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 수호기

 

  아이 때는 아버지나 삼촌이 내 머리를 깎아주셨다. 머리카락이 밤송이처럼 자라면 쇠죽 솥 앞에 앉히고 바리깡이라 불리는 기계를 머리에 대고 박박 머리카락을 밀었다. 기계가 신통치 않아 머리 올이 끼여서 따가워도 참아야 했다. 머리 스타일은 스님과 같았다. 간혹 부잣집 아이나 장터에 사는 아이는 뒷부분만 자르고 앞머리는 남기는 밑도리라는 걸 하기도 했다. 요즘 말로는 스포츠형 머리다. 밑도리 한 아이들이 부럽기는 했지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집도 그렇게 없이 살지는 않았지만 온 동네 아이들이 모두 스님 머리인데 혼자만 멋을 내는 것도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머리카락이 자라면 아궁이 앞에 앉아 굴욕을 당한다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온 마을 아이들이 다 그러하니 그러려니 하며 유년을 보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두발단속이 더 엄격했다. 3mm만 자라도 교문에서 선도부 학생들이 단속을 했다. 우리나라의 모든 중등학교 학생들은 스님의 머리가 규정이었다. 머리는 스님의 머리요 겨울 교복은 검정색으로 신부의 복장과 흡사했다. 거기에 모표가 달린 동그란 열차에서 표 검사하는 차장 같은 모자를 써야 했다. 그때는 매스컴이 신문이나 라디오밖에 없었으므로 외국 사정을 알지 못했다. 세계의 모든 학생들이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당시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의 중·고등학생을 보고 한국에는 웬 신부님들이 이렇게 많으냐고 했다고 한다.

 

  머리를 박박 밀어버리는 것과 학생들이 교복을 입는 것이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을 때 매우 분노했다. 해방된 지 몇 십 년이 지났음에도 일제 때 왜놈들처럼 머리를 밀게 하고 신부와 같은 교복을 입히고 경찰이나 군인 같은 모자를 쓰게 했다. 한창 멋을 부릴 청소년들이 왜놈의 행색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얼굴이 긴 편애 속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잘 타고 부끄러우면 금방 얼굴이 발갛게 되었다. 머리를 박박 민 붉은 색을 띤 내 모습이 마치 고구마와 같았나 보다. 고등학교 때 나의 별명이 고구마인 연유다. 장발을 한 뒤에 고구마란 이름은 듣지 않게 되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때 친구들 몇은 아직도 고구마라는 별명을 잊지 않고 가끔 불러준다. 나는 고구마란 별명도 싫고 고구마 먹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농사를 잘 짓지 못하셨다. 젊은 시절 글만 읽으시다가 마흔이 넘어 가세가 기울고야 처음 괭이를 손에 잡으셨다. 농사를 잘 짓지 못하시니 넓은 밭에 고마 한 가지만 심으셨다. 그래서 집에는 고구마가 넘쳐났다. 겨울철 점심은 늘 고구마였다. 그때 고구마를 질리도록 먹어서 지금도 고구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빨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머리를 기르고 싶었다. 공부는 하지 않고 빨리 졸업하여 머리 기를 궁리만 하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변방교육대학에 입학을 하면서 비로소 스포츠형 머리를 할 수 있었다. 그 시절 교육대학은 남학생이라면 누구나 학군단에 들어가야 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니 반은 군인이요 반은 학생이었다. 온전히 장발을 할 수 없고 군인 머리를 하는 수박에 없었다. 가정형편상 다른 대학에 갈 수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장발을 멋스럽게 하고 일반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이 매우 부러웠다.  

 

 

  70년대, 젊음을 상징하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청바지, 통기타, 생맥주, 장발이 그것이었다. 군사정권 시절이었으니 국민을 통치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들의 통치에 순종하도록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장발은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었다. 나는 변방교대를 빨리 졸업하고 장발을 하고 싶었다. 변방교대 생활은 나의 가장 암울한 시기이기도 했다. 번민과 절망으로 방황하다가 학점을 따지 못해 낙제를 하고 말았다. 낙제를 하였으니 친구들 모두 졸업한 교정을 떠날 수 없었다. 다행한 것은 학군단에서 해방되었으니 머리를 기를 수는 있었다.

