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작은 도시에서 학교에 다니다가 겨울방학에 고향집에서 지낼 때였다. 온 마을이 대체로 가난했다. 그런데 우리 집은 밥을 굶지는 않았다. 친구들은 모두 중학교도 못 가고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나는 어렵게나마 고등학교씩이나 다니니 그게 나의 마음을 편하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일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지만 마음 놓고 공부만 할 처지가 못 되었다. 할아버지는 궁하지 않게 사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사서만 읽으며 일이라고는 가끔 비올 때 논물 보는 것이 전부셨다. 그러다가 가세가 기울어 아버지는 불혹이 넘어서 농사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꾼을 둘 처지가 못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나보다 일을 잘 하실 줄 몰랐다.

방학동안 나는 오전에는 산에 가서 땔나무 한 짐 해 놓고 오후에는 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게 내가 스스로 정한 방학계획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겉으로는 대단한 모범생이었다. 내면에서는 청소년기의 욕망과 혼란으로 들끓고 있었지만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모법생인 줄 알았다. 가령 다른 친구들이 몰래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울 때 나는 그들과 어울리기는 했지만 술과 담배는 어른들이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해서 아예 멀리했다.

겨울 아침 찬바람에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갔다. 낫으로 마른 억새를 베고 갈퀴로 솔잎과 함께 글어 모아 지게 위에 쟁인다. 짐을 단단하고 모양 있게 하기 위해서는 맨 아래에 솔가지나 작은 나뭇가지를 깔아야 한다. 나뭇짐의 모양으로 나무꾼의 수준을 알 수 있다. 나뭇짐이 까치집처럼 엉성하면 초보다. 그런 나뭇짐을 보면 어른들은 혀를 차면서 빌어먹기 ‘마치맞다’고 하신다. ‘마치맞다’는 ‘알맞다’의 지역말이다.

그런 나뭇짐을 지고는 집에까지 갈 수도 없다. 바람이 약간만 불어도 날아가고 만다. 짐의 모양이 갖추어져도 지게를 지고 일어서기가 어렵다. 힘으로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지게작대기를 요령 있게 짚으며 무게 중심을 이용해서 일어나야 한다. 짐을 지고 걸으려면 전문용어로 지게가 등에 붙어야 한다. 이것을 어른들은 지게 귀신이 등에 붙는다고 했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지게가 등에 붙지 않으면 짐을 진 채로 도랑에 처박히기 일쑤다. 그렇게 되면 그 자리에서 다시 짐을 만들어야 야 한다. 방학 내내 매일 나무를 했지만 지게는 등에 붙지 않았다.

밤새 눈이 내렸다. 온 마을이 눈으로 하얗게 덮였다. 나는 나의 골방에서 창호지로 들어오는 빛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창호지 바른 문으로 걸러져 방에 들어오는 부드러운 빛을 좋아했다. 지금도 내가 집을 짓는다면 문은 유리창이 아닌 창호지로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눈이 내리면 사람들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 그러기에 김광균은 ‘머언 곳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생각하고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밤 깊어 뜰에 내리지 않았던가. 나는 그때까지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의 교훈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내면에는 다른 친구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더 강했을 것이다. 나타샤를 꿈꾸기도 하고 에디뜨 삐아프의 샹송을 들으며 이국의 여인을 꿈꾸기도 했다.

마당에서 초등학교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를 부르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문을 열었다. 한 아이가 누가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어디 있느냐고 하니까 대문 밖 감나무 아래 있다고 했다. 나는 무릎과 엉덩이가 툭 튀어나온 헐렁한 바지 차림으로 왕자표 통고무신을 신고 대문 밖으로 갔다.

감나무 아래 한 소녀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밟고 있었다. 단발머리에 까만 오버코트를 입고 빨간 장갑을 끼고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 친구가 없었기에 여자 친구일 리도 없고, 친척 중에서도 여학생이 없었다. 누구일까? 그녀는 이미 그 자리에 오래 기다려서인지 그녀의 발자국으로 인하여 눈이 판판하게 다져져 있었다.

“누구……?”

