 작가는 플라토닉 사랑을 ‘플라스틱 사랑’이라고 비꼬았다. ‘육체적 사랑’ 없이 어찌 ‘정신적 사랑’이 있을 수 있는가? 하지만 우리 사회의 실상은 얼마나 슬픈가! 우리의 육체적 사랑은 정신적 사랑으로 피어나지 않는다. ‘적나라한 육체만의 사랑’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다. ‘정신적 사랑’은 육체가 없이 유령이 되어 허공을 떠돈다. 한때 ‘성 교육’이 유행했다. 이제 ‘사랑 교육’이 유행했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가면 우리 사회에 ‘사랑’이 사라질까 두렵다. 인간은 오랫동안 ‘종교’를 통해 거룩함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종교 시대’가 끝나고 ‘사랑’이 왔다. 인간은 사랑으로 거룩함을 경험했다. 근대 문학은 거의 다 ‘거룩한 사랑 이야기’다. ‘사랑 없는 이 시대’는 얼마나 공허한가! 수많은 테러, 총기 사건, 묻지 마 범행은 사랑 없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일 것이다.  
238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권서각 file
편집자
1030 2018-02-25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민주주의(democracy)는 중세의 자유주의(liberalism)로부터 출발했다. 중세사회는 영주(領主)의 농노(農奴)에 대한 정치적·경제적·인격적 지배를 바탕으로, 가톨릭교회 체제를 이데올로기로 삼아 그 양자의 복합체로 성립되었다. 따라서 중세사회의 자유주의는 교황이나 영주가 정치적 경제적인 지배를 하던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의 전개를 의미한다.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소수에서 다수로 이동하면서 민주주의가 비롯되었다. 서구 민주주의의 특성은 민주주의의 정치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사회가 먼저 자유체제로 발달하였다는 데 있다. 소수의 지배계층에서 벗어나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시장경제원리가 작동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서구의 민주주의이다. 원래 민주주의는 평민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귀족이나 왕권에 반대하는 계급의식을 함축한다.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합성어다. 구스타브 라드부르흐는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사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정치적 사안이 결정되지만 자유주의는 개인의 의사를 위하여서는 (경우에 따라) 다수의 의사에 대하여 개인이 자기를 주장할 가능성을 열어둔다 고 했다. 어쩌면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더 강하게 보장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는 시장경제체제와 평민에 의한 지배라는 의미를 고유한다. 민주주의라는 말 가운데 이미 자유주의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서는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이른바 진보적이라 불리는(사실은 진보가 아니지만) 민주당계열의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선호하고 전 시대 집권세력인 자유한국당계열의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고집한다. 왜 자유라는 말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그 원인은 분단의 비극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 기반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있다. 북과 달라야 하고 북과 적대적이어야 했다. 북의 국가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다.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요건은 선거에 의해서 통치자를 선출해야 하고 두 개 이상의 정당이 존재해야 한다. 최소한의 민주주의 요건도 갖추지 못한 북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쓰니까 이와 대립하는 개념의 말로 자유를 강조하게 된다. 우리에게 자유는 반공의 다른 이름이다. 이승만이 대표로 집권한 정당이 자유당이다. 그 후에도 이를 계승하는 정치세력은 정당명칭에 자유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민자당도 아마 민주자유당일 것이다.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이라고 명칭을 바꾸었다. 자유당, 민주공화당,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현대사를 보면 역설적이게도 자유를 내세우는 정당이 집권했을 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일이 더 많았다.  
