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 청다리

 

원고를 청탁하는 편집자는 원고 끝에 늘 약력이라는 걸 적어 달라고 한다. 나는 그때마다 경북 영주 출생이라고 하지 않고 경북 순흥 출생이라고 적는다.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그렇게 적는 자신을 발견한다. 영주는 시이고 순흥은 면이지만 순흥이라는 지명에 은근한 이끌림이 있었던 것 같다.

 

  근대화 이전에는 교통과 관계없이 물 좋고 들 넓은 곳에 관아가 있었고 지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순흥은 소백산 아래 고을로 참나무 장작에 쌀밥을 먹는 곳으로 알려진 자연적 입지조건이 좋은 곳이었다. 조선 초기까지 부사가 있는 도호부였다가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사건으로 세조가 이 고을을 도륙을 내고 폐부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중국과 그 이웃나라’에서 영주, 풍기, 순흥 가운데 순흥의 가구 수가 가장 많았다고 기록했으니 순흥은 소백산 아래서는 가장 큰 고을이었다. 2일과 7일에 5일장이 섰던 것으로 미루어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눈을 들면 언제라도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고 눈을 더 높이 들면 언제라도 소백산의 비로붕, 연화봉, 국망봉의 신령스런 봉우리를 볼 수 있었다. 큰 산 아래 평평한 들이 펼쳐져 있고 야트막한 산자락에 기대 마을은 소백산의 너른 품에 안긴 듯하다. 순흥이라고 발음하면 늘 소백산의 품에 안긴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내 유년은 마을에서 밥은 굶지 않는 집에서 자랐다. 우리 민중 대다수가 보릿고개와 배고픔을 겪을 때 배고프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던가 생각하면 내 어린 시절 동무들에게 늘 빚진 게 있다는 마음을 떨칠 수 없다. 밥술을 뜨게 된 것은 할아버지께서 글은 읽었으나 과거가 폐지되었기에 호구지책으로 동의보감을 읽어 시골 한약방을 하신 까닭이었다.

 

  나의 위로 형이 둘 나자마자 죽었다. 겨우 건진 게 나였으니 할아버지 할머니는 나를 잃지 않으려고 애지중지 키우셨던 것 같다. 나는 그런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약골로 태어났다. 밥도 잘 먹지 않고 말도 별로 없고 그림같이 앉아 있기만 했다. 재롱도 부릴 줄 모르고 그냥 없는 아이 같았다. 기껏 하는 짓이라고는 사랑방으로 가라고 하면 사랑방으로 가서 어른 들 사이에 가만히 앉아 있고 안방으로 가라고 하면 다시 안방에 와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얀 저고리를 입은, 캔트지에 연필로 그린 것 같은 아이였다.

 

  나는 밥을 잘 먹지 않아서 어른들의 애를 태웠다. 할머니는 나를 업고 뒤에 밥그릇을 감추고 이웃집에 자주 가셨다. 남의 밥이라고 하면 조금 먹었기 때문이라 하셨다. 잘 먹지 못하는 버릇은 중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열면 밥 냄새와 멸치볶음 냄새를 견딜 수 없어 다시 뚜껑을 닫고 운동장 가 나무그늘 아래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잘 먹지 않아도 키는 조금씩 자라는데 늘 말라깽이였다. 팔이 가늘어 여름이면 반팔을 입는 것이 부끄러웠다.

 

  어른들이 애지중지하니 마을 사람들에게도 나는 특별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100주년 기념행사 때였다. 나는 100년사 책의 편집 책임을 맡아 참석했는데 뒷집에 살던 나보다 한 살 위인 친구를 만났다. 군에 갈 때 마지막 술잔을 나누고 할배가 되어서 처음 만났다. 그는 나보다 튼튼하고 컸다. 초등학교 시절 그와 같이 학교에 가기 위해 그의 집에 가면 장군 같은 그의 어머니가 고추 다는 저울을 나의 허리끈에 걸고 한 손으로 나를 달았다. 나는 대롱대롱 저울에 매달려 친구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몇 근이로?

  친구에 비해 너무나 약한 내가 신기해서 장난으로 그리했지만 나는 내가 가볍다는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서울에서 회사 사장이 된 그 친구와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기억은 달랐지만 또 같은 기억도 많았다. 나는 장마철에 황토물이 내려오는 마을 앞 죽계천을 건너다가 죽을 뻔 했던 기억이 있다. 둘이서 손을 잡고 개울을 건너다가 내가 급류에 휩쓸려 넘어졌다. 머리가 물에 잠기자 죽을 것만 같았다. 누런 물속에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거센 물살 때문에 바닥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이상한 세상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내 손을 놓지 않아 나는 살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자 친구가 말했다.

  “그게 바로 나다.

  ......? 고맙다. 친구야.

