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4호...
   2019년 12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 오늘방문자 : 
    542
  • 어제방문자 : 
    814
  • 전체방문자 : 
    465,389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22 공주약전/권서각 file
편집자
807 2017-04-25
공주약전 옛날 어느 나라 왕궁에 공주가 살았습니다. 왕궁은 파란 기와로 지은 집이었습니다. 이 나라는 원래 왕국이 아니라 공화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 아버지가 기마병을 몰고 와서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왕이 되자 그녀도 공주가 되었습니다. 이웃 나라들은 민주공화국이었지만 그는 스스로 왕이 되어 그의 통치에 반대하는 자들을 역당이라는 누명을 씌워 법의 이름으로 주리를 틀고 참하였습니다. 왕의 권력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공주는 그런 부왕의 통치를 보며 궁궐에서 자랐습니다. 모든 것은 아랫사람이 알아서 해주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공주는 보통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만 거울을 보며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하고 물으면 거울은 공주가 제일 예쁘다고 대답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주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절대 권력은 끝이 있게 마련입니다. 먼저 왕비가 괴한이 쏜 화살에 맞아 서거했습니다. 감히 왕비를 시해하는 나쁜 놈이 있다는 사실에 공주는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물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때 이상한 주술사가 나타나서 달콤한 말로 공주를 위로했습니다. 주술사는 공주의 말에 추호의 거스름이 없었습니다. 공주는 세상에 믿을 사람은 오직 주술사 한 사람 뿐이라 여겼습니다. 아메리카라는 큰 나라 사신의 장계는 주술사가 공주의 몸과 마음을 온전히 지배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왕비가 서거하자 공주는 왕비의 구실을 대신했습니다. 공주의 권위가 한층 높아진 샘입니다. 얼마 후 부왕도 신하의 칼을 맞고 붕어하게 되어 공주는 왕궁을 떠나야 했습니다. 얼마 후 백성들은 공주가 불쌍하다며 공주를 공화국의 통치자로 추대했습니다. 그래서 공주는 다시 파란 왕궁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공주가 통치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백성도 있었지만 그들은 적당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간 주술사도 세상을 떠나서 주술사의 딸이 공주의 시중을 들었습니다. 공주는 오로지 주술사의 딸의 말만 믿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행실이 올바르지 못한 주술사의 딸은 공주를 움직여 나라 일을 마음대로 농단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이게 나라냐고 하며 촛불을 들고 왕궁 앞마당에 모여 밤을 샜습니다. 원로원의 결정으로 공주는 궁에서 쫓겨나고 다시 포도청 옥사에 갇히는 몸이 되었습니다. 공주는 자기만이 옳다고 여겼기에 자기 말에 토를 다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나쁜 사람 또는 배신자라 하고 가차 없이 찍어냈습니다. 다른 왕자와 공주, 충성스런 신하도 한 마디만 토를 달면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포도청 옥사에 갇혀서도 옥바라지하는 신하 가운데 토를 다는 자가 있으면 내쳤습니다. 그리하여 공주 곁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늘 공주가 불쌍하다고 하던 백성들의 말이 옳았습니다. 공주는 참으로 불쌍하게 되었습니다.  
221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인류를 구원한다(괴테)/고석근 file
편집자
720 2017-04-15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인류를 구원한다(괴테) 등 이도윤 새끼들이 모두 떠난 사람의 쭈그러진 늙은 등은 허전하여 바라볼수록 눈물이 난다 위대하여라 등이여 이 땅의 모든 새끼들을 업어낸 외로움이여 한 할머니가 ‘약장수’에게 사기를 당했단다. 수 백 만원을 날렸다고 딸이 울부짖는다. “다 제 탓이에요.” 그 딸은 몇 년 동안 아이들 교육 때문에 외국에 나가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자 엄마가 매일 집으로 찾아왔단다. “엄마, 그만 좀 와.” 반찬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엄마에게 짜증을 냈단다. “그렇게 굳건하던 엄마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엄마는 한없이 강하나 늙은 여자는 얼마나 무력한가! 무력한 늙은 여자는 다시 엄마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살갑게 대하는 젊은 약장수들이 자식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알면서도 속는다고 한다. 이경자 소설가는 중국의 소수민족인 모소족의 ‘모계사회’에 가서야 비로소 깊은 안식을 찾았다고 한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소유물로 묶지 않는 사회. 그래서 서로가 사랑과 평등으로 만날 수 있는 사회. 우리가 사는 가부장 사회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인간’이 될 수 없다. 남자는 평생 처자식을 위해 일벌레가 되어야 하고. 여자는 남편과 자식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다. 남편과 자식이 다 떠난 늙은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노자는 여성은 도(道)에 가깝다고 했다. ‘여성성’은 어둠과 빛을 함께 품은 새벽과 같다고 했다. ‘남성성’은 어둠과 빛을 명확히 나눈다. 그런데 어디 세상살이가 그렇게 명확히 나눠지는가? 그래서 남성성이 지배하는 가부장 사회는 살벌해진다. 삭막해진다. 명확한 것들(돈, 권력, 법 등)이 지배하고 명확함을 위해 전쟁이 일상이 된다. 골목 여기저기에 나와 앉아 있는 할머니들. 표정이 없으시다. 눈 속이 텅 비어 있다. 우리 사회의 처절한 모습이다.  
