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가(장자)


의자였는데
내가앉으니도마였다
베개였는데
내가베니작두였다

  - 김언희,「의자였는데」중에서


나는 자주 악몽을 꾼다. 교련 시간인데 무기고에 갔더니 내 총이 부러져 있다. 다른 아이들은 각자 총을 들고 운동장으로 뛰어나가고 있는데. 또 어떨 때는 출석부를 들고 아침 조회하러 가는데 도무지 교실을 찾을 수가 없다.
헉헉대다 깨어나면 휴 모든 게 끝이다. 아침이 참으로 평화롭다. 내 방이 더없이 아늑하다. 어느 선사의 말처럼 ‘내가 있는 이 자리가 바로 극락’이다.

제임스 조이스는 ‘역사는 깨어나고 싶어 하는 악몽과도 같다’고 했다. 인생은 참으로 살기 어렵다. 하루하루가 전쟁 같다.

켐벨은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음’을 느끼려는 존재라고 했다. 또 장자는 ‘삶은 살아야하는 신비이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아 숙제를 하듯이 산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지쳐있다. 니체는 인간 정신에 대해 3단계의 변화를 말한다. 우리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헉헉대며 걸어가는 낙타의 운명을 거부해야 한다.  짐을 벗어던지고 사자처럼 포효해야 한다. 더 나아가 항상 즐거운 ‘아이’가 되어야 한다.  

즐거운 아이가 되려면 낙타의 꿈, 사자의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악몽을 꾸고 있기 때문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우리는 순식간에 최고의 인간, ‘아이’가 된다.

우리 눈에 보이는 풍경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들이다. 갓 태어난 아기 눈엔 자신과 사물들, 사물들과 사물들이 구별되어 보이지 않는다. 혼돈이다. 그러다 의식이 커가며 바깥에 풍경이 태어난다.
삼라만상은 우리 의식이 창조한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의 작용에 불과하다. 즉 우리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한 괴로움을 피할 수가 없다. 우리 마음은 항상 모든 것을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악, 미추, 길고 짧음, 높고 낮음 등등. 따라서 꿈속에서는 이 이분법의 감옥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산은 산으로 물은 물(성철)로 보일 때까지 우리는 고통스럽다. 맑디맑은 물엔 삼라만상이 그래도 비친다. 우리 마음이 맑디맑아 마음이 느껴지지 않을 때,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희로애락의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장자는 지극한 즐거움은 즐거움 없음(至樂無樂)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