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4호...
   2019년 1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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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42 2%가 모자라/권서각 file
편집자
866 2018-04-24
2%가 모자라 별명이 ‘모지리’라는 선생님이 있었다. ‘모지리’는 ‘모자라다’의 고장 말이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고 복장이 단정하지도 못했고 언행도 세련되지 못했다. 그래도 학생들에 대한 열정은 남달랐다. 방과 후에는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만나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했다. 그런 선생님을 학생들은 ‘모지리’라 불렀고 본인도 그 별명을 싫어하지 않았다. 학급별 체육대회가 있는 날 그 반 아이들은 등에 ‘모지리’라고 써 붙인 티셔츠를 입었다. 흔히 교사는 보람을 먹고 산다고 하는데 졸업 후에 졸업생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선생님도 그였다. 오래 전에 ‘바보네 가게’라는 수필이 낙양의 지가를 올린 적이 있다.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는 주인은 2%가 모자라는 사람이었다. 계산을 잘 하지 못해서 늘 거스름돈을 틀리게 내주는 일이 잦았다. 집에 와서 거스름돈을 세어보면 늘 얼마씩 남곤 했다. 사람들은 그 가게를 바보네 가게라고 불렀다. 이상한 것은 그 바보네 가게엔 늘 손님이 붐빈다는 것이다. 손님이 많으니 매출도 늘고 장사도 잘 되었다는 것이다. 옛날 아이들은 요즘처럼 놀이기구가 없어서인지 유난히 악동이라 불리는 개구쟁이가 많았다. 아이들은 고무줄 놀이하는 여학생의 고무줄을 끊고 도망하기도 했다. 등하굣길에 죄 없는 개구리를 잡아서 똥구멍에 밀짚을 박아 바람을 넣기도 했다. 자기네 또래와 조금이라도 다른 대상을 지목하여 집요하게 놀리기도 했다. 아주 오래 전에 아이들이 ‘떠중이’라고 부르는 선생님이 계셨다. 길을 가다다 그 선생님이 보이면 ‘떠중이’하고 소리치고는 골목으로 도망을 하곤 했다. 그래도 그분은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얼마 전에 옛 친구를 만나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그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연세는 높으신데 아직도 건강하시고 온화한 표정을 한 노신사가 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이 ‘떠중이’라 부르던 그분은, 실은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정이 많으시고 성품이 너그러우신 분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 후일담을 듣지 못했다면 내 맘에는 아직도 그분이 ‘떠중이’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복장이나 언행이 너무 완벽하여 빈틈이 없으면 그에게 다가가기가 쉽지 않다. 넥타이라도 조금 삐뚤면 다가가서 바르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어딘가 한곳이 비어 있다는 것은 타인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여유의 공간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산다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일이다. 타인과 맺어진 좋은 관계의 끈이 많을수록 행복지수도 높아지는 것은 아닐까.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타인이 쉴 수 있는 2%의 공간은 마련해 두는 것이 어떨까.  
241 (서평)김재순 시집 『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희망, 복숭아 꽃밭을 찾아서/고창근 file
편집자
1036 2018-04-10
희망-복숭아 꽃밭을 찾아서 -김재순 시집 『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 고창근 1 요즘은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한다. 시인이 독자이고 시인 지망생이 독자인 기막힌 세상이다. 그러니까 시인이나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느 시인은 페북에서 자신에게 시집을 많이 보내주는데 앞으로 보내지 말라고 선언했다. 읽지도 않는 시집을 왜 보내느냐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미디어의 발달이나 다른 이유를 들어 시가 독자로부터 멀어진 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수준이 되지 않는 시들을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무분별하게 시집으로 내는 일부 출판사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수준 낮은 시집을 본 독자가 다음에 시집을 사 볼 엄두가 나겠는가. 하지만 무엇보다 시인의 책임이 제일 크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독자가 시를 안 읽게 한 범인은 바로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웃지 못할 현실인 것이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는 시를 쓰는 시인들. 그들이 시로부터 독자를 멀어지게 한다. 시인과 독자가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또한 현실을 무시하고 공중에 붕 뜬 얘기를 하는 시인들, 그들 또한 독자를 무시하고 시로부터 독자들이 달아나게 한다. 인간의 삶이 녹아있지 않은 시, 힘든 하루를 살아가는 독자에게 도저히 공감되지 않는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은 시로부터 독자를 멀어지게 한다. 김재순 시인의 시집『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의 미덕이라면 쉬이 읽힌다는 것이다. 걸림이 없이 술술 읽힌다. 하지만 결코 가볍다는 말이 아니다. 주제는 깊되 시는 어렵지 않다는 말이다. 그만큼 습작을 오랫동안 치열하게 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살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굳건히 밟고 서서 시를 썼다는 것이다. 내 시가 부끄럽다 시인이란 이름표 장미처럼 달았거나 국어사전 눈 감고도 복사하듯 베끼거나 시어가 수정처럼 빛나는 시, 그 앞에서가 아니라네 오라버니, 내 오라버니 농투성이 둘째 오라버니 그 앞에서, 시 쓴다고 내 시가 부끄러워, 시 쓴다고 말 못하네 노모의 틀니 값도 아슬아슬한 배밭에서 폭염의 몰매를 맞던 오라버니, 나 시냇가 버드나무 아래, 물놀이를 거침없이 써내려가 부끄럽네 쳐들어오는 어둠을 향해 전조등을 쏘아대며 자정까지 탈곡기를 밀고 가던 오라버니, 나 달맞이꽃의 기다림만 노래해서 부끄럽네 추곡 수매하던 날, 해장술 몇 잔에 휘감겨 멱살잡이 주먹질로 피멍든 오라버니 ,나 왜 저 지랄이냐 소리쳐 부끄럽네 빈 우렁이 껍질 같아, 누런 거품만 일어 부끄럽네 - 「절필을 생각하다」전문 시가 얼마나 쉬운가. 초등학생이 읽어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시다. 현실을 외면한 시가 아니라 온 몸으로 껴안은 시다. 또한 김재순 시인의 문학관이 잘 드러난 시라고 할 수 있다.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봤자 “노모의 틀니 값도 아슬아슬”하게 나오는 농사꾼 오라버니 앞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꽃 얘기며 구름 얘기며 바람 얘기며 사랑 얘기를 쓰겠는가. 위선적인 시 때문에, 현실을 외면하는 아편 같은 시 때문에 시는 오래 전부터 독자를 잃어버린 것이다. 위 시에서 오라버니는 생물학적인 오라버니보다는 이 척박한 땅의 농민 노동자 서민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시집에서는 이러한 오라버니가 자주 나온다. 농사꾼 오라버니에 대해 쓴 “NO FTA/NO FTA/깊은 그늘에 열매 곪아터지고”(「오라버니」). 농촌의 현실을 다룬 “웃옷을 풀어헤친 더벅머리 중년 사내/그라목손 병을 들고 비틀비틀 강가로 가고”(「예언의 노래」). 사는 지역이 수몰된 사람 이야기 “저기 갑판에 서 있는 사람/그 때 보상금 받아 도시로 떠날/꿈에 부풀었을 사람일까”(「충주호 물길을 따라가다」). 농사꾼 이야기 “작은 짐승처럼 얼진대던 오라비는”(「감」). 아픈 누이를 걱정하는 가난한 오라비 이야기 “소주 두어 병 홀로 마신다”(「가시가 박히다」). 시인은 이런 무수한 오라버니들 앞에서 허황된 시를 쓴 것이 부끄럽다고 절필을 생각하는 것이다. 2 장자는 『장자』「내편」<거협>편에서 도덕이나 지식은 일반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위정자라는 큰도둑을 위해 있는 것이라며 성인이나 지식인은 큰도둑을 위한 파수꾼에 불과하다고 했다. 도덕이나 지식, 문명 등을 백성에겐 억압과 수탈의 도구로 본 것이다.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도 이와 결단코 다르지 않다. 많이 배우고 돈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큰도둑이며 일반 서민들은 큰도둑에게 억압당하며 살아간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공감’이라고 한다. 