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和諍思想과 大乘論

                                                        - 은정희 역주『원효의 大乘起信論 疏 ․ 別記』論註

 

                                                                                                                                                 山白 朴 喜 鎔

 

1. 원효와 『大乘起信論 疏 ․ 別記』

 

 「大乘起信論」은 산스크리트 원본이 없는 탓으로 印度撰述인가 中國撰述인가가 논란되어 오기도 하지만, 대승불교 시대의 후기에 나타난 불교사상서 중 가장 뛰어난 논서로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 유포된 ‘大乘起信’ 사상을 馬鳴이 논리적 체계를 갖추어 「大乘起信論」을 썼고, 여기에다 원효가 「起信論 疏」와 「起信論 別記」를 보탬으로써 비로소 『大乘起信論 疏 ․ 別記』가 완성되어 신라불교철학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 책 『원효의 大乘起信論 疏 ․ 別記』는 1977년 海印僧伽學院에서 간행한 『大乘起信論疏記會本』을 텍스트로 하여, 은정희 철학박사가 이기영의 『韓國의 佛敎思想』 ․ 성낙훈의 『韓國의 思想大全集 Ⅰ(元曉外)』 ․ 김탄허의 『懸吐解釋 起信論』을 저본으로 하여 국문으로 번역한 것을 1991년 5월에 <일지사>에서 출간하였다.

은정희 박사는 책의 解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大乘起信論」은 인도에서 그 당시 대립되고 있던 양대 불교사상, 즉 中觀派와 瑜伽(唯識)派의 사상을 지양 ․ 화합시켜 眞과 俗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迷汚한 현실생활(俗) 가운데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추구하고 수행함에 의하여 완성된 人格(眞)을 이루어 갈 수 있으며, 한편 깨달음의 단계(眞)에 이른 사람은 아직 迷汚한 단계(俗)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는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眞俗一如의 사상을 잘 나타낸 논서이다. 원효는 이 「大乘起信論」을 만나자마자 바로 자신의 구도적 학문과 삶의 자세와 너무도 일치함에 크게 감명을 느끼고 연구에 매진하여 7種의 연구서를 냈다.

 「大乘起信論」 본문의 구조는 因緣分, 立義分, 解釋分, 修行信心分, 勸修利益分 등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因緣分’에서는 이 논을 짓게 된 이유를 말하였고, ‘立義分’에서는 이 논의 대의, 즉 一心, 二門, 三大를 제시하였다. ‘解釋分’은 앞서의 입의분에서 제시한 一心, 二門을 구체적으로 논술한 것으로 「大乘起信論」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 부분은 다시 顯示正義, 對治邪執, 分別發趣道相의 셋으로 나뉘어진다. 우선 正義를 드러냄에 있어서 一心(衆生心)을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의 둘로 크게 구분하였다. 心眞如門에서는 如實空, 如實不空 등을 말하여 마음의 淸淨한 面을 묘사하였으며, 心生滅門에서는 阿黎耶識의 覺과 不覺의 二義와 薰習 등을 말하여 마음의 染淨緣起를 밝혔다. 다음으로 邪執을 對治함에 있어, 人 ․ 法 二執의 對治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發心 修行하여 道에 나아감을 분별하는 상에서는 信成就發心, 解行發心, 證發心의 세 가지 발심을 말한다.

‘修行信心分’에서는 앞서의 ‘해석분’ 중의 發趣道相이 不定聚衆生 중의 勝人을 위한 설명임에 비하여 여기서는 부정취중생 중의 劣人을 위하여 四信, 五行 및 他力念佛을 설한다. 마지막 勸修利益分에서는 이 논을 믿고 닦으면 막대한 이익이 있으리라는 것을 말하였다.

 

 원효의 기신론관에서 특징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효는 그의 「기신론 소」와 「기신론 별기」에서 기신론의 성격을 中觀思想과 唯識思想의 止揚 ․ 綜合이라고 판석한다. 즉 「기신론」은 마음의 청정한 면만을 주로 찬탄하고 강조해 온 중관사상과 마음의 염오한 면을 주로 밝혀 온 유가사상을 잘 조화시켜 眞俗不二의 뜻을 밝힌 것이라 본 것이다.