237 인간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진실은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고석근 file
편집자
1073 2018-02-14
인간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진실은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산중답속인(山中答俗人) 이백 내게 묻노니 어찌 푸른 산에 푸른 산에 사느냐고 대답 대신에 웃으니 절로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흩날려 아득히 물 따라 흐르니 이 별천지는 인간세상이 아니라네 오래 전에 모 초등학교에 ‘부모 교육’ 강의를 간 적이 있다. 한 학부모가 질문을 했다. ‘아이가 사랑이 뭐냐고 묻더라고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죠?’ 나는 나도 모르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때는 꼬옥 안아주세요. 그리고는 이게 사랑이야! 하고 대답해 주세요.’ 답변을 하면서 내 자신이 참으로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가르침대로 한 것이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은 보여줄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아이가 삶이 뭐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아마 많은 부모님들은 어떤 멋있는 답을 찾으려 애쓸 것이다. 고학력 부모일수록 어떤 현학적인 대답을 할 것이다. 가방 끈이 짧은 부모님들은 그냥 씩 웃으며 아이를 바라볼지 모른다. 한 때 ‘삶은 계란’이라는 아재개그가 있었다. 누가 만들어 널리널리 퍼졌을까. 다중지성(多衆知性)은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이 말은 비트겐슈타인의 경지다. ‘삶은 말로 할 수 없어. 입 닥쳐!’ 삶을 뭐라고 주절거리는 이 시대 모든 지식인들을 향해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한 방을 날린 것이다. 신(神), 사랑, 삶, 믿음, 소망, 애국, 정의, 지혜, 마음......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을 뿐인 것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말을 한다. 말로 그런 것들이 규정되고 나면 우리는 그런 고귀한 것들을 만날 수 없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말한다. ‘종교는 신(神)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 신은 깨달아야 알 수 있는 그 어떤 무엇일 것이다. 아마 신을 본 사람은 신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 성직자들은 신에 대해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가? 그들의 가르침이 우리 눈을 가려 우리는 신을 만나도 알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의 삶의 목적에 대해 정의를 내리셨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아,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가슴이 조여들고 숨이 막힌다. ‘그 좋은 말’ 앞에 우리는 꼼짝도 못하고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다.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말을 하게 되면 삶이 황폐해진다. 인간은 성찰(스스로를 보는)의 힘이 있어 정신이 아주 높은 단계에 오를 수 있다.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성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묵묵히 자신의 정신을 가꿔갔을 것이다. 우리는 빼어난 경치나 예술 작품을 보면 말을 잃는다. 멋있게 사는 사람을 봐도 말을 잃는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고귀해지는가! 세상에 말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산중(山中)에 있는데, 누가 ‘어찌 푸른 산에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이백 시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대답 대신에 웃으니 절로 마음이 한가롭네/복사꽃 흩날려 아득히 물 따라 흐르니/이 별천지는 인간세상이 아니라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 그는 죽을 때 ‘나는 경이로운 삶을 살았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다. 그는 경이로운 삶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느님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예수는 ‘저 돌멩이를 들춰보라. 그 아래에 하느님이 있다.’고 대답했다. 부처가 뭐냐고 묻는 제자에게 조주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 하고 대답했다. ‘묻지마 폭행’이 자주 일어난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들은 행동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가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고 말만 늘어놓자 이번엔 대형 화재 사고가 마구 일어난다. 우리는 또 말만 늘어놓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보여주어야 연이은 사건 사고들은 멈출 것인가?  