 

  나머지 몇 학점을 딴다는 명목으로 동기들 떠난 교정을 어슬렁거렸다. 군복 검게 물들인 바지, 고등학교 때 입던 교련복 물들인 상의, 내 발보다 큰 어디서 주운 낡은 구두, 그리고 장발이 그 시절 나의 모습이었다. 후배들 모두 스포츠머리인데 나 혼자 장발을 하고 교정에 다니니 본의 아니게 명물이 되었다.

 

  그 무렵 교육부에서 새마을 과장을 하던 분이 학장으로 부임해 왔다. 대학에 학장이라면 학자이어야 마땅한데 교육 관료가 학장으로 온다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 여겼다. 교육대학도 대학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이게 뭐란 말인가. 이런 연유로 교대에 다니는 학생들은 대학이란 생각보다 교원 양성소에 단다는 생각이 더 많았다. 낙제생도 학생이니 나는 가끔 학보사에 글을 써서 막걸리 값을 받곤 했다. 학보사에 들렸다가 나오는 길에 복도에서 그 학장을 만났다.

  “자네, 이리 좀 오게.

  나는 꼼짝 못하고 그에게 잡혀 학장실에 들어갔다. 그 학장은 생김새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통과 비슷했다.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나에게 심문을 시작했다.

  “자네 몇 월 며칠 몇 시쯤 나를 피해 탄지 쪽으로 간 적이 있지?

  “…… "

  그의 수첩에는 내가 그를 만날 때마다 다른 길로 피해 간 사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나는 교정에서 그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해 다닌 게 사실이다.

  “머리 좀 단정히 자르게.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어야지 않겠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이 교정에 장발이 있다는 사실에 심기가 매우 불편했던 모양이다.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난 머리를 자를 생각이 없었다. 나의 신상에 대해 아는 걸 보니 조사도 한 모양이이다. 명색이 대학의 학장이란 사람이 학생의 머리에 대해 이렇게 집착할 수가 있는가. 새마을 과장이라더니 과연 새마을 과장다웠다. 나는 그때에도 새마을이란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군사정권이 농촌을 잘 살게 한다고 한 것이 새마을 운동이란 것이었다. 아침마다 마을 스피커에서는 ‘새마을 노래’라는 것이 울려 퍼졌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마을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손으로 가꾸세‘ 대강 이런 가사의 2박자 노래였다. 지금도 사람들은 새마을 운동으로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새마을 운동이 성공했다면 우리의 농촌은 지금쯤 살기 좋은 곳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새마을 운동 이후 농촌에는 이농현상이 급격하게 일어나 농민들은 도시로 떠났다. 지금 우리나라 농촌에는 개와 노인들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 새마을 운동은 초가집을 없애고 슬레이트 지붕이나 시멘트 기와 지붕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시멘트나 얼마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지붕 개량을 시키는 것이 새마을 운동이었다. 마을길과 다리도 그렇게 했다. 마을 사람들의 노동력을 무상으로 요구하는 일제 때 부역과 다름이 없었다. 만약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면서기들이 와서 강제로 초가지붕을 걷어내곤 했다. 초가집은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제법 그럴듯한 서구적 마을의 풍경이 드러났다. 보기엔 그럴 듯 했지만 실은 그렇지 못했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던 집이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집으로 바뀌었다. 지붕 계량 사업은 우리의 초가지붕만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어 전통마을의 고즈넉함만 훼손하였다. 새마을 사업은 높은 사람이 멀리서 보기에 좋도록 마을의 풍경만 바꾸는 사업이었다.