 둘째, 원효는 그의 「기신론 소」와 「기신론 별기」에서 우리의 迷妄한 마음, 즉 無明이 본래의 청정한 마음 즉 진여를 훈습하여 不覺心이 처음으로 일어난 無明業相, 이 무명업상 즉 極微한 動念에 의하여 所緣境相을 볼 수 있게 되는 轉相, 그리고 이 전상에 의하여 경계를 나타내는 現相 등 세 가지 미세한 마음, 곧 三細識이 아라야식(Alayavijnana)位에 해당된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원효는 아라야식의 覺義에 의하여 자성청정한 覺의 상태로 환멸한 후의 本覺의 성격 즉 智淨相과 不思議業相에 대하여 自利와 利他의 두 가지 면을 배대시킴으로써 心源에 도달한 覺者는 깨달은 상태(自利)에 안주하지 말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적극 노력해야 함(利他)을 역설한다.

 결국 원효가 「기신론 소」와 「기신론 별기」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眞俗一如, 不住涅槃의 사상이었으니, 이는 出世間的 自利만이 불교의 진의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깨달음의 세계를 이룩해야 한다(利他)는 대승불교의 정신이 아닐 수 없다.

 

 은정희 박사가 정리한 「대승기신론」 본문의 구조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序分: 歸敬頌

2. 正宗分

가. 因緣分: 造論八因

나. 立義分: 一心, 二門, 三大

心眞如門......二種眞如(如實空, 如實不空)................. 體

心生滅.......阿黎耶의 二義 自

顯示正義.....一心.. 染淨生滅 生滅因緣.........五意, 意識 體 三

心生滅門 六染, 二礙 ․

生滅相 ....麤細의 相 ․ 義 相 大

다. 解釋分: 染淨薰習 .............................四種薰習 用

對治邪執 ................................人 ․ 法 二執의 對治

分別發趣道相 .........................三種發心

라. 修行信心分 ...........................................四信, 五行, 勝方便(他力念佛)

마. 勸修利益分 ...........................................信謗損益과 勸修

3. 流通分 .................................廻向頌

                                                 * 정확한 도표는 첨부물 참조

 

 다음으로, 은정희 박사는 원효의 생애와 저술, 포교활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국유사』와 『宋高僧傳』에 의하면, 원효는 신라 26대 진평왕 39년인 서기 617년에 현재 경북 경산군 자인면인 押梁郡 佛地村의 밤나무 밑에서 薛仍皮公의 손자요 談襟乃末의 아들로 태어났다. 兒名이 ‘새털’이라는 의미인 誓幢인 그는 10여세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고려 大覺國師 義天이 남긴 詩에 의하면, 백제 땅 전주 孤大山에서 고구려 고승인 普德和尙의 講下에서 「열반경」과 「유마경」등을 배웠다고 하며, 또『삼국유사』朗智來雲條와 釋惠空傳을 보면 朗智와 惠空에게서도 배웠다고 한다. 그의 저술에 나타나는 인용문을 통하여 그가 불교학 전반에 걸쳐서뿐만 아니라, 『논어』, 『노자』, 『장자』 등 유가서와 도가서에도 정통하고 있음을 볼 때,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그의 修學經歷을 짐작할 수 있다. 『三國遺事』에 의하면, 원효는 30세인 646년에 「普譯華嚴經疏」, 「十問和諍論」, 「大乘起信論別記」, 「發心文」, 「名僧集說」 등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여러 문헌에 의하면, 원효의 저서는 100여 종의 240여 편(또는 85 종의 170여 편)으로 알려져 있고, 그 연구 범위도 小 ․ 大乘, 經, 律, 論 등 거의 모든 부문을 다 망라하고 있다. 그의 저술 목록 중에서 가장 분량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唯識系와 律學部門, 그리고 起信論에 관련된 것들이며, 현존하는 것 중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法華經宗要 1권, 大慧度經宗要 1권, 涅槃經宗要 1권, 無量壽經宗要 1권, 金剛三昧經論 3권, 起信論疏 2권, 起信論別記 1권, 二障義 1권, 中邊分別論疏 第2권, 華嚴經疏 第3권, 十門和諍論 斷片.

 원효는 染淨無二, 眞俗一如라는 그의 학문적 이론을 통일기인 당시의 신라 사회에서 대중과 함께 몸소 실행에 옮겼던 실천가였다. 불교의 수용면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층과 일반 서민층 사이에는 아직도 괴리가 있는 때에, 惠空, 惠宿, 大安 등의 뒤를 이어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지방의 촌락, 街巷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無碍박을 두드리고 無碍歌를 부르면서 교화에 노력하여 불교를 일상생활화시킴으로써 대중들에게 유익한 의지처가 되게 하였다.

 원효는 대중 교화의 행각을 마친 뒤에는 失戒와 환속의 의미인 小姓居士가 아닌 불교사상가의 의미인 元曉和尙으로 돌아가 穴寺에서 신문왕 6년인 서기 686년 3월 30일에 70세의 생애를 마쳤다.

