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은 우리의 무엇인가

 

강태규/

 

   <대통령>은 어감 자체가, 제일 막중한 통감으로 해석될 때가 있다.   영어로 표현되는 내각의 최고책임자인 “미니스터”나 “the chief executive of a republic” 으로 표현되는 “프레지던트” 속에는 분명 위임받은 권한의 대행자임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지만 대통령이라는 언어의 감각은 사뭇 권위적이며 무소불위한 느낌을 배제할 수가 없다.

 

   왜 그럴까.

언어는 지속적으로 변위와 진화와 변동적인 시대의 감각적인 함의를 가진 동적인 ‘verse' 인 것은 분명한 듯하며, 그러한 연유로 사전의 개정판이 반복되는 것 또한 그 방증일 것이다.  지난, 서울 이전문제나 국어기본법의 한글전용정책의 헌법재판소의 해석에 등장한 관습헌법상 개념을 주목해 볼만하다.  쉬운 구어체로 풀어본다면,  오랫동안 (사실은 오랫동안이라 할 수도 없다. 재판관들의 습득된 법인식의 소요세월이 고작해야 30년 전후일 것이므로)사용해온 제도를 굳이 지금 바꿀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법이란, 과거에 쌓아온 판단의 근거에 준해서 제도적으로 설정된 울타리라고 볼 때는,  울타리 바깥을 넘지 않겠다는 법의 의지라고도 본다.

 

   실로 우리 문학인은 심리적 울타리까지의 극복과 그 변연의 확장이 사명일 수 있다는 생각에 닿을 때, 우리가 허물고 새로 구축해야 할 울타리 또한 만만치 않음도 안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미래의 헤게모니 구축에 있어 새 의자에 앉힐 인물들은 그 교육에 의해 계급적 재생산에 가담하게 되는 것이므로.

 

   지금 우리 앞에는 정치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새로운 유형의 대선후보자가 등장했다.

강준만 교수의 <안철수의 힘>에서의 표현대로 “증오의 종식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타이밍의 가장 적합한 후보의 등장이다.  즉, 승자독식의 증오와 적대의 시스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도 본다는 데 필자는 동감하며 통합과 타협을 통해, 리더십이 아니라 팔로십을 통해 진보와 보수의 양극단을 순리적으로 다듬어 가는, 이념대결에서 나아가 국민 실리의 대결국면을 즐겁게 누려보는 희망을 선사하리라 본다.

 

   그리하여 국민의 위임을 총괄하여 수행하는 그런 국가대표에게 금메달의 얄팍한 국수적 희비를 넘어 노무현정부 시절처럼 끌어내리는 데 부화뇌동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부의 한계와 문제점 또한 일찌감치 그리고, 충분히 소통되는 말과 제도와 습관들을 개진하면서 새 정권의 성공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문제투성이의 민주당 또한 국민이 나서서 재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전혀 다른 상머슴을 만나게 되는 꿈을 미리 준비한다.  차라리 강준만 교수의 말대로 “쇼크” 먹을 준비를 미리 해야 할 것이다.  지난 시절 우리 스스로가 “쥐떼”가 아니었나를 무릎 치게 되는 그런, 마음의 울타리 조차 없이 율려의 세상으로 드는 빗장을 열어 볼 수 있는 시대가 목전이 아니리 코끝 앞에 왔다고 생각하니 신명이 난다.      나는 기도하듯 한 음, 한 소절 노래할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던 정도령이 왔음도 알게될 거라는 그런 여름밤의 꿈을 꾼다.

깨지 말지니, 그 꿈이 개꿈일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