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된다(노신)


음화
김언희

인형이
있었다 눕히면 눈을
감았다 치마를 들치고 사내아이들이
연필심으로 사타구니를 쿡쿡 찌르며 킬킬거릴 때
눈을 감고 미동도 않던 인형이
있었다 죽어, 죽어, 죽어,
책상 모서리에
패대기쳐지며
터진 뒤통수에서 지푸라기를 꺼내보이던
비명도 한 번 안 지르던 인형이
있었다 머리채를 끄잡혀
질질 끌려가며
희미하게 웃어보이던
걸레쪽처럼 칼질 된 얼굴이
있었다 쓰레기더미 위에서
제 몸이 불타 없어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둥근
눈이

……있었다  


한 중년 여인이 말했다.
“어릴 적에 개구리 스무 마리를 한 줄로 매어 집에 가져왔었어요. 마당에 놓아두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다 죽어있더라고요.”

남에게는 치명적인 폭력이었는데 내게는 ‘장난’에 불과했던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  

세상에는 상처 받은 사람들 천지다.

상처를 주었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기서 우리는 절망한다.

“머리에 검은 털 난 짐승은 믿을 수 없어!”  

하지만 여기에 바로 우리의 희망이 있다.  

자신의 눈에 든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든 티끌은 훤히 보는 인간, 여기에 바로 우리의 희망이 있다.

민주주의를 잘 하면 된다.

우리는 남의 잘못은 귀신 같이 보는 눈이 있어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좋은 방법들도 잘 알고 있다.

민주적인 토론의 장만 잘 마련되면 좋은 방안들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 방안들이 나오면 우리 모두 함께 지키도록 하면 된다.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민주적인 시스템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 절망하지 말자.

우리에겐 길이 있다.

우리에겐 민주주의라는 희망의 길이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분노해야 할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온갖 폭력들이 아니라 그런 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 민주적인 시스템의 건설을 가로막는 세력들이다.

이런 세력들의 장벽을 뚫고 길을 내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걸어가면 길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