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장갑

 

 

  상로 형이 대소 형 과수원으로 오라고 해서 퇴근 후 대소 형의 과수원으로 향했다. 사람의 사귐은 대체로 유유상종이다. 공통점이 많은 사람끼리 어울리는 경향이 있다. 나는 교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교사들하고만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지식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어울리는 편이었다. 상로 형은 월남전 참전 후 제대하여 철도에 다니다가 퇴직하고 아내의 가게 일을 돕거나 술을 마시거나 한다. 상로 형은 키가 큰 편이며 힘도 좋다. 그는 사람을 좋아하여 자기 일보다 남의 일을 더 많이 하는 편이었다. 그를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곳은 상가 집이나 장지였다. 상가 집에서 허드레 일을 돕거나 장지에서 삽을 들고 묘지 조성하는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지인의 흉사에 그만큼 헌신적으로 돕는 이도 드물 것이다.

 

  상로 형이 대소 형 과수원에 자주 가는 것도 일을 돕기 위해서다. 크고 작은 심부름을 하거나 과수원 일을 한다. 대소 형은 그런 그에게 그가 좋아하는 술자리를 자주 마련했다. 마당에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고 막걸리를 마시는 일이 많았다. 그 자리에 나도 끼게 된 것이다. 상로 형이 술자리의 추래한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흰 장갑 형님일세. 인사하게.

  흰 장갑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어릴 때부터 전설로 전해지는 흰 장갑이라는 사람을 직접 보다니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내 앞에 쭈그리고 앉은 이 노인은 그 이름과는 너무나 다른 초라한 노인일 뿐이었다.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인사는 해야 했다.

  “저는 서각이라고 합니다.

  초라한 행색이나 어딘가 위엄이 있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앉게.

  이 동네에서 초면에 교사에게 쉽게 반말을 하는 이는 흔치 않다. 그는 대뜸 반말로 나왔다. 내심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흰 장갑이라는 명성에 주눅이 들어 얌전하게 술이나 마시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내심으로 이 노인이 정말 흰 장갑일까? 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흰 장갑,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 본 이름이다. 이 지역은 철도 교통의 요지다. 남북으로는 중앙선 열차가 부산과 서울로 연결되고 동으로는 강릉으로 가는 영동선이 있고 서쪽으로는 김천으로 가는 경북선이 있다. 그래서 영주는 영주역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철도가 연결된 곳이다. 영주에서 철로가 벋어가는 지역을 지배하는 건달들이 있었다. 그 건달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흰 장갑이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담임 선생님의 이름의 몰라도 흰 장갑이라는 이름은 모르는 이 없을 정도였다.

 

  영주역, 지금은 이전되었지만 영주역은 객지 사라들이 많이 거치는 곳이었기에 이들을 상대로 하는 잡범들이 대거 서식하는 곳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구두라는 것을 신고 객지에 갔다가 영주역에 내린 적이 있었다. 구두가 더러워져서 역 앞에서 구두 닦는 소년의 구두 통에 발을 올렸다. 소년은 성냥을 그어대며 침을 뱉으며 구두를 닦더니 내가 알고 있는 값의 몇 배를 달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많이 달라고 하느냐니까 불 매끼를 올렸다는 것이다. 나는 제법 똑똑한 척 내가 붕 매끼를 주문하지 않았는데 왜 불 매끼를 올렸느냐고 했다. 서로의 말이 몇 마디도 오고가기 전에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를 둘러쌌다. 그 때야 나는 사태를 파악했다. 내가 봉이 된 것이다. 시골에 살다가 외지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그들에게 나는 객지 사람이었던 것이다. 주머니에 돈을 탈탈 털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흰 장갑과 같은 주먹인데 나는 타고난 약골이라 그들에게 저항할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전략은 부모에 물려받은 몸은 조금도 다치게 할 수 없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면 다짜고짜 선빵을 날리고 형세가 불리하면 얼른 항복하거나 도망을 가는 것이 나의 전략이었다. 살아오면서 약골인 내가 주먹을 날린 일은 거의 없었다. 대개 항복을 하거나 도망을 하여 나의 신체를 보존할 수 있었다. 싸움에 이기기 위해 운동을 하며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밤에 영주역에 내리면 아줌마들이 따라오며 자고 가라고 성화다. 역 주변은 판자 집 같은 다닥다닥한 방들이 즐비했다. 봄을 파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영주역은 지나가는 여행객, 호객하는 아줌마, 잡범들, 짐 날라주는 지게꾼 등으로 아름답지 못한 이름을 전국에 날렸다. 그런 도시이니 질서보다는 무질서가 승했다. 군대 가기 위한 신체검사를 받을 때였다. 시내 학교 강당에서 팬티바람으로 신체검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껄렁패 청년들이 술집에서 손짓을 했다. 우리 일행이 시골에서 온 것을 알고 부른 것이다. 우리가 가자 그들은 우리를 술집에 몰아넣고 나가지 못하게 문에 의자로 바리케이트를 쳤다. 우리 앞에 막걸리 잔을 놓고 가득 부은 다음 숟가락으로 떠서 먹게 했다. 우리 촌놈들은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들 가운데 친구의 형이 있었다. 그 덕분에 무사히 나올 수 있었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또 삥을 뜯겼을 것이다. 행인을 위협하여 푼돈을 얻어내는 것을 삥 뜯는다고 했다. 지금은 선비의 고장이지만 6,70년대의 영주는 그런 곳이었다. 그 시대에 주먹이 세다는 것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바였다.