236 변하지 않는 것/권서각 file
편집자
1127 2018-01-25
변하지 않는 것 불변응만변(不變應萬變). 변하지 않는 가치로 변화하는 것에 대처한다는 뜻이다. 백범 김구 선생께서 1945년 가을 귀국하기 전날 밤에 쓰신 친필 휘호다. 지금도 상해임시정부 청사에 걸려 있다. 백범 선생은 왜 많고 많은 좋은 말 가운데 하필 이 글을 쓰셨을까? 당시 임시정부에는 사회주의, 민족주의, 아나키즘 등의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임시정부 요인을 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한민족이라는 유일한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범은 사상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지만 민족은 변하지 않는 가치라는 믿음이 있었다. 백범이라는 호는 백정(白丁)이라는 말과 범부(凡夫)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백범은 군역전(軍役田)을 소작하던 하층민의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이웃 고을 양반들에게 핍박을 받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임시정부 주석 자리에 추대되었을 때 사양하기도 했다. 그는 독립된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 동지들의 추대로 주석이 되었다. 그의 사람됨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백범이 우려했던 대로 광복 이후에 우리는 좌익 우익이라는 이념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남과 북은 70년 동안 원수로 살아왔다. 마치 사상이 민족보다 우월한 가치가 되어 같은 민족이면서도 다른 민족만도 못하게 살아왔다.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이 인사검증을 한답시고 공직 후보자에게 주적이 누구냐고 묻는다. 북쪽에 있는 동족을 주적이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종북 좌파라고 다그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백범이 들으셨다면 어떻게 여기실까? 사람 사는 세상에는 늘 무슨 주의가 있었다. 정치에도, 문화에도 무슨 주의가 없던 시대가 없었다. 문학에도 고전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사조가 있었지만 주의는 당대에는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지만 시대가 지나면 다른 주의로 바뀌게 마련이다. 사상은 유행가와 같은 것이다. 철 지나면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 사랑, 자유, 평등, 정의, 민족과 같은 가치가 그것이다. 공산권이 몰락한 지구상에서 지금 좌파 우파를 따진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한겨울에 밀짚모자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 헌법에는 사상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는데, 보이지도 않고 머릿속에만 있는 사상을 따져서 처벌한다는 것도 넌센스다. 우리사회에서 따져야 할 문제는 정작 따로 있다. 정의로운가? 그렇지 못한가? 자유로운가? 그렇지 못한가? 공정한가? 그렇지 못한가? 이런 문제는 버려두고 오로지 그의 사상이 어떠한가만 따지는 것이 우리의 슬픈 초상은 아닌가?  
235 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 (니체)/고석근 file
편집자
988 2018-01-16
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 (니체) 형(刑) 김종삼 여긴 또 어드메냐 목이 마르다 길이 있다는 물이 있다는 그곳을 향하여 죄가 많다는 이 불구의 영혼을 이끌고 가보자 그치지 않는 전신의 고통이 하늘에 닿았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하는 시를 배웠다. 이 시에 의해 우리는 세상을 나눠 보게 되었다. 하얀 세상과 까만 세상. 그래서 하얀 세상을 동경하고 까만 세상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이 세상은 ‘하얀 세상과 까만 세상’으로 선명하게 나눠지는가? 나는 오래전에 모 시의 시장 선거를 도와준 적이 있다. 그 공로로 한 문화 단체의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는 그 자리를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나는 그 때 이 세상의 맨 밑바닥을 본 느낌이었다. 그 뒤 나는 이 세상의 밑바닥을 몇 번 더 본 후 ‘하얀 세상’에서만 살기로 했다. ‘까만 세상’은 너무나 두려웠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많은 ‘부정’에 노출되어 있을 지가 상상이 된다. 그리고 ‘강한 마음’이 느껴진다. 나 같이 겁 많은 사람은 ‘넘사벽’인 자리들. 한 국회의원은 말했다. “세상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는 걸레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안다. 내가 ‘하얀 세상’에 사는 건, 나의 ‘하얀 마음’을 지키기 위한 절개, 지조 같은 게 아니다. 너무나 겁이 많아서다. 나의 극소심함이 나를 그렇게 살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걸레가 되어 세상을 닦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인 것이다. 만일 나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속인다면 나는 ‘선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남들이 나를 고고한 사람을 알아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게 지고 나면 스스로를 약하다고 하지 않고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 자위한다. 약한 자의 정신 승리법이다. 내게도 이런 마음은 깊고 깊다. 무의식에 깊이 쌓였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우리는 세상을 ‘까만 세상과 하얀 세상’으로 나눠보게 되고 까만 세상을 증오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죄 지은 자들에게 마구 돌멩이를 날린다. 하지만 그 돌멩이는 실은 우리 자신에게 던진 것이다. 우리의 깊은 마음은 상처투성이다. ‘여긴 또 어드메냐/목이 마르다/길이 있다는/물이 있다는 그곳을 향하여/죄가 많다는 이 불구의 영혼을 이끌고 가보자/그치지 않는 전신의 고통이 하늘에 닿았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항상 죄의식에 시달린다. 죄인을 다스리기는 쉽다. 우리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체로 무능하고 악한 것은 우리들이 죄인이 되어 알아서 기기 때문이다. 니체는 말한다. “노예의 도덕은 ‘선과 악’이고 주인의 도덕은 ‘좋음과 싫음’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에 빠져 노예로 사는 게 우리 삶의 실상이다. 이제 우리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좋을 때는 좋다고 하고 싫을 때는 싫다고 소리쳐야 한다. 우리의 희망은 ‘촛불 집회’일 것이다. ‘죄인들’이 모여 윗물을 맑히는 일일 것이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은 저절로 맑아진다. 어떤 원시인들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어쩔 수 없었어.”라고 한단다. 우리는 다 어쩔 수 없이 악하게 산다. 더러운 물에는 더러운 물고기가 살 수밖에 없다.  