220 염병(染病)/권서각 file
편집자
900 2017-03-26
염병(染病) 염병은 장티푸스의 옛말이다. 지금은 예방도 가능하고 치료도 가능한 병이지만 전 시대에는 염병에 대한 치료 방법이 없었다. 염병에 걸린 사람은 일단 전염을 막기 위해서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되었다. 거의 죽게 되지만 용하게 살아난다 해도 머리카락이 빠지고 몰골이 말이 아니게 된다. 마치 염하다가 놓친 사람 같다. 지랄은 간질의 속된 말이다. 간질이 발작되면 사지가 뒤틀리고 거품을 내는 흉측한 증상이 얼마간 지속된다. 둘 다 몹쓸 병이다. 국정을 농단한 강남 아줌마가 특검에 불려가면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억울하다고 하며 별로 좋지 못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를 지켜보던 환경 미화원 아줌마가 참다못하여 ‘염병하네.’라고 일갈하셨다. 이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시원하다고 했다. 미화원 아줌마가 갑자기 유명 인사가 되었다. 사실 ‘염병하네.’는 ‘지랄 염병하네.’의 줄임말이다. 너무 심한 욕설이기에 써서는 안 될 말이다. 공공의 자리에서 비속어는 쓰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는 어느 시대이든 욕이 존재했던 게 사실이다. 가령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심해서 싸움이 났을 때 예의를 갖추어 대화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어떤 사람에게 폭행을 당했을 때 점잖은 어조로 “당신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유 없이 저에게 폭력을 행하십니까? 그 연유를 일러주시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욕을 하는 것보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욕설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은 옳지 못하지만 때로는 필요하기에 사라지지 않는다. 욕의 문장구조와 문법을 따져서 그 의미를 분석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세계 공통으로 쓰이는 욕 가운데 개자식(Son of bitch)이 있다. 이는 암캐를 모친으로 둔 사람이란 뜻이지만 사람이 개에게서 태어날 수 없으니 그 말의 뜻을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다. 지랄 염병도 마찬가지다. 간질과 장티푸스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냥 매우 몹쓸 사람이란 한 묶음의 말로 보아 감탄사로 분류하는 것이 옳다. 우리 조상들은 이치에도 맞지 않고 도리에도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나무랄 때 ‘지랄 염병하네’라는 말을 쓰곤 했다. 명백하게 헌법을 어긴 사실이 밝혀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특검의 조사로 법을 어긴 사람들이 구속되었다. 국민의 80%가 위법을 인정하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국회가 잘못되었다, 특검이 잘못되었다고 몸에 태극기를 휘감고 광장에 모여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에게 예절을 갖추어 논리적으로 대응할 말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 때 쓰라고 우리 조상은 참으로 적절한 감탄사를 마련해 두셨다.  
219 하늘의 명령이 인간의 본성이다 天命之謂性 (공자) / 고석근 file
편집자
899 2017-03-16
하늘의 명령이 인간의 본성이다 天命之謂性 (공자)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신동엽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 쇠항아리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아침 저녁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 티 없이 맑은 구원의 하늘 마실 수 있는 사람은 연민(憐憫)을 알리라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모아리며.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하늘(天)은 우주 만물의 근원이자 원리인 신(神)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하느님(天)’의 뜻에 따라 살려고 했다. 인간 세상은 ‘하늘의 아들(天子)’이 통치했다. 그러다 ‘하늘의 뜻(天命)’이 ‘인간의 본성(性)’으로 나타난다는 사상이 등장했다. 신화시대가 끝나고 인문학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인간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되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사회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믿음을 전제하고 있다. 인류의 스승인 4대 성인, 예수,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일생을 사신 분들이다. ‘본성의 소리’에 따라 죽음도 불사한 분들이다. 가장 멋있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온 몸으로 보여주신 분들이다. 하지만 우리 보통 사람들은 성인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인간 세상의 주인(민주주의)’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본성을 깨쳐나가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성숙시켜 가면 루소가 말하는 ‘자신의 의지(개인의지)’가 ‘우리 모두의 의지(일반의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진정한 민주주의 세상을 열어가고 있다. 광장에서 각 개인의 마음을 모아 ‘이 시대의 마음’을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하늘을 보았다’고 하는 ‘망상’일 것이다. 자신의 ‘망상’을 남에게도 강요하는 ‘독선’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의 마음을 살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먹구름/그걸 하늘로 알고/일생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지붕 덮은/쇠항아리/그걸 하늘로 알고/일생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젠가 ‘마음속 구름을 닦고/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을 보는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망상’ ‘독선’에 빠진 사람들도 함께 품으며 ‘서럽게/아 엄숙한 세상을/서럽게/눈물 흘리며’ 살아가야 한다. 광장에 두 개의 마음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의 하늘 아래에 있다. 우리의 깊은 마음에서는 하나로 만나고 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이 자리 잡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보듬으며 가야 한다. 아직 우리 어느 누구도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하늘을 보았다’고 하지 말자!  
218 촛불/권서각 file
편집자
794 2017-02-26
촛불 촛불은 다른 불에 비해 약한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아궁이불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장작을 넣으라는 동작을 요구하지만 촛불은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하게 한다고 했다. 제 몸을 태우며 고요히 타오르는 촛불을 보고 있으면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지점이 바슐라르에 공감하게 하는 지점이다. 촛불은 고요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한다. 대개 종교의식에서 촛불을 켜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리라. 또한 촛불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를 때 길을 밝혀주기도 한다. 그래서 촛불의 힘은 경이롭다. 자기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툭하면 군복을 입고 가스통을 들고 나와 불을 붙이려는 할배들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불을 확 질러버리겠다고 위협을 해도 그다지 두렵지 않다. 타자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만 있고 깊은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앞뒤 가리지 않는 분별없는 행위는 어릿광대와 다르지 않다. 어릿광대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웃음거리일 뿐이다. 어처구니없는 일로 인해 우리가 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들은 하나 둘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왔다. 수백만의 인파가 광장에 모였지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며 조그만 불편함도 끼치지 않았다. 촛불을 나누어주는 사람, 음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 화장실을 안내하는 사람, 쓰레기를 모으는 사람, 사람, 사람들. 모르는 사람끼리도 오랜 친구처럼 서로 반갑다. 촛불을 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고 했지만 그의 말대로 되지 않았다. 비바람이 불어도 눈이 내려도 촛불은 꺼지지 않았다. 제 몸을 태우면서 어둠을 밝히는 촛불이 하나 둘 모여서 100만, 1000만이 되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모든 시위 앞에 불법이란 수식어를 달고 차벽을 치고 물대포를 쏘던 경찰도 촛불 앞에서 한발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국회는 촛불의 요구에 응답해서 탄핵을 의결했다. 독일의 유력 언론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한국의 촛불 문화제를 보도하면서 ‘민주주의 역사가 한국보다 긴 유럽이 오히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고 썼다. 촛불로 인해서 우리민족이 지닌 수준 높은 저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2016년 촛불은 1919년 ‘3.1혁명’ 이후 가장 많은 수의 우리민족 구성원을 하나 되게 하였다. 촛불은 다른 어떤 불보다 강하다. 제 몸을 태우며 어둠을 밝히려는 간절함은 하늘에 가 닿으리라.  
