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손가락



A시로 가기 위해 청량리에서 기차를 탔다. 열차는 만원이어서 복도에서 서서 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처럼 지정 좌석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미리 탄 사람은 앉고 늦게 탄 사람은 서서갈 수밖에 없었다. 도중에 내리는 사람이 있거나 양보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 잠시 앉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5시간 이상 벌 받는 사람처럼 서서 올 수밖에 없다. 지금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지만 그때는 그랬다. 모든 것이 부족하고 모두가 가난한 시절이었기에 그런 일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열차의 의자도 묘하다. 둘이 앉으면 넉넉하고 셋이 앉으면 불편한 크기였다. 그런 의자가 마주 보고 있어서 대개 여섯 사람이 한 가족처럼 모여서 앉는 꼴이었다. 친하든 친하지 않든 다정한 것처럼 앉게 되어 있었다. 옆 사람과는 몸이 닿아야 하고 앞 사람과는 얼굴을 바라보아야 한다. 같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선남선녀면 운이 좋다고 속으로 웃지만 예의 없이 시끄러운 아저씨나 불결한 사람과 같이 가게 되면 몇 시간 동안 인내심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그날도 좌석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복도의 적당한 공간에 서서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며 몇 시간 인내하리라 마음의 준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방을 선반에 얹고 책 한 권을 꺼내들고 복도에 서서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버티기에 들어갔다. 책에 눈을 고정시키고 읽으려고 했지만 차가 흔들릴 때마다 시선은 문장에서 벗어나곤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즈음 누군가 내 옆구리에 톡톡 노크를 했다. 손길을 따라 가니 내 옆의 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였다. 마침 6명이 앉은 자리에 5명이 앉아 있었다. 자기 앞 자리에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거기에 앉으라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비집고 앉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평균 이상의 부피를 지닌 중년들이었고 그들은 다리를 벌린 채 눈을 감고 편안한 자세로 등받이에 기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아까 나에게 노크했던 것처럼 자기 앞에 앉은 돼지의 팔에 톡톡 노크했다. 그는 졸린 눈을 들어 못마땅한 것처럼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돼지에게 옆 공간을 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나보고 앉으라고 했다.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뜨고 있었으므로 그는 마지못해 몸을 웅크려 조그만 공간을 만들었다. 나도 그녀의 명령에 따라 거기에 비집고 앉았다. 당시 우리가 자주 쓰는 말에 ‘나이롱 양말에는 문수가 없다’는 게 있었다. 외설적으로 쓰이던 말이었다. 큰 발이든 작은 발이든 나이롱 양말은 모두 맞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그때는 나일론을 나이롱이라 했다. 나이롱 양말은 버선이나 면양말에 비해 신축성이 뛰어난 신소재로 만든 것이었다. 그날 내가 경험한 바로는 삼등열차 자리도 문수가 없었다. 앉으니 자리가 생겼다. 나와 그녀는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밤새 몇 시간을 서서 벌을 받아야 하는 나를 구원해준 천사와 마주앉게 되었다. 도회풍의 예쁜 얼굴이었다. 뚱뚱한 중년에게 좁혀 앉을 것을 요구해도 들어줄 만큼 밝은 미소도 가졌다. 나는 속으로 믿지도 않는 하느님을 나직이 불러보았다. 하느님 이렇게까지 은혜가 충만하시나이까.

 

나는 어릴 때부터 부끄럼쟁이였다. 조금만 부끄러워도 금세 얼굴이 빨개지는 부끄럼에 천재였다. 부끄럼으로 겨루면 윤동주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변방교육대에 다니는 장래가 매우 보잘것없는 학생이었고, 촌놈에다 학비도 없어서 언제 그만둘지도 모르는 처지였기에 거의 늘 우울한 나날이었다. 밝음은 나의 선망이었다. 아무에게나 스스럼없이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걸고 노크를 하는 그녀의 행동은 천사나 다름이 없었다.

 

새마을이나 무궁화 열차가 없던 시절이라 삼등열차는 역마다 섰다. 열차가 살 때마다 승객이 내리고 타기에 우리는 어느새 나란히 앉아 가게 되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그녀가 물었다. 이 물음은 열차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질문이다. 행선지가 같으면 더욱 친밀하게 된다. 나도 그녀도 행선지가 A시였기에 우리는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삶은 계란이오. 오징어 땅콩 있습니다.”

