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회

 

유월항쟁은 체육관에서 몇몇이 대통령을 뽑던 독재체제를 무너뜨리고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내는 형식상 민주주의를 쟁취한 성과를 거두었다. 대학생들은 방학이면 전국 각 지역에 농촌 일손 돕기에 나가 이른바 농활을 전개했다. 대학생들은 농활을 통해 농촌의 일손도 도우며 농민회 조직을 돕는 활동도 아울러 전개했다. 농민들이 정권의 홀대를 받으면서도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각 지역의 농민들은 농민회를 설립하여 농민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아니 한반도에 우리민족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농민들이 제대로 사람대접 받으며 산 적이 거의 없었다. 쌀밥을 이 지역 어른들은 아직도 이밥이라 하는 분들이 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고 이 씨의 나라가 되자 비로소 쌀밥을 먹게 된 농민들이 쌀밥을 이밥이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걸 보면 한반도 농민들의 처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오직 소와 농부들이 힘들여 지은 농사의 결실인 쌀밥을 오히려 농민들은 먹을 수 없었다. 단군 이래로 처음으로 보릿고개를 넘게 해 주었다던 새마을 운동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농촌에서 살 수 없었던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도시 빈민이 되지 않았던가?

 

  이 땅의 농민들의 처지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그간 농민들은 정부가 시키는 대로만 했다. 벼를 심으라면 벼를 심고 고추를 심으라면 고추를 심고 돼지를 키우라면 돼지를 키웠다. 시키는 대로 해도 농민들의 삶은 나아지질 않고 농촌에는 늙은이와 개 몇 마라만 남게 되었다. 그래도 농촌을 지키겠다는 사람들이 남아서 농사를 지으며 농민회를 만들었다. 농업협동조합이라는 것이 있지만 농민을 상대로 농자재나 비료 판매 그리고 농자금 대출 등 금융사업만 해서 농협직원들의 이익만 챙기기에 농민들의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경두도 농민회 회원이 되었다. 농촌을 살리겠다는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답답해서였다. 고추를 심으면 고추 값이 폭락하고 배추를 심으면 배추 값이 폭락했다. 아무리 농사를 잘 지어도 농작물 값이 떨어지면 밑지는 게 농사였다. 일본 농협에서는 텃밭에 채소 한 잎이라도 따서 농협이 설치한 장소에 넣어 두기만 하면 통장에 돈이 들어오게 한다는데 우리 농민은 도와주는 곳이 없으니 농민회라도 가입해 보자는 마음에서였다.

 

  농민회에 나가서 회원들과 농사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쌀을 주식으로 해서 살아왔다. 우리의 주식인 쌀농사는 지을수록 손해가 났다. 가을에 추수를 해도 농약 값, 인건비, 농자재 값을 제하면 남는 게 없다. 해마다 추곡수매가를 정부에서 정하는데 그 추곡수매가라는 것이 농민들의 기대에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외국의 기업농들은 싼 값에 쌀을 대량생산하니 쌀을 수입하게 되니 쌀값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생산하는 곡물은 우리의 식량자급에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쌀을 수입하고 있다. 우리의 식량주권이 지켜지지 않음에도 정부는 농민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았다. 참으로 억울한 것이 농민이다.

 

  정부가 장려한 품목을 재배하면 그에 상응하는 소득이 있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다. 농사도 투기가 되어 어떤 작물을 심어 그해에 값이 좋으면 대박이 날 수도 있다. 그런 일은 몇 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다. 흉년이 들면 수확이 없어서 소득이 없고 풍년이 들면 값이 낮아서  소득이 없는 것이 농사다. 이래저래 골병드는 것이 농민이다.

 

 

  농민들의 시위는 과격하다. 농사가 목숨 줄이기 때문이다. 고추 값이 떨어지면 집집마다 수확한 고추를 싣고 나와 한 곳에 모으고 불을 지르기도 하고 누렇게 벼가 익은 논을 트랙터로 갈아엎기도 하고 전국의 벼 가마니를 서울로 싣고 가서 여의도 광장에 쌓아 놓고 시위를 하기도 한다.

