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웹진]문학마실~...115호...
   2020년 01월

  1. 내일을 여는 창
  2. 소설
  3. 수필
  4. 권서각의 변방서사
  5. 이달의 작가
  6. 동인지를 엿보다
  7. 작품집에 스며들다
  8. 시와 거닐다
  9. 사진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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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톨스토이) /고석근 file
편집자
1046 2015-10-1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톨스토이) 게 이시카와 다쿠보쿠 동해 바다 작은 섬 갯바위의 흰 백사장 나 눈물에 젖어 게와 놀았다네. 우리의 대표 시인 백석이 흠모했던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 그는 자살하려고 동해 바닷가에 나갔다가 흰 모래밭 위의 작은 바닷게 한 마리에 눈이 팔려 그 게와 놀다가 자살할 마음도 잊었다고 한다. 우리는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시도는 매번 실패하고 만다. 우리의 삶은 ‘반복’이다. 어제 떠오른 태양이 오늘도 떠오르고 내일도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태양이 떠오를 때마다 감탄을 한다. 그들에게는 매번 다른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에게는 미세하게 느껴지는 그 차이가 태산처럼 커다랗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매순간이 감동적이다. 그들은 ‘반복’이 아니라 매번 ‘신비로운 차이’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반복’ 속에서 ‘차이’를 발견해야 한다(들뢰즈). 하지만 ‘의미’에 길들여진 우리는 삶에서 ‘차이’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지루한 반복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 더욱더 몸부림을 친다. 하지만 그렇게 부여한 의미가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으랴. 그것들은 우리의 정신을 잠시 마비시키는 진통제일 뿐이다. 진통제의 약효가 떨어질 때 쯤 우리는 폭발한다. 살인을 하고, 자살을 하고, 사고가 나고, 질병에 걸린다. 며칠 전에도 한 젊은이가 자살을 했다. 외고와 명문대를 나온 고시생. 그렇게도 착했던 아들이 유서 한 장 없이 자살했다고 부모가 한탄을 했단다. ‘의미’에 지친 그가 평생 ‘의미’를 부여해온 부모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우리는 온갖 고상한 정신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이다(괴테).  
184 강은 흘러야 한다/권서각 file
편집자
973 2015-09-24
강은 흘러야 한다 내성천은 경북 봉화에서 발원하여 영주 무섬 마을과 예천 회룡포를 거쳐 문경에서 낙동강과 합류하는 강이다.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모래가 흐르는 강이다. 모래는 수질을 정화하는 기능을 한다. 모든 상수도 물은 모래로 몇 번 걸러서 소독 처리하여 공급된다. 내성천 모래는 수천 년 동안 낙동강 물을 정화해서 바다로 흘려보내는 일을 담당해 왔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내성천에는 흰수마자와 수달 등 희귀 동식물이 서식하는 곳으로 학계에서는 생태학적으로도 그 보존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간다. 내성천 모래는 결국 낙동강을 따라 바다로 간다. 남해안 해수욕장과 동해안 해수욕장의 대부분의 모래는 내성천의 모래다. 해류가 남해에서 동해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 내성천의 흐름을 막는 영주 댐이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르렀다. 며칠 전 4대강 대책위원장인 이미경 의원과 함께 처참하게 변해버린 내성천과 영주댐을 둘러보았다. 담수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댐 아래쪽 강은 모래는 사라지고 풀과 버드나무가 무성한 황무지가 되어 있었다. 모래가 유입되지 않으니 기존의 모래가 쓸려 내려가 곳곳의 다리는 다리발이 드러나도록 강이 낮아졌다. 물고기들도 볼 수 없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눈에 선하다. 대므로 막힌 강물엔 녹조가 생길 것이며 바다에는 녹조가 생길 것이다. 흘러야 강이 흐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다도 장마철에 강이 흘려보낸 황톳물로 정화된다. 곳곳에 지어진 댐으로 인해 큰비가 내려도 황토물이 흐르지 않으니 바다에는 적조가 생길 수박에 없다. 남해안 양식장의 물고기 폐사도 적조로 말미암은 것이다. 해수욕장의 모래는 사라질 것이며 물고기 양식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모두가 흘러야 할 강을 흐르지 못하게 한 대가일 것이다. 이른바 선진국에서는 지었던 댐을 허물고 있다. 우리는 강마다 댐을 막아 물을 가두고 있다. 설악산에는 케이블카를 만든다고 한다. 소백산에도 케이블카를 만든다고 한다. 사람들을 무더기로 산에 올려 그 위에서 먹고 마시게 한다는 것이다. 케이블카를 놓자는 사람들은 유럽의 케이블카를 이야기한다. 유럽의 케이블카가 설치된 산은 눈으로 덮인 산이다. 그리고 그것이 설치된 것은 환경문제가 논의되기 전의 일이다. 지금 새로이 케이블카를 만드는 나라는 없다. 자연을 훼손하는 만큼 인간의 삶의 터전이 사라진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어버린 시대다. 그래서 우리는 4대강공사를 반대했고 영주댐을 반대했고 케이블카 설치도 반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댐 짓기와 케이블카 놓기로 우리의 강과 산에 몹쓸 짓을 하고 있다. 우리의 강과 산을 이명박그네 정권이 망치고 있다. 시민단체에서 아무리 토론을 하고 목소리를 높여도 막무가내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결국 그들은 하고자 하는 대로 하고 만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민주공화국이기를 포기하고, 하고자하는 것을 기어이 해내고 마는 저들을 어이한단 말인가? 결국 모든 결정권은 정권이 가지고 있다. 정권이 그들에게 있는 한 누구도 강산을 허무는 일을 막을 수 없다. 그래서 환경운동도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시인이 왜 정치를 이야기하느냐고 말한다. 정치는 우리의 삶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하는 조그만 행동도 정치와 무관 것은 없다. 시도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영주댐에 물이 차고 내성천이 물에 잠기면 소월의 이 노래도 함께 묻히고 말 것이다. 설사 노래가 남는다 해도 금모래가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글 권서각  
183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된다(노신) /고석근 file
편집자
1051 2015-09-15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길이 된다(노신) 음화 김언희 인형이 있었다 눕히면 눈을 감았다 치마를 들치고 사내아이들이 연필심으로 사타구니를 쿡쿡 찌르며 킬킬거릴 때 눈을 감고 미동도 않던 인형이 있었다 죽어, 죽어, 죽어, 책상 모서리에 패대기쳐지며 터진 뒤통수에서 지푸라기를 꺼내보이던 비명도 한 번 안 지르던 인형이 있었다 머리채를 끄잡혀 질질 끌려가며 희미하게 웃어보이던 걸레쪽처럼 칼질 된 얼굴이 있었다 쓰레기더미 위에서 제 몸이 불타 없어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둥근 눈이 ……있었다 한 중년 여인이 말했다. “어릴 적에 개구리 스무 마리를 한 줄로 매어 집에 가져왔었어요. 마당에 놓아두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다 죽어있더라고요.” 남에게는 치명적인 폭력이었는데 내게는 ‘장난’에 불과했던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 세상에는 상처 받은 사람들 천지다. 상처를 주었다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여기서 우리는 절망한다. “머리에 검은 털 난 짐승은 믿을 수 없어!” 하지만 여기에 바로 우리의 희망이 있다. 자신의 눈에 든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든 티끌은 훤히 보는 인간, 여기에 바로 우리의 희망이 있다. 민주주의를 잘 하면 된다. 우리는 남의 잘못은 귀신 같이 보는 눈이 있어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좋은 방법들도 잘 알고 있다. 민주적인 토론의 장만 잘 마련되면 좋은 방안들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 방안들이 나오면 우리 모두 함께 지키도록 하면 된다.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민주적인 시스템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에 대해 절망하지 말자. 우리에겐 길이 있다. 우리에겐 민주주의라는 희망의 길이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분노해야 할 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온갖 폭력들이 아니라 그런 폭력을 방지할 수 있는 민주적인 시스템의 건설을 가로막는 세력들이다. 이런 세력들의 장벽을 뚫고 길을 내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그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걸어가면 길이 난다.  
