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흥 장날

 

  5일장 중에도 매달 27일에 장이 서는 곳은 인근에서 가장 큰 장이다. 순흥도 27일에 장이 서는 곳이다. 단종 임금 복위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순흥은 도호부였다.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자기가 임금이 되었다. 당시 순흥 부사는 순흥에 유배 와 있던 금성대군과 모의하여 영월에 귀양 와 있던 단종을 복위시키기로 했다. 이 모의는 밀고자에 의해 거사 직전에 한양에 알려지고 순흥에는 관군이 덥쳐 피바람이 불었다. 죽은 이들의 피가 죽계수를 붉게 물들였다 한다. 그 때 폐부가 된 후 순흥은 몰락한 지역이 되어 지금은 순흥면이 되었다.

 

  순흥은 지리적으로 고대 도시의 여건을 온전히 갖춘 곳이다. 소백산에서 발원한 죽계수를 끼고 제법 넓은 들이 소백산 자락에 펼쳐진 곳이다. 큰 산에 안겨 있어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고 기름진 들이 있어 살기 좋은 입지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순흥부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신라시대 화엄사상의 중심 사찰인 부석사가 있고 순흥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있다. 불교문화와 유교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어 순흥의 옛 영화를 말해 줄 뿐이다.  

 

  노인들의 말을 빌리면 옛날의 순흥은 기와집이 즐비하여 기와집 처마 밑으로 걸어가면 영주까지 비를 맞지 않고 갈 수 있었다 한다. 명절이 다가오면 놋그릇을 닦았다. 멍석을 펴고 그 위에 놋그릇을 내어 기와 조각을 가루를 내어 지푸라기에 묻혀서 닦았다. 어머니는 놋그릇을 닦을 때 개울에 가서 가와 조각을 주워오라 하셨다. 개울에는 기와 조각이 지천으로 있었다. 이로 미루어 노인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순흥면 사무소는 여느 면과는 달리 고풍스런 기와집이었다. 봉서루라는 누각을 옮겨 와서 사무소 건물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사무소 건물과 깨어진 기왓장, 그리고 27일 장날만이 순흥의 옛 흥성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은 그 5일장마저 사라지고 없지만 어린 시절의 순흥장은 제법 흥성스러웠다.

 

  장날이면 나는 어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장에 따라가기를 좋아했다. 장날에는 시골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골 마을의 볼거리는 논과 밭과 산과 개울물뿐이었기 때문이다. 난전에 펴놓은 물건들은 종류도 다양하고 색도 화려했다. 어머니는 옷감이랑 양잿물이랑 생선, 멸치, 성냥, 동동구루무, 고무줄 등의 장보기를 한 다음 마지막으로 책을 펼쳐놓은 곳에 난전으로 갔다. 난전에 펼쳐놓은 책은 알록달록한, 지금생각하면 조잡하기 그지없는 표지 위에 고대소설이란 장르 표시가 적혀 있었다. 춘향전, 유충열전, 권익중전, 옥루몽, 춘몽, 옥단춘전 같은 제목의 소설류였다. 어머니는 한글을 겨우 배워 더듬더듬 읽는 소설읽기에 재미를 붙였다. 어머니는 아마 그것이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허구가 아니라 사실로 알고 읽으셨던 것 같다. 고대소설 뒤에는 ‘이 소설을 다 읽은 다음에는 00전을 읽으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출판사의 판매 전략으로 그렇게 적어놓았지만 어머니는 반드시 그 책을 사오곤 하였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그 소설들을 읽으며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었다.

 

  장날이면 이발소 앞에는 뻥튀기 아저씨가 자리를 잡았다. 아저씨는 조그만 여자 아이를 늘 데리고 다녔다. 뻥튀기 아저씨와 그의 딸이라고 했다. 대포같이 생긴 뻥튀기 기계 주위에는 아이들이 붐볐다. 뻥 하고 강냉이가 튀겨지면 밖으로 튕겨 나온 뻥튀기 낟알을 주워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뻥튀기 아저씨와 그의 딸은 옷이고 얼굴이 온통 연기에 까맣게 그을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깡통에 기름기가 많은 소나무 조각인 관솔에 불을 피워 기계에 열을 가하기 때문에 그을음이 가실 날이 없었다. 강냉이가 다 읽으면 쇠꼬챙이를 끼워 당기면 뻥! 소리가 요란하다. 뻥 소리가 나기 전에 반드시 “소리 나니데이!” 하고 예고를 해야 한다. 그런데 아저씨는 목소리도 작고 혀가 짧아 예고할 때는 늘

  “도디 나니데이~

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소리가 끝나자 뻥! 하는 소리가 온 장터를 울렸다. 이웃 이발소 아저씨가 면도를 하다가 놀라서 손님의 턱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이발소 아저씨가 뻥튀기 아저씨에게 에게 항의를 했다.

