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8호...
   2020년 04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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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210 어떤 국어의 풍경/권서각 file
편집자
955 2016-10-26
어떤 국어의 풍경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말은 의사소통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생각이나 느낌을 담는 그릇이다. 국어는 한국인의 생각을 담기에 알맞은 그릇이고 중국어는 중국인의 생각을 담기에 알맞다. 그릇의 모양에 따라 담긴 것의 모양이 달라진다. 국어가 바르지 못하면 그 그릇에 담긴 생각도 바르지 못하다. 거친 말을 쓰는 집단은 생각도 행동도 거칠기 마련이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바른 말 고운 말을 강조한다. 다리가 두껍다, 맛이 틀리다, 벌레에 물려 피부가 간지럽다는 다리가 굵다, 맛이 다르다, 벌레에 물려 피부가 가렵다. 로 고쳐야 한다. 사람에게 붙여야 할 인칭대명사 ‘얘’를 사물을 가리킬 때 쓰는 등 국어를 잘못 쓰는 일이 심해지고 있다. 가령 개나 고양이를 가리키며 “얘 데리고 병원에 가요.”라든지 요리사가 음식에 소금을 넣으며 “얘도 한 스푼 넣어요.”라고 한다. 이렇게 국어를 잘못 사용하는 일은 어휘나 문법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발음의 문제도 있다. 우리 국어의 자음과 모음을 바르게 발음하는 것도 국어 사랑의 한 측면을 이룬다. 지난 날 교회의 목사님들의 설교 언어는 우리의 일상 언어와 크게 달랐다. ‘예수’를 ‘예슈’라하고 ‘믿습니다’를 ‘밋쉬미다’라고 하신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전 시대에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초창기 미국 선교사들의 영어식 국어 발음에 영향을 받아서이다. 이는 자기보다 우월한 것에 대한 지나친 따라 하기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언어의 사대주의라 할만하다. 요즘의 젊은 여성들의 말을 자세히 들어보면 기성세대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대개의 모음을 ‘오’에 가깝게 발음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입으로 나와야 할 공기를 코로 내보내어 콧소리에 가까운 소리를 낸다. ‘선생님’을 ‘손생니옴’’에 가깝게 발음한다. ‘ㅅ’이나 ‘ㅈ’발음도 유성자음 〔z〕에 가깝게 발음한다. 귀엽게 들리라고 그러는 모양이지만 언어를 다루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거북한 게 아니다. 이런 현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과거의 목사님들이 외국 선교사의 영향을 받았듯이 우리의 젊은 여성들이 이른바 걸 그룹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그런 말투가 매력적이고 애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바른 국어사용이 아님은 분명하다. 세종대왕이 들으시면 매우 섭섭해 하실 거다. 국어라는 그릇이 반듯해야 사회가 바르게 된다.  
209 착한 일을 하지 말아라!(원효)/고석근 file
편집자
1200 2016-10-15
착한 일을 하지 말아라!(원효) 대추 따는 노래 이달 이웃 집 꼬마가 대추 따러 왔는데 늙은이 문 나서며 꼬마를 쫓는구나. 꼬마 외려 늙은이 향해 소리 지른다. “내년 대추 익을 때에는 살지도 못할 걸요.” 설총이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 좌우명을 아버지 원효대사에게 부탁드리자 원효대사는 아들에게 한마디 던졌다. “착한 일을 하지 말아라!” 설총이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그럼 악한 일을 하고 살라는 말씀입니까?” 이에 원효대사가 일갈하였다. “착한 일도 하지 말라 하였거늘 하물며 악한 일을 생각하느냐?” 착한 일을 많이 행한 한 목사가 추문에 휩싸였다. 벌써 30여 년 전이다. 그 목사님을 어느 모임에서 뵌 적이 있다. 그 목사님의 확신에 찬 말이 귀에 쟁쟁하다. “40일 동안 금식하며 예수님의 길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뒤로 가끔 그 목사님의 ‘착한 행적들’을 언론에서 접했다. 인간에게는 ‘지랄의 양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다. 인간에게는 ‘지랄이라는 일탈 행위가 불가피하다’는 ‘무시무시한 윤리학’이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끝내 ‘지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세상은 착한 일을 강요한다. 어른들은 착한 아이를 참 좋아한다. 나중에 어떻게 되건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착한 아이가 다 악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하지 못한 ‘지랄’은 어디로 갈까?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분명히 몸 안을 떠돌아다닐 것이다. ‘착한 사람들’은 어딘가 많이 아프다. 그래서 이웃 집 할아버지 집에 몰래 대추를 따러 온 꼬마가 귀엽다. 들킨 꼬마는 외려 소리 지른다. “내년 대추 익을 때에는 살지도 못할 걸요.” 이런 ‘파렴치한 아이’가 있는 옛 마을이 그립다. 그 아이는 어른이 되어 지랄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달 시인은 홍길동을 쓴 허균의 스승이라고 한다. ‘지랄의 시’를 썼기에 멋있는 스승이 될 수 있었을까?  