   

  서울에 김두한, 이정재, 시라소니가 있다면 이곳에는 흰 장갑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흰 장갑은 다른 점이 있었다. 서울의 주먹은 구체적인 무용담과 함께 그 이름이 전해지지만 흰 장갑은 그의 출신이 어떠하며 구체적인 싸움이 어떤 것이 있으며 그가 어떻게 생긴 인물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흰 장갑이라는 이름만이 전설처럼 이 지역에 떠돌 뿐이었다. 보통 아이들이 울면 호랑이가 온다고 하기도 하고 곰쥐가 온다고 하지만 이 지역에서는 흰 장갑이 온다고 하기도 했다.

 

  건달은 범죄자임이 분명하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인식이 없었다. 일제의 힘에 억압된 세월이 길어서인지 힘을 가진 자를 숭배하는 기류가 존재했다. 마을마다 아이들은 샌드백을 달아놓고 치기도 하고 청년들은 마을 공터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태권도를 가르치기도 했다. 집집마다 아령이나 역도기구, 악력기 같은 운동기구 하나쯤을 있었다. 아이들의 화재도 누구와 누가 싸워서 누가 이겼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중요한 한몫을 할 때였다. 그런 시대였으니 흰 장갑은 아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름이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 흰 장갑의 세대가 노인이 되었을 무렵 이 지역에는 자칭 타칭 흰 장갑이었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마다 흰 장갑이라는 이가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누가 진짜 흰 장갑이었는지는 안개 속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흰 장갑이 있다. 술이 몇 잔씩 돌아도 흰 장갑 노인은 별 말이 없었다. 그에게 당신이 흰 장갑 맞느냐고 물어볼 상황도 아이어서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다.

 

  그날 대소 형 과수원에서 만난 세 사람은 모두 대단한 인물들이었다. 흰 장감은 말할 것도 없고, 대소 형도 이 지역 명문가 출신으로 일찍이 한양에 유학해서 명문학교를 졸업하고 청년 실업가로 크게 성공하다가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신문지상을 크게 장식하고 낙향하여 과수원에 은거한 분이었다. 상로 형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월남전에 참전하여 웨스트모랜드 장군과 골프를 치면서 굿샷! 이라는 영어를 구사하기도 했던, 지금은 내 일보다 남의 일에 더 관심이 많은 분이다.

 

  상로 형은 그날 만났던 그가 오리지널 흰 장갑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나는 상로 형 말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의 남을 위하는 품으로 보아 거짓으로 말하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이다. 상로 형이 갑작스런 병으로 하세하자 그를 생각하며 시를 쓸 정도로 나는 그를 믿었다.

 

이름이 상로인데 상노라 부른다

옛날 대갓집 노비 같다

이름값 하느라

자기 일 재껴두고 남의 궂은 일 더 많이 했다

몸이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고

죽어도 죽었다고 알리지 않아

그의 장례는 쓸쓸했다 한다

바람 부는 목로주점에 앉아

없는 상로 형과 대작을 한다

상노 형, 한 잔 해

금세 빈 잔이다

빈 잔에 금세 참이슬 고인다  - 졸시, 문상

 

 그날 과수원에서 만남 이후 다시는 흰 장갑을 만날 수 없었고 상로 형도 하세하여 흰 장갑에 대한 이야기는 상로 형에게서 생전에 들은 몇 마디밖에는 기록할 것이 없다. 그 점을 매우 애석하게 생각한다. 흰 장갑은 무술 수련을 따로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주먹이 센 사람이었다. 그리고 왼손잡이였다. 싸움을 자주 하지 않지만 부득이 싸움을 할 때면 왼손에 흰 장갑을 끼고 싸웠다 한다. 누구든 그의 왼손에 걸리면 몸을 온전히 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다.

 

  그는 태생이 선량한 사람이었다. 패거리를 만들어 조직을 하고 이권을 챙기는 조폭들과는 매우 달랐다 한다. 그의 정의감에 이끌린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서 그를 형님으로 모셔서 자연 조직 비슷한 것이 형성되었다. 폭력으로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그는 마지못해 그가 나서게 되고 그가 나서면 사건은 금방 해결되었다. 그럴 때에도 그는 혼자서 건달패의 우두머리에게 혼자 찾아간다. 정정당당하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리고 흰 장갑을 끼고 상대를 제압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그의 명성은 높아지고 흰 장갑은 차츰 전설이 되어 갔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시대였기 때문이었으리라.

