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진화론의 기초 「優性에 의한 劣性의 지배」 비판

                                                                                         

                                                                                                                                              山白 박희용

 

 다윈(1809~1882)이 50세 때인 1859년에 발표한 『種의 기원』은 생물진화론의 체계를 확립한 역작으로 생물학사 뿐만 아니라 사상사적으로도 중요한 고전의 하나이다. 다윈은 진화론의 논거로 자연도태설, 적자생존, 생존경쟁 등 세 가지를 제시 한 바, 기존의 학설인 스펜서의 진화론 학설과 헉슬리의 사상운동과 결부되어 19세기 말에 유럽 사회에 널리 보급되었다. 그의 학설은 자연과학분야뿐만 아니라 사회과학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쳐, 마르크스는 『種의 기원』을 “우리들의 견해에 자연사적 기초를 부여 한다”고 평가했는가 하면, 독재자와 지배층에 의해 다윈 진화론의 기초인 「優性에 의한 劣性의 지배」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 反民主主義 사상의 합리화에 이용되기도 했다.

 『種의 기원』은 발표 당시에도 인간 의식과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쳐 근대국가 형성에 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이후의 세계사를 결정토록 했지만, 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문명사관의 기초로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 많은 지성인들은 현대문명이 그 화려한 외형적 발달에도 불구하고 내면에 치명적인 암소를 갖고 있다고 진단하며, 나아가 현대문명의 위기를 넘어 붕괴까지 예상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문명의 논거인 진화론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검증과 치료를 통해 새로운 논리를 개발함으로써 현대문명의 병증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윈 진화론에 세 축인 자연도태설, 적자생존, 생존경쟁의 이론을 현장 생태계에 적용해보면 실제와 일치한다. 생물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거시적 현상을 설명하기에 충분한 이론이다. 그러나 승자만 계속 생존하는 게 아니라 패자도 간고하게나마 생존하다가 다시 경쟁력을 갖추거나 다른 생태계로 옮겨가서 생존을 계속한다는 미시적 관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 세 가지 현상은 생물사회 속에서 뿐만이 아니라 한 개체 내면에서도 일어난다. 진화의 원리가 생물과 생물의 경쟁과 탈락이라는 부정적인 상황만 연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꼭이 외면 생물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내면 생물계에도 적용되기 때문에 이것들은 한 개체의 육체에서 뿐만 아니라 정신에서도 일어난다. 즉 육체도 진화하고 정신도 진화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한 개체가 주위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갈 수 있다. 또한 진화된 개체들이 횡적 연대를 구성함으로서 사회의 진화를 이룬다. 매우 느리게 진행되나 조금씩 쌓인 이 진화의 흔적은 개체들의 유전자에 저장되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

 다윈의 논리대로라면 같은 종 안에서 최후에 생존하는 자는 딱 하나여야만 하고, 다른 종끼리의 생존경쟁 또한 일어나야 한다. 그의 논리대로 추종하면 수많은 종들 가운데 최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논리의 단순화, 목적의 함정에까지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지구 생태계에선 무수한 이종들이 상생공존하고 동일 종 안에서도 크고 작은 수많은 개체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윈의 논리를 액면 그대로 적용할 수만은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윈 진화론을 원본대로 이용한 마르크스와 독재자들이야말로 생물계의 다양성, 진화의 무원칙성을 간과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진화가 자연도태, 적자생존, 생존경쟁 등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물 구조나 기능이 이전보다 발달되지 않을 수 없다. 개체의 잘못된 습관 때문에 개별적으로 퇴화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달한다. 육체도 사회에 적응하지만 정신도 사회에 적응하여 갈등과 투쟁보다는 양보와 타협 쪽을 선호하게 된다.

