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와 김원봉

                                                                                                                                     산백 박 희 용

 

 

 김정일 시대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북한의 대남정책을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이번 장성택이 처형 사건에서 보듯이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서는 북한의 정책 방향을 예측하기가 매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특히 처형 결정문에서 언급한 나진항 50년 임대와 석탄 등 지하자원 헐값 매각 문제는 지금까지 북한을 그런대로 통제한다고 할 수 있던 중국의 대북 영향력에 직결되는 문제여서 향후 한반도 열전화의 임계점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선군노선을 주장하는 군부 강경파와 장성택을 중심으로 한 노동당 계열의 친중파 간에 노선 갈등에서 군부 강경파가 확실하게 승리함으로써 김정일 시대의 균형 외교 노선이 선군노선 쪽으로 휘게 되었다. 여기에다가 서른 살 혈기방장한 영도자 김정은의 충동성과 즉흥성이 발동하여 대남 정책이 비합리적, 소위 혁명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오리무중, 시계가 극히 불량한 협곡 속에서 언제 어디에서 돌발 사태가 터질지 조마조마한 상황이 적어도 수년 간 계속 될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위급 상황이 계속 될수록 그에 대응해야 하는 우리 정부의 노력과 인고도 막심하지만 우리 국민들의 일상이 고달플 수밖에 없다.

 오늘의 상황을 역사적 결과로 본다면, 남북의 상황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도록 한 원인이 무엇이며 원초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분명히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 성찰의 하나로, 해방 공간에서 북쪽을 선택한 많은 유명 인사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홍명희와 김원봉 두 사람을 중심으로 그들 선택의 후과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벽초 홍명희의 삶은 1949년을 분수령으로 해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일제시대인 청년기부터 화요회 등 좌익 활동과 임꺽정으로 대표되는 민중문학관을 견지함으로써 좌익문학가로서의 위치를 뚜렷이 했으며, 『임꺽정』을 발표하여 현대문학사에서 민중소설문학의 실체를 처음으로 연 소설가, 문필가로서의 삶을 뚜렷이 역사에 각인했다. 1949년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북한 체제를 선택해 북한에 잔류한 이후 육이오 전쟁 시기부터 1968년 사망할 때까지인 후기엔 북한 부수상 등 고위직을 역임함으로써 좌익정치인으로서의 삶을 뚜렷이 했다.

 북한에서 그가 이룩한 문학적, 정치적 성과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남한에서는 수십 년 동안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 민족문학인으로서의 전기의 삶은 칭송을 받지만, 북한 고위 정치가로서의 후기의 삶은 우리 민족분단사와 바로 연결되기 때문에 보수우익으로부터 배척 내지 거부의 대상이 된다. 그러다가 몇 년 번부터 그의 문학에 대한 조명이 문단 일각에서 조심스레 제기되다가 그의 고향인 충북 괴산에서 홍명희 문학제가 십 년 여 계속해서 열리면서 차츰 대중성을 갖게 되었다.