217 예술은 전례 없는, 예상치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존재의 질을 생성한다(가따리)/고석근 file
편집자
636 2017-02-15
예술은 전례 없는, 예상치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존재의 질을 생성한다(가따리) 바기날 플라워 진수미 여름 학기 여성학 종강한 뒤, 화장실 바닥에 거울 놓고 양 다리 활짝 열었다. 선분홍 꽃잎 한 점 보았다. 이럴 수가! 오, 모르게 꽃이었다니 아랫배 깊숙이 구근 한덩이 이렇게 숨겨져 있었구나 하얀 크리넥스 입입으로 피워낸 꽃잎처럼 철따라 점점(點點)이 피꽃 게우며, 울컥 불컥 목젖 헹구며, 나 물오른 한줄기 꽃이였다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이 생각난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긍정하게 되는 경이로운 순간. 이 시를 읽고 여성의 특정 부위를 묘사했다고 해서 ‘성적 자극’을 받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만일 이 시가 대다수 사람들이 ‘성적 자극’만 받는다면 이 시는 실패한 시일 것이다. 아니면 대다수 사람들이 ‘변태’가 되었든지. 남자들은 모른다. 여성이 얼마나 자신의 몸을 부정하고 사는 지를. 그래서 이 시는 우리의 깊은 ‘미적 감수성’을 깨우는 좋은 시다. 국회의원 회관에서 전시된 작품 ‘더러운 잠’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나는 원작은 보지 못했다. 그 작품을 인터넷 신문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그 작품을 패러디한 원작에서는 백인 여성이 나체로 누워있고 옆에 흑인 여성이 서 있다. 그 당시는 흑인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백인은 옆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나체로 ‘당당하게’ 누워있다. 혹 ‘더러운 잠’의 작가도 세월호가 침몰하는데도 나체로 ‘당당하게’ 누워있는 대통령을 묘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사람들의 그 작품에 대한 평가는 다양한 것 같다. ‘더러운 잠’에서 ‘여성의 나체’가 무엇을 보여주는 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모아졌으면 좋겠다. 단지 여성의 비하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미적 충격을 주는지. 칸트는 우리 가슴 속의 도덕률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은 ‘미적 감수성’에서 나온다고 했다. 우리가 ‘미적 인간’이 될 때 이 세상은 우리 가슴 속의 도덕률이 아름답게 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더러운 잠’이 우리의 사회의 미적 감수성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216 노란 리본/권서각 file
편집자
781 2017-01-26
노란 리본 노란 리본의 유래는 4세기 경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노래 ‘그녀는 노란 리본을 달고 있었다(She wore a yellow ribbon)’가 널리 불리어지면서 노란 리본은 영국인의 가슴에 무사귀환의 상징으로 자리합니다. 17세기 청교도 혁명 때는 병사들이 노란 띠를 두르고 전쟁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피트 하밀이 뉴욕포스트에 ‘고잉홈(Going Home)’이라는 글을 연재합니다. 형기를 마친 죄수가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내를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자기를 용서한다면 마을에 있는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달라고 편지를 씁니다. 남자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참나무에는 수많은 노란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1973년 우리도 알고 있는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세요(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라는 노래로 만들어졌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려 지게 됩니다. 이후로 노란 리본은 무사히 돌아오라는 상징으로 널리 쓰이게 됩니다. 2014년 4일 16일 세월호가 침몰했습니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꽃다운 아이들 304명이 차가운 물속에 가라앉았습니다. 구조할 수 있었지만 구조하지 못해서 안타까운 사건이었습니다. 누군가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노란 리본을 단 채 문상을 간 적이 있습니다. 어떤 아저씨가 왜 아직도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느냐고 나무랐습니다. 자기 부모가 죽어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수학여행 가다가 사고로 죽었는데 아직도 왜 그걸 달고 다니느냐고 나무랐습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 참 지나서 그가 소리를 질러서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 많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참으로 암담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아마 노란 리본을 종북의 상징쯤으로 읽었을지 모릅니다. 세월호 침몰에는 많은 의문이 있습니다. 왜 학생들이 타기로 한 배가 하루 전에 세월호로 바뀌었는지, 왜 선장도 바뀌었는지, 왜 그날 세월호만 출항했는지, 사고가 났을 때 왜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지, 왜 그 시각 국가재난구조 시스템은 작동되지 않았는지, 왜 그들이 죽어야 했는지, 왜 국가는 진상을 덮으려고만 했는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한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새해에는 우리 아이들은 비록 돌아올 수 없을지라도 침몰의 진실이 밝혀져서 304명 부모 가슴의 한이라도 풀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15 남이 뭐라고 말하든 자신의 성격대로 살아라(마르크스)/고석근 file
편집자
900 2017-01-16
남이 뭐라고 말하든 자신의 성격대로 살아라(마르크스) 똥지게 심호택 우리 어머니 나를 가르치며 잘못 가르친 것 한 가지 일꾼에게 궂은 일 시켜 놓고 봐라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된다 똥지게 진다 내 어린 시절은 공부가 최고인 시대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우리는 오전 수업이 끝나면 전교 석차대로 교실의 자리가 재배치되었다. 중학교 3학년 땐 복도 벽에 전교 50등까지의 성적표를 붙여놓았다. 그럼 이제 막 은퇴하고 있는 동창생들의 삶은 어떨까? 행복도 성적순일까? 대체로 다들 불행해 보인다. 다들 ‘소인배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공자는 말했다. ‘소인배는 한평생 편안함을 추구하다가 죽을 때 힘들고 군자는 일생을 힘들게 살지만 죽을 때 비로소 편안하다.’ ‘소인배’로 산 인생이 어찌 행복할 것인가! 하지만 이제 조물주가 준 ‘좋은 머리’로 편하게 살기조차 힘든 시대가 되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있기 때문이다. 한 동창생은 나라가 부도가 났을 때 열심히 건물을 사 놓았다. 그 덕분에 그 친구는 조물주보다 더 높은 건물주가 되었다. 그 친구 자식들은 공부를 못해도 평생 호의호식할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무나 건물주가 될 수 있나? 오랫동안 ‘소인배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서는 깊은 허무가 느껴진다. 편하기로 말하면 저 굴러가는 돌멩이가 더 편하지 않는가? 괴테는 말했다. ‘나이 30이 넘으면 살았다 할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30세 전까지는 ‘군자의 삶’을 산다. 적어도 ‘쪽팔리는 삶’을 살지 않으려 발버둥을 친다. 그러다 30이 넘으면 서서히 염치가 없어지고 소인배가 되어간다. 대선 후보들이 ‘기본 소득제’를 공약으로 내 걸 것이라고 한다. 국민 누구에게나 기본 소득을 보장해주면 - 어느 경제학자가 쓴 글을 보니 우리나라 경제력으로 보아 일인당 200만원을 줄 수 있다고 하지만 한 100만원씩만 주어도 - 사람들은 그 돈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까? 우리는 비로소 ‘소인배의 삶’을 벗어나기 시작할 것이다. 편안한 삶보다는 무언가 의미 있는 삶, 보람 있는 삶, 신나는 삶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소인배의 일생(一生)’이란 얼마나 슬픈 것인가!  
