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는 언제 피는가?

 

 

  지금은 교육대학이 선호하는 대학이지만 그 때는 겨우 대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명색이 대학이지 2년제 초등교원 양성기관이라 함이 더 합당했다. 그 때 초등교원은 대기업에 비해 대우도 신통치 못했기에 남학생들이 선호하는 대학이 아니었다. 여학생들에게는 나름 좋은 직장이라 여겼기에 가정형편이 괜찮은 학생도 있었지만 남학생은 대개 가난한 집 출신이었다. 4년제 대학에 가려면 등록금도 비싸고 졸업한 뒤에도 3년 군대생활을 마쳐야 취직을 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교육대학은 RNTC라는 제도가 있어서 제학중 학군단훈련만 이수하면 졸업과 동시에 제대증까지 받을 수 있어서 2년 뒤에는 초등학교 교사가 될 수 있었다. 4년제 대학에 비하면 5년 빨리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게다가 학비도 싸고 장학금까지 몇 푼 나왔으니 가난한 집 출신들이 많이 모였다. 그 때 젊은이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꿈만은 하늘에 가 있었다. 그런데 사내로 태어나서 가난하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교원이라는 정해진 미래를 위해 대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매우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미래가 정해졌다는 것은 청춘의 굴욕이라 여겼다.

 

  내가 입학한 변방 교육대학에 다니는 친구들 가운데는 두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었다. 열심히 학점을 따서 대도시에 발령을 받아 4년제 대학 야간부에 편입하여 공부를 이어나가려는 부류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생활에 깊은 회의를 하며 방황하는 부류가 있었다. 후자의 경우는 대개 명문고라 불리는 고등학교 출신이 많았다.

 

  게시판에 동아리 회원을 모집하는 광고가 붙었다. ‘코스모스 클럽’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코스모스는 언제 피는가에 대한 연구를 하는 동아리라 했다. 코스모스에 가입하려고 선배들이 하는 동아리 설명회에 갔다. 선배들은 이미 제 때에 졸업을 하지 못하고 가을 코스모스 필 때 졸업이 예정되었거나, 2년 안에 학점을 따지 못하여 추가졸업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려운 철학서적을 읽으며 인생에 대해 토론하고 매달 현대문학 크기의 동인지를 낼 예정이라 했다. 말짱 헛소리라는 것을 알만했다. 그래서 나도 토의 시간에 손을 들고 흰소리를 했다.

  “졸업 여행은 그랜드캐니언으로 갑시다.

  선배들의 눈빛이 내게 쏠렸다. 이거 물건이 하나 나타났군, 하는 표정들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선배들은 나를 데리고 허름한 술집으로 갔다. 그렇게 해서 그들과 하루가 멀다 하고 모여서 개똥철학을 논하며 술을 마셨다. 학교 공부는 뒷전이었으니 제 때 졸업을 하지 못하는 것은 예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출석하는 학과는 교육철학이나 아동심리학 등의 몇 과목에 그쳤고 교재는 아예 살 형편도 되지 못했다. 음악이나 무용, 미술 과목은 거의 결석이었다. 동요에 맞추어 팔랑거리며 춤을 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시간에 우리는 131호 강의실 옆 느티나무 아래 놓인 벤치를 132호 철학과 강의실이라 명명하고 모여서 되지도 않은 개똥철학을 논했다. 어느 날 132호 강의실에 까치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우리는 까치를 묻어주고 술잔을 올리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당시에 유행하던 ‘산 까치야, 산 까치야 어디로 날아갔니? 라는 노래를 합창했다.

 

 

  한 친구가 사랑을 하면서 왜 헤어져야 하나, 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자고 했다. 두꺼운 안경을 쓰고 학보사 편집국장 일을 하는 이 친구는 매우 근엄해 보였다. 술은 자기가 살 테니 가자는 것이다. 막걸리 한 말을 받아 놓고 다 같이 한잔 씩 마신 다음 그는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천천히 들며

  “사랑을 하면서 왜 헤어져야 하나?

  하며 두꺼운 안경 너머로 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실연을 당한 게 분명했다. 우리는 말없이 술을 마시며 그 친구의 실연의 아픔을 함께 나누었다. 마침 밖에는 비가 내렸다. 우리는 술을 다 마신 다음 비를 맞으며 강변을 걸었다. 우리는 떼창으로 노래를 불렀다. 가랑비야 내 얼굴을 더 세게 때려 다오, 안녕, 안녕 목 메인 그 한 마디. 이루어 질 수 없는 사아랑. 비는 더 세게 우리를 적셨다.