인간은 타인에게 공감을 느끼는데 비해 동물들은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억압당하고 소외되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공감한다. 결코 안타깝게 바라보거나 감싸주지 않는다. 그냥 공감하는 것이다. 형광등 불빛으로 모여드는 친구들 저 너울거리는 얼굴들 가시덤불 속 먹이 찾은 흔적 없어 옥토에 뿌리 내린 듯 푸른 잎 무성한데 아이들 용돈도 큰 손으로 주는데 아비가 쓰러지고 쟁기보다 키가 작던 그 해 봄부터 논 갈고 밭 갈고 몇 십 년 땅뙈기에 아무리 육수를 쏟아 부어도 농자금에 학자금도 모자란다고 쑥쑥 크는 새끼들 카시미론 새 잠바 하나 못 입히고 팔순의 어미에게 틀니 한 번 선뜻 못 해 준다고 서울, 서울 서울은 아직도 그리웁다고 소주잔 부딪칠 때마다 조금씩 작아지는 ㄱ 씨 - 「명절날의 ㄱ씨」전문 김재순 시인은 “논 갈고 밭 갈고 몇 십 년/ 땅뙈기에 아무리/ 육수를 쏟아 부어도/ 농자금에 학자금도 모자란다고” “쑥쑥 크는 새끼들/카시미론 새 잠바 하나 못 입히”기는 커녕 “팔순의 어미에게/ 틀니 한번 선뜻 못해” 주는 농촌의 현실을, 농민의 현실을 공감한다. 하지만 시인의 공감은 농촌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기초수급비 이십만 원으로”(「이십만 원의 힘」) 거나하게 쏘겠다는 아저씨. “주민등록표에 등재된/그의 전입지는/이곳이 스물 몇 번째” (「붉은 어깨 도요새」)인 그. “직원 명부에 이름이 없는 비정규직”(「동학교당에 간다」)의 그 남자. “폐기물 스티커가 붙은 책상서랍에는/이십 대 초반에 쓴/ 이력서가 잡동사니들과 쌓”(「채용의 조건」)인 그에게도 공감한다. 또한 “열세 살에 이국의 정글까지 끌려갔던 김씨 할매/깨어진 몸과 마음 얼기설기 동여매고 돌아왔지만/손을 잡는 사람보다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 천지에서/김씨, 할매 정글의 지옥에서도 살아왔는데/ 내 나라 내 고향에서 못 살까/겉보리 한 됫박에 종일 호롱기를 밟았고/장리송아지가 새끼를 낳고 낳아/저 다랑논 되었다네”(「녹두꽃, 만발하다」)의 위안부 할머니와 “일흔 넘은 할마시 징징 웁니다”(「낮술의 힘」)의 할마시, “폐품을 높게 실은 리어카 할아버지가 끌고/한 수족 끌며 할머니가 밀고 가” (「어떤 노 부부」) 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공감한다. 많이 배우고 돈 많은 사람들이 망쳐놓은 이 땅에 시인은 본능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공감하는 것이다. 3 『복숭아 꽃밭은 어디 있을까』에 흐르는 또 다른 결이 있다면 그건 욕망이다. 자본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욕망이 아니라 장자가 말한 ‘자연적인 본성’으로서의 욕망이다. 그래서 시인의 욕망은 추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냥 타고난 본성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 들어온 지 여섯 해인 우리 발바리 사람이라면 중년이 넘었겠지만 나처럼 홀로 늙어갑니다 홍살문을 세우겠다는 욕심도 없으면서 나의 시야에 발바리를 묶어두고 뒷집에서 컹컹거리는 멍돌에게 마음 줄까 닦달합니다 분방한 혈통의 발바리 정말 환장하지요 자신의 다리를 깨물다가 목줄을 물어뜯으며 발광하더니 유방이 통통하고 누르면 흰 액이 나오는 거 있지요 산책 가서 내가 공중변소 갔을 때 늘어진 벚꽃가지 아래서 멍돌이와 어우러졌을까 다리를 깨물어도 삭지 않는 춘정이 안으로 뭉쳐 병이 된 걸까 문제아 딸을 둔 어미처럼 나는 불안한데 상상임신이라는 의사선생님 말씀 나는 개의 뒤통수를 두 대 갈기고 너처럼 뜨거울 때 있음을 고백하면서 목줄을 풀어놓습니다, 새로운 주민등록표를 생각합니다 세대주; 재순 자 ; 발바리 손 ; 멍자 - 「새로운 주민등록표」전문 이 세상에 누군들 ‘뜨거울 때’가 없었겠는가. 시인은 비록 자신의 그림자인 개의 뒤통수를 치는 것으로 자신이 뜨거웠던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담벽에 가지 한 개 확 그으면/화락/화락花樂/화락和樂/그대의 중년도 타오르겠다”(「봄7」)는 속마음을 얼마나 솔직히 자연스럽게 표현했는가. 한 때 농부의 아내였던 여인의 “꽃잎를 활짝 여는 장미”(「슬픈 장미」)나 척박한 환경에서도 ‘화들짝 깨어나는’ 꽃 “네 입술에 꽃이 피네”(「패랭이꽃」), 먹고 살기 위해서 클럽 ‘황태자’에서 밤을 지새우던 여자 “어린 것을 떼어놓고/남자들 가슴팍을 유랑하던 여자, 저 여자” (「복숭아 꽃밭을 찾던 여자」)의 욕망은 아름답다.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에 따른 웃음이 아니라 자연스런 본성에서 우러나기 때문이다. “저 혼자 흔들리던 여인 하나”(「반야사에서」)나 “근질거리던/꽃멍울/툭 터지고”((「그 집 아지매)」),의 그 집 아지매의 ‘속 마음’. “내 마음 그를 좇았네”(「그리운 화개리」)와 “제 안에 광폭한 바람 일어 몸부림치는 단풍나무”(「오늘의 스타」), “가슴 속/꿈틀거림 치밀어/온몸에 노란 꽃이 피는/저 할마시”(「봄6」)의 자신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어쩔 수 없는 욕망도 아름답다. 타고난 자연적 본성이기 때문이다. 4 어쩌면 시인이 찾고자 하는 복숭아 꽃밭은 오라버니를 비롯해 이 땅의 노동자 농민들의 꿈이 있는 곳,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밀려나 주변부로 살아가는 서민들의 희망이 펼쳐지는 곳이 아닐까. 아니다. 어쩌면 “가슴에/처음으로 당신을 들여놓았던/내 낯빛도 저랬을 거야”(「벚꽃」) 의 그 당신인지도 모르겠다. 고창근/경북 상주 출생 소설집 『소도(蘇塗)』장편소설『신윤복, 욕망을 욕망하다』서사시집 『아리랑 아라리요』외 다수 <사람의 문학>2018 봄호 통권87호  
240 아모르 파티/권서각 file
편집자
1001 2018-03-25
아모르 파티 수학의 공식은 어떤 수를 대입하면 주어진 공식에 따라 연산되어 일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성과나 법칙도 일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람 사는 일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목표를 정하고 목표를 향하여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면 누구나 목표에 도달해야 하겠지만 현실에서는 누구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를 운명이라 생각한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용어로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의 말이다. 흔히 운명애(運命愛)라고 한다. 운명을 사랑하라니? 얼핏 들으면 사람마다 주어진 운명이 있으니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이나 어려움에 굴복하거나 체념하라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니체에 따르면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힘들더라도 도피하지 말고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 파티’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고난이나 어려움까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 즉,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고난을 극복하려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태도를 말한다. ‘아모르 파티’라는 말에는 부정을 긍정으로 바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태도, 세계에 대한 긍정을 통해 허무를 극복하는 적극적 삶에 태도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긍정이라는 말, 많이 들어본 말이다. 지난 시절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따가운 시선이 있었다. 현실비판적인 사람들에 대해 사람들은 ‘삐딱하다’고 말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충고를 하곤 했다. 니체의 긍정과 여기에서의 긍정은 같지 않다. 여기에서의 긍정은 옳든 그르든 대세에 순응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니체의 긍정은 자기 앞에 놓인 운명에 대한 긍정이다. 평창올림픽에 북측을 초청하면서 남북대화 가능성에 대해 관심이 높아졌다. 북측에서 우리 대통령을 초청하는 친서를 보내왔다. 우리는 70년 동안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이다. 우리의 아픈 운명이다. 종편은 하루 종일 남북대화와 화해 협력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올림픽이 끝나면 북은 또 핵실험을 할 것이다. 한미 군사훈련을 해야 한다. 북은 평화를 위장하고 있다. 남북 대화를 미국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올림픽 폐회식에 오는 북측의 아무개를 총살해야 한다.” 모두 부정적인 말들이다. 어쩌란 말인가? 대화도 통일도 하지 말자는 것인가? 만약 니체가 분단시대를 사는 우리민족의 일원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분단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전쟁이 아닌 화해협력을 통해 분단의 비극을 해소하려는 긍정적 모색을 하지 않았을까?  
