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득이

 

내 친구 부득이의 아버지는 목욕을 좋아하는 분이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일본에서 귀국했다. 땅뙈기 하나 없이 가난한 시골마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기에 일제 때 젊은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막연히 일본을 동경했다. 일본에서도 변변하게 살지 못했던 그는 해방이 되자 곧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일본에 가기 전이나 갔다 와서나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목욕을 자주하는 습관이었다.

도회지에도 목욕탕이 귀하던 시절인데 시골에 목욕시설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부지런히 목욕을 해서 마을에서 가장 깨끗한 남자가 되었다. 그의 목욕 장소는 주로 마을 앞 개울이었다. 그것도 날이 어두워져야 가능한 것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늘 깨끗했다. 이로 보아 그의 목욕에 대한 성실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는 늘 깨끗했지만 또한 늘 가난했다. 시골마을에서 농토가 없으면 가난을 면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는 남의 농사일에 품을 팔거나 공사판에 가서 막노동을 하여 생계를 이었다. 그의 하는 일은 언제나 시원치 않아 일터에서는 모두가 꺼리는 바였다. 일은 신통치 못하게 하면서 먹을 때는 활기에 넘치므로 일꾼들은 그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가키 마사오가 새마을 운동을 주창하던 시절이었다. 마을 앞 개여울을 건너는 시멘트 교량을 건설하는 공사판에서였다. 십장이 고기와 술을 한턱내는 날이었다. 모처럼 고기를 먹은 그가 매우 흡족하여 다리 난간에 걸터앉았다. 다리를 달랑달랑 그네처럼 흔들며 이렇게 말했다.

“고기 맛은 옛날과 변함이 없네.”

이 말에 공사판 인부들이 모두 모두 웃었다. 이후로 그를 보면 고기 맛은 옛날과 변함이 없네, 하고 농을 하기를 즐겨하였다. 이것이 굳어져서 그는 ‘고기 맛은 옛날과 변함이 없네.’라는 긴 별명을 얻게 되었다.

예로부터 우리는 곡물과 채소를 주식으로 하는 농경민족이었다. 그러므로 고기는 매우 높은 신분의 사람이나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백성들은 혼사나 장례 같은 큰일이 있어야 고기 맛을 볼 수 있었다. 평시에는 꿈도 꾸지 못할 음식이 고기다. 한 가지 더 있기는 하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이다.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는 학생들이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달리기 등을 겨루는 날이지만 어른들도 함께 즐기는 날이기도 하다. 운동장 하늘에는 만국기가 걸리고 운동장 가로는 국밥을 끓이는 가마솥이 걸린다. 돼지고기에 무와 대파를 넣어 끊인 붉은 기름이 둥둥 뜨는 돼지고기국밥이다. 솥에서는 김이 나고 구수한 냄새가 기가 막힌다. 지금도 비계 몇 점 둥둥 뜨는 그 돼지고기 국밥이 그리울 때가 있다.

특히 경상도 내륙 지방에서는 생선과 고기를 통틀어 그냥 고기라 불렀다. 고등어, 갈치, 문어, 닭고기, 돼지고기, 쇠고기를 모두 그냥 고기라 한다. 멸치도 고기 축에 든다. 쌀이 주식인 우리에게는 쌀에 대한 어휘가 다양하다. 그러나 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미국 사람들은 모, 벼, 쌀, 밥을 모두 통틀어 라이스(rice)라 한다. 경상도 내륙에서 생선까지를 고기라 부루는 것은 그만큼 고기가 귀했다는 뜻이다.

게다가 이 지방은 체면을 중시하는 선비의 후예가 많은 고장이다. 검소하고 소박하게 사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전통이 남아 있다. 고기는 제사상에나 올리는 음식으로 여겼기에 평소 고기를 먹는 일을 천박하게 여기기까지 했다. 고기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천박하게 여기는 문화가 잔재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가난한 그가 대놓고 고기 맛을 들먹였으니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부부금슬이 좋아 흥부만큼은 아니어도 여러 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비의 벌이는 신통치 못한데 먹을 입은 여럿이니 아이들은 늘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플 뿐만 아니라 입성도 남루하여 깡통만 차지 않았을 뿐이지 걸인에 방불했다.

시골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날이 마을에 큰일이 있는 날이다. 큰일이라 함은 장례, 소상, 대상의 삼년상을 비롯하여 혼례와 환갑잔치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어느 집에 큰일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 집에 모여 북적인다. 그야말로 큰일을 치루는 것이다. 남정네들은 돼지를 잡고 아낙네들은 부엌일에 참여한다. 온 마을 사람들의 식사도 자연 큰일 집에서 해결한다. 아이들이 큰일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른 들이 잡은 돼지의 오줌통에 바람을 넣어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것과 고기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늘 밥과 나물반찬만 먹던 아이들에게 고기 맛은 환상적이다. 요즘 사람들은 돼지비계는 모두 꺼려하지만 그때의 돼지비계 맛은 정말 훌륭했다. 꼬치에 꿰어 제사에 쓴 직사각형의 돼지고기 한 점을 양념간장에 살짝 찍어 씹는 맛이란 몸이 떨릴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나는 지금도 돼지고기 수육이나 문어는 초고추장에 찍지 않고 양념간장에 찍어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고기 맛은 옛날과 변함이 없네.’라는 긴 별명을 가진 그의 아들 가운데 내 친구 부득이가 있다. 눈이 크고 몸이 여위어 장수잠자리라 불리가도 하고 방아깨비라 불리기도 하는 아이였다. 부득이가 동네 잔칫날 어쩌다가 돼지비계 한 점을 얻었다. 그의 여동생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떼가 까맣게 묻은 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돼지 털이 턱수염처럼 까맣게 박힌 돼지비계 한 점을 들고 여동생 미수를 찾았다. 앞니가 빠져 미수라고 부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미슈야!”