182 인성교육은 가능한가?/권서각 file
편집자
976 2015-08-26
인성교육은 가능한가? 올 7월 21일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이라는 것이 시행된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인성교육이란 말이 자주 들리더니 드디어 인성교육진흥법이라는 것이 제정되고 우리사회에 인성교육이라는 것이 시작될 모양이다. 그런데 인성교육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린다. 내 귀가 이상한 것인가? 인성은 사람의 성품을 가리키는 말이다. 영어로는 Human nature다. 영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성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사람의 고유한 성품이다. 사람의 성품을 과연 교육할 수 있는가?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인성을 교육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 법을 제정한 사람들은 아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니까 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어떤 통치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하면 된다. 정말 그럴까? 도덕, 혹은 윤리는 이미 우리 교육과정 속에 편성되어 있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덕목, 혹은 이건 옳고 이건 옳지 못하다는 가치에 대한 교육일 터이다. 도덕과 윤리는 교육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서고금에 인성을 교육한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권력자들은 인성을 교육하시겠다고 기세를 올리신다. 도덕과 윤리로는 부족한 점이 있으신 모양이다. 교육이란 또 무엇인가? 이 법을 제정한 사람들은 교육을 가르치는 일로 이해할 것 같다. 오래 교육에 종사해 온 경험으로 말하는데 교육은 가르침이 아니다. 명령도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일이 교육이요, 교육자란 피교육자가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인성교육을 말하는 사람들은 교육을 무슨 명령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좋은 성품을 가지라고 가르치면 좋은 성품을 가진 국민이 길러진다고 믿는 것 같다. 한술 더 떠서 인성교육진흥법 제 1조에는 건전하고 올바른 인성을 갖춘 국민을 육성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인성교육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게 된 것은 학교폭력, 청소년 범죄 등의 사회문제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부터인 것 같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인성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OECD 국가 가운데 청소년 자살률 1위 등 온갖 불미스러운 일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묘안이 인성교육에 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우리사회의 문제는 인성교육이 없어서가 아니다. 비민주적이고 부도덕한 사회 시스템 때문이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이 맑다.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교과목 속에 진리가 있다. 진리를 탐구하면서 올바른 태도에 대한 의지가 생긴다. 아무리 노력해도 최저임금도 받을 수 없는 사회, 끊임없이 경쟁을 부추기고 서열화하는 교육제도, 그것을 만든 사회 어른들에게 문제가 있지 청소년에게 문제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 법을 만든 권력자들에게 있다. 당신들만 정신 차리면 만사가 순조로울 것이다. 당신들이 인성교육을 말할 때 내 눈에는 조폭 팔뚝에 새겨진 ‘차카게 살자.’라는 문신이 어른거린다. 인성교육이라는 것이 시행될 경우 떠오르는 그림이 또 하나 있다. 예비군 훈련 받으러 가면 정신 교육한다면서 멀쩡한 사람 앉혀 놓고 덜떨어진 소리하던 강사들 말이다. 배워할 사람이 강단에 서서 가르치는 그 가르침을 받아야 했던 악몽이 떠오른다. 온갖 덜떨어진 꼴통들이 인성 교육하겠다고 나서는 그림이 떠오른다. 나의 인성을 교육할 강사님들은 누구일까?  
181 유희적 인간(호이징가)고석근 file
편집자
1104 2015-08-16
유희적 인간(호이징가) 실업 여림 즐거운 나날이었다 가끔 공원에서 비둘기떼와 낮술을 마시기도 하고 정오 무렵 비둘기떼가 역으로 교회로 가방을 챙겨 떠나고 나면 나는 오후 내내 순환선 열차에 앉아 고개를 꾸벅이며 제자리걸음을 했다 가고 싶은 곳들이 많았다 산으로도 가고 강으로도 가고 아버지 산소 앞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저녁이면 친구들을 만나 여느 날의 퇴근길처럼 포장마차에 들러 하루분의 끼니를 해결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아름다웠다 아내와 아이들의 성적 문제로 조금 실랑이질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다음날 해야 할 일들로 가슴이 벅차 오히려 잠을 설쳐야 했다 이력서를 쓰기에도 이력이 난 나이 출근길마다 나는 호출기에 메시지를 담는다 ‘지금 나의 삶은 부재중이오니 희망을 알려주시면 어디로든 곧장 달려가겠습니다’ 일하지 않는 청년 백수들이 많다. 노래방을 운영하시는 지인은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노래방에서 알바를 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야! 대학을 졸업하고서 노래방에서 알바를 하냐?” 그 분은 공고를 나와 ㅅ대기업에서 일하다 10여 년 전에 명퇴를 하셨다. ‘청년 실업’의 문제는 정말이지 너무나 커다란 사회문제다. 하지만 나는 ‘사람은 성인이 되면 당연히 일을 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는 반대한다. 동물 중에서 일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나는 일하지 않는 인간을 ‘비정상’으로 보는 인간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인간은 원래 거의 일을 하지 않았어. 원시인들은 하루에 고작 4시간도 일하지 않았다고 해. 그런데 물질문명이 이렇게도 고도로 발전한 지금 왜 이렇게 일을 많이 해야 해?” 나는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인간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그런 주장을 하려면 이 세상을 다시 원시사회로 돌려 놔! 그때는 일을 거의 안 해도 잘 먹고 살 수 있었거든. 그런 사회로 돌려놓기 싫으면 당신들은 이런 세상의 혜택을 다 누리며 사니까 우리처럼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잘 먹고 살 수 있도록 돈을 충분히 내 놔!” 나도 젊을 때는 ‘인간은 당연히 일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나는 ‘일하는 동물’을 견딜 수 없었다. 30대 중반, 과감히 직장을 그만두고 나를 ‘유희적 인간’으로 바꾸었다. 그러다 나는 치열하게 놀며 나만의 놀이를 발견했다. 글쓰기와 강의였다. 나는 글을 쓸 때와 강의를 할 때 신난다. 정말이지 살아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놀아도 적지만 돈이 들어온다. 물론 나는 내가 ‘노는 동물’이 된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노는 동물’이 되는 게 불가능할까? 모든 인간이 ‘일하는 동물’이 되어 한평생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사는 이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인가? 그렇게 살며 온갖 정신 질환, 자살, 사고로 신음하는 이 인간 세상이 도대체 제대로 된 세상인가? 나는 청년 백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너희들을 일벌레로 길러놓고는 일자리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이 세상의 기성세대로서 참으로 미안하다. 하지만 절대로 기죽지 말거라. 인간은 원래 일하는 존재가 아니란다. 한평생 놀아야 한단다. 신나게 놀면서 살 수 있어야 제대로 된 인간이 될 수 있단다.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너희들은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단다. 그런 세상을 우리 함께 만들어 가자. 우리 함께 손을 맞잡으면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겠니?”  
