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그토록 두려워 말라. 못난 인생을 두려워하라.(브레히트)


죽음
무라노 시로오  

줄곧 쫓기고 쫓겨왔다
발톱도 찢기고 눈물도 마르고
하늘과 숲이 멀리 물러나기 시작했다.

나의 주검이
쓸쓸한 가시덤불 속에 뒹굴고 있다
드디어 누군가가 다가왔다

사랑과 공포의 표정으로
피에 젖은 짐승을
살짝 확인하러 온 사냥꾼처럼
넋이 나를 찾으러 왔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죄를 확신함에도 불구하고 사형 선고를 묵묵히 받아들인다.

왜 그는 그런 불의한 재판의 결과를 받아들였을까?

우리는 그가 ‘악법도 법’이어서 사형 선고를 받아들였다고 배웠다.

악법을 지키는 사람이 성인(聖人)이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소크라테스의 죽음’ 앞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죽음의 의미를 알고 나서야 그가 왜 ‘철학의 아버지’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는 평생 삶의 원칙을 갖고 살았다.

그는 항상 ‘내면의 소리(다이몬)’를 들으며 살았다.  

공자가 평생 천명(天命)를 따르며 산 것과 같다.

예수가 하느님의 목소리에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혔듯 그도 내면의 신의 목소리에 따라 독배를 마셨다.

내면의 소리는 양심(良心)일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한평생 양심에 따라 산 사람만이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 철인(哲人)이 통치자가 되는 사회를 꿈꿨던 것이다.  

양심을 저버리고 사는 사람은 한평생 죽음에게 쫓기며 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리도 바쁠 것이다.

바쁜 게 미덕인 우리 사회의 하늘엔 늘 죽음의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있다.

신동엽 시인의 노랫가락이 가슴을 적신다.

‘서럽게/아 엄숙한 세상을/서럽게/눈물 흘려//살아가리라/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하늘을 보았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