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낙원을 다시 찾는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내부 세계밖에 없다(프루스트)


산 너머 저쪽
부세

저 산 너머 멀리 헤매어 가면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기에
아, 남들처럼 나도 얼려 찾아갔건만, 울면서 되돌아 왔다네
저 산 너머 멀리 멀리에는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건만.


요즘 대학생들을 강의하며 다들 길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해야 제가 가야 할 길을 알 수 있죠?”

아이들은 물건을 사듯이 ‘적성’ 하나를 빨리 사고 싶은 것이다.

자신을 안다는 건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주먹이 얼마나 센지는 무언가(혹은 누군가)를 쳐봐야 안다.

아이들은 살아오면서 과연 몇 번이나 자신을 무언가(혹은 누군가)와 부딪쳐 봤을까?

“제 이상형을 모르겠어요.”

아이들은 과연 이성 친구, 애인과 몇 번이나 부딪쳐 봤을까?

산소는 수소와 부딪쳐 물이 된다. 산소 자신에게 전혀 없던 물이 된 것이다.

사람은 무언가(혹은 누군가)와 부딪쳐 전혀 다른 자신이 된 경험을 수없이 해봐야 한다.

자신이 무궁무진하다는 것, 자신의 무한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싸우지도 않고 큰다.

학교에서는 ‘정답’을 달달 외우며 자란다.

이렇게 자라면서 아이들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자신 안에 꼭꼭 웅크려 앉아 ‘나는 누구인가요?’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이 아이들에게 도대체 누가 답을 줄 수 있을까?        

나는 30대 중반에 소위 ‘중년의 위기’가 왔다. 그때부터 이 아이들처럼 내가 누구인지, 가야할 길을 몰라 십여 년을 방황했다.

백수가 되어 이 일 저 일 이 사람 저 사람...... 마구 부딪쳤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고 마음은 갈가리 찢어졌다.

그렇게 내 자신이 해체되고 나서야 나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아이들도 나처럼 십여 년을 방황해야 하나?

내가 이 아이들에게 나처럼 방황해 보라고 말할 수 있나?

사람이 길을 찾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나는 50대 중반이 되어서야 ‘안정’을 느꼈다.

행복이 지금 여기, 내 안에 있음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우리 교육이 아이들에게 삶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깨달으며 자라게 했다면 20대쯤에는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60대가 된 내가 20대인 아이들에게 오랫동안 방황해야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게 너무나 처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