234 성자들의 가르침/권서각 file
편집자
991 2017-12-25
성자들의 가르침 초등학교 동기회 모임에 오랜만에 참석했다. 어릴 때 모습은 간곳없고 영락없는 할매, 할배들이었다. 그들 눈에 나도 할배이리라. 어린 시절 이야기 끝에 운동회 날마다 교단에 칼을 꽂으며 행패를 부리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린 우리의 눈에 그는 몹쓸 짓을 많이 하는 악인이었다. 후에 삼청교육대까지 갔다 왔다고 했다. 무심코 “그 사람 아직 안 죽었어?”라고 물었다. 아직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대답이다. 왜 그런 물음이 무심코 나왔는지 스스로 놀랐다. 아마 마음 속 어디엔가 그는 벌을 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남아 있어서였을 것이다. 명심보감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공자께서 가라사대 선을 행하면 하늘이 복을 내리고 선하지 않은 자에게는 화를 내린다고 하셨다.(子曰 爲善者 天報之以福 爲不善者 天報之以禍)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반드시 그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말씀을 옳다고 믿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산다. 그것이 성자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세상이 온전히 망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공자께서는 또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己所不欲 勿施於人) 내가 괴롭힘을 당하면 싫으니 나도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나의 부정적인 것을 하나씩 줄이면서 선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네거티비즘(negativism)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면 네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다. 내가 먼저 선을 행하면 그만큼의 선이 되돌아온다는 적극적인 선으로의 의지다. 포지티비즘(positivism)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나신 두 성자가 그 방법은 다를지라도 모두 타인에 대한 선/사랑을 말씀하신다. 세상은 언제나 바람 잘 날 없고 어쩌면 노자의 말처럼 하늘은 선하기만 한 것이 아닌지도(天地不仁) 모른다. 그러하지만 세상은 온전히 망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남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스스로 실행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불가사의한 사랑을 가르치고 실행하신 성자이시다. 성자의 가르치심을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살아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 참 좋다. 평화란 말도 참 좋다. 세상은 여러 가지 갈등으로 혼란스럽다. 그럴수록 사랑, 평화, 타인에 대한 배려 등 성자의 가르침이 있어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지난 날 이해인 수녀님과 법정 스님은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며 가까이 지내셨다. 두 분의 모습이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이 가까워온다. 올 크리스마스에도 스님들이 성탄을 축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서로 배려하고 사랑한다면 세상은 한층 평화로울 것이다.  