 

  경두는 이것저것 다 해보았지만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궁리 끝에 소를 기르기로 했다. 송아지를 사서 기르면 사료 값 제하고도 목돈을 쥘 수 있다는 말을 들어서다. 여기저기서 돈을 융통하여 송아지 10마리를 샀다. 몇 개월 길러서 팔면 사료 값 제하고 몇 천 만원은 손에 쥘 거라는 계산에서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우사도 손수 짓고 사료는 적게 먹이고 농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볏짚 등의 조사료를 먹여서 정성껏 길러 볼 작정이었다. 송아지는 그런 대로 잘 자라 주었다. 그것도 며칠 가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송아지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돈도 돈이지만 자식처럼 애지중지 기르던 송아지가 죽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죽은 송아지는 팔지도 먹지도 못한다. 신고하고 땅에 묻어야 한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며칠 뒤 또 한 마리가 죽었다. 10마리 가운데 6마리가 죽은 뒤에야 송아지가 죽은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소에게 여물을 주는 여물통에 있었다. 시내 철공소에서 드럼통을 잘라서 만든 여물통을 주문했는데 그 여물통에 남아 있는 독극물이 원인이었다. 철제드럼통에는 국내 최대의 농약회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철공소에 이야기하니 철공소에서는 그 드럼통을 합법적으로 돈 주고 사서 만든 것이니 자기네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그 드럼통을 판 농약회사에 가서 물어보라 했다. 농약회사에 찾아가니 자기네는 고물로 판 것이지 여물통으로 판 것이 아니니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서울까지 찾아간 차비만 날린 꼴이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잘못으로 송아지가 6마리나 죽었는데 책임지는 곳이 없었다. 앞이 캄캄했다. 하소연 할 곳은 농민회밖에 없었다. 농민회 회원들에게 알리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회의기 소집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홀대 받는 농민이란 생각에 속이 끓던 회원들은 내 일처럼 걱정해 주었다. 드럼통으로 만든 여물통을 판 철공소를 상대해 보았자 영세한 가게에서 배상할 능력도 없을 것이다. 농약이 묻은 드럼통을 유통시킨 농약회사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기로 했다. 농민회 대표단이 인권변호사로 이름이 알려진 변호사를 찾아가서 상의했다.

 

  변호사는 대뜸 이런 경우에는 농약회사에 가서 내구부는 것이 상책이라 했다. ‘내구불다’는 이 지역 방언으로 누워서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변호사가 뭐 이런 사람이 있나 하고 회원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멀뚱하게 앉아 있으니 변호사가 그 연유를 설명했다. 노동자나 농민이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하면 소송에 이길 수는 있지만 대기업이 소송한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회유하고 설득하기 때문에 재판에는 이길 수 있지만 긴 재판 과정에서 모두 회유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실제로 변호사의 경험에 의하면 대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재판을 해서 이긴 적이 있는데 재판과정에서 대기업이 소송당사자 개개인을 찾아가서 회유하고 협박해서 대부분의 원고들이 소액으로 합의를 보았다는 것이다. 4년 뒤에 재판에서 승소했지만 모두 소를 취하한 뒤라 말짱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농민들이 소송을 해서 대기업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변호사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농민회에서는 변호사의 말대로 내구불기로 했다. 농민회 회원들은 농약회사에 찾아 가서 사장 면담을 요청했다. 농사 일로 거칠어진 피부에 남루한 옷차림을 한 농민들이 회사에 들이닥쳤다. 으리으리한 회의실에 안내된 농민들이 회사 간부들과 마주 앉았다. 농민들은 이 회사의 농약 드럼통으로 만든 소죽통 때문에 송아지가 6마라나 죽었으니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폐드럼통을 적법하게 팔았다는 거래 계약서와 영수증을 내놓고 자기들은 책임이 없으니 빨리 내려가라고 했다. 농민들은 처음엔 그들의 기세에 눌려 기가 죽었으나 변호사의 내구부라는 지침을 실행하기로 했다.