208 우리의 소원은/권서각 file
편집자
1100 2016-09-26
우리의 소원은 어린 시절부터 경로우대에 이른 지금까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했다. 그러나 통일은 오지 않고 우리는 아직도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오히려 다시 남북 관계는 더욱 긴장되고 있다. 북은 핵 실험을 계속하고 있고 남은 대화를 단절한 채 풍선을 날려 보내고 확성기 대북 방송을 재개하고 있다. 급기야 한국과 미국은 싸드( Thaad)를 배치한다고 발표했다. 그토록 간절하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했지만 통일이 오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어떤 소원이든지 이렇게 간절하게 이렇게 오래 노래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중의 소원은 통일이다. 그러나 남과 북의 통치자들의 소원은 통일이 아닌지도 모른다. 북은 남한을 적대시하며 긴장관계를 조성함으로서 그들의 왕조 체제를 구축했다. 남의 권력자들도 권력이 위태로울 때마다 남북의 긴장관계를 조성하여 그들의 권력을 강화했다. 종북 프레임, 북풍, 총풍 등의 용어가 이를 증명해 준다. 겉으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하면서 내심으로는 통일을 원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런 남북관계가 대화를 통한 화해와 협력으로 전환점을 맞이한 것은 남의 권력자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그 시기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역사적인 6.15공동선언을 발표하고, 노무현 대통령도 육로로 북을 방문하여 김정일과 10.4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기간에 끊어진 철로와 육로가 이어지고,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고, 개성공단이 조성되었다. 통일이 무엇인가? 남과 북이 이렇게 오고가며 만나는 게 통일이 아닌가? 이 시기에 우리는 절반의 통일을 이루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 한다. 무엇을 잃었는가? 개뿔을 잃었는가?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지금까지 누려온 부도덕한 권력이 아니었던가? 개성공단 조성에 관여했던 인사의 말을 빌리면 원래 남측은 공단 지을 곳으로 개성이 아닌 곳을 제안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정일이 이미 주둔해 있던 북한군 부대를 뒤로 물리고 지금의 개성공단 위치를 제안했다는 것이다. 물류가 편리하다는 이유를 들어서였다고 한다. 이는 북에 평화통일의 의지가 전혀 없지 않다는 일말의 기대를 갖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던 남북관계가 다시 냉랭하게 된 것은 ‘이명박그네’ 정권부터이다.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고, 통일의 마지막 희망인 개성공단에서마저 철수하고 말았다. 이후 한반도는 다시 냉전체제로 회귀하고 말았다. 미국의 북에 대한 제제는 심해지고 북은 중단되었던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재개했다. 급기야 경북 성주에 싸드 배치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싸드의 폐해는 곱게 자라던 참외의 생존마저 위태롭게 하고 있다. 한반도의 정세는 싸드 배치 이전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싸드 배치 이전은 일말의 평화통일의 희망이 있었지만 싸드 배치 이후는 평화통일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한다. 군대도 가지 않았던 사람들이 전쟁을 말하고 있다. 또한 싸드 배치는 우리 정부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형식만 한미 양국의 합의에 의한 발표지 실제는 미국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싸드 배치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 체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우리의 국익과는 무관한 결정이다. 우리의 국익에 가장 의존도가 높은 중국이 반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러시아도 크게 반발한다. 한반도 싸드 배치는 외세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대한민국 구성원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미국의 뜻대로 싸드를 배치하게 한 것은 구한말 일본에 국권을 넘겨준 을사오적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 북은 미국의 경제 제재로 심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까지 행태로 보아 압박한다고 핵을 포기할 북이 아니다. 쥐도 막다른 곳에 몰리면 고양이를 물 수 있다. 대통령은 그 특유의 목소리로 “싸드 배치 외에 북한의 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우리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부디 제시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하셨다. 어조로 보아서 좋은 방법을 제시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입 다물라는 뜻임을 알겠다. 그래도 굳이 제시하니 소통의 차원에서 들어주셨으면 한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6.15 공동선언을 존중하고 북과 대화하시라.   
207 예술은 박물관, 미술관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는 모든 아름다움이 상실되어 있다(모리스)/고석근 file
편집자
1147 2016-09-16
예술은 박물관, 미술관 속에 들어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있어서는 모든 아름다움이 상실되어 있다(모리스) 박물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 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 최소한 삼백 년 전부터 쭉. 부채는 있는데 - 홍조 띤 뺨은 어디 있나요? 칼은 있는데 - 분노는 어디 있나요? 어두운 해질 녘 류트를 퉁기던 새하얀 손은 온데간데없네요. 영원이 결핍된 수만 가지 낡은 물건들이 한자리에 다 모였어요. 진열장 위에는 콧수염을 늘어뜨린 채 곰팡내 풀풀 풍기는 옛날 파수꾼이 새근새근 단잠을 자고 있어요. 쇠붙이와 점토, 새의 깃털이 모진 시간을 견디고 소리 없이 승리를 거두었어요. 고대 이집트의 말괄량이 소녀가 쓰던 머리핀만이 킬킬대며 웃고 있을 뿐. 왕관이 머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어요. 손은 장갑에게 굴복하고 말았어요. 오른쪽 구두는 발과 싸워 승리했어요. 나는 어떨까요, 믿어주세요, 아직도 살아 있답니다. 나와 내 드레스의 경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어요. 아, 이 드레스는 얼마나 고집이 센지! 마치 나보다 더 오래 살아남기를 열망하듯 말이죠. 며칠 전에 일가족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한 여인의 바람이 일가족 네 명의 목숨을 앗아갔단다. 그 여인의 불륜의 현장을 고스란히 담은 동영상을 우연히 보게 된 예비사위가 딸에게 얘기하고 딸은 엄마에게 얘기하고 엄마가 자살하고 아버지가 알고 딸이 자살하고 아버지가 자살하고 결국엔 아들까지 자살하게 되었다고 한다. 간음한 여인을 향해 마구 돌을 던지는 자들에게 예수는 외쳤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돌을 던지던 자들은 부끄러움에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현대문명사회에서 이리도 잔혹한 사건이 일어나다니! 우리는 어쩌다 남의 잘못에 이리도 가혹하게 되었을까? 부모가 죄수여서 항상 죄의식에 시달리던 자베르 형사는 장발장의 죄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의 불타는 정의감의 원천은 자신의 깊은 마음속에 똬리를 튼 죄의식이었던 것이다. 한 여인의 불륜을 일가족의 자살로 몰아갈 만큼 우리 사회는 지금 깊은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다. 왜 다들 죄인이 되어버렸을까?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누추해서일 것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우리의 일상, 생활 세계는 과학에 의해 식민지화 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얼마나 ‘과학주의자’가 되어버렸는가? 과학이 우리의 일상을 점령하게 되면 우리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은 다 사라져버린다. 예술은 박물관, 미술관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우리의 일상에서 모든 아름다움은 사라져버린다. 오로지 ‘적자생존이론’만이 우리들 머리 위를 배회한다. 정글에서 상처 받은 인간은 먹잇감일 뿐이다. 조만간 그 가족의 이야기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들이 살던 집만이 덩그러니 유물처럼 남을 것이다. 그 집은 오래 오래 우리의 경배를 받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테러를 가하지 않으려면 ‘삶의 아름다움’을 회복해야 한다. 과학은 현대의 종교다. 우리는 과학의 이름으로 말하는 자들에게 꼼짝하지 못한다. 우리는 ‘경제학(사회과학)’이라는 이름에 걸려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다. 사드 배치도 과학의 아름으로 추진될 것이다. 누군가가 과학의 논리로 ‘소녀상 철거 이전’을 얘기할 것이다. 박물관에 가보면 원시시대부터 고대 중세 근대 현대까지 깔끔하게 배열되어있다. 우리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 다행이야! 현대에 태어나서...... .’ 우리가 과학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한 우리는 누군가의 꼭두각시가 되어 서로에게 돌을 던지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206 신념과 고집/권서각 file
