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과 마음의 관계

- 금장태 박사의 「인간존재의 근본구조」 논주

 

양백산인 박희용

 

 

철학박사 금장태가 쓴 『儒學思想의 문제들』제2장 「유교의 인간이해」2절 「인간존재의 특성」2항 「인간존재의 근본구조」32p 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인간의 생명은 생물학적으로는 육신의 기능에 연결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인격적으로는 마음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음은 육신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은 아니나, 육신을 명령하고 주재하는 지위에 있는 존재이다. 마음도 육신의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인간생명의 주체는 마음으로 이해된다. 성품과 욕망은 모두 마음에 깃들어 있으면서 각각 하늘과 땅에서 근원하는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유교이념에서는 하늘로부터 부여된 성품은 순수한 선이요, 보편적 이치이며 불멸적인 존재라 인식되고 있다. 욕망과 연결되어 있는 육신은 선의 기준으로부터 이탈하기 쉬운 가능성을 가진 충동적 힘이요, 개체적이면서 가멸적 존재이다. 마음은 선과 악이 실현되는 계기요 현장이며, 개체적이고 가멸적인 충동을 그릇으로 삼아, 보편적이고 불멸적인 이치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 양자를 결합하는 인격의 중심을 가리킨다. 따라서 마음은 인간이 성품을 발견하여 하늘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필수적인 통로라 할 수 있으며, 하늘이 세계를 주재하는 지위에 상응하여 인간 자신의 신체를 주재하는 지위에 있음을 주목한다.」

 

금 박사의 유학 공부는 이중 구조를 가진 듯하다. 학부 시절에는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에서 공부하고 대학원 시절은 유학의 본산인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공부하여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력에서 보듯 그의 유학관은 종교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의 저서 곳곳에서 학문으로서의 유학보다는 종교로서의 유교를 강조하는 논지를 읽을 수 있다.

위의 글 중 ‘마음은 하늘이 세계를 주재하는 지위에 상응하여 인간 자신의 신체를 주재하는 지위에 있음’이라고 하며, 비록 인격신이라고 직접 지칭하지는 않지만 하늘을 큰 신으로, 마음을 신체를 주재하는 지위, 즉 작은 신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육신<마음<하늘’이라는 종교적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하여 논리를 전개함으로서, 성리학이 갖고 있는 학문성보다는 원시유학의 제례성을 강조함으로서 수많은 저작활동에도 불구하고 유학의 다양성과 각 학파들에 대한 심도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편이다. 학문으로서의 유학이 심화되어야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갖는 것이지 종교로서의 유교가 강조되어서는 개인적 수양이나 전통 유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이제 전제된 글을 분석해 보자.

앞 문단에서, 금 박사는 육신을 말할 때는 ‘있겠지만’, ‘것은 아니나’, ‘받을 수 있지만’이란 연결어미를 사용하여 육신의 존재 가치를 일단 인정하는 모호성을 보인 다음에, ‘볼 수 있다’, ‘존재이다’, ‘이해된다’, ‘구분될 수 있다’라는 확정형 종결어미를 사용하여 마음의 존재를 강조하고 있다. 육신은 존재와 가치가 희미하지만 마음은 뚜렷하다는 마음 우선, 즉 종교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연결어미의 모호성을 걷어내고 육신과 마음의 관계를 직시하면, ‘받을 수 있지만’이 아니라 마음은 육신의 영향을 깊이, 절대로 받는다. 육신의 현상적 표현이 마음이다. 인간생명의 주체는 마음이 아니라 몸이다. 마음이 잉태되는 게 아니라 몸이 먼저 잉태된다. 몸이라는 그릇이 마련되어야 마음이 그 속에 담긴다. 그릇이 깨어지면, 즉 몸이 흩어지면 마음도 새거나 흩어져버린다. 그러므로 마음은 몸의 종속물이다.

그러나 시간이 누적하여 마음이 성숙하면 앞나서서 몸을 이끈다. 태어나서부터 유년기까지는 몸의 욕구에 따라 마음이 움직이나 몸이 계속 성장함에 따라 마음도 성장한다. 20세경에 몸은 성장을 완성하나 마음은 계속 성장하여 드디어 몸을 이끄는 위치에 오른다. 마음의 성장이 올곧게 된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으나, 마음의 성장이 짧거나 왜곡된 사람은 육신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다.

