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적 달관의 방법

 

양백산인 박희용

 

 

유교와 유학은 동의어이기도 하면서 미묘한 차이를 가진다. 나무 한 줄기에서 갈라진 두 가지처럼 같은 자양분을 먹으며 자라지만, 가지가 뻗어갈수록 추구하는 목표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그럼에도 금장태 박사는 꾸준히 ‘유학’이란 말 대신 ‘유교’란 말을 즐겨 쓰며 『유학사상의 문제들』 37p 27행에서 다음과 같이 ‘유교적 달관의 방법’을 말하고 있다.

 

「유교에서는 한 인간이 죽으면 마음과 육신이 분리되고 사라져 가는 존재라 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적 사실이요, 다른 부분에서 그 인간은 그의 혈통을 이은 후손에로 그의 생명이 이어진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일부분은 죽음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놓이고 나머지 일부분은 후손의 생명을 통하여 이어져 가는 것으로 받아들임으로 자기존재의 연속성을 확보하고 있다. 죽은 뒤에 불멸하는 것은 육신도 영혼도 아니다. 다만 육신과 영혼이 돌아가는 우주 그 자체가 영원하고 후손에로 이어가는 생명이 무궁할 수 있다. 유교적 신념에서는 한편으로 인간의 죽음이란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요, 자연에로 돌아가는 것이라 확인하여 평안을 얻을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후손으로 무궁히 이어진 핏줄의 생명 속에 자신이 부분으로 살아있다는 확신이 죽음에 대한 유교적 달관의 방법이다.」

 

금 박사의 오랜 내공이 쌓인 위의 말을 비빌 언덕으로 하여 서학, 천주교, 기독교, 불교 등과 비교한 ‘유교적 달관의 방법’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인간은 육신과 정신의 합일체여서 그 둘 중 하나가 상실되면 이미 인간이 아니다. 육신이 상실되면 기껏해야 ‘누구의 魂’으로 불리고 정신이 상실되면 하등 동물이나 살아있는 肉塊로 취급된다. 인간이 숨을 마치면 육신을 이루었던 물질들은 빠르게 분해되어 우주 속으로 환원되고 육신에 퍼져있던 신경계의 감각과 의식은 소멸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두뇌 역시 육신의 일부로서 활동을 종료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저장된 정신의 결정들, 즉 魂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하여선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초기유교 등에서는 육신이 멸하여도 정신은 영혼의 옷으로 갈아입고 시공간 어느 때 어디서든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진다. 기독교와 천주교는 유일신이자 절대적 주재자인 야훼 휘하에 모든 영혼들이 포함된다는 교리를 가지나 불교와 유교는 주재자를 인정은 하되 그 강도가 약한 편으로 영혼 하나하나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인정되고 있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에서는 주재자의 수명은 무궁무진하나 일반영혼들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다고 보면서도 그 기간을 명시하지 않는데, 몇 대 위의 조상에 대한 제사가 없고 나의 바로 앞대의 영혼에 대한 추도식만 있으므로 바로 앞의 영혼만 인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주재자의 수명 역시 무궁무진하나 일반영혼들은 위로 4대손까지 약 120년간 유효하다고 여겨 정성스레 제사를 모신다.

기독교와 천주교에서는 주재자인 야훼를 믿는 영혼은 천당으로, 반기독교인 영혼은 지옥으로 가 머문다고 하면서도 때가 되면 부활하여 다시 사람이 된다는 영혼불멸설을 말하고, 불교 역시 공덕 덕분으로 극락에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거나 죄업 때문에 지옥에 가서 온갖 고초를 다 겪은 후에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짐승이나 벌레 등으로 태어난다는 윤회설을 말한다. 그에 비해 유교는 부활이나 윤회를 말하지 않고 소멸을 말할 뿐이다.

물론 기독교, 천주교, 불교에서 말하는 천당과 지옥, 부활과 윤회란 어리석은 대중들을 상대로 한 교화 차원의 도구요 방편이다. 그러나 그 도구와 방편들이 초기엔 유효했을지 몰라도 인지가 발전하여 분별력이 향상되면서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종교가 자꾸 쇠퇴하면서 사회적 통제의 자리를 법과 권력에 내주게 되었다.

유교에서 제사를 인정하고 정성껏 지내는 까닭이 경험적 사실에 기반 하지 않고 영혼이 120년간 흩어지지 않고 유지된다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물론 영혼이 120년간 유효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체험하거나 증명한 사례는 전무하다. 단지 인간은 육신과 정신이 함께 이루어진 존재인데, 죽으면 기의 집합체인 육신의 소멸은 확실하지만 리인 정신의 소멸은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리 존중 차원에서 가상한 것이 영혼 120년 유효론인 것이다. 그릇이 깨지면 물이 새 흩어지듯 육신의 기가 흩어지면 정신의 리 역시 흩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즉 영혼이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의 제사논리란 가상의 것이다. 그에 따른 풍수지리설, 음택론, 조상복덕설, 감응설, 제수설 등 모두 그 가상의 논리에 따른 결과인 것이다.