편집자
1222 2016-08-23
신념과 고집 그리 바쁘지 않을 때, 혹은 창밖에 하염없이 비가 내릴 때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이는 누워서 천정의 무늬를 세거나 멸치 똥을 고르기도 한다. 어떤 이는 옛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고 그녀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헤아리기도 한다. 말과 글을 다루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이는 어떤 단어에 대해 중얼중얼 생각하기도 한다. 신념이라는 말과 고집이라는 말이 있다. 신념의 사전적 풀이는 ‘굳게 믿는 마음’이고 고집의 사전적 풀이는 ‘자기의 의견을 바꾸거나 고치지 않고 굳게 버팀’이다. 두 말의 차이가 확실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두 말의 공통점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끝까지 굽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른 점은 무엇일까? 얼핏 드는 느낌으로 신념은 긍정적이지만 고집은 부정적인 것 같다. 이퇴계 선생이 평생 경(敬)을 화두로 삼은 것,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 이회영 선생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만주에 신흥군관학교를 세우신 것은 신념일 것이다. 옹고집전의 옹고집이 인색한 태도를 바꾸지 않는 것,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태도, 한번 내 사람이면 끝까지 믿는다는 태도 등은 고집에 가까울 것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바를 굽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념과 고집은 같은 말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 보면, 내 생각이 신념이고 당신의 생각이 고집이다. 당신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 생각이 신념이고 내 생각이 고집이다. 그렇다면 고집과 신념은 어떻게 다를까? 신념에 있어서 옳은 것은 무엇일까? 고집에 있어서 옳은 것은 무엇일까? 분명히 그 옳은 것이 서로 같지 아니할 것이다. 문득 한 생각이 떠오른다. 신념의 옳음은 나만을 위한 옳음이 아니요, 고집의 옳음은 나만을 위한 옳음일 것이다. 이퇴계, 안중근, 이회영 같은 분들은 나만을 위해 사신 분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또 한껏 이런 생각이다. 세상에는 신념을 지닌 이도 있고 고집쟁이도 있다. 그러나 고집쟁이가 어떤 사회의 권력자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고집불통 폐가망신이라는 말이 있다. 개인이 고집을 부리면 개인의 불행에 그치지만 권력자가 고집을 부리면 사회 전체가 불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205 한 번 진리를 인정해버리고 나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카뮈)/고석근 file
편집자
994 2016-08-17
한 번 진리를 인정해버리고 나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카뮈)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다윈의 진화론을 배웠다. 생명체의 생존 법칙은 ‘약육강식’이라고. 그러다 최근에는 ‘적자생존’이 맞단다. 어느 게 맞는가? 토마스 쿤은 말한다. “과학의 역사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그는 과학이 지식의 축적에 의해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시현상이라고 말한다. 단지 ‘패러다임(생각의 틀)’이 바뀐 것뿐이란다. 천상의 세계에 신이 산다고 생각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에서는 천상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별똥별을 보며 기상현상이라고 생각했단다. 완전한 천상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중국에서는 별똥별을 그대로 기록했단다. 세상은 ‘생각’대로 보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오로지 ‘강자’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과학 시간에 배운 ‘약육강식’이 우리의 눈에 ‘강자’만이 보이게 했다. 그러다 이제 ‘강자’와 ‘약자’가 대체로 나눠지는 것 같다. 이렇게 계급이 굳어지는 사회에서는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아!’라는 과학 이론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약자들이 계속 강자가 되려고 ‘헛된 노력’을 할 테니까. 세상에 잘 적응하게 하는 ‘과학’은 진화론 외에도 온갖 철학, 심리학 등등 참으로 많다. 요즘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재벌 2세’란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재벌이 되어야만 이룰 수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꿈을 다 버리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존 방식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저께 오랫동안 대기업에 다니다 명퇴를 하고 식당을 하는 50대 중반의 남자 분과 술잔을 나눴다. 짙은 허무감이 몰려온단다. 세상에 잘 적응하여 지금까지 잘 살아남았는데. 니체는 우리에게 ‘지식의 계보’를 알라고 한다. 지식, 진리라고 하는 것들의 뿌리를 파헤쳐 가면 그것들은 결국 패러다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패러다임은 누가 만든 것인가? 우리는 누구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인가? ‘과학’이라는 안개는 우리의 시야를 뿌옇게 가린다. TV에서는 노인 인구비율이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한탄을 한다. 우리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란다.  
204 경(敬)이라는 글자/권서각 file
편집자
1181 2016-07-25
경(敬)이라는 글자 소수서원 경렴정에서 죽계수 건너편을 바라보면 바위에 새겨진 공경 경(敬)자가 보인다. 경자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경자가 성리학의 핵심 사상이며 퇴계 선생의 가장 소중한 가르침이라는 사실이다. 흔히 경은 웃어른에 대한 공경, 스승에 대한 공경, 지위가 높은 이에 대한 공경, 임금님에 대한 공경쯤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다. 퇴계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도산에 계실 때 23세의 청년 율곡이 도산을 방문했다. 퇴계는 마당에 내려가 젊은 율곡을 맞이했다. 소수서원 강학당 밖 마당에서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엿듣던 대장장이 배순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유생들과 함께 공부하게 하셨다. 사화로 말미암아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게 되어 여러모로 부족한 권씨 부인을 공경으로 대하셨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바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퇴계의 경은 나이나 지위에 대한 공경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공경이었던 것이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에 대해 연민했던 예수의 가르침도 나 아닌 남에 대한 공경일 것이다. 팔 다리와 머리를 가장 낮은 데 임하게 하여 절하는 불교의 오체투지도 나 아닌 남에 대한 공경일 것이다. 청마 유치환 시인이 경주 여고 교장으로 계실 때 정한 교훈이 ‘나란 나만을 위한 나가 아니다.’이다. 이 또한 타자에 대한 공경을 기반으로 한 가르침이다. 모든 스승의 가르침에는 나 아닌 남에 대한 공경과 사랑이 있다. 우리사회도 날이 갈수록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다. 상대에 대한 공경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요즘은 대개 주례 없는 결혼식을 하지만 얼마 전까지 결혼식에는 주례가 있었다. 주례를 할 때마다 이런 주례사를 하곤 했다. ‘누구를 공경한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부인이 화가 나서 베개를 던지면 오체투지 하듯이 납작 엎드리십시오. 그러면 베개는 허공으로 날아가고 가정에는 다시 평화가 가득할 것입니다.’ 이 세상 공경 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으랴.  
