氣土理木論 자연주의와 인문주의

 

양백산인 박희용

 

 

금장태 著 『儒學思想의 문제들』 제16장 <楊朱의 자연과 인간> 2절 <양주사상에서의 자연과 진실존재> 263p 1행부터 12행까지에는 『列子』<天端篇>에서 인용한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실질적 존재의 기본범주인 천 ․ 지 ․ 인도 “氣의 맑고 가벼운 것은 위로 올라 天이 되고 흐리고 가벼운 것은 아래로 내려가 地가 되며 조화된 氣는 人이 되는 것이며, 그러므로 천지도 氣의 精을 머금고, 만물도 氣를 바탕으로 변화 ․ 생성하는 것(淸輕者上爲天 濁重者下爲地 沖和氣者爲人 故天地含精 萬物化生)”이라 이해하였다.」

「이러한 氣論的 생성세계에서는 天 ․ 地 ․ 人 ․ 聖 ․ 物의 각 개별적 존재영역이 그 근거에는 공통적 동질요소를 가지게 되는 것이고, 그 개별 존재영역의 차이는 상하적 우열관계나 지배관계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기능적 독립성과 한계성을 밝힘으로써 상호평등적이고 자립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있는 사실에서 자연주의적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이 두 문장을 비빌 언덕으로 하여 리기의 관계가 자연주의와 인간주의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는지 생각해보도록 하자.

 

列子에 ‘天地含精 萬物化生’과 금장태에 ‘그 근거에는 공통적 동질요소를 가지게 되는 것’이란 말처럼 氣의 세계인 자연주의는 모든 天 ․ 地 ․ 人 ․ 聖 ․ 物의 각 개별적 존재영역 뿐만 아니라 인간이 두뇌로 생각해 낸 모든 이념과 사상이 서 있는 바탕이요 논리 전개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자연주의가 각 개별적 존재영역과 사상에 미치는 영향력이 꼭이 절대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나무가 흙에 바탕 하여 생장하나 나무와 흙, 나무와 나무는 이미 서로 별개이듯이 각 개별적 존재영역과 사상은 서로서로 별개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무들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흙에서 왔기 때문에 넓게 보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현실 상황에 적응하는 상태의 차이를 기준으로 본다면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닐 수 없다. 즉 천지가 氣의 精을 머금은 단계까지는 자연주의이지만 일단 그 기가 동하기 시작하여 만물이 변화 ․ 생성하는 단계부터는 자연주의로 정의되는 본질이 아니라 인간주의로 정의되는 현상이 된다. 본질이 중요하나 현재하는 현상 역시 못잖게 중요하다.

 

氣土理木, 氣를 흙이라 하면 理는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의 氣란 물질의 세계인 자연을 이름이고, 理란 기가 조립 ․ 합성된 상태와 작동을 이름이다. 즉 氣는 본질이고 理는 현상이다. 흙을 떠난 나무가 살 수 없듯이 본질을 떠난 현상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와 리의 관계는 비교나 우열이 아니라 상생과 의존의 관계이다. 기가 바탕이므로 밑에 놓이고 리가 현상이어서 그 위에 놓이기 때문에 理上氣下이고, 기가 源泉이고 리가 流水이나 앞에서 보아, 즉 현상을 중심으로 보아 理先氣後, 理前氣後라는 말이 쉽게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의 착시현상을 걷어내고 기와 리의 관계를 정확하게 정의한다면, 氣土理木과 氣泉理江으로 상징되는 氣先理後, 氣元理分, 氣一理殊가 된다. 기가 거대한 저수지이고 리는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지류이다. 氣는 검은 암컷, 즉 玄牝으로서 만물만사를 잉태하여 세상에 내놓는다. 태어난 만물만사는 개체를 이룬 기가 방출하는 리에 따라 살아간다. 즉 생물의 육신은 기의 집합이고 살아가는 방법인 정신은 기의 감각적 표현, 즉 리인 것이다. 그래서 기와 리, 즉 육신과 정신은 경중을 다투는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상생하는 의존의 관계가 된다.