마음의 근본은 육신이기 때문에 마음이 앞나서서 육신을 이끌더라도 근본인 육신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육신의 욕망은 물이나 불과 같기 때문에 물이 순리로 흐르도록 하는 게 중요하듯 육신의 욕망이 순리로 흐르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고 불은 활동의 근원이다. 물과 불이 알맞은 때와 곳에서 상호작용을 원활히 하면 생명이 윤택하다.

마음의 고결성을 강조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지나치면 육신을 피폐하게 한다. 육신의 욕망을 무조건 저열한 것, 추잡한 것으로 치부하고서 오로지 마음의 순수성만을 추구하면 편협한 唯心論으로 흐르게 된다. 그리하여 육신을 음지에 가두고 마음을 양지에 내놓아 홀로 설치게 하면, 꺾어온 꽃이 곧 시들 듯이 육신이란 물과 토양에서 분리된 마음은 곧 시들고 만다.

마찬가지로 물질의 조합체인 육신의 욕망을 본질로 보고 마음이란 것은 육신의 허상으로 보는 唯物論 역시 온당하지 않다. 그렇다고 유물론과 유심론의 조화를 말하는 것은 논리를 모호하게 만드는 가식이다. 유물론을 중심한다하여 마음의 가치가 훼손되는 게 아니다. 유물은 마음의 바탕이다. 마음이 꽃나무라면 유물은 화분이다. 화분이 튼실하고 그 속에 든 흙이 비옥해야 꽃나무가 잘 자란다. 육신이 튼실하고 영양상태가 양호해야 마음의 꽃나무가 잘 자라고 마침내 개화하여 꽃과 열매를 맺는다.

유물론에 덮씌워져 있는 19세기적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걷어내고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물질을 강조한다고 하여 정신이 무시되거나, 정신을 강조한다고 해서 물질이 무시되어서는 온전한 인간 삶의 양면을 보았다고 할 수 없다. 육신이 있어서 마음이 있는 것이지 육신이 소멸하면 마음 역시 따라서 소멸하고 만다. 생시에는 마음이나 죽으면 靈魂이 된다고 하는데, 靈魂은 죽은 자의 모습과 언행이 산자들의 관념상에 떠오른 影像일뿐이다. 육신의 끝이 마음의 끝이다.

마음은 고결하고 육신은 저열하다는 고정관념에 묶인 사람들은 유심론을 적극 주장하면서 유물론을 뱀 보듯이 한다. 육신은 허상이 아니라 본질이고 마음의 근저이기 때문에 유물론 역시 고결하다. 육신의 욕망은 생명체를 존속시키기 위한 생리적 현상일 뿐이지 도덕적 잣대로 재단할 대상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배가 고프면 울고 목이 마르면 액체로 보이는 것이면 아무 것이나 마신다. 마음이 성장하지 않는 동물들은 육신의 욕망에 따라 자동적으로 행위한다. 그러나 몸의 성장에 따라 마음이 성장하는 인간은 차츰 육신의 욕망을 조절하거나 통제할 줄 알게 된다. 동물의 세계에서 보더라도 독립생활을 하는 맹수들은 육신의 욕망에 투철하지만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사회생활에 적응하면서 대체로 온순해진다. 마찬가지로 고독한 인간은 육신의 욕망에 탐닉하지만 사회생활에 익숙한 인간들은 마음이 육신의 욕망을 조절한다. 마음이 모습을 온전히 갖추게 되면 유물론이 환골탈태 하여 마음이 쑥쑥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자양분이 된다. 즉 유심론이 유물론을 앞서는 단계가 된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이런 단계에까지 오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물과 유심의 경계에 머물며 오락가락한다. 마음의 성장이 육신의 성장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은 범죄의 가시밭길을 걷지만, 육신의 성장에 맞게 마음이 성장한 사람이라도 어떤 사안에 닥쳤을 때 마음으로는 통제를 하고 싶지만 과도한 육신의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서 사회적 해를 끼치기도 한다. 생물인 이상 누구나 사회적 가치보다 개인적 욕망을 우선하는 게 사실이다. 단지 사회적 통제 때문에 마음속에 잠복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내공이 깊은 도덕군자라 하더라도 마음속에서는 욕망이 갈등하고 아찔한 유혹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진다.

