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발부수지부모

 

아버지는 전형적인 시골 선비셨다. 아버지를 이야기하면서 선비 앞에 불경스럽게도 시골이란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가령 유학의 경전 해석이 한문 문장을 그대로 번역하는 수준을 넘지 못하셨기 때문이었다. 성현들의 말씀과 행적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군자의 길이라는 믿음에 갇힌 분이라 생각했다. 가령 출필곡반필면(出必告反必面)을 금과옥조로 여기셔서 나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셨다. 학교에 갈 때 간다고 고하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왔다고 고했다. 한 번은 동무들과 개울에 며감으로 가면서 고하는 것을 잊은 적이 있다. 그 때 아버지에게 체벌을 받은 적이 있다. 내 생애에서 부모에게 받은 유일한 체벌 한 대였다. 나는 마을에서 다른 아이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유일한 아이였다. 한 가지 이유를 더 보태자면 다른 사람 모두 서양 옷 입는 시대에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한복, 두루마기, 갓을 정장으로 알고 사신 분이었다. 내가 교사를 해서 월급을 탔을 때 단 한 번 양복을 맞추어 드린 적이 있다. 그 외에는 단 한 벌의 양복도 갖지 않으신 분이다.

 

  일제 때 소학교를 나오시기는 했으나 할아버지가 그 이상의 신교육은 금하셨다. 왜놈의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려는 것과 같음이라 하시며 아버지의 향학열을 꺾으셨다. 그래서 당신 곁에 두시고 먹고 사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한학을 가르치셨다. 타고난 효자이신 아버지는 할아버지 말씀을 한 치도 어기지 않으신 분이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에 대한 효는 인근에 소문이 자자했다. 아버지는 시골에 사시면서도 농사일도 할 줄 모르셨다. 사서삼경 외는 일밖에는 거의 무능에 가까운 분이셨다. 아버지도 신학문에 대한 열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집수리를 하다가 우연히 일본어로 된 강의록 몇 권을 발견하고서다. 와세다 대학에서 발간한 통신강의록이었다.

  항상 논어 구절을 읊으시며 도덕만 강조하시던 아버지가 젊은 시절 할아버지 몰래 통신강의록으로 신식 공부를 하셨다니 놀라운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내 할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가 들려주시는 공자 맹자 말씀이 귀를 떠난 적이 없다. 아버지는 특히 암기력이 뛰어나셨다. 시간만 나면 원문을 외우시고 해석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강조하시는 구절이 身體髮膚受之父母니 不敢毁傷孝之始也. 몸이며 얼굴이며 머리카락이며 피부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니 감히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뜻이니 어디에 가드라도 몸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숙제였다.

 

  나는 본의 아니게 장남이 되었다. 위로 형 둘이 태어나자마자 죽은 다음 태어났으므로 나를 살리려는 어른들의 정성이 지극했다.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애지중지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나는 어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약골이었다. 아이 때 나는 말라깽이였다. 입이 짧아서 먹는 것을 싫어했다. 오죽했으면 유순하기 그지없는 어머니가 화를 내며 이런 대사를 친 적이 있다.

  “좀 처먹어라. 요놈아.

