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경북작가 시선집 <귀싸대기 한 대>에서 34인 시인들의 작품 100여 편 중에서 임술랑 시인이 시인 당 한 편씩을 선정하여 실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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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 설

    권석창



이따금 폭설이 내려

집과 집으로 난

마을과 마을로 난

길을 지워버리는 것은

그리하여 너와 나를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일러주려 하심이다

그리하여 그리움의 전용도로인

하얀 길을 만들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하여 눈이 녹을 때까지

밤새워 긴 편지를 쓰게 하려 하심이다

그리움의 자음과 모음이

맨발로 하얀 길을 가게 하려 하심이다




꼬리

   권선희

  

떠나란다고 훌쩍 떠난 당신

족히 백 리는 더 갔을 터인데

쇳줄 끌고 빙빙 도는 검둥이

나는 뱃공장 언덕 조광상회 검둥이만 쓰다듬다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꼬리

읽고 만다

감추지 않는 속내다

버려두어 살아남은

정직한 반응이다

미안하다 핥지마라

속내 읽지 못하고 떠난

이별 탓이 아니다

증오조차 달콤하게 굴리는 흉측한 고깃덩어리

혀만을 갈고 닦은 탓이다

정작 사랑 앞에서

힘차게 흔들려야 할 꼬리

잃은 것조차 잊어버린 내 탓이다

배들이 내항 돌아 나가는 저녁

북실한 반응 차오르는

꼬리뼈가 울고 있다




꽃잠

   권자미



늦잠을 잔다 장미 꽃수와 손날염한 잘잘한 안개꽃이불을 깔고

뻗어가는 넝쿨처럼 보듬어 자는 잠은 우리식 안부다


오늘도 아토피 때문에 둘째는 잠결이 솔다


노란 장판이 깔린 안방은 안전하고

붉은 벽돌 담장은 견고하다


이불을 털어 널고, 전화를 받고, 마당을 쓸고, 서로의 밥숟가락에

반찬을 얹어 주는 달그락거리는 사소한 일들


잔다, 오래 자는 잠은 꿈도 많지 달기도 하지 눈곱 붙어도

부끄러워 말고 일요일 아침 느긋대게 고양이처럼 쩌~억 하품도 하면서

담을 넘던 줄장미가 꽃무늬 카펫을 그늘에게 깔아 줄 때까지


줄장미식으로 무던하게 뿌리가, 잎에게, 잎맥에게, 줄기에게 하듯

우리는 우리식으로 안녕을 묻는다




북한강 

       김 만 수

  

안개는 제법 긴 문장을 쓰고 있었다

운문韻文같이 살다가고 싶다는 여자

더미더미 무너지는 안개 강 보아온 지

오래된 그녀

강과 강을 또 건너면서 써 내린 문장

짧고 간명했지만

까맣게 점으로 다가와

식별되지 않는 뿌연 장면으로

함께 서성이다가

미루나무 이파리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을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안개를

그 길고 막막한 언어들 밀어내며 살아가는

그녀의 몸짓이 짧고 차가운 운문일까

꿈꾸던 사랑과 혁명과 구원이

선명한 불꽃으로 타오르던

강 언덕에서

아직도 막막한 안개를 뜯어내며

거기 살고 있다





웃기는 짬뽕

              김소인

 

제삼한강교 밑을 흐르는 혜은이의 강물과

눈 감으면 떠오르는 남상규의 고향의 강도

그리고 새벽안개 가득 피어나는

정태춘의 북한강과

물새 우는 고요한 강 언덕을

다시는 볼 수 없는 건가

시난고난한 인생 늘그막이라도

씨 뿌려 가꾸면서

강촌(江村)에서 조용히 살고 싶은데

다시는 몰칵몰칵 밀려오는

시원한 물바람 느낄 수 없나

아무리 뽕밭이 바다 되는 세상이라지만

시러베잡놈들 활개 치는 세상이라지만

참말로 웃기는 짬뽕이다

너무 웃겨 와락 눈물 나온다




봄 취 정

         김재현

  

옷깃 파고드는 비 뛰어가라지만

자작나무 의연히 서있고

찬 겨울 견디어 낸 수숫대

꺽어진 허리지만 몸을 눕히지 않았다

  

떨어진 꽃잎이 누군가의 편지 속에서

차마 다 맺지 못한 말로 붉게 피어날지

몰락한 선비의 얼룩진 병풍 속에

그윽한 향기로 화개할지 봄은 알지 못한다.