214 보수(保守)라는 말/ 권서각 [1]
편집자
1195 2016-12-26
보수(保守)라는 말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다. 어떤 말이 본래의 뜻을 잃고 다른 뜻으로 쓰일 때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진나라 때 황제의 신임을 받는 환관 조고가 사슴을 가리기며 말이라 했다(指鹿爲馬)는 고사는 말이 권력에 의해 그릇 쓰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조고가 사슴을 가리키며 대신들에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조고의 위세에 눌려 말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살고 사슴이라 대답한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다. 허균의 홍길동전에도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상황이 제시된다. 이 또한 말이 제 뜻을 담지 못한 예라 할 것이다. 이런 사회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우리도 오랜 세월 잘못된 말을 사용해 왔다. 가장 대표적인 말이 ‘보수’라는 말이다. 보수는 전통적인 가치, 기존의 가치를 유지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는 무엇인가? 불의에 굴하지 않는 선비정신, 동방예의지국으로서의 자부심, 일제 강점기 독립지사의 항일정신, 마을에 길흉사가 있을 때 온 마을 사람들이 자기 일처럼 상부상조하는 공동체의 정신 등일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 민주공화정의 정신, 대한민국 헌법을 지키려는 정신이 이에 속할 것이다. 국가원수가 헌법을 어긴 것이 드러나 국회에 의해 탄핵이 가결되었다. 이른바 친박 단체에 소속된 사람들이 탄핵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언론은 이들의 집회를 보수 단체의 집회라고 보도했다. 헌법을 심대하게 위반하여 탄핵된 사람을 옹호하는 단체가 어떻게 보수단체인가? 우리의 전통 어디에도 불법이나 위법을 옹호하는 전통은 없다. 이들을 보수 단체라 부르는 것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헌법을 어겨도 된다는 것은 보수가 아니다. 특정한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일 뿐이다. 종북이라는 말도 바르게 사용되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친박이라는 사람들은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모인 232만의 시민들을 종북이라고 한다. 종북은 북한을 따르고 지지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북한이 권력세습 국가이고 독재국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 북한을 따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부도덕한 권력을 비판하는 세력을 그냥 종북이라고 부른다. 그 많은 촛불이 모두 종북이라면 나라가 어찌되었겠는가? 왜 보수, 종북 같은 말이 제 뜻을 잃었을까? 이는 전적으로 부도덕한 정치권력과 권력에 장악된 언론 탓이다. 권력은 그 부도덕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를 보수라 하고 그들에 반하는 세력을 진보 또는 종북이라 규정하고, 우리사회의 갈등을 보수와 진보의 갈등으로 왜곡했기 때문이다. 이제 촛불아래 그들의 민낯이 드러났다. 그들은 보수가 아니었다. 말은 바르게 쓰여야 한다.  
213 실은 혁명이란 아무도 죽이지 않고 살리는 일이다(노신)/고석근 file
편집자
1142 2016-12-17
실은 혁명이란 아무도 죽이지 않고 살리는 일이다(노신) 솔직히 말해서 나는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것이 아닌지 몰라 열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 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촛불 집회에 다녀 온 한 여자 분이 말한다. “화장실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옆 건물을 가리키며 소리쳤어요. 저기에 가면 화장실이 비어있어요!” 한 남자 분이 말한다. “여고생들이 모금함을 갖고 다녔어요.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편의점에 들어가 음료수를 사서 사람들에게 나눠줬어요. 음료수를 마신 분들이 모금함에 돈을 넣고 여고생들은 그 돈으로 다시 음료수를 사서 나눠줬어요.” 한 여고생이 말한다. “상여를 맨 농민들이 땀을 많이 흘렸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모금을 했어요. 제가 맨 앞에 앉아있었는데요. 한 순간에 앞으로 돈이 모아졌어요. 그 순간 눈물이 쏟아졌어요.”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을까? 평소엔 서로 말도 없이 무심히 스쳐지나가던 사람들이었는데. 길에 마구 담배꽁초를 버리던 사람들이었는데. 자기 눈앞의 이익만 챙기며 남을 배려하지 않던 사람들이었는데.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던가? 자신들을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나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파리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러나 우리는 그날 알았다.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피투성이로 문드러진/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기다려 봄을 기다려/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평소에 ‘열개나 되는 발가락으로/열개나 되는 손가락으로/날뛰고 허우적거리다/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그 주정인지도 몰라/누군가 말하듯/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이렇게 주정하고 투정하다가 그날 우리는 알았다.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이제 역사의 강물은 흘러가리라. 누구도 이 강물의 노래를 멈추게 하지 못하리라. 강물은 다 쓸어 가리라. 우리의 눈물과 한탄과 절망과 모든 쓰레기들을. 강물은 끝내 우리 모두를 살리리라.  