 

2. 해제 (8~16p)

 

(1) 3p 역주자 서문 2행: 「우리나라가 낳은 불세출의 천재 원효」

 

[논주] 元曉가 있어 신라의 하늘이 밝음은 사실이지만, 혼자만이 밝힌 게 아니라 당대에나 후대에서 義湘과 孤雲 같은 석학들도 함께 밝혔다. 하물며 아직 제대로 그 가치가 알려지지 않은 천재들이나 시간의 퇴적층에 종적이 묻힌 현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것은 신라라는 한 시대에만 한정되지 않고 사람이 살아가는 어느 시대에나 해당된다. 그러므로 한 현자가 일군 사상을 액면 그대로 봐야지, 거기에다 수식어를 덧붙임으로써 지성인들로 하여금 오히려 가치를 심상하게 하거나 식상하게 할 수 있다. 수식어가 붙은 채로 시간이 쌓일수록 중생심의 후인들로 하여금 궁금증의 착시현상을 심화시켜 우상숭배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여, 마침내 한 현자가 처음으로 하늘을 밝힌 뜻과는 엉뚱한 결과가 생긴다.

 이러한 현상은 인류문명사 전체를 통관하여 계속 일어나는데, 그 원인은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동물’인 보통사람들이 ‘사유하는 인간’인 사상가들을 만날 때 갖게 되는 존경심 -기쁨, 믿음, 두려움, 부러움. 시샘 등이 혼재된-이 순수한 느낌 그대로 유지되면 정신적 노고의 부담을 덜고 삶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어서 좋다. 그러나 여러 가지 수식어가 보태어짐과 동시에 개인적 상상과 집단적 구조화가 진행되면서 ‘밝은 하늘’이 다양한 기상변화를 하게 되고, 그 아래에 사는 중생들에게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지식은 언어와 기억력을 도구로 하여 제 앞에 주어진 그대로 학습하지만, 지성은 비판정신을 축으로 하고 사실을 벼리로 하여 새로운 가치를 포획하려고 한다. 지식인은 기존의 가치관으로 기성의 사상을 추종하나, 지성인은 기존의 가치를 변증하며 기성의 사상을 비판적 분석과 검증을 통해 변화시킨다. 즉 지식은 줄기로서 보수이고 지성은 우듬지로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지식인은 방안에 앉아 상 위에 놓인 물고기를 먹는 사람이고 지성인은 강에서 그물을 들고 물고기를 잡는 사람이다. 성장을 두려워하는 나무는 자랄 수 없고 그물질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싱싱한 물고기를 먹을 수 없다.

 새물이 솟아나지 않는 샘은 한갓 웅덩이일 뿐이고, 새물이 흘러들어오지 않고 헌물이 흘러나가지 않는 강은 한갓 큰 웅덩이일 뿐이다. 들 다 곧 썩고 마른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생각이 솟아나지 않는 사상계는 묵은 생각들이 얽히고설켜 서로 부딪치다가 타버려 재가 되고 마는 한갓 잡탕 도가니일 뿐이다.

 ‘밝은 하늘’이 다양한 기상변화를 하게 되고, 그 아래에 사는 중생들에게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은 ‘생각하는 동물’인 보통사람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인 사상가들에게 있다. 아니 정확하게 분별한다면 ‘사유하는 척 하는 인간’인 ‘고급지식인’들에게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를 부러움과 시기심이란 양날의 칼로 재단하여 자기들의 장식물로 만든다. 자기의 장식물이 더 화려하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수식어, 더 뻥튀긴 존칭어들이다. 그러한 화려한 장식에 혹하여 부나비처럼 달려드는 중생심들을 기름으로 하여 ‘고급지식인’이 생존한다. 그러므로 학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은 기존의 가치와 기성의 사상을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식인과 지성인의 중간 단계인 ‘고급지식인’이다. 한국문화사뿐만 아니라 인류문명사에서 가장 큰 해악을 끼친 계층이 바로 이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은정희 박사가 ‘고급지식인’이란 말은 아니지만, ‘우리나라가 낳은 불세출의 천재 원효’라는 말 보다는 ‘우리나라가 낳은 훌륭한 불교사상가 원효’ 정도의 표현이 알맞지 않을까 한다. ‘불세출의 천재’라는 말은 학문적인 표현이 아니라 영웅주의와 국가주의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말로서 자칫 우상화의 빌미가 될 수가 있다. 화장과 수식어를 모두 걷어낸 맨얼굴을 봐야 그 인간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원효를 한국정신사에서 신라의 한 하늘을 밝힌 우수한 불교사상가 중의 한 사람으로 봐야지, 과도한 수식어를 덧붙이는 것은 원효의 사상을 제대로 해석하게 할 수 없는 선입견이 되기도 한다.

