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3호...
   2019년 11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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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00 다시 임을 위한/권서각 file
편집자
1047 2016-05-27
다시 임을 위한 올해도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공식 기념곡 지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가보훈처는 지금까지의 관례에 따라 작년처럼 제창으로 하지 않고 합창으로 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이 이 노래를 둘러싼 갈등을 해소하는 최적의 결정이라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보훈처는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참가자들에 의해 제창되는 것을 한사코 막아보겠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최후의 시민군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불린 노래로 이후 5.18관련 행사, 민주화 운동 집회 등에서 널리 불리기 시작하면서 5.18을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매김 되었다. 누가 의도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다. 이는 이 노래가 5.18 정신을 가장 오롯이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5.18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노래를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고, 기념식에서 다함께 부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5.18정신이 담긴 노래가 5.18 기념식에서 제창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국가는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이 노래가 싫은 것이다. 왜 그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는 것을 한사코 막으려 하는가? 그들은 이 노래가 싫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싫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세에 밀려 5.18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긴 했지만, 지금 국가권력을 가진 이들은 이를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우리 현대사는 외형적으로는 민주화 되었다고 하지만 실제 권력의 주체는 민주화 세력이 아니다. 늘 말하는 바이지만, 일제에서 이승만 독재로 그리고 군사 독재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주류는 아직 그대로다. 이 주류의 흐름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해방되었다고도 민주화 되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깨어 있는 민중의 수효가 늘어나서 이 부도덕의 물줄기를 바꾸지 않는 한 <임을 위한 행진곡> 사태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며칠 전 망월동을 찾아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힘차게 불렀다.  
199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예수)/고석근 file
편집자
1152 2016-05-16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예수) 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괴로운지, 얼마나 외로운지, 미칠 것 같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라.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세상엔 억울한 사람들뿐이다. 전부 한이 많고 서럽다. 피해자는 넘쳐나는데 가해자는 없다. 우리 모두 상처 입은 영혼들이다. 왜 그럴까? 사람은 ‘신의 마음, 부처의 마음, 하늘의 마음’을 타고나기에 누구나 사랑이 그득하고 지혜롭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지 훤히 안다. 그래서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처럼 행동한다. 남을 함부로 재단하고 가르치려든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얼마나 남들과 똑같이 어리석고 탐욕에 젖어있다는 건 모른다. 밖으로 향하는 지혜를 빛을 안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도 남들과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남들에게 관대해진다. 더불어 함께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가게 된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은 지혜의 빛을 안으로 향하게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훤히 보이는데 인간들이 어리석기 짝이 없어.’ 그는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간다. 그는 한평생 개와 함께 산다. ‘도무지 삶의 의미를 모르겠어.’ 그는 겉으론 깔깔거리지만 속으론 운다. 천지불인(天地不仁-도덕경)이다. 천지는 냉정하게 이치대로 돌아갈 뿐이다. 우리는 이치에 복종해야 한다. 오로지 이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의 마음’에서 벗어나 이치를 따를 수 있는 몸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란 얼마나 엉터리인가! 자신의 욕망을 얼마나 교묘히 숨기는가? 합리화하는가?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인간에겐 위대한 내면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내면의 힘을 믿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내면의 힘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게끔 철저히 복종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에 속지 말자. 우리의 의식은 엉터리다. 무의식에 진실이 있다(프로이트). 자신의 마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다들 눈빛이 분노에 젖어 있다. 그러다 금방 울음보가 터질 듯 표정이 일그러진다.  
198 어버이라는 이름으로/권서각 file [1]
편집자
1291 2016-04-26
어버이라는 이름으로 일찍이 안데르센은 ‘미운 오리새끼’를 통해 오리의 무리 속에 한 마리 백조의 외로움을 이야기했다. 오리와 함께 살아가지만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외로운 섬일 수밖에 없다. 영남이라는 지역에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도 외로운 섬이 되는 일이다. 4.13 총선 결과 여당이 참패했지만 이 지역에서는 100% 승리했다. 겉으로는 웃는 얼굴로 만나고 인사를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비판적 생각을 가진 이들의 귀에 가끔 들리는 말이 있다. 그 사람, 사람은 좋은데 생각이 삐딱해. 그들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고민을 하며 가지게 된 생각을 두고 그들은 삐딱하다고 한다. 총선 결과로 보면, 우리 국민의 반 이상이 가진 생각을 이 지역 사람들은 삐딱하다고 한다. 실은 우리 국민 전체로 보면 이 지역 사람들이 오히려 삐딱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삐딱한 이가 삐딱하지 않은 이를 오히려 삐딱하다 하는 꼴이다. 친일의 잔재,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 땅에 살현하려는 소망이 삐딱한 생각인가? 전쟁 없이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적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 삐딱한 생각인가? 연일 북은 핵 실험 결과를 알리고 위협적 언어를 쏟아낸다. 남에서는 대북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고 한다. 전쟁의 위기가 감돈다. 지금 한반도는 위험하다. 쥐도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고양이를 물 수 있다. 전쟁은 얘기치 못한 지점에서 일어난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전쟁에 대한 걱정을 아니 할 수 없다. 아무리 시인이지만 시인도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일진대 걱정이 없을 수 없다. 일찍이 다산 선생은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라(非憂國非詩也) 하였다. ‘대한민국 어버이연합’이라는 좋은 이름을 가지 단체가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린다. 주로 일제 강점기에 희생당한 종군위안부 할머니들 모임,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모임, 세월호 희생자 추모 모임, 국정원 선거 개입 규탄 모임 등 민주화와 관련된 시민단체 모임에 훼방꾼 노릇을 하는 단체 이름이다. 이들이 검은 돈을 받아 탈북자들을 2만원에서 5만원씩 주고 동원한 사실이 밝혀졌다. 대개 부도덕한 권력이 하는 짓이 이러하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공영방송이라는 공중파 방송에서는 보도조차 없다. 머지않아 5월 8일은 어버이 날이다. 우리는 어버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을 흘리는 민족이다. 몇 푼의 돈에 팔려 권력의 시녀가 되어 여론을 조작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어버이라는 이름은 당치 않다. 이 땅의 모든 어버이를 모독하는 일이기에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한다. 그런 어버이들을 이용하는 권력은 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글 권서각  
197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다 一卽多 多卽一 (불경)/고석근 file
편집자
821 2016-04-15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다 一卽多 多卽一 (불경) 엄숙한 시간 릴케 지금 이 세상의 어디선가 울고 있는 이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이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다. 지금 이 세상의 어디선가 웃고 있는 이 밤 속에서 까닭 없이 웃고 있는 이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웃고 있다. 지금 이 세상의 어디선가 걷고 있는 이 이 세상을 까닭 없이 걷고 있는 이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지금 이 세상의 어디선가 죽어가는 이 어디선가 까닭 없이 죽어가는 이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팔고(八苦)중에는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운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가 있다. 정말이지 미운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건 엄청난 고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되도록 미운사람을 보지 않고 살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살다보면 인간관계가 지극히 좁아진다. 마음이 맞는 사람하고만 만나 서로 ‘독백’만 하다 만다. 허전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미운 사람은 누구일까? 대체로 그는 ‘나의 그림자- 나의 어두운 모습’이다. ‘나의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이 들킬까봐 그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운 사람과 만나지 않고 살면 우선은 편할지는 모르나 자신의 어두운 모습이 극복되지 않는다. 자신의 일부로 살아가야 하니 ‘삶의 충만감’이 없다. 따라서 ‘자신의 전부’로 살아가려면 미운사람과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죽을 때 삶의 여한이 없다. 우리는 미운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고통스럽지만 ‘그가 나’라는 것을 성찰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세상 모든 사람이 나’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다 간 사람들이다.  