 인류가 오늘날 지구에 패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리동물의 법칙을 제대로 준수하고자 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하였기 때문이다. 맹수가 비록 강력하지만 개체별로 독립된 생활을 하고 초식동물들이 비록 유약하지만 번식력이 높아 무리가 많은 까닭은, 맹수는 개체 진화 수준에 머물지만 초식동물들은 개체 진화를 사회진화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일반 동물은 진화의 목표를 자기 생존과 무리 보호에만 두기 때문에 진화가 개체 수준에서 되풀이되지만 인간은 목표를 자신과 함께 가족과 사회에 두기 때문에 사회적 진화가 촉진된다. 고릴라나 원숭이보다도 유약한 인류는 영악한 육체진화와 더불어 상대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사회적 진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 되었다. 도덕심과 자비심에까지 정신의 진화가 미칠 수 있었기 때문에 문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며, 특수한 경우에는 전쟁을 선택하더라도 평상시에는 평화를 선호하는 성향이 형성되었기에 인구가 팽창하였다. 정신의 이러한 진화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 인류의 미래가 반드시 절망적이진 않다고 할 수 있다.

 진화라는 말이 갖고 있는 ‘종적으로 앞으로 나아가 질적으로 변화 한다’라는 의미는 변화가 갖고 있는 ‘횡적으로 상태가 바뀐다’라는 의미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진화는 답보나 퇴전이 아니라 한 차원 더 높은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진화에 따라 인류 문명도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윈 시대 이후 진화론 탐구가 심화하면서 나타난 드 프리이스(H. De Vries)의 돌연변이론은 하늘에서 별도로 둑 떨어진 것이 아니라 진화의 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된 결과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 진화라면 돌연변이는 그것이 갑자기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전과 이후의 생물이 형태상으로는 이질적이지만 본질상으로는 동질이다.

 이러한 돌연변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타나면 진화이지만 부정적인 방향으로 나타나면 퇴화가 된다. 그런데 돌연변이는 진화에 쓰이지 못한 유전자 찌꺼기들이 어쩌다 간혹 나타날 기회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진화보다 퇴화가 더 많다. 달리 말하면 진화만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퇴화 역시 자연법칙인 셈이다. 앞으로 수천수만 년 동안, 더 길게는 수억 년 동안 앞으로만 향하는 진화가 계속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가깝게는 인간의 몸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몸의 구조와 형태를 변화시키더라도 그 변화의 한계는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에 진화가 영구히 계속된다고 할 수 없다. 즉 진화가 한계에 이르면 역진화, 즉 퇴화가 진행되어 마침내 생명 발생 초기 단계에까지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진화가 자연법칙이면 퇴화도 자연법칙이 아니겠는가. 문명 역시 일월에 바래다가 마침내 분자 상태로 돌아갈 것 아니겠는가. 또다시 생명이 발생하고 진화가 이루어지고 문명이 발달할 것 아니겠는가.

 해부학적 현생 인류가 출현한지 약 20만 년이다. 네안데르탈인을 이기고 번성하기 시작한지 2만 5천 년 된다. 인간이 그러했듯 호모 사피엔스 줄기에서 새로운 영장류가 출현할 것이다. 진화든 퇴화든 돌연변이든 수만 년 후엔 이 지구상에 현대인의 직계들은 없을 것이다. 다윈 진화론이 거시적 관점으로 보면 적당하지만 미시적으로는 문제점을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시적으로만 올인한 결과로 그 시기가 수만 년 빨라질지도 모르겠다.

 

「優性에 의한 劣性의 지배」는 생존경쟁에서 적자생존을 가져오고 패자는 자연도태 되도록 하는 기본 원리로서 다윈 진화론의 토대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優性에 의한 劣性의 지배」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 反민주주의 사상의 합리화에 이용되기도 했다.>라는 말은 긍정과 부정의 이중성을 갖는다. 민주주의적 사상에서 보면 가당찮은 말이지만 전제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타당한 말이 된다. 더구나 이 말은 공산주의 사상의 한 축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떠받드는 논리적, 생물적인 근거로 이용되면서 인류 현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육체와 정신 두 면 모두 優性과 劣性이 있다. 한 개체 내에서도 우열이 구분되지만 개체와 개체 사이에서의 우열은 편차가 심하다. 우성에 의한 열성의 지배가 계속되고 열성은 자연도태 되지만 승리한 우성과 우성 사이에서도 경쟁이 이루어져서 다시 우열이 구분된다.