  “배상을 못하겠다. 그 말씀이지요. 알았습니다.

  농민회장의 말이 끝나자 농민들은 회사를 나왔다. 그리고 왕복 10차선 도로에 텐트를 치고 솥을 걸기 시작했다. 트럭에 싣고 간 나무에 불을 붙여 솥에 국을 끓이고 밥을 지어 먹으며 농성에 들어갔다. 경찰이 와서 무슨 연유냐고 물었다. 농민들은 저간의 일을 말하고 배상을 받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다. 굶어죽으나 감옥 가서 죽으나 마찬가지니 마음대로 하라고 뻗대었었다.

 

  경찰의 중재로 다시 협상이 시작되었다. 농민회원들이 모두가 같지는 않았다. 고시공부를 하다가 낙방하여 농민회 일을 돕는 춘배도 있었다. 협상은 주로 춘배가 농민회를 대표해서 맡았다. 춘배는 농약회사가 봉두에게 드럼통을 직접 판 것은 아니지만 독극물이 있는 폐기해야 할 드럼통을 잘못 관리한 책임이 농약회사에 있으니 마땅히 회사가 배상해야 한다고 했다. 회사는 위로금조로 100만원 줄 테니 내려가라고 했다. 춘배가 소리쳐 말했다.

  “이 양반들이 촌놈들이라고 너무 헐하게 보는군. 나갑시다.

  그들은 협상장을 박차고 나와 다시 텐트로 내려왔다. 경찰이 와서 다시 협상을 중재했다. 춘배가 눈치를 보니 경찰은 회사 편에서 일하는 낌새였다. 농성하는 농민회 회원들을 위협하기도 하기도 하고 회사의 손해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회사로부터 무언가를 챙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농민회와 회사의 협상은 경찰의 중재로 이어졌다 쉬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협상이 다시 시작될 때마다 회사에서 제시하는 금액이 올라갔다. 처음 400만원으로 올랐다가 30분 휴식 후에 다시 1600만원으로 올랐다. 다시 30분 쉬는 시간이었다.

  화장실에서 경찰서 정보과장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춘배는 소변을 보면서 옆에 서서 소변을 보는 정보과장이 들으라고 중얼거렸다.

  “도저히 안 되겠네. 농성 치우고 신문사로 가야겠네.

  “신문사 가서 어쩌려고요?

  정보과장이 물었다.

  “신문사에 제보하면 기사 막으려면 2000만원은 더 줘야 할 걸.

  춘배는 언론과 대기업이 부당한 거래를 하며 상생한다는 걸 알기에 간접적으로 협박을 한 것이다. 효과는 의외로 금방 나타났다. 정보과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2000만원이면 되겠습니까?

  “회원들과 상의해서 답하겠습니다.

  농민회 회원들에게 물으니 좋다는 반응이었다. 다시 협상이 재개되고 회사는 2000만원을 제시했다. 5분도 안 되어서 협상은 타결되었다. 변호사가 말한 내구불기가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봉두는 100만 원짜리 송아지 6마리를 잃었지만 오히려 배도 넘는 배상금을 챙길 수 있었다. 트럭을 몰고 돌아온 농민회 회원들은 늘 업신여김만 당하다가 오랜만에 짜릿한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날 봉두가 낸 술값으로 농민회 회원들은 모든 금심을 털어놓고 잔치를 벌였다. 처음 서울로 출발할 때 형사들은 가봐야 이길 수 없으니 올라가지 않는 게 좋을 거라며 상경하지 말기를 종용했다. 농민회가 이기고 돌아오자 정보과 형사들도 놀랐다. 봉두는 건배사를 하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하찮은 농사꾼이지만 힘을 모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