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학사상과 도학사상의 관계

 

                                                                                                                                             개산양백 박 희용

 

모든 학문은 인간정신의 표현이기 때문에 넓게 보면 목표와 본질이 같으나, 학문마다의 특성에 따라 구분한다면 불학과 유학이 갈라지고, 또 유학도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심학과 도학이다. 도학은 소학을 중심 경전으로 하여 일관되게 전해지나 심학은 대학과 주역을 중심 경전으로 하나 양명학과 성리학으로 갈라져서 저마다의 깊이를 더했다. 물론 성리학자들 모두가 도학을 기반으로 하여 심학을 연구하였지만, 엄밀히 구분한다면 도학자와 심학자는 목표론적인 면에서 구분된다. 도학이 유학 본래의 학풍에 충실하여 현실적인 실천을 위주로 하였다면 심학은 리기론과 인성론에 집중하여 관념적인 논증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목표하는 바가 상이했다.

이런 기준을 적용하여 실학을 본다면, 실학은 기존의 성리학적 관념의 세계보다는 고전유학에 뿌리 한 도학을 다시 뿌리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형원 ․ 이익 등 실학의 거봉들이 율곡과 퇴계로부터 학문적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것일 뿐이고 전체적인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더구나 율곡과 퇴계는 성리학자로 이름이 남았지 실학자로 자리매김 받지는 않기 때문에, 실학이란 유형원과 이익의 독창성이 도학에 뿌리를 두고 발흥된 학문이 아닐 수 없다. 율곡과 퇴계 중에서 누구의 학문이 실학에 더 영향을 끼쳤을까를 분별한다면, 율곡이 도학자인 조광조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음에 비하여 퇴계는 리기론자인 이언적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므로 율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학에 영향을 준 선학이 율곡이냐 퇴계냐 하는 것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영향을 따지는 까닭은 실학파 내부에도 있지만 외부에도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현대에 들어서면서 실학이 재조명을 받다보니, 현대 실학자들 가운데에는 자기들의 학맥을 조선 성리학의 학문세계에 접목시켜 역사성을 보장받으려 하고, 현대 성리학파들 가운데에는 실학을 자기들의 영역 안에 흡수하여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 유형원, 이익, 정약용 등 실학자들의 저서를 총체적으로 보지 않고 자기들 학파에 유리한 부분들을 발췌해서 강조하다보니 ‘영향’이란 말이 쓰이게 된 것이다. 물론 실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물건이 아니라 기존의 학문을 자양으로 하여 개발 된 것이다. 하지만 지향하는 바는 성리학과 달랐다.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의 <오학론>에서 보듯 실학의 출발점은 기존 성리학 세계의 부정이었다. 15세기 이후 200여 년 동안 조선의 주류 학문으로 행세해온 성리학이 분명 환부를 앓고 있음을 직시한 유형원이 17세기 들어 겨우 일으켜 세운 학문이 바로 실학이다. 이후 200여 년 동안 실학자들이 성리학자들과 치열한 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탄압을 받아 패배하고 말았지 아니한가. 그 탓에 조선은 패망의 나락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실학과 성리학은 엄연히 구분되지 않을 수 없는 역사적 책임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이다. 탄압의 중심이 율곡을 종장으로 하는 서인-노론 세력이었으니 하물며 율곡은 실학과는 정신이나 실천면에서 상이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실학에 끼친 성리학자들의 영향을 논하고, 실학을 성리학 속에 포함시키려는 것은 학문의 본질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지나친 말일지 모르지만 인간 심성에 근본을 파헤쳐 보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선과 악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 선인이 한 때 악 쪽으로 흐르지만 곧 회귀하는 것은 선의 磁場이 강하기 때문이요, 악인이 잠시 선의 흉내를 내지만 곧 돌아가는 것은 악의 자장이 워낙 강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상 學人들도 선과 악의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학문을 함에 경건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며, 안으로는 나를 충실하게 하고 밖으로는 이웃과 사회를 위함에 있으며, 축적한 학문이 잘 발효되어 지혜가 밝고 겸손한 자는 선한 학인이고, 축적한 학문의 양만 매일 재며 안으로 자기 존재에 만족하고 밖으로 과시하려고 하는 자는 악한 악인이다. 善學人은 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간구하나 惡學人은 고이지도 않았는데도 달달 긁어서 퍼내기 바쁘다.