 

취해라 술에 취해라 봄비에 취해라

사랑에 젖든 꽃잎에 젖든 젖어라

봄이사 할 말은 이 뿐

자작자작 코만 곤다






억새처럼

         김재환


 

가을에 이리 흔들리는 건

떠나버린 너의 손가락을 기억하기 때문일까?

흰 손수건 목에 감고 강가에 서서

흐르는 물 위로 청둥오리처럼

꺽꺽 소리를 지르는 건

 

노란 은행잎 사이로

짧게 그어오는 빗물의 칼날

베어져서 잘라진 실핏줄의 단면으로

봄날의 꽃향기가

여름의 햇살이

건초더미의 바람이

 

아직 눈 내리지 않는 들판

그 봄날 떨리던 너의 손길

소낙비를 맞던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솜털처럼 날아 내리는 것은

 

회청색 하늘 가장자리

은행알 뚝, 떨어지고

가을 길 수북 바람이 덮이고

가슴에 쌓이는 깃털 같은 모래들

 

아무 것 없는 날까지

가을 강가에 선 억새처럼

이리 흔들리는 건

그때의 눈부신 파문










귀싸대기 한 대

                 김종인

 

 

 

수요일 7교시 2학년 식물과 수업 시간에

귀싸대기 한 대 올려붙였다

수업 시간이니까 조용히 하자 해도 막무가내,

옆 사람과 잡담에다 농담하려 들고 공부는 뒷전,

자꾸만 불쑥불쑥 말하는 녀석, 주의를 주고,

눈짓하고, 복도로 나가 책을 읽고 오라하고,

다시 앉아 책 펴고 따라 읽어라 하고,

일어나서 혼자 읽어 보라 해도 엉뚱한 소리로

옆 친구에게 말 걸기, 필기는 괴발개발,

수업에 방해되니 그러지 마라고 당부해도

어느새 구시렁구시렁 혼잣말에,

조금하다 보면 또 엎드려 자는 서너 명,

속미인곡은 어려우니 따라 읽고 필기하고

집중해서 보라 해도 자꾸만 엉뚱한 소리에

농담이나 하려는 녀석의

귀싸대기를 한 대 올려붙였다

너무너무 화가 나서 가만히 있는 녀석의

보드라운 뺨을 소리가 나도록 순식간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찰나에 피할 틈도 주지 않고

귀싸대기 한 대 올려붙였다

녀석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생각할 틈도 없이 펑펑 울며

의자를 박차고 온갖 발악을 다하며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나가버렸다

복도에서도 한참 동안 씩씩대며 소리 지르며

우유통을 걷어차며 발악을 한다 귀싸대기 한 대!

마지막 남은 오 분의 수업을 거두고

어리둥절 쳐다보는 아이들 뒤로 하고 교무실로 왔다.

어찌 해야 하나. 참을 걸, 그냥 내버려둘 걸,

모른 채 할 걸, 대충 넘어갈 걸,

후회하며 가슴을 치며 뉘우치며

휴게실로 가 쓰디쓴 담배를 피워 물었다

교단에서 보낸 30여 년이 와르르 무너지는데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가르치는 것이 다 허무하고

어디론가 봄이 오는 저 들판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수요일 오후,

고등학교 진학할 때, 뒤에서부터 끊어

갈 데 없어 들어온 녀석들,

어릴 때부터 공부라곤 제대로 해 본 적 없이

이혼에, 별거에, 특수반 아이에, 학습부진아에,

현실 부적응 학생에, 자폐에, 컴퓨터 중독에,

결손 가정에 방치되어 온 녀석들,

오락이나 하다가 밤을 새우고 온 녀석들,

감옥 같은 학교라며 반항만 하는 녀석들,

교과서는 사물함 속에 처박아 두고

필기구도 없이 앉아 있는 녀석들,

한 시간을 적당히 놀고 잠이나 자고

농담이나 하려는 녀석들,

어찌 보면 정말 불쌍한 우리 아이들 속에서

고문으로 된 속미인곡을 가르쳐서 무얼 하나.