212 꿀밤/권서각 file [1]
편집자
1236 2016-12-12
꿀밤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 치는 것을 꿀밤을 먹인다고 했다. 어린 시절 시골 마을에는 아이들이 가지고 놀 장난감이 없어 아이들끼리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 놀기도 했다. 어른들도 아이가 귀여우면 꿀밤을 먹이며 놀리기도 했다. 요즘 어떤 어른이 아이에게 꿀밤을 먹이면 아동 폭력이라고 난리가 날 것이다. 시대가 많이도 변했다. 숲길을 혼자 걷다가 툭! 머리에 꿀밤이 떨어졌다 어린 시절 골목길 아장아장 걷는데 귀엽다고 툭! 꿀밤 먹이고 빙그레 웃던 잘 생긴 아재 얼굴, 등에 얹힌 빈 지게 오래 잊었던 고향마을 툭! 펼쳐진다 – 졸시, 꿀밤 집 가까이 뚜껑바위 동산이 있어 가끔 오른다. 시청에서 길을 내고 운동 기구도 설치해 놓았다. 뚜껑바위산에는 참나무 도토리나무가 많다. 무심히 걷다 보면 도토리 열매가 머리에 떨어지기도 한다. 툭! 하고 떨어지는 꿀밤 한 대에 정겹던 고향 아재가 생각나고 초가지붕이 이마를 맞댄 고향마을이 선명하게 열린다. 아무 집이나 마음대로 그냥 드나들고 별식이라도 하면 아이들은 음식 그릇을 들고 심부름하기에 바빴다. 마을 가운데 있는 큰샘에는 아낙네들이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참꽃 필 때면 가까운 산에 올라 솥뚜껑 뒤집어 화전을 지지고 화전놀이를 했다. 논매기가 끝나면 하루 날을 잡아 집집마다 음식 한 가지씩 만들어 내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먹고 마시는 풋구를 했다. 남정네들은 술이 거나하면 풍물놀이를 했다. 풍물이 없는 이들은 막춤을 추었다. 사람마다 그만의 춤사위가 있는데 해마다 그 춤사위는 그대로다. 아낙네들은 마을 남정네들의 각양각색의 춤사위를 수줍게 훔쳐보기도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집과 집 사이에 경계가 없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공동체였다. 이제는 다시 오지 못할 막막한 풍경들이다. 모든 지나간 것은 아름답고 사무치게 그립다. 어린 시절 입이 짧아 먹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말라깽이였다. 사천 아지매는 기골이 장대했다. 이게 몇 근이나 될꼬? 하며 내 허리띠에 고추 다는 조그만 저울을 걸어 나를 달랑 들고 달았다. 저울에 매달려 많이 부끄러웠다. 서울로 이사 간 뒤 소식 모르다가 어제 부고를 받고 문상을 갔다. 아파트 벽 한 장 사이에 두고 인사도 없이 지내는 이 시대에 아름다운 풍경화 한 폭이 지워지고 있었다.  
211 내가 아는 언어의 한계가 곧 내가 사는 세상의 한계다(비트겐슈타인)/고석근 file
편집자
980 2016-11-16
내가 아는 언어의 한계가 곧 내가 사는 세상의 한계다(비트겐슈타인) 낫 김남주 낫 놓고 ㄱ 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 의사는 왜 '이 시대의 최고의 직업'으로 인정을 받을까? '공부를 많이 해야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럼 조선 시대는 왜 의사가 별로 대접을 받지 못했나? 조선 시대 의사는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아도 가능했나? 한 시대에 최고의 대접을 받는 직업은 '그 시대의 지식'을 소유하는 직업이다. 조선 시대는 유교 사회라 유교의 지식인인 선비가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현대 사회는 '과학'이 모든 지식의 제왕이다. 따라서 과학을 다루는 사람들이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의사도 과학자다. 우리는 목사, 신부, 스님, 교사, 교수의 말은 듣지 않아도 '의사 선생님'의 말은 듣는다. 오랫동안 '왕'이 인간 위에 군림해 왔다.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가능했을까? 그 당시의 사람들이 갖고 있던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다는 지식' 때문이다. 흙수저들이 '금수저론'을 믿을 때 금수저들은 흙수저들을 지배한다. 그래서 봉건 시대의 혁명가들은 부르짖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 이 말이 우리의 '지식(언어)'을 바꿀 때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누가 광화문에 단두대를 갖다 놓았다. 단두대는 프랑스 루이 16세의 목을 잘랐다. 그 뒤 왕이 없는 세상이 열렸다. 광화문에 놓인 단두대는 누구의 목을 자르려고 했을까? 단두대는 '우리의 왕'의 목을 잘라야 한다. 우리는 대통령을 '왕으로 보는 지식'을 갖고 있다. 이런 지식의 목을 잘라야 한다. 왕이 없는 세상,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지식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이제 대통령 선거에서 '왕'을 뽑지 않아야 한다. 누구를 뽑던 우리가 모든 권력을 갖고 있는 주인이다. 광화문의 단두대는 철거되었다. 하지만 단두대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 살아 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 땅엔 '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210 어떤 국어의 풍경/권서각 file
편집자
869 2016-10-26
어떤 국어의 풍경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말은 의사소통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생각이나 느낌을 담는 그릇이다. 국어는 한국인의 생각을 담기에 알맞은 그릇이고 중국어는 중국인의 생각을 담기에 알맞다.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담긴 것의 모양이 달라진다. 국어가 바르지 못하면 그 그릇에 담긴 생각도 바르지 못하다. 거친 말을 쓰는 집단은 생각도 행동도 거칠기 마련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바른 말 고운 말을 강조한다. 다리가 두껍다, 맛이 틀리다, 벌레에 물려 피부가 간지럽다는 다리가 굵다, 맛이 다르다, 벌레에 물려 피부가 가렵다. 로 고쳐야 한다. 사람에게 붙여야 할 인칭대명사 ‘얘’를 사물을 가리킬 때 쓰는 등 국어를 잘못 쓰는 일이 심해지고 있다. 가령 개나 고양이를 가리키며 “얘 데리고 병원에 가요.”라든지 요리사가 음식에 소금을 넣으며 “얘도 한 스푼 넣어요.”라고 한다. 이렇게 국어를 잘못 사용하는 일은 어휘나 문법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발음의 문제도 있다. 우리 국어의 자음과 모음을 바르게 발음하는 것도 국어 사랑의 한 측면을 이룬다. 지난 날 교회의 목사님들의 설교 언어는 우리의 일상 언어와 크게 달랐다. ‘예수’를 ‘예슈’라하고 ‘믿습니다’를 ‘밋쉬미다’라고 하신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전 시대에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초창기 미국 선교사들의 영어식 국어 발음에 영향을 받아서이다. 이는 자기보다 우월한 것에 대한 지나친 따라 하기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언어의 사대주의라 할만하다. 요즘의 젊은 여성들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기성세대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대개의 모음을 ‘오’에 가깝게 발음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입으로 나와야 할 공기를 코로 내보내어 콧소리에 가까운 소리를 낸다. ‘선생님’을 ‘손생니옴’’에 가깝게 발음한다. ‘ㅅ’이나 ‘ㅈ’발음도 유성자음 〔z〕에 가깝게 발음한다. 귀엽게 들리라고 그러는 모양이지만 언어를 다루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거북한 게 아니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과거의 목사님들이 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듯이 우리의 젊은 여성들이 이른바 걸 그룹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그런 말투가 매력적이고 애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바른 국어사용이 아님은 분명하다. 세종대왕이 들으시면 매우 섭섭해 하실 거다. 국어라는 그릇이 반듯해야 사회가 바르게 된다.  