239 사람도 사랑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인류를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입센)/고석근 file
편집자
884 2018-03-16
사람도 사랑해보지 않았던 사람이 인류를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입센) 꽃가루 속에 이용악 배추밭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 숨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것은 어디서 네가 나즉히 부르기 때문에 배추꽃 속에 살며시 흩어놓은 꽃가루 속에 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 중학생이 되자 내게도 ‘사랑’이 왔다. 한 단발머리의 여학생을 보면 ‘배추밭 이랑을 노오란 배추꽃 이랑을/숨가쁘게 마구 웃으며 달리는’ 기분이 되었다. 어릴 적 우리 집에서는 채소밭을 가꿨다. 봄이 되면 채소밭에서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났다. 아지랑이 사이로 나비들이 날고 종달새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 숨 막히는 느낌. 바로 ‘사랑’이었다. 나를 보며 하얗게 웃던 그 여학생은 지금껏 내 가슴에 생생하게 새겨져있다. 지금도 봄이 오면 가끔 그 여학생이 생각난다. ‘어디서 네가 나즉히 부르기 때문에/배추꽃 속에 살며시 흩어놓은 꽃가루 속에/나두야 숨어서 너를 부르고 싶기 때문에’ 그리스 신화에서는 사랑(에로스)이 둘이다. 하나는 태초의 대모신(大母神) 가이아의 아들이다. 또 하나는 바다에서 태어난 미(美)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프시케를 사랑한다. 아프로디테는 프시케에게 네 가지 과제를 주고 그 과제를 풀면 사랑을 허용하겠다고 선언한다. 프시케는 ‘인간의 정신’이라는 뜻이다. 가이아의 아들 에로스가 ‘원초적 사랑’이라면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는 ‘인간 문명사회의 사랑’일 것이다. 사회와 문명을 이룬 인간은 ‘원초적 사랑’을 넘어 정신(프시케)이 고양되어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인류의 집단적 지혜일 것이다. 봄 들판의 숨 막혔던 ‘내 첫사랑’은 그 뒤 더 이상 피어나지 못했다. 나는 여학생들을 멀리서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무협지의 허황한 세계에 빠져들었다. 여학생들은 ‘하이틴 로맨스’의 허황한 세계에 들어갔다. 현실은 누추하고 사랑은 ‘아가페, 플라토닉의 세상’에 있었다. 우리의 사랑(에로스)은 그리스 신화대로 둘로 선명하게 나눠져버렸다. 하지만 그 둘은 하나일 것이다. 인간 사회가 변화, 발전하며 하나의 사랑이 둘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사랑은 여전히 둘로 선명하게 나눠져 있다. 어느 작가는 플라토닉 사랑을 ‘플라스틱 사랑’이라고 비꼬았다. ‘육체적 사랑’ 없이 어찌 ‘정신적 사랑’이 있을 수 있는가? 하지만 우리 사회의 실상은 얼마나 슬픈가! 우리의 육체적 사랑은 정신적 사랑으로 피어나지 않는다. ‘적나라한 육체만의 사랑’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다. ‘정신적 사랑’은 육체가 없이 유령이 되어 허공을 떠돈다. 한때 ‘성 교육’이 유행했다. 이제 ‘사랑 교육’이 유행했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가면 우리 사회에 ‘사랑’이 사라질까 두렵다. 인간은 오랫동안 ‘종교’를 통해 거룩함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종교 시대’가 끝나고 ‘사랑’이 왔다. 인간은 사랑으로 거룩함을 경험했다. 근대 문학은 거의 다 ‘거룩한 사랑 이야기’다. ‘사랑 없는 이 시대’는 얼마나 공허한가! 수많은 테러, 총기 사건, 묻지 마 범행은 사랑 없는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일 것이다.  
238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권서각 file
편집자
986 2018-02-25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민주주의(democracy)는 중세의 자유주의(liberalism)로부터 출발했다. 중세사회는 영주(領主)의 농노(農奴)에 대한 정치적·경제적·인격적 지배를 바탕으로, 가톨릭교회 체제를 이데올로기로 삼아 그 양자의 복합체로 성립되었다. 따라서 중세사회의 자유주의는 교황이나 영주가 정치적 경제적인 지배를 하던 사회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의 전개를 의미한다. 정치적 경제적 권력이 소수에서 다수로 이동하면서 민주주의가 비롯되었다. 서구 민주주의의 특성은 민주주의의 정치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사회가 먼저 자유체제로 발달하였다는 데 있다. 소수의 지배계층에서 벗어나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시장경제원리가 작동하는 사회로의 변화가 서구의 민주주의이다. 원래 민주주의는 평민의 지배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귀족이나 왕권에 반대하는 계급의식을 함축한다.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합성어다. 구스타브 라드부르흐는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사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정치적 사안이 결정되지만 자유주의는 개인의 의사를 위하여서는 (경우에 따라) 다수의 의사에 대하여 개인이 자기를 주장할 가능성을 열어둔다 고 했다. 어쩌면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더 강하게 보장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민주주의나 자유주의는 시장경제체제와 평민에 의한 지배라는 의미를 고유한다. 민주주의라는 말 가운데 이미 자유주의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서는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다르게 사용되고 있다. 이른바 진보적이라 불리는(사실은 진보가 아니지만) 민주당계열의 사람들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선호하고 전 시대 집권세력인 자유한국당계열의 사람들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고집한다. 왜 자유라는 말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그 원인은 분단의 비극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권력 기반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있다. 북과 달라야 하고 북과 적대적이어야 했다. 북의 국가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다.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요건은 선거에 의해서 통치자를 선출해야 하고 두 개 이상의 정당이 존재해야 한다. 최소한의 민주주의 요건도 갖추지 못한 북이 민주주의라는 말을 쓰니까 이와 대립하는 개념의 말로 자유를 강조하게 된다. 우리에게 자유는 반공의 다른 이름이다. 이승만이 대표로 집권한 정당이 자유당이다. 그 후에도 이를 계승하는 정치세력은 정당명칭에 자유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다. 민자당도 아마 민주자유당일 것이다.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이라고 명칭을 바꾸었다. 자유당, 민주공화당, 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현대사를 보면 역설적이게도 자유를 내세우는 정당이 집권했을 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일이 더 많았다.  
237 인간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진실은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고석근 file
편집자
1043 2018-02-14
인간은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진실은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 산중답속인(山中答俗人) 이백 내게 묻노니 어찌 푸른 산에 푸른 산에 사느냐고 대답 대신에 웃으니 절로 마음이 한가롭네 복사꽃 흩날려 아득히 물 따라 흐르니 이 별천지는 인간세상이 아니라네 오래 전에 모 초등학교에 ‘부모 교육’ 강의를 간 적이 있다. 한 학부모가 질문을 했다. ‘아이가 사랑이 뭐냐고 묻더라고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죠?’ 나는 나도 모르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때는 꼬옥 안아주세요. 그리고는 이게 사랑이야! 하고 대답해 주세요.’ 답변을 하면서 내 자신이 참으로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가르침대로 한 것이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라!’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은 보여줄 수 있을 뿐’이라고 했다. 아이가 삶이 뭐냐고 물으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 아마 많은 부모님들은 어떤 멋있는 답을 찾으려 애쓸 것이다. 고학력 부모일수록 어떤 현학적인 대답을 할 것이다. 가방 끈이 짧은 부모님들은 그냥 씩 웃으며 아이를 바라볼지 모른다. 한 때 ‘삶은 계란’이라는 아재개그가 있었다. 누가 만들어 널리널리 퍼졌을까. 다중지성(多衆知性)은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이 말은 비트겐슈타인의 경지다. ‘삶은 말로 할 수 없어. 입 닥쳐!’ 삶을 뭐라고 주절거리는 이 시대 모든 지식인들을 향해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한 방을 날린 것이다. 신(神), 사랑, 삶, 믿음, 소망, 애국, 정의, 지혜, 마음......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을 뿐인 것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많은 말을 한다. 말로 그런 것들이 규정되고 나면 우리는 그런 고귀한 것들을 만날 수 없다.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말한다. ‘종교는 신(神)을 만나지 못하게 한다.’ 신은 깨달아야 알 수 있는 그 어떤 무엇일 것이다. 아마 신을 본 사람은 신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 성직자들은 신에 대해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가? 그들의 가르침이 우리 눈을 가려 우리는 신을 만나도 알아 볼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래 전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의 삶의 목적에 대해 정의를 내리셨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아,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가슴이 조여들고 숨이 막힌다. ‘그 좋은 말’ 앞에 우리는 꼼짝도 못하고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다.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 말을 하게 되면 삶이 황폐해진다. 인간은 성찰(스스로를 보는)의 힘이 있어 정신이 아주 높은 단계에 오를 수 있다.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은 성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묵묵히 자신의 정신을 가꿔갔을 것이다. 우리는 빼어난 경치나 예술 작품을 보면 말을 잃는다. 멋있게 사는 사람을 봐도 말을 잃는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고귀해지는가! 세상에 말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산중(山中)에 있는데, 누가 ‘어찌 푸른 산에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이백 시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대답 대신에 웃으니 절로 마음이 한가롭네/복사꽃 흩날려 아득히 물 따라 흐르니/이 별천지는 인간세상이 아니라네’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내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다.’ 그는 죽을 때 ‘나는 경이로운 삶을 살았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다. 그는 경이로운 삶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하느님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예수는 ‘저 돌멩이를 들춰보라. 그 아래에 하느님이 있다.’고 대답했다. 부처가 뭐냐고 묻는 제자에게 조주 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 하고 대답했다. ‘묻지마 폭행’이 자주 일어난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들은 행동으로 우리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가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고 말만 늘어놓자 이번엔 대형 화재 사고가 마구 일어난다. 우리는 또 말만 늘어놓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보여주어야 연이은 사건 사고들은 멈출 것인가?  