 

(2) 11p 9~12행: 「그는 불교사상을 연구함에 있어 어느 一宗, 一派에 구애됨이 없이 “萬法이 一佛乘에 총섭 되어야 하는 것은 마치 大海 중에 일체 衆流가 들어가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금강삼매경론)고 하여 大 ․ 小乘, 性 ․ 相, 頓 ․ 漸의 상호대립적인 교의를 다 융회하여 一佛乘에로 귀결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뭇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하여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 진리 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불교의 지극히 공변된 뜻을 열어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諍論들을 和會시킨다”(열반경종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和諍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논주] 원효의 수많은 저서 가운데 和諍의 방법에 의하여 眞俗不二의 사상을 나타내려 한 대표적인 것으로 「大乘起信論 疏」와 「大乘起信論 別記」를 들 수 있는데, 이것들은 30세인 646년에 「普譯華嚴經疏」, 「十問和諍論」 등과 함께 썼다. 당시의 동북아 정세는 신라, 고구려, 백제가 상호 간에 치열한 전쟁을 통해 통일을 선접하려고 하는 비상 시기였다. 또한 세 나라는 각기 당나라 세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치열한 외교전도 병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삼국 상쟁의 시대에서 살고 있는 원효가 승려 신분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평화주의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불교에서 찾아 좀더 심화시켜 불교사상으로 만든 것이 和諍思想이다. 또한 668년에 고구려 멸망과 676년에 당나라 안동도호부의 요동 故城 옮김으로써 삼국통일이 완성됨에 따라 삼국 유민들의 통일체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하여서는 和諍思想의 강화가 더욱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30세 때의 和諍思想을 좀 더 심화시켰다고 할 수 있는 「金剛三昧經論」과 「涅槃經宗要」는 원효가 50대인 삼국통일 직후인 670년 전후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즉 和諍思想은 평화의 시대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 전쟁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교사상이라기보다는 국가적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국책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창 혈기 방장한 38세에서 44세 사이인 서기 654~660년경에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음으로써 태종무열왕의 통일 정책 추진에 음양으로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승려인 그가 국책에 협조하여 삼국의 유민들을 융합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화쟁사상의 심화와 정립이었다. 결국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갖기 때문에, 화쟁사상이 겉으로 드러나는 말은 그럴듯하지만 속은 제대로 짜여졌다고 보기가 어렵다. 국가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사상이기 때문에 불교 본연의 의미와 가치를 여실하게 표현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이다.

 집필의 시대적 배경이 이러하다보니, 馬鳴이「大乘起信論」에서 말하고자 했던 본지와 원효가 「大乘起信論 疏」와 「大乘起信論 別記」에서 말하고자 한 취지가 미묘한 차이점을 가질 수가 있다. 물론 馬鳴이 말한 ‘大乘’의 개념을 원효가 정확하게 파악하여 순수한 의미의 화쟁사상으로 발전시켰을 수도 있지만, 자기가 처한 시대적, 정치적 입장에서만 해석하여 작위인 화쟁 개념을 윤색하는 도구로 이용했을 수도 있다. 원효가 고승으로 역사에 이름이 크게 남고, 그의 화쟁사상이 오늘날까지 내내 칭송을 받는 까닭은 물론 심오한 불교사상 때문이지만, 그의 왕실에서의 위치와 화쟁사상이 삼국통일에 정신적으로 기여한 공로가 국가로부터 칭송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원효가 분황사 법회에서 강론하고자 준비한 「金剛三昧經論」을 훔쳐간 자는 단순한 시기심의 발로가 아니라 ‘작위인 화쟁사상’을 거부하는 파들이 아니었는가 한다. 또는 신라의 통일정책에 협조하고 있는 원효의 화쟁사상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피지배 고구려나 백제 출신의 승려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 당시는 불교가 신라에 들어온 지 약 100년 되는 때로서 갓 수입된 불교 교리에 대한 해석을 두고 다양한 학파들 간에 한창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화쟁론의 대두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치적 필요도 있었겠지만 종교적 필요에 의해서도 다양한 불교사상들을 정리할 시점에 이르렀고, 그것을 원효가 화쟁사상을 통해 시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화쟁사상으로 묶어 정리할 수 있는 게 있고 할 수 없는 게 있다. 물건이라면 쉽게 묶어 정리할 수 있지만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의 정신작용은 쉽게 정리할 수가 없다. 권력으로 한 때는 정리할 수 있지만 곧 풀어져서 다시 복잡, 미묘해지는 게 사상계이다. 세상에는 귀납법도 필요하고 연역법도 필요하다. 더구나 고등 정신작용의 결과인 사상에 있어서는 어느 한 쪽만이 유효적절한 것이 아니라 양 쪽 모두 타당성을 갖고 있다.