203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 말라. 못난 인생을 두려워하라.(브레히트)/고석근 file
편집자
1134 2016-07-16
죽음을 그토록 두려워 말라. 못난 인생을 두려워하라.(브레히트) 죽음 무라노 시로오 줄곧 쫓기고 쫓겨왔다 발톱도 찢기고 눈물도 마르고 하늘과 숲이 멀리 물러나기 시작했다. 나의 주검이 쓸쓸한 가시덤불 속에 뒹굴고 있다 드디어 누군가가 다가왔다 사랑과 공포의 표정으로 피에 젖은 짐승을 살짝 확인하러 온 사냥꾼처럼 넋이 나를 찾으러 왔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죄를 확신함에도 불구하고 사형 선고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왜 그는 그런 불의한 재판의 결과를 받아들였을까? 우리는 그가 ‘악법도 법’이어서 사형 선고를 받아들였다고 배웠다. 악법을 지키는 사람이 성인(聖人)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소크라테스의 죽음’ 앞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알고 나서야 그가 왜 ‘철학의 아버지’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평생 삶의 원칙을 갖고 살았다. 그는 항상 ‘내면의 소리(다이몬)’를 들으며 살았다. 공자가 평생 천명(天命)를 따르며 산 것과 같다. 예수가 하느님의 목소리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혔듯 그도 내면의 신의 목소리에 따라 독배를 마셨다. 내면의 소리는 양심(良心)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한평생 양심에 따라 산 사람만이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 철인(哲人)이 통치자가 되는 사회를 꿈꿨던 것이다. 양심을 저버리고 사는 사람은 한평생 죽음에게 쫓기며 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리도 바쁠 것이다. 바쁜 게 미덕인 우리 사회의 하늘엔 늘 죽음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있다. 신동엽 시인의 노랫가락이 가슴을 적신다. ‘서럽게/아 엄숙한 세상을/서럽게/눈물 흘려//살아가리라/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202 왜곡 국어사전/권서각 file
편집자
1117 2016-06-25
왜곡 국어사전 종북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북한의 체제와 이념을 추종하는 행위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분단 직후에는 다수 있었을 것이나 지금 거의 사라졌다. 지금은 이른바 주류들이 즐겨 쓰는 말로 권력에 비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이 종북이란 규정을 하면 괜히 쫄아드는 위력이 있다. 보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리고 전통적인 것을 유지하려는 성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의 전통문화와 역사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사상이다. 그러나 자칭 보수라 하는 자들은 일제, 이승만 독재, 군사독재 정권을 옹호하는 세력이다. 부패와 부정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집단을 가리킨다. 일제 강점기 이후 우리 사회의 주류를 형성해 온 부도덕한 세력이다. 그들은 스스로 보수라 하지만 민주화 세력은 이들을 수구꼴통 혹은 수꼴이라 한다. 애국자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쓰였다. 지금은 나라가 아니라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권력 집단에 무조건 순응하고 복종하는 자를 말한다. 이들의 특징은 민주주의와 임을 위한 행진곡과 노란 리본을 싫어한다. 어버이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의 뜻으로 쓰였다. 지금은 젊은이들에 호통치고 나무라는 꼴통 노인네를 가리킨다. 예로 어버이연합이 있다. 종편 케이블 방송 종합편성 채널의 줄임말이었다. 지금은 술집에 앉아서 나누는 잡담을 티브이 방송에서 볼 수 있게 한 티브이방송 채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로 수꼴과 탈북자가 출연하여 민주화 세력과 북한을 씹는 일을 한다. 탈북자 북한에서 살 수 없어 남쪽으로 탈출한 우리 동포였다. 지금은 주로 어버이 연합 집회에 2만원 받고 가거나 종편에 출연하여 북한을 소재로 농담을 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고위공직자 높은 지위의 공직을 담당한 관리였다. 지금은 자기의 소신과 관계없이 대통령의 명에 따라 골프를 치기도 하고 치지 않기도 하는 자를 가리킨다. 낙하산 비행기를 타고 고공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때 사용하는 기구였다. 지금은 대통령의 뜻에 순종하는 이가 대통령의 명을 받아 고위 공직자나 공사에 고위직으로 부임하는 일을 가리킨다. 이들은 성과가 없어도 거액의 성과급을 나누어 가진다. 노동자 자본가와 더불어 재화를 생산하는 일을 담당하는 이를 가리킨다. 의사, 변호사. 공무원 교사 등의 모든 직장인이 모두 노동자다. 자본가가 아닌 사람을 가리킨다. 우리는 적은 임금을 받고 열심히 일해서 자본가의 돈을 벌게 해 주는 일꾼을 가리킨다. 노동조합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기 위한 합법적 단체였다. 독일에서는 학교에서 노동조합 활동이나 파업을 교육한다. 우리는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암적 존재로 여긴다. 좌빨이나 종북과 같은 부류로 분류된다. 틀리다 ‘맞다’ ‘옳다’의 반대말이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다르다’의 뜻으로 쓴다. ‘다르다’는 ‘같지 않다’는 뜻이다. 가령, ‘내 동생과 나는 성격이 틀리다.’라고 말한다. 이는 ‘내 동생과 나는 성격이 다르다.’고 해야 한다. 수꼴은 진보적인 생각을 늘 틀린다고 말한다. 자기와 같지 않으면 틀리다, 라고 한다. 공화국 共和는 Republic의 번역어다. 공화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주나라 때이다. 왕이 없이 두 대신이 통치하던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공화국은 국민의 합의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다. 우리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마 공화국을 5.16이후 공화당이 다스리는 나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201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공자)/고석근 file
편집자
1224 2016-06-15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공자) 서시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알리요? 알리요? 이 내 마음 누가 알리요? 민요 ‘아리랑’에는 우리의 짙은 한이 서려있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한. 내 마음은 내 눈에 이리 환하게 보이는데 왜 남들 눈엔 보이지 않는 걸까? 그래서 우리들 가슴속은 검게 타버렸다. 하지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포기해야 한다. 우리는 아이처럼 자기를 알아달라고 앙탈부리거나 떼쓰지 말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야 한다. 중용(中庸)에 나오는 말이다. ‘오직 천하에 지극히 성실한 이만이 자기의 타고난 본성을 극진히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지극히 성실하게 가다보면 자신의 본성(本性)이 깨어난다. 인간의 본성은 하늘의 명령이다(天命之謂性). 우리의 본성이 깨어날 때 우리는 ‘하늘의 명령(天命)’을 알 수 있게 된다. 하늘의 명령은 모든 인간의 본성에 들어와 있기에 우리의 깊은 마음은 누구나 같다. 이렇게 자신의 본성이 깨어날 때만이 우리는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과 마음이 하나로 통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슬퍼하지 말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가면 된다. 남들이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건 우리가 하늘이 명령한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했다. ‘하늘의 그물은 엉성해 보이지만, 결코 어떤 것도 놓치지 않는다(天網恢恢, 疏而不失).’ 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오래도록 우리의 가슴을 울릴 것이다.  