236 변하지 않는 것/권서각 file
편집자
1073 2018-01-25
변하지 않는 것 불변응만변(不變應萬變). 변하지 않는 가치로 변화하는 것에 대처한다는 뜻이다. 백범 김구 선생께서 1945년 가을 귀국하기 전날 밤에 쓰신 친필 휘호다. 지금도 상해임시정부 청사에 걸려 있다. 백범 선생은 왜 많고 많은 좋은 말 가운데 하필 이 글을 쓰셨을까? 당시 임시정부에는 사회주의, 민족주의, 아나키즘 등의 다양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임시정부 요인을 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한민족이라는 유일한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범은 사상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지만 민족은 변하지 않는 가치라는 믿음이 있었다. 백범이라는 호는 백정(白丁)이라는 말과 범부(凡夫)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백범은 군역전(軍役田)을 소작하던 하층민의 집안에서 출생했으며 이웃 고을 양반들에게 핍박을 받기도 했다. 그런 연유로 임시정부 주석 자리에 추대되었을 때 사양하기도 했다. 그는 독립된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 동지들의 추대로 주석이 되었다. 그의 사람됨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백범이 우려했던 대로 광복 이후에 우리는 좌익 우익이라는 이념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남과 북은 70년 동안 원수로 살아왔다. 마치 사상이 민족보다 우월한 가치가 되어 같은 민족이면서도 다른 민족만도 못하게 살아왔다.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이 인사검증을 한답시고 공직 후보자에게 주적이 누구냐고 묻는다. 북쪽에 있는 동족을 주적이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종북 좌파라고 다그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백범이 들으셨다면 어떻게 여기실까? 사람 사는 세상에는 늘 무슨 주의가 있었다. 정치에도, 문화에도 무슨 주의가 없던 시대가 없었다. 문학에도 고전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사조가 있었지만 주의는 당대에는 최고의 가치로 여겨지지만 시대가 지나면 다른 주의로 바뀌게 마련이다. 사상은 유행가와 같은 것이다. 철 지나면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 사랑, 자유, 평등, 정의, 민족과 같은 가치가 그것이다. 공산권이 몰락한 지구상에서 지금 좌파 우파를 따진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한겨울에 밀짚모자를 찾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 헌법에는 사상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는데, 보이지도 않고 머릿속에만 있는 사상을 따져서 처벌한다는 것도 넌센스다. 우리사회에서 따져야 할 문제는 정작 따로 있다. 정의로운가? 그렇지 못한가? 자유로운가? 그렇지 못한가? 공정한가? 그렇지 못한가? 이런 문제는 버려두고 오로지 그의 사상이 어떠한가만 따지는 것이 우리의 슬픈 초상은 아닌가?  
235 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 (니체)/고석근 file
편집자
955 2018-01-16
선한 자보다 약한 자가 되어라 (니체) 형(刑) 김종삼 여긴 또 어드메냐 목이 마르다 길이 있다는 물이 있다는 그곳을 향하여 죄가 많다는 이 불구의 영혼을 이끌고 가보자 그치지 않는 전신의 고통이 하늘에 닿았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하는 시를 배웠다. 이 시에 의해 우리는 세상을 나눠 보게 되었다. 하얀 세상과 까만 세상. 그래서 하얀 세상을 동경하고 까만 세상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이 세상은 ‘하얀 세상과 까만 세상’으로 선명하게 나눠지는가? 나는 오래전에 모 시의 시장 선거를 도와준 적이 있다. 그 공로로 한 문화 단체의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도저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부정’을 저지르지 않고는 그 자리를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나는 그 때 이 세상의 맨 밑바닥을 본 느낌이었다. 그 뒤 나는 이 세상의 밑바닥을 몇 번 더 본 후 ‘하얀 세상’에서만 살기로 했다. ‘까만 세상’은 너무나 두려웠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얼마나 많은 ‘부정’에 노출되어 있을 지가 상상이 된다. 그리고 ‘강한 마음’이 느껴진다. 나 같이 겁 많은 사람은 ‘넘사벽’인 자리들. 한 국회의원은 말했다. “세상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는 걸레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안다. 내가 ‘하얀 세상’에 사는 건, 나의 ‘하얀 마음’을 지키기 위한 절개, 지조 같은 게 아니다. 너무나 겁이 많아서다. 나의 극소심함이 나를 그렇게 살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걸레가 되어 세상을 닦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인 것이다. 만일 나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속인다면 나는 ‘선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남들이 나를 고고한 사람을 알아주기를 기대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게 지고 나면 스스로를 약하다고 하지 않고 ‘선한 사람’으로 만들어 자위한다. 약한 자의 정신 승리법이다. 내게도 이런 마음은 깊고 깊다. 무의식에 깊이 쌓였다. 이런 마음으로 사는 우리는 세상을 ‘까만 세상과 하얀 세상’으로 나눠보게 되고 까만 세상을 증오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죄 지은 자들에게 마구 돌멩이를 날린다. 하지만 그 돌멩이는 실은 우리 자신에게 던진 것이다. 우리의 깊은 마음은 상처투성이다. ‘여긴 또 어드메냐/목이 마르다/길이 있다는/물이 있다는 그곳을 향하여/죄가 많다는 이 불구의 영혼을 이끌고 가보자/그치지 않는 전신의 고통이 하늘에 닿았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항상 죄의식에 시달린다. 죄인을 다스리기는 쉽다. 우리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체로 무능하고 악한 것은 우리들이 죄인이 되어 알아서 기기 때문이다. 니체는 말한다. “노예의 도덕은 ‘선과 악’이고 주인의 도덕은 ‘좋음과 싫음’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에 빠져 노예로 사는 게 우리 삶의 실상이다. 이제 우리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 좋을 때는 좋다고 하고 싫을 때는 싫다고 소리쳐야 한다. 우리의 희망은 ‘촛불 집회’일 것이다. ‘죄인들’이 모여 윗물을 맑히는 일일 것이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은 저절로 맑아진다. 어떤 원시인들은 무슨 잘못을 했을 때 “어쩔 수 없었어.”라고 한단다. 우리는 다 어쩔 수 없이 악하게 산다. 더러운 물에는 더러운 물고기가 살 수밖에 없다.  
