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분기점 1801년, 그리고 2012년

 

양백산인 박희용

 

 

인조반정 이후 300년 동안 조선의 집권 주류 세력이 된 서인이 분화한 노론과 소론, 시파, 벽파의 파쟁도 결국 순조 등극 이후부터는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등 몇 몇 문중이 지배하는 세도정치 체제 속에서 소멸되어 버리고, 학문적 교양보다는 천박한 정치적 이해관계 위주의 사고를 하는 외척들의 발호로 인하여 성리학도 차츰 쇠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 치세 때까지만 해도 움터 자라던 실학의 꽃망울이 신유사옥이라는 독한 꽃샘추위를 당하는 바람에 서학, 천주교와 함께 엮여 절멸하고 말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하는 사건으로 발생한 1791년 11월의 신해사옥이 서론부분이라면 1801년 2월의 신유사옥은 본론 부분, 이해 10월에 터진 황사영밀서 사건은 결론 부분으로서, 이 10년 동안이 천주교사에서는 가장 잔혹한 순교의 시대로 경배 받지만 한국사에서 국운을 가를만한 아주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이 때 갈 길을 잘 정해야 하는데, 그만 선택을 잘못하는 바람에 200 년 동안 후손들이 개고생을 하게 되었다.

 

1801년도에만 국한시켜 역사의 책임을 물어보면, 가장 무거운 책임은 정조에게 돌아간다. 그가 좀 더 살았다면 서학과 천주교 문제가 순리로 풀리지 않았을까. 또 순조가 좀 더 장성한 연후에 왕위에 올라 대왕대비의 섭정과 안동 김씨 외척들의 세도정치를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이 짧은 걸 어떻게 하겠나, 인명재천이요 나라의 운수인 것을.

정조는 영리하다고 할 수 있지만 순조를 낳은 원빈 박씨라는 밭의 토질이 별로였던 모양이다. 후궁을 들일 때 색기만 보지 말고 영리함을 반드시 살펴야 했는데 살살 꼬리 치니 덥석 물었다가 나온 소생이 나중에 왕위를 계승하니 나라꼴이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조선 초기에는 여덟아홉 명씩 생산하던 씨와 밭이 중기로 접어들면서 시들시들하더니 명종 대에 와서 씨가 부실해지고 밭이 척박해지면서 정비 출생이 귀하게 되었다. 이성계의 혈통이 무반이고 상대 할아버지가 여자를 탐해 삼각관계를 하다가 쫓겨 간 것을 보면 정력 하나는 확실하게 센 모양인데, 거기에다가 함경도에서 백여 년 동안 여러 대에 걸쳐 여진족의 밭에다 씨를 뿌렸으니 오죽 튼튼했겠는가. 그러니 정실 소생으로 팔 왕자 구 왕자 생산은 거뜬했고 공주, 서자, 옹주들은 부지기수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토록 튼튼하던 씨도 고량진미에 운동부족, 매일 밤 침소에 궁녀를 갈아들이기를 몇 대 동안 계속하니 어찌 무쇠 같은 씨인들 비실비실 녹아나지 않겠는가. 이런 이치로 하여 중국의 왕조는 길어야 3백 년, 거의 2백 년 기간 동안 십 몇 대 정도의 왕 다음에는 자연적으로 쇠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곤 다시 튼튼한 씨가 폐허에서 자라고.

그런데 조선은 두 배인 5백 년이나 왕조를 유지한 까닭은 왕씨의 부실에도 불구하고 봉건왕조를 떠받드는 사대부들의 골수에 충효정신이 꽉 배어있었기 때문이다. 즉 성리학의 명분론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 태종, 세종, 명종 같은 영리한 왕들과 기득권 계급이 고삐 하여 꿴 ‘고려 충신 정몽주’, ‘절의충신 사육신’이라는 명분, 성리학의 제일 교조인 충효와 불사이군의 명분 앞에 왕에 대한 불경은 전혀 용납될 수가 없었다. 중종의 후궁 소생 아들에서 난 방계인 선조가 왕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효종과 현종 등 몇 말고는 줄줄이 후궁 소생. 왕통이 미약하니, 나중엔 씨가 말라 강화도에까지 가서 씨를 빌려올 지경이 되니 자연적으로 궁중에선 왕위 계승을 노린 암투가 벌어지고, 그에 연통하여 권력을 장악하려는 사대부들의 정쟁이 격화되지 않을 수 없는 정치구조가 고착된 것이다.

이걸 보면 중기 쯤 되어 경국대전을 수정하여 신권 강화 구조를 만들든지, 그게 안 되면 태종처럼 절대왕권을 휘두르든지, 약한 씨가 도저히 튼실해질 가능성이 낮거나 없으면 아예 씨를 바꾸든지, 양단간에 결단하였더라면 나중에 20세기를 사는 후손들이 왜놈들의 종노릇을 안 해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늦어도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중반엔 정치혁명이든 역성혁명이든 있어주었어야 백성들의 삶이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였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반역이나 민란 같은 소요는 제외하고, 인조반정에 반대한 이괄의 난이나 홍경래의 난이나 동학혁명 같은 것이 성공하여 새로운 왕조를 창건하였더라면 우리나라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궁금하다.

