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변방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대기하고 있었다. 당시 교육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정부로부터 교육비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5년간 초등학교에 복무해야 했다. 발령이 났다는 연락을 받고 지역 교육청으로 갔다. 내가 태어난 고향 인근에 있는 학교였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지도로 위치를 확인하고 학교가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버스는 하루에 한두 번밖에 다니지 않는 곳이어서 택시를 탈 수밖에 없었다. 택시는 비포장도로의 오르막을 끝도 없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다 왔니껴?”

“멀었니더”

이런 대화를 몇 번 되풀이한 다음 택시는 고갯마루에 다다랐다. 다시 내리막이 끝도 없을 듯 이어졌다.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 있고 초등학교가 나타났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마을에는 학교가 있고 경찰지서가 있고 우체국이 있었다. 다시는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얼핏 스치기도 했다. 새로 산 양복 입고 가방 하나 들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무실로 향했다. 우선 학교에 인사하고 다음에 짐을 챙겨서 다시 오려는 생각이었다. 교무실 문을 열자 한 교사가 밖으로 떠밀었다. 회의 중이니 다음에 오라고 했다. 내 차림세로 보아 월부 책을 파는 상인이라고 여긴 듯했다. 책 팔려고 온 사람이 아니고 발령이 나서 온 교사라고 했다. 그제야 교무실로 들어가게 했다. 회의를 중단하고 인사를 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 한분이 결혼하는 바람에 사표를 내서 아이들이 며칠째 수업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은 인사만 드리고 준비해서 내일 오겠습니다.”

사정하듯 말했지만 안 된다는 것이다. 내일부터 당장 수업을 해야 하고 좋은 하숙집이 있으니 당장 하숙으로 가자는 것이었다. 오늘밤에 신임 교사 환영회가 있다고 공지사항을 말하는 것이다. 봉사 시집가듯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박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병아리 교사가 되었다.

하숙집이라는 곳에 안내되었다. 마치 군대 막사처럼 길게 흙벽돌로 지는 집이었는데 몇 개의 칸이 나누어져 있었다. 한 칸에 교사 2명씩 수용되어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이곳은 이 지역에서 교사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학교였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형태의 오지였으므로 교통이 불편해서 시내에서 통근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결혼한 교사는 가족을 거느리고 농가 주택을 얻어 살림을 차려야 하는 곳이었다. 대개 오지에 근무하면 벽지 점수라는 것이 있어서 근무 평점을 높게 받는 이득이 있지만 이곳은 오지이지만 벽지학교로 분류되지 않아 아무런 혜택이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만만한 초임 교사를 대개 이곳으로 보낸다. 그래서 젊은 교사가 많으며 하숙집이 필요했던 것이다.

밤이 되자 하숙집으로 교사들이 몰려들고 술상이 차려졌다. 결혼한 교사도 더러 있었지만 대개 총각 선생들이 많았다. 허름한 잠바를 입은 더벅머리의 젊은 교사들이 방안에 가득했다. 병아리 교사의 부임을 축하한다며 건배!가 몇 차례 이루어졌다. 그들은 축가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들은 상에 젓가락을 두드리며 그때 유행하던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의 가사를 바꾸어 불렀다. “인삼 꽃 피고 지이는 산골 마으으레 조오빨라꼬 왔던가 총각 선언새애앵님. 사이사이 좋아 좋아.” 이렇게 합창이 끝나고 나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나는 음치다. 그래서 어느 모임에서나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노래 부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 준비 없이 인사하러 왔다가 노래까지 하라고 하니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내가 음치라고 하자. 그들은 다시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장단을 맞추었다.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 엽저언 열 닷 냥. 병신 같은 게. 분위기 단 깬다. 쪼다 같은 게 분위기 조진다. 엽저언 열 다앗냐아앙.” 나는 어쩔 수 없이 문학청년시절 선배에게 들은 노래를 염불하듯 읊었다. “옛날 어느 마을에 대머리 까진 총각이 깡깡이를 치면 서 찾아 왔더래……” 내가 염불 같은 노래를 하자마자 그들은 자기들 끼리 이야기 하며 듣지 않았다. 나는 염불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노래 시켜놓고 왜 안 들어 씨바!”

