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선생전

 

 

  최낭만 선생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2학년 올라가자마자 첫 국어시간에 낭만 선생이 들어오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제대하자마자 첫 부임 학교가 우리학교였다. 수업은 잠깐이고 군대 이야기 대학 이야기가 반을 넘었다. 우리학교는 종합고등학교라서 농과, 상과, 화공과, 기계과 등의 실업계 반이 있고 우리 반은 유일한 진학 반이었다. 보통 인문과 또는 보통과라 불렀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 그룹이었기에 낭만 선생의 수업이 그리 달갑지 않은 친구도 더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낭만 선생의 수업이 좋았다.

 

  대개 선생님들은 시험을 출제할 때 시중의 참고서 문제를 그냥 베껴서 내거나 약간 변형하는 수준이었지만 낭만 선생은 모든 문제가 스스로 만든 문제였다. 언젠가 그가 출제한 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 연유로 그를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명문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는데 자기는 문리대 국문과를 다녔는데 제학 시절에 사범대 국어교육과 친구들을 한참 아래로 보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인문학이 진짜 학문이지 사범대는 대학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문학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던 나에게 그의 그런 자부심이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는 휴일이면 아이들과 함께 야외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 학생들을 친구처럼 대했다. 아직 일제 잔재가 남아 교사가 학생에게 체벌하는 것이 보편화 되었던 시절 학생을 인격체로 대하는 교사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교사와 학생은 철저한 상하관계이던 시절이었다. 그 때 그의 출현은 신선하기까지 했다. 단오 날 낭만 선생은 아이들과 함께 시골 마을로 가서 그네를 뛰기도 했다. 그런 낭만 선생이 한 학기를 마친 후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되었는데도 나타나질 않았다. 그의 수업에 다른 선생님이 들어왔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멀리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갔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서도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내가 변방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을 때였다. 지역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주관하는 어린이 백일장 행사에 문예반 아이들을 인솔하여 참가했다. 아이들이 글을 쓰는 동안 지도교사들은 일정한 장소에서 대기해야 했다. 교사가 아이들의 글쓰기에 첨삭을 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주최 학교의 선생님들은 대기하는 교사들에게 음료수 등을 대접했다.

 

  술을 좋아하는 나는 캔 맥주 생각이 나서 수발드는 교사를 불러 캔 맥주를 주문했다. 캔 맥주를 들고 나타난 선생님의 얼굴이 아무리해도 어디에서 본 듯했다. ‘길’이라는 이태리 영화에 잠파노 역으로 출연한 안소니 퀸을 닮았다. 어렴풋이 수업시간에 낭만선생이 자기를 안소니 퀸 닮았다고 자랑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맥주를 들고 온 그에게 물었다.

  “혹시, 낭만 선생님이 아니세요?

  “그런데 뉘신지요?

  나는 고등학교 때 그의 수업을 들은 학생임을 고백하고 그간의 안부를 여쭈었다. 그는 매우 반가워하며 저간의 일을 이야기했다. 원래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해 이 학교 저 학교를 전전하다가 초임 지역이었던 이곳이 그리워 다시 돌아왔노라 했다. 그는 나와 내 동료 교사를 자기 댁으로 초대했다. 행사를 마치고 아이들을 돌려보낸 뒤 그의 집으로 갔다. 술을 좋아하는 그의 성정을 아는 터라 우리는 가게에 들려 백주 몇 병과 안주를 사서 그가 말해 준 그의 집을 찾아갔다.

 

 

  그의 집은 빈민가 골목 안 단칸방이었다. 아무리 박봉이라지만 교사가 사는 집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남루했다. 온통 벽에 아이들의 낙서가 가득한 방에 사모님과 아이들이 아랫목에서 추위를 녹이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아이들의 수효였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추세를 배반하고 그 집 아이들 수는 흥부네 아이들 버금가는 듯했다. 대여섯은 넘어 보였다. 낭만 선생은 방에 들어서자 호기롭게 외쳤다.

  “오늘 친구들이 왔네. 술상 좀 보게.