234 성자들의 가르침/권서각 file
편집자
948 2017-12-25
성자들의 가르침 초등학교 동기회 모임에 오랜만에 참석했다. 어릴 때 모습은 간곳없고 영락없는 할매, 할배들이었다. 그들 눈에 나도 할배이리라. 어린 시절 이야기 끝에 운동회 날마다 교단에 칼을 꽂으며 행패를 부리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린 우리의 눈에 그는 몹쓸 짓을 많이 하는 악인이었다. 후에 삼청교육대까지 갔다 왔다고 했다. 무심코 “그 사람 아직 안 죽었어?”라고 물었다. 아직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대답이다. 왜 그런 물음이 무심코 나왔는지 스스로 놀랐다. 아마 마음 속 어디엔가 그는 벌을 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남아 있어서였을 것이다. 명심보감의 첫 구절이 떠올랐다. 공자께서 가라사대 선을 행하면 하늘이 복을 내리고 선하지 않은 자에게는 화를 내린다고 하셨다.(子曰 爲善者 天報之以福 爲不善者 天報之以禍)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면 반드시 그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말씀을 옳다고 믿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산다. 그것이 성자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세상이 온전히 망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공자께서는 또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己所不欲 勿施於人) 내가 괴롭힘을 당하면 싫으니 나도 남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나의 부정적인 것을 하나씩 줄이면서 선으로 나아가자는 것이다. 네거티비즘(negativism)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면 네가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하셨다. 내가 먼저 선을 행하면 그만큼의 선이 되돌아온다는 적극적인 선으로의 의지다. 포지티비즘(positivism)이다. 지구 반대편에서 태어나신 두 성자가 그 방법은 다를지라도 모두 타인에 대한 선/사랑을 말씀하신다. 세상은 언제나 바람 잘 날 없고 어쩌면 노자의 말처럼 하늘은 선하기만 한 것이 아닌지도(天地不仁) 모른다. 그러하지만 세상은 온전히 망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남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삶을 스스로 실행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불가사의한 사랑을 가르치고 실행하신 성자이시다. 성자의 가르치심을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살아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 참 좋다. 평화란 말도 참 좋다. 세상은 여러 가지 갈등으로 혼란스럽다. 그럴수록 사랑, 평화, 타인에 대한 배려 등 성자의 가르침이 있어 우리가 오늘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지난 날 이해인 수녀님과 법정 스님은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며 가까이 지내셨다. 두 분의 모습이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성탄절이 가까워온다. 올 크리스마스에도 스님들이 성탄을 축하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서로 배려하고 사랑한다면 세상은 한층 평화로울 것이다.  
233 하나는 전체요 전체는 하나다 一卽多 多卽一 (화엄경)/고석근 file
편집자
1053 2017-12-16
하나는 전체요 전체는 하나다 一卽多 多卽一 (화엄경) 점 네루다 아픔보다 넓은 공간은 없다 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만한 우주도 없다. 한 아이가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담임선생님이 다른 아이들에게 이유를 물으니 다들 ‘걔한테서 냄새가 난다’고 하더란다. 혐오감이 냄새로 나타나는가 보다. 아이들에게 왕따가 된 그 아이는 선생님들과 지내려한단다. 쉬는 시간에는 선생님들을 찾아가 교과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한단다. 담임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말한다. “그 아이하고만 너무 많은 얘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어떻게 해야 하죠?” 나는 성경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해 얘기하며 예수처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다른 양들은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왜 우리가 길 잃은 양 한 마리 때문에 피해를 당해야 해? 목자는 전체를 생각해야 하지 않아?” 하지만 예수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 우리는 아플 때 안다. 아픈 부위가 나의 전부임을. 손가락 하나가 아프다고 손가락 하나가 아픈 게 아니다. 다른 부위들이 아픈 손가락을 위해 함께 아파하고 그 손가락의 치유를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우리는 이러한 ‘본성(本性)’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왕따 한 아이를 계속 왕따 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과 다른 동물의 결정적 차이는 ‘공감(共感)’의 유무다. 인간은 다른 인간, 존재와 감정을 함께 나누도록 진화하였다. ‘아픔보다 넓은 공간은 없다/피를 흘리는 아픔에 견줄만한 우주도 없다.’ 한 인간에게 아픔은 전부다. 그 아픔에 모두 함께 하는 것이 타고난 인간의 마음이다. 아픔으로 우리는 모두 ‘점’ 하나가 된다. 점 하나가 빅뱅을 일으켜 지금의 우주가 되었단다. 언젠가는 우주는 다시 점 하나로 돌아간다고 한다. 우리는 아픔을 통해 점 하나가 된다. 우주의 비의(秘義)에 도달한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잃어버렸을까?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의 의식은 서구의 자본주의가 만든 의식이다. 자본주의의 중심세력인 부르주아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이런 사고 구조에서는 ‘나’는 사라져버린다. 세상은 나와는 별개로 어떤 힘, 법칙에 의해 돌아간다. 근대 자본주의 이후 우리는 이런 ‘사고의 틀’로 살아간다. 그래서 왕따의 아픔을 함께 느끼지 못한다. ‘왕따’를 객관적으로 분석한다. 스마트 폰을 검색하듯이 나와 남의 아픔을 본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물질적 이익을 위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자본주의 이전의 인간은 이런 사고 구조를 갖고 살지 않았다. 원시인들은 자신들이 체험한 것을 갖고 삼라만상을 만나며 자신의 마음을 점점 확장해 갔다. 이런 마음의 구조를 ‘야생의 사고’라고 한다.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자신의 체험, 아픔을 중심으로 널리 널리 퍼져가기에 다른 사람들, 다른 동식물, 다른 무생물들과 아픔을 함께 한다. 원시인들에게 세상은 점 하나다. 자본주의가 만든 ‘문명의 사고’는 세상과 우리 마음을 황폐화시켰다. ‘포항의 지진’은 우리 모두에게 묻는다. 다들 함께 아프냐고?  
232 어른과 꼰대/권서각 file
편집자
1272 2017-11-26
어른과 꼰대 젊은이들이 기성세대를 가리키는 말 가운데 ‘꼰대’라는 비속어가 있다.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가리키는 말 가운데 ‘철부지’란 말이 있다.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간극을 보여주는 말들이다. 이른바 세대차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의 모든 기성세대는 꼰대이고 모든 젊은이가 철부지인 것은 아니다. 꼰대와 철부지가 단순히 자연연령만으로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젊다고 모든 젊은이가 철부지는 아니다. 그들에겐 자유로운 영혼이 있다. 나이가 많다고 모두 꼰대인 것은 아니다. 어른이라고 불리는 이들도 있다.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 나이가 든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꼰대가 될 확률이 더 높다. 우리사회의 나이든 사람들 가운데는 어른의 수효보다 꼰대의 수효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감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꼰대는 부정적인 말이고 어른은 긍정적인 말이다. 누구나 꼰대가 아닌 어른이 되고 싶을 것이다. 그렇다면 꼰대와 어른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꼰대는 자신이 겪은 경험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특히 성공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삶이 절대 진리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말끝마다 ‘왕년에 내가 해 봐서 아는데’, ‘내가 자네 나이 때는 말이야’라는 말을 자주한다. 조그만 지위라도 얻게 되면 내빈소개 할 때 이름이 불리지 않으면 불편해 한다. 그리고 젊은이에게 무언가를 자꾸만 가르치려 한다. 사회는 변하고 가치관도 변한다. 그런데 꼰대는 자기가 젊은 시절 성공한 방법이 지금도 통할 거라고 믿는 자다. 변화된 사회에서 구시대의 방법으로 성공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자가처럼 하라고 강요한다. 그런 기성세대를 젊은이들은 꼰대라 부른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 가운데도 꼰대가 있었다. 대개의 독립지사들은 이미 왕정시대가 끝나고 공화정의 시대가 올 것을 예비했다. 그래서 1920년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체제는 공화제였다. 그런데 몇몇 독립지사들의 독립운동의 목표는 왜놈을 몰아내고 임금을 다시 모시자는 것이었다. 이들을 복벽파라 부른다. 전형적인 꼰대다. 그렇다고 시대의 조류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것이 꼰대를 면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유불리만 추구하면 기회주의자가 되기 쉽다. 어찌해야 꼰대가 아닌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우선 젊은이를 철부지로 보지 말아야 한다. 젊은이에게는 어른이 갖지 못한 유연한 사고와 창의력이 있다. 이런 젊은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자기의 생각만이 옳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끊임없이 진보하는 역사 속에서 과거에 머물러 있으면 꼰대가 될 수밖에 없다. 기성세대는 신세대에게 없는 풍부한 경험이 있다. 이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만 옳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신세대에 귀를 열 때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다.  