 화쟁사상은 귀납법만을 선호한다. 비유이지만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 진리 바다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은 참 좋은 말이지만, 바다가 갖고 있는 한 맛이 반드시 진리인 것은 아니다. 또 이 말은 온갖 물줄기들은 아직 진리가 아니고 바다만이 진리라는 것인데, 이것은 진리의 상대성보다는 절대성만을 강조하는 편견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이다. 한 진리만 있어 여기저기에 두루 쓰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진리가 있어서 상황에 따라 쓰임새가 각각 다르다.

 ‘온갖 물줄기’인 大 ․ 小乘, 性 ․ 相, 頓 ․ 漸 등은 연역법이다. 각각의 주제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개념을 상황에 맞추어 풀어나간다. 小乘과 大乘이 갖는 개인과 사회의 근본은 같다하여도 그 변화는 이질적이다. 相이 性에서 나왔지만 현상은 본질과는 이미 다른 모습이다. 頓과 漸이 수행을 목표로 하는 점은 같지만 이미 실제에서는 차이를 갖는다. 이것들은 비유하자면 한 줄기 나무와 같다. 아랫부분은 기본이고 윗부분은 성장, 즉 변화이다. 小乘과 性, 漸은 기본이고 大乘과 相, 頓은 변화이다. 大乘과 相, 頓이 小乘과 性, 漸에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달라져서 마침내는 현저하게 다른 모습이 된다. 그 변화된 모습이 기본과는 다르지만, 애초에 기본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기본이 뚜렷해야만 변화가 제대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기본이 중요하다. 기본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小乘과 性, 漸의 개념을 변화인 大乘과 相, 頓과 분변해야 한다.

 그러므로 大 ․ 小乘, 性 ․ 相, 頓 ․ 漸 등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방법은 귀납적이 아니라 연역적이어야 한다. 화쟁사상과 같이 각각의 개념들이 갖는 고유성을 뭉뚱그려 묶어 낯선 공통성으로 장식하는 귀납법이 아니라 각각의 개념들이 갖는 고유성을 인정하면서 그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는 연역법이 보다 자연스러운 인식을 갖도록 할 것이다. ‘중화융합과 一佛乘에 총섭’이란 말은 하기 좋고 듣기 좋은 말이지만, 자칫하면 大 ․ 小乘, 性 ․ 相, 頓 ․ 漸 등이 가진 본래의 개념을 모호하게 하여 변화무쌍한 진리를 인식하는데 있어 오류를 초래할 수가 있다.

 性 ․ 相은 본질과 현상의 문제이고 漸 ․ 頓은 수행 방법의 문제이며, 小 ․ 大乘은 개인과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에 상호 대립적이 아니라 상호 연관적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性 없는 相이 없고 相 없는 性은 준비이며, 漸이 쌓여서 한 순간에 발효하는 것이 頓이다. 小乘이 충실하면 저절로 大乘이 된다. 이렇게 한 줄기 나무처럼 아랫부분과 윗부분의 차이일 뿐 서로 이어져 있다. 승려들과 문중, 사찰에 따라 교리의 차이, 주장의 차이, 실천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각기 아랫부분에서 난 가지와 윗부분에서 난 가지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가지가 있어야 나무가 살 수 있듯이 性漸小 부분에서도 다양한 논리의 가지가 돋아서 뻗어가고, 相頓大 부분에서도 다양한 논리가 펼쳐짐으로써 불교철학이 한층 풍요로워질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지들 모두가 한 줄기에서 나왔음을 잊지 않아야지, 근본을 잊어버리고 말단만 고집한다면 결국 근본이 고사하여 마침내 모든 가지들이 죽을 것이다. 원효의 화쟁론을 깊이 들여다본다면, 각 부분에서 난 가지의 차이에 집착하여 줄기 전체를 잊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에 불교계가 격심한 교리 갈등을 겪고 있었기에 원효가 화쟁론을 주창했겠지만, 반드시 교리 갈등 때문이 아니라 다른 요인, 즉 내부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된 승려들 간의 파쟁이나 사찰들 간의 세력 경쟁 때문이었을 수가 있다. 性 ․ 相, 漸 ․ 頓, 小 ․ 大乘에 대한 교리는 이미 초보적인 것으로 대부분의 승려들이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상호 대립적인 갈등이 있었다면 불교사상계의 수준이 한참 미흡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데에도 원효가 새삼스럽게 화쟁론을 주창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적시하기 보다는 다른 목적을 띄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3. 대승기신론 소 ․ 별기 (권1) (17~98p)

