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두 발, 사변과 실천

  

                                                                                                                                  양백산인 박희용

 

 

고려 말의 대학자인 익재 이제현(1287년~1367년)의 實學觀은 그의 문집 『익재난고』권9(하), 「史贊」, <成王>에 보이는 ‘거부과 去浮夸 , 무독실 務篤實, 구신민지리 求新民之理, 궁행심득 躬行心得’과 같은 표현에서 잘 나타난다. 이는 당시 원나라에서 성행하던 실천적인 주자학풍에서 영향을 받은 바 큰 듯하다.

                                                                                                       - 최영성의 『한국유학통사』上卷 330p -

 

당대의 현인이었던 이제현이 원에서 수입한 것은, 그로부터 약 250년 뒤인 조선 중, 후기부터 극성한 ‘사변적 주자학풍’이 아니라 ‘실천적 주자학풍’이었다. 이 말은 주자학풍에는 ‘사변적’과 ‘실천적’의 양면이 있다는 것으로, 주자가 조선에 알려진 바인 ‘사변적 논리학자’의 모습만이 아니라 현실을 개혁하려는 ‘실천적 지식인’의 모습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신시대를 지나 안향, 이제현, 백이정, 이색, 정몽주 등 현자들에 의해 새로이 싹튼 고려 문화가 최영, 이성계 등의 무장들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면 고려의 국운이 다시 흥성하였을 것이다. 고려 멸망이라는 역사적 변환이 없었다면 이제현에 의해 수입된 ‘실천적 주자학풍’이 계속되었을 것이다. 물론 개국파인 정도전, 권근 등에 의해 그 맥이 이어져 조선 초기의 문운을 융성케 했지만, 중기 이후 조선을 지배한 주류는 실세하여 산림에 은거한 학자들이 주자학의 사변성에 깊이 천착하여 배양한 ‘사변적 성리학’이었다.

고려 말기 유학의 학맥은 安珦(순흥. 1243~1306. 1289 주자전서 도입)-白頤正(1247~1323. 1314 주자학 연구)-禹倬(안동. 1263~1342. 역학 연구, 사변적 연구 방법 선구, 理學 창시자)-李齊賢(1287~1367. 경학과 성리학의 병진, 유학의 실학화)-李穡(1328~1396)으로 이어진다.

이색에 이르러 큰 호수를 이룬 유학은 고려를 유지하자는 절의파인 정몽주-길재-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사변적 성리학파와, 새 왕조 조선을 세운 혁신파인 정도전-권근-정인지-신숙주로 이어지는 실용적 경세학파로 양분되어 흘렀다.

1289년 안향이 『주자전서』를 원에서 수입한지 약 100년 뒤에 신유학의 번성과 함께 구왕조가 몰락하고 신왕조가 건립되었다. 시대 풍조에 맞는 『주역』을 중심으로 한 역성혁명파의 실용적 경세학이 주류가 되었고, 『춘추』를 중심으로 한 절의파의 사변적 성리학은 비주류가 되었다.

조선 건국 후 약 150년 동안 태평성대를 유지한 바탕은 관학파의 실용적 경세학이다. 그러나 산림으로 들어가 그동안 뿌리를 내린 성리학이 그 세력을 현실화하면서 차츰 관학파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한 갈등의 산물이 네 번에 걸친 士禍이다.

연속되는 士禍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은 지식인들에게 더욱 심화되어 마침내 1550년 이후부터는 관학파의 실용적 경세학을 밀어내고 주류 학문이 되었다.

 

안향이 『주자전서』를 수입한 고려 말 이후부터 서양 문명이 수입되기 시작한 조선말까지의 한국사를 관류한 두 흐름은 실용적 경세학과 사변적 성리학이다. 이 두 흐름은 동전의 양면이면서도 역사상에서 끊임없이 갈등하였다. 조선의 개국과 초기엔 실용적 경세학이 우세였고, 퇴계학과 율곡학이 융성한 조선 중기엔 성리학이 우세였다. 국력의 피폐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조선 말기엔 성리학 일변도의 위험성을 간파한 선각들이 실학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속으로는 물질적 풍요를 탐하면서도 겉으로는 정신을 논하는 성리학의 사변적 고답성을 끝내 돌파하지 못하였다.