그러므로 유교이념에서처럼 인간의 성품은 하늘로부터 부여된 순수한 선이요 보편적 이치이며 불멸적인 존재라고 확언할 수 없다. 또한 권근이 「입학도설」제1도인 「天人心性合一之圖」에서 말한 대로 육신이 욕망과 연결되어 선의 기준으로부터 이탈하기 쉬운 가능성을 가진 충동적인 힘이요 개체적이며 가멸적인 존재인 것은 분명하지만, 마음이 꼭하게 선과 악이 실현되는 계기요 현장이며, 육신의 욕망을 그릇으로 삼아 보편적이고 불멸적인 이치를 받아들여 마음과 몸을 결합하는 인격의 중심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육신은 시공간적 제약을 받아 한계를 갖지만 마음이 인간의 성품을 발견하여 하늘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필수적인 통로인 것은 분명하다. 물론 그 통로의 외벽은 육신이다.

인간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은 생명이다. 이때 말하는 ‘하늘’이란 어떤 인격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말하며, 생명은 가깝게는 부모로부터 받았지만 근본적으로는 대자연으로부터 받았다. 즉 대자연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이 갖고 있는 섭리는 동일하다. 대자연의 기와 리가 한 점에 응집되어 內循環을 시작한 것이 생명이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 外循環을 위해 흩어지는 시점이 사망이다. 물질의 본질인 원자와 그 결합체인 분자들이 육신을 형성하여 생시 동안 내부에서 순환하다가 분자의 산화작용으로 인하여 피로 물질이 누적되어 한계에 이르면 자연적으로 분해, 소멸작용이 일어난다. 한 개체에서 내순환을 종료한 원자들은 다시 대자연 속으로 흩어져 외순환을 하다가 다시 한 개체 속으로 들어가 내순환을 시작하여 생명체를 형성한다. 이렇듯 지구상의 모든 생물과 무생물은 화학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나비효과’에서 보듯 물리적인 면에서도 서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지구의 생명체는 서로 존중하여야 한다.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는 내순환과 외순환으로 연계되어 있고, 그 외연은 우주 전체로 확대되므로 인간의 육신과 마음이 갖는 고귀한 가치와 함께 그 한계를 적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생성은 소멸을 전제로 하여 시작된다. 생명은 시작이고 사망을 마침이다. 지구가 갖고 있는 물질의 질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한 개체 내에서만 내순환이 무한정 계속되면 다른 개체들이 새로 형성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다. 한 개체가 소멸되어야 그가 갖고 있던 질량이 외순환을 통해 다른 개체의 내순환으로 옮겨갈 수 있다. 모든 인간들이 자기만은 무병장수하기를 바라는데, 내순환과 외순환의 원리로 보면 그것이 얼마나 헛된 욕망인지 알 수 있다. 무조건 무병장수를 탐내기보다 내가 갖고 있는 내순환의 기간을 충실하게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사고, 독수, 독물 등으로 내순환 기능을 망치지 않으면 하늘이 부여한 수명을 다할 수 있다.

생물과 무생물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문명과 인류의 세계에도 지구질량불변의 법칙은 적용된다. 식자들은 물질문명의 팽창과 인구의 팽창으로 인하여 지구가 갖고 있는 자원 고갈로 인하여 인류의 멸망이 멀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인류 중심의 고정관념의 소산이다. 50억년이나 되는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주인으로 등장한 것은 불과 만년이 안 된다. 그동안 써버린 지구자원은 인류의 문명을 위한 것이었지 지구에 사는 다른 생물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즉 인류는 자기 몫의 자원을 자신만의 내순환을 위해 모두 소모하였기 때문에 지구 전체적 차원의 외순환 원리에 의해 필연적으로 소멸 시점을 맞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소멸되고 난 다음에는, 앞으로 지구가 수십억 년의 미래 역사를 갖기 때문에 공룡시대처럼 어떤 다른 생물체가 자기들의 번식에 적합한 자원을 이용해서 번성할 것이다.

인류의 미래가 걸어 갈 향방은 발전, 극성, 쇠퇴의 외길이다. 인간의 번식본능 때문에 인구가 한 세기마다 배로 증가할 것이고, 지능의 발달에 따라 문명은 더욱 발달할 것이고, 인류문명은 물질을 섭취, 소화, 배설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 할수록 가용 물질의 양이 줄어들 것이고, 가용물질이 부족할수록 인간 대 인간, 지역 대 지역, 민족 대 민족, 국가 대 국가, 인종 대 인종 간에 갈등과 전쟁이 빈발할 것이다. 전쟁이 극도에 도달하면 핵이 사용될 것이고, 핵겨울은 지구를 빙하기에 강제로 들게 하여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들의 절멸을 초래할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성주괴공, 춘하추동, 극성쇠락 등의 원리가 인류문명사에 그대로 적용될 것이다. 하지만 지구는 수십억 년 동안에 걸쳐서 몇 번 되풀이 했듯이 그 혹독한 핵겨울 빙하기를 자연스럽게 극복할 것이다. 그리하여 수백, 수천만 년 후에 다시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새 세상은 인류의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군집성의 사회적 동물이고 지능이 우수하기 때문에, 진화의 원리를 간파하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서로 살상하다가 공멸하는 핵겨울 빙하기를 피하기 위하여 노력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다. 그러한 노력은 크게 두 가지, 물질과 마음 두 분야에서 이루어진다.