231 나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에머슨)/고석근 file
편집자
884 2017-11-16
나에 대한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이 된다(에머슨) 솔직히 말해서 나는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것이 아닌지 몰라 열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 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우리는 가끔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아무것도 아닌지 몰라/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그 목숨인지도 몰라’ 자신이 파리나 모기 목숨 같이 느껴질 때, 우리는 자칫 ‘약자의 정신 승리법’에 빠질 수가 있다. 루쉰의 소설 ‘아Q정전’의 주인공 아Q처럼. ‘비록 졌지만 정신은 내가 우월하므로 결과적으로 이긴 것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항상 자신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합리화하려는 아Q. 이런 인간 군상들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은 ‘자존심’을 가진 인간들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은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잘 찾아보면 우리에게 남보다 뛰어난 점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사람들에겐 재벌 회장이 전혀 부럽지 않은 점이 있다. 그들보다 젊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은 재벌 회장 앞에 섰을 때 주눅이 들지 않을 수 있다. 나는 강의를 할 때 수강생들에게 가끔 질문을 한다. “개미와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많은 사람들이 “사자요!” 한다. 이 때 자존심을 갖고 사시는 분들은 말한다. “사자가 개미를 어떻게 이겨요?” 그렇다. 사자는 절대 개미를 이길 수 없다. 지금까지 둘 다 이 지구에 잘 살고 있지 않은가?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손자)’.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지는 건, 상대를 알고 나를 알려고 하지 않아 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남보다 잘난 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자존심이다. 자신과 상대방의 잘난 점과 못난 점을 모두 인정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이런 ‘자존심’만으로는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갈 수 없다. 자신보다 잘난 점을 가진 사람 앞에서 주눅이 들고, 못난 사람 앞에서 우쭐해지는 마음으로 어떻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무언가가 잘 나서 자존심이 센 사람은 우리 눈에 멋있게 보일지 모르나 조나단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의 주인공 걸리버가 본다면 어떻게 보일까? 달걀을 깨는 방법 가지고 목숨을 거는 소인국의 사람들처럼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이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존감’을 가져야 한다. 잘난 점, 못난 점을 떠나 자신을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자존감’이다. 이런 마음은 어떻게 생겨날까? ‘열개나 되는 발가락으로/열개나 되는 손가락으로/날뛰고 허우적거리다/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그러다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의식의 대전환이 일어날 때다. ‘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인간은 ‘유적존재類的存在(마르크스)’다. 인간은 ‘개인’으로 살아가지만 ‘인류(人類)’로 살아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물방울’이면서도 ‘강물’인 것이다. 자신이 ‘강물’이 되고,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이 되고, 불빛의 ‘노래’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모든 사람, 삼라만상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그대로 아름답다. 그의 눈엔 모든 존재가 다 아름답게 보인다. 다시 주말마다 촛불이 켜진다. 우리 모두 강물 위에 떨어지는 불빛이 된다.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가볍지 않다(이싸)’  
230 민주평화통일/권서각 file
편집자
833 2017-10-25
민주평화통일 스위스 융플라워를 보기위해 전망대에 오르는 산악열차 안에서 여행 중인 독일인 부부를 만났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나라가 위험한데 어떻게 이렇게 여행을 올 수 있느냐고 했다. 그들은 한반도에서 곧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이 느끼는 것 같았다. 외국인이 느끼는 전쟁에 대한 체감온도가 우리와 매우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정전 상태인 나라이고 분단 이후 늘 전쟁의 위험 속에 살아왔기 때문에 위험의 체감정도가 무디어진 게 사실이다. 현재의 북미관계 남북관계는 분명히 위험하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놀랄 만치 평온하다. 여행에서 돌아와 보니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영주시협의회장’이라는 생에서 가장 긴 이름의 직함이 주어져 있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는 1980년 출발한 헌법기구이다. 말 그대로 평화통일에 대한 정책을 의장인 대통령에게 자문하고 평화통일과 관련된 기반을 조성하고 인식을 확산하는 일을 하는 기구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구이기에 책무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더구나 남북관계가 최고로 악화된 상황이라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분단된 나라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64년 넘게 그야말로 전쟁의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북은 남을 남조선 괴뢰도당이라 하고 남은 북을 주적이라 하고 적대감정을 키우고 있다. 분단은 남과 북의 통치자들의 권력 강화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그런 나날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높아지고 위험에 대한 감각은 무디어진 게 사실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 시민들의 소원은 통일이다. 기구의 이름에서 이미 드러나 있듯이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은 민주통일이요 평화통일이다.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인 나라요 통일의 방법은 전쟁이 아닌 평화동일이다. 이미 북은 핵무기와 미사일을 보유했다. 우리도 우리의 우방인 미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사실상 핵을 보유한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전쟁은 한반도의 재앙이요 인류의 재앙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처음으로 핵무기가 사용된 이후 핵무기는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그것이 서로가 공멸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의 위험 속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 속에서 전쟁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축구를 하다가 전쟁을 하가도 하고 여자를 얻기 위해서 전쟁을 하기 했다. 기분 나쁜 말 한 마디가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김정은과 트럼프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성격도 위험의 한 요소다. 평화통일 이전에 전쟁의 위험 요소부터 해소하는 것이 우선과제다. 주어진 직함의 길이만큼이나 책임감이 무겁다.  
229 내 안에는 나 혼자 살고 있는 고독의 장소가 있다 그 곳은 말라붙은 당신의 마음을 소생시키는 단 하나의 장소다(펄 벅)/고석근 file
편집자
877 2017-10-15
내 안에는 나 혼자 살고 있는 고독의 장소가 있다 그 곳은 말라붙은 당신의 마음을 소생시키는 단 하나의 장소다(펄 벅) 이십억 광년의 고독 다나카와 슌타로 인류는 작은 공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 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 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인력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우주는 점점 팽창해간다 따라서 모두는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지난 수요일 밤 공부 모임에 퇴직한 남자분이 왔다. ‘아저씨’가 공부하러 오면 긴장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아저씨’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서는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오랜 가부장 문화와 군사 문화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퇴직자 분에게 자신을 소개하라고 하자 자신의 삶의 이력을 짧게 얘기하고 나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수선화에게)’는 모 시인의 시까지 낭송했다. 오랜 외국 생활을 해서인지 합리적인 생각을 하고 사시는 듯 했다. 한 평생 열심히 살아오다 일에서 물러난 남자의 마음은 어떨까? 퇴직한 후 한 순간에 무너지는 많은 남자들을 보면 은퇴자의 속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가장 무서운 게 ‘외로움’일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외로움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날 것이다. 그런데 ‘외로우니까 사람’이라니? (한 때 유행했던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그 시인의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시인은 외로움을 받아들이라고 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고 말한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고 까지 하면서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고 한다. 물론 시적 수사라고 볼 수 있지만 ‘하느님’ 같은 초월적 존재나 ‘산 그림자’ 같은 무생물까지 외롭다고 하는 것에는 훌륭한 시가 갖는 미적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현대인은 외롭다.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자꾸만 인간을 그렇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은 원래 외롭지 않았다. 자본주의 이후 형성된 인간의 특징이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인간상이다. 그런데 이 시는 외로운 사람에게 외로움을 극복하게 하는 게 아니라 외로움 속에 주저앉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 외로운 사람에게 일시적으로는 위안의 묘약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끝내 외로움을 넘어서야 한다. 외로움 속에 빠져들면 우리는 ‘피학증 환자(마조히즘)’가 된다. 자신을 학대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우리 사회의 현란한 밤풍경은 우리의 외로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시는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를 ‘힐링’해 줄 뿐이다. 우리는 단호히 ‘힐링’을 거부해야 한다. 힐링해주는 예술(시)로부터 탈주해야 한다. 외로움에 ‘정면으로 직면(세상이 다 외롭다고 자위하지 말고)’하게 되면 우리 안에서 외로움을 넘어 혼자 무소의 뿔처럼 가게 하는 힘이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외로운 게 아니라 고독해져야 한다. ‘외로움이란 혼자 있는 고통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고, 고독이란 혼자 있는 즐거움을 표현하기 위한 말(폴 틸리히)’인 것이다. 외로움에 젖지 않고 고독해지면 우리의 깊은 곳에서 ‘인류의 지혜’가 깨어난다. 한 인간의 무의식에는 인류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깨친 지혜들이 깊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독해진 인간은 ‘작은 나’를 넘어서 ‘큰 나’로 나아간다. 외로움에 젖은 인간은 ‘작은 나’에 계속 머물러 자신을 점점 쪼그라들게 한다. 우리는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 세상이 우리에게 이렇게도 깊은 고독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우리 자신을 오롯이 맡겨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이렇게 자신의 외로움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그러면 우리의 깊은 무의식에서 ‘이십억 광년의 지혜’가 깨어난다. 외로움을 수동적으로 견디며 사는 세상에서는 폭력(남을 향해, 자신을 향해)이 난무한다. 그래서 퇴직한 그 남자의 깊은 외로움이 슬프다. 외로움의 병을 주고 힐링의 약을 주는 우리 사회는 얼마나 무서운가! 우리는 ‘이십억 광년의 고독’을 받아들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 혼자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남과 함께 갈 수 있다.  