 이러한 우열의 구분과 경쟁은 생물 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인간 세계에서는 「優性에 의한 劣性의 지배」가 승자에 의한 패자 멸살이 아니라 용서와 포용의 현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동물들은 자신 이외의 우성을 용납하지 않고 열성은 전부 복속시켜 지배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동물적인 과거 역사를 탈피하고 만인이 평등하다는 민주주의 시대에 결국 진입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생물들에게서 일어나는 우열의 편차는 본능적인 것일지라도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우열의 편차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優性에 의한 劣性의 지배」라는 철학을 反민주주의 사상의 합리화에 이용하는 것은 다윈이 세운 진화의 원리와 목적을 어긋나는 것이다. 다윈이 『種의 기원』 序言의 끝 문장으로 “또한 나는 <자연도태>는 변화의 방편으로 가장 중요하긴 하지만,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다”라고 쓴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였다면 「優性에 의한 劣性의 지배」를 결코 反민주주의 사상의 합리화에 이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류 역사가 진화의 원리에 따라 독재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로 나가는 것이 대세임이 분명한데도 「優性에 의한 劣性의 지배」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이론적 근거로 삼는 공산주의는 正진화가 아니라 曲진화 또는 퇴화일 수밖에 없다. 물론 19세기 말에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자행된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에 대한 분노와 동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그들을 지도해나갈 세력의 명분적 근거로서 「優性에 의한 劣性의 지배」가 이용되었겠지만, 이후에 각국의 공산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전개 과정을 보면 결국 그것이 오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성과 열성에 대한 이론적 차이는 인식했지만 그것이 동물에게는 일반적인 현상이더라도 인간에게는 특수한 경우가 있음을 간과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대적 요청 때문에 사회에 대한 이해와 적용이 성급했다. 그래서 한 세기 만에 공산주의 혁명이 실패하고 말았다. 개체진화의 우열과 사회진화의 우열을 정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사회진화론에다가 개체진화를 강제로 몰입하였기 때문에 사회라는 형식만 강화되고 인간이라는 내용은 왜소해져서 공산주의 자체가 허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학문의 상호 유기적인 구조면에서 보면 인문학이 미숙한 사회과학은 사상누각이 되어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우열의 차별을 인정하면서도 우성이 지배의 전권을 휘두르는 제도가 아니라 열성의 권리를 보장해주는데 묘미가 있다. 동물 세계에서처럼 강자가 약자를 먹거나 지배하는 원리가 아니라 강자는 존엄하되 약자를 보호하고 배려해주는 것을 가치로 하는 정신적 구조를 발달시키고 있다. 그것은 법과 제도에 의해서 보장되기도 하지만 강자의 높은 의식작용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사회가 흩어지지 않고 단단한 결속력을 유지한다. 즉 민주주의 사회는 「優性에 의한 劣性의 지배」를 인정하되 ‘폭력 지배’보다는 ‘평화 지배’의 형태로 발전하는 사회이다. 또한 민주주의 사회는 열성이 우성으로 변화할 수 있는 사회, 우성이 열성으로 변화할 수 있는 유동 사회이다. 그러한 유동성은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어 건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된다. 독재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는 닫힌 구조이기 때문에 생명력이 소진되어 마침내 사라지고 말지만 민주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새 물이 들어오고 헌 물이 나가는 열린 구조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인류가 고안한 사상 중에서 가장 유효적절한 사상인 것이다.