196 담배 피는 죄/권서각 file
편집자
1204 2016-03-28
담배 피는 죄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푸대접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담배 피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 담배 값은 갑절 올랐는데 담배 필 곳은 마땅치 않다. 집에서 피면 아내에게 꾸중 듣고, 아파트 발코니에서 창문 열고 피면 위층에서 항의 들어오고, 거리에서 피면 행인이 손을 내젓고, 드물고 먼 흡연 장소 찾아가서 핀 다음 사람 만나면 당신 담배 피웠지? 냄새나는데, 하고 범죄인 취급이다. 전 시대에는 흡연이 자유로웠다. 버스에서 기차에서 마구 피기도 했다. 곰방대에 담배 피시는 할아버지와 환기도 하지 않고 한 방에서 기거해도 싫은 줄 몰랐고 싫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만약 그때 할배 담배 연기가 맵다고 한 마디 했다면 담배 대로 대가리를 맞아 혹불이 났을 것이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 수 없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매스컴의 공로가 크다. 거의 매일 담배의 해악에 대해서 떠들어댄다. 만병의 근원이 담배인 것처럼 말한다. 의사라는 공부 잘 하는 사람들도 병원만 찾으면 담배 피지 말라고 한다. 담배 피면 당신 죽어, 라고 협박까지 한다. 차라리 그냥 내 능력으로는 치료할 수 없습니다, 하면 밉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간접흡연이 직접흡연보다 더 나쁘다고 한다. 이게 무슨 낮도깨비 개울 건너는 소리인가? 매일 듣는 소리가 담배를 증오하는 소리 뿐이다. 반복은 주술의 효과를 나타낸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몹쓸 인간이 담배 피는 인간이 되었다. 담배가 그렇게 나쁘면 법률로 금지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흡연자를 죄악시하는 풍토를 만드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담배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아는 바이다. 사람이 건강에 좋은 것만 추구하고 살지는 않는다. 거리의 매연도 좋지 못하고 작물에 뿌리는 농약도 좋지 못하고 우리가 늘 쓰는 전자제품의 전자파도 건강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담배만이 죄악시 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비흡연자는 담배 냄새를 유독 싫어한다. 이해한다. 담배가 악이라는 주술에 걸렸기 때문이다. 어떤 냄새의 좋고 싫음은 관념의 문제이다. 옛날에는 그렇게 싫지 않았는데 지금 그토록 싫은 것은 담배 냄새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담배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이 변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여름날 화장품 냄새와 땀 냄새가 혼합된 것을 싫어한다. 미운 사람에서 나는 모든 냄새는 싫다. 공공장소에서 어떤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가 싫어도 싫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처럼 담배를 죄악시하는 곳은 없다. 유럽이나 동남아를 다니면서 담배 연기를 기적처럼 날리며, 거리에 담배꽁초를 마구 버리며 흡연의 자유를 누리기도 했다.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높은 좋은 나라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온갖 멸시와 박해를 견디며 금연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흡연의 자유마저 포기하면 더 포기할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를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담배가 그렇게 나쁘다면 나는 벌써 병들어 죽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올해 경로우대를 맞이하도록 살아 있다. 나는 담배를 좋아한다. 커피도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밥이 될 수 없는 시를 쓴다. 오랜만에 시 한 편 썼다 고료 삼만 원 받아 뻥튀기 한 자루와 담배를 사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온다 방에 들어 담배를 피우니 금세 연기가 한 방 가득이다 - 졸시, 시의 경제학  
195 네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사랑스럽게 창조한다는 것이다.(니체) /고석근 file
편집자
1052 2016-03-15
네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사랑스럽게 창조한다는 것이다.(니체)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아주 오래 전 기관조사로 근무할 때 사망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다. 건널목을 건너던 행인이 기관차에 부딪쳐 논두렁으로 나가떨어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벌벌 떨며 어찌할 줄 모르던 기관사와 달리 나는 침착했다. 매뉴얼대로 널브러진 시체를 차장과 함께 수습하고 승객들을 차에 오르게 하고 보고를 하고 무사히 종착지까지 갔다. 사람들은 나를 냉정하다고 했다. 나도 나를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30대 중반에 문학을 공부할 때였다. 어느 날 강의가 끝나고 뒤풀이를 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걷잡을 수 없었다. 내 안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있다니! 나는 그 뒤 수시로 술만 마시면 펑펑 울었다. 강사가 되어 수강생들과 뒤풀이를 할 때도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어떨 땐 술주정까지 하며 울었다. 한 동화작가는 내 얼굴 표정이 두 가지라고 했다. ‘천진한 아이’와 ‘데드 마스크’. 노자는 ‘굳음은 죽음이고 부드러움은 삶’이라고 했다. 내가 문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나는 ‘데드 마스크’를 쓰고서 일생을 살았을 것이다. 내 안에 마냥 즐거운 ‘천진한 아이’가 있는 줄 모르고. 서정주 시인은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라고 했다. 그 뒤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고’ 바람이 부는 대로 살다보니 결국엔 ‘친일파’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친일파와 그 후손들. 그들의 ‘데드 마스크’ 뒤에는 얼마나 많은 눈물이 고여 있을 것인가? 그들의 ‘데드 마스크’가 이끌어 가는 우리 사회가 슬프다.  