233 하나는 전체요 전체는 하나다 一卽多 多卽一 (화엄경)/고석근 file
편집자
1107 2017-12-16
하나는 전체요 전체는 하나다 一卽多 多卽一 (화엄경) 점 네루다 아픔보다 넓은 공간은 없다 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만한 우주도 없다. 한 아이가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담임선생님이 다른 아이들에게 이유를 물으니 다들 ‘걔한테서 냄새가 난다’고 하더란다. 혐오감이 냄새로 나타나는가 보다. 아이들에게 왕따가 된 그 아이는 선생님들과 지내려한단다. 쉬는 시간에는 선생님들을 찾아가 교과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한단다. 담임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그 아이하고만 너무 많은 얘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 해야 하죠?” 나는 성경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해 얘기하며 예수처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양들은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왜 우리가 길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피해를 당해야 해? 목자는 전체를 생각해야 하지 않아?” 하지만 예수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 우리는 아플 때 안다. 아픈 부위가 나의 전부임을. 손가락 하나가 아프다고 손가락 하나가 아픈 게 아니다. 다른 부위들이 아픈 손가락을 위해 함께 아파하고 그 손가락의 치유를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우리는 이러한 ‘본성(本性)’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왕따 한 아이를 계속 왕따 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과 다른 동물의 결정적 차이는 ‘공감(共感)’의 유무다. 인간은 다른 인간, 존재와 감정을 함께 나누도록 진화하였다. ‘아픔보다 넓은 공간은 없다/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만한 우주도 없다.’ 한 인간에게 아픔은 전부다. 그 아픔에 모두 함께 하는 것이 타고난 인간의 마음이다. 아픔으로 우리는 모두 ‘점’ 하나가 된다. 점 하나가 빅뱅을 일으켜 지금의 우주가 되었단다. 언젠가는 우주는 다시 점 하나로 돌아간다고 한다. 우리는 아픔을 통해 점 하나가 된다. 우주의 비의(秘義)에 도달한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잃어버렸을까?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의 의식은 서구의 자본주의가 만든 의식이다. 자본주의의 중심세력인 부르주아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이런 사고 구조에서는 ‘나’는 사라져버린다. 세상은 나와는 별개로 어떤 힘, 법칙에 의해 돌아간다. 근대 자본주의 이후 우리는 이런 ‘사고의 틀’로 살아간다. 그래서 왕따의 아픔을 함께 느끼지 못한다. ‘왕따’를 객관적으로 분석한다. 스마트 폰을 검색하듯이 나와 남의 아픔을 본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자본주의 이전의 인간은 이런 사고 구조를 갖고 살지 않았다. 원시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것을 갖고 삼라만상을 만나며 자신의 마음을 점점 확장해 갔다. 이런 마음의 구조를 ‘야생의 사고’라고 한다.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자신의 체험, 아픔을 중심으로 널리 널리 퍼져가기에 다른 사람들, 다른 동식물, 다른 무생물들과 아픔을 함께 한다. 원시인들에게 세상은 점 하나다. 자본주의가 만든 ‘문명의 사고’는 세상과 우리 마음을 황폐화시켰다. ‘포항의 지진’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다들 함께 아프냐고?  
232 어른과 꼰대/권서각 file
편집자
1322 2017-11-26
어른과 꼰대 젊은이들이 기성세대를 가리키는 말 가운데 ‘꼰대’라는 비속어가 있다.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가리키는 말 가운데 ‘철부지’란 말이 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간극을 보여주는 말들이다. 이른바 세대차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모든 기성세대는 꼰대이고 모든 젊은이가 철부지인 것은 아니다. 꼰대와 철부지가 단순히 자연연령만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젊다고 모든 젊은이가 철부지는 아니다. 그들에겐 자유로운 영혼이 있다. 나이가 많다고 모두 꼰대인 것은 아니다. 어른이라고 불리는 이들도 있다.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꼰대가 될 확률이 더 높다. 우리사회의 나이든 사람들 가운데는 어른의 수효보다 꼰대의 수효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감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꼰대는 부정적인 말이고 어른은 긍정적인 말이다. 누구나 꼰대가 아닌 어른이 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꼰대와 어른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꼰대는 자신이 겪은 경험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특히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삶이 절대 진리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말끝마다 ‘왕년에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내가 자네 나이 때는 말이야’라는 말을 자주한다. 조그만 지위라도 얻게 되면 내빈소개 할 때 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불편해 한다. 그리고 젊은이에게 무언가를 자꾸만 가르치려 한다. 사회는 변하고 가치관도 변한다. 그런데 꼰대는 자기가 젊은 시절 성공한 방법이 지금도 통할 거라고 믿는 자다. 변화된 사회에서 구시대의 방법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자가처럼 하라고 강요한다. 그런 기성세대를 젊은이들은 꼰대라 부른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 가운데도 꼰대가 있었다. 대개의 독립지사들은 이미 왕정시대가 끝나고 공화정의 시대가 올 것을 예비했다. 그래서 1920년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체제는 공화제였다. 그런데 몇몇 독립지사들의 독립운동의 목표는 왜놈을 몰아내고 임금을 다시 모시자는 것이었다. 이들을 복벽파라 부른다. 전형적인 꼰대다. 그렇다고 시대의 조류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것이 꼰대를 면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유불리만 추구하면 기회주의자가 되기 쉽다. 어찌해야 꼰대가 아닌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우선 젊은이를 철부지로 보지 말아야 한다. 젊은이에게는 어른이 갖지 못한 유연한 사고와 창의력이 있다. 이런 젊은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끊임없이 진보하는 역사 속에서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꼰대가 될 수밖에 없다. 기성세대는 신세대에게 없는 풍부한 경험이 있다. 이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만 옳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신세대에 귀를 열 때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다.  