따라 읽어라 한들 무얼 하나

수능은 필요 없고 대학이야 원서만 내면 합격인데

굳이 어려운 고전을 배워 무얼 하느냐고,

적당히 출석이나 하고 졸업장이나 받으면 되는 거지,

하기 싫은 공부를 왜 굳이, 억지로 시키려고 하느냐고

제발 좀 내버려두라고 거부하고, 반항하고,

눈을 감는 아이들에게 정말이지 이게 무얼 하는 거냐고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은 자조에, 넌덜머리나는 수업에,

이제 그만 모든 걸 버리고 싶은 귀싸대기 한 대!

2학년 식물과 수요일 7교시 수업에,

나의 뺨에, 무너져가는 실업 교육에,

공교육의 모든 책임을 교사에게 묻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 쑥대밭 정책에,

교과부에 정말이지 귀싸대기 한 대!

올려붙이고 싶다.





꽃 앞에서

           김진문


어느 누군가의 아름다운 영혼들

이 봄, 잊지 않고 또 찾아왔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봄 되자 마술 같은 꽃들

일제히 뛰쳐나올 수 있으랴!

가지 끝에 가지가 나고

잎 속, 새 잎 돋아나고

꽃 속에 꽃이 피듯

아름다운 목숨들

또 피어나는구나!

세월의 모퉁이  돌던

가슴 뜯든 그 시절, 붉은 꽃잎들

이 봄도 꿈결처럼

쉼 없이 흘러 사라지고 흔들리는 것

꽃도 향기도 아닌

한줄기 바람 같은 사람의 삶

봄바람에 아름답게 흔들리는 꽃들이여!

삶도 죽음도 한 송이 꽃 아니랴!

한 점 구름 꽃 아니랴!

강철 같은 부드러운 꽃의 힘이여!

봄 향기 묻어나는 오늘. 이, 아침.

나는 너 앞에서

더욱 겸손하고 싶어라.




스물아홉 

         김철옥

 

비는 금새 그칠 모양이다.

곧 추위가 불청객처럼 들이 닥치겠지.

시청으로 가는 길가, 수은등 발밑에

손바닥 모양의 낙엽들이 쌓인다.

퇴근길에서 새벽녘까지

오뎅 바에서 사내 혼자

자신만의 술병의 그림자를 눕히는 시간

젊은 치들은 삼삼오오 역전으로 밀려가지만.

언젠가는 그들도

살아온 날을 헤아려보고

그리고 어딘가로의 여행을 준비하겠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늘 있기 마련이다.

벌써, 이십대의 마지막 가을이고.

그건 서른이 가깝다는 거구,

그건 또 무언가와 작별을 의미하리라.

비는 그쳤다.

사내의 굽은 등은 여전히

맹물 같은 소주잔을 놓지 않는다. 

  



앓는 강

       남태식


막무가내 모래를 퍼 올리는 기계소리에 꿈이 어지럽다. 없는 무덤에서 고려장 당한 주검으로 웅크려 숨을 졸인다. 물길을 막으니 오탁에 썩어 찌든 눈언저리의 검은 그림자가 두껍다. 오랜 선잠에 샘이 끊어진 마른 눈이 쓰라리다. 인공샘물을 채우고 더듬거리며 꺼풀을 찢는다. 보일락 말락 언뜻번뜻하는 눈동자는 맑은 하늘을 담지 못 한다. 오래 하늘을 품지 못한 눈동자는 녹이 슬어 벌겋다. 인공샘물은 밑 빠진 독이다. 묻지 마 관광에 묻지 마, 미래를 저당 잡아 당겨쓰는 이 누구인가. 마침내 밑 빠진 시멘트 독에 취해 실명하니 첫 키스의 풍경을 다 잃는다. 미래가 가뭇없다.



무씨래기를 엮다

                   남효선

 

 

비가 오고 추워진다는 예보에 무를 뽑기로 했다

아내와 함께 일일이 배추벌레를 손으로 잡으며 기른

무를 뽑는다. 아내의 종아리만큼 굵다.

동리 할미 한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무시 이뿌네”하며 밭고랑에 걸터앉아 무청을 다듬어주신다.

아내는 무청을 자르고 할미는 무청을 다듬고, 금세 손바닥만한

텃밭이 가득 찬다.

막 가꾼 무맛을 보기도 전에 지인 두 사람을 불러

무를 한 자루씩 나눴다.

텃밭 곁자리에 무 구덩이를 팠다.

해거름 마당에 퍼질러 앉아 무청을 엮는다. 지난 해 처음 배운 서툰 손놀림으로

무씨래기는 제법 모양새를 띤다. 무씨래기를 엮는 손놀림을 아내가

곁눈질한다.