  “소리 난다고 말을 해야지 말이야. 깜짝 놀랐잖아!

  뻥튀기 아저씨는 난감해 하다가 정색을 하고 짧은 혀로 소리를 높여 외쳤다.

  “도디 난다 그이께네!

  통역을 하자면 ‘소리 난다고 그러니까.’이다. 구경하던 장꾼들이 모두 웃고 면도칼에 벤 사람도 따라 웃고 순흥장은 시끌벅적하고 흥에 겨웠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 오늘 길이었다. 그 때는 버스라 하지 않고 오가다라 불렀다. 그 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마 대형(大型)이라는 일본말에서 온 것인 듯하다. 망할 놈의 일제 잔재를 뜻도 모르고 쓰던 시절이었다. 비록 비포장 길이었지만 오가다 타는 기분은 신선했다. 소달구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오르막을 오르다가 내리막을 내려갈 때는 하늘을 나는 느낌이었다. 난생 처음 느끼는 아찔함은 신선했다. 내 옆에 뻥튀기 아저씨의 까만 딸이 앉았다. 그 딸이 내게 말했다.

  “어떤 아저씨가 나보고 김지미 닮았다고 하던데 맞나?

  김지미, 그 때 한국 최고의 여배우가 김지미였다. 모든 영화에 주연을 혼자 할 때였다. 햇볕과 연기에 그을어 까만 소녀는 김지미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아마 어떤 싱거운 아저씨가 조롱으로 한 말을 이 소녀는 그대로 믿는 것 같았다. 나는 난감하여 겨우 입을 열었다.

  “몰라. 나는 김지미가 누군지 몰라.

  이 소녀는 내게 말고도 여러 사람에게 나에게 했던 질문을 했던 모양이다. 아이들은 이 소녀를 보며 김지라고 부르고 키득거렸다. 순흥장에는 장날마다 뻥튀기 아저씨와 그의 착한 딸인 김지미가 나타났다.

 

  순흥장에는 또 다른 명물이 있었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어른이나 아이나 그를 당나구라 불렀다. 당나구는 당나귀의 방언이다. 그는 카가 크고 얼굴이 길죽하며 어질게 생겼다. 특징이 있다면 귀가 남들보다 크며 위로 쭝긋하게 올라갔다. 언듯 보면 군자의 상호를 가지고 있어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있었다. 그런 그를 아이나 어른이나 함부로 대하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다. 굳이 하는 일이 있다면 프랑스 소설 ‘좀머 씨 이야기’에 나오는 좀머 씨처럼 하루 종일 걷는 것이 그의 일이다. 좀머 씨는 지칠 때까지 걷다가 지치면 깊은 잠을 자고 깨면 다시 걷는다. 당나구는 좀머 씨처럼 그렇게 열심히 걷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선량한 눈으로 먼 산을 보며 성큼성큼 걷는 모습 외에 그의 다른 모습을 따로 볼 수가 없었다. 그의 걸음은 유유자적했으며 그의 얼굴은 선량했다. 그를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가 시인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면사무소 아저씨들은 가끔 그를 보면 당나구 하고 불렀다. 그리고 공문을 주며

  “당나구, 이거 영주 군청에 갖다 주게.

하면 당나구는 빙그레 웃으며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30리를 걸어서 군청으로 가는 것이었다. 면서기가 당나구에게 공문 배달을 시키는 것은 우편으로 보내는 것보다 정학하고 빠르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심부름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수행했다. 나는 그가 왜 당나구라 불리는지 궁금했다. 사실 나는 그 때까지 당나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장날 손님과 장사꾼 사이에 흥정하는 말 거운데 당나귀라는 말을 들어서 짐작할 뿐이었다. 장터에는 당연히 흥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손님은 장사꾼이 부르는 가격에서 얼마라도 깎아야 속지 않았다 여겼다. 그래서 장사꾼은 미리 높은 값을 부르고 조금씩 깎아 주어 손님을 섭섭하지 않게 하는데 이것이 흥정이었다. 손님 중 에는 흥정이 유독 심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 때 장사꾼이 하는 말이 있다.