231 나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에머슨)/고석근 file
편집자
927 2017-11-16
나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에머슨) 솔직히 말해서 나는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것이 아닌지 몰라 열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 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우리는 가끔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아무것도 아닌지 몰라/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그 목숨인지도 몰라’ 자신이 파리나 모기 목숨 같이 느껴질 때, 우리는 자칫 ‘약자의 정신 승리법’에 빠질 수가 있다. 루쉰의 소설 ‘아Q정전’의 주인공 아Q처럼. ‘비록 졌지만 정신은 내가 우월하므로 결과적으로 이긴 것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항상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합리화하려는 아Q. 이런 인간 군상들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은 ‘자존심’을 가진 인간들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잘 찾아보면 우리에게 남보다 뛰어난 점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사람들에겐 재벌 회장이 전혀 부럽지 않은 점이 있다. 그들보다 젊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은 재벌 회장 앞에 섰을 때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강의를 할 때 수강생들에게 가끔 질문을 한다. “개미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많은 사람들이 “사자요!” 한다. 이 때 자존심을 갖고 사시는 분들은 말한다. “사자가 개미를 어떻게 이겨요?” 그렇다. 사자는 절대 개미를 이길 수 없다. 지금까지 둘 다 이 지구에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손자)’.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지는 건, 상대를 알고 나를 알려고 하지 않아 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보다 잘난 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자존심이다. 자신과 상대방의 잘난 점과 못난 점을 모두 인정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이런 ‘자존심’만으로는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없다. 자신보다 잘난 점을 가진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들고, 못난 사람 앞에서 우쭐해지는 마음으로 어떻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무언가가 잘 나서 자존심이 센 사람은 우리 눈에 멋있게 보일지 모르나 조나단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의 주인공 걸리버가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달걀을 깨는 방법 가지고 목숨을 거는 소인국의 사람들처럼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 잘난 점, 못난 점을 떠나 자신을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자존감’이다. 이런 마음은 어떻게 생겨날까? ‘열개나 되는 발가락으로/열개나 되는 손가락으로/날뛰고 허우적거리다/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그러다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의식의 대전환이 일어날 때다. ‘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인간은 ‘유적존재類的存在(마르크스)’다. 인간은 ‘개인’으로 살아가지만 ‘인류(人類)’로 살아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물방울’이면서도 ‘강물’인 것이다. 자신이 ‘강물’이 되고,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이 되고, 불빛의 ‘노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사람, 삼라만상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대로 아름답다. 그의 눈엔 모든 존재가 다 아름답게 보인다. 다시 주말마다 촛불이 켜진다. 우리 모두 강물 위에 떨어지는 불빛이 된다.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가볍지 않다(이싸)’  
230 민주평화통일/권서각 file
편집자
890 2017-10-25
민주평화통일 스위스 융플라워를 보기위해 전망대에 오르는 산악열차 안에서 여행 중인 독일인 부부를 만났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나라가 위험한데 어떻게 이렇게 여행을 올 수 있느냐고 했다. 그들은 한반도에서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이 느끼는 것 같았다. 외국인이 느끼는 전쟁에 대한 체감온도가 우리와 매우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정전 상태인 나라이고 분단 이후 늘 전쟁의 위험 속에 살아왔기 때문에 위험의 체감정도가 무디어진 게 사실이다. 현재의 북미관계 남북관계는 분명히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놀랄 만치 평온하다.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영주시협의회장’이라는 생에서 가장 긴 이름의 직함이 주어져 있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1980년 출발한 헌법기구이다. 말 그대로 평화통일에 대한 정책을 의장인 대통령에게 자문하고 평화통일과 관련된 기반을 조성하고 인식을 확산하는 일을 하는 기구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구이기에 책무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더구나 남북관계가 최고로 악화된 상황이라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된 나라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64년 넘게 그야말로 전쟁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북은 남을 남조선 괴뢰도당이라 하고 남은 북을 주적이라 하고 적대감정을 키우고 있다. 