  따라서 몸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의 과제가 몸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으니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나는 여름이 두려웠다. 여름에는 짧은 팔의 옷을 입어야 했다. 그러면 여윈 팔이 그대로 드러나니 그것이 부끄러워 고통스러웠다. 너무나 부끄러움이 많아 별명이 암사내였다. 성별은 남자이지만 하는 짓은 계집아이를 닮았다. 조금만 부끄러워도 금세 얼굴이 빨개지고 몸 둘 바를 몰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중학교 때는 점심을 굶었다.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 주시지만 점심시간에 도시락 뚜껑을 열면 밥 냄새가 났다. 그 밥 냄새가 싫어 다시 뚜껑을 닫고 운동장 가 나무 그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점점 키가 자라고 사춘기를 지나면서부터 밥을 잘 먹게 되었다. 몸이 자라야 하니까 스스로 영양을 요구했기기 때문일 것이다. 밥은 잘 먹게 되었지만 키만 클 뿐 여전히 말라깽이요 약골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태권도를 배우거나 집에 운동 기구를 갖다놓고 운동을 하기도 했다. 샌드백을 달아놓고 치며 노는 아이도 있도 시멘트로 역기를 만들어 들기도 했다. 나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강조하시는 몸을 상하지 않게 하려면 운동이라도 해야 했었다. 그 때는 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착하게 살면서 남에게 해로운 짓을 하지 않으면 싸울 일도 없으리라 여겼다. 나는 싸워서 누굴 이길 자신이 거의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고학년 아이들이 저학년 아이들을 불러놓고 싸움을 시키는 일이 있었다. 그 때 자주 들은 말이 있다. 너 얘와 싸워 이길 수 있겠니? 이 말을 내가 사는 변방에서는 이렇게 물었다.  

  “니 야 이기나?

  이 때 이긴다고 대답해야 남자답지 진다고 하는 일은 남자답지 못한 일이라 여겼다. 서로 이긴다고 하면 싸워보라고 했다. 대가리가 굵은 아이들은 이렇게 싸움 구경을 무료로 관람하곤 했다.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 구경 가운데 가장 재미있다는 것을 이들도 알았을 것이다. 나는 싸움 구경이 재미있지 않고 무섭기만 했다. 놀이시설도 없고 장난감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몸을 가지고 노는 수밖에 없었으리라. 모래밭이나 잔디가 잘 자란 묘지에서 편을 갈라 레슬링을 하기도 했다. 고상받기라고 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때 고상! 이라고 하면 공격을 멈춘다. 고상이라는 말이 항복의 일본말이라는 걸 안 건 많은 세월이 지나서였다. 이런 무지막지한 어린이들의 놀이문화가 생긴 것도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생긴 상처라는 것도 그 때는 몰랐다.

 

  나는 이런 놀이문화가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누구와 싸워도 이길 자신이 없었었다. 더구나 약한 몸으로 싸우다가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어기는 일이기에 더욱 안 될 일이었다. 그렇다고 진다고 솔직하고 말하는 치욕도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상받기를 하다가 항복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싸움을 시키거나 고상받기를 하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외톨이가 되어 하늘을 보거나 냇가에 앉아 흐르는 물을 보며 노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혼자 잘 노는 것은 그 때부터 만들어진 버릇일 것이다.  

 

  중학교에 가서야 몸을 상하지 않게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차츰 알게 되었다. 그래서 몇 가지 궁리를 하게 되었다. 첫째 싸움이 일어났을 때 36계가 제일이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가슴에 새겼다. 둘째는 가진 것 다 주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납작 엎드린다. 셋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 급소를 먼저 공격하고 도망치는 일이다.

 

  시골 조그만 중학교 교실에서였다. 나는 반장이었다. 입학할 때 장학금도 받고 범죄 사실이 없으니까 아이들이 나를 반장으로 뽑았다.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반장이 되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차렷, 경례도 하고 반장 노릇을 했다. 종례가 끝나면 청소를 하고 집에 가야 하는데 청소 당번 아이들이 도무지 청소를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혼자 청소를 했다. 그래도 아이들은 거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청소를 마치고 만만한 아이에게 왜 청소를 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이 아이가 할 말이 없으니까 씨발이라고 욕을 하더니 주먹으로 공격을 하려했다. 나도 모르게 선빵과 급소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그 아이의 주먹이 내게 닿기 전에 내 주먹이 그 애의 코에 먼저 닿았다. 그 애의 코에서 피가 났다. 어릴 때 싸움은 코피가 나면 지는 것이다. 아이들이 모여들고 나는 그 애와 같은 마을에 사는 형들에게 교사 뒤편으로 끌려가서 몽둥이로 맞았다. 맞으면서도 아픈 줄 몰랐다. 다만 신체발부수지부모만 생각했다. 재발 상처가 나지 않기만을 빌었다. 다행히 피도 나지 않고 바지 속이라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집 가까운 곳에 고등학교가 없어서 고등학교는 집과 떨어진 소도시에서 다니게 되었다. 나는 음치이기도 하고 수치이도 했다. 노래를 하면 이상한 소리가 나고 수학은 중학교까지는 그럭저럭 했는데 고등학교 수학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수학 참고서를 사러 서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두운 거리 담벼락에 몇 명의 소년들이 모여 있었다. 낌새가 조금 이상했지만 그냥 모른 채 지나치기로 했다. 그들과 가까워졌을 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를 둘러쌌다.