 벽초 홍명희를 ‘조선의 길’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홍명희가 과연 ‘조선의 길’일까 하는 점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적어도 ‘조선의 길’이란 말에서 먼저 확실하게 정의 되어야 할 말은 ‘조선’이다. 여기서 쓴 ‘조선’이란 말이 북한체제 국가 이름을 의미한다면, ‘조선의 길’에 대하여 남한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필자로서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조선’이란 말이 1910년 경술년까지 이 땅 화려강산에 존재했던 나라 이름이라면, 또 화려강산에 살고 있는 인민들을 지칭하는 말이라면 ‘조선의 길’은 벽초 홍명희에게 붙이는 헌사로선 마땅하지 않다. 백범 선생과 함께 활동할 때까지의 홍명희는 좌익 민족주의자였지만 백범과 결별하고 북한에 남으면서 욱이오 전쟁 개전을 결정할 권력층인 부수상 직위를 장기간 유지함으로써 이미 그는 좌익민족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를 빙자한 수령전제 왕조의 하수인이 되고 만 것이다. 홍명희 그는 동족상쟁을 일으킨 원초적 책임의 일부분을 운명적으로 짊어지고 있으므로, 또 이후에는 18년 동안 북한체제를 떠받드는 기둥 역할을 함으로써 남과 북의 모든 인민들을 함께 지칭할 때 사용하는 ‘조선’이란 말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해방공간 이후 60년이 지났어도 아직 이데올로기 싸움은 현재진행형이다. 박영희가 십여 년 전에 재조명 되었고 요즈음은 홍명희뿐만 아니라 임화가 재조명 되고 있다. 좌익 문학가들의 공과를 논할 때 그들의 문학적 성과를 주요 잣대로 하느냐 아니면 정치적 활동을 잣대로 하느냐 하는 근본적 시각의 차이 때문에 문학적, 사회적, 정치적 평가가 정확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진보 쪽이든 보수 쪽이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그들의 문학적 작업과 정치적 활동이 화려강산 인민들, ‘조선 사람들’에게 이익과 평화를 주었는가 아니면 손해와 살육을 주었는가 하는 관점이다.

 진보적 관점을 가진 인사들에 의해 좌익문학가들이 과대평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고 보수적 관점을 가진 인사들에 의해 과소평가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데올로기 문제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한국 근대사의 빛과  어둠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것이다. 빛과 어둠을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한 어슴푸레한 상태에서 한국 현대사가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도 갈등과 투쟁이 치열하였고 끝내 매듭을 풀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갈등과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근대사에서 발생한 빛과 어둠에 대한 명료한 정리가 언젠가 이루어진다면, 어슴푸레한 상태가 걷히고 사물이 분명히 모습을 드러낸다면, 역사적 인물과 사건들의 실체가 드러난다면 수십 년 동안 대결해온 좌익과 우익의 공과가 확실하게 밝혀질 것이다.

 결국 좌익과 우익이란 역사적 실체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의미한다. 그러한 관점의 차이가 이론의 차원을 벗어나 현실 생활에 이입 실천됨으로써 우리 현대사가 비극이 되고 말았다. 많은 좌익문학가들이 현장성과 실제성을 강조하며 이론투쟁보다는 실천투쟁 쪽으로 몰려갔다. 그러다보니 문학작품은 이데올로기 선전에 쓰이는 언어도구가 되어 문학성과 예술성은 증발하고 말았다. 문학성과 예술성이 증발된 문학은 이미 문학이 아니고 그것을 남발한 투사들은 어디까지나 정치가이지 문학인이 아니다. 홍명희, 박영희, 임화 등 좌익문학가들이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젊은 시절에 잠시 반짝 빛내고는 문학작품을 이데올로기 선전을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좌익정치가가 된 것은 민족문학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참으로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임꺽정』 한 편의 소설을 남김으로써 홍명희는 민족소설사에 큰 이름을 남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후의 그의 삶의 행적은 화려강산 남부에 사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는 것도 분명하다. 김구 선생은 죽음으로써 역사에 큰 이름을 나겼다. 홍명희 그가 북한을 선택했으면 고위직을 하지 말고 초야에 묻혀 민족소설을 계속 썼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한을 선택하기에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남한에 돌아와 학계나 문학계에서 활동하였다면 우리민족사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임꺽정』 소설에 맥맥이 흐르는 혁명의 불길은 홍명희 바로 그의 것이었고 그는 그 불길을 북한에서 현실화했다. 충청도 양반 출신이면서도 민중의 고통을 대변하고 시대를 혁명하려는 그의 불길은 북한에서 활활 타올랐으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김씨왕조 세습독재의 밑거름이요 기둥이 되고만 것은 홍명희나 북한 권력자들의 관점에선 충성일지 모르지만 화려강산 전체적으로 보면, 아니 인구가 훨씬 많은 남한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엄연한 역사적 과오가 아닐 수 없다.

