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미술 하니라

 

 

 

  초등학교 때는 미술시간이 좋았다. 대부분의 미술시간은 선생님이 그림 주제를 주고 운동장이나 야외에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림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자유가 좋았다. 교실에 앉아서 선생님이 가르쳐 주는 것을 배우는 시간보다 혼자 앉아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그리는 시간이어서 좋았다. 대개 미슬 시간은 그림을 완성하는 시간을 감안하여 두 시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두 시간 동안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날의 그림 주제는 ‘우리학교’였다.

  “오늘 그릴 그림은 ‘우리학교입니다. 모두 바께 나가서 우리학교를 그리세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운동장 가운데로 나가 앉아서 우리학교 교사의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우리고장에서 제일 큰 신식 건물인 학교를 그리기 시작했다. 학교 지붕을 그리고 건물의 벽과 창문을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나무를 그렸다. 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그리고 잎은 초록색을 칠했다. 지붕은 기와 하나하나를 검정색으로 그렸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구름을 그리고 하늘은 파란색을 칠했다.

 

  우리들이 쓰는 색은 대개 정해져 있었다. 땅은 주황색을 칠했다. 아이들은 주황색을 흙색이라 불렀다. 청색은 하늘색이라 불렀다. 모든 나무줄기는 갈색을 칠했다. 우리는 갈색을 나무색이라 했다. 나뭇잎이나 풀잎은 녹색이나 초록색이지만 그냥 푸른색이라 했다. 사람의 피부색은 살색이라 했다. 모든 머리카락은 검정색으로 칠했다. 크레파스 한 통을 사면 하늘색, 흙색, 나무색 살색은 이내 짤막해지고 자주 쓰지 않는 중간색은 그대로 남기 일쑤였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주제에 정답을 쓰는 것이라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대상과 유사하면 잘 그린 그림이고 대상과 멀어지면 잘 그리지 못한 그림이었다.

 

  나는 부끄럼쟁이라서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늘 혼자 놀았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노는 놀이는 하나도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가령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은 할 줄 몰랐다. 그래서 지금도 바둑이나 장기, 당구, 화투는 할 줄 모른다. 모처럼 얻은 자유시간을 위해 나는 운동장 가 철봉이 있는 곳으로 갔다. 철봉이나 평행봉은 혼자 할 수 있어서 시간만 나면 늘 철봉에 매달려 살았다. 가끔 땅에 손을 짚고 물구나무를 서거나 핸드스프링으로 몸을 돌려 한 바퀴 돌기도 했다. 특히 물구나무서기를 잘 했는데 물구나무를 선 채로 자유롭게 걸어 다니기도 했다. 아이들은 내가 체조를 잘 하는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은 몸치에 가깝다. 그냥 혼자 놀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무구나무를 서서 바라보는 풍경이 재미있기도 했다.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나는 그림을 그려야 했다. 학교 건물을 그리지 않고 감나무 곁에 있는 시소를 그리기로 했다. 그것도 우리학교라는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감나무 한 그루와 시소 하나니까 순식간에 그릴 수 있었다. 대충 그려서 선생님께 제출했다. 우리학교라는 주제에서 다소 벗어낫기 때문에 선생님 앞에 섰을 때는 조금은 떨리는 마음이었다. 얼굴이 붉어지기도 했다.

  “그림은 이렇게 그려야 되지.  

  나의 걱정과는 달리 선생님의 칭찬이 돌아왔다. 학교에서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다. 너희들은 우리학교라니까 모두 학교 건물만 그렸지. 이걸 봐. 이것도 우리학교야. 그림은 말이야 자기의 생각이 담겨 있어야 해. 그리고 나의 허접한 그림은 교실 뒤 게시판에 붙여졌다. 본의 아니게 그림 잘 그리는 아이가 되었다. 본의든 아니든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아이에게는 설레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때의 선생님은 우리 시골 사람들과는 부류가 다른 인간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늘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었지만 선생님은 양복을 입은 사람이었고 시골사람들에게서는 담배 냄새가 났지만 선생님에게서는 늘 포마드 냄새가 났다. 그런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그때 선생님들은 칭찬을 잘 할 줄 몰랐다. 늘 회초리를 들고 다니시며 잘 못한 아이들에게 매를 대는 무서운 분이기도 했다. 학생과 교사의 관계가 아니라 졸병과 지휘관의 관계였다. 그것이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라는 아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고등학교 때 대도시에서 미술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머리에 까만 베레모를 쓴 미술선생님 다운 풍모를 지니신 분이었다. 미술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우리를 학교 뒷산에 올게 하고 풍경을 그리라고 했다. 나는 그때  세상에서 고민이 가장 많은 소년이었다. 기울어져 가는 가세, 공부에 대한 자신감의 상실 등으로 세상의 고민을 모두 가슴에 안은 소년이었다.

 

  오월이었다. 오월의 눈부신 햇살이 메마른 황토에 따갑게 부서졌다. 그날 학교 뒷산에서 바라본 인상이 지워지지 않고 있는 걸 보면 나의 내면은 매우 절망적인 상태였던 것 같다. 멍하니 앉아서 오월의 신록과 햇살을 바라보다가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지 않으면 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날 사용한 물감은 땅을 그린 짙은 주황색과 신록을 그린 녹색 두 가지뿐이었다. 주황색과 녹색을 쓴 추상화에 가까운 그림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그림은 건물과 나무와 들이 어울어진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이거 누구 그림이야?

  선생님 손에 들린 그림은 내가 낸 것이었다. 내가 수줍게 손을 드니 선생님은 내 얼굴과 그림을 번갈아 보았다.

  “잘 그렸어. 그림은 이렇게 그려야지.