200 다시 임을 위한/권서각 file
편집자
1155 2016-05-27
다시 임을 위한 올해도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공식 기념곡 지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가보훈처는 지금까지의 관례에 따라 작년처럼 제창으로 하지 않고 합창으로 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것이 이 노래를 둘러싼 갈등을 해소하는 최적의 결정이라고도 했다. 결과적으로 보훈처는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참가자들에 의해 제창되는 것을 한사코 막아보겠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최후의 시민군 윤상원의 영혼결혼식에서 처음 불린 노래로 이후 5.18관련 행사, 민주화 운동 집회 등에서 널리 불리기 시작하면서 5.18을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매김 되었다. 누가 의도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이다. 이는 이 노래가 5.18 정신을 가장 오롯이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5.18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노래를 5.18 기념곡으로 지정하고, 기념식에서 다함께 부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5.18정신이 담긴 노래가 5.18 기념식에서 제창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국가는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이 노래가 싫은 것이다. 왜 그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리는 것을 한사코 막으려 하는가? 그들은 이 노래가 싫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싫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세에 밀려 5.18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긴 했지만, 지금 국가권력을 가진 이들은 이를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우리 현대사는 외형적으로는 민주화 되었다고 하지만 실제 권력의 주체는 민주화 세력이 아니다. 늘 말하는 바이지만, 일제에서 이승만 독재로 그리고 군사 독재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주류는 아직 그대로다. 이 주류의 흐름이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해방되었다고도 민주화 되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깨어 있는 민중의 수효가 늘어나서 이 부도덕의 물줄기를 바꾸지 않는 한 <임을 위한 행진곡> 사태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그래서 며칠 전 망월동을 찾아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힘차게 불렀다.  
199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예수)/고석근 file
편집자
1271 2016-05-16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예수) 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괴로운지, 얼마나 외로운지, 미칠 것 같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라.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세상엔 억울한 사람들뿐이다. 전부 한이 많고 서럽다. 피해자는 넘쳐나는데 가해자는 없다. 우리 모두 상처 입은 영혼들이다. 왜 그럴까? 사람은 ‘신의 마음, 부처의 마음, 하늘의 마음’을 타고나기에 누구나 사랑이 그득하고 지혜롭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지 훤히 안다. 그래서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처럼 행동한다. 남을 함부로 재단하고 가르치려든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얼마나 남들과 똑같이 어리석고 탐욕에 젖어있다는 건 모른다. 밖으로 향하는 지혜를 빛을 안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자신도 남들과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어 남들에게 관대해진다. 더불어 함께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가게 된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은 지혜의 빛을 안으로 향하게 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훤히 보이는데 인간들이 어리석기 짝이 없어.’ 그는 점점 외톨이가 되어 간다. 그는 한평생 개와 함께 산다. ‘도무지 삶의 의미를 모르겠어.’ 그는 겉으론 깔깔거리지만 속으론 운다. 천지불인(天地不仁-도덕경)이다. 천지는 냉정하게 이치대로 돌아갈 뿐이다. 우리는 이치에 복종해야 한다. 오로지 이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의 마음’에서 벗어나 이치를 따를 수 있는 몸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란 얼마나 엉터리인가! 자신의 욕망을 얼마나 교묘히 숨기는가? 합리화하는가?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인간에겐 위대한 내면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내면의 힘을 믿고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내면의 힘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게끔 철저히 복종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에 속지 말자. 우리의 의식은 엉터리다. 무의식에 진실이 있다(프로이트). 자신의 마음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하다. 다들 눈빛이 분노에 젖어 있다. 그러다 금방 울음보가 터질 듯 표정이 일그러진다.  
