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2주 전에 기형도 문학관에 갔었다. KTX 광명역 가까운 곳에 있어서 찾기는 쉬웠다. 첫걸음에는 지나쳤다가 한 번 더 돌다가 '빈 집'의 공간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빈 집'은 내게는 늘 '빈 방'으로 읽혔고, 이 '빈 집'의 공간을 '빈 방'으로 변형해서 '빈 방'이라는 제목의 시도 한 편 썼었다. 아니 두 편이었던가. 2행시 한 편에, 그 2행시를 변형하여 늘려 쓴 자유시 한 편. 돌아가는 곳 끝자리 어둠 속에 위치해 있어서 기형도의 시를 읽으며 가다가는 지나치기가 쉬운 공간이었다. 그 때도 언뜻 드는 생각은 '빈 방'이었다.  지나쳤다가 돌아가 들여다보는데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에 '빈 집' 시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한 사람이 그 공간 입구에서 멈춰서서 시를 감상하고 있어서, 저 공간에 앉을 자리 하나라도 놓였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바로 돌아섰다. 오래 들여다보지 않고 바로 돌아서와서 나는 되려 지금까지도 그 '빈 집' 아니, '빈 방'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도 이 시가 생각나 다시 찾을 때 나는 '빈 집'이 아닌 '빈 방'을 찾았다.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요즘 논란이 되는 드라마(tvn '나의 아저씨')를 보다가 문득 이 구절이 생각났다. 몰래 도망가서 스님이 된 '애인'을 몇 십 년 동안 못 잊고 그리워하다가 그 사는 곳을 알고 찾아와 "돌아와 돌아와 안 돌아오면 이 절간 다 불 싸질러 버릴" 거라고 악다구니 애원을 퍼붓고 떠난 '옛 애인'을 보낸 뒤 스스로를 '빈 방'에 유폐시키는 장면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미 오래 전 '옛 애인'으로 떠나보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여전히 자신에게도 '애인'으로 남아 있었다는 것을 느껴서였을까. 아님, 스스로 '옛 애인'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그 때까지도 여전히 '애인'을 '옛 애인'으로 돌리지 못해 몇 십 년을 그리워하고 애달파하며 살아왔던 '그 사람'의 고통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었을까. 내가 본 것은 다만 기거하던 방에 있던 물건들을 다 밖으로 꺼내고 그 방을 '빈 방'으로 만든 뒤 스스로를 유폐시키는 장면에 불과했다. "언제까지요" "몰라" 그 문답 뒤에 문을 닫고 들어가는 스님과 그 방문에 서둘러 자물쇠를 거는 장면 하나.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빈집에 갇혔다. 문을 잠그는 이와 갇힌 이는 분명 달랐지만 그것은 스스로 문을 잠그는 순간이었다. 내게는 오랫 동안 풀리지 않았던 비밀 하나가 풀리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역시 나만의 상상에 불과한 비밀이겠지만. '암종 같은 빈방' 나는 '빈 방'이라는 시의 마지막을 이렇게 풀었었다. '사내는' '암종같은 빈 방을 여럿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장님처럼' 사랑을 얻고 '장님처럼' 사랑을 하다가 그 사랑을 잃고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는 사내. '장님처럼' 와서 '장님처럼' 우리를 붙잡고 있는 사랑의 순간은 언제까지일까. '증오'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던 사랑마저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는 순간들을 늘 맞고 있으니 내게는 '장님' 같은 사랑의 순간은 죽음까지 함께 가리라 생각되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 '암종같은 빈 방을 여럿 주렁주렁 달고' 살면서도 '임종'에는 이르지 않는 사랑을 나는 하고 있다고나 할까.

   어쨋든 이 시의 화자가 이 시를 쓴 시인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기형도는 너무 일찍 떠났다. 등단을 포기하고 긴 습작 시절을 견디고 지내던 내게 동갑인 기형도의 어떤 시는 '흉내내기'를 부추겼는데 그 '흉내내기'를 미처 다 하기도 전에 기형도는 너무 일찍 떠났다. 그러나 떠났거나 말거나 나는 '빈 집'의 화자가 스스로를 유폐시킨 그 '빈 방'에 오래 지금까지 머물고 있다. '잃었던 사랑'들마저 다시 찾으면서. '장님처럼' 새로운 사랑을 얻고 또 '장님처럼' 사랑을 하면서. 하니 다시 말하자면 기형도는 떠났으나 떠나지 않았다. 기형도 앞에 선 나는 늘 '장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