 

 

  멀리서 보면 슬레이트 지붕에 색을 칠해서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은 농촌의 전통적 미덕도  살림도 황폐하게 되었다. 그게 내가 아는 새마을운동이다.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도시의 노동자보다도 수입이 못하니 농촌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새마을 운동의 결과가 이러했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새마을이란 말과 깃발은 곳곳에서 펄럭이고 있다.

 

  군사정권은 장발뿐만 아니라 여자의 미니스커트도 단속 대상이었다. 무릎 위 몇 센티 이상 올라가면 단속했다. 남자의 머리카락은 귀를 덮지 않아야 하고 뒷머리는 와이셔츠의 깃에 닿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을 마련하고 길 가는 사람을 잡고 자를 들이대는 풍경이 도처에 펼쳐졌다. 시민들의 반발이 심했다. 그러자 40대 이후의 예술가에게는 장발을 허용한다는 예외 규정을 발표하기도 했다. 나는 40세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이 정권이 왜 이렇게 국민의 머리칼까지를 관리하려고 할까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이 머리카락의 규제를 받는 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죄수와 군인과 스님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자유를 구속당한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죄수는 당연히 자유가 없다. 군인도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스님은 욕망을 극도로 자제하고 화두에 집중하여 깨달음을 얻으려는 사람들이다. 자유를 구속하는 상징적 행위가 머리카락을 통제하는 것이라면 머리카락은 자유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생각에 이르렀다. 삼손이 델릴라에게 진 것도 머리카락을 잘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법칙을 발견했다.

  머리카락의 길이는 그가 가진 자유에 정비례한다. 머리카락 때문에 쫓기면서 얻어낸 나의 결론이다. 나는 자유를 구속당하는 걸 견딜 수 없다. 우여곡절 끝에 한 많은 변방교육대학을 졸업했다. 교육대학을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5년 동안 학교에 복무해야 한다. 병역과 학비의 혜택을 받은 대가를 치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사 자리가 나지 않아 발령 대기를 해야 했다. 집은 어렵고 수입은 있어야겠기에 서울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주소지는 시골집으로 되어 있었다. 예비군 훈련 통지가 나왔다기에 내려와서 예비군 훈련장으로 갔다. 정문에서 군인들이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다. 거부하면 훈련 불참이 되니 머리를 내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결코 이 수모를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훈련을 마치고 스포츠형으로 머리를 겨우 정리했다. 그래도 깊게 파인 가위자국이 모두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양복을 입고 스포츠형 머리를 하니 스스로도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울 동료들의 말이 아직도 남아 있다.

  “간첩 같다.

  북에서 훈련 받다가 내려 와 남한 사람 행세를 하려고 어울리지 않은 양복을 입 것 같다는 뜻이리라. 1년을 기다려 산골 초등학교에 발령이 났다. 내가 처음 부임한 학교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가운데 있었다. 교통이 좋지 않아 대개의 교사들은 이사를 오거나 하숙을 했다. 관공서라고는 학교와 경찰지서와 우체국이 있었다. 밤이면 공직자들끼리 모여서 술판을 벌이기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 숙직 날은 순경이 와서 숙직실에서 술을 함께 마시기도 했다. 품앗이 하듯 지서에서 술판을 벌인 적도 있다.

 

 

  일요일 여행을 갔다가 학교로 돌아오기 위해 시내의 버스 정거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시내 도로 가운데 경찰 백차를 세워 놓고 사람들을 차에 싣는 광경이 보였다. 장발족 단속을 하는 것이었다. 어떤 경찰이 나를 끌고 백차에 태우려고 했다. 백차 근처에 있던 경찰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우리학교 옆 경찰지서에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평소에 우리는 서로 존대 말을 하며 예의를 지키는 사이였다. 그가 시내로 전근을 온 것이었다. 그가 나를 보고 소리쳤다.

  “야, 임마, 니가 여기 왜 왔어. 빨리 가!

  나는 그의 명령대로 저 멀리 도망을 갔다. 백차에 실려 가는 걸 면했으니 고맙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뒷맛이 개운치 못했다.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고맙다. 임마!