194 민중은 옳은가?/권서각 file [1]
편집자
1586 2016-02-25
민중은 옳은가? 역사의 진화 과정을 보면 왕이라는 1인 권력의 통치에서 개인에게로 권력이 나뉘어져 온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권력은 국민(people)에게서 나온다는 명제가 당연한 시대까지 왔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Democracy)를 인류가 발견한 최선의 정치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민주주의의 의사 결정은 다수결을 원칙으로 한다. 민중에 의해 정치적 결정이 내려진다. 그렇다면 민중은 항상 옳은가?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민중에 의해서 선택된 국가 권력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젊은이들이 ‘헬조선’과 ‘흙수저’를 외치게 하고 개성공단을 폐쇄함으로써 남북관계를 냉전체제로 돌려놓은 일이 그것이다. 사드(미국의 고고도 미사일 방위체계) 배치까지 거론되는 한반도는 지금 매우 위태롭다. 우리 정치권력이 한반도를 이토록 위태롭게 몰고 가도 우리 정치권력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는 변함이 없다. 여기서 다시 민중은 옳은가? 라는 물음과 만나게 된다.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정권을 지지하는 민중은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인가? 여기서 떠오르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히틀러가 지배했던 나치 정권 때의 독일 민중이다. 독일 민중은 히틀러를 지지했고 히틀러의 니치 정권은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고 유럽을 피로 물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남기고 몰락했다. 이때 히틀러를 지지했던 독일의 민중을 옳았다고 할 수 있을까? 민중은 누구인가, 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 구성원 가운데 다수를 민중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숫자의 많음을 가리킬 뿐이다. 민중은 대중과 구별되어야 한다. 독일 나치 정권 시대에 괴벨스의 선동으로 강자의 편에 섰던 대중과 구별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권력자의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거나 자신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는 사람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중일지라도 민중은 아니다. 민중의 개념은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긴 하지만, 최소한의 조건은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1. 자신의 이득보다 더불어 산다는 쪽에 선 사람이어야 한다. 2. 역사 발전에 기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치 시대 독일의 대중은 앞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에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있다. 지금 전쟁을 말하며 사드 배치를 말하는 권력자들은 어떠한가? 지금 장관이나 권력자 가운데는 병역 기피자가 많다. 사드 배치를 요구하며 자신의 지역구엔 안 된다고 한다. 이들을 지지하는 대중들도 사회에 기여하는 삶보다는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는 성향의 사람들이다. 민중은 옳다. 민주주의도 옳다. 다만 민중에서 부도덕한 권력을 지지하는 대중들은 제외해야 할 것이다. 옛말에 물에 빠져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했다. 지금 우리의 대중들은 공중파 방송, 신문, 케이블 종편 방송, 인터넷 등이 부도덕한 권력에 대변자 노릇을 하고 있다. 나치 치하의 괴벨스의 선동에 못지않다. 민중을 어리석은 대중으로 만들고 있다. 부도덕한 정보의 홍수에 우리 민중을 빠뜨리고 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깨어있는 민중으로. 깨어나서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아야 한다.  
193 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찾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내부 세계밖에 없다(프루스트)/고석근 file
편집자
909 2016-02-17
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찾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내부 세계밖에 없다(프루스트) 산 너머 저쪽 부세 저 산 너머 멀리 헤매어 가면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기에 아, 남들처럼 나도 얼려 찾아갔건만, 울면서 되돌아 왔다네 저 산 너머 멀리 멀리에는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건만. 요즘 대학생들을 강의하며 다들 길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해야 제가 가야 할 길을 알 수 있죠?” 아이들은 물건을 사듯이 ‘적성’ 하나를 빨리 사고 싶은 것이다. 자신을 안다는 건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주먹이 얼마나 센지는 무언가(혹은 누군가)를 쳐봐야 안다. 아이들은 살아오면서 과연 몇 번이나 자신을 무언가(혹은 누군가)와 부딪쳐 봤을까? “제 이상형을 모르겠어요.” 아이들은 과연 이성 친구, 애인과 몇 번이나 부딪쳐 봤을까? 산소는 수소와 부딪쳐 물이 된다. 산소 자신에게 전혀 없던 물이 된 것이다. 사람은 무언가(혹은 누군가)와 부딪쳐 전혀 다른 자신이 된 경험을 수없이 해봐야 한다. 자신이 무궁무진하다는 것, 자신의 무한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싸우지도 않고 큰다. 학교에서는 ‘정답’을 달달 외우며 자란다. 이렇게 자라면서 아이들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자신 안에 꼭꼭 웅크려 앉아 ‘나는 누구인가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이 아이들에게 도대체 누가 답을 줄 수 있을까? 나는 30대 중반에 소위 ‘중년의 위기’가 왔다. 그때부터 이 아이들처럼 내가 누구인지, 가야할 길을 몰라 십여 년을 방황했다. 백수가 되어 이 일 저 일 이 사람 저 사람...... 마구 부딪쳤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다. 그렇게 내 자신이 해체되고 나서야 나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아이들도 나처럼 십여 년을 방황해야 하나? 내가 이 아이들에게 나처럼 방황해 보라고 말할 수 있나? 사람이 길을 찾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나는 50대 중반이 되어서야 ‘안정’을 느꼈다. 행복이 지금 여기, 내 안에 있음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우리 교육이 아이들에게 삶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깨달으며 자라게 했다면 20대쯤에는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60대가 된 내가 20대인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방황해야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처절하다.  