홍익회라는 글자가 쓰인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손수레를 끌고 지나면서 외치는 소리다. 내가 아는 홍익은 단군할아버지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뜻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으로 고조선을 세우셨다는 것인데 이 아저씨들도 먼 기차 여행에 지친 승객들에게 오징어와 땅콩 그리고 삶은 계란으로 널리 승객들을 이롭게 하셨다. 가차 여행에서 먹는 삶은 계란 맛은 최고다. 다른 데서 먹으면 그 맛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김밥이 소풍에서 그 진가를 드러내는 것과 같다 하겠다. 아무튼 홍익회 아저씨의 수레를 밀면서 외치는 소리는 계란 맛만큼이나 반갑다. 그 소리에는 가락이 있어 나이든 사람의 추억 속에 아직도 유정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삶은 달걀과 음료수를 나누어 먹으며 다정한 친구처럼 밤기차의 정취를 즐기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중간에 탄 사람은 우리가 몇 년 사귄 연인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만큼 붙임성이 있는 아가씨였다.

 

그녀는 A시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C읍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버스 타는 곳까지 바래주고 버스가 떠날 때 손까지 흔들어주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매우 실망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여자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한 상태였다. 물론 모든 수컷이 그러하듯 나도 여자를 좋아했다.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내 또래의 남자애들이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기보다 숭배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남자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여자애들은 단발머리를 했지만 남자애들은 스님처럼 머리를 깎았다. 일제의 잔재였지만 그때는 그걸 몰랐다. 스님도 아닌데 스님 머리를 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남자들은 피부가 거칠지만 여자애들은 피부가 고왔다. 운동회 때 여자애들은 양 다리에 고무줄이 있는 빤스를 입었지만 남자애들은 거시기가 드러날 정도로 고무줄이 없는 빤스를 입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남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여자를 부러워하며 지낸 어린 시절이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여선생님을 처음 보았는데 나는 그녀들이 천사인 줄 알았다. 화장실도 안 가는 정결한 존재로 여겼다. 그리고 내 몰골과 비교하며 늘 부끄러웠다. 그랬다. 청년이 되어서도 모르는 여자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녀를 보내고 며칠이 지났다. 학교로 편지 한 통이 왔다. 그녀의 편지였다. 전화는 부잣집에나 있는 거였기에 귀했고 대부분의 통신 수단은 편지였다. 다시 서울로 가야 하는데 A역에서 기차를 타야 하니까 기차역에서 만나자는 거였다. 수업을 빼먹고 역에 갔다. 그녀가 환한 얼굴로 맞이했다. 기차 출발 시간까지는 시간이 넉넉했다. 우리는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며 그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녀에게는 부끄럼 많은 나에게도 말을 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녀는 서울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C읍에는 외가가 있어 가끔 들린다는 것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어 외가에서 자랐기에 외삼촌 내외가 부모나 다름이 없다고 했다. 외가에 올 때 만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그러자고 했다. 정말 그녀는 서울에서 올 때 그리고 서울로 돌아갈 때마다 연락을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만났다. 나는 주로 그녀의 말을 듣는 편이었고 나는 묻는 말에만 겨우 대답하는 그런 만남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친구 이상도 이하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오래 함께했던 친구가 나누는 대화와 다름이 없었다. 그녀로 하여 나도 꽤 많은 말을 한 것 같다. 제법 거짓말로 꾸며낸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재미있다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나는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려고 더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를 찾곤 했다.

 

그녀는 겉과 다르게 외로운 여자였다. 외가에서 자라 외삼촌 내외를 부모와 같이 여긴다는 것은 외면상 그렇다는 거였다. 외사촌들과 함께 자랐는데 외삼촌 내외는 늘 친부모라 여기라고 했지만 형제들 사이에 은연중에 느끼는 소외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내면에는 늘 고아라는 괴물이 살고 있었다. 그걸 감추기 위해 그녀의 얼굴에는 늘 미소가 포장되어 있었으며 행동은 명랑소녀의 그것이었다. 그녀와 만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그녀의 외로움 바이러스가 나에게도 감염되는 것을 느꼈다.

“이건 비밀이에요..”

“이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자기의 내면을 이야기하고 난 다음 그녀가 내게 한 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나의 고민 이외에 그녀의 외로움까지 내 가슴 속에 더하는 꼴이 되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나란히 걷거나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은 달콤했다. 그녀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녀의 외로움을 감당할 만큼 나는 여유롭지 못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두려웠다.

 

그 당시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는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다. 정치적으로는 군사정권의 억압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대학생들은 이런 청년문화로 정치적 상황에 저항하며 나름대로 낭만적인 대학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 시절은 절망의 나날이었다. 교지 편집을 하고 있었는데 편집 후기에 나의 사적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세 가지 이유로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문장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그 세 가지가 무엇인지 지금은 기억할 수 없다.

 

다른 젊은이들이 암울한 시대에 저항하며 번민하던 시절 나는 비겁하게도 나 개인적 상황이나 미래에 대한 암담함으로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런 것이 자신을 더욱 부끄럽게 했다. 사실 나는 문학이나 역사학이나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요즘 말하는 인문학이다. 그렇지만 장남으로 빨리 취직을 해서 우리 집에 보탬이 되어야 할 처지였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변방 교육대학에 들어왔고 교육대학의 수업에는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당장 객지에서 먹고 살기에도 힘겨워 학교를 마칠지도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런 사적인 일들이 나를 절망하게 했을 것이다. 너절한 청춘이었다.