  길을 가다가 또 경찰에 걸린 적이 있다. 기차역 옆에 있는 파출소에 잡혀 갔다. 일장 훈계를 한 뒤 백지를 한 장 주더니 ‘장발 포기서’라는 걸 쓰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문서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경찰이 불러주는 대로 다음부터 장발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글을 한 장 쓰고 지장을 찍은 다음 풀려나기도 했다.

 

  장발 단속에 걸려서 약식 재판에 오라는 고지서를 받았다. 젊은 검사 앞에 섰다.

  “왜 머리를 깎지 않았습니까? 머리를 깎지 않고 왔으니 벌금 두 배입니다. 다음!

  높은 검사님 앞에 갈 때는 머리를 단정히 하고 가야 하는데 겁 대가리 없이 장발로 나타났으니 매우 괘씸했을 것이다. 짜장면도 곱빼기로 먹어본 적이 없는 내가 괘씸죄에 걸려서 벌금을 곱빼기로 물었다.  

 

  가끔 부모님이 계시는 본가에 가면 왜정 때를 사신 나의 아버지도 나의 머리만 보면 한 말씀 하셨다.

  “야야, 머리가 그게 머로? 고만 시원하게 홀딱 깎아라.

  “예에.

  왜정 때는 교사도 머리를 박박 깎았다. 그 시대를 사신 분이니 장발이 답답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는 절대 깎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대답만은 시원하게 한다. 그리해야 머리에 대한 잔소리 시간을 줄일 수 있으니 말이다. 나름대로 터득한 나의 장발 수호 전략 가운데 하나다.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이 조용히 교장실로 불렀다.

  “머리 좀 짧게 할 수 없습니까?

  “…… ”

  “교육장님이 만날 때마다 선생님 머리 쫌 깎게 하라고 해서 나도 죽을 지경입니다.

  “바쁘신 교육장님이 교사 머리에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네요.

  “부탁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교장 선생님과 나의 이런 대화는 몇 번 되풀이 되었다. 대답은 시원하게 했지만 그 대답로 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지켜온 머리인데 교장 선생님 몇 마디에 굴할 수 없는 일이다. 젊은 시절 나의 장발은 무수히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장발 포기서를 쓰며 벌금을 물며 강제로 삭발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며 수호해 온 장발인데, 그 수난과 회한에 찬 세월을 견디며 지켜온 나의 장발이 타인의 따가운 눈총 따위에 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대는 나의 머리카락을 자르기에 안달이 났지만 그럴수록 나의 장발 수호 의지는 더욱 강고해 졌다.

 

  고백하건데 장발을 수호하는 일에 대한 피로감 때문에 잠시 흔들린 적이 있긴 하다. 나이가 들어 이마가 벗겨지면, 그 벗겨진 면적이 5할이 넘으면 남아 있는 머리카락을 밀어버리는 건 어떨까. 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또한 누구 못지않으므로 다수결의 원칙을 존중해서 그리 해 볼까, 하는 생각 한 적이 있다. 그렇지만 나의 머리카락은 친구들처럼 그렇게 대머리로 가지 않았다. 다만 색깔만 흰색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사회가 차츰 민주화 되면서 권력의 머리카락에 대한 집착도 그 강도가 약화되었다. 그간에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유행은 돌고 도는 것 같다. 마치 바지 길이나 여자의 치마의 길이가 짧아졌다가 길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것처럼 머리카락도 짧아졌다가 길어지는 유행이 반복되었다. 유행의 물결이 몇 번이나 밀려가고 밀려오기를 되풀이 했지만 나의 헤어스타일은 초지일관 변함이 없었다.

 

  다른 모든 것은 유행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나의 장발은 유행과는 무관하였다.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흑발이 백발이 된 것이다. 고난과 회한에 찬 세월을 견디어 온 흔적이리라. 아니면 수많은 전장을 누빈 노병의 상처뿐인 훈장이리라. 나의 백발이여, 참으로 고난의 겨운 날들이었다. 수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