 

  술을 마실 돈이 없어서 나는 대학신문에 글을 썼다. 원고료가 나오면 교문을 나서서 조그만 개울에 다리를 건너 술을 마사러 갔다. 우리는 그 개울을 세느라 부르고 개울에 놓인 다리를 미라보 다리라 불렀다. 지난여름 유럽으로 여행을 다니다가 파리의 세느 강변에 갔다. 옛 생각에 혼자 슬그머니 웃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세느를 건너면 허름한 중국집이 있었는데 주고객이 가난한 학생들이라 짜장면도 많이 주고 막걸리도 주전자에 꾹꾹 눌러서 주었다. 친구는 그 집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를 가련이라 불렀다. 김삿갓의 연인 이름이 가련이니 스스로를 풍류객 김삿갓에 비유한 바이리라.

 

  이 친구가 라다오 음악신청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아나운서가 무슨 노래를 듣고 싶으냐고 물었다. 김세레나의 ‘선화공주’를 듣고 싶다고 했다. 누구와 함께 듣고 싶으냐고 물었다.

  “이미 고인이 된 선화공주와 함께 듣고 싶습니다.

  이리하여 아나운서를 경악하게 하기도 했다. 이렇게 고전 취향을 가졌으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교사가 어울릴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의 차림은 바지는 군복 바지에 검은 물을 들인 것이고 상의는 고등학교 교련복을 검게 물들인 것이었다. 신발은 쓰레기통에서 주은 내 발보다 큰 구두를 신었다. 친구들은 내 차림을 모기 발에 워커라 불렀다. 바지에는 막걸리 자국이 가실 날이 없었다. 늘 같은 옷만 입으니 검은 물이 빠져서 갈색으로 변해갔다. 머리칼은 장발이었다. 구본웅 앞에 서서 담배 연기를 기적처럼 날리며 발차! 하고 술집으로 향하던 이상을 본받아서였을 것이다. 어떤 교수는 눈에 거슬린다며 훈계를 하기도 했지만 차림에 마음 쓸 만한 여유가 없었다. 누가 전공이 무어냐 물으면 방황이라 했다.

 

  술값을 마련하기 위해 대학신문에 글을 쓰니 이름이 알려지게 마련이었고 게시판에는 늘 재시험자 명단에 늘 단골로 나붙으니 자연 학교의 명물이 되어갔다. 교수들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교육부 새마을 과장이라는 분이 학장으로 오셨다. 교육 관료가 학장으로 온다는 자체가 코스모스 클럽 멤버에게는 못마땅한 일이었다. 이분은 새마을형의 단정한 것을 좋아하셨다.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스레이트 지붕으로 가는 것이 새마을 운동이었으니 단정하지 못한 학생이 당연히 눈에 거슬렸으리라. 교정에서 이분을 보면 나는 다른 길로 돌아서 목적지에 가곤 했다. 어느 날 학보사에 들렸다가 학장실 앞을 지나게 되었다. 막 문을 열고 나오는 학장과 맞닥뜨렸다. 딱 걸렸다. 학장실에 들어가 새마을형의 훈계를 들어야 했다. 그는 수첩을 꺼내서 언제 어디에서 자기를 피해 갔는지를 수첩에 빼곡히 적어 놓았다. 그리고 후배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며 나의 장발과 남루한 옷차림에 대해서 훈계를 하셨다. 과연 새마을 과장다웠다.

 

 

  강의실 건물 뒤쪽에는 한국전쟁 때 포탄이 떨어져 연못이 되었다는 탄지가 있었다. 연못 주위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나무 아래는 벤치가 몇 개 놓여 있었다. 탄지 가까운 곳에는 음악 강의실이 있었는데 오르간이 수십 대 놓인 음악실에서는 떼로 오르간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그 소리를 귀신의 통곡이라 불렀다. 귀신의 통곡 소리만 빼면 탄지는 멍 때리기를 하거나 개똥철학을 하기에 적합한 공간이었다. 일주일에 수채화를 두 장 그려내는 과제가 있었다. 탄지 주변에는 이젤을 세우고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이 많았다. 특히 그림 그리는 뒷모습이 보기 좋은 여학생이 있었다. 물론 나는 그림 과제를 하지 않았다. 어쩌다 친구에게 부탁해서 같은 그림 몇 장을 따라 그려 달라고 해서 제출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귀찮아서 그만 두었다.

 

  나는 탄지 벤치에 앉아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예뻤고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가 보기에 좋았다. 유행하던 노래 ’라일락꽃 향기 흩날리던 날 교정에서 우리는 만났죠’를 속으로 흥얼거릴 뿐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했다. 그녀는 선배였고 바지에 막걸리 자국이 있는 유급이 예정된 문제 학생이 감히 말을 붙일 처지는 아니었다. 도서관에 처박혀 이해도 되지 않는 니이체, 쇼펜하워를 읽거나 벤치에 앉아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죽이기에 충분했다.