분단은 남과 북의 통치자들의 권력 강화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런 나날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높아지고 위험에 대한 감각은 무디어진 게 사실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 시민들의 소원은 통일이다. 기구의 이름에서 이미 드러나 있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은 민주통일이요 평화통일이다.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인 나라요 통일의 방법은 전쟁이 아닌 평화동일이다. 이미 북은 핵무기와 미사일을 보유했다. 우리도 우리의 우방인 미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사실상 핵을 보유한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전쟁은 한반도의 재앙이요 인류의 재앙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처음으로 핵무기가 사용된 이후 핵무기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이 서로가 공멸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의 위험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 속에서 전쟁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축구를 하다가 전쟁을 하가도 하고 여자를 얻기 위해서 전쟁을 하기 했다. 기분 나쁜 말 한 마디가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성격도 위험의 한 요소다. 평화통일 이전에 전쟁의 위험 요소부터 해소하는 것이 우선과제다. 주어진 직함의 길이만큼이나 책임감이 무겁다.  
229 내 안에는 나 혼자 살고 있는 고독의 장소가 있다 그 곳은 말라붙은 당신의 마음을 소생시키는 단 하나의 장소다(펄 벅)/고석근 file
편집자
929 2017-10-15
내 안에는 나 혼자 살고 있는 고독의 장소가 있다 그 곳은 말라붙은 당신의 마음을 소생시키는 단 하나의 장소다(펄 벅) 이십억 광년의 고독 다나카와 슌타로 인류는 작은 공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 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 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인력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우주는 점점 팽창해간다 따라서 모두는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지난 수요일 밤 공부 모임에 퇴직한 남자분이 왔다. ‘아저씨’가 공부하러 오면 긴장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서는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오랜 가부장 문화와 군사 문화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퇴직자 분에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하자 자신의 삶의 이력을 짧게 얘기하고 나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수선화에게)’는 모 시인의 시까지 낭송했다. 오랜 외국 생활을 해서인지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사시는 듯 했다. 한 평생 열심히 살아오다 일에서 물러난 남자의 마음은 어떨까? 퇴직한 후 한 순간에 무너지는 많은 남자들을 보면 은퇴자의 속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가장 무서운 게 ‘외로움’일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외로움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날 것이다. 그런데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니? (한 때 유행했던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그 시인의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시인은 외로움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고 말한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고 까지 하면서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고 한다. 물론 시적 수사라고 볼 수 있지만 ‘하느님’ 같은 초월적 존재나 ‘산 그림자’ 같은 무생물까지 외롭다고 하는 것에는 훌륭한 시가 갖는 미적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현대인은 외롭다.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자꾸만 인간을 그렇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외롭지 않았다. 자본주의 이후 형성된 인간의 특징이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인간상이다. 그런데 이 시는 외로운 사람에게 외로움을 극복하게 하는 게 아니라 외로움 속에 주저앉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외로운 사람에게 일시적으로는 위안의 묘약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외로움을 넘어서야 한다. 외로움 속에 빠져들면 우리는 ‘피학증 환자(마조히즘)’가 된다. 자신을 학대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 사회의 현란한 밤풍경은 우리의 외로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시는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를 ‘힐링’해 줄 뿐이다. 우리는 단호히 ‘힐링’을 거부해야 한다. 힐링해주는 예술(시)로부터 탈주해야 한다. 