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늙어가는 것에 대해

              박래녀

 

당신은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셨습니까? 마음은 청춘이라지요. 그 말에 반박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지천명을 넘길 때까지는, 아니, 팔순이 넘어도 마음은 청춘이지요. 미래보다 과거의 모습에 집착하고, 젊은이처럼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지요. 다리에 힘이 빠지고, 여기저기 아픈 곳이 생길 때쯤이면 건강식품이다. 한약이다. 양약이다. 머리맡에 약 소쿠리 챙겨놓고 밥은 안 먹어도 약은 먹지요. 곧 뛰어다닐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면서.

 

팔순 노인이 되어도 지팡이 짚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유모차 밀고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그러다가 알지요. 지팡이나 유모차 없이 삽짝 나서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유모차를 밀고 지팡이를 짚지요. 날이 갈수록 그것과 익숙해져서 내 몸처럼 되어버려도 마음은 청춘이지요. 내가 기운이 왜 빠지는 것일까. 무엇을 먹어야 펄펄 기운이 살아 오를까. 시도 때도 없이 자식들을 괴롭히게 되지요. 전화만 하면 앓는 소리를 내지요.

 

처음 어린애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라 부를 때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지요. 나, 아직 할아버지 할머니 소릴 들을 만큼 늙지 않았어. 아저씨, 아줌마라고 불러 줘. 애원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아들딸이 과년해서 시집 장가보낼 나이란 것을 깨달을 때면 손자 손녀를 안고 싶지요. 손자손녀가 시집장가 갈 나이가 되어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죽어야지 하면서도 생명에 대한 집착은 좋다는 약품, 좋다는 건강식품을 두루 섭렵하고 싶지요. 좀 더 젊게 살고 싶다는. 이 좋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억울하고 아깝지요.

 

장성한 자식들 집 떠나 제 식솔 거느리고 살아도 부모는 자식이 떠난 것을 인정할 수 없지요. 언제나 부르면 달려와 줄 것이란 믿음이 철통같지요. 이래라저래라 늘 지시하고 품어주려고만 애쓰지요. 상노인이 된 어느 순간, 늙은 남편은 늙은 아내에게 젊어서부터 해 왔던 것처럼 변함없이 받들어 모시기를 바라고, 당신 건강만 챙기지요. 늙은 아내는 남편 수발드는 것도 지겹고, 밥 해 먹기도 싫고, 두 사람이 입고 벗는 옷가지조차 씻기 싫고, 집안 청소나 자잘한 살림 하는 것이 지겨워지지요. 며느리가 밥상을 차려다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요. 노모나 노부는 첫째 맏며느리에게 의탁하고자 합니다. 맏이는 당연히 부모를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예전에 자신이 그러했듯이, 대가족 제도 일 때야 당연지사로 받아들였던 일이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언감생심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맏이가 부모를 모실 수 없다고 하면 길길이 화를 내지요. 그러다 두 번째, 세 번째, 편한 자식을 찾지요. 순한 며느리, 말 잘 듣는 며느리에게 집착을 하지요. 보살피면 보살피는 것보다 더 보살펴 달라고 보채게 되는 나이가 옵니다. 여든이 넘으면 이승보다 저승길이 열려 있는데도 노인은 모릅니다.

 

몸이 아프다거나 병원행일 때 처음에는 자식들이 모두 놀라 달려오지요. 부모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줄 듯이 설치지만 두 번, 세 번, 거듭되면 자식에게 부모가 참으로 무거운 짐이 됩니다. 요즘은 편하게 요양원으로 직행 시키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돈만 있으면 요양원 행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지요. 오십대 부모는 누구나 늙으면 요양원 들어가겠다고 대답합니다만 막상 팔십이 넘어서면 그 마음이 그대로 보장 될까요? 일단 요양원에 들어가면 죽어서 나옵니다. 처음에는 자식들이 자주 찾아뵙지요. 가진 돈이 있으면 만고 편한 백성이지요. 요양원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프면 약 주고, 때 되면 밥 주니까요. 요양원 생활이 길어지면 자식들이 슬슬 찾아오는 횟수가 줄어듭니다. 이젠 돌아가시라는 암묵적인 뜻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어떤 할머니는 영감님 돌아가시고 오래 혼자 살았어요. 기운 있을 때는 품삯 일도 하고, 희망근로도 나가며 잘 살았지요. 가끔 들어다보는 자식들도 예뻤지요. 자식들이 주는 용돈 모아놨다가 힘들어 죽겠다는 자식이나 손자에게 목돈 주는 재미도 있었지요. 하지만 어느 날부터 기운이 빠집니다. 끼니 챙겨 먹는 것도 귀찮아 집니다. 자식에게 아프다고 자꾸 전화를 넣습니다. 처음에는 부를 때마다 어김없이 달려오던 자식들도 슬슬 꽁무니를 빼더랍니다. 요양원에 넣어 달라고 했답니다. 자유의지로 들어간 요양원이라 참으로 편하고 좋더랍니다. 주말만 되면 온갖 먹음직스러운 음식 바리바리 싸서 면회 오는 자식들 덕분에 행복하더랍니다. 그러다가 슬슬 자식들 발길이 끊어지니 외롭더랍니다. 집에 보내달라고 떼를 썼지요. 집으로 왔어요. 오랜만에 집에 오니 살 것 같더랍니다. 한동안 집에서 생활했는데. 금세 밥 챙겨 먹는 게 싫더랍니다.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갔지요. 얼마 전, 그 할머니 검은 리무진 타고 선산에 묻혔습니다.