실용적 경세학과 사변적 성리학은 사상의 양면이다. 한 시대에 그 둘이 조화롭게 나타나면 문명이 발달하고, 서로 상극이 되면 난세가 된다. 한 시대에 그 둘이 함께 등장하여 조화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시대마다 교대로 나타나야 국력을 유지할 수 있는데, 조선은 중기 이후 사변적 성리학의 시대가 계속 되었기 때문에 국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사변적 성리학을 마루고 실용적 경세학의 시대로 변화하였다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이후 강제된 시련기인 일제 침략, 분단, 전쟁을 거치면서 사변적 성리학은 모든 책임을 지고 퇴장하고, 서양문명의 영향을 깊이 받은 실용적 경세학이 재등장함으로서 한국이 경제, 문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실용적 경세학은 줄기이고 사변적 성리학은 꽃이다. 사변적 성리학만을 최고로 여기고 실용적 경세학을 천시하는 것은 꽃만 탐하고 줄기를 버리는 것과 같다. 줄기를 떠난 꽃은 잠시 화려하지만 곧 시들고 말듯이 성리학은 경세학이라는 받침이 든든해야만 번성할 수 있다. 성리학이 마음이라면 경세학은 몸이다. 어느 한쪽만 강조하면 건강을 곧 해치고 만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내가 사는 시대와 후손들이 살아갈 시대를 생각하는 지식인이라면 학문과 사상의 다양성을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큰 역사적 범죄인가를 먼저 인식해야 한다. 아무리 선현으로 추앙받는 대학자라 해도 자기 학문만을 고집하고 타 학설을 극력 부정하며, 심지어 반대 학파를 사문난적의 이단으로 몰아 정치적 탄압을 자행한 것은 ‘爲己之學’의 의미를 오독하였기 때문으로, 마땅히 후학들로부터 엄중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

범부는 명분을 우습게 알아 명예욕을 가장 먼저 버리지만 識者는 명분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 명예욕을 가장 끝에 버린다. 명예욕은 정신적 가치이다. 한 생애 동안 학문으로 닦은 명예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자기 정신의 기둥이다. 그래서 늙어갈수록 명예, 자기 학문에 집착한다. 그 기둥이 훌륭하다는 말은 백번 들어도 흐뭇하지만, 옳지 않다거나 삐뚤어졌다는 말을 한 마디라도 들으면 극심한 분노에 빠진다. 선비라면 항상 불치하문하는 겸허한 자세여야 함에도, 명예욕에 집착된 자들은 그러한 분노로부터 탈출하기 위하여 정신의 기둥을 더욱 장식하거나 비판자를 사문난적으로 매도하며 엄중히 문책하였다. 그러므로 명예욕에 들끓는 자들은 입으로는 아무리 유식한 말을 내뱉어도 뼈와 피는 이미 선비가 아니다.

정신의 기둥이 옳지 않는데도 장식에만 급급하는 것은 위선이요, 논리가 아니라 비방이나 형벌로 비판자를 억압하는 것은 폭력이다. 한국사에서 보면 이러한 학문적 폭력이 비일비재하다. 학설의 차이, 표현의 차이를 학문적으로 해결하지 아니하고 당파적, 정치적 폭력으로 해결한 경우가 매우 많다.

이런 면에서 이색에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조광조-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학맥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퇴계가 사변성이 짙은 안향-우탁-이색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정맥으로 치고, 백이정-이제현으로 이어지는 학맥을 접은 까닭은 그 역시 경세성보다 사변성을 추종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40세까지 경학을 공부하다가 40세 넘어서 비로소 『주자대전』을 접하고 그 깊이에 몰입하기만 하였지, 그것이 통달하고 난 다음에는 신속히 빠져나와야 할 정신의 늪인 것을 미처 몰랐다. 그러기에는 그의 몸과 마음이 이미 노쇠하여 빠져나올 시간이 없었다. 그가 20세 전후부터 주자학을 접하였더라면 생각의 폭이 훨씬 넓어져서 사변성과 경세성의 균형을 회복하였을 것이다. 그에 의해 본격적으로 흥기된 성리학은 경세성이 축소되고 사변성이 강조된 경직된 모습이 시대가 흐를수록 심해졌고, 그에 따라 士氣가 퇴전되어 국운이 피폐해졌다.

 

문명의 중심이 서양에서 동양에로 이동하기 시작한 21세기 벽두에, 그 중심의 핵인 新儒學이 사변과 실천의 두 발을 어떻게 행보하여야 할까. 줄기가 튼튼해야 꽃이 실하고, 두 발이 튼튼해야 역사의 지평을 굳세게 멀리 갈 수 있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