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봉선사 행장기

 

문학청년 시절에 이웃 고을에 ‘글밭’이라는 문학 동인이 있음을 풍문으로 들었다. 그 고을에 있는 변방교육대학에 입학하면서 그 말로만 듣던 글밭 동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학생이었지만 학교 친구들보다는 학교 밖 문학청년들을 자주 만나는 편이었다. 그 때 글밭은 잠시 해체되어 변방문인협회와 통합된 상태였다. 그 문학 선배 가운데 한 사람이 해봉 형이었다. 해봉은 이미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산골 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변방문인협회가 주관하는 백일장에서 장원을 한 적이 있는데 일반부 장원은 문인협회 회원으로 영입했기에 나는 학생 신분으로 회원이 되었다.

 

  해봉 형과 나는 문협 회원이라는 공통분모로 인연을 맺게 되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연장자였으므로 나는 선배 말이라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술과 담배를 배우게 된 것도 문학 선배들로부터였다.

  “글을 쓰려면 술과 담배는 할 줄 알아야지.

  선배들의 이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술과 담배에 도전했다. 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술을 마시지 못하신다. 아버지는 상가에 가셨다가 친구가 권하는 바람에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집으로 오시는 길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신 적이 있다.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세상이 근대화 되었음에도 아버지는 외출하실 때 갓과 두루마기를 반드시 갖추시었다. 술 한 잔 드시고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논둑길을 걸어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 분 모두 담배는 잘 하셨다. 할아버지는 장죽으로 담배를 태우셨고 아버지는 권련을 태우셨다. 윗대의 유전자를 이어받았는지 담배는 쉽게 배웠지만 술은 정말 어렵게 배웠다.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술을 마신 다음 토하지 않게 되었다. 그 무렵 박정희는 ‘하면 된다’는 구호를 강조했는데 아마 박정희의 말을 굳게 믿고 실천했던 것 같다.

 

  변방교육대를 다니는 동안 나는 학교 친구들보다 변방시에서 글을 쓰는 선배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해봉 형과도 그런 인연으로 자주 만나게 되었다. 해봉 형이 근무하는 산골 초등학교 분교에 문우들과 함께 방문한 적이 있다. 교사 한 명, 잡무를 하는 용인 한 명이 전부인 학교였다. 형은 학교 사택에 살고 있었다. 사택에서 밤을 새워 술을 마시며 개똥철학을 논했다. 설을 풀면서 술을 마시다가 취하면 나는 몰래 밖에 나와 개울에 먹은 것을 토하고 다시 들어와서 마셨다. 학교로 가는 길의 고요하던 저수지와 숲속에 작은 학교가 그림처럼 내 내 추억의 창고에 남아 있다.

 

  이런 곳이라면 교사가 되어 살아도 좋을 거라는 생각을 했건만 해봉 형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형은 그 무렵 수필에 빠져 있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문장이면서도 여백과 여운이 있는 수필의 매력에 빠진 것이다. 그 무렵 박연구라는 수필가가 쓴 ‘바보네 가게’라는 수필집이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었다. 셈이 흐린 구멍가게 주인이 있었는데 그는 종종 거스름돈을 더 많이 내어주곤 했다. 사람들은 똑똑한 주인이 있는 이웃 가게보다 바보 같은 주인이 있는 이 가게를 더 좋아해서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다.

 

  형이 드디어 학교에 사표를 내고 바보네 가게의 주인공을 본받아 구멍가게를 차렸다. 간판도 ‘바보네 가게’라고 달았다. 나는 그때 변방교대를 졸업해야 했지만 0.5학점을 따지 못해 졸업을 하지 못했다. 학생도 아니요 졸업생도 아닌 애매한 처지였다. 올 데도 갈 데도 없는 유랑인이 되어 떠돌고 있었다. 변방시에서 사귄 문학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가장 만만한 곳이 바보네 가게였다.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바보네 가게를 찾았다. 가게 구석에 앉아 소주병을 갖다 놓고 마셨다. 쥐포며 과자며 손에 잡히는 대로 안주 삼아 술판을 벌이면 주인인 해봉 형도 끼어들어 가게는 이내 술집으로 변신하곤 했다. 물론 우리 주머니에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가게 분위기가 그러하니 손님이 찾을 리도 없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 바보네 가게가 망했다. 바보네 가게는 형의 이력서에 구멍가게 주인 역임이라는 한 줄을 보태고 추억 속으로 사라졌다.