192 동지 무렵/권서각 file
편집자
1218 2016-01-25
동지 무렵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행해졌던 세시풍속도 사라지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그리고 정보화 사회로 사회의 모습이 바뀌면서 그리 되었을 것이다. 설, 정월보름, 단오, 칠월칠석, 백중, 추석, 동지 등등 지금은 그 이름조차 다 기억할 수 없다. 다만 추석과 설만이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세시풍속 속에는 민족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 가령 설은 한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에 그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가, 한가위는 농사를 풍요롭게 해준 하늘에 감사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농경사회에서 농사의 시작과 끝에 행해졌던 제사요 축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민족의 대부분의 세시풍속은 농사와 관련되어 있다. 농사가 뒷전으로 밀리면서 세시풍속도 점차 그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어떤 집에는 아직 팥죽을 쑤는 것 같지만, 동지 팥죽을 못 먹은 지 오래 되었다. 다만 어린 시절 동지에 팥죽 먹던 기억이 남아 있다. 동지는 일 년 중에 낮이 가장 짧다. 다음 날부터 해가 점점 길어지면서 새날이 시작된다 하여 애기설이라 하기도 했다. 동지에는 집집마다 붉은 팥으로 죽을 쑤어 집 주위에 뿌리며 잡귀를 쫓기도 했다. 새해를 정하게 맞이하려 함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내 몫의 팥죽을 그릇에 담아 식지 말라고 무쇠 솥에 넣어두셨다가 고춧가루가 적은 배추 짠지와 함께 상에 차려 주셨다. 팥죽은 겉에 막이 생겨 꾸덕꾸덕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그야 말로 식은 죽 먹기다. 창호지에 여과된 부드러운 동지 무렵 해가 어두운 방안에 풀어진다. 그 방에 외롭게 담겨져 왠지 서러웠다. 노루꼬리만한 동지 무렵 해 지고 황혼이 빚 받으러 온 듯 헛간에 든다 마루 끝에 앉아서 식은 팥죽 한 사발 먹고 차나락 쭉정이 메나락 쭉정이 콩깍지와 더불어 헛간에서 잠을 잔다 쇠죽솥에 눈물자국 누가 닦아 주나 싸리비 뗏비는 누가 세워 놓았나 바람은 솔솔 불어 병아리 털 흔드는데 구정물 위에 살얼음 끼는데 황혼이 빚 받으러 온 듯 헛간에 들어 차나락 쭉정이 메나락 쭉정이 콩깍지와 더불어 헛간에서 잠을 잔다 - 졸시, 황혼이 헛간에 들어 젊을 때 썼던 시 한편이 생각나서 꺼내 읽었다. 그때의 나와 만나기 위함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초가집이 이마를 맞대고 모여 있는 농촌 마을의 풍경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쇠죽 통이 있는 외양간이 있고 맞은편에는 쇠죽솥이 걸려 있는 아궁이가 있다. 소는 선한 눈을 들어 쇠죽 끓이는 농부를 본다. 쇠죽솥에는 김이 나기 전에 눈물이 미리 난다. 그런 정겨운 풍경으로 동지 무렵 황혼이 손님처럼 찾아든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동지 무렵 황혼 무렵이면 누구에겐가 빚진 것 같고 무엇인가에 쫓기는 것 같았다. 동지, 헛간, 팥죽, 차나락, 메나락, 싸리비, 뗏비, 구정물, 쇠죽 이런 이름들을 호명하면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이제 곧 그런 이름마저 잊혀질 것이라서 더욱 그러하리라. 동지는 한해의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동지 해질 무렵이면 노을이 유난히 붉다. 이루지 못한 일이 남았는데 한해가 저물어서일까. 글 권서각  
191 그전보다도 백배는 더 섬세해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니체) /고석근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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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2016-01-16
그전보다도 백배는 더 섬세해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니체)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브레히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예수는 말했다. “오른 뺨을 치면 왼 뺨도 내밀어라!” 만일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예수의 오른 뺨을 치면 어떻게 될까? 나는 예수가 크게 분노하리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모르는 그에게 분노하는 게 당연하니까. 예수는 ‘사랑’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독사의 자식들아!” 나는 통 큰 사람을 믿지 않는다. 한때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절대 권력을 가졌던 모씨가 고향에 다녀오면서 마을 이장에게 금일봉을 하사하였는데, 거금 삼천 만원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역시 통이 크신 분이야!” 이장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고 한다. 통이 크다니? 그 돈이 어떻게 그의 손에 쥐어졌는지를 생각하면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만일 그가 땀 흘려 그 돈을 모았다면 선뜻 내놓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나는 ‘쪼잔한 사람’을 믿는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 .’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김수영 시인 같은 사람들을 믿는다. 통 큰 사람들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랑을 알면 얼마나 세심해지는가!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는 지극히 섬세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온 몸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오른 뺨을 치면 왼 뺨을 내밀 수 있으면서도 불같이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소위 ‘지도층들’은 왜 이리도 통이 큰 걸까?  
190 의도의 오류/권서각 fil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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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4 2015-12-25
의도의 오류 대한민국에는 참으로 독특한 문화가 있다. 전통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외래의 것이 이 땅에 들어오면 이상한 왜곡이 일어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가령 개인주의라는 개념은 전체주의의 반대 개념이다. 국가나 사회보다 사회구성원에 하나인 개인의 가치와 인권에 무게 중심을 두는 사상을 이름이다. 개인주의는 민주주의의 전제가 된다. 그 개인주의가 한국에서는 이기주의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된다. 기독교의 중심 사상은 사랑이지만 우리나라의 어떤 기독교인들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외침 속에 사랑은 없다. 이런 왜곡 현상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문학에서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독자에 의해서 작품이 다르게 해석되는 것을 의도의 오류라 한다. 신동엽은 두루 아는 바와 같이 민중 시인이다. 그의 시 ‘껍데기는 가라’에는 껍데기와 알맹이가 또렷이 구분된다. 사월혁명, 동학농민전쟁, 아사달과 아사녀의 결혼으로 상징되는 남북통일 등의 가치가 알맹이라 한다면 사월혁명의 정신을, 동학농민전쟁의 정신을, 남북의 평화적 통일 정신을 부정하는 모든 세력들을 껍데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동엽의 삶도 민족주의, 민중 사상, 반외세, 민주주의를 위한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며칠 전 어떤 글에서 껍데기와 알맹이가 바뀐 글을 읽고 놀란 적이 있다. 앞부분에 조종동, 종편(종일 편파방송)과 같은 논리를 늘어놓은 다음 분노하면서 ‘껍데기는 가라’는 신동엽의 시를 인용하면서 끝맺은 글이었다. 민주주의를 소망하고 부도덕한 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껍데기라는 것이다. 이 정도 되면 의도의 오류를 넘어서 왜곡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신동엽 시인이 읽었다면 어떠하셨을까? 이것이 ‘헬조선’의 현주소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지금은 국회의원인 도종환 시인과 거리를 걷다가 어떤 간판을 같이 보았다. 여당 국회의원 이름이 크게 적힌, 그의 사무실임을 알리는 간판이었다. “아, 이분 사무실이 여기군.” 