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에서(상주동학농민혁명을 생각하며)

임술랑

 

 

상주에는 왕산(王山)이 있다. 상주시민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누가 왕산이라고 말하면 "아 왕산!"하면서 맞장구치기를 자연스레 한다. 그만큼 상주사람들 속에는 왕산이 있다.

 

왕산은 상주시내 중앙에 위치한 작은 산이다. 평지에 돌출한 고산(孤山)인 것이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상주에 왔을 때 왕산에 있는 관아를 행궁으로 사용하였다. 그 인연 때문에 이 산을 고려왕실의 산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산이 된 것이다. 왕산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고 최근에 심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유적으로는 왕산석불(상주복룡동석불좌상, 보물 119호)과 위암 장지연선생 기념비, 지방관들의 송덕비가 줄지어 있다. 그리고 조그만 정자 백우정(百友亭)이 있다.

 

상주성이 이 산을 중심으로 둘러져 있었고 성안에 관아가 있었던 것이다. 상주는 통일신라 때 9주 중 한 주였고, 고려 때는 전국 8목 중에 하나였으며, 조선 초에는 200년간 경상감영이 자리 했다.

 

왕산을 배경으로 있었던 일들은 수도 없겠으나, 그 하나는 1894년(갑오년)에 있었던 상주동학농민혁명이다. 오늘 왕산 둘레길을 거닐며 상주에서 일어 난 동학농민혁명을 생각해 본다.

 

인성(人性)이 본래 선(善)하다거나 악(惡)하다거나 하는 논쟁은 끊임이 없었다. 그리고 결론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근세의 학자 이건방(李建芳)은 다산 정약용의 저서인 방례초본(邦禮艸本)에 서문을 썼는데 거기 이르기를 "옛날 성왕(聖王)은 천하를 다스리면서 백성들은 욕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 욕심을 고르지 않으면 반드시 어지럽게 되는 까닭에 예(禮)로써 조절하였으며, 그 욕심을 징계하지 않으면 반드시 어지럽게 되는 까닭에 법으로써 제어하였다." 라고 하였다. 백성의 욕심 즉 사악함을 예로써 다스리고 법으로 제어하며 교화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동물 세계에도 서열이 존재하는 것처럼 인간도 지배층과 피지배 계급이 존재해 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사회 지도층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지도계층이 사회를 잘 이끌지 못한다면 반드시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옛 성인이 말한 백성들의 욕심 즉 인간 본성의 한 가지인 사악한 성질 때문이리라.

 

신라 말 진성여왕시대인 서기 889년도에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농민항쟁이 상주지방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원종(元宗)과 애노(哀奴)의 난이라고 한다. 한때 상주성을 점령하므로 중앙군이 파견되어 난을 진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는 시초가 되는 사건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렇듯 사회 지도 계층이 백성을 교화하고 다스리지 못하면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본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생존이 피폐와 위협을 느낄 때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며 정당한 것이다. 농민이 흙을 파던 농구를 치켜들고 하늘을 찌를 듯 달려들고 포수는 총구를 겨눈다. 

 

홍길동전의 작가 허균은 호민론(豪民論)에서 백성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으로 구분하였다. 호민은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고 기존의 질서를 뒤집어엎는 종류의 사람들이다. 푸줏간 같은 음지에 숨어 지내다가 봉기하여 호령하면 항민이나 원민의 무리는 그들을 따른다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견훤이요 궁예인 것이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이 바로 이것이다. 타락 할대로 타락한 지배계급을  괭이로 찍은 것이다. 마치 흙을 파듯 파버린 것이다.  

인간에 있어 혁신이란 험난한 것이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늘 한 곳에 안주하지도 못 하는 게 또 인간이기에 낯선 물리에 대한 적응은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19세기 말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주변국의 야욕에 표적이 된 조국은 혼란을 겪게 된다. 사실 사회지배계층의 타락 아래 신음하는 무지렁 농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는 것이다. 다행이 조선의 위대한 선각 최제우선생이 동학의 도를 높이 들어 밝혀 가르쳤으므로 많은 백성들이 그 길 위에 섰었다. 사회지배계층과 관리들의 타락으로 행정이 이미 마비되었으므로 주민이 스스로 다스리자는 생각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른바 주민자치, 지방자치의 모태가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비록 7일천하에 지나지 않았지만 주민이 스스로 궐기하여 자치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동학혁명이 피폐한 민초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삶에 희망을 주었던 것이다. 스스로 용기를 가지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한 것이었다. 난을 주도한 이들은 잡혀 죽고(상주성 태평루 마당에서 농민군 140명이 처형되고 그 시신은 아리랑고개 너머 공동묘지에 버려졌다) 도망가서 후일을 도모하고자 했던 이들은 보은 종곡리 북실에서 2,600명이 몰살당했다.

 

기존 질서에 반항하는 것이란 그것도 아무런 기반도 조직도 준비 없이 궐기함은 무모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이 이곳 상주지방만의 일이 아니었고 전국에서 동시 다발하였으니 조국의 개화는 그만큼 더 빨랐던 것이다. 그들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이다.

 

왕산은 멀리 바라보이는 산이 아니라 가깝게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 그래서 더욱 친근하다. 상주 왕산에서 120여 년 전 암울한 시대를 발부둥치다 간 임들을 그리며 술잔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