 

사람의 일생이 그렇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지내는 부모 제사도 지내기 싫어하는 며느리가 속출하는 세상입니다. 겨우 이틀 고생하면 끝나는 제산데도. 그렇습니다. 며느리도 늙어가기 때문입니다. 늙으면 몸이 아파지고, 만사 귀찮아지기 때문입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이 들어 쩔쩔 매게 되면 제사가 무슨 소용 있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때쯤이면 자신의 늙음만 생각하지 자신도 돌아가신 부모와 똑 같이 제 자식에게 그런 대접을 받으리란 생각조차 안 하는 겁니다. 물론 얼마간은 잘하고 싶지요. 부모 모습이 바로 뒷날 내 모습이란 것을 아는 자식이나 며느리라면 그 부모에게 조금이나마 더 잘 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지요. 그 노력이 치매로 이어지거나 뇌졸중 같은 중병으로 명보전만 하고 눕게 되면 요양원 행이지요. 요양원 생활이 오래되면 매달 들어가는 요양원 비가 아깝습니다. 처음에는 못 모시니까 그 정도는 지출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한 해 두 해 시부모 명줄이 길어지면 매달 나가는 돈이 짐이 됩니다. 가족간의 다툼이 또 일어나지요.

 

부모는 자식의 그런 냉정함을 알까요? 아닙니다. 요양원에 들어가도 더 오래 이 좋은 세상을 살고 싶습니다. 입맛 없다하면서도 산해진미 먹고 싶습니다. 기운 없다 하면서도 사철 꽃구경, 단풍구경 다니고 싶습니다. 쓸쓸한 노후가 시작되는 것은 너무 오래 살기 때문이란 것을 잊어버립니다. 한동안 자식에 대한 원망도 있겠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원망하는 마음은 그리움으로 바뀌고, 치매는 현재를 잊고 행복했거나 불행했거나 과거 어느 시점에서 놀게 되지요.

 

오래 사는 것이 형벌이란 생각을 합니다. 오래 사는 것이 죄인이기도 합니다. 전생에 얼마나 업이 많으면 불면 날아갈까, 떨어지면 다칠까, 금지옥엽으로 키운 자식에게 홀대를 받으면서도 명줄을 놓지 못할까요. 인간의 한 생이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아. 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주팔자를 모르니 알 수 없지요. 내 명이 얼마나 될지 어떻게 알겠어요. 가능하면 건강할 때 죽는 것이 행복입니다. 내 생각은 일흔과 팔순 사이가 가장 죽기 좋은 나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내 나이가 벌써 환갑을 바라보기 때문은 아닐는지요.

 

바야흐로 봄이 깊어가는 마당입니다. 매화꽃 푸지게 피더니 지고, 진달래와 개나리는 아직 만개했습니다. 엊그제부터 앵두꽃이 피기 시작했군요. 송이 째 뚝뚝 떨어져버린 동백 잎은 기름을 바른 듯 반질반질합니다. 화살나무 잎과 찔레나무 잎은 제법 푸른빛이 무성합니다. 겨우내 뼈만 앙상하던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끝에도 구기자 열매만한 잎눈이 돋았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앙상한 가지를 소담스럽게 감싸겠지요. 이렇듯 자연은 사계절을 어김없이 돌아 제 자리에 옵니다. 인간의 한 생도 그렇습니다. 나무 한그루가 해마다 나뭇잎을 떨어뜨리고 다시 피우듯 부모가 죽고, 자식이 부모가 되었다가 부모와 비슷한 길을 걸어 죽고 나면 그 자식이 또 부모가 됩니다. 우주 섭리고 순환이지요. 당신도 늙어가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201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