180 향원(鄕原)/권서각 file
편집자
1070 2015-07-23
향원(鄕原) 공자는 사람을 4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그 첫째가 군자(君子)다. 중용(中庸)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을 이른다. 둘째가 광자(狂者)다. 뜻은 높으나 실천이 그에 미치지 못한 자를 이른다. 셋째가 견자(狷者)다. 광자에는 미치지 못하나 원칙을 지키는 사람을 이른다. 마지막이 향원(鄕原)이다. 그 마을에서 별다른 허물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이른다. 공자는 향원을 증오했다. 허물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일진대 그는 왜 향원을 미워했을까? 허물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기 때문이다. 자기 철학 없이 강한 편에 서기 때문에 허물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득을 좇아 허물을 감추는 것은 겉으로는 원만하게 보이지만 실은 사이비(似而非)다. 공자는 이들을 덕을 헤치는 자라 했다. 공자는 사회에 악을 끼치는 범죄자보다도 사회에 특별한 해악을 끼치지 않는 향원을 더 미워했을까? 드러나게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공자가 아니더라도 미워하고 징계할 사람이 많다. 허물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사람은 어떤 사회에서라도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저절로 그 사회에서 운신의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허물이 드러나는 자가 아니라 허물이 드러나지 않는 자다. 공자가 추구한 최고의 가치는 중용이다. 중용은 중간과는 엄연히 구별된다. 서양식으로 말하면 변증법적 결론에 가까운 개념이다. 작년에 우리나라에 오신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사회적 약자를 찾으시고 약자의 편에서 행동하신 것이 중용에 가까운 행보일 터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약자를 편드는 듯이 보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정의에 가까운 길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민주주의가 심하게 훼손되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건이 여당 원내대표의 사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국회에서 가결한 ‘국회법 개정안’은 폐기되었고 이를 추진했던 여당 원내대표는 대통령의 뜻에 따라 사퇴 되었다. 유승민 의원은 사퇴의 변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1조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폭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공화국에서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들이 일어나도 우리사회는 매우 평화롭다. 왜 이렇게 평화로울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통치자, 그리고 통치자의 뜻에 따라 자신이 가결한 법안도 스스로 철회하고 동료 의원을 내치는 여당의원들을 누가 뽑았던가? 우리 스스로 그런 사람들을 우리의 대표자로 뽑았으니 할 말이 없다. 물론 모든 유권자들이 민주공화국에 반하는 사람들에게 투표한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대개 향원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사회에는 향원의 수효가 너무 많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도덕적이지만 정치적 선택을 할 때는 늘 중용의 가치 쪽보다는 강자의 편에 서는 향원 말이다. 우리사회에는 공자가 혐오한 향원의 수효가 너무 많은 것 같다.  
179 민주주의여 만세 /고석근 file
편집자
1062 2015-07-10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 김지하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메르스 환자들이 자신의 행적을 숨기거나, "메르스를 퍼뜨리겠다"며 행패를 부리거나, 검사 결과를 기다리다가 병원을 도망쳐 나갔다는 기사를 읽었다. 왜 우리 사회가 이렇게 막장까지 가버렸을까? 공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시대 지도자들이 막장까지 가서 그렇다." 인간은 생명체니까 누구나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을 위해 먹어야 하고 자신을 위해 잠을 자야하고 자신을 위해 종족 번식을 해야 하니까. 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생겨난 '본성'이다. 인간 사회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무너져 버린다. 사랑은 생존을 위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심성이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우리 사회는 무섭다. 앞으로 메르소보다 더 강력한 바이러스가 침투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해결책은 '민주주의' 밖에 없다. 한 개인 개인은 이기적이지만 함께 모여 서로의 생각을 허심탄회하게 나누게 되면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사랑이 샘물처럼 솟아 나온다. 민주주의의 위대한 힘이다. 그렇게 모든 사회구성원의 마음을 모아가면 사람들 가슴에 사랑이 가득하게 된다. 어떤 위기가 와도 헤쳐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이 이런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가?'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사회의 내일이 두렵다. 하지만 긴 역사를 만들어가는 건 우리 민중들이다. 나는 막장까지 간 우리 보통 사람들을 믿는다. 우리는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많은 지혜를 배울 것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살 수 있다! 우리들 가슴 속에서 사랑의 샘물이 한 방울 한 방울 솟아날 것이다.  
178 통일대박/권서각 file
편집자
986 2015-06-25
통일대박 대통령께서 통일은 대박이라고 말씀하셨다고 감격하신 분이 여럿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통일대박이란 말이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이제는 시사용어가 되어버렸다. 귀에 매우 거슬리는 말이다. 왜 그런 것일까? 대박이란 말은 청소년들이 장난스럽게 쓰는 말이며 국가 통치자의 말로는 적절하지 못하다. 통일이라는 어휘 속에는 우리 민족의 70년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통일대박이란 말 속에는 통일의 결과만 제시되었을 뿐 방법이나 내용이 없다. 그냥 느닷없는 통일대박만 있다. 방법이 없으면 실현불가능이기에 껍데기뿐이다. 불가능인 것을 가능인 것처럼 하는 말은 거짓이다. 통일대박이라고 말해 놓고 통일을 위한 정책은 아무것도 없다. 이명박 정권 때 내려진 5.24조치는 이직도 풀리지 않고 있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북을 자극하는 성명을 내고 북은 온갖 험악한 말로 남을 공격하고 있다. 북이 가장 싫어하는 북을 비방하는 대북 풍선 날리기를 표현의 자유라며 용인하고 있다. 통일을 말하면서 실은 북과의 긴장관계를 고조시키고 있다. 남북교류의 조그만 희망인 개성공단마저 늘 위태롭기만 하다. 그러는 동안 나진 선봉 지역에는 중국 자본이 들어와 활발한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노래하고 통일대박을 외치지만 지금까지의 권력은 통일을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 광복 70주년이다. 만약 통일을 위해 70년 동안 노력했다면 지금쯤 통일에 조금은 가까이 와 있어야 옳을 것이다. 광복70주년인데 우리는 아직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북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이미 세계적으로 보편적 가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북은 3대 세습이라는 왕조시대의 유물이 아직 남아 있는 나라다. 틈만 나면 남을 향해 온갖 욕설로 적대적 감정을 드러낸다. 남과 북은 공히 갈등을 고조시켜 국민을 통제함으로써 그들의 체제를 유지하려 한다. 70년 동안에 10년은 통일에 대한 노력이 있긴 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이 그러했다. 이 시기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고, 개성공단이 세워지고, 끊어진 철로와 육로가 이어지고, 남북교류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거의 통일 가까이 간 시기였다. 통일이 무엇인가. 남북의 왕래가 자유로운 것이 통일 아닌가. 이 시기를 지금의 권력자들은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른다. 잃어버린 10년에 그들은 무엇을 잃었던가? 그들의 권력이 그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권력이지 통일이 아니었다. 