비록 당은 다르지만 같은 의원이니 눈에 들어왔으리라. 나는 도 의원에게 이분 애송시가 뭔지 아느냐 물었다. 내가 당신이 쓴 ‘담쟁이’라고 하자 깜짝 놀랐다. 그리고 함께 웃을 수박에 없었다. 그 여당 국회의원은 어떤 행사장에서 자기의 애송시라면서 ‘담쟁이’를 낭송했다. 그는 지금까지 민주 세력을 억압하는 편에서 활동한 사람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사실 담쟁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담쟁이의 생태적 특징과 결합된 시다. 어떤 시련도 포기하지 않고 연대해서 나아가면 민주주의는 오리라는 의지가 담긴.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씌어진 시다. 이 시에서 ‘벽’에 해당하는 분이 이 시를 애송시라 하니 놀라운 일이다. 아마 담쟁이처럼 포기하지 않으면, 기득권을 오래 유지하며 민주화 세력을 물리칠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의미로 해석했을 것이다. 이 또한 의도의 오류를 넘어서는 왜곡의 경지이리라.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 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 담쟁이, 도종환 왜 우리 사회는 어떤 것이 들어오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왜곡된 의미로 변하는 것일까? 참으로 마술 같은 일이지만 이것이 지금 우리 사회의 현상이다. 이러한 왜곡이 일어나는 원인은 뒤틀린 우리의 근대사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깊은 병이 들면 그것이 병인 줄 모른다. 민주공화국이면서 비민주적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도 그것이 비민주적임을 모른다. 오죽하면 시위현장에서 들리는 가장 절절하게 외치는 구호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일까.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의 나라에 하루 38명씩이나 자살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도 그게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면 병이 들어도 병이 든 것을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땅에는 종편이 종일 편파방송을 해도 하루 종일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보고 있는 사람들이 사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 글 권서각  
189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발레리) /고석근 file
편집자
1112 2015-12-15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발레리) 바다의 미풍 말라르메 오! 육체는 슬퍼라,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노라. 떠나버리자, 저 멀리 떠나버리자. 새들은 낯선 거품과 하늘에 벌써 취하였다. 눈매에 비친 해묵은 정원도 그 무엇도 바닷물에 적신 내 마음을 잡아두지 못하리. 오! 밤이여! 잡아두지 못하리. 흰빛이 지켜주는 백지, 그 위에 쏟아지는 황폐한 밝음도, 어린아이 젖먹이는 젊은 아내도. 나는 떠나리! 선부여, 그대 돛을 흔들어 세우고 닻을 올려 이국의 자연으로 배를 띄워라. 잔혹한 희망에 시달린 어느 권태는 아직도 손수건의 그 거창한 작별을 믿고 있는지. 그런데, 돛들이 이제 폭풍을 부르니 우리는 어쩌면 바람에 밀려 길 잃고 돛도 없이 돛도 없이, 풍요한 섬도 없이 난파하려는가 그러나, 오 나의 가슴아, 이제 뱃사람들의 노랫소리를 들어라. 얼마 전부터 대학생들과 함께 고전을 공부하고 있다. 다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다. 앞으로 이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내 학창시절엔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대기업에 들어갔다. 고도 성장기여서 그들의 삶은 나날이 빛나는 듯했다. 이제 그들은 거의 다 은퇴했다. 그들의 일생은 어떨까? 대체로 그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물질적으로는 별로 부족해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 허기져있는 듯하다. 사람은 ‘배부른 돼지’로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엄친아’로 불리었을 아이들을 보며 나는 이 시대의 절망을 본다.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만 공부하는 아이들. 그래서 그들은 삭막해 보인다. 고전을 공부하며 그들은 새로운 삶을 느끼는 것 같다. 2시간 내내 강의에 집중한다. 아, 잔혹한 희망에 시달리는 그들의 가슴에 바람이 다시 불 수 있을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들을 찾아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아이들. 나는 30대 중반에 내 가슴에 불어온 바람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자유인’이 되어 미친 듯이 바람결 따라 마구 날아다니던 시절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너희들이 최선을 다해 살아보아야 너희들의 길을 알 수 있단다. 고전엔 인류의 마음이 담겨있단다. 너희들은 한 인간이 아니라 인류란다. 한 인간을 넘어 인류가 되어 보아라. 그러면 너희들의 길이 보일 거야. 가슴에 부는 바람결 따라 흘러가 보거라. 너희들은 알게 될 거야. 산다는 게 얼마나 고상하고 신나는 것인지.  
188 농민의 시/권서각 file [1]
편집자
1184 2015-11-26
농민의 시 이농현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농민들이 농촌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도시로 떠나 농촌이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젊은이들은 삼삼오오 도시로 떠나고 농촌에는 공장에서 일 할 수 없는 노인과 개들만 남았다. 공장에 간 사람들은 어찌 되었는가? 쪽방에 살면서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을 견디어야 했다. 그것이 70년대 군사정권 시대였다. 아직도 농촌을 지키는 사람들은 경쟁에서 밀려난 약자들뿐이다. 농촌 홀대 정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 농촌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농업은 우리민족 반만 년 역사를 이어온 우리역사의 원동력이었다. 우리는 대대로 소와 더불어 논밭을 일구며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우리민족을 농경민족이라 부른다. 우리민족의 생명을 이어온 것이 쌀이며 보리며 콩이며 조며 귀리였다. 우리 역사는 농업에 빚이 많다. 그럼에도 지금 우리는 농업을 폄하하여 할 일 없으면 농사나 짓지, 라고 말한다. 농촌을 이렇게 만든 것이 누구인가?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며 경제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경제개발 계획을 세운 군사정권시대부터가 아닌가? 그래서 명목상 우리 경제 수치는 세계 10위권에 진입했다. 고마운 일이다. 그럼 지금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부를 누리고 있는가? 경제개발의 혜택을 보는 사람들은 상위 10%를 넘지 않는다. 이 땅의 농민과 노동자는 아직도 경제성장의 혜택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대한민국을 젊은이들은 ‘헬조선’이라 한다. 농촌의 현실이 이러함에도 지금의 정권은 상위 10%와 재벌을 위한 정책을 계속 추진한다. 노동법을 밀어붙여 노동자 해고를 쉽게 하려한다. 수많은 민주 인사를 죽게 한 분의 명예회복을 위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한다고 한다. 심청은 아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했지만 대통령은 아비의 명예회복을 위해 전 국민의 눈을 먹게 한다는 비아냥을 사고 있다.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이 땅의 역사를 이어온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예의는 어디에도 찾을 길 없다. 그럼에도 정권과 집권당은 민생을 입에 달고 산다. 그래도 농촌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이 농촌에 남아 논밭을 일구고 있다. 그들이 조직한 단체가 농민회다. 농민회가 내 건 펼침막에 이런 구호가 눈에 들어왔다. 개사료 1kg에 5,330원 쌀 1kg에 1,275원 쌀값이 개 사료보다 싸다니 새누리가 쌀을 지키면 우리 집 똥개는 우주를 지킨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지금 이 땅엔 21세기에는 세계 어디어도 찾아볼 수 없는 반민주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뒤로 가고 있다. 소외되고 억압 받을수록 사람은 절실해 진다. 시는 항상 배고프고 절실할 때 쓰여 진다. 이제 어디에도 갈 곳 없는 농민들이 이런 절묘한 시를 만들었다. 어떤 시인의 시보다 감동적이다.  