  사모님은 아이들을 윗목으로 몰고 아랫목에 술상을 차렸다. 선생이 잔에 맥주를 따르며 호기롭게 외쳤다.

  “반갑네. , 한 잔 하세. 건배!

  우리는 사모님과 아이들 보기에 민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선생님이 권하는 데 아니 마실 수가 없어서 몇 잔의 낮술을 마셨다. 선생은 몇 잔 마시자 금세 취흥이 도도해 지셨다.

  “자, 우리 노래하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먼저 젓가락으로 상을 두드리며 노래하기 시작했다.

  “사으나으아이 우는 마음을 그 누우가 아아알랴~ 바아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수운정”

  우리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멋쩍게 젓가락을 두드려 선생의 흥을 도왔다.

 

  이렇게 낭만 선생과의 만남이 있은 후 우리는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이후에 나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이 되었기에 학교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지역에서 국어선생이라는 동업자였다. 또 술을 좋아한다는 공통점까지 있으니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를 사제가 아닌 친구로 여겼다. 어떨 때는 수업 중에 막혔던 문제를 내게 묻기도 하며 사제의 벽을 아주 무너뜨려 버렸다.

 

  우리가 자주 가는 술집은 주로 주모 혼자서 맥주나 소주를 파는 조그만 술집이었다. 단골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었다. 몇 차를 거쳐야 하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때는 봉급이 통장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봉투에 현금을 넣어서 주었다. 봉급날이면 그는 전화를 걸어 만나자 했다. 외상값을 갚아야 하니까 같이 다니자는 것이다. 외상을 갚고 다시 한 상 차려 먹고 다른 집으로 가서 갚고 또 한 상 먹고 그러다보면 자정을 넘기게 되고 술도 인사불성이 되기 마련이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아침이슬을 합창하며 술집 골목을 행진하기도 했다.

 

  낭만 선생의 봉급봉투는 대개 봉급 받는 날 텅 비게 마련이었다. 이 고장에는 낭만 선생의 전설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봉급 이튿날 낭만 선생은 출근하면 사모님에게 차비와 담배 값 만원을 달라고 했다. 사모님이 말했다.

  “돈 없니더.

  “어제 월급봉투 줬잖아?

  “예, 받기는 받았는데 5천 원 밖에 없던데요.

 

  “그래?

  낭만 선생은 묵묵히 쓸쓸히 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보통과는 여러 실업계 학급 가운데 한 반만 있었기 때문에 60명이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반이 갈리지 않고 같은 반에서 지냈다. 그러므로 유대감이 남달랐다. 친구들이 고등학교 졸업 25주년 행사를 하자고 했다. 60명 대부분이 중견 사회인이 되었기에 돈을 모으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행사에 그 때 선생님들도 모시자고 했다. 수소문해서 세 분 선생님과 연락이 닿았다. 나는 낭만선생을 추천하였다. 모신 선생님께는 금으로 만든 행운의 열쇠도 선물하기로 했다.

 

  기념행사를 하는 날이었다. 나는 낭만 선생을 모시고 행사가 있는 리조트에 갔다. 황금 열쇠를 증정하는 간단한 행사가 있고 나서 한우 숯불구이를 배불리 먹는 식사를 했다. 그 다음은 뻔한 노래방 기기가 있는 공간에서 유흥이 있었다. 낭만 선생은 신명이 아서 친구들과 어울려 춤을 추었다. 한참 취흥이 오르니 누가 선생인지 누가 졸업생인지 알 수도 없게 되었다. 한창 신명이 오른 한 친구가 낭만 선생의 뒤통수를 갈기며 소리쳤다.

  “이느마야, 니는 왜 이리 늙었노?

  얼떨결에 뒤통수 가격을 당한 낭만 선생은 그만 술이 깨는 것 같았다. 낭만 선생이 나를 불렀다.

  “서각아, 이느마가 날 때렸데이.

  마치 학생이 선생에게 고자질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친구 귀에 대고 말했다.

  “이느마야, 이분은 친구가 아니라 선생님이다. 2학년 한 학기 동안 국어 가르치셨다. 얼릉 사과해라.