시집 온 지 몇 해 동안 콩가루를 묻혀 끓여 낸 무씨래기국 맛, 남편의 투정을

떠올리는 듯 아내의 입언저리가 옴짝옴짝 거린다.

무씨래기는 겨우내 서리를 견디고 눈발을 견디고

아내의 손길을 담아

꽃샘바람 부는 어느 봄날, 식구의 가슴을 환하게

덥힐 것이다. 새 봄날, 혹 늦은 눈발이 날리는 날에.





老母의 화장대

                박승민



앉은뱅이 재봉틀 위의

베니어판 화장대는

뒤란 竹防 그늘 속 같다


지지난 봄 서울 누이가 보내준

파운데이션은 납작하게 입 다문 가리비 같고

살 맛을 1년 넘게 못 본 분홍 루주는

말라가는 주인의 안다리를 자꾸 닮아간다


雪花水, 입술에 찍힌 가뭇한 손도장 위로

아주 오랜 옛길에서처럼 

먼지 눈

드문 

드문 

내리고 

이제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주인을 기다리는

面鏡의 하루는

그 눈 속을 뚫고 먼 광산으로 품팔러간

신랑을 기다리던 청상의 엄마의 하루 해와 같아서

한번 굽은 허리를 펼 줄 모르고


벚꽃이 입술에 붙는 어느 날

병실을 나와 노모가 다녀갔는지

아니면 雪花水, 그 둥그란 입술이

제 주인의 살 냄새를 찾아

기어코 문지방을 넘었는지


방안 가득

엄마 냄새가

花, 할 때 있다


잠깐 

面鏡의 얼굴이 

젊을 때가 있다




붉은 토마토

             박은숙


어머니 붉은 토마토 한 광주리 머리 이고 어디 가시나요?

오늘 큰 트럭이 새말 정미소 앞에 오는 날이군요.

새말 정미소 까지 가려면 천마지기 논을 지나야 하는데......,

 

어머니, 토마토  제게 열 개만 나두어 주세요. 열 개정도는

저도 머리에 일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하면 안 될까요.

어머니는 동생들과 원두막을 지키라 말씀하시고, 토마토 밭을

바삐 걸어 나가신다.

 

우리는 원두막에 엎드려 눈으로 어머니 뒤를 따라간다.

8월의 태양은 토마토처럼 붉고 터질 것 같다.

들녘의 풀들이 바람의 부는 방향으로 눕지 못하고

녹아내린다.

 

돌림길이 아니면 벌써 도착했을 터인데

어머니와 트럭과의 거리는 내손 한 뼘 차이

엄지손가락으로 트럭을 어머니 앞으로 끌어본다.

 

좀처럼 끌려오지 않는다.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다.

그날 아버지는 어디 계셨을까?





안동소주

         박희용



잔 하나 있을까

한참 비어서 퀭한 바닥에

흰 구름 피어나고 있을까


적막을 깨뜨리는 풀잎의 힘 채워

신 앞에 선뜻 내놓을

잔 하나 있을까


막 허물 벗은 뱀처럼 싱싱한

푸른 산 푸른 물 출렁이고 있을까


온몸 가득 하얗게 돋는 봄날 앵두꽃은

아지랑이

금세 왔다 금세 가는 풀꽃은

낯선 손님


잔 하나 있을까

알몸의 선묘 곁에 앉아 한 나절

산비둘기 울음소리 먼지처럼 쌓일

잔 하나 있을까

경찰서가 망했다
               
송은영

 

사람들이 쓸 만큼 돈을 벌어 
놀고 먹는 게으름뱅이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부모도 자식을 버리지 않았고
자식도 부모를 버리지 않아 행복하단다
어제까지 사기꾼 전과자였던 사람들이
피 보일 상대가 없어지자 
평범한 이웃이 되었다  
교회당 십자가 밑에는 
안식하는 사람들로 넘쳐 났고
그리하여 우리 동네는 
이날 이후로 사건 사고가 사라졌다
출근해서 하릴없이 빈둥거린 경찰들이
눈치 밥을 먹다가 하나 둘 사표를 내고 
급기야 세계 동 네거리 
노른자 땅에 점포 세를 붙이고 
모두 실직자가 되었다
설탕 한 숟갈의 회유에도
납작 엎드린 경찰들은
전성기의 이름값을 분칠하다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지 
자신을 여러 번 개종했다
경찰서가 망하자 
사람들은 더 이상 
미치고 팔짝 뛰지 않았다  





풍등(風燈)
           신대원

 


대보름 달 떠오면 
하늘로 높이높이 띄워보자던
거룩한 우리들의 약속하나. 