187 기적이란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이다(임제) /고석근 file
편집자
1010 2015-11-14
기적이란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이다(임제) 학 백거이 사람은 저마다 좋아하는 바가 있고 사물에는 애당초 꼭 그래야만 되는 법도 없어 누가 너를 일러 춤을 잘 춘다 하는가 한가롭게 서 있을 때만 못한 것을   인간은 왜 자신이 아닌 다른 그 무엇이 되려고 애쓰는 걸까? 물개처럼 헤엄치려 하고 치타처럼 달리려 하고 새처럼 날려고 하고 꾀꼬리처럼 노래하려 하고 나무처럼 높이높이 자라려 하고...... .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조급하다. 고요히 앉아 쉴 수가 없다. 기계처럼 빠르게 돌아간다. 바빠야 제대로 살고 있는 듯하다. 공자는 자신의 마음에 중심을 두고 이 세상을 그때그때 알맞게 살라고 한다. 중용이다. 우리는 이 ‘마음의 중심’을 잃어버렸다. 세상이 시키는 대로, 유혹하는 대로 정신없이 살다보니 누군가의 손에 의해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길을 가다 한가롭게 서 있는 학을 보는 백거이 시인은 그 무엇도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가며 기적을 느낄 것이다. 한 승려가 조주 선사에게 물었다. “거지가 오면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조주 선사가 대답했다. “그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우리는 당연히 ‘거지는 무언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편견일 뿐이다. 어찌 거지라고 항상 부족하기만 하겠는가? 거지도 보통 사람들처럼 충분할 때도 있고 부족할 때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유심히 그를 살펴본다면 우리가 그에게서 얻을 것이 얼마나 많겠는가? 조주 선사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너 자신이 부족하지 않도록 하라!” 조주 선사는 ‘텅 빈 충만, 부족함이 없는 경지’에 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눈엔 거지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거지에게서 불성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자꾸만 결핍을 강요한다. 사후에 천국이 있다느니 극락이 있다느니 미래에는 지상낙원이 도래한다느니...... . 땅 위를 걸어가는 기적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186 한 가지 반찬보다 여러 가지 반찬/권서각 file [1]
편집자
1271 2015-10-26
한 가지 반찬보다 여러 가지 반찬 식당이나 가게에 켜 놓은 텔레비전은 대개 종합편성 채널이다. 흔히 종편이라 말하는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이다. 주로 뉴스나 시사 토론 프로그램으로 편성된 이 방송이 무차별적으로 대중들에 열려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중의 여론을 무시한 채 허가해준 방송이다. 종편을 소유한 모회사는 극우 보수로 분류되는 언론사들이다. 조중동이라 불리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와 매일경제신문이 운영하는 TV조선, JTBC, 채널A, 그리고 MBN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언론이라 할수 있는 것은 JTBC 뉴스룸뿐이다. 이들은 하루 종일 선술집 취객에게서나 들을 수 있는 수준의 잡담을 내보내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민주 인사들에 대한 욕설 수준의 언어를 하루 종일 내보내고 있다. 종편 내용은 언론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의 금도를 넘는, 범죄 수준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문명국가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내용들을 방송을 통해 내보내고 있는 것이다. 남한을 향해 공격적 감정을 쏟아내는 북한방송 외에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방송이다. 이것이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며칠 전 종편에서 이런 잡담이 흘러나왔다. 성공회대의 한흥구 교수에 관한 이야기다. 한흥구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박정희가 김창룡에게 죽었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두 사람의 대통령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흥구는 그의 아버지가 자다가도 그놈 생각하면 벌떡 일어날 정도로 문제가 많은 인간이다. 이게 종편의 방송 내용이다. 사실은 이러하다. 박정희는 남로당 핵심당원으로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을 담당한 특무대장 김창룡은 박정희와 같은 일본군 장교 출신이다. 김창룡은 박정희의 남로당 동료들의 명단을 넘겨받고 박정희를 살려주기로 한다. 그 후 박정희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한국전쟁 때 살아남는다. 만약 김창룡이 박정희를 죽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이 한흥구 교수가 한 강의의 핵심이다. 한흥구 교수는 사실을 말했다. 그러나 종편은 한흥구가 박정희는 그 때 죽었어야 했다고 왜곡했다. 게다가 한 교수의 사생활까지 왜곡해서 인신공격을 하고 있다. 한흥구의 부친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출판사인 일조각 대표였다. 민족문화에 이바지한 존경받는 출판인이다. 종편은 그의 부친이 어린 아들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쓴 수필의 일부만 잘라서 인신공격을 했다. 가히 쓰레기보다 못한 방송이며 범죄 행위다. 종편이 한흥구를 공격하는 이유는 있다. 국사교과서 국정제를 반대하기 때문이다. 국정이 왜 비판받는가에 대한 어느 스님의 대답이다. 한 가지 반찬이 좋으냐, 여러 가지 반찬이 좋으냐? 어느 신문기사의 일부도 답이 되겠다. 심청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고 대통령은 아버지의 과오를 덮기 위해 전 국민의 눈을 멀게 한다. 이건 방송에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공중파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의 언론은 죽었다. 그들은 왜 종편을 만들고 국사 교과서를 국정 교과서로 하려 하는가? 그들이 국사 교과서에 싣고자 하는 내용이 그들의 목적이다. 1. 일제 식민 지통치는 근대화에 초석이 되었다. 2.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다. 3. 박정희는 조국근대화의 영웅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줄이면 일제 식민지 통치와 군사독재에 대한 미화다. 지금 권력을 잡고 있는 세력이 친일파와 독재자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 글 권서각  
18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톨스토이) /고석근 file
편집자
1011 2015-10-1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톨스토이) 게 이시카와 다쿠보쿠 동해 바다 작은 섬 갯바위의 흰 백사장 나 눈물에 젖어 게와 놀았다네. 우리의 대표 시인 백석이 흠모했던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 그는 자살하려고 동해 바닷가에 나갔다가 흰 모래밭 위의 작은 바닷게 한 마리에 눈이 팔려 그 게와 놀다가 자살할 마음도 잊었다고 한다. 우리는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매번 실패하고 만다. 우리의 삶은 ‘반복’이다. 어제 떠오른 태양이 오늘도 떠오르고 내일도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태양이 떠오를 때마다 감탄을 한다. 그들에게는 매번 다른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에게는 미세하게 느껴지는 그 차이가 태산처럼 커다랗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매순간이 감동적이다. 그들은 ‘반복’이 아니라 매번 ‘신비로운 차이’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반복’ 속에서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들뢰즈). 하지만 ‘의미’에 길들여진 우리는 삶에서 ‘차이’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지루한 반복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더욱더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그렇게 부여한 의미가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으랴. 그것들은 우리의 정신을 잠시 마비시키는 진통제일 뿐이다. 진통제의 약효가 떨어질 때 쯤 우리는 폭발한다. 살인을 하고, 자살을 하고, 사고가 나고, 질병에 걸린다. 며칠 전에도 한 젊은이가 자살을 했다. 외고와 명문대를 나온 고시생. 그렇게도 착했던 아들이 유서 한 장 없이 자살했다고 부모가 한탄을 했단다. ‘의미’에 지친 그가 평생 ‘의미’를 부여해온 부모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우리는 온갖 고상한 정신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이다(괴테).  