  “아이고 선생님, 죽을죄를 지었슴다.

  “개안타, 우리 춤추자.

  낭만 선생은 이처럼 경계가 없는 분이었다.

 

  어느 날 낭만 선생이 근무하는 학교의 교감 선생님을 만났다. 내가 초등에서 중등학교로 옮길 때 그의 학교에 초빙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분이라 나와는 안면이 있는 분이었다.

  “서각 선생, 자네 낭만선생하고 친하지? 나는 낭만 선생 때문에 못살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교감 선생님은 학교의 수업을 관리해야 하는 책무가 있는데 수업 중에 복도를 다니며 수업이 잘 이루어지는지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도를 순회하고 있는데 어느 교실이 하도 조용해서 창문 너머로 들여다보았다는 것이다. 칠판에 큰 글씨로 無主空山이라 써 놓고 교사는 보이질 않더라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칠판 아래 교단에 낭만 선생이 큰 대자로 누워서 주무시더라는 거였다. 나와 낭만 선생과의 관계를 알고 하시는 하소연이었다. 나는 낭만 선생의 인품의 훌륭함과 수업이 꼭 교사가 많이 가르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전교조가 막 결성될 무렵 전국의 교사들이 여의도 광장에 모였다. 우리도 버스를 전세 내어 여의도로 갔다. 각 도의 교사들이 깃발을 들고 여의도 광장을 매웠다. ‘임을 위한 행진곡’, ‘참교육의 함성으로’를 떼창으로 부르며 분위기는 곧 참교육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각 도의 대표가 앞에 나가 구호를 외쳤다. 아직도 독재의 서슬이 퍼럴 때였다. 우리 도에서는 비교적 연장자라는 이유로 낭만 선생이 대표로 나갔다. 마이크를 잡은 낭만 선생은 평소와는 다른 결연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전도깐, 이순자 구속하여 정의사회 구현하자!

  나는 오금이 저려왔다. 그런데 낭만 선생은 아무렇지 않게 구호를 외치는 것이었다. 전도깐은 물러났지만 그의 친구가 대통령이던 시절이었다. 전도깐 정권은 관공서마다 ‘정의사회 구현’이란 글자를 크게 써서 걸어놓고 속으로는 간첩을 조작하고 온갖 고문을 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낭만 선생의 구호는 의외였다. 위태로움은 있었지만 사이다 맛이었다.

 

  낭만 선생은 원래 지역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오신 분이다. 낭만 선생의 이력서에는 학교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한 학교에 오래 있지를 못한다. 사표를 냈다가도 다시 이력서를 넣으면 금방 채용이 되었다. 명문학교를 나온 덕이 크다고 낭만선생은 말씀하신다. 그렇게 술과 낭만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물려받은 시골의 논밭도 그 면적이 줄어들어 지금은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 봉급은 대부분 술값으로 나가니 아이들 교육비와 생활비가 없을 지경이었다. 늘 순종적이기만 하던 사모님도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돈을 벌기로 했다.

 

  보험회사에도 나가고 남의 돈을 빌려 부동산 투기도 해 보았지만 세상물정 모르던 사모님이 잘 될 턱이 없었다. 사모님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되었다. 급기야 낭만 선생이 사표를 내고 퇴직금으로 빚잔치를 한 다음 이 도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떠나실 때 야반도주와 다름없이 가셔서 나는 작별의 술 한 잔 나누지 못한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바람결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서울 어느 거리에서 난전에 물건 펴놓고 계시더라는 둥, 초라한 생색으로 지나는 걸 보았다는 둥 좋지 않은 소식들이었다. 시대가 바뀌어 교사 자리 구하기도 옛날 같지 않았을 것이다. 더 많은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낭만 선생을 만났다는 사람의 전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많던 선생의 아이들이 장성해서 모두들 서울의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사 자 들린 직업을 얻어 선생을 잘 봉양한다는 것이다. 선생의 어진 성품을 하늘이 굽어보신 것이리라. 선생이시어 만수무강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