 

(1) 19p 7~11행: 「第一標宗體者 然夫大乘之爲體也 蕭焉空寂 湛爾沖玄, 玄之又玄之 豈出萬像之表 寂之又寂之 猶在百家之談, 非像表也 五眼不能見其軀 在言裏也 四辨不能談其狀, 欲言大矣 入無內而莫遺 欲言微矣 苞無外而有餘, 引之於有 一如用之而空 獲之於無 萬物乘之而生, 不知何以言之 强號之謂大乘」

[음역] 「제일표종체자 연부대승지위체야 소언공적 담이충현, 현지우현지 기출만상지표 적지우적지 유재백가지담, 비상표야 오안불능견기구 재언리야 사변불능담기상, 욕언대의 입무내이막유 욕언미의 포무외이유여, 인지어유 일여용지이공 획지어무 만물승지이생, 부지하이언지 강호지위대승」

[논주] 먼저, 은정희는 다음과 같이 국역하고 있다.

 「처음 종체(宗體)를 나타내는 것은, 저 대승(大乘)의 체(體)체됨이 고요하여 적막하며, 깊어서 그윽하다. (이 대승의 체가) 깊고 또 깊으나, 어찌 만상(萬像)의 밖을 벗어났겠으며, 고요하고 또 고요하나 오히려 백가(百家)의 말 속에 있다. 만상의 밖을 벗어나지 않았으나 오안(五眼)으로 그 몸을 볼 수 없으며, 백가의 말 속에 있으나 사변(思辨)으로 그 모양을 말할 수 없다.

크다고 말하고 싶으나 안이 없는 것에 들어가도 남김이 없고, 작다고 말하고 싶으나 밖이 없는 것을 감싸고도 남음이 있다. 유(有)로 이끌려고 하나 진여(眞如)도 이를 써서 공(空)하고, 무(無)에 두려고 하나 만물이 이(대승의 체)를 타고 생기니, 무엇이라고 말해야 될지 몰라 억지로 이름하여 대승이라 한다.」

 이것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국역해 본다.

 「제일 먼저 종체를 말하고자 한다. 대체로 저 대승의 본질은 고요하여 적막하며 깊어서 그윽하다. 그윽하고도 그윽하나 어찌 만상의 표현 밖이며(나타나지 않는 게 있으며), 고요하고 고요하나 오히려 백가의 말 속에 있다. 만상으로 표현되나 오안으로 그 몸을 볼 수 없으며, 말 속에 있으나 사변으로 그 모양을 말할 수 없다.

크다고 말하고자 하나 들어가도 안이 없어 남음이 없고. 작다고 말하고자 하나 밖이 없음을 꾸러미하고도(감싸고도) 남음이 있다. 유로 이끌려고 하나 일여의 작용이 공하고 무에 얻으려고 하나 만물이 이것을 타고 생기니, 이것을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이름 지어 불러서 대승이라고 한다.」

 

 그런데 몇 구절에서는 기존의 국역이 미흡하여 전체적 의미가 순조롭게 흐르지 못한다. 그 몇 구절에 대한 분석을 통해 기존의 국역에서 미흡한 부분을 밝혀 본다.

 이 글은 대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앞 구절과 뒷 구절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먼저, <玄之又玄之 豈出萬像之表>과 <寂之又寂之 猶在百家之談,>이 서로 짝을 이루며, 다음으로 <非像表也 五眼不能見其軀>와 <在言裏也 四辨不能談其狀>이 서로 짝을 이룬다.

 이어서 <欲言大矣 入無內而莫遺>과 <欲言微矣 苞無外而有餘>가, <引之於有 一如用之而空>과 <獲之於無 萬物乘之而生>이 서로 짝을 이룬다.

 첫째로 <玄之又玄之 豈出萬像之表>과 <寂之又寂之 猶在百家之談,>을 살펴보자.

