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 무렵

 

모든 사라져 가는 것들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행해졌던 세시풍속도 사라지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그리고 정보화 사회로 사회의 모습이 바뀌면서 그리 되었을 것이다. , 정월보름, 단오, 칠월칠석, 백중, 추석, 동지 등등 지금은 그 이름조차 다 기억할 수 없다.  다만 추석과 설만이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세시풍속 속에는 민족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 가령 설은 한해의 농사가 시작되는 시기에 그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가, 한가위는 농사를 풍요롭게 해준 하늘에 감사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농경사회에서 농사의 시작과 끝에 행해졌던 제사요 축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민족의 대부분의 세시풍속은 농사와 관련되어 있다. 농사가 뒷전으로 밀리면서 세시풍속도 점차 그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어떤 집에는 아직 팥죽을 쑤는 것 같지만, 동지 팥죽을 못 먹은 지 오래 되었다. 다만 어린 시절 동지에 팥죽 먹던 기억이 남아 있다. 동지는 일 년 중에 낮이 가장 짧다. 다음 날부터 해가 점점 길어지면서 새날이 시작된다 하여 애기설이라 하기도 했다. 동지에는 집집마다 붉은 팥으로 죽을 쑤어 집 주위에 뿌리며 잡귀를 쫓기도 했다. 새해를 정하게 맞이하려 함이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내 몫의 팥죽을 그릇에 담아 식지 말라고 무쇠 솥에 넣어두셨다가 고춧가루가 적은 배추 짠지와 함께 상에 차려 주셨다. 팥죽은 겉에 막이 생겨 꾸덕꾸덕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그야 말로 식은 죽 먹기다. 창호지에 여과된 부드러운 동지 무렵 해가 어두운 방안에 풀어진다. 그 방에 외롭게 담겨져 왠지 서러웠다.  

 

노루꼬리만한 동지 무렵 해 지고

황혼이 빚 받으러 온 듯 헛간에 든다

마루 끝에 앉아서 식은 팥죽 한 사발 먹고

차나락 쭉정이 메나락 쭉정이

콩깍지와 더불어 헛간에서 잠을 잔다

쇠죽솥에 눈물자국 누가 닦아 주나

싸리비 뗏비는 누가 세워 놓았나

바람은 솔솔 불어 병아리 털 흔드는데

구정물 위에 살얼음 끼는데

황혼이 빚 받으러 온 듯 헛간에 들어

차나락 쭉정이 메나락 쭉정이

콩깍지와 더불어 헛간에서 잠을 잔다         - 졸시, 황혼이 헛간에 들어

 

젊을 때 썼던 시 한편이 생각나서 꺼내 읽었다. 그때의 나와 만나기 위함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초가집이 이마를 맞대고 모여 있는 농촌 마을의 풍경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쇠죽 통이 있는 외양간이 있고 맞은편에는 쇠죽솥이 걸려 있는 아궁이가 있다. 소는 선한 눈을 들어 쇠죽 끓이는 농부를 본다. 쇠죽솥에는 김이 나기 전에 눈물이 미리 난다. 그런 정겨운 풍경으로 동지 무렵 황혼이 손님처럼 찾아든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동지 무렵 황혼 무렵이면 누구에겐가 빚진 것 같고 무엇인가에 쫓기는 것 같았다.

 

동지, 헛간, 팥죽, 차나락, 메나락, 싸리비, 뗏비, 구정물, 쇠죽 이런 이름들을 호명하면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이제 곧 그런 이름마저 잊혀질 것이라서 더욱 그러하리라. 동지는 한해의 끝과 시작이 교차하는 시간이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동지 해질 무렵이면 노을이 유난히 붉다. 이루지 못한 일이 남았는데 한해가 저물어서일까.

 

                                                      글 권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