우수경칩 다 지나도록 
풍등은
우리들의 부푼 소망은
세월로 야위어 가고.

아, 비 다시 개이고
바람 풋풋하게 일어
풍등에 실린 꿈 
일어나는 날
언제일까

신앙처럼
두더지 닮은 신앙처럼
설레며 기다리지.





돌감나무 

         신순말

   


  寒露가 지나고 霜降이 다가왔다.


  점지된 나무들은 한 겹 옷 벗어내듯 돌돌돌 껍질 깎이고 바람에 몸을 말려 쫀득한 곶감이 되거나 마음 순한 효자가 노부모 상에 올리는 달착한 홍시가 되려 연지곤지 찍은 신부 가마에 태우듯 일찌감치 감알을 떠나보냈지만, 쪼개어 보았댔자 단단한 씨앗이나 옹골지게 들어있을 조막만한 감알뿐인 고목은 돌아보는 이가 없었더라는데, 그예 서러워선지 자꾸만 이파리만 발밑으로 털어낼 뿐이었더라는데, 찬이슬 내리고 거푸 비를 맞자 두어 개 까치밥을 체면삼아 달고 있던 간택된 나무들도 미련 없이 남은 잎 후두두둑 던져버리고 길게 잠들어 버렸다는 것인데, 푸지게도 눈송이 쏟아지던 날 작은 새들 우르르 날아와 품에 안기자 볼이 한층 더 붉어진 돌감은 그제야 감은 눈을 뜨고 사방 둘러보며, 순간 그만 온몸 뜨거워져 수많은 전등알 필라멘트에 일시에 화락 불 당겼더라는데…… 번뜩 깨달았던 것이다, 고목은


  오롯이 은백색 빈들 꽃나무로 서 있음을.




스승의 은혜

         안병호

 

 


젖은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의 틈새에서 흘러나오는 꾸겨진 그림자

펼쳐보면 내 학업의 연대기가 보인다

 

1.

열한 살 내가 동시숙제를 검열 받기 위해 교탁 난간에 걸려 있다

가자미눈으로 변이되는 담임의 눈,

부모가 해줬다며 거칠게 몰아붙이는 붉은 입술

이윽고 울고 있는 내가 복도로 질질 끌려간다

뺨따귀에 벼락이 꽂힌 채

추락하는 나,

창가의 벚꽃도 하얗게 질려 추락하고

 

아침이면 얼굴에 판각된 담임의 손을 쥐가 갉아놓은 비누로 팍 팍 씻어낸다

밤일 다니는 어머니,

새벽녘엔 죽어가는 짐승처럼 쓰러져있고

아버지는 여전히 낯선 도시를 떠다닌다

(잃어버린 조약돌처럼 그렇게 스무 해 넘도록 시를 잃어 버렸지 )

 

 

2.

열다섯 살 내가 여학생을 희롱했다며 교무실 귀퉁이에 박혀 취조를 당하고 있다

검찰청 분위기의 무거운 교무실,

외가친척 교무주임도 무슨 파렴치범 목격한 것처럼 미간을 찌푸린다

나는 병든 개 문양으로 울고 있지만

근엄한 교권에 의해

어머니마저 교무실에 세워진다 동공이 풀린 채

해질녘이면  반성 없는 반성문을 쓰고는

그림자를 학교옥상 난간에 걸쳐 놓는다 미치도록 아름다운 노을에 젖어

개 패듯 하던 담임보다 교무주임을 더 증오하는데

(나를 판 옆 반 양아치는 무사했고 외가친척들은 한동안 나를 벌레 보듯 하였지)

 

 

3.