228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한용운)/고석근
편집자
958 2017-09-16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한용운) 나룻배와 行人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낡어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 ‘즐거운 사라’ ‘가자, 장미여관으로’ 등 에로틱한 작품으로 세상의 비난을 받던 마광수 교수가 자살했다고 한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세상의 도덕윤리를 어지럽힌다고 생각했다. 그도 교수의 품격을 잃은 ‘방탕한 인간’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그의 삶과 죽음을 보니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가! 세상은 그를 애도하는 분위기로 돌변했다. 르네 지라르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희생재물로 사람을 바치고는 그를 성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그가 살아있을 땐 왜 그를 존중하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 성적 담론에서는 얼마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가! 이런 사회에서는 누군가의 희생재물이 필요하다.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사회를 바꾸면 자신들의 음흉함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힘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적당한 사람’을 희생재물로 삼는 것이다. 여기에 속아 넘어가는 대다수 사람들이 한 사람을 잡아 죽이고는 죽인 죄의식을 씻기 위해 이번엔 그를 칭송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엔 사랑, 에로티시즘이 난무한다. 왜 우리 사회에서는 사랑, 에로티시즘이 폭력적으로 드러나는가? 우리 사회보다 개방되어있는 서구에서는 성범죄가 우리 사회보다 훨씬 적다는데. 사랑, 에로티시즘이 얼마나 고결하고 숭고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 사람은 만해 한용운 시인일 것이다. 그는 “내가 어떻게 너를 통해서만 내가 되는가... 내가 나를 너에게 양도하고 너 속에 나를 상실할 때만 내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서여연화라는 여인을 사랑하며 그녀를 통해 진정한 ‘나’로 태어나는 신비로움을 깨달았나 보다. 그래서 그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고 하여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 보편적 사랑으로 확장할 수 있음을 노래했다. 우리는 그의 시 ‘나룻배와 行人’을 보살행을 노래한 시로 이해한다. 보살의 무조건적인 사랑. 맞다. 하지만 그런 숭고한 사랑은 어디서 싹이 트는가! 진흙에서 연꽃이 핀다. 우리 눈에 진흙투성이로 보이는 이성간의 사랑이 숭고한 사랑의 씨앗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진흙투성이를 견디지 못한다. 워낙 완고한 가부장적인 교육을 받았기에 자신의 성적 욕망이 더러운 진흙투성이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성적 욕망은 연꽃을 피우지 못하고 점점 더 썩어가는 진흙투성이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적 담론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사람을 비난한다. 자신 속의 더러운 진흙투성이를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자라면서 이성 간의 사랑을 제대로 해 본 사람은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크나큰 사랑을 느낄 것이다. ‘나는 나룻배/당신은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당신은 물만 건느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어요’ 이런 숭고한 사랑을 모르고 사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황폐한가! 마광수 교수의 죽음을 통해 우리 사회가 ‘연꽃을 피우는 진흙’의 에로티시즘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그의 죽음을 단지 숭고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가 아닐 것이다.  
227 귀태(鬼胎)라는 말/권서각 file
편집자
961 2017-08-25
귀태(鬼胎)라는 말 귀태라는 말은 무속신앙에서 나온 말이다. 귀태가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삼국유사다. 신라 진지왕은 빼어난 미인인 도화부인에 마음이 끌려 궁궐로 불러 후궁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도화부인은 남편이 있는 몸이라 하여 거절한다. 진지왕이 죽은 후 귀신이 되어 도화부인과 사통하여 비형랑(鼻荊郞)이 태어난다. 이를 들은 진평왕이 벼슬을 주어 궁에 살게 하지만, 비형랑은 늘 궁을 나와 귀신과 즐겨 놀았다. 비형랑과 같이 귀신과 사람이 사통하여 난 아이를 귀태라 한다. 귀태는 태어나지 말아야 할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속신앙은 우리의 토속신앙이다. 불교, 기독교 등의 종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민족은 무속신앙을 믿었다. 무속신앙의 무(巫)라는 글자는 종교의 원형을 보여준다. 위의 가로획은 하늘, 아래의 가로획은 땅을 뜻한다. 가운데 세로획은 하늘과 땅의 소통을 뜻한다. 두 개의 사람인(人)자는 무녀(巫女)와 박수무당(남자무당)을 뜻한다. 무당은 하늘의 신과 땅의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존재이니 오늘의 사제나 승려와 같은 역할을 했다. 진평왕이 비형랑을 진지왕의 차남으로 인정한 것도 무속신앙을 믿었기 때문이다. 도화살((桃花煞)이라는 말은 도화부인처럼 한 남자와 살지 못하고 여러 남자 살아야 하는 운명을 말한다. 무속신앙의 흔적은 우리 생활 곳곳에 남아 있다. 귀태라는 말 때문에 나라가 매우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2013년 민주당 원내대변인 홍익표 의원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책을 인용하면서 귀태라는 말을 사용했다. 기시 노부스케(1급 전범, 만주국 실권자)와 박정희(창씨개명 다가키 마사오)는 만주국의 귀태라는 말이 있다면서 지금 한국과 일본에는 귀태의 후손이 정상으로 있다는 말을 했다. 당시 집권당인 새누리당은 막말이라고 거세게 항의하며 국회윤리위원회에 제소했다. 홍익표 의원은 책에 나온 말을 인용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견디지 못하고 대변인 직에서 물러났다. 자유한국당 서울시당위원장이라는 분의 공식석상에서의 말이 논란이 되고 있다. “문재인이가 청와대를 5년 동안 전세 내어 우리 보수 주류 세력을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상대가 아주 나쁜 놈, 깡패 같은 놈이기 때문에 젊잖게 나가다가는 나라꼴이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을 주사파라고도 했다. 주사파라는 말은 김일성 주체사상을 따르는 빨갱이라는 말이다. 어떤 근거로 그리 말하는지 아무래도 막말인 듯하다. 막말의 사전적 풀이는 ‘되는대로 말하거나 속되게 하는 말’이다. 홍익표의 귀태의 후손이라는 말은 막말일까? 결과를 보면 박근혜 정권은 국정농단으로 퇴출되었으니 그의 말이 마냥 막말은 아닌 듯도 하다. 어느 말이 막말인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이다.  