단지 제사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이라면 ‘부모를 통하여 조상과 연결되고 자식을 통하여 후손으로 연결되는 한 매듭으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자각하게 하는 점이다. 제사를 통하여 현재의 시공간에 살고 있는 유전적 존재로서의 자기실존의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고 조상의 뜻을 이어받아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역사적 연결고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또 제사를 통하여 자신과 가족, 친척들의 심성을 순화하고 윤리도덕을 신장할 수 있으며 문중의 친목과 단결을 돈독히 하여 사회 속에서 건전한 한 부분으로 생활하게 할 수 있는 기제가 될 수 있다. 물론 제사가 조상 자랑이나 행세의 방편이 되어선 안 되겠지만 훌륭한 조상에 대한 긍지와 든든한 문중에 대한 자부심은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좋은 동력이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제사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제사가 복잡한 현대문명에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다.

먼저, 꼭이 영혼 120년 유효설에 근거한 4대 봉사를 강조할 것은 없다. 그것을 고수하는 가정은 그대로 계속하고, 일반의 가정들은 바로 윗대 또는 할아버지 대까지 지내는 것이 알맞다. 왜냐면 살아서 대면할 수 있는 분들이 할아버지 때까지이기 때문에 그분들을 추모하는 뜻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물론 그분들이 평소엔 하늘에서 자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횡액을 막아주고 복을 내리다가 제삿날에 자손의 집에 와 제수를 감응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해주시도록 바라는 자손들의 마음일 뿐이다.

제수 문제에 있어서도 과중한 음식 장만과 심리적 부담이 있다. 기일을 잊지 않고 추모하려다 보니 자손들이 모이게 되고, 제군들이 많다보니 음식을 많이 장만하게 되고, 음식을 많이 장만하다보니 이것저것 제상에 올리게 되는 것이다. 제수 부담을 줄이는 방법은 제군들을 직계로 한정하고 제상에 간소하게 올리면서 제군들이 간소하게 식사하도록 하면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며느리들의 과중한 심적 부담과 신체적 부담을 덜어주어서 제사가 조상 추모의 본래 취지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제사 올리는 시간 역시 시대 상황과 제군들의 생활에 맞춰 일몰 직후로 하고 곧 이어 저녁 식사를 하도록 해야 한다. 물론 제사 올리는 순서도 가가예문이면서 간소하게 해야 한다.

장례 문제에 있어서도 삼일장으로 하고 부고의 범위를 친척과 지인들로 하며, 화장하여 평장으로 하고 작은 비석 하나를 세워서 후손들로 하여금 추억은 하되 매년마다 관리에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얼굴을 아는 후손들이 죽은 다음에는 그 비석조차 저절로 쓰러져 묻힘으로서 모든 흔적을 말끔히 지워야 한다. 또한 원에 따라 수목장이나 풍장을 할 수도 있지만 강물이나 바다에 띄우는 것은 2차 오염 때문에 하지지 말아야 한다.

제사를 귀신이 있느냐 없느냐, 유일신이냐 가신이냐 하는 문제로 보는 것은 좁은 관점이다. 조상이 있으므로 자손이 있는 것은 인간 역시 생물인 이상 절대로 변하지 않는 만고의 진리이므로 죽은 조상을 추모하는 것은 살아있는 자손으로서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조상의 영혼이 자손을 보우해주면 더욱 좋은 일이지만 영혼 자체가 없으므로 도움을 받을 일이 전혀 없으니 제사를 지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또한 조상이 살아있을 때도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성모님’만 숭배하고, 조상이 죽어서도 당대만 추모는 하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오로지 그들만 숭배하면 되는 것이지, 일반 사람들이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상숭배, 심지어 악마를 모시는 것이라고 하는 기독교와 천주교의 교리는 근본적으로 많은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

멀게는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낳아주셨을지라도 가깝게는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고 애써 키워주셨으므로 살아계신 부모님께는 효도를 다하고 죽은 부모께는 간소한 제수와 차례로 제사를 올리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다. 인간의 도리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산 아버지보다 ‘하느님아버지’를 더 소중하게 받들고, 죽은 아버지는 내팽개치고 아득한 ‘하느님 아버지’를 추모하는 것은 인간의 도리에 어긋난 것이 아닐 수 없다. 초창기에 예수가 식민지배의 고통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가족과 이웃, 유태 민중들을 보며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인간의 도리를 생각한 바와 크게 다르게 변질되었을 것이다.