왜 남과 북은 같은 민족인데 서로를 적대시하며 긴장관계를 지속하려 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 않는 이 수수께끼는 우리의 역사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역사학자들은 당파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 국가의 존망에 아랑곳하지 않는 행태의 연원을 노론 벽파에서 찾고 있다. 노론벽파는 사도세자를 죽인 일을 옳다고 했던 세력이다. 이들은 자기 당파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개혁가 정조에 대항해서 온갖 정치적 술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도 노론벽파라고 한다. 이 권력이 친일파로 이어지고 이승만은 친일 청산을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에게 권력을 주었다. 해방이 되었지만 친일 권력은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이승만의 독재에 항거한 4.19가 일어났지만 군사독재자가 나타나 4.19를 무력화시켰다. 노론벽파, 친일파, 이승만 독재,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권력의 공통점은 나라보다는 개인과 당파의 권력을 위하는 데 있다. 부도덕한 권력이 우리 근대사의 주류를 형상해 오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근대사에 대한 인식 없이는 오늘의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 근대사는 노론벽파, 친일파와 이승만 독재, 그리고 군사독재로 이어지는 부도덕의 흐름을 형성했고 이 부도덕의 흐름이 한국근대사의 주류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부도덕한 주류는 친일을 미화하고 이승만과 군사독재를 찬양하는 교학사 국사 교과서를 한사코 주장한다. 역사를 왜곡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의도로 읽을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이 부도덕한 주류의 흐름을 민족, 민중, 민주가 주류가 되는 흐름으로 바꿀 수 있을까? 우리의 다중은 오랜 부도덕의 주류에 길들여져 왔다. 우리 근대사의 모든 혁명은 부도덕한 세력에 의해 패배했다. 동학농민혁명도, 3.1운동도, 4.19. 혁명도, 5.18민주화 운동도 주류에 의해 좌절된 미완의 혁명이었다. 이런 패배의 역사 속에서 주류에 서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이 우리 민족 구성원 사이에 역병처럼 확산되었다. 그래서 주류는 옳고 비주류는 그르다는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었다. 그러기에 선거 때마다 부도덕한 세력에게 자기도 모르게 표를 던지는 어리석음이 되풀이되고 있다. 일찍이 노무현이 말했듯이 우리 어버이들은 자식에게 이렇게 말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제발 나서지 말라. 이제 우리 근대사에 대한 인식을 바르게 하고 우리 민족 구성원과 함께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부도덕의 흐름을 도덕의 흐름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야 한다. 부도덕한 권력에 항거했던 동학혁명의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 통일대박. 좋은 말이다. 통일이 되면 우리민족에게 대박인 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통일할 건대? 통일대박이라고 가볍게 말하는 사람은 사실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남북의 화해와 교류 없이 통일대박을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계층에서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분단체제가 지속되어야 부도덕한 기득권 세력은 자기들에 반하는 세력을 향해 종북과 좌빨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할 수 있다. 남북관계가 긴장되어야 권력에 반하는 민주세력을 국가보안법으로 억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들의 부도덕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177 타인 속에서 신은 나타난다(레비나스) /고석근 file
편집자
966 2015-06-19
타인 속에서 신은 나타난다(레비나스) 연기 브레히트 호숫가 나무들 사이에 조그만 집 한 채 그 지붕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이 연기가 없다면 집과 나무들과 호수가 얼마나 적막할 것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마구 휘젓고 다니는 ‘메르스’, 그는 사라진 후 앞으로 계속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점점 더 싫어하게 될 것이다. 아마 우리는 급기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바이러스를 옮기는 다른 인간 없이 살 수 있을까?’ 우리는 점점 로봇을 닮아갈 것이다. ‘아, 참 좋네. 이제 어떤 바이러스가 침투해도 끄떡없잖아.’ 로봇은 점점 진화하게 될 것이다. ‘인간을 닮아 참 불편한 게 많네. 괜히 생각을 해야 하고. 에너지를 항상 공급받아야 하고. 귀찮게 일도 해야 하고.’ 차츰 로봇은 돌멩이를 닮아갈 것이다. ‘아, 참 좋아. 이제 인간을 완전히 탈피했네.’ 돌멩이는 미소를 지으며 삭아갈 것이다. 언젠가는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폴폴폴 흩어져 갈 것이다. 영원히 고통 없는 세상으로.  
176 우문현답/권서각 file
편집자
924 2015-05-25
우문현답 안동 말 가운데 ‘보-ㅁ 모-니껴?’라는 것이 있다. ‘보면 모릅니까?’라는 뜻이다. 사람마다 습관적으로 자주 쓰는 말이 있다. 필자가 아는 어떤 안동 노인은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누가 무엇을 물으면 대개 ‘보-ㅁ 모-니껴?’라고 대답한다. 요즘 텔레비전에 여자 리포터가 등장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현장에서 주민과 인터뷰하는 장면에 대개 리포터가 등장한다. 행동과 말씨가 과장되고 애교가 지나치다. 그래서 거북함을 느낄 때가 많다. 가끔 들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묻는다. “지금 뭐하세요?” 나는 이 리포터들에게 안동 노인의 말을 돌려주고 싶다. “보-ㅁ 모-니껴?” 그리고 나의 졸시를 들려주고 싶다. 보면 모릅니까? 의 안동 말은 보-ㅁ 모-니껴? 보와 모를 강하게 발음한다. 아는 이는 알고 모르는 이는 모른다, 의 안동 말은 아-니는 아-고 모-니는 모-ㄴ다. 아와 모를 강하게 발음한다. 따라해 볼래요? 보-ㅁ 모-니껴? 아-니는 아-고 모-니는 모-ㄴ다. 입으로 여러 말 하는 것보다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 낫고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몸에 밴 말투다. 농사철 땀 흘리며 일하는데 양복 입은 면장님이 찾아와서 올해 농사는 어떻습니까? 하면 보-ㅁ 모-니껴? 하고 선거철 높으신 분이 재래시장 찾아와서 요즘 장사 잘 됩니까? 해도 보-ㅁ 모-니껴? 한다. 지을수록 밑지는 농사짓는다고 업신여김 당하고 애면글면 해도 펴지지 않는 살림살이 우리네 기막힌 사정을 아-니는 아-고 모-니는 모-ㄴ다, 는 것이다. - 권서각의 시 ‘보-ㅁ 모-니껴?’ 무심히 켠 텔레비전에서 안동의 어느 맛집을 소개하고 있었다. 가락국수로 이름난 시장의 허름한 맛집이다. 값도 싸고 맛이 좋아 손님이 만원이었다. 리포터가 예의 그 호들갑스런 말투로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었다. “가락국수 맛이 이렇게 좋은 비법이 무엇입니까?” 아주머니가 대답했다. “비법 없니더. 머리가 돌이래서 그래요. 이것밖에 할 줄 모르니더.” 참으로 우문현답이다. 모름지기 장인이란 오로지 하나의 목표에 모든 것을 걸고 기어코 뜻을 이루어 그 분야에 일인자가 된 사람을 이른다. 오로지 가락국수 하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한 아주머니의 정성과 노력이 그 현명한 대답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떤 일에 왕도가 없듯이 명품을 만드는 데 비법은 없다. 서울에서 내려와 소백산에 사는 선배가 있다. 며칠 전 그를 찾아가 곡차를 나누었다. 올해가 소백산에 온지 36년이 되는 해란다. 일제 36년과 연수가 같다고 했다. 대개 자급자족하고 돈 쓸 일은 가을에 송이 몇 송이 캐서 해결한다. 산에 오래 살아서 산을 닮은 사람이다. 영화 ‘국제사장’에 흥남철수가 나온다. 그도 영화의 주인공처럼 빅토리아호를 타고 남하했다고 한다. 워낙 과묵한 분이라 만난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빅토리아호 이야기는 그날 첨 들었다. 그래서 술이 꽐라되도록 마시고 급기야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까지 불렀다. 그가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기에 보았다. 리포터와 함께 산 중턱에 나란히 앉았다. 리포토가 물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무슨 생각을 하세요?” 그 특유의 더듬는 어법으로 대답했다. “머, 머, 아무 생각 없지. 머.” 사람이 대자연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우문현답이다. 글 권서각  
175 아빠를 부탁해/고석근 file
편집자