  “너, 담배 있어?

  아버지로부터 받은 도덕교육으로 무장된 내가 담배가 있을 리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술과 담배를 할 줄 몰랐다.

  “없는데요.

  “웃기지 마. 이 새캬.

  주눅이 잔뜩 든 목소리로 대답하자 욕설이 날아왔다. 머릿속은 복잡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주머니 뒤짐을 당할 것이고 담배나 돈이 없으면 매를 맞을 것이 뻔했다. 신체발부를 떠올리고 다치지 않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들과 싸워서 다치지 않을 힘이 없었다. 포위되어 있으니 도망갈 통로도 없었다. 그 중 가장 약하게 보이는 놈을 뚫기로 했다. 갑자기 한 놈을 밀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학교 담장을 따라 하수도 뚜껑이 길게 깔려 있었다. 하수도 뚜껑이 덮인 위를 달렸다. 몇 놈이 따라서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앞에 두 간 정도의 뚜껑이 없는 하수도가 나타났다. 나는 갑자기 앉았다. 뒤를 따르던 놈 몇이 내 등을 넘어 하수도로 처박혔다. 나는 죽어라 달렸다. 내 생애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린 것이 그 때가 아닌가 한다. 양주동 박사도 잠자는 머슴의 다리털을 뽑다가 머슴이 일어나 달려와서 담을 뛰어넘어 도망갔는데 그 높이가 3미터는 된다고 구라를 친 적이 있다. 그 때 나의 달리기 속도는 운동회 때 달리던 것보다는 빨랐음은 확실하다. 나는 운동회 때 땅! 하면 늘 꼴찌였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추격자가 보이지 않았다. 겨울이었는데도 땀이 온몸을 적셨고 수학1의 정석은 행방을 몰랐다. 다만 몸을 상하지 않게 한 것만을 다행으로 여길 따름이었다.

 

  스무 살 때 군대에 가기 위한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시내에 왔다. 초등학교 강당에서 모하마드 알 리가 권투할 때 입는 줄무늬가 있는 팬티 차림으로 신체검사를 받았다. 어머니가 장날 난전에서 사 주신 거였다. 나는 그런 차림이 부끄러워 아직도 그 때 생각을 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몸무게가 53킬로그램 정도 되었는데도 갑종 판정을 받았다. 비록 말라깽이였지만 갑이라니 을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신체검사를 마치고 시골에서 온 친구들과 같이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시내 양아치들은 신체검사 받는 날이 대목이었다. 촌놈들이 무더기로 시내에 오는 날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내에서 고등학교라도 다녔으니 시내의 이런 물정을 알고 있었다. 허름한 대포집 앞에서 건달들이 우리를 불렀다. 가슴이 덜컹했다. 일 났구나 싶었다. 시골에서 농사짓던 친구들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리로 가려고 했다. 나는 가면 안 된다며 튀자고 했다. 친구들은 부르는데 어찌 도망을 가느냐며 촌놈의 순진함으로 그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혼자라도 36계를 놓고 싶었지만 친구들을 버리고 그냥 갈 수가 없었다.

 

  양아치들은 우리를 대폿집 안으로 밀어 넣고 출입문에 의자로 바리케이드를 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갇혀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우리 앞에 막걸리 한 사발씩을 따르고 숟가락으로 떠서 먹으라는 것이다. 우리 촌놈들은 양아치들이 시키는 대로 숟가락으로 막걸리를 떠서 국 먹듯이 했다. 그들은 저희들끼리 킥킥거리며 이 기이한 관경을 즐겼다. 이 굴욕의 공간에서 탈출할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돈을 빼앗기거나 폭행을 당하거나 아니면 두 가지 모두를 당할 처지였다. 암담하고 막막했다. 이 와중에도 신체발부수지부모를 생각하며 다치는 일만은 없기를 간절히 빌었다.  