기독교는 개화기에 들어왔기 때문에 전통 유교사회와 충돌이 없었으나, 천주교는 17세기 초에 이 땅에 들어온 이후 18세기 말까지 약 150여 년간 잠복기를 가치는 동안에는 아무런 갈등이 없었으나, 교세가 팽창한 18세기 말부터는 유교 전통사회와 크게 갈등을 일으키면서 충돌하여 많은 희생자를 냈다.

그 때까지 서학 대접을 받으며 비교적 잠잠하던 천주교가 사회적 여론이 악화되어 조정으로부터 본격적으로 탄압을 받게 된 것은 1791년 윤지충과 권상연이 유교의 상례와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사건 때문이다. 이전까지 그래도 제사를 지내던 그들이 제사를 폐한 까닭은 1790년 북경에서 윤유일을 통해 보내진 질문에 대해 유교제사를 금지를 지시한 구베아 Gouvea 주교의 회답이 조선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사 문제에 대한 천주교 측의 지시가 어떠했는지 제19장 <제사문제와 유교 ․ 천주교의 이해>의 323p에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을 살펴보면, 제사 문제에 대한 대응이 처음부터 일관되지 않고 때때로 상반되게 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라 조선의 천주교인 역시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조선 사회 역시 큰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어가게 되었고, 민심을 한 곳으로 모아도 감당해내지 못할 대격변의 19세기 100년 동안을 국론분열과 민심 이반의 내부투쟁으로 지새면서 국력을 갉아먹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20세기의 식민지배와 분단, 전쟁을 겪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천주교가 명말 중국에 전래된 초기에는 예수회의 마테오리치에 의한 補儒論 내지 적응주의적 입장에서 공자와 조상에게 드려지는 유교전통의 제사를 신이 아니라 인격에 대한 감사와 추모로 보면서 묵인하였다. 그러나 뒤따라 예수회 내부에서도 이견이 생겨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꼬 회에서는 공자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로 비판하면서 이른바 의례문제 Quaestio de Ritibus라 일컫는 논쟁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황청도 선교단체의 상반된 주장에 휘말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1645년 9월 12일, 제사금지령을 내렸고 1656년 3월 23일, 교황 알렉산더 7세는 적응주의적 입장에서 유교제사를 묵인하는 허용령을 내렸다. 다시 교황 클레멘스 Ⅱ세는 1704년 1월 20일, 제사에서 神位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고 死者의 이름만 사용할 것을 허용하였으며, 1715년 3월 19일, 더욱 강경하게 제사를 금지하는 칙서를 반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742년 7월 11일, 교황 베네딕또 14세는 1715년 칙서를 재확인하여 제사금지령을 확립하는 칙서를 반포하여 100년간의 의례논쟁을 종결짓게 되었다.」

 

‘마테오리치에 의한 補儒論 내지 적응주의적 입장에서 공자와 조상에게 드려지는 유교전통의 제사를 신이 아니라 인격에 대한 감사와 추모로 보면서 묵인하였다.’라는 전래 초기의 제사관이 역시 가장 원만한 관점이었다. 그러나 교세가 확장되면서는 도미니꼬회와 프란치스꼬회가 각자 자기중심적 관점에 따라 제사를 평가함으로써 문제가 꼬이게 되고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즉 배고플 때는 무엇이든지 먹지만 포만해지면 맛있는 것만 골라서 먹는 것처럼 전래 초기에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발톱을 감추었다가 자리를 잡자 곧 본래의 발톱을 내밀고 제사를 금지하게 되었다. 묵인과 금지가 여러 번 되풀이 되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천주교 교리 자체가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세 불리하면 적응이라는 미명 아래 숨었다가 세 유리 국면이 되면 까탈스럽게 요구조건을 제시하는 이기적 교리 때문이기도 하다.