198 어버이라는 이름으로/권서각 file [1]
편집자
1388 2016-04-26
어버이라는 이름으로 일찍이 안데르센은 ‘미운 오리새끼’를 통해 오리의 무리 속에 한 마리 백조의 외로움을 이야기했다. 오리와 함께 살아가지만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다. 그냥 외로운 섬일 수밖에 없다. 영남이라는 지역에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도 외로운 섬이 되는 일이다. 4.13 총선 결과 여당이 참패했지만 이 지역에서는 100% 승리했다. 겉으로는 웃는 얼굴로 만나고 인사를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비판적 생각을 가진 이들의 귀에 가끔 들리는 말이 있다. 그 사람, 사람은 좋은데 생각이 삐딱해. 그들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고민을 하며 가지게 된 생각을 두고 그들은 삐딱하다고 한다. 총선 결과로 보면, 우리 국민의 반 이상이 가진 생각을 이 지역 사람들은 삐딱하다고 한다. 실은 우리 국민 전체로 보면 이 지역 사람들이 오히려 삐딱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삐딱한 이가 삐딱하지 않은 이를 오히려 삐딱하다 하는 꼴이다. 친일의 잔재,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 땅에 살현하려는 소망이 삐딱한 생각인가? 전쟁 없이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적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 삐딱한 생각인가? 연일 북은 핵 실험 결과를 알리고 위협적 언어를 쏟아낸다. 남에서는 대북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고 한다. 전쟁의 위기가 감돈다. 지금 한반도는 위험하다. 쥐도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고양이를 물 수 있다. 전쟁은 얘기치 못한 지점에서 일어난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전쟁에 대한 걱정을 아니 할 수 없다. 아무리 시인이지만 시인도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일진대 걱정이 없을 수 없다. 일찍이 다산 선생은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라(非憂國非詩也) 하였다. ‘대한민국 어버이연합’이라는 좋은 이름을 가지 단체가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린다. 주로 일제 강점기에 희생당한 종군위안부 할머니들 모임,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모임, 세월호 희생자 추모 모임, 국정원 선거 개입 규탄 모임 등 민주화와 관련된 시민단체 모임에 훼방꾼 노릇을 하는 단체 이름이다. 이들이 검은 돈을 받아 탈북자들을 2만원에서 5만원씩 주고 동원한 사실이 밝혀졌다. 대개 부도덕한 권력이 하는 짓이 이러하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공영방송이라는 공중파 방송에서는 보도조차 없다. 머지않아 5월 8일은 어버이 날이다. 우리는 어버이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을 흘리는 민족이다. 몇 푼의 돈에 팔려 권력의 시녀가 되어 여론을 조작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어버이라는 이름은 당치 않다. 이 땅의 모든 어버이를 모독하는 일이기에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한다. 그런 어버이들을 이용하는 권력은 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글 권서각  
197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다 一卽多 多卽一 (불경)/고석근 file
편집자
896 2016-04-15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다 一卽多 多卽一 (불경) 엄숙한 시간 릴케 지금 이 세상의 어디선가 울고 있는 이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이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다. 지금 이 세상의 어디선가 웃고 있는 이 밤 속에서 까닭 없이 웃고 있는 이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웃고 있다. 지금 이 세상의 어디선가 걷고 있는 이 이 세상을 까닭 없이 걷고 있는 이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지금 이 세상의 어디선가 죽어가는 이 어디선가 까닭 없이 죽어가는 이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팔고(八苦)중에는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운 사람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는 괴로움)가 있다. 정말이지 미운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건 엄청난 고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되도록 미운사람을 보지 않고 살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살다보면 인간관계가 지극히 좁아진다. 마음이 맞는 사람하고만 만나 서로 ‘독백’만 하다 만다. 허전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미운 사람은 누구일까? 대체로 그는 ‘나의 그림자- 나의 어두운 모습’이다. ‘나의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자신의 약점이 들킬까봐 그를 미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운 사람과 만나지 않고 살면 우선은 편할지는 모르나 자신의 어두운 모습이 극복되지 않는다. 자신의 일부로 살아가야 하니 ‘삶의 충만감’이 없다. 따라서 ‘자신의 전부’로 살아가려면 미운사람과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죽을 때 삶의 여한이 없다. 우리는 미운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고통스럽지만 ‘그가 나’라는 것을 성찰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세상 모든 사람이 나’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온전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다 간 사람들이다.  
196 담배 피는 죄/권서각 file
편집자
1282 2016-03-28
담배 피는 죄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푸대접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담배 피는 사람이 아닌가 한다. 담배 값은 갑절 올랐는데 담배 필 곳은 마땅치 않다. 집에서 피면 아내에게 꾸중 듣고, 아파트 발코니에서 창문 열고 피면 위층에서 항의 들어오고, 거리에서 피면 행인이 손을 내젓고, 드물고 먼 흡연 장소 찾아가서 핀 다음 사람 만나면 당신 담배 피웠지? 냄새나는데, 하고 범죄인 취급이다. 전 시대에는 흡연이 자유로웠다. 버스에서 기차에서 마구 피기도 했다. 곰방대에 담배 피시는 할아버지와 환기도 하지 않고 한 방에서 기거해도 싫은 줄 몰랐고 싫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만약 그때 할배 담배 연기가 맵다고 한 마디 했다면 담배 대로 대가리를 맞아 혹불이 났을 것이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 수 없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매스컴의 공로가 크다. 거의 매일 담배의 해악에 대해서 떠들어댄다. 만병의 근원이 담배인 것처럼 말한다. 의사라는 공부 잘 하는 사람들도 병원만 찾으면 담배 피지 말라고 한다. 담배 피면 당신 죽어, 라고 협박까지 한다. 차라리 그냥 내 능력으로는 치료할 수 없습니다, 하면 밉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간접흡연이 직접흡연보다 더 나쁘다고 한다. 이게 무슨 낮도깨비 개울 건너는 소리인가? 매일 듣는 소리가 담배를 증오하는 소리 뿐이다. 반복은 주술의 효과를 나타낸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몹쓸 인간이 담배 피는 인간이 되었다. 담배가 그렇게 나쁘면 법률로 금지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흡연자를 죄악시하는 풍토를 만드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담배가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아는 바이다. 사람이 건강에 좋은 것만 추구하고 살지는 않는다. 거리의 매연도 좋지 못하고 작물에 뿌리는 농약도 좋지 못하고 우리가 늘 쓰는 전자제품의 전자파도 건강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담배만이 죄악시 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비흡연자는 담배 냄새를 유독 싫어한다. 이해한다. 담배가 악이라는 주술에 걸렸기 때문이다. 어떤 냄새의 좋고 싫음은 관념의 문제이다. 옛날에는 그렇게 싫지 않았는데 지금 그토록 싫은 것은 담배 냄새가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담배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이 변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여름날 화장품 냄새와 땀 냄새가 혼합된 것을 싫어한다. 미운 사람에서 나는 모든 냄새는 싫다. 공공장소에서 어떤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가 싫어도 싫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우리처럼 담배를 죄악시하는 곳은 없다. 유럽이나 동남아를 다니면서 담배 연기를 기적처럼 날리며, 거리에 담배꽁초를 마구 버리며 흡연의 자유를 누리기도 했다.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높은 좋은 나라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온갖 멸시와 박해를 견디며 금연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흡연의 자유마저 포기하면 더 포기할 무엇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를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담배가 그렇게 나쁘다면 나는 벌써 병들어 죽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올해 경로우대를 맞이하도록 살아 있다. 나는 담배를 좋아한다. 커피도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밥이 될 수 없는 시를 쓴다. 오랜만에 시 한 편 썼다 고료 삼만 원 받아 뻥튀기 한 자루와 담배를 사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온다 방에 들어 담배를 피우니 금세 연기가 한 방 가득이다 - 졸시, 시의 경제학  
195 네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사랑스럽게 창조한다는 것이다.(니체) /고석근 file
편집자
1120 2016-03-15
네 운명을 사랑하라. 운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운명을 사랑스럽게 창조한다는 것이다.(니체)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 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틔워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아주 오래 전 기관조사로 근무할 때 사망사고가 일어난 적이 있다. 건널목을 건너던 행인이 기관차에 부딪쳐 논두렁으로 나가떨어지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벌벌 떨며 어찌할 줄 모르던 기관사와 달리 나는 침착했다. 매뉴얼대로 널브러진 시체를 차장과 함께 수습하고 승객들을 차에 오르게 하고 보고를 하고 무사히 종착지까지 갔다. 사람들은 나를 냉정하다고 했다. 나도 나를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30대 중반에 문학을 공부할 때였다. 어느 날 강의가 끝나고 뒤풀이를 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걷잡을 수 없었다. 내 안에 그렇게 많은 눈물이 있다니! 나는 그 뒤 수시로 술만 마시면 펑펑 울었다. 강사가 되어 수강생들과 뒤풀이를 할 때도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어떨 땐 술주정까지 하며 울었다. 한 동화작가는 내 얼굴 표정이 두 가지라고 했다. ‘천진한 아이’와 ‘데드 마스크’. 노자는 ‘굳음은 죽음이고 부드러움은 삶’이라고 했다. 내가 문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나는 ‘데드 마스크’를 쓰고서 일생을 살았을 것이다. 내 안에 마냥 즐거운 ‘천진한 아이’가 있는 줄 모르고. 서정주 시인은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라고 했다. 그 뒤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고’ 바람이 부는 대로 살다보니 결국엔 ‘친일파’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친일파와 그 후손들. 그들의 ‘데드 마스크’ 뒤에는 얼마나 많은 눈물이 고여 있을 것인가? 그들의 ‘데드 마스크’가 이끌어 가는 우리 사회가 슬프다.  