스승의 날 아침, 아이 담임에게 드릴 상품권 티켓을 아내에게 건넨다

영혼이 병든 게 틀림없는데 나는 아프지 않고 잘 살고 있다 잡풀처럼






미나리 비빔밥

                육봉수

-미나리 

맑은 물 만드시느라

스스로도 맑아진 물

아삭하게 씹어 삼키는

봄 햇볕 맛이라니


-참기름 

가을 땡볕 땀으로

흘리지 못하고 안으로 고여

점. 점. 점. 익은 속들

볶이고 눌려 짜여

매끈하게 스미는 고소함


-된장 

심고 매고 털어 거둔 콩

삶고 밟아 띄우고 담그며

어머님의 손 맛 그들먹 우러난

구수한 흙 내음


-고추장 

서리 맞으면 시든다고

죽을 힘 다해 여름 내 붉어진

성깔대로 아휴 매워

늘어진 정신 철썩

한 대 치는 매서움


-밥상위 

마침내들입다섞여내더러운오 

장육부속향긋하게고소하게구 

수하게매서웁게들어와이름까 

지버리며한번더녹아들어똥되 

어자라던곳찾아가자밥상위다 

를반찬밀어내는미나리비빔밥 




아름다움

         윤석홍



  아침에도 아름답고 저녁에도 아름답다. 맑은 날에도 아름답고 흐린 날에도 아름답다. 산도 아름답고 물도 아름답다. 단풍도 아름답고 바위도 아름답다. 멀리 보아도 아름답고 가까이 다가가도 아름답다. 불상도 아름답고 스님도 아름답다. 좋은 안주가 없는 탁주라도 아름답다. 들어줄 아름다운 사람이 없는 초동의 노래도 아름답다. 그윽한 아름다움, 상쾌한 아름다움, 툭 터진 아름다움, 아슬아슬한 아름다움, 담박한 아름다움, 화려한 아름다움, 넉넉한 아름다움, 살가운 아름다움, 뛰어난 아름다움, 추한 아름다움, 숨겨진 아름다움, 절제의 아름다움, 곡선의 아름다움, 드러난 아름다움, 조용한 아름다움, 말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어디를 가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어디를 함께 하여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아름다움이 이토록 많을 수가 있을까. 그저 아름다움 뿐이다.



나는 

   이명희

 

 

이리저리 발길 따라 생긴 오솔길을  걷다가

온갖 새소리 벌레 소리에 흠뻑 젖어 그냥 걷다가

옷섶에 풀물이라도 들면 돌이건 맨 땅이건

되는대로 퍼질러 앉아 나무사이로 보이는 하늘 속을

새가 된 듯 물고기가 된 듯 풍덩풍덩 헤엄치고 날아다닐 때

그런 때가 제일 좋아서

갖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이 자꾸만 줄어드는 세월을 남의 일인 양

바라보아도 그 뿐 그저 멍하니 하늘이나 바라보며 살아도

하나 상할 것 없는 요즘

이 모든 게 나이 탓이라고 아니다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고

비오는 날 들녘의 푸르른 풀빛더러 동무나 하자고




바람을 만나다
                이석현



국립 청주박물관 제2전시실에서
기원전 300년 고대철기문화를 관람하다가
바람을 불어 넣는 손풀무로
풀무질 체험을 해본다.

어라!
철 속에도 바람이 들어야 하느니
강한 바람을 집어 넣어야
강한 철이 만들어 지느니
그래야 바람을 가르는 칼도 만들어 지느니

30년간 철공장에서
이런 저런 철을 만들어 내고도
손 풀무질 체험으로
이제 와서 그걸 깨닫다니

전시실을 나와
상당산성 골짜기로 생생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만나
바람의 노래를 들으며
몸 속 깊이 바람을 집어 넣어본다.

세상에 모든 것은 바람을 만나야 단단해 지는가.
이 바람 맞으면
약한 나의 몸 강해 지려는가.




여우 굴

        이위발                                                                             

 

내 추억은 바위보다 무거워

거북이 껍질이 되었다가

코끼리 발바닥이 되었다가

권태 속에서도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로

 

 

땅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벽으로부터의 탈출은

죽음이겠지만

그 벽을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

수액 가득한 나무뿌리가 되어

황홀경에 빠져 있던 그곳

 

 

너무 완벽하고

너무 영원한 것이어서

불멸의 크기로 확대되는

끝없는 공허감에

하나의 형상마저도

가둘 수 없던 초라한 집









영천사람 주석봉

             이 중 기

 

 

일흔다섯 살 할마시가 와도 대번에 반말이다

그래 이 나이에 어디가 아파서 왔노?