또한 2013년 겨울 현재를 보면, 북한에서 김정은이가 고모부인 장성택을 잔인하게 처형하는 정변이 발생하여 한반도 전체가 극심한 위험 상황에 빠져버렸다. 결과론적으로 말해, 홍명희, 박헌영, 김원봉, 임화, 이원조, 백남운 등 월북 유명인사들이 이룩하고자 했던 이상국가가, 한국전쟁이란 동족상잔만 일으켜 수백만이 살상당하도록 하고, 이후 북한에서 숙청된 수천수만의 피를 먹으며 자란 김일성 왕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그들의 무지가, 헛짓이, 착각이, 오류가 얼마나 한반도 역사에 막심한 과오를 끼쳤는지 후세의 사가들이 곧은 붓으로 상세하게 기록할 것이고 학생들은 그들의 이름을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달아 만고의 역도 명단으로 암기할 것이다.   

  

 지식인이란 다양한 지식, 우수한 기억력과 판단력을 가진 고급의 지적 존재이다. 그래서 한 시대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지식인의 반열에 드는 것은 아니다. 대중이 갖고 있는 보편성이란 사물과 현상에 대한 표피적인 관찰과 인식을 의미한다. 물론 역사를 추동하고 이어가는 동력은 보편성이지만 역사가 어디로 굴러가야 올바르게 굴러간다고 할 수 있는가하는 점은 지식인들의 몫이다. 지식인이란 대중이 갖는 역사적 보편성이 제대로 형성되도록 하는 예지성을 갖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 예지성이 이론의 영역에 머물면 사상가이지만 이론을 넘어서 현실세계 혁명 추구에까지 이르면 혁명실천가가 된다.  그 예지성이 작품 속에 녹아들면 문학가이지만 무기로서의 문학을  제련하는데 쓰인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닌 사회운동가, 혁명 운동가인 것이다.

 그러한 예지성은 좌익이든 우익이든 모든 문학가들이 갖고 있는 우수한 자질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좌익과 우익이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가하면 바로 아집에 근거한 지적 오만 때문이다.

배울 만큼 배우고 알 만큼 안다고 자부하는 지식인은 자기 논리에, 자기 사상의 성에 견고한 방어벽을 설치하고 난 다음 가능한 한 다른 지식인들의 성을 점령하려고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와 가족의 의식주 생활이 안전하고 풍요로움을 삶의 최종 목표로 하지만 지식인들은 생물적인 일상의 삶보다는 정신적으로 특수한 삶을 희구하기 때문에 자기 사상에 대한 고집이 대단하다. 지식인들은 물질 소유와 몸의 안락을 사상하면서까지 자기 정신세계의 완성을 추구한다. 그러니 일단 의식에 굳게 형성된 사상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자기 사상을 부정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사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인은 절대로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설혹 문제점이 발견되더라도 새로운 논리를 자가 보충하면서 자기 사상을 키워나간다. 개인적 지적 오만이 세력을 얻어 집단적, 사회적 오만이 되면 운동성을 갖게 된다. 운동성을 가진 집단, 사회적 오만은 이윽고 세상을 바꾸기 위한 혁명으로 발전한다. 혁명으로 발전한 사회적 오만은 자기 수정력, 통제력을 상실하여 갖가지 파열음을 내면서도 소기의 목표를 향하여 멧돼지처럼 돌진한다.  

 초기엔 순수한 문학적 관점에서 출발하였던 개인적 오만도 혁명이란 굉음 속에 휩싸이면서 개성을 상실하고 집단성에 물들게 된다. 그 때부턴 문학성이 아니라 운동성, 혁명성이 주류가 되면서 문학은 완전히 탈락하게 된다.