209 착한 일을 하지 말아라!(원효)/고석근 file
편집자
1107 2016-10-15
착한 일을 하지 말아라!(원효) 대추 따는 노래 이달 이웃 집 꼬마가 대추 따러 왔는데 늙은이 문 나서며 꼬마를 쫓는구나. 꼬마 외려 늙은이 향해 소리 지른다. “내년 대추 익을 때에는 살지도 못할 걸요.” 설총이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좌우명을 아버지 원효대사에게 부탁드리자 원효대사는 아들에게 한마디 던졌다. “착한 일을 하지 말아라!” 설총이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그럼 악한 일을 하고 살라는 말씀입니까?” 이에 원효대사가 일갈하였다. “착한 일도 하지 말라 하였거늘 하물며 악한 일을 생각하느냐?” 착한 일을 많이 행한 한 목사가 추문에 휩싸였다. 벌써 30여 년 전이다. 그 목사님을 어느 모임에서 뵌 적이 있다. 그 목사님의 확신에 찬 말이 귀에 쟁쟁하다. “40일 동안 금식하며 예수님의 길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뒤로 가끔 그 목사님의 ‘착한 행적들’을 언론에서 접했다. 인간에게는 ‘지랄의 양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다. 인간에게는 ‘지랄이라는 일탈 행위가 불가피하다’는 ‘무시무시한 윤리학’이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끝내 ‘지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세상은 착한 일을 강요한다. 어른들은 착한 아이를 참 좋아한다. 나중에 어떻게 되건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착한 아이가 다 악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하지 못한 ‘지랄’은 어디로 갈까?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분명히 몸 안을 떠돌아다닐 것이다. ‘착한 사람들’은 어딘가 많이 아프다. 그래서 이웃 집 할아버지 집에 몰래 대추를 따러 온 꼬마가 귀엽다. 들킨 꼬마는 외려 소리 지른다. “내년 대추 익을 때에는 살지도 못할 걸요.” 이런 ‘파렴치한 아이’가 있는 옛 마을이 그립다.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 지랄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달 시인은 홍길동을 쓴 허균의 스승이라고 한다. ‘지랄의 시’를 썼기에 멋있는 스승이 될 수 있었을까?  
208 우리의 소원은/권서각 file
편집자
1024 2016-09-26
우리의 소원은 어린 시절부터 경로우대에 이른 지금까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했다. 그러나 통일은 오지 않고 우리는 아직도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오히려 다시 남북 관계는 더욱 긴장되고 있다. 북은 핵 실험을 계속하고 있고 남은 대화를 단절한 채 풍선을 날려 보내고 확성기 대북 방송을 재개하고 있다. 급기야 한국과 미국은 싸드( Thaad)를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그토록 간절하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했지만 통일이 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어떤 소원이든지 이렇게 간절하게 이렇게 오래 노래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중의 소원은 통일이다. 그러나 남과 북의 통치자들의 소원은 통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북은 남한을 적대시하며 긴장관계를 조성함으로서 그들의 왕조 체제를 구축했다. 남의 권력자들도 권력이 위태로울 때마다 남북의 긴장관계를 조성하여 그들의 권력을 강화했다. 종북 프레임, 북풍, 총풍 등의 용어가 이를 증명해 준다. 겉으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하면서 내심으로는 통일을 원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런 남북관계가 대화를 통한 화해와 협력으로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남의 권력자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그 시기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을 발표하고, 노무현 대통령도 육로로 북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10.4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기간에 끊어진 철로와 육로가 이어지고,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고, 개성공단이 조성되었다. 통일이 무엇인가? 남과 북이 이렇게 오고가며 만나는 게 통일이 아닌가? 이 시기에 우리는 절반의 통일을 이루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 한다. 무엇을 잃었는가? 개뿔을 잃었는가?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지금까지 누려온 부도덕한 권력이 아니었던가? 개성공단 조성에 관여했던 인사의 말을 빌리면 원래 남측은 공단 지을 곳으로 개성이 아닌 곳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정일이 이미 주둔해 있던 북한군 부대를 뒤로 물리고 지금의 개성공단 위치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물류가 편리하다는 이유를 들어서였다고 한다. 이는 북에 평화통일의 의지가 전혀 없지 않다는 일말의 기대를 갖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던 남북관계가 다시 냉랭하게 된 것은 ‘이명박그네’ 정권부터이다.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고, 통일의 마지막 희망인 개성공단에서마저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한반도는 다시 냉전체제로 회귀하고 말았다. 미국의 북에 대한 제제는 심해지고 북은 중단되었던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재개했다. 급기야 경북 성주에 싸드 배치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싸드의 폐해는 곱게 자라던 참외의 생존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 한반도의 정세는 싸드 배치 이전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싸드 배치 이전은 일말의 평화통일의 희망이 있었지만 싸드 배치 이후는 평화통일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한다. 군대도 가지 않았던 사람들이 전쟁을 말하고 있다. 또한 싸드 배치는 우리 정부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형식만 한미 양국의 합의에 의한 발표지 실제는 미국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싸드 배치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 체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우리의 국익과는 무관한 결정이다. 우리의 국익에 가장 의존도가 높은 중국이 반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러시아도 크게 반발한다. 한반도 싸드 배치는 외세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한민국 구성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미국의 뜻대로 싸드를 배치하게 한 것은 구한말 일본에 국권을 넘겨준 을사오적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 북은 미국의 경제 제재로 심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까지 행태로 보아 압박한다고 핵을 포기할 북이 아니다. 쥐도 막다른 곳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 수 있다. 대통령은 그 특유의 목소리로 “싸드 배치 외에 북한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우리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부디 제시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셨다. 어조로 보아서 좋은 방법을 제시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입 다물라는 뜻임을 알겠다. 그래도 굳이 제시하니 소통의 차원에서 들어주셨으면 한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6.15 공동선언을 존중하고 북과 대화하시라.   