 은정희는 <(이 대승의 체가) 깊고 또 깊으나, 어찌 만상(萬像)의 밖을 벗어났겠으며, 고요하고 또 고요하나 오히려 백가(百家)의 말 속에 있다>라고 역주하고 있다. 주 2)에서 이기영, 성낙훈, 탄허 등 세 사람의 역주를 예로 들었는데, 앞부분인 <玄之又玄之>와 <寂之又寂之, 뒷부분인 <猶在百家之談>,는 네 사람이 동일하나 뒷부분인 <豈出萬像之表>에서는 각기 다르게 역주하고 있어서 의미가 혼란스럽다.

 이기영은 <어찌 만상을 표출시킬 수 있으며>로, 성낙훈은 <어찌 만상의 밖에 벗어났으랴>로, 탄허는 <어찌 萬像의 밖에 벗어나며>로, 은정희는 <어찌 만상(萬像)의 밖을 벗어났겠으며>로 각각 국역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문제가 되는 한자는 ‘出’과 ‘表’이다. 이기영은 둘을 합하여 ‘표출’로 보나, 성낙훈, 탄허, 은정희는 ‘出’을 ‘벗어나며’로 보고 ‘表’를 ‘밖’으로 보는 점은 같으나, 조사에서 성낙훈과 탄허는 ‘에’로 쓰나 은정희는 ‘을’을 쓰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원효가 이 구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후 문맥을 통해 살펴보면, 분명 (이 대승의 체가) 현묘하고도 현묘하기 때문에 마치 형체가 없는 추상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쉬우나 사실은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이 그 현묘함의 표상이라는 것이므로 네 사람이 국역한대로는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선 ‘表’는 ‘밖’이 아니라 나타남, 즉 ‘표현’이어야 ‘出’이 갖는 ‘벗어나다’가 유효하게 쓰일 수 있다. 세 사람의 ‘만상의 밖에(을) 벗어나며’라는 역주는 도저히 뜻이 통하지 않는 비문성을 갖는다. 어찌 만상의 밖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만상의 밖이란 무엇이며 어디인가 하는 문제, 어떻게 벗어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역주대로라면 대승은 몇 차 방정식을 푸는 듯한 매우 난해한 논리로서, 현실적인 간단명료한 논리로 구성된 대승사상을 지향하는 원효의 뜻과는 달리 엉뚱한 지적 유희에 머물기 쉽다.

 그래서 어렵게 읽을 것 없이 원문 그대로 <어찌 만물의 표상을 벗어나겠느냐>, <어찌 만물의 표상 밖이겠느냐>, 즉 <그 현묘함은 만물에 그대로 나타난다>라고 읽으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非像表也 五眼不能見其軀>에서 ‘非像表也’가 문제이다.

 이기영은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로, 성낙훈은 <만상의 밖이 아니건만>으로, 탄허는 <像 밖이 아니건만>으로, 은정희는 <만상의 밖을 벗어나지 않았으나>로 각각 국역하고 있다.

 이처럼 국역이 다른 까닭은 ‘非’ 자에 대한 해석의 차이 때문이다. 네 사람이 이 구절에서 만큼은 서로 다른 국역을 하고 있어서 이 문단의 전체적인 뜻이 난조를 보이고 있다.

 이 ‘非’를 ‘아니면’으로 읽으면 뜻이 풀린다. 즉 <만물의 표상이 아니면> 또는 <만물로 나타나지 않으면>이 되어 이어서 오는 <오안으로 그 몸(현묘의 체현, 즉 대승)을 볼 수 없으며.와 어울린다. 이렇게 하여 <非像表也 五眼不能見其軀>는 앞에서 말한 <玄之又玄之 豈出萬像之表>를 강조하는 말이 된다.

 이어서 오는 <在言裏也 四辨不能談其狀>에서도 ‘在言裏也’가 혼란을 가져온다. 이것을 이기영은 <또 말 속에 숨어있기 때문에>로, 성낙훈은 <언설의 안에 있으나>로, 탄허는 <말 속에 있음이여>로, 은정희는 <백가의 말 속에 있으나>로 읽는다. ‘在言裏’를 앞의 ‘猶在百家之談’에 이어서 직역하면 <백가의 말 속에 있다>가 된다. 그러나 이대로 읽으면 이어서 오는 <四辨不能談其狀>의 ‘사변으로 그 모양을 말할 수 없다’와 상충한다.

 그런데 원효가 앞에서 <寂之又寂之 猶在百家之談>라고 말한 취지에 이어서 생각해 보면, <고요하고 고요함>을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낸 말이 ‘百家之談’이기 때문에 ‘四辨’은 추상적이거나 현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구체적인 말’이란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 이어서 읽어보면 <백가의 말 속에 있지 않으면 사변으로 그 모양을 말 할 수 없다>가 된다. 앞의 ‘非’를 이 두 대구 모두에 적용하면 문의가 활연하게 풀린다.