 

  숟가락으로 막걸리를 떠서 먹는 시늉을 하며 우리를 지배하는 양아치들을 곁눈질로 살펴보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던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양아치 가운데 친구의 형이 보였다.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몇 번 본 얼굴이었다. 나는 그에게로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도 나를 보더니 놀라는 눈치였다. 나는 계속 구원의 레이저를 쏘았다.

 

  난감해 하던 그가 갑자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화난 어조로 말했다.

  “야 임마! 니가 왜 여기 왔어?

  나는 겉으로는 죽을죄를 지었다는 시늉으로 머리를 숙이고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여기 오지 말라고 했지? 빨리 집에 가!

  친구 형은 아마 양아치 그룹에서 꽤 지위가 높은 것 같았다. 우리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지만 죄인처럼, 아무 은혜도 입은 바 없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굴욕의 공간을 벗어났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번에도 나의 신체를 상하게 하는 불효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

 

  변방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집에 머물면서 발령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 모교의 가을 운동회 날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날을 좋아하지 않았다. 달리기만 하면 늘 꼴찌를 면할 수 없었다. 3들까지는 상으로 공책을 한권 주었는데 나는 한 번도 상을 받아보지 못했다. 달리가가 끝나면 내가 이러려고 달리기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운동장 가에서 가마솥에 끓이는 돼지국밥은 잊을 수 없다. 운동회 날이면 운동장 가에 가마솥을 걸고 국밥을 끓이는 사람들이 온다. 가마솥에 장작을 지피고 국을 끓이면 솥에는 시뻘건 국물이 끓고 그 위에 돼지 비개가 둥둥 떠다니고 구수한 냄새가 퍼진다. 시골에서 평소 먹을 수 없는 음식이기에 그거 한 그릇 먹는 일은 운동회의 가장 큰 보람이었다.

 

  그 국밥 생각이 나서 운동회가 열리는 초등학교에 갔다. 고향 집에서 학교까지는 오리 길이었다. 오다가 집 가까운 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다. 젊은이들이 가게 앞 들마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데 한 청년이 나를 불렀다. 손짓으로 들마루 쪽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나를 들마루에 앉게 하고 술을 따르었다. 몇 잔을 받아 마셨다. 인근마을의 아이들이었으나 그들은 나를 알지 못했다. 객지에서 학교만 다녔으니 그랬을 것이다. 이제 가야겠다고 일어서려니 그들은 나를 보네주지 않았다. 술값을 내게 할 요량인 것 같았다. 돈이 없으니 술값을 낼 형편이 아니었다. 그냥 가면 폭력이 돌아올 것이 자명한 형편이었다.

 

  다시 떠오르는 생각이 신체발부수지모였다. 나는 그냥 일어서서 집을 향해 걸어갔다. 글들 몇 명이 나를 따라오며 잡으려 했다. 나는 뛰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외줄기 논둑길이었다. 길이 좁으니 자연 내가 선두에서 뛰고 그 뒤를 일렬로 그들이 따라왔다. 나는 걸음도 그리 빠르지 못했다. 거의 잡히려는 순에 돌아섰다. 그리고 앞발을 들어 급소에 약간의 충격을 가했다. 그가 논에 처박혔다. 또 달렸다. 또 잡히려 했다. 다시 돌아서서 발길질을 했다. 그도 논에 처박혔다. 그러기를 몇 번이었는지 기억에 없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대문을 잠그고 부모님께 누가 와도 문을 열어주지 말기를 당부하고 깊은 잠이 들었지만 꿈속에서 계속 달리기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야 비로소 달리기를 멈추었다. 친체발부는 수지부니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라는 가르침을 행했음에 안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