 

3월이었다. 그녀에게서 편지가 왔다. 서울로 가는 길 역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녀는 제법 큰 가방을 들고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역에서 가까운 곳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다. 낙동강, 아름다운 강이다. 옛날에는 부산에서 배가 올라오던 강이다. 지금은 배가 다닐 정도는 아니지만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물줄기와 강바람이 옛 정취를 느끼게 하는 강이다. 강원도 태백에서 발원하여 모래가 흐르는 내성천을 지나 남해로 흐르는 우리민족의 어머니와 같은 강이다. 우리는 낙동강 강바람을 쐬며 긴 강둑을 걸었다. 3월이라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지만 우리는 추운 줄을 몰랐다. 우리는 그런 청춘이었다.

 

점심때가 되어 요기를 하기 위해 한자로 중화요리라고 쓰인 집에 들어갔다. 요리를 먹기 위해서 아니라 실은 짜장면을 먹기 위해서였다. 점원이 안내하는 방에 들어가자 그녀가 비로소 가방을 내려놓았다. 방이 따뜻했다. 우리는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아아, 따뜻하다.”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고 두 손을 비볐다. 그녀의 손가락이 이상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내 손 위에 올려놓고 보았다. 손가락 끝이 파랗게 얼어 있었다. 나는 한참동안 그녀의 손을 감싸고 나의 손의 체온으로 녹여주었다. 아아, 그녀는 나와 강변을 걷는 동안 손가락이 파랗게 어는 줄도 모르고 나에게 열중했구나. 나는 그녀의 무거운 가방을 들어줄 줄도 모르는 바보였구나. 그녀는 다시 서울행 기차를 탔다. 가냘픈 몸에 비해 큰 가방을 들고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4월이었다. 라일락 향기가 교정이 흩날리고 있었다. 내가 이름을 걸고 있는 학교에는 탄지라는 연못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 포탄이 떨어진 자리라고 해서 탄지라고 불렀다. 탄지 주변에는 라일락이 심어져 있고 몇 개의 벤치가 놓여 있었다. 탄지 뒤로는 음악실이 있었는데 여러 대의 풍금이 놓여 있어서 학점을 따기 위한 풍금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여러 대의 풍금소리가 한꺼번에 들릴 때는 마치 귀신의 통곡 소리와도 같았다. 나는 대부분의 낮 시간을 탄지 벤치에 앉아서 보냈다. 물론 강의는 거의 듣지 않았다. 친구들은 내가 문학청년이어서 무슨 깊은 사색에 잠겨 있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그건 오해일 따름이었다. 그때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절망의 끝은 죽음이니까 늘 죽음에 대한 생각만 했다. 도서관에서 죽음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도 하고 죽음의 방법에 대해서도 골똘히 연구했다. 탄지에 포탄이 떨어지기 전에 내가 거기 있었더라면 이런 연구를 하지 않아도 되리라는 되었으리라는 생각도 했다.

 

내가 찾아낸 가장 아름다운 죽음은 방안 가득 백합 화분을 들여 놓고 자는 것이었는데 나는 나의 방이 없을뿐더러 남에게 나의 주검을 수습하는 수고를 끼친다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을 매는 것이 가장 황홀하다는 정보도 있었지만 나뭇가지에 매달린 끔찍한 형상을 타인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방법을 구상해 보았다. 얇은 송판 몇 장, 못 몇 개, 망치 하나를 산다. 그리고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 관을 만들어 그 속에 눕는다. 옆에는 뚜껑과 못, 그리고 망치를 둔다. 뚜껑 위에는 이렇게 쓴다. 지나가는 이는 뚜껑을 닫고 못 몇 개 박아주세요. 세월이 흐르면 나는 그곳의 자연의 일부가 될 것이다.

 

그런 생각에 골몰해 있을 때 친구가 우편함에서 편지를 가지고 왔다. 그녀의 편지였다. 그녀, 그녀의 외로움이 내 몸으로 스며들었다. 견딜 수가 없었다. 편지 내용은 한 줄이었다. ‘우리 같이 살까요.’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겁이 났다. 죽음을 연구하는 가난한 청춘이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 뒤로 그녀의 편지는 몇 차례 더 왔지만 나는 두려워서 읽을 수가 없었다. 답이 없으므로 그녀의 편지도 끊어졌다.

 

나는 죽지 않고 아직 살아 있다. 살아오면서 그녀만큼 아름다운 여자도 그녀만큼 스며드는 여자도 만난 적이 없다. 삶의 어떤 고비에서 가끔 파란 손가락이 떠오른다. 더러는 가슴 한곳을 결리게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