소설이지만, 임진왜란의 일등공신으로 온 백성들의 흠모를 받던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몸을 노출시키지 않고 모진 마음으로 살아남은 다음, 전라좌수영과 우수영을 기반으로 한 세력을 동원하여 이성계처럼 새 왕조를 열었다면 어땠을까. 이성계가 새 하늘을 열 수 있었던 까닭은 백성들과 사대부들의 전폭적인 신망을 받았기 때문이고, 그 신망은 그가 평생토록 남북강산을 종횡으로 쏘다니며 황건적, 왜구 등의 침략을 막아낸 훌륭한 장수였기 때문이다. 민심은 천심이라고, 썩은 고려를 베어내고 새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대세를 이뤘기 때문에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이성계의 반란’이 아니고 역성혁명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이순신이 서해와 남해의 뱃길을 막아 수운에 능한 왜적들이 바다 길로 군대와 군수품을 조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궁핍케 하여 죽어가는 조선을 간신히 살려놓았으니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이성계와 비교한다면 왕권이 튼튼했고 사대부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점이다. 이런 점을 염려해서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려 했고, 정유재란 덕분에 목숨을 구한 이순신은 군자답게 최선을 다해 왜적을 물리친 다음에 스스로 죽어 멸문지화를 막고자 한 것 아니겠는가.

두 번째 책임은 대왕대비 김씨에게 돌아간다. 자기가 직접 낳은 아들이 아니라서 그런지 열두 살 순조가 왕이 되고 오랜 기간 동안 섭정을 하면서 자기 친정 쪽 사람들을 중용하여 왕권을 미약하게 한 원죄가 있다. 명분과 능력도 없이 문중 출신 대왕대비 덕분에 꿰찬 벼슬자리는 토색질하여 재물을 긁어모으는 아주 유효한 갈퀴였을 뿐이다. 달달 긁힌 조선의 백성과 강산은 피골이 상접할 수박에 없었다. 아마 자기 친자식이었으면 출가외인 의식이 투철해 순조의 왕권을 보위하는데 최선을 다하였을 것이다. 그에 더하여 보수적인 신료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신유사옥을 일으키도록 한 것은 역사적 범죄가 아닐 수 없다.

 

1801년의 상황을 2012년에 대입해 보자.

정조와 대왕대비 김씨, 그리고 안동김씨와 풍양조씨 등의 척족들,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 대통령, 여당, 야당, 언론, 군부, 등 등.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차이뿐이지 정치 구조와 정치인들의 형태는 거의 비슷하다. 1801년에 태평성대는 고전 속의 꿈이었고 현실엔 파벌 간에 권력 투쟁이 치열하였다. 2012년에 민주주의는 교과서 속의 수식어일 뿐이고 현실엔 파벌 간에 권력 투쟁이 치열하다. 군주제냐 공화제냐 하는 옷의 차이만 있을 뿐 알몸이기는 똑같다. 그 알몸도, 여유가 있으면 교양을 꾸미지만 조금이라도 몰리면 냉큼 감춘 발톱으로 상대를 할퀴어버린다.

남북분단과 대결의 구도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완전히 궤도에 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말로 괜찮은 인물들이 대대로 대통령직을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보니 평온한 타입보다는 역동적인 타입의 인물이 대통령으로 추대 또는 선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통일이 되기 전까지 계속될 것이다.

두 달이 안 되게 남은 대통령 선거, 빅 3의 행진이 귀와 눈을 어지럽힌다. 그래도 이번 선거는 지난 2007년과는 달리 유권자들에게 선택의 폭이 좀 넓은 편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분야에서 20년 이상씩 내공을 쌓은 후보들이라 깊이와 무게가 있어 보인다. 모두다 우리나라에서 정한 공교육을 알차게 받은 분들이니 얼마나 지식과 교양이 충실한 분들이겠는가. 그러니 안티니 네거티브니 티격태격 하지 마시고 정책과 의지로 멋진 한판 승부 펼쳐 국민들로 하여금 감동토록 하시라.

누가 무어라 해도 역사는 앞으로 걸어간다. 반역이 한 때 발목을 잡아도 진화하는 민중의 에너지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앞으로 굴린다. 이제 누구나 시대정신이란 말을 쉽게 이해하고 자주 입에 올린다. 큰 목소리로 “과거를 묻어 거름하여 미래를 도모하자”.

2012년은 1801년의 잘못된 선택은 말고, 활연히 민족통일과 번영을 향하여 걸어가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