184 강은 흘러야 한다/권서각 file
편집자
936 2015-09-24
강은 흘러야 한다 내성천은 경북 봉화에서 발원하여 영주 무섬 마을과 예천 회룡포를 거쳐 문경에서 낙동강과 합류하는 강이다.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모래가 흐르는 강이다. 모래는 수질을 정화하는 기능을 한다. 모든 상수도 물은 모래로 몇 번 걸러서 소독 처리하여 공급된다. 내성천 모래는 수천 년 동안 낙동강 물을 정화해서 바다로 흘려보내는 일을 담당해 왔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내성천에는 흰수마자와 수달 등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곳으로 학계에서는 생태학적으로도 그 보존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 내성천 모래는 결국 낙동강을 따라 바다로 간다. 남해안 해수욕장과 동해안 해수욕장의 대부분의 모래는 내성천의 모래다. 해류가 남해에서 동해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 내성천의 흐름을 막는 영주 댐이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르렀다. 며칠 전 4대강 대책위원장인 이미경 의원과 함께 처참하게 변해버린 내성천과 영주댐을 둘러보았다. 담수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댐 아래쪽 강은 모래는 사라지고 풀과 버드나무가 무성한 황무지가 되어 있었다. 모래가 유입되지 않으니 기존의 모래가 쓸려 내려가 곳곳의 다리는 다리발이 드러나도록 강이 낮아졌다. 물고기들도 볼 수 없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눈에 선하다. 대므로 막힌 강물엔 녹조가 생길 것이며 바다에는 녹조가 생길 것이다. 흘러야 강이 흐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다도 장마철에 강이 흘려보낸 황톳물로 정화된다. 곳곳에 지어진 댐으로 인해 큰비가 내려도 황토물이 흐르지 않으니 바다에는 적조가 생길 수박에 없다. 남해안 양식장의 물고기 폐사도 적조로 말미암은 것이다. 해수욕장의 모래는 사라질 것이며 물고기 양식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모두가 흘러야 할 강을 흐르지 못하게 한 대가일 것이다.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지었던 댐을 허물고 있다. 우리는 강마다 댐을 막아 물을 가두고 있다. 설악산에는 케이블카를 만든다고 한다. 소백산에도 케이블카를 만든다고 한다. 사람들을 무더기로 산에 올려 그 위에서 먹고 마시게 한다는 것이다. 케이블카를 놓자는 사람들은 유럽의 케이블카를 이야기한다. 유럽의 케이블카가 설치된 산은 눈으로 덮인 산이다. 그리고 그것이 설치된 것은 환경문제가 논의되기 전의 일이다. 지금 새로이 케이블카를 만드는 나라는 없다. 자연을 훼손하는 만큼 인간의 삶의 터전이 사라진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어버린 시대다. 그래서 우리는 4대강공사를 반대했고 영주댐을 반대했고 케이블카 설치도 반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댐 짓기와 케이블카 놓기로 우리의 강과 산에 몹쓸 짓을 하고 있다. 우리의 강과 산을 이명박그네 정권이 망치고 있다. 시민단체에서 아무리 토론을 하고 목소리를 높여도 막무가내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결국 그들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만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민주공화국이기를 포기하고, 하고자하는 것을 기어이 해내고 마는 저들을 어이한단 말인가? 결국 모든 결정권은 정권이 가지고 있다. 정권이 그들에게 있는 한 누구도 강산을 허무는 일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환경운동도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시인이 왜 정치를 이야기하느냐고 말한다. 정치는 우리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하는 조그만 행동도 정치와 무관 것은 없다. 시도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영주댐에 물이 차고 내성천이 물에 잠기면 소월의 이 노래도 함께 묻히고 말 것이다. 설사 노래가 남는다 해도 금모래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글 권서각  
183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된다(노신) /고석근 file
편집자
1020 2015-09-15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된다(노신) 음화 김언희 인형이 있었다 눕히면 눈을 감았다 치마를 들치고 사내아이들이 연필심으로 사타구니를 쿡쿡 찌르며 킬킬거릴 때 눈을 감고 미동도 않던 인형이 있었다 죽어, 죽어, 죽어, 책상 모서리에 패대기쳐지며 터진 뒤통수에서 지푸라기를 꺼내보이던 비명도 한 번 안 지르던 인형이 있었다 머리채를 끄잡혀 질질 끌려가며 희미하게 웃어보이던 걸레쪽처럼 칼질 된 얼굴이 있었다 쓰레기더미 위에서 제 몸이 불타 없어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둥근 눈이 ……있었다 한 중년 여인이 말했다. “어릴 적에 개구리 스무 마리를 한 줄로 매어 집에 가져왔었어요. 마당에 놓아두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다 죽어있더라고요.” 남에게는 치명적인 폭력이었는데 내게는 ‘장난’에 불과했던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 세상에는 상처 받은 사람들 천지다. 상처를 주었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기서 우리는 절망한다. “머리에 검은 털 난 짐승은 믿을 수 없어!” 하지만 여기에 바로 우리의 희망이 있다. 자신의 눈에 든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든 티끌은 훤히 보는 인간, 여기에 바로 우리의 희망이 있다. 민주주의를 잘 하면 된다. 우리는 남의 잘못은 귀신 같이 보는 눈이 있어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좋은 방법들도 잘 알고 있다. 민주적인 토론의 장만 잘 마련되면 좋은 방안들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 방안들이 나오면 우리 모두 함께 지키도록 하면 된다.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민주적인 시스템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 절망하지 말자. 우리에겐 길이 있다. 우리에겐 민주주의라는 희망의 길이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분노해야 할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온갖 폭력들이 아니라 그런 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 민주적인 시스템의 건설을 가로막는 세력들이다. 이런 세력들의 장벽을 뚫고 길을 내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걸어가면 길이 난다.  