“…….”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 것도 초조한 일이었지만 나의 몰골이 그녀와 비교되어 더욱 거북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전형적인 도회지의 세련된 여학생이었고, 나는 반은 나무꾼이요 반은 학생인 찌질한 촌놈이었다. 아이들은 신기한 듯 구경을 하는데 그녀는 누구인지 말을 하지 않았다. 감나무 가지 위에 쌓인 눈이 몇 번 툭!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난 뒤에 그녀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어, 박호순 선생님…….”

그때서야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정희구나!”

그제야 그녀가 웃음 띤 얼굴을 들었다. 하얀 이가 가지런하게 반쯤 드러났다.

시골 조그만 중학교에 여선생님이 오셨다. 홍일점 여선생님이었다. 햇볕에 그은 시골사람들만 보던 아이들의 눈에 선생님은 천사와 같은 존재였다. 학교 뒤 작은 농가에 방을 얻어 사셨다. 교사 초임이라 아이들을 귀여워하셨다. 소월의 시를 외게 하고 문예반을 만들어 글쓰기도 가르치셨다. 우리는 선생님 방에 모여 독서토론도 하고 선생님이 해 주신 밥도 먹었다. 선생님의 귀염을 받던 아이들 가운데 후배 정희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정희가 보이지 않았다. 서울로 전학을 갔다는 것이다. 정희는 후배였고 별로 말을 나눈 기억도 없는 아이였다. 그보다 나는 여학생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착한 학생의 행동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 때 조그만 정희가 여고생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어머니가 차려준 개다리소반 밥상을 마주하고 정희와 밥을 먹었다. 남루한 시골 방안의 풍경, 개다리소반 밥상 위의 투박한 그릇들, 그 그릇에 담긴 시골 음식들이 서울 소녀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난 편하게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정희는 젓가락을 들어 밥알을 세듯이 밥을 먹었다. 먹는다기보다 먹는 시늉을 하는 것 같았다.

하오의 햇살이 창호지를 통해 토방 안에 풀어졌다. 정희는 저쪽 벽에 기대앉고 나는 맞은 편 벽에 기대앉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정희는 중학교 1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가서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라고 했다. 영주 시내에 있는 외가에 들렸다가 오빠 생각이 나서 찾아왔다는 것이다.

“지금도 글쓰기는 하세요?”

아마 그렇게 물은 것 같은데 나는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먼 곳에서 천사가 눈길을 걸어 내가 사는 곳에 찾아왔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내 내면에서는 정희라는 소녀에 대한 정감이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지만 그걸 들키지 않으려 긴장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말을 하지 않으니 정희도 까만 눈으로 창호지에 어린 햇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 사이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시간은 정희에게도 나에게도 힘겨운 시간이었다.

“이제 가 봐야겠어요.”

정희가 빨간 장갑을 끼며 몸을 일으켰다. 나도 엉덩이와 무릎이 튀어나온 바지 차람으로 엉거주춤 일어섰다.

“동구 밖까지 바래다줄게.”

그랬던 것 같다. 고작 그런 말만 했던 것 같다. 정희와 나는 고샅을 걸었다. 마을 아이들이 구경난 것처럼 우리 뒤를 따랐다. 시골 마을에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걷는다는 것은 구경거리였다. 아이들에게 가라고 했지만 아이들은 물러갔다가는 다시 몰려왔다. 놀이기구도 없고 장난감도 없는 마을에 우리는 아이들의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었다. 하얀 눈길을 걸어 동구 밖까지 다다랐다. 한참을 서 있다가 그녀가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나무꾼의 거친 손에 선녀의 따스하고 부드러운 손이 느껴졌다.

“잘 가.”

“오빠두요.”

아이들은 아직도 그녀의 뒤를 졸개들처럼 따라가고 있었다. 나는 왔던 길을 천천히 돌아가며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전학을 가고 난 다음 잊고 있었던 정희가 여고생이 되어 멀리서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 참 신기한 일란 생각을 했다. 내가 그 애를 잊고 있던 동안 그 애의 마음 한켠에 내가 남아 있었다니 참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눈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밖에서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얘들아, 그 여학생 잘 갔니?”

아이들이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니요. 아이들이요. 눈으로 때려가지고요. 울면서 갔어요.”

눈 내리는 날이면 아직도 아이들 목소리가 들린다. 울면서 갔어요. 울면서 갔어요. 그리고 눈을 감으면 까만 코트를 입고 하얀 눈길어 걸어서 가는 그 애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