226 청춘시대에 갖가지 우행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중년이 되어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이다(노신) /고석근 file
편집자
757 2017-08-15
청춘시대에 갖가지 우행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중년이 되어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할 것이다(노신) 여덟 살의 꿈 부산 부전초 1학년 박채연 나는 ○○ 초등학교를 나와서 국제중학교를 나와서 민사고를 나와서 하버드대를 갈 거다. 그래 그래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정말하고 싶은 미용사가 될 거다.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에 대해 교육계의 논쟁이 뜨겁다. 한 교사에게 들은 얘기다. “아이들을 참 잘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보면 거의 다 기간제 교사예요.” 왜 그럴까? 정규직 선생님들은 그 어려운 임용 시험을 치르느라 학창시절을 오로지 공부벌레로 보냈기에 아이들과 마음을 제대로 나눌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간제 교사를 정규직화하면 다른 예비 교사들과 형평성이 맞지 않을 것이다. 나는 70년대에 국립사범대학을 다녔다. 그 때는 졸업하면 임용 시험 없이 100% 교사로 발령이 나니 다른 직종으로 가려는 학생 외에는 아무도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교수님들이 시험 문제도 참 쉽게 내 주셨다. 그래서 많은 학생들이 여행을 하고 여러 써클(동아리) 활동을 하고 읽고 싶은 책을 보고 연애도 열심히 했다. 교사를 천직으로 생각하는 학생들은 야학 교사로도 많이 활동했다. 지금은 임용 시험이 고시 수준이라고 하니 엄청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교사로 오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교사들이 미용사가 되기 위해 ‘국제중학교를 나와서/민사고를 나와서/하버드대를 갈 거다.’라고 결심하는 ‘여덟 살의 꿈’을 이해하고 도와 줄 수 있을까? 사람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큰다. 청춘 시절에 갖가지 우행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어찌 좋은 교사가 될 수 있겠는가? 오로지 공부만 했으니 지식 전달에는 자신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교사가 아니라 입시 학원 강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 논쟁’이 ‘전반적인 교사 양성 과정에 대한 사회적 논쟁’으로 확산되었으면 좋겠다. 최소한 교사는 대학 시절만이라도 갖가지 우행을 저지르며 성장했으면 좋겠다. 그런 교사들은 아이들의 갖가지 우행을 지켜보며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225 그 사람의 말/권서각 file
편집자
704 2017-07-25
그 사람의 말 언어(Language)의 어원은 그리스어 로고스(Logos)에서 왔고 한다. 로고스는 이성(理性) 혹은 논리라는 뜻이 있다. 인간의 감성(感性)을 가리키는 파토스(Pathos)와 상대적 지점에 있는 말이다. 그러니까 언어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 하나인 논리적 사고 능력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말을 바르게 잘 하거나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논리적 사고능력을 가졌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말을 바르게 하는 사람은 정상적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옛 어른들도 사람을 볼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먼저 보았다. 이 때 언(言)이 곧 언어능력이다. “아유, 클 났네... 다 죽었네... 다 죽었어... 왜 그거를 못 막았어... 그거를 얘기를 좀 짜 보고... 그러니까 고한테 정신 바짝 차리라고... 얘네들이 이게 완전히 조작품이고 얘네들이 이거를 훔쳐가지고 이렇게 했다는 걸로...” 지금은 감옥에 있는 최순실의 전화통화 내용이다. 이 사람의 말은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주어 서술어의 호응이 되지 않아 논리적이지 않다. 낱말의 선택이 매우 부적절하다. 태블릿 피시를 ‘조작품’이라는 사전에도 없는 말을 쓰고 피시를 공개한 언론사 사람들을 ‘얘네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그’ 저‘와 같은 지시어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해서 내용이 불분명하다. 그리고 통화내용도 거짓으로 사건을 꾸미라는 부도덕한 지시다. 얼마 전 검찰 조사에서는 특검이 자기와 딸과 손자 삼대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했다. 이 때 사용한 ‘멸망’이라는 낱말은 잘못 쓰인 말이다. 멸망과 호응되는 말은 ‘나라’다. 나라가 멸망했다는 말은 있어도 사람이 멸망했다고는 하지 않는다. 며칠 전 재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이 재판장에 40여 년 동안 지켜본 박대통령을 나오시게 해서 너무 많은 죄인인 것 같습니다. 박대통령께선 절대 뇌물이나 이런 걸 갖고 나라를 움직였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검찰이 몰고 가는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이 재판이 진정하게 박대통령이 허물을 벗는 나라를 위해 여태까지 일했던 대통령으로 남도록 해주시면 좋을 거 같습니다.” ‘너무 많은 죄인은’는 무엇이며 ‘몰고 가는 형태’는 무엇이며 ‘뇌물을 가지고 나라를 움직인다.’는 건 무엇인가? 한마디로 언어능력 수준이 너무나 미약하다. 상식적 사고능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이다. 차라리 청소 아줌마가 했다는 “염병하네.”가 훨씬 수준 높은 언어다. 우리는 이런 사람에게 나라 일을 자문 받고 연설문을 고쳐달라고 하는 분을 국가원수로 뽑고 그녀의 통치를 받았다.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는 그렇게 했던가에 대해 생각해볼 때다.  
224 계절의 여왕/권서각
편집자
839 2017-05-25
계절의 여왕 언제부터인가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불렀다. 노천명의 시 ‘푸른 오월’의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르는데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록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많은 수효의 꽃이 피는 계절이기에 그러하리라. 오월에 피는 꽃 가운데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꽃이 장미다. 온통 신록인 천지에 유독 붉은 꽃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백과사전에서는 장미를 오월의 여왕이라 한다.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장미를 사랑했다. 장미를 너무 사랑해서 장미 가시에 찔려 죽었다. 그가 스스로 쓴 묘비명에는 ‘장미, 오 순수한 모순, 그렇게 많은 눈꺼풀 아래 누구의 잠도 되지 않는 기쁨’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미 남의 여자가 된 루 살로메를 사랑했던 가엾은 남자의 독백은 아니었을까. 신이 처음 장미를 만들었을 때 큐피드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장미에 입술을 댔다. 꽃 속에 숨어 있던 벌이 놀라서 큐피드의 입술을 쏘았다. 비너스는 벌의 침을 뽑아 장미 줄기에 꽂아 두었다. 그것이 가시가 되었다. 그 후로도 큐피드는 장미 가시에 찔리는 아픔을 아랑곳하지 않고 장미를 사랑했다고 한다. 장미의 꽃말은 ‘애정’, ‘행복한 사람’이다. 가장 열정적인 사랑에는 가장 치명적인 것이 따르기 마련이다. 가시에 찔리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여왕께 무릎을 꿇고 고백하고 싶은 계절이 오월이다. 우리 절기로 입하(立夏)와 소만(小滿) 무렵이 오월이다. 올해 입하가 양력으로 5월 5일이었고 소만이 21일이다. 소만은 24절기 가운데 햇볕이 가장 풍부하고 만물이 점차 자라서 누리에 가득 찬다는 절기다. 만물의 기운이 가장 왕성한 절기라는 뜻이다. ‘동국세시기’에는 이 계절에 계집아이들이 봉숭아꽃을 으깨어 손톱에 물을 들이는 풍습이 있다고 했다. 속설에 첫눈이 올 때까지 봉숭아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오월은 사랑의 계절이다. 신라 향가 헌화가는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수로부인에게 꽃을 바치면서 부른 노래다. 신라 최고의 미인으로 알려진 수로부인이 동해 바닷가를 지날 때 벼랑의 진달래꽃을 보고 갖고 싶다고 하자 소에게 풀을 뜯기던 머리카락이 하얀 노인이 벼랑에 올라가 꽃을 꺾어 바쳤다 한다. 수로부인의 아름다움이 노인에게 암벽등반을 하게 한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렇게 노인에게까지 충만한 기운을 준다. 계절의 여왕 오월은 더없이 우아하고 아름답다. 그녀 앞에 삼가 무릎을 꿇고 뚜껑바위 산에 핀 들꽃 한 다발을 바친다. 여왕이여 사양하지 말고 받아 주시라.  
223 인생의 본질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통해 완성해가는 것이다(사르트르)/고석근 file
편집자
873 2017-05-15
인생의 본질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을 통해 완성해가는 것이다(사르트르)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팽이가 돈다 어린 아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 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 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그림책 ‘108번 째 아기양(아야노 이마이 글, 그림)’에서 주인공 여자 아이 수아는 잠을 자려고 양을 센다. 양 1 마리, 양 2 마리, 양 3 마리...... . 양들이 차례대로 침대를 넘어가는데, 쿵 소리가 나더니 이마에 커다란 혹이 볼록 솟은 108번째 양이 침대를 넘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있다. 108번째 양이 울먹이며 말했다. “흑흑, 역시 난 안 되겠어요.” 그래서 수아는 톱으로 침대에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108번째 양이 후닥닥 달려와 몸을 날려 구멍으로 쏙 들어가 멋지게 발을 착 내디뎠다. 마침내 양들이 몸을 둘둘 말고 수아는 다리를 쭉 뻗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간절히 원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우리의 무의식이 도와주고 무의식과 연결된 온 우주가 도와준다) 문제는 간절히 원하는 것이 없을 때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키에르케고르)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촛불이 세상을 다 밝힐 듯 했는데, 온갖 흉흉한 바람이 곳곳에서 불어오고 있다. 삶을 제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방황(괴테)’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김수영 시인은 한평생 자유를 향한 간절한 꿈을 꾸었기에 수많은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어느 날 김수영 시인은 팽이를 돌리는 아이를 본다. ‘팽이가 돈다/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내 앞에서 돈다’ 김수영 시인은 팽이에게서 깊은 가르침을 듣는다.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다. 우리가 2017년의 봄에 틔운 싹들이 어떻게 자라고 열매를 맺을 것인가? 순전히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우리가 간절히 피워 올렸던 ‘촛불’을 각자의 가슴에 고이 간직할 수만 있다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스스로 제 길을 찾아 굴러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