물질 분야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적정한 인구 유지이다. 국가 단위나 지역 단위로 적절한 인구 정책을 시행하여 인구가 과밀화 되는 현상을 방지함과 동시에 인류 DNA를 고급화하여야 한다. 하지만 적정한 인구가 유지되더라도 지구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은 자원이 고갈될 수밖에 없다. 자원 소비의 최소화, 대체 자원의 개발, 타 행성 자원 도입 등의 외형적인 노력과 동시에 물질과 에너지를 재활용, 순환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과학기술을 개발하여야 한다.

또한 인간 육신의 진화 과정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대응이 필요하다. 외모와 신체 기관, 체모와 손가락 등을 보면 인류가 아직 진화 과정에 놓여있는데, 그 진화가 유효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또한 적정 인구 유지, 물질 순환 등의 조치가 성공하더라도 인간의 DNA가 잘못된 방향으로 진화하거나 퇴화해서는 만사 헛일이다.

물질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한 전제는 마음 분야이다. 인류에게 닥친 위기를 인식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통찰하는 지혜의 원점이 마음이다.

지금까지 모든 철학과 종교, 학문과 예술 같은 인문학이 응시하는 목표는 인간과 사회의 마음이 갖는 본질적 가치였다. 마음을 하늘로, 육신을 땅으로 하여 땅이 하늘의 지배를 받듯 마음이 육신을 지배한다는 관념적이고 도덕적인 관점을 중요시 했다. 그러다보니 육신은 현실에서 온갖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무시 또는 억제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고, 마음은 그 본질이 제대로 구명되지도 못한 채 온갖 장식을 입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철학과 종교, 학문과 예술이 현실과 유리되어 현학성만을 띄게 되었다. 생각과 입으로는 문명의 붕괴와 인류의 멸망을 말하면서도 일상생활에서는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려는 이중의 인식 구조가 고착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이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통섭하여야 한다. 인문학의 뿌리가 자연과학이고 자연과학의 현현이 인문학임을 인식해야 한다. 인문학이 지식인들의 지적 유희 수준에 머물지 않고 인간과 자연의 이치와 현현이라는 본질로 가야하고, 자연과학이 물질적 풍요만 추구하는 수준을 벗어나 인간과 자연의 이치 규명과 물질 순환 구조의 개선이라는 본질로 가야한다. 사회적으로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통섭, 개체적으로는 마음과 육신의 통섭이 필요하다. 마음을 꺾은 꽃가지가 아니라 흙속에 뿌리내린 꽃나무로 가꾸어야 한다.

 

동물마다 각기 마음을 갖고 있지만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되는 까닭은 인간이 갖는 마음의 양과 질이 여타 동물들과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신체구조와 뇌를 가진 미물들의 마음은 단순하지만 복잡한 신체구조와 뇌 구조를 가진 인간의 마음은 매우 복잡 미묘하다. 인간마다 갖고 있는 마음의 모양과 색깔은 공통점이 많지만 일정한 차이점을 가진다. 또한 인간마다 마음의 크기, 깊이, 굳기, 밀도, 개폐 정도가 다르다.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해야 할 것은 공통점을 수용하고 차이점을 인정하는 것이다. 역사상 수많은 철학자들이 마음을 연구하면서도 종내에는 실패하고 마는 까닭은 자기의 마음을 기준으로 다른 인간들의 마음을 재단하였기 때문이다. 자기는 수준 높은 불변의 마음을 갖고 있어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잣대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재단하였기 때문에 판판이 대중들의 마음은 저급하며 불완전하다는 결과가 도출된 것이다. 또한 자기는 육신의 욕망을 충분히 억제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충만하였기 때문에 대중들은 욕망의 노예로만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자기만이 예쁜 꽃이고 다른 것들은 보잘 것 없다고 여기는 꽃의 자만과 같다. 하지만 형형색색의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있는 산이나 들이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것이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혼자 또는 무더기로 피어있어서는 보는 이로 하여금 큰 감동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기 위해서 혁명이 필요하다. 그 혁명의 씨앗은 자기 마음의 나르시즘을 벗어나는 것이다.