리와 기의 관계가 사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봉건시대 수많은 학자들이 설왕설래하면서 다양한 학설을 표출해 놓았다. 그런데 그 학설들의 대부분이 상하, 선후, 전후관계 등으로 리를 앞세우고 기를 뒤에 놓았다. 시대적 필요에 따라서는 理主氣從이라 하여 리를 극대화 하고 기를 극소화 하기도하였다. 등급 짓기 좋아하는 자들은 선현들의 말씀에 추종하여 리를 기보다 앞세우거나 위에 놓고는 리만이 만물만사를 주재하는 지선이라고 자리매김 했다. 그러고는 학문적 권위에 도전하는 것들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봉건시대는 갈수록 우물 안이 되었다.

 

靜의 상태로 가만히 있으면 될 것인데 왜 氣는 끝없이 움직이는가, 氣는 어떻게 조립되고 합성하고 작동하여 개별적 존재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 역시 바탕인 자연주의에 의거하고 있다.

태양열로 인하여 공기가 데워지면 상승하고, 냉각하면 하강하듯이 氣 역시 熱冷의 영향을 받는다. 熱은 원자, 수소폭탄의 원리처럼 우주의 점점에서 폭발하는 항성이고, 冷은 차갑게 침묵하는 우주공간의 면면이다. 우주의 원자들은 열과 랭의 영향을 직접 받으면서 수시로 움직이고 변화한다.

벽돌 하나는 단조롭지만 많은 벽돌을 쌓아 올리면 높은 탑이 된다. 탑을 높이 쌓으려는 것이 욕망이지만 과도한 부하에 걸리면 탑이 와르르 무너져 다시 하나의 벽돌로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가장 가벼운 원소인 수소가 핵 융합하여 수소폭탄이 되기도 하고 무거운 우라늄이 핵 분열하여 원자폭탄이 된다. 둘 다 서서히 반응하면 열을 발생하지만 임계질량을 넘으면 갑자기 폭발하여 熱源이 된다.

단기적으로는 가벼운 수소와 무거운 우라늄 사이에 모든 원소들이 나열되나, 장기적으로는 수소가 중첩하여 차츰 무거운 원소로 변화하고 무거운 원소가 붕괴하여 가벼운 원소로 변화하면서 한계 질량의 범위 속에서 순환하고 있다. 원소들이 질량의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순환하는 까닭은 熱과 冷이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소들은 항상 변화하고 유동하며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인력과 중력에 의해 뭉쳐지고, 뭉침이 과도하면 압력에 의해 열이 발생한다. 열이 오래 계속되면 원소들의 결합이 풀어지면서 다시 흩어진다. 흩어진 원소들은 다시 변화하고 유동하면서 집산의 때를 기다린다.

이러한 현상은 전체적으로는 모든 우주에서, 부분적으로는 우리 우주에서, 세부적으로는 은하계에서, 미시적으로는 태양계-지구에서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여 현란하게 일어나고 있다. 상상한다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실재적 현재가 다른 우주에서는 과거나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우주, 즉 다른 세상에서 겪었던 일들이 우리 우주의 현재에 되풀이 되고 있으며, 내가 겪고 있는 현재가 다른 우주에서는 미래가 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상이 가능한 까닭은 자연주의, 즉 모든 우주가 공통적 동질요소를 갖기 때문이다. 더 짙은 공통적 동질요소를 공유하는 우리 우주-태양계-지구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사는 인간들의 생각과 행위, 발생하는 사건들은 서로 짙은 연관성을 갖지 않을 수 없다.

 

氣土理木, 氣는 흙이요 理는 나무이기 때문에 理氣不相雜이요 不相離이다. 기는 본래부터 動性이 있어 움직이다가 상충, 응집하여 사물을 이루었다가 일정한 시간-일러서 수명-이 지나면 상충, 분해한다. 先人들이 금과옥조로 받드는 ‘태극을 이루는 陽이 動이고 陰이 靜이다’란 말은 핵심까지 통찰하지 못한 표피적인 말이다. 양이 동이라는 말은 음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란 뜻인데, 목수가 재목을 하나하나 가져다가 집을 짓듯 양이 음을 하나하나 가져와서 사물을 구성한다는 것은 양이 목수의 역할을 한다는, 즉 主宰한다는 전제하에서만 성립하는 말로 양과 리의 가치가 음과 기의 가치보다 당연히 우월하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작위적인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선현들의 논리에 대하여 한 점 의심을 품거나 반론하는 것이 당최 금기시된 봉건시대에, 후학들이 처음부터 이러한 작위적 논리를 절대명제로 해서 성리학을 아무리 궁구해봐야 과정만 피로할 뿐이고 결과 역시 난삽할 뿐이다.