182 인성교육은 가능한가?/권서각 file
편집자
928 2015-08-26
인성교육은 가능한가? 올 7월 21일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이라는 것이 시행된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인성교육이란 말이 자주 들리더니 드디어 인성교육진흥법이라는 것이 제정되고 우리사회에 인성교육이라는 것이 시작될 모양이다. 그런데 인성교육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린다. 내 귀가 이상한 것인가? 인성은 사람의 성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로는 Human nature다. 영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성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사람의 고유한 성품이다. 사람의 성품을 과연 교육할 수 있는가?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인성을 교육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 법을 제정한 사람들은 아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니까 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어떤 통치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하면 된다. 정말 그럴까? 도덕, 혹은 윤리는 이미 우리 교육과정 속에 편성되어 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덕목, 혹은 이건 옳고 이건 옳지 못하다는 가치에 대한 교육일 터이다. 도덕과 윤리는 교육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서고금에 인성을 교육한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권력자들은 인성을 교육하시겠다고 기세를 올리신다. 도덕과 윤리로는 부족한 점이 있으신 모양이다. 교육이란 또 무엇인가? 이 법을 제정한 사람들은 교육을 가르치는 일로 이해할 것 같다. 오래 교육에 종사해 온 경험으로 말하는데 교육은 가르침이 아니다. 명령도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일이 교육이요, 교육자란 피교육자가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인성교육을 말하는 사람들은 교육을 무슨 명령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좋은 성품을 가지라고 가르치면 좋은 성품을 가진 국민이 길러진다고 믿는 것 같다. 한술 더 떠서 인성교육진흥법 제 1조에는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을 갖춘 국민을 육성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성교육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게 된 것은 학교폭력, 청소년 범죄 등의 사회문제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부터인 것 같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인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OECD 국가 가운데 청소년 자살률 1위 등 온갖 불미스러운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묘안이 인성교육에 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우리사회의 문제는 인성교육이 없어서가 아니다. 비민주적이고 부도덕한 사회 시스템 때문이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이 맑다.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교과목 속에 진리가 있다. 진리를 탐구하면서 올바른 태도에 대한 의지가 생긴다. 아무리 노력해도 최저임금도 받을 수 없는 사회,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고 서열화하는 교육제도, 그것을 만든 사회 어른들에게 문제가 있지 청소년에게 문제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 법을 만든 권력자들에게 있다. 당신들만 정신 차리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다. 당신들이 인성교육을 말할 때 내 눈에는 조폭 팔뚝에 새겨진 ‘차카게 살자.’라는 문신이 어른거린다. 인성교육이라는 것이 시행될 경우 떠오르는 그림이 또 하나 있다. 예비군 훈련 받으러 가면 정신 교육한다면서 멀쩡한 사람 앉혀 놓고 덜떨어진 소리하던 강사들 말이다. 배워할 사람이 강단에 서서 가르치는 그 가르침을 받아야 했던 악몽이 떠오른다. 온갖 덜떨어진 꼴통들이 인성 교육하겠다고 나서는 그림이 떠오른다. 나의 인성을 교육할 강사님들은 누구일까?  
181 유희적 인간(호이징가)고석근 file
편집자
1050 2015-08-16
유희적 인간(호이징가) 실업 여림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떼와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 내내 순환선 열차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가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여느 날의 퇴근길처럼 포장마차에 들러 하루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적 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다음날 해야 할 일들로 가슴이 벅차 오히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력서를 쓰기에도 이력이 난 나이 출근길마다 나는 호출기에 메시지를 담는다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일하지 않는 청년 백수들이 많다. 노래방을 운영하시는 지인은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노래방에서 알바를 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야! 대학을 졸업하고서 노래방에서 알바를 하냐?” 그 분은 공고를 나와 ㅅ대기업에서 일하다 10여 년 전에 명퇴를 하셨다. ‘청년 실업’의 문제는 정말이지 너무나 커다란 사회문제다. 하지만 나는 ‘사람은 성인이 되면 당연히 일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는 반대한다. 동물 중에서 일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나는 일하지 않는 인간을 ‘비정상’으로 보는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인간은 원래 거의 일을 하지 않았어. 원시인들은 하루에 고작 4시간도 일하지 않았다고 해. 그런데 물질문명이 이렇게도 고도로 발전한 지금 왜 이렇게 일을 많이 해야 해?” 나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인간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그런 주장을 하려면 이 세상을 다시 원시사회로 돌려 놔! 그때는 일을 거의 안 해도 잘 먹고 살 수 있었거든. 그런 사회로 돌려놓기 싫으면 당신들은 이런 세상의 혜택을 다 누리며 사니까 우리처럼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잘 먹고 살 수 있도록 돈을 충분히 내 놔!” 나도 젊을 때는 ‘인간은 당연히 일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는 ‘일하는 동물’을 견딜 수 없었다. 30대 중반, 과감히 직장을 그만두고 나를 ‘유희적 인간’으로 바꾸었다. 그러다 나는 치열하게 놀며 나만의 놀이를 발견했다. 글쓰기와 강의였다. 나는 글을 쓸 때와 강의를 할 때 신난다. 정말이지 살아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놀아도 적지만 돈이 들어온다. 물론 나는 내가 ‘노는 동물’이 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노는 동물’이 되는 게 불가능할까? 모든 인간이 ‘일하는 동물’이 되어 한평생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사는 이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인가? 그렇게 살며 온갖 정신 질환, 자살, 사고로 신음하는 이 인간 세상이 도대체 제대로 된 세상인가? 나는 청년 백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너희들을 일벌레로 길러놓고는 일자리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이 세상의 기성세대로서 참으로 미안하다. 하지만 절대로 기죽지 말거라. 인간은 원래 일하는 존재가 아니란다. 한평생 놀아야 한단다. 신나게 놀면서 살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있단다.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너희들은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단다. 그런 세상을 우리 함께 만들어 가자. 우리 함께 손을 맞잡으면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