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미소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시골 중학교 입학시험을 쳤다. 입학식 날 까만 교복을 입고 까만 모자를 쓰고 학교에 가니 수석 입학을 했다고 장학금을 주었다. 그때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저 아이가 쌀 한 가마니를 벌었다고 신기해 하가도 했다. 그 일로 나는 내가 공부를 잘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나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책을 읽거나 공상을 하는 사간이 공부하는 시간보다 훨씬 많았다.

 

  조그만 시골 중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은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대개의 친구들은 농사일을 돕거나 산에 뗄 나무를 하러 가거나 소꼴을 뜯느라 공부할 여가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일을 시키지 않았으므로 다른 아이들보다 그나마 책과 가까이 하는 기회가 많았을 뿐이다.

 

  학교 선생님들은 나를 서울의 세칭 일류 고등학교에 보내려고 상담도 해 주시고 참고서도 사 주시며 공부하기를 종용했다. 집에서는 아버지의 기대라는 짐을 견디기 힘겨웠다. 아버지는 조선조 유학의 전통에 고착된 분이었다. 말씀마다 논어 구절을 인용하여 교훈을 내리시는 분이었다. 그 교훈은 항상 되풀이되는 것이었다. 한문문장으로 한번 하시고 우리말 풀이로 한번하시기 때문이었다. 공부를 잘 하여 고시에 합격하는 것이 수신제가하여 입신양명하는 길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믿음이었다. 논어의 가르침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꾸중을 들어야 했다.

 

  아버지는 나의 방을 급습하여 내가 보는 책이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니면 압수하여 이런 걸 왜 보느냐고 하셨다. 가령 데미안이나 삼국지를 보다가 아버지께 들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일을 시키지 않는 나의 환경을 부러워했지만 나는 아버지와 선생님들의 기대라는 짐을 힘겨워하고 있었다.

 

  내게는 대화가 통하는 동무가 둘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는 친구, 서울 고등학교로 유학 친구가 그들이다. 날이 저물어도 집에 아이가 들어오지 않으면 우리의 부모는 서로의 집으로 아이를 찾으러 갈 정도로 셋이 어울려 다녔다. 우리는 놀이보다는 주로 이야기를 많이 하는 친구였다. 서당에 다니는 친구는 참으로 성실했다. 서당에 다녀와서 소꼴을 베어야 했는데 반드시 소가 가장 좋아하는 바랭이 풀을 베었다. 그러느라고 날이 저물도록 들을 헤매다가 완전히 날이 저물어야 돌아올 때가 많았다. 나는 그 때 마아저리 로올링즈라는 미국의 소설가가 쓴 ‘내 어머니는 멘빌에 살고 계셔요’라는 단편을 읽고 있었다. 주인공인 여류작가가 집필하는 별장에 시중을 드는 제리라는 소년이 있었다. 이 아이와 같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사과나무 타는 불꽃이 가장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제리는 느닷없이 자기의 어머니가 멘빌에 산다는 말을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소년은 아버지 어머니가 없는 고였다는 이야기다. 작가는 그 소설에서 ‘성실’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제리는 장작을 준비하라고 하면 장작을 고르게 쪼개서 비가 맞지 않는 곳에 쌓아두고 그 곁에 불쏘시개까지 준비한다는 것이다. 장작 패는 소리가 하도 고르고 일정해서 주인공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 정도라고 했다. 주인공은 그 ‘성실’이라는 어휘를 제리에게만 붙여주고 싶다고 했다. 나는 서당 다니는 나의 친구에게도 성실이라는 어휘를 붙여주었다.

 

 

  중학교 졸업 무렵 우리 집 가세는 기울어 객지에서 학교에 다닐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내 성적도 조그만 시골 중학교에서만 우수했지 서울에 유학을 갈 성적은 되지 못했다. 아버지는 우리 집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종합고등학교에 대학 진학반이 생겼으니 그리로 가라고 하셨다. 그곳은 변방시에 가장 우수한 아이들 한 학급을 뽑아 진학 지도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명으로 시험은 쳤지만 학교에 대한 흥미는 잃은 지 오래였다.

 

  합격자를 발표한다는 날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중학교 시절 나를 귀엽게 여긴 여자선생님이 계셨다. 나의 이런 사정을 아시는 선생님께서 그 학교에 가신 모양이었다. 저물 무렵 그 선생님은 뾰족구두를 신고 30리 눈길을 걸어 합격증을 찾아서 우리 집에 오셨다. 어머니가 밥상을 차려 오셨다. 개다리소반에 고봉밥과 시래기 국과 김치가 올라왔다. 선생님의 양장과 우리 집 밥상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아 안절부절 못하며 밥을 먹었다.

 

  선생님의 고마운 뜻을 저버릴 수 없어 변방실업고등학교 진학반 학생이 되었다. 이때부터 나의 어두운 고등학교 시절이 시작되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입학 성적은 꽤 우수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나름 이 변방에서는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모였으니 나는 공부 못하는 학생이 되었다. 중학교에서는 공부 잘 하는 학생이었다가 고등학교에서는 갑자기 공부 못하는 아이가 된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팔뚝에 서울대라는 글자를 쓰고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공부에 매진하는데 나는 늘 도서관에 처박혀 칸트니 니체니 하는 알지도 못할 책들만 읽고 있으니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나는 이 반에서 말없는 아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아이가 되었다.