 설혹 수십 년 후에 인구 과잉과 자원 고갈 문제 때문에 인류 문명에 위기가 닥치더라도 진화의 원리에 따라 인류는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소수 엘리트들이 인류를 지도하자는 우성독재론이나 지구 위에 사는 인구를 줄이자는 열성청소론과 같은 극단론이 다시 제기되지 않고서도 문제를 잘 해결할 것이다. 우성이 열성을 폭력으로 지배하는 과거역사가 복원되지 않고도 우열이 모두 공존하는 사회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 당시 유럽 사상계의 화두가 진보와 자유경쟁이었는데, 다윈 진화론은 그에 대한 이론적 근거로서 유용하게 쓰였으며, 1860년부터 1880년까지 20년 동안 자연도태설의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기간은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여 상업자본주의로 진입한 단계로서 다윈 진화론이 본의 아니게도 유럽 식민제국주의의 대외 팽창, 침략정책의 명분으로 이용되었다. 유럽의 강국들은 우열의 논리로 자기들의 불법과 비인도성을 변명하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약소국들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았다. 양심이니 정의니 종교니 하는 것들은 「優性에 의한 劣性의 지배」라는 자연법칙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교양과 예의, 인격과 문화는 유럽 우성의 것이었지 기타 지역 열성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은 물질적 욕구 충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목표에 일치하고, 「優性에 의한 劣性의 지배」라는 다윈 진화론은 약소국을 침략하여 지배하는 논리로서 안성맞춤이었다. 19세기 유럽의 종교, 경제, 철학, 과학은 인간의 양심과 지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인종들의 식민제국주의를 떠받치는 거대한 교각이었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할 적에는 순수한 학문적 목적이었는지 몰라도 사망한 1882년까지 20년 동안 자신의 진화론이 어떻게 변질, 곡용 되는지 현장에서 똑똑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가 진정한 의미의 학자라면 진화론의 변질, 곡용, 오용에 대하여 크게 분노하거나 실망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 문명 전체를 조감하는 인문학적 안목이 미흡한 한 사람의 과학자였기 때문에 자기 조국인 영국의 발전과 백인종의 팽창을 진화의 결과로 받아들여 크게 기뻐하였을 것이다. 결국 진화론이라는 좋은 학문이 국가주의의 기반이 되고 말았다.

 다윈은 진화론을 생물학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했다. 인간 역시 생물이지만 다른 생물들과는 진화의 차원이 다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인간의 진화도 일반 생물들과 동일한 패턴을 밟기 때문에 유럽 문명의 우성은 당연하고 유럽인들에 의한 지구 지배가 정당하다는 신념을 가졌을 것이다. 다윈이 개인적으로는 그런 신념을 안 가졌을지 몰라도 진화론의 추종들은 그런 신념을 당연히 가졌다. 그 신념의 결과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후반까지 한 세기 넘게 이어지고 있는 물질문명의 팽창, 전쟁과 파괴이다. 그러므로 다윈 진화론이 인류 문명사에 끼친 공도 많지만 과 또한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진화가 유럽 백인종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수십 년 느리지만 여타 지역의 유색 인종들에게도 진행되기 때문에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진화가 지구 차원에서 일반화 되었다. 우성이 제아무리 지배하고 말살하려고 했지만 열성은 차분하게 자기 진화를 이루어 마침내 우성에 대항할만한 역량이 되었다.

 백인종의 관점에서 본 20세기의 열성 지역도 동북아시아 지역과 여타 지역의 둘로 나눌 수 있다. 동북아의 한국과 중국은 이미 수천 년의 문명을 가진 국가들로서 비록 군사력분야에선 구미 국가들에게 뒤떨어졌지만 다른 물질문명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정신문화 면에서는 구미 국가들보다 월등했다. 그럼에도 한국이 미국과 영국의 똘마니인 일본에 식민지로 전락하고 중국이 구미 열강과 일본의 침략에 수십 년 동안 시달린 까닭은, 무력이 약했기 때문이지만 무보다 문을 숭상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평화를 사랑하면서도 강력한 무력을 길렀다면 결코 식민지와 반식민지로 전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과 중국은 과거의 공동 경험을 교훈으로 하여 문과 무를 함께 진화시킴으로서 강력한 국력을 이루었다. 나아가 물질문명의 피로와 정신문명의 정체 현상을 보이는 구미 국가들을 추월하여 새로운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창조할 역량을 갖게 되었다. 앞으로 그 역량이 더욱 발전하여 21세기 새로운 인류문명을 이루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다윈 진화론이 내포한 비합리성과 편협성을 걷어내어 올바르게 해석하여 한층 진화된 이론을 정립함으로서 광란의 근대사를 청산하고 인류가 공존공생 하는 대동세상을 성사시킬 것이다.

 

 

                                                                2013년 중추에 안동 열락연재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