마음은 수시로 표변하지만 육신의 욕망은 한 곳으로 집중하려는 자연의 이치이다. 물론 타인과 사회에 피해를 주는 욕망은 선별되어 마땅하지만 욕망이라고 하여 모두 무조건 억제, 배척되어서는 안 된다. 크고 작은 욕망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는 것이 마음을 소통하게 하는 방법이 된다. 욕망을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다보면 광산의 선별라인에서 잡석이 가려지고 원광이 나타나듯이 유익한 욕망은 육신과 마음의 생기가 되고 무익, 유해한 욕망은 사라지게 된다.

욕망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과 선택의 문제이다. 인식과 선택에 따라서 개인적 악이냐 사회적 악이냐가 구별된다. 선과 악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선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악이고 개인적으로는 악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선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인식과 선택의 차이에 의해 개인적 문제, 사회적 문제, 국가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당사자인 개인이 선과 악에 대한 인식과 선택을 유효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과 사회적 환경이 중요하다. 물론 그 중심은 자각이다.

성인에게 있어 선과 악에 대한 인식과 선택의 주체는 마음이다. 그래서 금 박사의 말대로 마음이 ‘하늘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필수적인 통로’인 것이다.

 

우주 속에 작은 한 점으로 존재하는 행성 지구의 대자연 속에서 식물과 동물은 탄생, 성장, 사멸이라는 같은 과정의 한살이를 한다. 인간의 일생을 식물인 복숭아나무에 비유하자면, 한 그루의 묘목이 성장하여 줄기가 굵어지고 가지와 잎을 가지는 것은 인간이 성장하며 온전한 육신을 바탕으로 감각과 의식이 깊어지는 것이고, 복숭아꽃은 마음의 성숙을 향한 화사한 펼침이라 할 수 있다. 꽃의 화사한 펼침이 열매를 향한 노력이듯 마음공부는 온전한 마음을 향한 노력이다. 복숭아나무의 모든 노력이 견고한 씨앗의 완성으로 향하듯 인간의 마음 역시 완전을 추구한다. 완전히 성숙된 마음이라야 비로소 육신의 가멸적인 충동을 억제하고 유효하게 주재하는 지위가 된다. 이때의 마음이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대자연에서 생명체가 받아들이는 감각과 의식의 영양이 집중된 종결점이자 현재와 미래에 제시되는 모든 행위의 시발점이다.

꽃의 화사함은 인간 삶의 보람과 즐거움이고, 씨앗의 견고함은 인간 마음의 완성이다. 복숭아나무가 꽃과 씨앗을 위해 노력하듯 인간 역시 삶의 의미와 마음의 완성을 위해 노력함이 마땅하다. 한 그루의 나무도 가뭄과 폭풍우 등의 자연재해와 벌목 등의 인위재해를 당하지 않은 한에는 생생지리의 이치에 따라 지속적인 성장을 도모한다. 그러나 나무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삶과 마음의 가치에 대한 자각이 부실해서 물질문명의 발달에 비례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인간들이 늘어나고 있다. 보태어 다른 인간의 생명까지 죽이는 사건이 증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생물들이 生生之理에 맞춰 살려고 노력하는데, 지능이 가장 우수하다는 인간동물만은 걸핏하면 ‘죽는다, 죽여버리겠다’라는 소리가 입에 달렸다. 아주 이기적인 이유를 대며 자살과 살인을 선택한다. 어떤 명분과 이유로라도, 자살과 살인은 꽃을 피워 완전한 열매를 맺으라는 생명의 원리에 역행하는 우매한 짓이며, 육신과 마음의 관계를 확실하게 통찰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19세기 서양 문명에서 잉태되어 이후 두 세기 동안 지구의 사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세 흐름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이다. 그중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득세하여 각자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면서 상충하고 있다. 이미 공산주의는 그 한계성이 노정되어 소멸기로 접어들었고, 자본주의 역시 극성기를 구가할수록 내적으로는 공동화 현상이 생겨나 치명적인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리하여 많은 지성인들이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로 아나키즘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물론 현대의 과밀한 인구와 복잡한 사회구조를 간과한 아나키즘의 순박성이 문제시 되지만, 아나키즘의 선구자인 클로포트킨이 ‘만물은 서로 돕는다’라고 말한 의미를 인간의 육신과 마음의 관계, 나아가 생물과의 관계에 비추어보면, 지구에 존재하는 생명들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통찰하고 있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2012년 壬辰季夏初澣 說樂然齋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