動靜은 理가 아니라 氣에서 사용되는 말이다. 陰인 氣의 세계에서 因緣한 氣가 聚하여 사물을 이룬 상태가 陽인데, 기의 면에서 말하면 氣靜이다. 陽인 聚氣가 散하여 자유인 상태로 환원하는 것이 氣動이다. 이 때 理는 聚하여 작동하는 원리, 散하여 환원하는 원리이다. 즉 기는 흙이나 그 기가 응집하여 이룬 나무는 리이다. 나무가 흙에서 나오듯 리가 기에서 나오나 형체를 달리하기 때문에 理氣不相雜이요 不相離인 것이다.

 

기와 리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자연주의와 인간주의의 관계를 살펴보자.

금장태의 말대로 자연주의에서는 개별 존재영역이 상호평등적이고 자립적인 관계를 갖지만 인간주의에서는 天 ․ 地 ․ 人 ․ 聖 ․ 物의 개별 영역들이 차별성을 갖는다. 우월한 인간들과 저급한 인간들의 天 ․ 地가 각기 다르며, 소유할 수 있는 聖과 物 역시 엄격히 차별된다. 자연주의의 보편적 원리와 인간주의의 보편적 질서가 서로 보완적 관계가 아니라 날카롭게 충돌한다. 자연주의는 보기에 좋은 장식용 현수막으로 내걸어 놓고 실제로는 인간주의를 칼같이 적용하고 있다.

자연주의는 고도의 정신작용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의 것이고 인간주의는 일상인들의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고도의 정신작용력을 보유하고 있다면 자연주의가 당연히 최선이겠지만, 현실세계는 그렇지 못하므로 차선인 자연주의와 인간주의가 적당히 조화를 이루는 상태가 현실적이다. 그러나 현대문명이 발달할수록 그 둘의 괴리 현상이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있다. 자연주의는 창고 구석에 처박히다 못해 폐품으로 낙인찍혀서 아예 내다 버려지고 인간주의만이 지구 도처를 쏘다니고 있다. 상호평등성의 자연주의는 버림받고 상호차별성의 인간주의만 홀로 사랑받고 있다.

자연주의가 바탕으로서 중요하지만 인간주의 역시 소중하다. 기가 흙이고 리가 나무이듯이 자연주의는 흙이고 인간주의는 나무이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태어나지만 살아가면서 문명을 이루어 발전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문명을 속성으로 하는 인간주의가 현실성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인간주의는 자연주의의 거대한 품속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인간주의가 제대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자연주의를 먼저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반대로 자연주의를 무시하고 인간주의만 발전시키려고 하는 것은 사상누각이다. 자연주의는 몸이고 인간주의는 옷이다. 옷은 상황과 계절에 따라 바꾸어 입을 수 있지만 몸은 절대로 바꾸지 못한다. 문명 역시 인류생활에 필요한 한 벌의 옷이다. 문명은 옷처럼 상황과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즉 인간주의도 변화한다.

봉건시대에 인간주의가 가졌던 불편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현대를 사는 한국인에게 우선 필요하다. 복잡다단한 현대문명에 자연주의를 직접 적용하는 것은 부작용이 많다. 거시적 관점에서 자연주의가 갖고 있는 ‘상호평등적이고 자립적인 관계’를 투시함으로써 현대문명의 산물인 현대인간주의의 장단점을 걸러낼 수 있다. 인문학적 소양의 신장으로 개체적 삶의 의미를 생산하고 겸허한 예의 실천과 법규 준수로 사회적 관계를 원만하게 하는 등, 뼈대는 자연주의로 세우고 살은 인간주의로 채움으로서 개인과 개인, 사회와 사회의 관계에 생기가 감돌 것이다.

 

氣土理木, 흙을 떠난 나무는 곧 고사하고 만다. 기의 드넓은 바탕을 망각하고 홀로 잘난 척하는 리는 곧 붕괴하고 만다. 자연주의의 넉넉한 품을 떠난 인간주의는 곧 고장이 나고 만다. 자연주의는 현대문명의 불구를 정형하고 지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약이다. 자연주의는 玄牝 검은 암컷처럼 만물을 생산하기도 하지만 다시 불러들여 치유하기도 한다.

 

2012년 8월 20일 초가을에

안동 열락연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