시대를 좁혀 조선조 때만 보더라도, 많은 학인들이 있었지만 전부가 선 또는 전부가 악이라고 단정 짓지는 못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두 종류로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특히 조선 중기부터 대두된 민생 문제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실천했느냐의 여부에 따라 뚜렷이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학계 평가에서 실학자라는 소리를 듣는 학인들은 대부분이 선학인이 될 것이고, 17세기 말 경에 거의 정리된 태극론, 리기론, 인성론 등을, 인간의 내면적 본질은 시대를 초월하므로 궁구하여 끝까지 밝힌다는 명분으로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진 자들, 진지한 학문적 탐구 목적이 아니라 자가 도취적 지적 유희, 자기 과시의 수단, 명문벌족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교과서로 이용한 자들, 현학적인 관념론에만 집착하여 공리공론을 일삼은 자들, 실학을 하학이라고 모멸한 자들, 오로지 공부만 한답시고 생업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 모두가 악학인이 될 것이다.

오늘날 실학에 대한 평가가 상승하면서 실학자들에 대한 탐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 실학의 연원과 계보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작은 물줄기라고 할 수 있는 유형원과 저수지라고 할 수 있는 이익이 선대의 누구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는가가 관심사로 부각하고 있다. 학자들에 따라 크게 두 가지 학설, 조광조-이이의 설과 이황의 설이 있다.

반계와 성호 두 사람 모두 선현들의 학문을 사숙하면서 그 요체를 자기화한 독학 중심이었지 사사받은 스승이 없다. 즉 실학의 연원은 어느 누구라고 특정 지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학 계통에서는 이이로, 퇴계학 계통에서는 이황으로 실학의 연원을 규정짓는 것은 반계와 성호의 독공력을 가볍게 보는 게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내내 지겹도록 싸워서 식상한 퇴율논쟁, 사색당파의 잔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실학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앞서의 선학들이 축적한 학문 업적을 밑거름으로 하여, 이전의 많은 성리학자들이 중시한 본질론과는 달리 현상론을 중시한 새로운 관점의 학문이다. 실학자들이 현상론을 중시한다고 해서 본질을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니다. 관념론자들은 본질에만 집착하고 현상은 매우 가볍게 여겼지만, 실학자들은 본질은 현상을 통해서 발현되고 현상은 본질에 따라 형성된다는 등가의 관점에서 본질과 현상을 보았다.

본질을 추구하면서도 그 발현인 현상을 무시하는 것은 씨앗을 일 년 내내 시렁에 매달아 놓고 즐기는 것과 같고, 본질을 소홀히 하고 현상만을 중시하는 것은 뿌리 없는 꽃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나날이 쇠퇴하는 국운이 눈앞에 빤히 보이는 조선 말기에도 대를 이어 본질론에 집착한 명분론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실학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실학자들은 소수로 변방에서 풍우를 맞음으로써 조선 성리학은 수명을 다하였다.

시대 변화에 둔감한 명분론자들 모두 惡學人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학문을 하는 목적 중의 하나는 시시비비를 분명하게 가리는 것이다. 국망에 이르게 한 원인을 하나하나 규명하고, 시대마다 그 중심에 섰던 인물들에 대한 검증과 혹독한 비판을 통해서만 다시는 그러한 오류가 미래에 발생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그래서 선과 악, 이분법의 잣대가 필요하다.