  “당나구 귀빼고 좆 빼면 남 게 머 있니껴?

  이로 미루어 당나귀는 귀가 크고 좆이 큰 짐승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나구에 대해 몇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아이들이 당나구라 불러도 반말을 해도 그는 왜 화를 내지 않을까? 아이들이 당나구라 부를 때 슬프지는 않을까? 그는 왜 걷기만 할까? 당나귀는 귀와 그것이 크다는데 당나구의 그것도 클까? 그러면 당나구가 걸을 때 그것도 흔들릴까? 혹시 걷기에 너무 무겁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우리가 자라는 동안 당나구도 장터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 지금도 그는 시인처럼 유유자적 이름 모를 마을에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어릴 때 내 꿈은 면서기가 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바람도 그러했다. 내 고장 마을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것은 양복을 입은 사람과 한복을 입은 사람이었다. 한복을 입은 사람은 농민이었다. 들에서 농사를 지으니 햇볕에 얼굴을 그을려야 하고 흙과 더불어 사니 흰 바지저고리에 늘 흙이 묻어 불결했다. 그것은 농토가 많은 농부나 가난한 농부나 마찬가지였다. 농부들의 삶은 일 년 내내 땀 흘리는 고달픈 나날이었다. 그에 비해 양복 입은 사람은 그늘에서 서류를 만지며 일하기에 얼굴이 희고 편해 보였다. 양복을 입은 사람은 면서기나 학교 선생님뿐이었다. 어머니는 가끔 이렇게 말씀 하셨다.

  “니는 농사짓지 말고 그늘에서 붓 놀리는 일을 해라.

 

  어머니도 장터에 가서 면서기를 보기는 한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너무 귀해 감히 되기 어려울 거 같고 면서기쯤은 어찌하면 될 것 같기도 했다. 초등학교에서 8.15 기념식을 할 때 보면 면서기는 선생님들과 대등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면서기에게는 농촌에서 맡을 수 없는 향긋한 화장품 냄새도 났다. 면서기가 마을 이장님 댁에 오는 날이면 이장님 댁에서는 닭을 잡는다, 술을 받아온다, 대접이 융숭했다. 사내로 태어나서 한 번 면서기가 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 여겼다.  

 

  순흥면에 면장님이 새로 부임해 오셨다. 부면장은 면장님을 대접하기 위해 장터에서 이름난 맛집인 암소 갈빗집에 면장을 모시고 갔다. 숯불을 피워 석쇠에 쇠고기를 굽는 집이었다. 면서기들이 식사를 마치고 이를 쑤시며 식당을 나오는 모습을 장터 사람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만큼 쇠고기는 아무나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이었다. 부면장은 고기를 먹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쇠고기는 익을수록 딱딱하고 돼지고기는 제대로 익어야 부드럽다는 것도 아는 사람이었다. 반면 면장은 바닷가 쪽에서 온 사람이라 소고기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부면장은 말하자면 웰던보다 미디움이나 레어를 즐겼다. 반면 면장은 완전히 익은 웰던을 좋아했다. 순흥장에는 소고기는 불김만 스쳐도 먹는다는 말이 있었다.

 

  면장이 석쇠 위의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부면장은 핏기가 있는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날름 먹는 것이었다. 면장이 점찍어 두고 익으면 먹으려고 벼르던 것도 부면장이 얼른 먹어치우는 것이다. 부면장이 배불리 먹는 동안 면장은 한 점도 먹지 못했다. 부면장은 아아, 잘 먹었다 하며 게트림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면장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일어서서 음식점을 나서며 한 마디 했다.

  “부면장! 고기도 잘 먹으니 니가 면장 해라!

  이 이야기는 갈빗집 심부름하는 아이의 입을 타고 온 장터에 퍼졌다. 순흥에는 아직도 참나무 숯불에 한우를 굽는 맛집이 있다. 어느 날 나의 은사님 내외분이 오셨다. 대학의 총장님으로 계시는 분이셨다. 이분들을 모시고 순흥에 있는 맛집에서 식사를 대접했다. 식사를 하다가 문득 부면장 이야기가 생각나서 이분들께 해 드렸다. 두 분이 박장대소하시며 고기맛보다 이야기를 더 좋아하셨다.

  그 후에 사모님을 뵌 적이 있었다.

  “서각 선생, 나 서각 선생 때문에 몬살겠다.

  “왜 그러세요?

  “이 양반이 무슨 일만 있으면 나 보고 니 면장 해라, 니 면장 해라, 하고 소리 질러서 몬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