이후에 조선에서 벌어진 제반 상황에 대한 근원적인 책임은 천주교 교리 자체에 있지만 직접적인 책임은 동방 선교 조직인 북경교구의 구베아 주교에게 있다. 이미 1742년에 제사금지령 칙서가 발표되었기 때문에 윤유일의 문의에 답한 1790년에는 그 칙서를 충실히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구베아 주교가 좀더 현명했다면 근본주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원만한 응용책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도 갑자기 제사를 폐하는 바람에 당한 탄압을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전까지만 해도 서학에 흥미를 느껴 차츰차츰 연구하다가 천주교를 신앙하게 된 자생적 조선 천주교인의 역사가 두 세기 200년 가까이 됨에도 불구하고, 윤유일을 북경에 보내 구베아 주교의 판결을 자청한 당시의 조선 천주교 지도부들에게 더 깊은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학을 통해 알게 된 천주교의 교리에 공감했으면 그 가르침대로 조선의 현실에 적응하면서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면 되는 것이지 구태여 외국인 중국 북경교구 주교의 유권해석을 구한 것은 그간의 자주적인 천주교 교리 탐구에 대한 불신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천주교가 외부 충격에 휘둘리지 않고 조용하고 알찬 성장을 계속하였더라면 천주교도들이나 조선의 백성들 모두가 편안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 땅에 뿌리 내린 조선의 천주교로 충실한 조선 교구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외세인 북경 교구 산하에서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천주교도들뿐만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와 백성들 역시 정상적인 성장을 하지 못한 채 불구가 되고 말았다.

종교의 토착화란 근본교리를 위하여 전통을 거부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의 환경과 전통을 인정하면서 그 속에 조용히 뿌리내리는 것이다. 종교의 본질이 영적인 평화인 이상, 어느 곳에 전래되어 문제를 일으키고 탄압을 초래한다면 그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어야지 주변을 탓해선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조선말에 천주교인들이 당한 희생은 물론 안타깝지만 자업자득인 면이 있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나라보다 지적인 탐구심이 충만한 조선의 사대부들이 왜 천주교도들을 탄압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서학을 묵인했는데도 가장 민감한 제사 문제를 건드리는 천주교에 대항해 유교적 가치를 수호함으로써 봉건사회를 유지하려던 조선 사대부들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동양 선교에서 제사 문제가 계속 대두되자 1939년 12월 8일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제사금지령이 해제되고, 21세기 초에는 로마 교황청 발표로 제사문제가 해결된 것은, 제사가 꼭 동양 사회에 대한 선교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유교가 지향하고 있는 조상 추모와 공경심이 집약된 것으로 재인식되었기 때문으로, 동양문명에 대한 서양문명의 이해가 더욱 깊어진 결과가 아닐 수 없다.

神主 문제 역시 조상을 상징하는 하나의 表物로 봐야지 거기에 무슨 조상귀신이 깃들어 있다는 식의 비합리적인 의미부여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기독교와 천주교의 십자가, 불교의 불상의 경우와 같은 맥락이다. 물론 신주가 십자가와 불상이 갖는 전체적 의미와는 비중이 다르다. 하지만 크게 의지하고 보살핌을 받는 유일신이나 자연이 물론 중요하지만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조상신 역시 소중함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신주를 모시든 안 모시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작은 단위인 가정사 차원인 작은 일이고,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경배하는 것은 사회적 차원의 큰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거기에 절대자인 유일신만이 존재할 뿐 다른 신들은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하거나, 무슨 작은 귀신, 큰 귀신의 위차와 우열을 따지는 것은 참 어리석은 인간들의 하찮은 장난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몇 십 년마다 인구가 폭증하여 현재로 약 70억이나 되는 데도 불구하고, 혼자인 하느님은 정말로 바빠서 지상의 인간 하나하나를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지만, 각 가정의 조상신들은 자기 후손들만 챙기고, 각 마을의 동신들은 자기 지역을 챙기고, 지구 위 나라신들은 자기 나라만 챙기면 되므로 전체적 관리자인 하느님에 비해 훨씬 인간들과 가까워 세세하게 잘 챙겨준다고 할 수 있다. 또, 샤머니즘의 신들 역시 자기가 맡은 나무, 바위, 골짜기, 산, 물, 집, 방, 길, 모퉁이, 바다, 못 등에서 자기가 맡은 역할을 다함으로써 자기를 숭배하는 인간들에게 보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신교의 교리대로, 유일신만이 존재하더라도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되는 이상은 작은 귀신들이 존재할 수밖엔 없다. 유일신이 찬송가와 기도, 꽃으로 숭배 받을 때 영혼들이 그 뒤에 시립해 있으므로 함께 숭배 받는 것과 진배없다. 즉 십자가 속에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의 영혼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사 이래 죽은 모든 영혼들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신주 속에는 조상신만이 단출하게 들어있으므로 숭배의 범위가 좁고, 십자가 속에는 하느님과 예수가 크게 들어있으므로 숭배의 범위가 광활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서양에서는 가정이든 교회든 대표인 십자가에 추모를 하고, 유교사회에서는 가정 단위로 자기 조상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십자가와 신주는 크든 작든,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생명의 원천에 대한 고마움의 상징이다. 그렇게 하느님과 조상에 대해 경건한 정성을 표현하는 의례에 문화적 우열의 차이가 언급될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부정이요 불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