  친구는 개울을 건널 때 내가 물에 휩쓸리자 내 손목을 놓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했다고 했다. 마을에서 귀하게 여기는 아이인데 만약 손목을 놓으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죽어도 손을 놓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고 했다. 약하고 귀하게 여기는 아이라는 이유로 나는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마을 처녀들은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었다. 머리는 뒤로 길게 땋아 내리고 끝에는 자주색 댕기를 달기도 했다. 진달래 피는 봄날이었다. 우리는 진달래라 하지 않고 참꽃이라 불렀다. 처녀들은 바구니를 들고 산에 나물 뜯으러 가면서 나도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큰 애기들의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막 피어나는 꽃처럼 큰 애기들은 피부도 곱고 이름다웠다. 그래서 따라갔다. 큰 애기들은 나물을 뜯으며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참꽃이 피면 참꽃 그늘아래 문둥이가 온단다. 꽃 속에 숨어 있다가 아이가 오면 잡아서 간을 꺼내 먹는단다. 너 같은 아이의 간을 먹으면 문둥병이 낫기 때문이란다. 니를 데리고 오는 게 아닌데 괜히 데리고 왔다. 니 혼자 집에 갈 수 있나? 니는 이제 고만 내려가라. 그 때 한 처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참꽃 문디 온다아!

  그러고 그야말로 말만한 처녀들은 둥그런 바구니를 이고 치마를 휘날리며 등성이를 넘는 것이었다. 검정치마 흰 저고리, 댕기 달린 머리꼬리, 그런 영상이 활동사진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나는 혼자 남아 아득해졌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 아앙 울었다. 한참을 우고 있는데 눈물 속에 큰 애기들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 시절은 별 오락이 없어서인지 아이를 놀리는 것도 오락에 하나였으리라.

 

  나는 울보였다. 조그만 일에도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였다. 마을 사람들은 내가 지나가면 불러서 이런 저런 말로 나를 울리곤 했다. 울릴 거리가 없으면 그냥 나를 보고 자 운다 운다, 했다. 그러면 나는 정말 울곤 했다. 사람들은 내가 지나가면 자는 운다 운다 하면 운대이 하고 수군거리곤 했다.

 

  내가 밥을 먹지 않으면 고모들은 니 밥 안 먹으면 순흥 청다리 밑에 데려다 준다고 했다. 순흥 청다리는 우리 마을에서 오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소수서원 옆을 지나는 죽계수를 건너는 다리다. 니 자꾸 밥 안 먹고 할매 속 썩이면 청다리 밑에 니 엄마한테 데려다 줄란다. 저 정지에 밥하는 엄마는 친엄마가 아니다. 니는 청다리 밑에서 주어 왔다. 니를 낳아 준 친엄마는 지금 청다리 밑에서 적을 구어 팔고 있다. 다리 밑에서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불을 떼서 적을 굽다가 치마에 불이 붙어 아랫도리가 다 타부렀다. 얼굴에도 불이 붙어 입도 삐딱하게 돌아갔다. 아랫도리 대산에 나무 접시를 깎아서 달고 다닌다. 그래서 걸을 때마다 달각달각 소리가 난다. 니 엄마한테 갈래? 엄마가 반가와 할 거다. 니가 가면 반가워서 막 뛰어 올 게다. 그러면 달각달각 접시 소리가 나고 삐딱한 입으로 인제 오나, 하고 안아 줄 게다.

 

 

  나는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이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어른들은 이야기의 내용과는 다르게 싱글싱글 웃으며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이야기 끝에 입을 실룩거리며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러면 어른들은 야가 또 운다 하시며 만족해 하셨다.

 

  너는 순흥 청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이야기는 내 나이의 모든 아이들이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른이 하는 이야기니까 동화로 분류함이 옳을 것이다. 대개 동화는 꿈과 환상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일 것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도 많이 있다. 우리나라 전래 동화에는 도깨비나 마녀가 등장하는 무서운 것이 많다. 나처럼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무서움으로 위협하여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아이로 잘 자라라는 어른들의 기대가 담겨서일 게다.

 

  내 유년이 위협만 당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집은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일하는 아저씨가  있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유학 경전을 읽는 것 외에 농사일을 하시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어린 시절 몇 분의 일하는 사람이 우리 집을 거쳐 가셨다. 첫 번째 일하는 사람은 처음으로 무등을 태워주었다. 그는 나를 무등을 태워 감나무가 있는 고샅길을 걸었다. 머리에는 감나무 가지가 닿고 내려다보는 길은 아득하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간 것은 그의 덕분이었다.

 

  초봄에는 30리 떨어진 큰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기도 했는데 그의 나뭇짐에는 나를 위한 선물이 실려 있었다. 가장 탐스러운 진달래꽃 한 다발이 있을 때도 있었고 달고 시원한 물이 흐르는 야산에는 없는 송기가 몇 줄기 있기도 했다. 어느 여름 야산에 나무하러 가는 그를 따라갔다. 빗방울이 듣더니 이내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오리나무를 잘라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어 뚝딱 조그만 집을 만들었다. 우리는 그 초록색 집에서 비를 피했다. 참으로 아늑했다. 그는 밥도 잘 먹지 않고 몸도 약하고 울기 잘 하는 나를 보호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나를 울게 한 사람이나 나를 귀하게 생각해 준 사람이나 모두 나를 키워준 분들이다. 이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서 고맙다는 말도 전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