 다음으로, <欲言大矣 入無內而莫遺>과 <欲言微矣 苞無外而有餘>에 대한 국역은 네 사람이 같은데 대승이 무한하게 크기도하고 지극하게 작기도 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두루 들어있다는 존재론적 측면을 말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引之於有 一如用之而空>과 <獲之於無 萬物乘之而生>는 대승의 작용론적 측면을 말하는데, ‘之’는 주체인 대승이며 ‘有’와 ‘無’가 가상의 목적, ‘空’과 ‘生’이 실제의 변화이며, ‘一如’가 본질이고 ‘萬物’이 현상이다. 또한 ‘引’과 ‘獲’, ‘用’과 ‘乘’이 작용이 된다.

 은정희의 <유(有)로 이끌려고 하나 진여(眞如)도 이를 써서 공(空)하고, 무(無)에 두려고 하나 만물이 이(대승의 체)를 타고 생기니>라는 국역대로 읽어도 무난하나, 그 뜻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유에서 그것(대승)을 이끌어도 진여가 그것을(대승) 사용하여 공이 되고 무에서 그것을 얻고자 해도 만물이 그것을 타고서 생한다>로 읽을 필요가 있다.

 대승이 어떻게 작용하는 가에 대하여 원효가 말하고자 한 바를 살펴보면, 대승은 어느 한 곳에 붙잡아 둘 수 없는 것으로 ‘有’와 ‘無’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며 ‘一如’라는 본질과 ‘萬物’이라는 현상의 양쪽 벽 사이를 오고간다는 것이다. 대승을 ‘有’에 두면 일여가 곧 대승에 작용하여 공으로 만들고, 대승을 ‘無’에 두면 만물이 곧 대승을 타고서 생겨 번성하게 되니, 대승이란 물건은 도저히 종잡을 수 없음이다.

 이 ‘大乘’이란 말은 곧 ‘道’라는 말인데,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원효는 大乘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사유를 펼친다. 「대승기신론」의 곳곳에서 나타나는 노장사상이 담긴 어구에서 볼 수 있듯이 원효는 자기 논리를 전개하는데 있어 노장의 견해를 차용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선을 긋고 있기도 하다. 노자가 ‘玄’과 ‘寂’을 처음과 끝이 있는 평면으로 본다면 원효는 그것을 회전하는 입체로 본다고 할 수 있다. 노자의 현적이 무형이라면 원효의 현적은 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은 두 사람이 생존한 시대적 배경에서 찾아야 한다. 노자는 춘추전국시대를 간고하게 살면서 본질을 추구하는 무위와 은둔 지향이었으나, 원효는 30세인 한창 시절인 서기 646년 삼국통일 준비기에 공주의 남편으로 풍요하게 살면서 본질과 현상의 양면을 함께 보고 취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니 원효와 노자는 대승, 곧 도를 인식하는 관점은 같지만 그 작용과 효용 면에서는 각자 갈라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자가 낫다거나 원효가 낫다거나 비교할 필요는 없다. 둘 다 동일한 인식의 관점을 가졌으나 그것을 푸는 과정에서 시대와 환경의 영향을 받아 그에 알맞도록 변용하였을 따름이다. 노자는 철저한 개인적 삶의 태도를 통하여 시대를 초월하는 법을 제시하였고, 원효는 시대와 민중을 함께 품어나가자는 사회적 삶의 태도를 통하여 현실계를 화엄세상으로 변화시키자는 의지를 제시한 것이다.

 원효는 본질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인식의 무게 중심을 실천적 현상에 두는 현실주의자였다. 삼국통일의 국책에 적극 협력하여 화쟁사상을 주창하여 국력을 결집하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무애행을 펼쳐서 난후의 혼란한 민심을 수습한 실천철학 면에서 뿐만 아니라, 대승의 체가 깊고 고요하나 ‘萬像之表 ’와 ‘在百家之談’을 벗어나지 않는다며 현실적 실천성을 강조하는 대승 개념에 대한 정의에서도 볼 수 있다.

 앞으로 펼쳐질 一萬의 말들은 ‘大乘’에서 나와 화려하게 피다가 다시 ‘大乘’으로 돌아갈 것이다. 즉 대승은 인식의 어느 한 점에 한정되는 개념이 아니라 씨앗이다가 폴이다가 다시 씨앗이 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