 가장 부드러운 지성과 감성이 문학의 본질일진데 가장 견고한 신념과 사상만이 횡행한다면 이미 문학은 사라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좌익이든 우익이든 자기 사상을 현실에 지나치게 투사하고자 집착한 지식인들에게서 공통으로 볼 수 있다.

 적어도 문학가들에게 있어서 좌익이나 우익이란 말은 성립되어선 안 된다. 말하기 쉬워서 중도가 아니라, 제대로 된 문학가라면 좌익과 우익이란 사회, 정치적 스펙트럼을 한 눈 안에 볼 수 있어야 한다. 좌 우 어느 한 쪽에서 보면 가까운 것은 크게 보이고 먼 것은 작게, 소홀히 보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일제시대와 이후 해방공간에서 좌와 우 어느 한쪽에 경도되어 문학 작품을 쓰고 사회, 정치적 활동을 전개한 사람들은 역사에 역행한 원죄를 걸머지고 있다. 

 문학이 아무리 사회적 현실을 반영함이 그 본연이라지만 문학이 어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유효하게 쓰이는 선전 도구가 될 수 있는가. 물론 시대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불관언한 자세로 음풍농월 하고 있는 것은 비겁임이 분명하지만, 반드시 모든 문학이 시대적 고통 해소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은 교조적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일제시대에 유명세를 탐하여 친일문학을 한 작가들은 비겁의 차원이 아니라  민족반역의 차원이기 때문에 문학성이니 사회성이니 시대성이니 하면서 언급할 가치가 전혀 없다.       

 

 밀양 출신인 김원봉과 윤세주로 대표되는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항일무력투쟁사는 우리 민족사에 영원히 남을 장한 일이다.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으로 한 시대 의열투쟁을 이끌었고 윤세주는 상해임정 쪽으로 기운 김원봉과 헤어져 의열단 활동을 마감한 후 조선의용대원으로 항일 전선의 최선봉에 섰다.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이 이끈 팔로군이 정강산에서 토벌군인 장개석 군에게 포위당하여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윤세주가 자기 목숨을 던져 그들의 활로를 타개해주었다. 그 공을 잊지 않은 팔로군은 나중에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다음 정강산 전투 현장에 윤세주의 공로비를 세웠다고 한다.

 김일성 왕조가 70년이 되어간다. 해방 전까지의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공이 과소평가 되어선 안 되겠지만, 김원봉과 윤세주의 의열단, 조선의용대 활동에 비하면 그 비중이 약하다. 항일 현장성만 놓고 비교하더라도, 김원봉과 윤세주는 광복 때까지 항일 현장인 대륙에 있었지만 김일성은 1940년부터 5년 간 안전지대인 연해주에 있었다. 만주에서의 동북항일연군의 활약상이 대단했지만 1940년 이후엔 거의 소멸되었다. 또, 항일 전투역량과 전과 면만 놓고 비교하더라도, 윤세주, 무정 등의 지도자가 이끈 조선의용대는 수만 병력으로서 1945년 8월까지 여러 차례 일본군과 정규전을 펼쳐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지만, 김일성이 이끈 빨치산은 1940년까지 소규모 유격전을 펼쳐 조선의용대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전과를 거두었다. 전공만을 놓고 따진다면 조선의용대 계열이 북한 지역의 대표 세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연해주에서 소련군의 신임을 받은 김일성 계열이 북한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