1077 2015-05-15
아빠를 부탁해 유괴 진은영 아주 어렸을 적, 혼자서 별들의 놀이터에 있을 때였다 그는 어디로부턴가 와서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끌고 갔다 내가 두려움에 떨며 처음 울음을 터뜨린 곳은 어느 낯선 집 차가운 요람 속이다 그의 말로 그는 세상에서 덧셈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다 수만 개의 돌을 쌓아 도시를 만들었다 수만 개의 물방울을 모아 저수지를 만들었다 수만 개의 불꽃은 타고 화성에도 다녀왔다 유괴범, 그에게는 덧셈의 가업을 이을 장자가 필요하다 유괴범, 그의 이름은 아버지다 유괴범, 그는 나를 좁은 철창에 가두었다 옛날을 생각하며 나는 눈물을 흘린다 동쪽 바다에 오른 발을 담그고 서쪽 바다에 왼발 담그고 당신 곁에서 바다 가득 물보라 일으키며 물장구치던 시절 쇠창살에 밤하늘 별들이 비친다 구름 사이로 나를 내려다보는 어머니 부드러운 빛의 슬픈 손가락이 내 입술을 어루만진다 한 중년 여인이 며칠 전에 돌아가신 친정아버지를 얘기하며 울먹인다. 21년 만에 관 속에 누워계신 해골이 되신 아버지 얼굴을 봤단다. “술만 드시면 어머니와 우리들에게 마구 폭력을 휘둘렀어요. 그래서 우리 자매들이 다 부부 사이가 안 좋은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좋은 아버지’는 없다는 것을. 흔히 자상하고 사랑을 듬뿍 준 아버지를 좋은 아버지로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이상적인 아버지상’ 때문에 힘들다. 머릿속에만 있는 그런 허상의 아버지 때문에 ‘나쁜 아버지’를 둔 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좋은 아버지를 가졌다고 하는 딸들을 잘 관찰해보자. 실상이 어떤지. 많은 경우에 딸들은 ‘귀여운 애완견’ ‘예쁜 인형’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한 인간의 본성을 깨우고 북돋워주는 것이다. 그래서 한 인간을 성숙하게 하여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다. ‘좋은 아버지들’이 이런 사랑을 주었는가? 어른이 되어서도 사랑을 듬뿍 준 아빠를 벗어나지 못한 ‘어른 아이들’, 언뜻 보면 이들은 행복하게 보인다. 그들은 미성숙한 아이들이라 항상 깔깔거리고 웃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속은 허하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항상 즐거운 것들을 찾아 불나비처럼 날아다닌다. 집에 오면 쓰러진다. 허무감에 진저리친다. 이 세상의 ‘나쁜 아버지’를 둔 모든 딸들은 알아야 한다. ‘좋은 아버지’는 없다는 것을. 모든 아버지는 ‘모계 사회의 딸들을 부계사회로 납치한 유괴범’이라는 것을. 임제 선사는 말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 ‘마음속에 머물고 있는 아버지’를 죽이고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의 맨얼굴을 볼 수 있을 때 모든 부녀관계는 공자가 말하는 ‘부자유친(父子有親)’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74 콘크리트 민심/권서각 file
편집자
935 2015-04-28
콘크리트 민심 가끔 오르는 집 근처 야산이 있다. 등산도 아니고 산책도 아닌 그 중간쯤 되는 걷기 코스다. 집 가까이 이런 산이 있어 주어서 고맙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사각형 아파트에 갇혀 살다가 가끔 천천히 오르며 내리며 볼 것도 보고 들을 것도 들으며 바람도 쐰다. 아파트에 살면 날씨와 계절을 잊기 쉽다. 밖에 비가 오는지 혹은 추운지 더운지 알지 못한다. 다행히 산에 오를 수 있어 꽃이 피고 잎이 피는 것을 보고 계절의 바뀜을 알 수 있다. 사람도 원래 자연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아파트는 사람을 자연으로부터 갈라놓는다. 그러니까 산은 내게 있어서 자연과 반자연을 소통하게 하는 통로인 셈이다. 언제인가부터 이 야산에 손바닥만한 산밭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주로 나이 드신 분들이 소일거리로 평평한 곳을 일구어 만든 밭뙈기들이다. 이렇게 생긴 밭은 대개 기대 이상으로 작물들이 탐스럽게 자란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작물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가 그것이다. 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내가 보는 산밭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산밭을 일구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 밭에 온다. 풀 한 포기 없이 깨끗하게 가꾸어진 밭에서 고구마, 고추, 들깨, 땅콩, 배추, 무, 상추 등이 자라는 것을 보는 것도 좋은 볼거리 가운데 하나다. 자라는 작물들을 보면서 그 밭을 가꾸는 사람의 정성을 생각하기도 한다. 자신의 몸 하나 지탱하기에도 힘겨워 보이는 노인이 유모차로 물을 실어 나르고 거름을 실어 나르고 흙에 몸을 가까이하고 작물을 가꾸는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하다. 그들의 정성이 저 손바닥만한 밭에서 씨앗에 싹을 틔우게 하고 잎과 줄기가 자라게 하고 꽃을 피우게 하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게 한다. 그 과정이 성스러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등산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서로 모른 척 하가가 쉽다. 산에 오르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차림새가 다르듯이 서로 다른 사람인 것이다. 그래도 밭에 가는 길이나 산책길이 구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하거나 같은 지점에서 쉴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알게 되어 서로 인사를 하고 지내는 노인이 있다. 허리 굽은 왜소한 노인이었다. 자신의 몸도 힘겹게 추스르는 노인이 어떻게 푸름이 가득한 밭을 가꾸어 내는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그가 일구어 내는 밭을 통해서 그의 성실한 내면을 읽을 수 있었다. 그를 대하는 태도가 나도 모르게 공손해졌다. 4월16일 시민연대에서 주관하는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제에 다녀왔다. 거리에서 하는 밤 행사였다. 추모시를 낭송해 달라는 주최 측의 부탁을 나는 기꺼이 수락했다. 전에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미선이 효순이 추모제에도 추모시를 낭송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갔을 때도 시민들이 차린 분향소에서 추모시를 낭송한 적이 있다. 시를 쓰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임무라 여겼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단순한 교통사고 아니다. 그들의 희생은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작년 오늘 수학여행 간다고 집 나서더니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구나 우리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잊지 않고 있다 다시 개나리가 피고 우리들 가슴에도 노란 개나리 지지 않고 있다 어떤 이들은 지겹다고 한다 세월호 이야기 그만하자고 한다 세월호 이제 그만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세월호 진상조사특위’를 무력화시키려고 하고 한사코 한사코 덮으려고 한다 잊으라고 한다 그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아이가 수학여행 떠나서 1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왜 돌아오지 않는지 영문도 모른다면 당신은 잊을 수 있는가? 왜 세월호가 가라앉았는지 왜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지 왜 가라앉는 배를 보고도 구조하지 않았는지 왜 304명의 소중한 생명이 영문도 모르는 채 왜 차가운 물속에 가라앉아야 했는지 왜 그들은 잊으라고 하는지 왜 한사코 덮으려고 하는지 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304명이 아직 돌아오지 못하는 것은 운전자 한 사람이 잘못한 단순 교통사고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우리 사회 전체의 잘못이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이제는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는 수학여행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 이 땅의 누구도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울지 마라, 왜 너희들이 돌아오지 못하는지 밝혀지는 그날까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이 되는 그날까지 우리는 잊지 않겠다 우리는 잊지 않겠다 울지 마라, 우리가 잊지 않겠다 -권서각 시 「울지 마라, 우리가 잊지 않겠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복합적으로 쌓여서 나타난 사건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 사회에 산밭을 일구는 노인 같은 분들만 있으면 이런 비참한 사건 따위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며칠 전이었다. 산을 오르다가 밭둑에 앉아서 쉬고 있는 노인을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다짜고짜 한숨을 섞어 말을 했다. “속상해 못살시더.” 그가 가꾼 밭에서 푸른 싹들이 봄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어제 갑자기 밭 임자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자기가 이 땅을 사서 측량해 보니 노인이 가꾸는 밭뙈기도 자기가 산 땅에 포함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이제 자기의 땅이니까 당장 농사를 걷어치우라는 것이었다. 노인은 이렇게 자라고 있는 것들을 어찌할 수 없으니 가을에 거둘 때까지만 참아달라고 애원을 했단다. 당장 그 땅에 무엇을 할 것도 아니면서 그는 막무가내로 당장 농사를 그만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노인은 분노에 차서 말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데 있니껴? 그놈은 노무혀이보다 더 나쁜 놈이래요.” 나는 콘크리트보다 더 견고한 그의 정치적 견해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글 권서각  