외로움에 ‘정면으로 직면(세상이 다 외롭다고 자위하지 말고)’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 외로움을 넘어 혼자 무소의 뿔처럼 가게 하는 힘이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외로운 게 아니라 고독해져야 한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폴 틸리히)’인 것이다. 외로움에 젖지 않고 고독해지면 우리의 깊은 곳에서 ‘인류의 지혜’가 깨어난다. 한 인간의 무의식에는 인류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깨친 지혜들이 깊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독해진 인간은 ‘작은 나’를 넘어서 ‘큰 나’로 나아간다. 외로움에 젖은 인간은 ‘작은 나’에 계속 머물러 자신을 점점 쪼그라들게 한다. 우리는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이렇게도 깊은 고독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우리 자신을 오롯이 맡겨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이렇게 자신의 외로움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깊은 무의식에서 ‘이십억 광년의 지혜’가 깨어난다. 외로움을 수동적으로 견디며 사는 세상에서는 폭력(남을 향해, 자신을 향해)이 난무한다. 그래서 퇴직한 그 남자의 깊은 외로움이 슬프다. 외로움의 병을 주고 힐링의 약을 주는 우리 사회는 얼마나 무서운가! 우리는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받아들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 혼자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남과 함께 갈 수 있다.  
228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한용운)/고석근
편집자
996 2017-09-16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한용운) 나룻배와 行人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낡어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즐거운 사라’ ‘가자, 장미여관으로’ 등 에로틱한 작품으로 세상의 비난을 받던 마광수 교수가 자살했다고 한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세상의 도덕윤리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했다. 그도 교수의 품격을 잃은 ‘방탕한 인간’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의 삶과 죽음을 보니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가! 세상은 그를 애도하는 분위기로 돌변했다. 르네 지라르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희생재물로 사람을 바치고는 그를 성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그가 살아있을 땐 왜 그를 존중하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 성적 담론에서는 얼마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가! 이런 사회에서는 누군가의 희생재물이 필요하다.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사회를 바꾸면 자신들의 음흉함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힘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적당한 사람’을 희생재물로 삼는 것이다. 여기에 속아 넘어가는 대다수 사람들이 한 사람을 잡아 죽이고는 죽인 죄의식을 씻기 위해 이번엔 그를 칭송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엔 사랑, 에로티시즘이 난무한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사랑, 에로티시즘이 폭력적으로 드러나는가? 우리 사회보다 개방되어있는 서구에서는 성범죄가 우리 사회보다 훨씬 적다는데. 사랑, 에로티시즘이 얼마나 고결하고 숭고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사람은 만해 한용운 시인일 것이다. 그는 “내가 어떻게 너를 통해서만 내가 되는가... 내가 나를 너에게 양도하고 너 속에 나를 상실할 때만 내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서여연화라는 여인을 사랑하며 그녀를 통해 진정한 ‘나’로 태어나는 신비로움을 깨달았나 보다. 그래서 그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고 하여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 보편적 사랑으로 확장할 수 있음을 노래했다. 우리는 그의 시 ‘나룻배와 行人’을 보살행을 노래한 시로 이해한다. 보살의 무조건적인 사랑. 맞다. 하지만 그런 숭고한 사랑은 어디서 싹이 트는가! 진흙에서 연꽃이 핀다. 우리 눈에 진흙투성이로 보이는 이성간의 사랑이 숭고한 사랑의 씨앗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진흙투성이를 견디지 못한다. 워낙 완고한 가부장적인 교육을 받았기에 자신의 성적 욕망이 더러운 진흙투성이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성적 욕망은 연꽃을 피우지 못하고 점점 더 썩어가는 진흙투성이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적 담론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사람을 비난한다. 자신 속의 더러운 진흙투성이를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자라면서 이성 간의 사랑을 제대로 해 본 사람은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크나큰 사랑을 느낄 것이다. ‘나는 나룻배/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이런 숭고한 사랑을 모르고 사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황폐한가! 마광수 교수의 죽음을 통해 우리 사회가 ‘연꽃을 피우는 진흙’의 에로티시즘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그의 죽음을 단지 숭고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