 반세기가 지난 오늘의 관점으로 볼 때 가장 안타까운 점은 해방공간에서 김원봉이 극우 세력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타의에 의해 삼팔선을 넘어 북행을 한 사실이다. 해방 후 곧바로 북으로 안 가고 남쪽으로 귀국한 김원봉이 서울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고 고향 밀양에서는 인산인해를 이룬 환영객들의 영접을 받았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김원봉은 고향인 남쪽에서 정치인이 되려고 계획했지 북한체제를 추종하는 극좌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테러리즘이지만 식민지 백성들로 보면 속 시원한 쾌거인 의열단의 눈부신 활동을 이끌었고, 30년대 중반 이후엔 우익 위주의 상해임시정부와 좌익 무력인 조선의용대의 연결고리였던 김원봉이 결국 월북함으로써, 그것도 북에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권력 상층부에 오른 것이 아니라 그의 위명을 견제하는 소련 사대주의 세력들에 의해 숙청됨으로써, 그의 고향인 남한에서는 반국가, 반체제범이 되어 그가 이룬 빛나는 항일투쟁 업적이 어둠 속에 묻히고 말았고, 북한에서는 민족사보다 권력을 선택한 자들에 의해 소외되고 잊혀진 것은 김원봉 그의 개인적인 운명이기도 하지만, 멀리는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 누적된 구조적 사회모순과 인간정신의 황폐화가 깊이 곪다가 드디어 20세기 벽두에 화산처럼 폭발하기 시작하여 반세기 동안 고름과 피가 흘러내린 우리 민족의 운명이기도 하다

 독립국이든 식민지든 한 나라, 한 민족이 가는 길이 문과 무의 조화라면, 문은 상해임정 등의 우익 독립운동 단체가 주류였고 무는 좌익 조선의용대가 주류였다. 그 무력이 독립된 조국, 통일된 조국에 고스란히 들어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고 북한의 무력이 된 것은 민족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무정 장군이 이끈 수만의 조선의용대가 압록강 도강을 소련군으로부터 저지당하여 무정 장군 이하 간부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것은, 남쪽에서 김구 선생 등 상해임정 요인들이 미군의 저지를 당하여 결국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 것과 똑같다. 이것은 민족의 해방이 자력이 아니라 타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증명해주는 대표적 좌절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시초가 어긋났기에 해방 이후 남북의 현대사가 비틀어지게 되어 지금 현재까지 제살 제가 깎아먹는 소모전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남쪽에선 친일파 기득권 세력이 잔명을 보존하더니 불과 수 년 만에 기세등등하여 항일 독립 운동가를 좌익으로 몰아 탄압하고 위해를 가한 것도 비극이지만, 북쪽에선 항일전선의 전사였던 조선의용대원들이 북한 인민군의 중추가 되어 1950년 6월 남침전쟁의 주력이 된 것은 더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용대의 지휘 장군, 간부 군관들과 전사들, 대륙의 화북과 북만주 전선에서 눈보라를 헤치며 일본군과 전투를 할 땐 분명 꿈에서라도 장래에 남쪽의 동족을 사살하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꿈에서라도 내가 흘린 땀과 눈물, 피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란 위장막 아래 장치된 세습왕조 건설을 위한 밑거름이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북풍한설을 이겨내고 해마다 봄이면 새싹이 파릇파릇 돋아나듯이 어느 누구의 정신이나 고유성과 자아의식을 가지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항일전선에 헌신한 열사들의 의지를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이 땅의 무인이라면 다시는 동족상쟁의 전선에 타의에 의해 내몰리진 않으리라 맹세해야 한다. 그 선열들이 무엇을 위해 항일전선에서 목숨을 바쳤는지 안다면, 진실로 삼천리 화려강산을 민족을 위한 길이 어느 것인지 나름대로 분별해야만 한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다지만, 양식 있는 민족적 좌익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소련을 호가호위하는 사대주의자들의 정략을 극복하고 북한의 무력이 되었다면 최소한 육이오는 없었을 것이다. 한 시절 민족 유일 무력인 조선의용대를 호령하던 무정 장군이 그만 날개 꺾인 독수리가 되어 겨우 인민군 사단장에 자족하곤 남침전쟁의 도구로 쓰이고 말았다니, 그의 용맹은 선천적이나 그의 역사의식은 선천적이지 못했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반추해볼 때, 대의를 위해 한 몸을 던질 결기로 가득 찬 열혈남아들의 용맹이 민족과 민중을 위한 바른 길에 쓰여 지도록 하는 역사의식의 함양과 길 터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역사에선 몸을 쓰는 용맹한 실천가들의 영역이 있고 정신을 쓰는 침착한 이론가들의 영역이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해방공간에서 조선의용대 이론가들의 영역이 김일성을 조종한 러시안 이론가들의 영역보다 더 넓지 못하였기에 실패한 것이라고 정리 할 수 있다.