173 절망은 나의 힘(카프카)/고석근 file
편집자
1251 2015-04-13
절망은 나의 힘(카프카) 인식의 힘 -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이다(니체) 최승호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친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한 승려가 물었다. “거지가 오면 무엇을 주어야 합니까?” 조주 선사가 대답했다. “그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다들 ‘사는 게 힘들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 우리 모두 하루살이처럼 ‘오늘도 무사히...... .’ 간신히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살아갈 힘’이 필요하다고 한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키에르케고르)’이니 우리에게 살아갈 힘이 될 수 있는 ‘희망’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희망이 필요할까? 조주 선사 같으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우리는 가끔 차라리 벌레가 되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밥벌레, 밥이나 축내는 밥벌레가 되어 그냥 밥이나 먹으며 꿈틀꿈틀 사는 인생.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의 삶을 살아간다. 그는 인간으로서는 부족했지만 벌레로 변신하고서는 부족한 것이 없다. 우리에게 정말 희망이 필요할까? 다리가 짧은 도마뱀은 도태되는 게 아니라 날개가 돋아 하늘로 날아오른다.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자네는 자네의 불행 중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야.” 우리 모두 하루살이로 변신하면 새로운 삶이 우리에게 열리지 않을까?  
172 우리말의 풍경/권서각 file [1]
편집자
1355 2015-03-24
우리말의 풍경 티브이를 보다가 거슬리는 말이 들리면 매우 불편하다. 언어에는 그 사회가 반영된다. 역으로 언어가 사회의 모습을 바꾸기도 한다. 언어가 바르지 못하면 사회도 바르지 못하다. 그래서 공자는 그 대상에 맞는 말을 써야 사회가 바르게 된다고 했다.(正名) 개를 개라하고 사람을 사람이라 해야 사회에 혼란이 없다는 것이다. 요즘 티브이에서 자주 쓰이는 말 가운데 예능 프로그램이란 말이 있다. 인기 있는 연예인 몇이 농담하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예능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 사전에서는 예능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1.재주와 기능을 아울러 이르는 말. 2.연극, 영화, 음악, 미술 따위의 예술과 관련된 능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 오빠 언제부터인가 자기의 남자 친구를 오빠라고 한다. 결혼해서도 자기의 남편을 오빠라고 한다. 오빠는 여동생이 손위의 남자 형제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다. 오빠를 오빠라 해야 하지만 남자친구를 오빠라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오빠와는 혼인할 수 없는 게 우리사회의 규범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 어지러우면 인간관계도 바를 수가 없다. 홍길동이 들으면 그냥 있지 않을 일이다. 아비를 아비라 하고 형을 형이라 해야 한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존칭을 나타내는 선어말어미 ‘-시’가 남용되고 있다. 말끝마다 시가 붙는다. 이는 주로 고객을 상대하는 직원들이 많이 쓰는 말이다. 병원에서 차례가 되면 아무개 님 들어가실게요, 계산대에서 만 원 되시겠습니다, 이런 말 자주 듣는다. 이는 업체를 운영하는 갑이 직원인 을에게 강요해서 생긴 언어의 풍경이다. 손님은 높여야 하겠지만 커피는 높일 필요가 없다. 우리 사회는 갑질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시’의 남용은 갑질이 낳은 풍경이라서 더욱 씁쓸하다. 개를 보고 ‘얘’라 한다. ‘얘’는 인칭대명사다. 가까이 있는 아이를 이르는 말이다. 요즘 애완견을 기른 사람의 수가 늘어나면서 개를 가족과 같이 생각해서인지 ‘얘’ 또는 ‘우리 아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이것이 확산되면서 요리 프로그램에서 요리사가 음식재료를 가리키며 ‘얘라고 하기도 한다. 사람이 아닌 사물에 인칭대명사 ’얘‘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개를 시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은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부모는 돌보지 않으면서 개만 끔찍이 여겨 ’얘‘라고 하는 꼴은 감당하기 힘든 우리말의 풍경이다. 부모보다 개를 더 섬기는 사회는 분명히 가치가 전도된 사회다. 티브이에서 방송되는 언어는 어떤 언어보다 전파력이 강하다. 그럼에도 출연자의 언어사용에 개의치 않고 인기만 있으면 출연시키는 방송사의 태도는 옳지 않다. 시청율과 관계되기 때문일 것이다. 시청률 때문에 우리말의 질서를 훼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공영방송은 우리말을 바르게 세우는 데 앞장서야 할 사명이 있다. 한흰샘 주시경 선생은 ‘말이 올라야 나라가 오른다.’고 하셨다. 일본제국주의가 우리말과 글을 말살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말과 글을 지켜내신 한흰샘 선생이 오늘의 방송언어를 들으시면 어떻다 여기실까. 글/ 권서각  
171 소유냐 존재냐 (프롬) /고석근 file
편집자
1232 2015-03-16
소유냐 존재냐 (프롬) 사랑 나해철 풀을 떠나며 풀을 죽이는 이 사랑 좀 봐 그대는 바람같이 머물다 가지만 숨 쉬는 법을 아주 잊는 이 풀을 좀 봐. 우리의 사랑은 왜 매번 실패할까? 눈망울은 언제나 휑하니 사랑을 갈구하는데. 그러다 우리는 사랑을 포기한다. ‘사랑을 못 믿겠어.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을 했는데...... .’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삶의 양식을 ‘소유 양식’과 ‘존재 양식’으로 나눴다. 그는 ‘이 둘의 삶의 양식은 양립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소유’를 택하는 한, 우리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도 말한다. “하느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김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재물을 섬기는 한, 우리는 사랑을 섬길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바람처럼 사랑을 찾아 헤맨다. “사랑해. 사랑해.” 우리는 만나는 것들을 온 몸으로 사랑한다. 하지만 다 숨이 막혀 죽고 만다. 우리가 ‘물질’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리웠던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슬프다. 바람처럼 만나 서로를 얼싸안는다. ‘숨이 막혀. 숨이 막혀.’ 화들짝 놀라 서로에게서 떨어진다. 창백한 얼굴로 헤어진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우리는 울먹인다. 우리는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다 죽이고 나서야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될까?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우리의 눈망울 뒤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어 언제나 눈물이 찰랑거린다’  
170 이런 생각/권서각 file
편집자
1055 2015-02-26