207 예술은 박물관, 미술관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는 모든 아름다움이 상실되어 있다(모리스)/고석근 file
편집자
1065 2016-09-16
예술은 박물관, 미술관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는 모든 아름다움이 상실되어 있다(모리스) 박물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 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 최소한 삼백 년 전부터 쭉. 부채는 있는데 - 홍조 띤 뺨은 어디 있나요? 칼은 있는데 - 분노는 어디 있나요? 어두운 해질 녘 류트를 퉁기던 새하얀 손은 온데간데없네요. 영원이 결핍된 수만 가지 낡은 물건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어요. 진열장 위에는 콧수염을 늘어뜨린 채 곰팡내 풀풀 풍기는 옛날 파수꾼이 새근새근 단잠을 자고 있어요. 쇠붙이와 점토, 새의 깃털이 모진 시간을 견디고 소리 없이 승리를 거두었어요. 고대 이집트의 말괄량이 소녀가 쓰던 머리핀만이 킬킬대며 웃고 있을 뿐.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오른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 나는 어떨까요, 믿어주세요, 아직도 살아 있답니다. 나와 내 드레스의 경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어요. 아, 이 드레스는 얼마나 고집이 센지! 마치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기를 열망하듯 말이죠. 며칠 전에 일가족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한 여인의 바람이 일가족 네 명의 목숨을 앗아갔단다. 그 여인의 불륜의 현장을 고스란히 담은 동영상을 우연히 보게 된 예비사위가 딸에게 얘기하고 딸은 엄마에게 얘기하고 엄마가 자살하고 아버지가 알고 딸이 자살하고 아버지가 자살하고 결국엔 아들까지 자살하게 되었다고 한다. 간음한 여인을 향해 마구 돌을 던지는 자들에게 예수는 외쳤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돌을 던지던 자들은 부끄러움에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현대문명사회에서 이리도 잔혹한 사건이 일어나다니! 우리는 어쩌다 남의 잘못에 이리도 가혹하게 되었을까? 부모가 죄수여서 항상 죄의식에 시달리던 자베르 형사는 장발장의 죄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의 불타는 정의감의 원천은 자신의 깊은 마음속에 똬리를 튼 죄의식이었던 것이다. 한 여인의 불륜을 일가족의 자살로 몰아갈 만큼 우리 사회는 지금 깊은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다. 왜 다들 죄인이 되어버렸을까?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누추해서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우리의 일상, 생활 세계는 과학에 의해 식민지화 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얼마나 ‘과학주의자’가 되어버렸는가? 과학이 우리의 일상을 점령하게 되면 우리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은 다 사라져버린다. 예술은 박물관, 미술관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모든 아름다움은 사라져버린다. 오로지 ‘적자생존이론’만이 우리들 머리 위를 배회한다. 정글에서 상처 받은 인간은 먹잇감일 뿐이다. 조만간 그 가족의 이야기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들이 살던 집만이 덩그러니 유물처럼 남을 것이다. 그 집은 오래 오래 우리의 경배를 받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테러를 가하지 않으려면 ‘삶의 아름다움’을 회복해야 한다. 과학은 현대의 종교다. 우리는 과학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들에게 꼼짝하지 못한다. 우리는 ‘경제학(사회과학)’이라는 이름에 걸려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다. 사드 배치도 과학의 아름으로 추진될 것이다. 누군가가 과학의 논리로 ‘소녀상 철거 이전’을 얘기할 것이다. 박물관에 가보면 원시시대부터 고대 중세 근대 현대까지 깔끔하게 배열되어있다. 우리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 다행이야! 현대에 태어나서...... .’ 우리가 과학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한 우리는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되어 서로에게 돌을 던지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206 신념과 고집/권서각 file
편집자
1148 2016-08-23
신념과 고집 그리 바쁘지 않을 때, 혹은 창밖에 하염없이 비가 내릴 때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이는 누워서 천정의 무늬를 세거나 멸치 똥을 고르기도 한다. 어떤 이는 옛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고 그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헤아리기도 한다. 말과 글을 다루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이는 어떤 단어에 대해 중얼중얼 생각하기도 한다. 신념이라는 말과 고집이라는 말이 있다. 신념의 사전적 풀이는 ‘굳게 믿는 마음’이고 고집의 사전적 풀이는 ‘자기의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버팀’이다. 두 말의 차이가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두 말의 공통점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끝까지 굽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점은 무엇일까? 얼핏 드는 느낌으로 신념은 긍정적이지만 고집은 부정적인 것 같다. 이퇴계 선생이 평생 경(敬)을 화두로 삼은 것,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 이회영 선생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만주에 신흥군관학교를 세우신 것은 신념일 것이다. 옹고집전의 옹고집이 인색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것,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태도, 한번 내 사람이면 끝까지 믿는다는 태도 등은 고집에 가까울 것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바를 굽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념과 고집은 같은 말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 보면, 내 생각이 신념이고 당신의 생각이 고집이다. 당신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 생각이 신념이고 내 생각이 고집이다. 그렇다면 고집과 신념은 어떻게 다를까? 신념에 있어서 옳은 것은 무엇일까? 고집에 있어서 옳은 것은 무엇일까? 분명히 그 옳은 것이 서로 같지 아니할 것이다. 문득 한 생각이 떠오른다. 신념의 옳음은 나만을 위한 옳음이 아니요, 고집의 옳음은 나만을 위한 옳음일 것이다. 이퇴계, 안중근, 이회영 같은 분들은 나만을 위해 사신 분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또 한껏 이런 생각이다. 세상에는 신념을 지닌 이도 있고 고집쟁이도 있다. 그러나 고집쟁이가 어떤 사회의 권력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고집불통 폐가망신이라는 말이 있다. 개인이 고집을 부리면 개인의 불행에 그치지만 권력자가 고집을 부리면 사회 전체가 불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205 한 번 진리를 인정해버리고 나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카뮈)/고석근 file
편집자
929 2016-08-17