 

 

  남들 2년 만에 졸업하는 교육대학을 3년 만에 겨우 졸업했다. 졸업 무렵 어느 학교에 근무할 것이냐는 희망 근무지역을 적는 조사를 했다. 근무지는 성적순으로 결정된다. 나는 거의 꼴찌로 졸업했기 때문에 희망할 곳이 없었다. 하처가(何處可)라는 난이 있었다. 어느 곳이든 좋다는 뜻이다. 나는 그 하처가에 동그라미를 치고 변방교대의 문을 나섰다. 참으로 긴 방황의 나날이었다.

 

  1년 뒤에 나는 교육청의 부름을 받았다. 발령이 났다는 것이다. 교육청에 가 보니 내가 가야 할 학교는 내 고향과 가까운 곳이지만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이었다. 벽지는 벽지인데 벽지 점수도 없는 두메산골이었다. 물론 통근도 할 수 없는 곳이었기에 그곳에서 하숙을 했다. 교대를 졸업하면 의무적으로 5년 동안 초등학교에 근무해야 하는데 나는 그곳에서 5년을 보냈다. 2년이 지나면 내신을 내어 이동할 수 있었지만 굳이 다른 교사와 경쟁하며 내신을 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남과 경쟁하는 것이다.

 

  하숙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누가 문을 두드렸다. 손에 붕대를 감은 해봉 형이 나타났다. 옷에도 핏자국이 있었다.

  “형이 어인 일이오?

  “내가 오늘 제일교회를 쳐부수고 오는 길이다.

  제일교회라면 내가 사는 도시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교회다.

  ......?

  “교회에서 늘 사랑을 외치는 놈들이 잠 좀 자자니까 목사라는 자가 안 된다고 그러잖아. 그래서 내가 교회 유리창을 다 부수고 왔다.

  “잘 했수.

  드디어 형의 방황이 시작되고 있었다. 나의 시골 하숙에서 며칠 묵은 형은 간다는 말도 없이 떠났다. 이미 결혼해서 아들딸이 있는 형이 방황이라니 형의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그 후에 형의 소식은 풍문으로 들 수 있었다. 특수교사 자격시험을 쳐서 특수교사가 되어 농아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오래 전에 그의 불행한 가족사가 기술된 자전적인 산문집을 보내와서 읽게 되었다. 글을 통해서 형이 방황하는 이유를 조금은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그 뒤로 형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어느 날 학교에서 시달리다가 퇴근해서 거실 소파에 지친 몸을 기대고 티브이를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불교방송이 화면에 떴다. 화면 가득 비친 고승의 얼굴은 해봉이었다. 해봉 형이 해봉선사가 되어 티브이 나온 것이다. 원래 형은 젊은 시절에도 앞 어리가 벗겨졌었다. 속으로 차라리 깎아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정말 깎으니 인물이 한결 훤했다. 시원한 머리에 온화한 얼굴이 완전히 고승이었다. 다도와 선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보기에 좋았다. 아아, 해봉 형이 해봉선사가 되었구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농아학교를 그만 둔 형은 머리를 깎고 태고종에 귀의해서 계를 받았다 한다. 태고종은 대처가 허용되는 종파다. 승려가 된 형은 서울 근교에 조그만 암자를 마련하고 형수를 공양주 삼아 주지가 되었다 한다. 승려가 되었지만 그의 행적은 속이나 나를 바가 없었다. 신도를 관리하고 절을 관리하는 일은 버려두고 공부하는 일과 때로 곡차 마시는 일에 매진한다는 것이다.