여든 살 노인이 와도 반말은 거침이 없다

와? 꼬치가 잘 안 서나? 그거는 나도 자신 없는데……

주석봉은 노련한 나이 여든여섯이었다

영천에서 그에게 따끈한 존댓말 받아 자신 분 없었다

우리도 삼대가 거길 다녔는데 아이들만 대접받았다

그러니까 주석봉은 아이들 앞에선 겸손해진다

아이고, 어디가 편찮아서 여기까지 출타를 했는기요?

열이 이래 많아서야 어디 꼬치가 잘 여물겠나

봐라, 이 어른 꼬치 잘 여무는 약 하나 갖다드려라

간호사가 쪼르르 와서 알사탕을 입에 넣어주었다

간혹 젖꼭지에다 청진기를 들이댄다는 낄낄거림도 있었지만

영천에서 그는 유쾌 상쾌 통쾌한 영감탱이였다

그는 스크루우지를 닮아 짠물이었다

접수부 진료기록부 애오라지 광고지 전단 뒷면이었다

그는 역사학자 김성칠 사망진단서를 끊어준 사람이었다

살해범에 대해 알아보려고 그를 세 번 찾아갔지만

판판이 쌍욕만 얻어먹고 즐겁게 쫓겨나왔다

김성칠을 살해한 범인을 아는 사람은 주석봉 뿐이다

나는 알아도 그가 결재를 안 해주어서 함구중인데

그도 이젠 세상을 떠나 내 입이 좀 신중해졌다

나이 칠십 중반에 몸 아픈 걸 나무라던 사람

영천사람, 주석봉











 이종암

 

 

  경산絅山 선생은 내 고향 청도 감을 두고 ‘결사結社’와 ‘신격神格’ 그리고 ‘벼락 감춘 금강金剛’이라 노래했다* 씨 없는 청도 감의 속내는 청도의 바람과 물과 흙이 접椄으로 빚어내는 그 생명의 마당이어야 한다 고욤나무에 청도 감나무 생가지를 꺾어다가 볕 좋은 봄날에 접붙이면서 감나무는 생명의 첫눈을 뜬다 접이 중요하다 서로 다른 너와 내가 만나 접椄 되어 한 몸으로 새끼를 놓는 일, 생명이 나오는 본디 모습이다 이 땅에 내 생명 하나 내려놓는 일 이것이 분명 결사요, 신격이요, 금강일 터이다 세상에 번지는 죽임의 물결 걷어내고 생生의 명命 지켜내는 것 신격보다 더 소중한 인격의 본 모습이다



*정진규 시집 『껍질』(세계사,2007)에 수록된 시「청도가 수상하다」




속리산휴게소 

              임술랑

  

  

밤새 달려 온 그대는

바퀴를 멈춘다

아- 가득한 산바람

잠시 마시더니

詩가 가득한 지갑을 꺼낸다

그 중 낡은 것 한 수 집어서

커피 자판기에 주르르 밀어 넣더니

향기로운 차 한 잔 탁 앉힌다

딸깍딸깍 

쇳덩어리 利子처럼 떨어진다

九屛山 꼭대기에

눈발이 희끗한 풍경 속에서

한 모금 한 모금

행간을 새기며

가슴 속에 뭉친 긴 숨을

내쉰다 









세온도(歲溫圖)를 그리다

 

               정선호



  추사I(秋史)가 유배지 탐라에서 세한도(歲寒圖) 그렸을 무렵, 난 필리핀 루손섬*에서 세온도((歲溫圖) 그렸다. 세한도의 소나무대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망고나무와 파파야나무 그려 넣고 초가 대신 바파이쿠보* 그려 넣었다. 그가 세찬 바람과 눈 내리는 탐라에서 독한 술 마시며 그렸다면, 난 섬나라 바닷가 카페에서 차가운 맥주 마시며 그렸다 또 그가 그림의 소나무처럼 변치 않는 기개를 바랬다면, 난 열매 맺어 가난한 나라의 먹을거리 주는 나무들의 풍요로움 간절히 원했다

 

  추사와 난 따로 기나긴 겨울과 여름 지내며 너무 고독했다 그랬다,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유배자여서 고독했다 살아가며 가슴에 섬 하나씩 품고 있는 거였다 섬은 때로 고립되고 때로 모든 인류가 더불어 사는 곳이 되기도 했다 유배지에서 난 잘 사는 나라를 처절하게 원하고 추사는 따뜻한 나라를 목숨보다 더 원했던가

 

추사는 세한도 그리면서 가슴속에선 세온도(歲寒圖) 그리고 있었던가

 

 

 

 

*. 루손섬 : 필리핀은 수천개의 섬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수도 마닐라가

   위치한 면적이 큰 섬 이름임.