 시간이 약이라더니, 그 치열했던 민족 운명의 폭발과 분출도 이젠 반세기가 지나니 잦아들고 상처 위에는 커다란 딱지가 덮였다. 남과 북의 생각 있는 인사라면 어는 누구도 그 상처 딱지를 다시 떼고 싶지 않을 것이다. 상처 딱지가 자연스레 떨어지고 뽀오얀 새살이 돋아난 걸 보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때가 되어야만, 지금은 고향 박물관에서 해방공간 치열했던 이데올로기 차원과 국가권력 관계를 떠나 역사적 관점에서만 대접받고 있는 김원봉과 윤세주 등 밀양 출신의 열혈남아들이 이룬 항일공로가 비로소 청천백일 아래 후세들에게 환하게 읽혀질 것이다.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장성택이 숙청을 보며, 이참에 북한 정권의 본질을 분명하게 인식한 국민들이 많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가진 역사적 정당성 때문에 북한을 지지하고 좌익노선을 지지한 사람들도(소위 우익에서 공격용어로 사용하는 종북주의자들) 이번에 분명히 자각 하였을 것이다. 소득 격차가 38배로 벌어진 2013년의 한반도의 남과 북의 상황이 바로 역사적 결과가 아니겠는가.

 우리 남한에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 시대가 있었지만 수십 수백 수천 명을 한꺼번에 도륙하는 참혹한 처형은 없었다. 그러나 북한은 남로당 숙청, 연안파와 소련파 숙청, 갑산파 숙청, 심화조 사건 등에서 수천수만 명을 잔인하게 처형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나마 발전한 것은 정치적 반대자들도 처형하지 않고 사회 속에서 나름대로 살도록 놔두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북한이 저 지경이 되도록 피폐한 이유는 세습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처형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치적 반대자들과 그 가족들이 모조리 제거됨으로써 북한 사회가 단순화 되고 인재가 부족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 역적으로 몰려 3족이 구몰되어도 겨우 살아남은 자들은 깊은 산중에 들어가 숨어살면서 후일을 도모할 수 있었지만, 북한에서는 한번 숙청되면 모조리 처형되고, 목숨을 구한 자도 즉각 수용소에 구금되어, 설혹 살아남은 자라 할지라도 어디 도망가서 살 반 평의 공간조차 없으니 사회적 생산력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결국 북한 사회에는 순종형 인간들만 남게 된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반, 민족의 반이 단순화 되어 버리는 거다.

 물론 공식적으로 경쟁국이자 적국인 북한에서 처형된 인사들이 많을수록 우리에게 유리한 측면도 있지만, 그래도 한반도 안에서 수천 년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민족적 차원에서 보면 막대한 인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강제하는 권력에 순종하는 백 명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저항하는 그들 한 명 한 명의 자질이 우수한 것은 사실이므로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서가 아니라 미래를 도모하는 통합적 관점에서 본다면 민족의 총체적 역량의 약화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한 시대 잘난 인물이었던 홍명희와 김원봉. 그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지도 벌써 두 세대 너머 지났다. 그들의 선택과 그들이 뿌린 원인이 어떻게 되었는지 2013년의 12월이 증명하고 있다. 그들은 부귀영화를 계속 누리지 못하고 중간에 숙청되었으니, 그들이 바라는 나라가 김씨왕조는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떤 나라를 꿈꾸었을까.

 

 

                                                                            2013년 12월 23일 열락연재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