 

  수십 년 만에 형을 만나게 되었다. 승복을 차려 입은 형이 내가 사는 변방시에 찾아오신 것이다. 형은 형이 쓴 책을 한 보따리 가져왔다. 주로 한국현대불교사에 관 책이었는데 그 양이 실로 방대하였다. 그 많은 자료를 어떻게 수집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친일 승려편을 형이 집필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불교에 대해 형만큼 해박한 승려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복색만 승려지 말투나 행동은 젊은 시절의 그와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언행이 보다 자유롭고 호방해진 것이리라. 나는 형에게서 천의무봉(天衣無縫)을 느꼈다. 그와 대화하다가 그의 말에 사족을 달아 공감을 표할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느마, 이게 머 쪼매 아네.

  자기 이외에는 모두 하찮은 중생으로 보인다는 뜻이리라.

  곡차가 얼큰하게 오르면 노래를 한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여 윤심덕이 불렀다는 ‘사의 친미’다. 입을 크게 열어 목청껏 부르는 그의 노래는 가사는 맞지만 음정은 거의 염불에 가까웠다. 웃을 때는 큰 입을 열어 이와 잇몸이 거의 다 드러날 정도로 호방하게 웃었다. 나는 그 모습을 스마트폰에 갈무리해 두었다가 가끔 꺼내 보며 혼자 빙그레 웃곤 한다.

 

  며칠을 함께 보내다가 홀연히 지취를 감춘 해봉 선사는 몇 년이 지나도 전화 한 통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운전을 하며 가는데 전화가 왔다. 해봉 선사의 목소리였다.

  “몇 달 후에 자네를 만나러 가야겠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나이까?

  “자네가 머를 쪼매 아니까 자네한테만 이야기를 하는데...

  “무슨 얘기요?

  “다른 놈은 얘기해도 알아듣지도 못할 거 같고...

  “무슨 얘긴지 해 보시오.

  얘기인 즉슨 이런 것이었다. 성경과 불경, 그리고 유발 할라리의 ‘호모 사피엔스’까지 다 읽어 보았는데 모두가 조금씩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세계사에 없었던 인류 문명사를 집필하고 있는데 아직 집필 중이라는 것이다. 당장 내려가서 자네를 만나고 싶지만 집필이 바빠서 내려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책이 나오면 그 때 내려가서 곡차 한 잔하자는 것이다. 지금 집필하는 책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쓰지 못했던 인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명저가 될 거라는 것이다.

 

  “형, 형은 충분히 쓸 거요. 내 기다릴게. 그때 우리 곡차 한 잔 나눕시다.

  “역시, 자네가 머를 쪼매 아네. 하하하!

  전화기 너머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세월이 지나면 그의 책은 출간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책이 전무후무한 명저가 될지 아닐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그의 저서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느냐가 종요한 일일 것이다. 몇 달 뒤에 그는 이 변방에 나타날 것이다.

  “형, 그때 우리 곡차 나누면서 사의 찬미 부릅시다.

  “하하하, 불러야지.

  둥글고 환한 그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얼마 뒤에는 그의 사의 찬미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도 음정은 전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여기까지 썼을 때 또 느닷없이 스마트폰 신호가 왔다. 해봉 형이었다. 안부도 없이 거두절미하고 대뜸 질문부터 들어왔다.

  “어이, 서각, 아무 것도 모르는 놈을 쥐뿔이라 한다는데 개조또 모르는 놈을 뭐라 하면 되지?

  “그거야 형 맘대로 하면 되니더.

  “하하하, 그러면 되겠네.

  그러고는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지금 책 세 권을 써서 세계를 석권하려 하는데 원고가 거의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지난여름 무더위 속에서 전력으로 집필한 결과 방대한 원고가 완성되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너무 장황하여 다시 정리하는 중이라 했다. 준비한 세 권의 책이 출판되면 인도로 갈 생각이라 했다. 앞으로의 세계는 팍스 아메라카 시대는 가고 디지털 글로벌 시대가 올 것인데 자기가 디지털 프레지던트가 되어야 겠다는 것이다. 문명의 중심이 인도로 바뀌기 때문에 인도에 가야 디지털 프레지던트가 될 것이라 했다.

  “형, 그런데 사의 찬미는 언제 듣지?

  “그게 중요한 게 아이따. 서각이 한 번 올라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