 

인간은 정신과 육체의 조합으로, 이 중 어느 하나가 없으면 존재가 성립할 수 없다. 정신은 사고 작용을 하는 이성과 감성이란 두 개의 속성을 가졌고 육체는 취득 작용을 하는 욕구와 감정이란 두 개의 원초적 본능을 가졌다. 이성은 순차적 질서를 준 상태의 객관적 사고이며 감성은 다양한 가변성을 준 상태의 주관적 사고이다. 이 두 개의 사고 작용이 교직하면서 이루는 것이 정신이다. 날줄이나 씨줄 하나만으로는 옷감이 짜여질 수 없듯이 이성이나 감성 하나만으로는 인간이 올바르게 설 수 없다. 흔히들 감정과 감성을 혼동하여 감정이 정화된 상태를 감성이라고 하는데, 감정은 육체의 즉각적인 반응이며 감성은 사고 작용의 한 면이라는 차이를 갖는다.

육체의 취득 작용인 욕구와 감정은 이기적 활동이 왕성하다. 그러나 이기적 활동만 활발하면 다른 인간들과 상충하게 된다. 그래서 조절과 타협이 필요한데, 그 때 사용되는 것이 정신이다. 이성은 직선적 사고, 감성은 곡선적 사고로서 상호 보완한다. 직선만으로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고 곡선과 어울려야만 하듯이 정신 역시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온전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성에 근거를 둔 도학과 감성에 근거를 둔 사장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 인간이나 사회, 국가가 온전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한쪽만을 숭상하게 된다면 반드시 후유증이 발생하게 된다.

무인시대를 초래한 고려조 때의 부화한 사장풍조도 경계해야 하지만 도학 일변도를 강제한 조광조 등 신진 사림들의 행보 역시 경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의 착점과 행마가 결국 자기 숨통을 자기가 조여서 조선이란 대마가 질식사하도록 하였으니 도학 숭상은 학문적 패착이 되고만 것이다. 교각살우, 살아서 펄펄 뛰는 생물인 인간사회가 소학 책 속에 강제로 넣어지는 바람에 그만 시들고 말았다. 조광조 이후 성리학자들의 찬란한 학문 업적이란 겉으로는 백성 교화라는 명분을 달았지만 속으로는 양반층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무기였다. 성리학 자체가 논리적 모호성을 최대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학문에서, 유명세를 타면 반드시 부패한다. 한 학자가 유명해지면 모든 사람들이 그리로 우우 쏠려서 우상으로 받든다. 우상은 마침내 영원불변의 진리가 되어 종교적 절대가 된다. 동시에 미이라가 되어 단상에 모셔진다. 영원히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이 영원히 살아 있으려면 끊임없이 비판 과정을 겪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조선이 살아있으려면 초기에 학문의 다양성이 인정되었어야 했다. 학문과 정치가 확실하게 구분되어야 했다. 학문하는 자들이, 특히 과거 급제 한 성리학자들이 권세와 학문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 자기 학문을 고집한 탓에 정치가 학문의 하수가 되고 말았다. 학자들은 초야에서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고 경세가들은 조정에서 정책 개발에만 치중하였다면 조선의 역사가 확연히 달라졌을 것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높은 관직을 역임한 자들은 이미 학자가 아니라 관료일 뿐이다. 즉 수신제가치국평천하란 명분 자체가 허구였다. 유학, 성리학 자체가 가진 현실 지향성이란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학만이 유일이 됨으로써 장기적으로 보면 이득보다는 손해가 훨씬 많았다. 한 시대의 것에 만족해야 할 조광조의 도학이 후세에까지 남는 바람에 조선의 역사가 굴레를 꿰이고 말았다. 최영성 저 『한국유학통사』 600p의 김정국의 『사재집』에서 언급된 조광조의 행적을 보면 아직 수신이 제대로 되지 않은 면을 볼 수 있는데, 조광조 그가 좀 더 수양이 된 40대 이후에 현달하였더라면 도학과 개혁이 착실히 추진되어 개인이나 국가나 모두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