라고 일갈했다. 좌중이 머쓱해졌다. 그리고 밖에 나가 우물가에 엎드려 엉덩이를 하늘로 향하고 그날 먹고 마신 모든 것을 고스란히 토했다.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니 별이 듬성듬성 근심스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3학년 담임이 되었다. 처음으로 교사가 되어 교실에 들어서자 30명가량의 아이들이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맑고 깨끗한 것은 아이들 눈뿐이었다. 대부분 옷은 남루하고 얼굴도 몸도 깨끗하지 못했다. 마당에서 뒹굴고 노는 강아지와 다름이 없었다. 머리와 피부에 부스럼이 난 아이들이 많았다. 생각 같아서는 아이들 모두를 시내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기고 옷도 깨끗하게 빨아서 입히고 싶었다. 내가 맡은 사무는 양호와 접대라는 것이었다. 양호는 구급약을 구입해 두었다가 배탈이 나면 소화제를 먹이고 살갗에 상처가 나면 빨간 약을 발라주는 일이었다. 접대는 손님이 오면 차를 타서 내오는 일이었다. 지금은 양호교사가 따로 있고 커피는 자판기가 설치되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약장에는 쓰지 않은 약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점심시간에 부스럼이 난 아이들을 불러서 과산화수소로 소독을 하고 붕산연고를 발라서 부스럼을 퇴치하려고 했다. 상처에 소독을 할 때 아이들은 죽는 소리를 냈다. 엄마처럼 머리를 쥐어박으며 약을 발랐다. 아이들의 피부병도 차츰 수그러드는 것 같았다. 날이 따뜻해지자 체육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개울가로 갔다. 비누를 구해서 아이들 머리를 감기고 손발을 씻게 했다.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작심삼일이란 말이 증명되었다. 나도 게을러지고 아이들도 다시 부엌강아지가 되어 갔다. 나도 청바지에 티셔츠 한 장 걸치고 아이들처럼 부엌강아지가 되어갔다. 사람의 행동은 생각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산과 들이 결정하는 것 같았다.

수업을 하는데 손님이 왔다는 전갈이 왔다. 내 업무가 접대였기에 하던 수업을 멈추고 차를 끓여 쟁반에 받쳐 들고 교장실에 들어갔다. 탁자에 커피 잔을 다소곳이 내려놓았다. 손님이 빙글빙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보니 고등학교 동기생 녀석이었다. 이런 씨바라고 하고 싶었지만 교장 선생님 앞이라 감히 그러지 못한 것이 매우 억울했다. 그 친구는 은행에 취직을 했는데 학교의 땅값감정을 하러 출장 왔다는 것이다. 후일 그 친구는 동기생 모임이 있을 때마다 나를 일러 자기에게 차를 바친 착한 교사이라고 두고두고 놀렸다. 나의 양호와 접대 교사 업무는 여자 선생님이 부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레바논 골짜기 같은 곳이었기에 교사들은 다른 학교로 전근가지 않으면 이 마을을 벗어날 수 없었다. 퇴근을 한 교사들은 저녁을 먹은 뒤에 다시 교무실로 모여들었다. 영화관도 없고 찻집도 없고 문화의 혜택이라고는 거의 없는 곳이었기에 의지할 것이라고는 소주밖에 없었다. 전화기에 손잡이를 돌려 교환을 부르면 교환이 고깃집을 연결해 준다. 조금 있으면 아주머니가 머리에 술과 안주를 이고 교무실에 온다. 고기와 김치가 든 냄비를 장작 난로위에 올린다. 찌개가 끓으면 누군가 외친다.

“까라!”

그러면 팔뚝만한 소주병의 뚜껑이 열리고 옛날식 다방의 엽차 잔에 꽈르르 소주 따르는 소리가 경쾌하다. 취흥이 도도한 날은 이 마을 지서의 경찰을 부르기도 하고 우체국 직원을 불러 판이 커지기도 했다. 술자리는 항상 청춘이 유배당했다는 억울함과 언제나 이곳을 벗어나는가,가 화제의 중심이었다.

학교생활에서 내가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이 음악수업이었다. 음악 때문에 교육대학에서 낙제를 했을 정도이니 그 재능을 알만할 것이다. 음악수업이 있는 전날은 일찌감치 풍금을 우리 반 교실에 옮겨 놓고 연습을 했다. 노래 잘 하는 아이를 남겼다가 나는 풍금을 치고 아이는 노래를 하게 했다. 그렇게 몇 시간 연습을 한 뒤에야 다음 날 음악수업을 할 수가 있었다. 겨울은 그런 대로 할 수 있었지만 여름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발은 열심히 풍금 페달을 밟아 바람을 넣고 손은 건반을 찾아 헤매고 눈은 아이들을 보고, 한참 그렇게 하다 보면 땀이 흘러 등을 적셨다. 음악수업이 아니라 노가다를 하는 것 같았다. 음악은 즐거워야 하는데 나의 음악은 노가다 수준이이니 좋은 수업이 될 수가 없었다. 늘 아이들에게 미안했다.