이런 생각 땅콩 회항 사건 이후, 문득 항공기 좌석에 클래스를 없앴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공기를 탈 때 탑승구는 하나다. 이코노미 클래스 표를 가진 나는 입구의 넓은 클래스의 자리를 지나 뒤쪽에 있는 비좁은 자리에 다리를 오그리고 몇 시간을 견디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같은 항공기 안에서 가진 자의 자리와 그렇지 못한 자의 자리는 확연하게 구별된다. 경제적 능력에 따라 사람의 계급이 나뉘는 공간이 항공기다. 봉건사회에서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양반과 노비의 계급이 나뉘었지만 현대사회는 경제적 능력에 따라 계급이 나뉜다. 현대판 계급사회라 하겠다. 이런 사회를 민주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봉건사회에서 민주사회로의 변화 과정은 사회적 계급을 없애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귀족과 평민, 양반과 상민,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등의 계급을 없애고 무두가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이 지금까지의 역사였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의 진보라고 배웠다. 봉건사회에서 봉건질서에 순응하는 사람만 있었다면, 그리고 누구도 봉건체제의 계급질서에 항거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민주주의 사회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끊임없는 투쟁과 희생에 의해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사라졌다. 명색이 지역의 유지라고 하는 이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땅콩회항 사건이 화제가 되었다. 모두 항공사 사주 딸의 갑질에 대해 분개했다. 어차피 항공기 이야기가 화제니까 나는 항공기의 클래스를 없애는 게 어떻겠느냐고 생뚱맞은 소리를 하고 말았다. 좌중에 몇 사람이 픽 하고 비웃었다. 그들에게 나의 말이 생경한 만큼이나 내게는 그 웃음이 낯설게 들렸다. 그리고 나에 대한 공격이 시작 되었다. 그들의 발화 취지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많은 돈을 내고 좋은 자리에 앉는 것은 당연하다. 자기 능력에 따라 좋은 자리에 앉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억울한 것 하나 없다. 적은 돈을 냈으니까 뒷자리에 앉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은 능력에 따라 사는 것이다. 요즘은 오히려 없는 사람들이 큰소리친다. 한센 병 환자 수용시설에 가보면 그들이 직원들을 개 부리듯 한다. 고마워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큰소리다. 우리나라는 복지가 과하다. 그들은 나를 종북 좌파로 보고 있음이 확실하다. 나는 화를 참으며 나름대로의 생각을 말했다. 돈 많은 사람이 자기 집에서 금 수저로 밥을 먹든, 벤츠를 타고 다니든, 호화주택에 살든 그것을 탓하자는 것이 아니다. 대중교통수단이나 대중이 같이 쓰는 공간에서 계급이 나뉘는 것은 비민주적이다. 공화국 시민은 헌법에 보장되어 있듯이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 같은 공간에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모멸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기차에 1등석이 사라지고, 고등학교가 평준화 되고, 학교에서 모든 학생이 같은 음식을 먹는 것이 민주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의 이런 목소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묻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해방은 되었지만 진정한 해방이 되지 않았다. 친일이 청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 공화국이라고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민주 공화국이 아니다. 식민 지배나 봉건 질서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영남에서 섬처럼 외롭다. 글/ 권서각  
169 현재를 잡아라!/고석근 file
편집자
1246 2015-02-16
현재를 잡아라! 샘물 김달진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본다 물속에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바람이 지나가고 조그마한 샘물은 바다같이 넓어진다 나는 조그마한 샘물을 들여다보며 동그란 지구의 섬 우에 앉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오랫동안 모셨던 아난다는 중생인 자신과 부처인 석가의 차이가 도대체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석가의 일상을 하나하나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놀라운 발견을 했다. ‘석가의 일상은 매순간이 똑같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석가에게는 세수하고, 공양을 하고, 걸어가고, 설법을 하는 매순간이 똑같이 중요했다. 석가는 언제나 ‘현재’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산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고 우리는 함께 휩쓸려 흘러간다. 우리에게는 ‘현재’가 없다. 말과 생각으로는 ‘현재’라고 하지만, 그 순간은 휙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은 생생하지 않다. 그래서 한평생이 뜬 구름 같다. 그런데 ‘시간’은 없다. 시간은 우리의 감각 작용에 불과하다(아인슈타인). 오로지 있는 건 ‘현재’ 뿐이다. 우리는 현재라는 찰나의 시간 속에만 존재한다(석가).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것들은 우리의 생각, 관념에 불과하다. 우리는 ‘정신의 수직적 시간(메를로 퐁티)’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수평으로 쏜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수직으로 분수처럼 솟구쳐 올라가는 시간, ‘찰나’ 속에 머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찰나’ 속에 살 수 없다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한평생은 허망할 수밖에 없다. 인간에겐 자신이 사라지는 ‘죽음’이 가장 두려울 것이다. 그래서 누구나 영생불사를 꿈꾼다. 요즘 엄청나게 비싼 ‘줄기세포주사’를 맞는 부자들이 많다고 한다. 그 주사가 건강과 젊음을 되찾아 줄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의 노예’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시간의 노예가 되어 ‘쏜살 같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 함께 휩쓸려가는 한 아무리 건강하게 오래 살아도 우리의 삶은 끝내 ‘일장춘몽’이 되고 말 것이다. ‘숲 속의 샘물을 들여다보며 조그마한 샘물이 바다같이 넓어지고 나는 동그란 지구의 섬 위에 앉는 기적’ 이런 ‘기적의 삶’은 우리가 ‘현재를 잡는 삶’을 살 때 가능할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영생불사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168 술과 담배/권서각 file
편집자
1670 2015-01-21
술과 담배 문학청년시절 글쟁이가 되려면 술과 담배를 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말을 듣고 술과 담배를 시작했다. 좋아서 한 것이 아니라 글쟁이가 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학습했다 함이 옳을 것이다. 담배는 가장 값이 싼 것부터 한 갑씩 정복해 나갔다. 필터가 없는 금잔디에서 출발해서 가장 비싼 신탄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흡연자의 반열에 들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적 사정으로 인하여 필터가 없는 ‘백조’를 피우며 청춘 시절을 보냈다. 왜 백조를 피우느냐고 물으면 담배는 이름으로 피우는 거라 구라를 치기도 했다. 술은 체질에 맞지 않아 마시면 토하기를 30대 중반까지 반복하다가 30대 중반을 넘어서야 술맛을 알게 되었다. 술맛을 알게 되자 주량이 줄어들어 지금은 막걸리를 조금씩 마시며 술꾼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담배는 아직도 누구 못지않은 골초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다. 흡연자에게 가해지는 멸시와 모욕을 감내하면서도 꿋꿋이 지조를 굽히지 아니했다. 그러나 박그네 정권이 담배 값을 2배 가까이 올리는 바람에 지금은 떨고 있다. 아니 분노하고 있다. 종합부동산세에서 거두는 세수가 1조 원 가량인데 담배세에서 거두는 세수가 7조원이란다. 가난한 시인의 담배 개비 수가 반으로 줄었다. 박그네는 시인을 떨게 한다. 각설하고 술에 대한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낮술 김상배 이러면 안되는데 일곱 음절밖에 안 되는 짧은 시다. 그러나 독자로 하여금 시의 길이보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모름지기 시는 글의 길이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야 한다. 