  두 번째 들어보는 그림에 대한 칭찬이었다.

 

  내가 음치인 것을 안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음치인지 몰랐을 때는 어머니가 사 주신 하모니카를 혼자 불기도 했다. 음악시험을 친다고 했다. 한 사람씩 앞에 나와서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좀 부끄럽기는 했지만 음악시간에 배워서 아는 노래라 용기를 내어 부르기로 했다. 앞에 나가 친구들을 향해 섰다. 그 엽 책상에는 점수를 매기기 위해 선생님이 앉아 계셨다. 얌전하게 나가 공손히 인사하고 바른 자세로 서서 노래를 불렀다.

 “하하하! 하하하!

  첫음절이 끝나기도 전에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교실에 낭자했다. 나는 노래를 끝내지도 못하고 얼굴이 붉어지고 정신이 아득하여 제자리로 돌아왔다. 선생님도 빙그레 웃으셨다. 내가 쥐였다면 아무 구멍이나 찾아 들어갔을 것이다. 내가 들어도 음정이 맞지 않는 소리였다. 이후로 나는 음악시간이 가장 무서운 시간이었다. 친구들과 모임이 있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이 노래를 시키는 일이었다. 내 차례가 다가오면 가슴이 두근거리며 어떻게 모면할까에 대한 궁리를 하느라 다른 생각은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노래 대신에 차라리 고문을 받고 싶었다.  

 

 

  어찌어찌하여 변방교육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원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학교였다. 말이 대학이지 음악과 미술 과목도 이수해야 하는 곳이었다. 젊으나 젊은 나이에 적성에도 맞지 않는 초등학교 교사라는 정해진 미래를 향해 공부해야만 했다. 건성으로 학교에 적만 걸어놓고 시간을 죽이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음악시간과 미술시간은 아예 들어가지 않았다. 필기시험을 치는 과목은 어찌어찌하여 학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음악과 미술은 실기를 해야 하니 학점을 딸 수가 없었다. 학점 미달로 친구들 모두 떠난 교정에 남아야 했다. 낙제를 한 것이다.

 

  미술은 정해진 양의 수채화를 매주 2장씩 그려내는 것이었다. 다시 학기말이 가까워오자 그림을 그려내기로 했다. 제출해야 할 그림이 수십 장이었다. 친구의 그림을 몇 장 얻어다가 놓고 그 림을 모사해서 내기로 했다. 어찌했던 그림의 양을 채워볼 양이었다. 하늘 색 물감을 잔뜩 풀어 몇 장의 도화지에 하늘색을 칠하고 초록색의 물감을 붓에 묻히면 여러 장의 도화지에 풀만 그렸다. 공장에서 염색하는 방식이었다. 하룻밤에 정해진 매수를 마련했다. 그림을 들고 연구실에 찾아가서 교수님께 제출했다.

  “자네. 남의 그림을 베꼈구먼. D학점일세! 졸업하거든 인생을 그렇게 살지 말게."

  학점과 함께 준엄한 교훈은 덤으로 들었다. 미술은 해결이 되었지만 음악은 해결이 되지 않아 다시 유급을 했다. 음악 학점을 따기 위해서는 주어진 오르간 곡을 연습하여 교수님 앞에서 연주해 보여야 했다. 주어진 곡은 너무 어려워 도저히 연주할 수가 없었다. 나는 레슨 목록에도 없는 미국민요 스와니 강 한곡을 택했다. 가끔 생각나면 연습하여 다시 학기말이 되었을 때 겨우 칠 수 있게 되었다. 연구실에 찾아가니 교수님은 교학과에 학점을 모두 넘기고 서울로 가신 뒤였다. 교학과 직원이 두 번씩이아 낙제한 내 처지가 가여웠던지 그 교수님께 전화를 했다.

  “서울 댁으로 오랍니다. 주소를 적어줄 테니 가 보십시오.

  주소를 들고 변방에서 기차 타고 버스 타고 교수님 댁을 찾아갔다. 댁은 매우 단란한 가정으로 보였다. 어린 아이들이 있고 미인 사모님이 있고 거실에는 피아노가 있었다. 교수님이 피아노를 가리키며 말했다.

  “쳐 보게.

  오르간으로 연습했는데 피아노를 치라니 난감했다. 나는 그의 가족을 청중으로 모신 음악회에 게스트로 출연한 셈이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콘서트였다. 아무 생각 없이 피아노 건반을 두들겼다. 무슨 소리가 났는지 기억에도 없다. 박수도 받지 못하고 연주는 끝이 났다. 교수님이 내가 가지지고 간 서류에 D학점이라고 적고 서명을 하신다음 봉투를 봉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신 그분은 목사님 설교조의 어조로 말씀하셨다.

  “자네. 인생을 그렇게 살지 말게. 자네 때문에 내가 이 교수와 다투기도 했네.

 

  이 교수라는 분은 나를 각별하게 여기시는 교수님이었다. 아마 그분이 나를 졸업시키기 위해 학점을 부탁하셨던 모양이다. 나는 연주가 부끄러웠고 교수님의 훈계가 견딜 수 없었다. 사모님이 보시기에 내가 너무 가여웠는지 주방에 들어가 달걀 프라이를 몇 개 만들어서 쟁반에 받쳐 들고 오셨다. 배도 고프던 참이라 나는 얼른 달걀 접시를 비우고 쫓기듯이 학점 봉투를 들고 현관을 나섰다.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입천장이 홀라당 덴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나는 친구들 2년에 졸업한 한 많은 변방교육대학을 3년 만에 졸업할 수 있었다. 나의 파란만장한 학창시절을 한 문장으로 서술하라면 ‘반공 도덕 하니 음악 미술 하니라.’가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