 

  학군단 소속이므로 여름방학에는 병영에 들어가 훈련을 받았다. 강의 듣기보다 더 싫은 일이었지만 분단된 나라에 태어난 죄이기에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식사시간이었다. 남루한 군복을 입고 숟가락을 들고 식당 앞에 줄을 서 차례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 여기고 먹지 않았지만 뺑이를 치고 나니 그것도 음식이라고 식사시간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다. 메뉴는 거의 매일 무시래기와 껍질 벗기지 않은 감자와 꽁치 대가리가 든 국에 바구미가 섞인 보리밥이었다. 우리는 밖에 나가면 죽어도 무시래기는 먹지 않으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그걸 먹기 위해 줄을 서서 숟가락을 빨고 있었다. 그 때 변방교육대학 여학생들이 위문을 왔다. 여학생 쪽으로 눈을 돌리니 예의 탄지에서 그림 그리던 긴 생머리의 여학생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쥐구멍이 어디 없나 찾다가 앞의 친구의 등으로 눈을 돌리고 모른 척 했다. 그녀가 나를 봤는지 보지 못 봤는지는 잊어버리기로 했다.

 

  예정된 된 대로 나는 유급을 했다. 그리고 코스모스 피는 가을이 와도 졸업을 할 수가 없었다. 음악과 교수가 내어준 과제를 풍금으로 쳐야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제에도 없는 ‘스와니 강’ 한 곡 뿐이었다. 다시 한 학기가 지나고 나는 음악 교수를 찾아갔다. 이미 학점은 마감되고 방학이 되어 교수는 집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조교가 그의 집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전화를 거니 서울 자기 집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차를 타고 서울 그의 집으로 갔다. 태어나서 그렇게 좋은 집에는 처음 들어가 봤다. 그의 집에는 사모님과 예쁜 아이들이 있었다. 교수님은 거실에 있는 피아노를 가리키며 쳐 보라고 했다. 나는 내가 칠 수 있는 유일한 곡인 ‘스와니 강’을 쫄아서 쳤다. 그의 가족들이 지켜보고 있어서다. 그리하여 최하점인 60점이라고 적힌 학점이 든 봉투를 받았다. 내 몰골이 불상했는지 사모님이 달걀 프라이를 몇 개 해서 접시에 담아 주었다. 이 공간을 얼른 빠져나가려고 급히 먹다가 입 안이 홀랑 익었다. 앗 뜨거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삼청교육대와 이름이 유사한 변방교육대를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코스모스 피면 졸업을 하는데 나는 코스모스가 피어도 졸업하지 못하고 흰 눈이 내려서야 겨우 졸업이라는 걸 할 수 있었다.  

 

 

  변방교육대학에 적을 두고 있던 어느 날 교문에 탱크가 있고 군인들이 교문에 총을 들고 서 있었다. 박정희가 계엄을 선포하고 유신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나는 박정희가 싫었지만 방황에 열중하느라 데모할 생각도 못했다. 아무리 하찮은 변방교육대학이지만 대학에 군인을 들여보내다니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어두운 나의 내면으로 향하했던 시선이 사회를 향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탱크가 나의 방황을 멈추게 했을 것이다.

 

  졸업 후에도 교육대학을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하는 교사 발령이 나지 않았다. 꼴찌로 졸업했기 때문일 것이다. 골방에 틀어박혀 결코 밥이 될 수 없는 시를 썼다. 내 생에서 가장 많은 시를 쓴 1년이었다. 이듬해 1월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변방교육대학 시절의 절망과 방황의 흔적이 시행에 아프게 남은 까닭일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러 별로 이룬 것도 없이 중년이 된 어느 날이었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오래 잊었던 사람의 이름이 올랐다. 탄지에서 그림을 그리던 생머리가 길던 여학생의 이름이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유명 시인이 나성에 문학 강연을 왔는데 간담회에서 변방에서 왔다고 하니까 서각 시인을 아느냐고 물어서 서각이 아직 살아 있음을 알았다고 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그녀가 한국에 오면 연락하기로 했다.

 

  어느 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리고 만났다. 우리는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게 그녀와 나의 처음 대화였다. 그년도 긴 머리 소녀가 아니었고 나도 코스모스클럽의 멤버가 아니었다. 그녀와 나는 어쩔 수 없는 아줌마와 아저씨였다. 세월이 우리를 망쳐놓았다. 별 할 말이 없어서 탄지에서의 일을 이야기 했다. 그 때 당신은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소리쳤다.

  “진작 말하지!

  그녀도 내가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긴 모습이 좋았다고, 대학신문에 발표되는 글도 읽었노라고 했다. 내가 소리쳤다.

  “진작 말하지!

  그리고 남의 일처럼 낄낄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