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같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사람이 사는 곳에 술이 있었다. 술을 먹지 않아도 사람은 살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람이 사는 곳에 술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사람은 밥만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다. 밥이 사람의 몸을 살아있게 한다면 술은 사람의 마음에 작용한다. 선배 시인 한 분이 어느 날 술을 함께 마시며 이런 말을 하신 걸 기억한다. “참 이상해. 술은 기분 나쁠 때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기분 좋을 때 마시면 더 좋아진단 말이야.” 술을 아는 말씀이다. 술은 예로부터 기쁠 때나 슬플 때 사람들 곁에 있었다. 잔치에는 흥을 돋우어주고 제사에는 슬픔을 달래주는 구실을 했던 것이다. 한 잔의 술을 얻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곡물과 과일이 필요하다. 그래서 식량이 부족하던 시대에는 나라에서 술 빚는 일을 금하기도 했다. 곡물을 발효시켜 증류한 것이 소주다. 과일을 발효시켜 증류한 것이 코냑이다. 보리를 발효시켜 증류한 것이 위스키다. 예로부터 귀한 술은 많은 양의 과일과 곡물이 필요한 증류주였다. 그래서 술이 밥보다 귀했다. 술이 귀한 음식이라는 이유는 신에게 제사지낼 때 올리는 음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규보는 ‘국선생전’에서 ‘하루라도 이 친구를 만나지 않으면 마음에 비루함이 싹튼다.’고 했다. 또 ‘성정이 맑아서 더 맑히려 해도 맑게 할 수 없고 더 흐리게 하려해도 흐리게 할 수 없다.’고도 했다. ‘동의보감’에 술을 찾아보면 ‘많이 마시면 취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술은 귀한 음식이지만 과하게 마시면 인간의 무의식의 경계를 무너뜨리곤 한다. 평소에 더없이 도덕적인 사람도 술이 지나치면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게 된다. 무의식의 경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낮술을 찾는 이는 지나치게 무료하거나 지나치게 외로운 사람일 것이다. 낮술에 취하면 그 부친도 알아보지 못한다 했으니 마땅히 경계하고 삼가야 하리라. 글 권서각  
167 일상에서 공부하라! (왕양명)/고석근 file
편집자
1093 2014-12-16
일상에서 공부하라! (왕양명) 문구멍 신현득 빠꼼빠꼼 문구멍이 높아간다. 아가 키가 큰다. 문학을 공부할 때 수련회를 간 적이 있다. 팔당댐 근처 풍광 좋은 곳으로 갔는데, 그 날 밤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문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할 때였다. 젊은 강사가 내게 '글을 보는 눈이 잘못되어 있다'고 말했다. 나는 불같이 화가 났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너는 얼마나 잘 아나?' 그 다음 날 새벽에 혼자 첫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와 버렸다. 그 뒤 여러 분야의 공부를 하며 그 강사가 한 말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온 몸이 오글거린다.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나도 이제 강사가 되어 강의를 다니다 보면 '그때의 내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된다. 나는 강사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그 강사처럼 수강생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줄 때가 있다. 그때의 나처럼 파르르 반응을 보이며 기분 나빠 하는 분들도 있고, 고맙게 받아들이는 분들도 있다.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할 때 사람들에게 쇠파리처럼 달라붙어 그가 스스로 무지하다고 깨달을 때까지 질문을 퍼부었다고 한다. 졸지에 '무식한 인간'이 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두 부류로 나눠졌다고 한다. '무지의 깨달음'에 환희에 젖는 사람들과 '너는 얼마나 아나?'하고 분노하는 사람들로. 왜 이렇게 나눠질까? 머리로만 공부한 사람은 불같이 화가 날 것이다. 자기도 아는 게 많다고 생각할 테니까. 소크라테스가 별로 많이 아는 것 같지 않게 보일 테니까. 하지만 일상에서 '진리' '정의' '자유' '사랑' 등을 성찰하며 공부한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이 아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때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흡사 불철주야 '화두(話頭)'를 잡고 공부하던 승려가 어느 날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깨달을 때의 그 느낌을 몸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느끼게 될 것이다. 노자는 말했다.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하고 아는 자는 말하지 않는다(言者不知 知者不言)" 언어를 끝까지 밀고 갔던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 소크라테스가 언어로만 세상을 보고 있는 사람에게 그의 언어의 한계를 깨줄 때 몸으로 공부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그의 눈앞에 새로운 진리의 세계가 섬광처럼 스쳐갈 것이다. 그는 새로운 열림의 세계로 들어설 것이다. 가끔 내가 제자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줄 때 그것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분들을 볼 때 경이감에 젖는다. 사람은 이렇게 크는구나! 아이가 문구멍을 찢고 세상을 내다보듯. 그렇게 키가 크듯.   
166 논리적 분노/권서각 file
편집자
1501 2014-11-25
논리적 분노 문학인은 근본적으로 시대와 불화한다. 왜 그럴까? 세계(universe)는 원초적으로 선과 악이 공존한다.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했다. 하늘은 착하지만은 않다. 만약 하늘이 착하다면 선한 이에게 복을 주고 악한 이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하늘은 착한 사람을 끝없이 불행하게 하기도 하고, 악한 이에게 복을 누리게도 한다. 이런 모순적 세계에 대항하는 이가 작가다. 우리 고전 흥부전, 춘향전, 심청전을 다시 보자. 우리가 사는 현실은 흥부와 같이 착하게 살면 부자가 될 수 있는가? 춘향처럼 권력에 대응해서 정절을 지키면 승리할 수 있는가? 심청처럼 부모에 효도하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 저항하고 극복하려는 작가정신이 우리의 고전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우리 고전도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 산물이다. 노자의 말처럼 세계는 착한 사람들의 편에만 서 있는 것이 아니다.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했다. 옛날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은 다 그런 거야”라고 세계의 밝은 면만을 노래해야 하는가? 공자가 ‘자가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物施於人)고 한 것은 세계의 어두운 면을 소멸시켜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퇴계 선생 평생소원이 ‘허물이나 없고자’라고 노래한 것은 자기 내면의 불의한 것들을 소멸해서 완전한 선으로 나아가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즉 정의로운 자기, 정의로운 세계가 성자들의 소망이었다. 작가는 근본적으로 정의의 편에 선 자다. 정의의 편에 선자는 불의와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작가는 시대와 불화한다. 작가가 시대에 순응하고 시대의 어두운 면을 외면한다면 작가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나아가 작가가 권력의 편에 선다면 악이 선을 억압하는 것을 도울 뿐이다. 세계는 그런 작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런 작가정신을 나는 논리적 분노라 한다. 반면에 우리 사회에는 아무런 이유 없이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경제성장, 반공주의로 무장되어 있다. 스위스, 노르웨이, 핀란드, 독일 등의 유럽 국가들은 우리보다 국가경제가 낮은 수준일 때도 무상교육 등의 복지 정책을 실현했다. 우리는 지금 경제 대국에 속한다. 그럼에도 더 성장해야 한다고, 경제성장을 내걸고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있다. 끝없는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노동자들의 복지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 복지를 말하면 종북으로 몰아세운다. 논리적 근거가 없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꼼수다. 기득권층도 가짜 종북을 만들어 분노하고 증오한다. 그들은 근거 없이 분노하고 증오하지만 작가정신은 논리적 분노를 하는 것이다. 글 권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