 

  친구들과 대화도 거의 없었다. 중학교부터 시작된 공상에 빠져서 전혀 인문계 고등학생답지 않은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겨울 방학을 맞이했다. 집에 오니 서울에 유학 갔던 친구가 졸업을 하고 와 있었다. 그는 나와 나이는 같지만 일찍 학교에 다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고 했다. 나와 같이 절에 가 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그가 물색한 빈 절에 가게 되었다. 친구와 나는 양식과 침을 싸서 지고 아무도 살지 않는 암자에 들어가서 그 겨울을 보냈다.

 

  방학을 마치고 학교 수업이 시작되었다. 영어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수업은 하시지 않으시고 방학에 겪은 것을 이야기 보라고 하셨다. 그 영어선생님은 얼굴이 해사하고 가냘픈 도시풍의 용모를 가지고 계셨다. 소문에 의하면 어떤 병을 얻어 도회에 살지 못하고 공기 좋은 이 변방시로 요양 차로 지원해서 오신 거라 했다. 1번부터 차례로 앞에 나와서 발표를 하라는 것이다. 1번 친구가 나갔다.

  “방학에 공부 좀 해야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했는데 계획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뒤통수에 손이 올라가며 겸연쩍어 했다. 1분이 되지 않았다. 선생님이 매우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2번이 앞에 나갔다. 1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다음도 단어 몇 개만 달랐을 뿐이지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등학생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공부와 대학진학이었으니까 재미없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루한 발표가 이어지고 내 차례가 되었다. 선생님을 계속 실망스럽게 하는 것이 민망했다. 나는 앞에 나가 선생님께 좀 길게 이야기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나는 그 겨울 친구와 빈 암자에 갔던 이야기를 했다.

 

 

  저는 친구와 함께 빈 암자에 들어가서 겨울방학을 보냈습니다. 배낭에 먹을 것과 책 몇 권을 넣고 산길을 걸어서 암자에 도착했습니다. 조그만 암자지만 법당에 부처님을 모신 암자임에는 분명했습니다. 법당 옆방에 들어서니 오래 전에 누가 살았던지 벽에 낡은 달력이 붙어 있었습니다. 달력 속의 아가씨가 빛바랜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했습니다. 오래 비워 둔 곳이어서 우리는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법당 마루에 우리가 가지고 간 멸치 한 마리가 떨어져 부처님과 눈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육식을 하지 않으시는 부처님께 송구하여 얼른 치웠습니다.

 

  청소를 마친 우리는 뒷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구해 와서 아궁이에 불을 지폈습니다. 그리고 저녁 준비를 했습니다. 가지고 간 먹을거리라고는 쌀, 김치, 멸치, 고추장, 그리고 몇 가지의 밑반찬이 전부였습니다. 우리는 아궁이에 불을 피워 밥을 짓고 멸치와 고추장을 푼 김치찌개를 끓여 맛있게 밥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책을 펴고 공부를 했습니다. 밥 먹고 나무하고 책보고 밥 먹고 나무하고 책보고 하는 똑 같은 일상이 계속되었습니다.

 

  밥이 깊으면 우리는 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토론의 주제는 책의 내용도 포함되었지만 주로 철학적 문제였습니다. 의견이 일치할 때는 문제가 없었지만 일치하지 않으면 밤샘 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은 토론으로 끝장을 볼 수 없어서 레슬링을 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암자에서 우리는 부처님을 심판으로 모시고 밤 세워 힘겨루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서로가 지치면 쓰러진 채로 해가 중천에 올라올 때까지 자기도 했습니다.

 

  공부는 많이 했느냐고요? 그 친구는 몰라도 저는 아무런 진척이 없었습니다. 저는 제가 음치인 줄은 알았지만 수치인 줄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못하는 수학 교과서를 몇 번 읽었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학을 할 수 없으니 좋은 대학은 갈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아주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면 된다.’고 하지만 저는 해도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학 교과서를 다 외었지만 나는 수학 문제를 한 문제도 풀 수 없으니까요. 뭐 빠지게 하면 되는 사람도 있지만 뭐만 빠지고 안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암자의 생활을 마감하고 돌아오는 날 다시 청소를 하고 짐을 꾸리고 방을 나섰습니다. 달력 속의 아가씨가 빛바랜 얼굴로 쓸쓸하게 웃어주었습니다. 내 청춘의 절망과 고뇌가 아직 남아 있는 그 암자를 뒤로 하고 돌아오는 길 그녀의 빛바랜 미소가 나의 등에 어리었습니다. 친구들 들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이야기를 미치자 친구들의 박수와 함성이 들렸다. 선생님도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해 주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늘 어두운 나날이었지만 그 순간만은 반짝 빛나는 아이였다는 기억이다. 이 후로 그 선생님은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잘 하는 것으로 특별  대우를 해 주셨다. 교칙을 위반하거나 눈에 거슬리는 장면까지도 모른 체 해주셨다. 지금은 이름도 모습도 희미한 선생님, 어디에 계시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