194 민중은 옳은가?/권서각 file [1]
편집자
1667 2016-02-25
민중은 옳은가? 역사의 진화 과정을 보면 왕이라는 1인 권력의 통치에서 개인에게로 권력이 나뉘어져 온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권력은 국민(people)에게서 나온다는 명제가 당연한 시대까지 왔다. 그래서 우리는 권력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Democracy)를 인류가 발견한 최선의 정치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민주주의의 의사 결정은 다수결을 원칙으로 한다. 민중에 의해 정치적 결정이 내려진다. 그렇다면 민중은 항상 옳은가?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민중에 의해서 선택된 국가 권력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젊은이들이 ‘헬조선’과 ‘흙수저’를 외치게 하고 개성공단을 폐쇄함으로써 남북관계를 냉전체제로 돌려놓은 일이 그것이다. 사드(미국의 고고도 미사일 방위체계) 배치까지 거론되는 한반도는 지금 매우 위태롭다. 우리 정치권력이 한반도를 이토록 위태롭게 몰고 가도 우리 정치권력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는 변함이 없다. 여기서 다시 민중은 옳은가? 라는 물음과 만나게 된다.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정권을 지지하는 민중은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인가? 여기서 떠오르는 역사적 사실이 있다. 히틀러가 지배했던 나치 정권 때의 독일 민중이다. 독일 민중은 히틀러를 지지했고 히틀러의 니치 정권은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고 유럽을 피로 물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남기고 몰락했다. 이때 히틀러를 지지했던 독일의 민중을 옳았다고 할 수 있을까? 민중은 누구인가, 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회 구성원 가운데 다수를 민중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숫자의 많음을 가리킬 뿐이다. 민중은 대중과 구별되어야 한다. 독일 나치 정권 시대에 괴벨스의 선동으로 강자의 편에 섰던 대중과 구별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권력자의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거나 자신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는 사람들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대중일지라도 민중은 아니다. 민중의 개념은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긴 하지만, 최소한의 조건은 갖추어야 한다고 본다. 1. 자신의 이득보다 더불어 산다는 쪽에 선 사람이어야 한다. 2. 역사 발전에 기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나치 시대 독일의 대중은 앞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기에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있다. 지금 전쟁을 말하며 사드 배치를 말하는 권력자들은 어떠한가? 지금 장관이나 권력자 가운데는 병역 기피자가 많다. 사드 배치를 요구하며 자신의 지역구엔 안 된다고 한다. 이들을 지지하는 대중들도 사회에 기여하는 삶보다는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는 성향의 사람들이다. 민중은 옳다. 민주주의도 옳다. 다만 민중에서 부도덕한 권력을 지지하는 대중들은 제외해야 할 것이다. 옛말에 물에 빠져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했다. 지금 우리의 대중들은 공중파 방송, 신문, 케이블 종편 방송, 인터넷 등이 부도덕한 권력에 대변자 노릇을 하고 있다. 나치 치하의 괴벨스의 선동에 못지않다. 민중을 어리석은 대중으로 만들고 있다. 부도덕한 정보의 홍수에 우리 민중을 빠뜨리고 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깨어있는 민중으로. 깨어나서 역사의 죄인이 되지 않아야 한다.  
193 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찾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내부 세계밖에 없다(프루스트)/고석근 file
편집자
994 2016-02-17
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찾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내부 세계밖에 없다(프루스트) 산 너머 저쪽 부세 저 산 너머 멀리 헤매어 가면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기에 아, 남들처럼 나도 얼려 찾아갔건만, 울면서 되돌아 왔다네 저 산 너머 멀리 멀리에는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건만. 요즘 대학생들을 강의하며 다들 길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해야 제가 가야 할 길을 알 수 있죠?” 아이들은 물건을 사듯이 ‘적성’ 하나를 빨리 사고 싶은 것이다. 자신을 안다는 건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주먹이 얼마나 센지는 무언가(혹은 누군가)를 쳐봐야 안다. 아이들은 살아오면서 과연 몇 번이나 자신을 무언가(혹은 누군가)와 부딪쳐 봤을까? “제 이상형을 모르겠어요.” 아이들은 과연 이성 친구, 애인과 몇 번이나 부딪쳐 봤을까? 산소는 수소와 부딪쳐 물이 된다. 산소 자신에게 전혀 없던 물이 된 것이다. 사람은 무언가(혹은 누군가)와 부딪쳐 전혀 다른 자신이 된 경험을 수없이 해봐야 한다. 자신이 무궁무진하다는 것, 자신의 무한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싸우지도 않고 큰다. 학교에서는 ‘정답’을 달달 외우며 자란다. 이렇게 자라면서 아이들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자신 안에 꼭꼭 웅크려 앉아 ‘나는 누구인가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이 아이들에게 도대체 누가 답을 줄 수 있을까? 나는 30대 중반에 소위 ‘중년의 위기’가 왔다. 그때부터 이 아이들처럼 내가 누구인지, 가야할 길을 몰라 십여 년을 방황했다. 백수가 되어 이 일 저 일 이 사람 저 사람...... 마구 부딪쳤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다. 그렇게 내 자신이 해체되고 나서야 나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아이들도 나처럼 십여 년을 방황해야 하나? 내가 이 아이들에게 나처럼 방황해 보라고 말할 수 있나? 사람이 길을 찾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나는 50대 중반이 되어서야 ‘안정’을 느꼈다. 행복이 지금 여기, 내 안에 있음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우리 교육이 아이들에게 삶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깨달으며 자라게 했다면 20대쯤에는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60대가 된 내가 20대인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방황해야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처절하다.  