*. 마파이쿠보 : 필리핀의 전통가옥








서해에서

         조영옥

 


그대는 내 속 깊이 잠겼다 떠났나보다

넓은 공허

무수히 박힌 조가비처럼

추억 혹은 상처

어디에 그대 흔적 있을까

종종종 갈매기 발자국 따라

물결자국 따라

걷다걷다 아득한 만큼

선명하게 다가드는 빈자리

그대는 내 깊은 마음 속 울타리

남김없이 쓸어갔나 보다

시간에 등 떠밀려 솟아오른 바위

휑하니 드러나는 멍든 아랫도리

굴딱지 같은 기억들

묻어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났다 잠길 뿐

그대는 떠나며

버리라버리라 했는데

나는 얄팍한 무엇 하나

그래도 붙들고 있었나보다

바람이 불고

바다가 운다

큰 소리 지르며 물러났다

물거품으로 돌아와 흩어지는

나를 운다.




용사동락락(龍蛇同樂樂)

         차영호


문경 가은에 가면 연개소문 세트장이 있고

삼족오三足烏 날개 펄럭이는

고구려적 안시성도 있어

성안 옥사獄舍에 내걸린

주련柱聯

용사동락락龍蛇同樂樂

톡 까놓고 뒹굴면

왕후장상이나 백정고리짝이나

매일반이라는

말씀

저거

요새도 유효한

쿠폰일까

여름밤

      천승현


 

메밀꽃 겨드랑이마다

웅크린 조각

 

밤빛조차 두렵지 않은

기다림 안고

흩뿌려진 마음

끌어모아 본다.

 

새벽노을 툭 하고

차오르는 숨 몰아쉴 때

그리움이

산짐승처럼 달려와도

 

들판 같은 마음

보여주지 않으리라

 



한사코

      피재현



어미가 찔러 넣어주는 만 원짜리 두 장을

고모는 한사코 받지 않았다

몇 년에 한 번 바람처럼 다녀가시는 길

그 길로 고모는 바람에 넘어져 이승을 떠나고

아버지와 나서는 조문 길에

어미는 한사코 집을 지켰다

늙어서일까?

어미는 고모의 얼굴에서 돌아가신 할머니를

본다고 했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 열여덟 시집와

살아준 것만도 고마울만한데

그리 고집스럽게 시집살이 시키던

미운 시어미 얼굴이 보여

고모가 싫다고 했다

고모마저 세상을 뜨고

어미는 손을 떨었다

나이 칠십 셋에 아비가 싫다고 혼자 살고 싶다고

가방 하나 들고 딸네 집을 전전 서울로 부산으로

흘러 다닌다

어미 모시고 병원 가면 어미는 아무 데서나 쪼그려 누워

잠을 잔다

입원은 한사코 싫으시다 집도 한사코 싫으시다 저리

바람처럼 떠돌아다닌다





사막을 건너는 노인

                   하재영


 

눈높이를 지평선에 맞춘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축구시합

우리나라 경기를 응원하러

도시 넓은 공원으로 가는데

허리 굽은 노인

공처럼 휘인 몸 지팡이에 의지하고

굼벵이 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굴러간다

그런 속도라면

축구장 골대와 골대 사이

하루는 걸리겠다

저 지독한 느림 뒤로

하루가

노을로 떨어진다

넓은 사막이다






박태기나무

           황구하

 

 

한 계절을 굶주리고도 여자는 배가 부르다

 

수천수만 송이 꽃알 단박에 낳고

또 입덧을 하고 있다

 

집 천장 높지 않아도 새로 돋는 별

자잘한 가지에도 하늘이 걸린다

 

폭설 지나 빗물 속으로 녹아내리는

붉은 구름 태기가 슬어

햇빛 한 줌

바람 한 숨통 들이키며

열두 달을 거느린 수척한 얼굴

 

난생 누대의 뿌리로부터

피가 돌고 있었던가

투두둑 터져 나오는 꽃알 꽃알 몽우리

 

세상 모든 꽃의 자식들

지느러미 살랑이며 돌아오고 있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크음큼 배가 부른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