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진리를 인정해버리고 나면 거기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카뮈)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우리는 학창 시절에 다윈의 진화론을 배웠다.

생명체의 생존 법칙은 ‘약육강식’이라고.

그러다 최근에는 ‘적자생존’이 맞단다.

어느 게 맞는가?

토마스 쿤은 말한다.
“과학의 역사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그는 과학이 지식의 축적에 의해 발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시현상이라고 말한다.

단지 ‘패러다임(생각의 틀)’이 바뀐 것뿐이란다.

천상의 세계에 신이 산다고 생각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에서는 천상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별똥별을 보며 기상현상이라고 생각했단다.

완전한 천상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던 중국에서는 별똥별을 그대로 기록했단다.  

세상은 ‘생각’대로 보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오로지 ‘강자’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과학 시간에 배운 ‘약육강식’이 우리의 눈에 ‘강자’만이 보이게 했다.    

그러다 이제 ‘강자’와 ‘약자’가 대체로 나눠지는 것 같다.

이렇게 계급이 굳어지는 사회에서는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아!’라는 과학 이론이 등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약자들이 계속 강자가 되려고 ‘헛된 노력’을 할 테니까.  

세상에 잘 적응하게 하는 ‘과학’은 진화론 외에도 온갖 철학, 심리학 등등 참으로 많다.

요즘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면 ‘재벌 2세’란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재벌이 되어야만 이룰 수 있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꿈을 다 버리는 방법으로 이 세상에 적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존 방식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저께 오랫동안 대기업에 다니다 명퇴를 하고 식당을 하는 50대 중반의 남자 분과 술잔을 나눴다.

짙은 허무감이 몰려온단다.

세상에 잘 적응하여 지금까지 잘 살아남았는데.

니체는 우리에게 ‘지식의 계보’를 알라고 한다.

지식, 진리라고 하는 것들의 뿌리를 파헤쳐 가면 그것들은 결국 패러다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패러다임은 누가 만든 것인가?

우리는 누구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인가?

‘과학’이라는 안개는 우리의 시야를 뿌옇게 가린다.

TV에서는 노인 인구비율이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한탄을 한다.

우리에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안고 살아가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