“미슈야!”

애절하게 동생을 찾아 헤매다가 잔치마당 아이들 틈에서 미수를 발견했다. 부득이는 앞니 빠진 입을 벌려 웃으며 돼지비계를 미수에게 내밀었다.

“미슈야! 고기 먹어!”

그의 아버지가 고기 맛은 변함이 없다는 명언으로 마을에서 유명해진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부득이는 ‘미슈야, 고기 먹어’ 로 대를 이어 명언을 남기게 되었다. 그 후로 부득이는 이름보다 ‘미슈야, 고기 먹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전 국민의 9할이 농민이었고 대부분이 가난하던 시절이었기에 가난은 그리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무능함으로 흥부의 아이들처럼 남루하게 자랐지만 부득의 형제자매는 모두 들풀처럼 잘 자랐다. 사내아이는 착하고 계집아이는 예뻤다.

가난한 시골 아이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부득이는 가출을 해서 서울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다행이 적빈은 면한 집에 태어나서 아버지가 소를 팔아 등록금을 마련해 주었으므로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서울에서도 고기 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동아리 친구들과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켰다. 그 가운데 돼지고기 조각이 유난히 도드라지게 보이는 그릇이 있었다. 서로 그 그릇을 차자하려고 경쟁이 치열하였다. 누군가 제안했다.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못한 사람이 먹기로 하자. 얼마나 오래 고기를 먹지 못했는가에 대해 발표를 하기로 했다. 나는 할아버지 제사 때먹고 못 먹었다. 나는 생일날 먹고 못 먹었다. 나는 돌 때 고기 보고 지금 처음 본다. 나는 아버지 재혼할 때 먹고 처음이다. 각자 발표가 끝난 다음 한 녀석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나는 뱃속에 풀이 날려고 해.”

그날 우리 모두는 그에게 졌다고 말하고 장원을 줄 수밖에 없었다. 돼지고기가 도드라진 그 짜장면은 그의 몫이 되었다.

어느 날 하숙집으로 공장에 다니는 고향 친구 부득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가운 것이 객지 생활이라 나는 반가운 마음에 부득이를 만났다. 우리는 부득이의 비좁은 자취방에 모였다. 부득이 외에 몇몇 고향 친구들이 더 있었다. 가게에서 라면과 통조림과 소주를 사서 그날의 상이 차려졌다. 상은 부득이와 같이 공장에 다니는 부득이의 여자 친구가 차렸다. 그때 나는 어디선가 들은 듯한 말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부득이가 꽁치 통조림의 꽁치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그의 여자 친구 라면 그릇에 올려주며 말했다.

“자기야, 고기 먹어.”

자리를 함께했던 고향 친구들의 눈이 일제히 부득이에 쏠렸다. 그리고 모두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는 눈치였다. 모두 그의 옛 별명 ‘미슈야, 고기 먹어.’가 떠올랐으리라. 아아, ‘미슈야, 고기 먹어’가 ‘자기야, 고기 먹어’로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날 이후로 우리 고향 친구들로부터 부득이는 ‘미슈야, 고기 먹어’에서 ‘자기야, 고기 먹어’라는, 보다 진보적 별명을 얻었다. 흥부의 아이들 같은 부득이의 형제자매는 학교는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사내아이들은 성실해서 도회지에 나가 기술을 배워 잘 살게 되었고, 여자아이들은 예뻐서 시집을 잘 가서 모두 잘 살게 되었다.

말년에 부득의 아비는 자식들 모두 도회로 날려 보내고 아내와 둘이서 살고 있었다. 아이들이 모두 자리를 잡아 효도를 할 만큼 되었을 때 어느 겨울, 부득의 아버지, ‘고기 맛은 옛날과 변함이 없네.’ 씨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그의 시신이 개울에서 동사체로 발견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개울의 얼음을 깨고 목욕을 하다가 얼어 죽은 거라 했다. 이로써 고기가 귀하던 시절 고기 발언으로 명성을 얻었던 가문의 가장이 일생을 마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목욕하는 버릇을 굳게 지켰던 것이다. 그의 죽음을 두고 마을에 말들이 떠돌았다. 어떤 이는 일본에서 배운 것을 그렇게 오랜 세월 굳게 지켰으니 대단한 친일파라 했다. 어떤 이는, 헤엄 잘 치면 물에 빠져 죽고, 나무에 잘 올라가면 나무에 떨어져 죽는다더니, 옛말 하나 그른 거 없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