한 번 진리를 인정해버리고 나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카뮈)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다윈의 진화론을 배웠다. 생명체의 생존 법칙은 ‘약육강식’이라고. 그러다 최근에는 ‘적자생존’이 맞단다. 어느 게 맞는가? 토마스 쿤은 말한다. “과학의 역사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그는 과학이 지식의 축적에 의해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시현상이라고 말한다. 단지 ‘패러다임(생각의 틀)’이 바뀐 것뿐이란다. 천상의 세계에 신이 산다고 생각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에서는 천상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별똥별을 보며 기상현상이라고 생각했단다. 완전한 천상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중국에서는 별똥별을 그대로 기록했단다. 세상은 ‘생각’대로 보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오로지 ‘강자’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과학 시간에 배운 ‘약육강식’이 우리의 눈에 ‘강자’만이 보이게 했다. 그러다 이제 ‘강자’와 ‘약자’가 대체로 나눠지는 것 같다. 이렇게 계급이 굳어지는 사회에서는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아!’라는 과학 이론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약자들이 계속 강자가 되려고 ‘헛된 노력’을 할 테니까. 세상에 잘 적응하게 하는 ‘과학’은 진화론 외에도 온갖 철학, 심리학 등등 참으로 많다. 요즘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재벌 2세’란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재벌이 되어야만 이룰 수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꿈을 다 버리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존 방식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저께 오랫동안 대기업에 다니다 명퇴를 하고 식당을 하는 50대 중반의 남자 분과 술잔을 나눴다. 짙은 허무감이 몰려온단다. 세상에 잘 적응하여 지금까지 잘 살아남았는데. 니체는 우리에게 ‘지식의 계보’를 알라고 한다. 지식, 진리라고 하는 것들의 뿌리를 파헤쳐 가면 그것들은 결국 패러다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패러다임은 누가 만든 것인가? 우리는 누구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인가? ‘과학’이라는 안개는 우리의 시야를 뿌옇게 가린다. TV에서는 노인 인구비율이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한탄을 한다. 우리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란다.  
204 경(敬)이라는 글자/권서각 file
편집자
1105 2016-07-25
경(敬)이라는 글자 소수서원 경렴정에서 죽계수 건너편을 바라보면 바위에 새겨진 공경 경(敬)자가 보인다. 경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경자가 성리학의 핵심 사상이며 퇴계 선생의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경은 웃어른에 대한 공경, 스승에 대한 공경, 지위가 높은 이에 대한 공경, 임금님에 대한 공경쯤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다. 퇴계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도산에 계실 때 23세의 청년 율곡이 도산을 방문했다. 퇴계는 마당에 내려가 젊은 율곡을 맞이했다. 소수서원 강학당 밖 마당에서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엿듣던 대장장이 배순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유생들과 함께 공부하게 하셨다. 사화로 말미암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게 되어 여러모로 부족한 권씨 부인을 공경으로 대하셨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바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퇴계의 경은 나이나 지위에 대한 공경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공경이었던 것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에 대해 연민했던 예수의 가르침도 나 아닌 남에 대한 공경일 것이다. 팔 다리와 머리를 가장 낮은 데 임하게 하여 절하는 불교의 오체투지도 나 아닌 남에 대한 공경일 것이다. 청마 유치환 시인이 경주 여고 교장으로 계실 때 정한 교훈이 ‘나란 나만을 위한 나가 아니다.’이다. 이 또한 타자에 대한 공경을 기반으로 한 가르침이다. 모든 스승의 가르침에는 나 아닌 남에 대한 공경과 사랑이 있다. 우리사회도 날이 갈수록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다. 상대에 대한 공경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요즘은 대개 주례 없는 결혼식을 하지만 얼마 전까지 결혼식에는 주례가 있었다. 주례를 할 때마다 이런 주례사를 하곤 했다. ‘누구를 공경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부인이 화가 나서 베개를 던지면 오체투지 하듯이 납작 엎드리십시오. 그러면 베개는 허공으로 날아가고 가정에는 다시 평화가 가득할 것입니다.’ 이 세상 공경 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203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 말라. 못난 인생을 두려워하라.(브레히트)/고석근 file
편집자
1064 2016-07-16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 말라. 못난 인생을 두려워하라.(브레히트) 죽음 무라노 시로오 줄곧 쫓기고 쫓겨왔다 발톱도 찢기고 눈물도 마르고 하늘과 숲이 멀리 물러나기 시작했다. 나의 주검이 쓸쓸한 가시덤불 속에 뒹굴고 있다 드디어 누군가가 다가왔다 사랑과 공포의 표정으로 피에 젖은 짐승을 살짝 확인하러 온 사냥꾼처럼 넋이 나를 찾으러 왔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죄를 확신함에도 불구하고 사형 선고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왜 그는 그런 불의한 재판의 결과를 받아들였을까? 우리는 그가 ‘악법도 법’이어서 사형 선고를 받아들였다고 배웠다. 악법을 지키는 사람이 성인(聖人)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소크라테스의 죽음’ 앞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알고 나서야 그가 왜 ‘철학의 아버지’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평생 삶의 원칙을 갖고 살았다. 그는 항상 ‘내면의 소리(다이몬)’를 들으며 살았다. 공자가 평생 천명(天命)를 따르며 산 것과 같다. 예수가 하느님의 목소리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혔듯 그도 내면의 신의 목소리에 따라 독배를 마셨다. 내면의 소리는 양심(良心)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한평생 양심에 따라 산 사람만이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 철인(哲人)이 통치자가 되는 사회를 꿈꿨던 것이다. 양심을 저버리고 사는 사람은 한평생 죽음에게 쫓기며 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리도 바쁠 것이다. 바쁜 게 미덕인 우리 사회의 하늘엔 늘 죽음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있다. 신동엽 시인의 노랫가락이 가슴을 적신다. ‘서럽게/아 엄숙한 세상을/서럽게/눈물 흘려//살아가리라/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하늘을 보았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