 

  영주역을 반경으로 한, 철도가 닫는 곳에는 희 장갑의 세력이 미쳤다. 태백도 흰 장갑의 구역이었다. 태백은 광산 지대라서 돈이 풍부한 곳이었다. 태백에서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니 곳이라 했다. 흔히 돈 많은 곳이 그랬듯이 태백도 유흥주점이 즐비한 곳이었다. 흰 장갑이 수하를 거느리고 태백에 행차했다. 경찰서장이 나와서 영접을 했고 그는 서장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치안에 공이 있다는 명목이었다. 돈이 흔한 곳에서의 경찰서장의 대접이었으니 그 호사스러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영주 군수를 찾아갔다. 그 때는 시가 아니고 군이었다. 일정한 직업이 없이 자기를 따르는 젊은이들을 환경 미화원으로 취직을 시켜 줄 것을 제안했다. 그 때에는 환경미화원이 턱없이 부족할 때였기에 그들을 모두 군청에 취직시켰다. 그로 인해 덕을 본 사람들의 수효가 늘어날수록 그의 명성은 높아가고 나와바리도 넓어졌다. 없는 일자리를 만들자니 군수도 난감했으나 그의 부탁을 거절할 만큼 배짱이 있지는 못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신문에는 정치깡패 이정재가 ‘나는 깡패입니다.’라고 쓰인 현수막과 함께 서울 시내에 조리돌림 당하는 사진이 실렸다. 전국에 폭력배 소탕령이 내리고 흰 장갑도 리스트에 올랐다. 자기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폭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그걸 부정할 흰 장갑이 아니었다. 흰 장갑은 스스로 경찰서로 찾아갔다.

  “서장, 내 신세가 청와대 개만도 못하게 되었네. 잡아가게.

  그는 구속되어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가 출소하는 날 많은 사람들이 교도소 문 앞에 몰려가서 그를 환영했다. 환영객 가운데는 그의 수하도 있었지만 일반 시민의 수도 적지 않았다. 흰 장갑이 옥살이를 하는 동안 그가 없는 사이에 정 아무개라는 건달이 나타났다. 정 아무개는 조금은 근대화된 조폭이었다. 흰 장갑과는 부류가 달랐다. 조직을 가지고 이권을 챙기는 조폭이었다. 흰 장갑이 출소했다는 소식을 들은 정 아무개는 흰 장갑에게 도전장을 냈다. 흰 장갑이 있는 한 자가의 조직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었다. 이를 마다할 흰 장갑이 아니었다.

 

  장소는 영주극장 앞 광장이었다. 영주에서 유일하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내 중심에 자리 잡은 목조 건물이었다. 흰 장갑이 맞장을 뜬다는 소문이 시내에 퍼졌다. 구경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구경이 싸움구경과 불구경이라는 구경꾼이 없을 수 없었다. 더구나 흰 장갑의 싸움이라니 그 수효를 짐작할 만했다. 사람들은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극장 앞에 모였다.

 

  흰 장갑은 어김없이 왼손에 흰 장갑갑을 끼고 자세를 잡으려 했다. 흰 장갑이 미쳐 지세를 취하가도 전에 정 아무개의 발뒤꿈치가 원을 그리며 흰 장갑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흰 장갑이 쓰러졌다. 구경꾼들은 망연자실했다. 정 아무개는 태권도를 수련한 사람이었다. 흰 장갑이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돌려차기라는 기술을 구사한 것이다. 돌려차기는 상대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공격이 들어오기 때문에 방어할 사이도 없이 당하고 만 것이다. 어떤 이는 흰 장갑이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정 아무개가 공격했기 때문에 정 아무개가 반칙이라고 했다. 구경꾼들은 흰 장갑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 도시의 최고의 주먹이요 전설적인 주먹인 흰 장갑이 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러나 흰 장갑은 패배를 인정했다. 그 후에 몇 번 정에게 흰 장갑이 도전장을 냈지만 정은 받아 주지 않았다. 다시 싸운다면 타고난 싸움꾼이요 장사인 그를 이긴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흰 장갑은 스스로 칩거하여 시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싸움을 하지 않는 흰 장갑은 이미 흰 장갑이 아니었다. 주먹이 법보다 앞서던 시대는 저물고 흰 장갑이라는 존재도 전설에 묻혔다. 그러나 이 지역 나이 든 사람들은 아직도 눈 내리는 겨울이면 혹은 장갑을 낄 때면 흰 장갑이라는 이름이 문득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가끔 술자리에서는 자기가 아는 사람이 흰 장갑이라고 서로 우기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