학교에는 내신이라는 것이 있다. 학년말이 되면 자기가 가고 싶은 학교를 적어서 제출하면 근무 점수에 따라 원하는 학교에 가기도 하고 가지 못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일단 학기말이 되면 내신을 낸다. 나는 내신을 낼 수가 없었다. 나도 이 골짜기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선생님들의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규정에 의하면 한 학교에 근무할 수 있는 기간이 5년이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면 초등학교 교원으로 복무해야 하는 의무복무 기간도 5년이었다. 나는 5년만 하고 그만 둘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내신을 낼 필요가 없었다.

이 골짜기 학교에서 생활도 5년 가까이 되었다. 내년에는 다른 학교로 가야 한다. 다른 학교에서 한 달 반이 지나야 5년의 복무기간이 끝난다. 한 번도 내신을 내지 않고 묵묵히 일만 하던 나를 교장과 교감이 어여삐 여겼는지 후한 점수를 준 것 같았다. 게다가 아들을 글쓰기 대회에 데리고 나가서 상을 많이 받게 해 주었다. 유능한 문예 지도교사로 꽤 이름이 나 있었다. 그 덕에 이 고장에서는 제법 큰 시내에 있는 학교에 전근을 가게 되었다. 동료들은 좋은 학교에 가게 되었다고 축하의 말을 했지만 나는 한 달 반 뒷면 초등학교를 떠날 속셈이었기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정든 아이들과 헤어진다는 슬픔이 더 컸다. 자연에서 자란 아이들의 순수함에 나는 많은 것을 배운 터였다.

3월이 되어 시내 학교에 부임하자 정신이 없었다. 한 학년이 10개 반 정도 되는 학교니까 교사의 수도 60명이 넘었다. 교사들 얼굴 익히기도 어려웠다. 나는 5학년 담임이 되었다. 이곳 아이들은 이미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익힌 아이들이 많기에 나는 음악 수업을 할 수가 없었다. 음악시간에는 옆 반 선생님과 수업을 바꾸어 했다. 오후에는 아이들과 교외로 산책을 나가기도 하고 교실에서 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다. 시골 아이들과 도시 아이들의 차이점이 느껴졌다. 시골 아이들은 선생님이 좋아도 좋다는 표현을 하지 않는다. 대개 시골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가족처럼 여기고 배려한다. 아이들이 교육적 문화적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그런 선생님의 배려에 대해 표현을 하지 못한다. 도시 학교 교사들은 그에 비해 학생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아이들을 배려할 시간이 없다.

나는 산골에 있을 때와 같은 태도로 아이들을 대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순하고 친절한 선생님을 처음 본 것처럼 나를 따랐다. 병아리가 어미닭을 따르는 병아리 같았다. 아이들도 깨끗하고 예뻤다. 그런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도시 학교의 또 하나의 문화는 학부모로부터 접대받기였다. 점심시간마다 전교직원이 초대되었다. 3월 한 달 거의 매일 점심시간은 잔치와 다름이 없었다. 나는 이런 문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만 5년이 되어 나는 사표를 제출했다. 교장은 이 학교가 문예대회에서 화려한 수상을 할 기회를 잃은 것을 애석해 했고 교감은 나를 앞에 세워놓고 교육청에 전화를 해서 빨리 새 교사를 보내달라고 했다. 교실에 돌아오니 아이들이 책상을 뒤로 밀어놓고 모두 마루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아이들이 모두

“선생님, 가지마세요!”

하고 울었다. 나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 둘 수밖에 없음과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하고 교실을 나섰다. 아이들은 계속 꿇어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칠판에 나의 주소를 적어두고 꿇어앉은 아이들을 그대로 두고 교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복도를 지나다가 눈이 부어 있는 우리 반 아이를 보고 어떤 교사가 너 왜 싸웠어 하며 다짜고짜 뺨을 때리는 것을 보았다. 내 초등학교 교사 시절은 이렇게 마감되었다. 학교를 떠난 후 한동안 나는 아이들의 편지를 읽으며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들곤 했다. 잠자리에 누워 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 그게 꽤 오랜 버릇이 되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범인은 몰래 범죄 현장을 다시 찾는다고 한다. 나는 가끔 내가 있었던 초등학교를 몰래 찾기도 했다. 나는 이를 혼자말로 성지순례라 명명했다. 어느 날 그 학교는 폐교되어 노인요양원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