192 동지 무렵/권서각 file
편집자
1306 2016-01-25
동지 무렵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행해졌던 세시풍속도 사라지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그리고 정보화 사회로 사회의 모습이 바뀌면서 그리 되었을 것이다. 설, 정월보름, 단오, 칠월칠석, 백중, 추석, 동지 등등 지금은 그 이름조차 다 기억할 수 없다. 다만 추석과 설만이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세시풍속 속에는 민족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 가령 설은 한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에 그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가, 한가위는 농사를 풍요롭게 해준 하늘에 감사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농경사회에서 농사의 시작과 끝에 행해졌던 제사요 축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민족의 대부분의 세시풍속은 농사와 관련되어 있다. 농사가 뒷전으로 밀리면서 세시풍속도 점차 그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어떤 집에는 아직 팥죽을 쑤는 것 같지만, 동지 팥죽을 못 먹은 지 오래 되었다. 다만 어린 시절 동지에 팥죽 먹던 기억이 남아 있다. 동지는 일 년 중에 낮이 가장 짧다. 다음 날부터 해가 점점 길어지면서 새날이 시작된다 하여 애기설이라 하기도 했다. 동지에는 집집마다 붉은 팥으로 죽을 쑤어 집 주위에 뿌리며 잡귀를 쫓기도 했다. 새해를 정하게 맞이하려 함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내 몫의 팥죽을 그릇에 담아 식지 말라고 무쇠 솥에 넣어두셨다가 고춧가루가 적은 배추 짠지와 함께 상에 차려 주셨다. 팥죽은 겉에 막이 생겨 꾸덕꾸덕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그야 말로 식은 죽 먹기다. 창호지에 여과된 부드러운 동지 무렵 해가 어두운 방안에 풀어진다. 그 방에 외롭게 담겨져 왠지 서러웠다. 노루꼬리만한 동지 무렵 해 지고 황혼이 빚 받으러 온 듯 헛간에 든다 마루 끝에 앉아서 식은 팥죽 한 사발 먹고 차나락 쭉정이 메나락 쭉정이 콩깍지와 더불어 헛간에서 잠을 잔다 쇠죽솥에 눈물자국 누가 닦아 주나 싸리비 뗏비는 누가 세워 놓았나 바람은 솔솔 불어 병아리 털 흔드는데 구정물 위에 살얼음 끼는데 황혼이 빚 받으러 온 듯 헛간에 들어 차나락 쭉정이 메나락 쭉정이 콩깍지와 더불어 헛간에서 잠을 잔다 - 졸시, 황혼이 헛간에 들어 젊을 때 썼던 시 한편이 생각나서 꺼내 읽었다. 그때의 나와 만나기 위함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초가집이 이마를 맞대고 모여 있는 농촌 마을의 풍경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쇠죽 통이 있는 외양간이 있고 맞은편에는 쇠죽솥이 걸려 있는 아궁이가 있다. 소는 선한 눈을 들어 쇠죽 끓이는 농부를 본다. 쇠죽솥에는 김이 나기 전에 눈물이 미리 난다. 그런 정겨운 풍경으로 동지 무렵 황혼이 손님처럼 찾아든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동지 무렵 황혼 무렵이면 누구에겐가 빚진 것 같고 무엇인가에 쫓기는 것 같았다. 동지, 헛간, 팥죽, 차나락, 메나락, 싸리비, 뗏비, 구정물, 쇠죽 이런 이름들을 호명하면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이제 곧 그런 이름마저 잊혀질 것이라서 더욱 그러하리라. 동지는 한해의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동지 해질 무렵이면 노을이 유난히 붉다. 이루지 못한 일이 남았는데 한해가 저물어서일까. 글 권서각  
191 그전보다도 백배는 더 섬세해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니체) /고석근 file
편집자
1190 2016-01-16
그전보다도 백배는 더 섬세해진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니체)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브레히트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말했다. “당신이 필요해요” 그래서 나는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걷는다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면서 그것에 맞아 살해되어서는 안되겠기에. 예수는 말했다. “오른 뺨을 치면 왼 뺨도 내밀어라!” 만일 그 말을 들은 누군가가 예수의 오른 뺨을 치면 어떻게 될까? 나는 예수가 크게 분노하리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모르는 그에게 분노하는 게 당연하니까. 예수는 ‘사랑’을 모르는 바리새인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독사의 자식들아!” 나는 통 큰 사람을 믿지 않는다. 한때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절대 권력을 가졌던 모씨가 고향에 다녀오면서 마을 이장에게 금일봉을 하사하였는데, 거금 삼천 만원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역시 통이 크신 분이야!” 이장은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고 한다. 통이 크다니? 그 돈이 어떻게 그의 손에 쥐어졌는지를 생각하면 과연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만일 그가 땀 흘려 그 돈을 모았다면 선뜻 내놓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나는 ‘쪼잔한 사람’을 믿는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정말 얼마큼 적으냐...... .’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김수영 시인 같은 사람들을 믿는다. 통 큰 사람들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랑을 알면 얼마나 세심해지는가! 빗방울까지도 두려워하는 지극히 섬세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온 몸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오른 뺨을 치면 왼 뺨을 내밀 수 있으면서도 불같이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소위 ‘지도층들’은 왜 이리도 통이 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