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 씹는 남자

 

-문인수

 

 

 

한 이레 일찍 온 셈이 되어버렸다.

남해 이 섬엔 아직 동백이 활짝 피지 않았다.

완전 헛걸음했다. 꽃샘바람이 차다.

 

일행 중 좌장께서

이제 겨우 눈 뜬, 쬐끄맣게 핀 동백 한 송이를 꺾어

들고 다녔다. 들여다보고, 향기 맡고, 어린

속잠지만한 것에 혀 대보고 하더니

어, 먹었다. 아작아작아작 씹어 꿀꺽, 삼켰다.

나도, 둘러앉은 일행도 낄낄낄 웃었다.

동백독이 올랐는지 그의 안색이, 잠시

붉어졌다.

 

“선생님, 방금 걔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거든요.”

“알아요.”

“그럼, 신문사에 제보해도 될까요?”

“이왕이면 대서특필케 해주시오.”

 

한 장면,

즉흥 퍼포먼스가 수평선 멀리 넘어가고 여러 섬들이

주먹만한 활자처럼 시커멓게 몰려와 박히는 뱃길이여

봄이 오는 사태만큼 사실 큰 사건은 없다.

 

지금은 쓸쓸한 춘궁, 그래도 봄날은 올 것이며

씹어먹어도 먹어도

굽은 등 떠밀며 또 봄날은 갈 것이다.

 

 

 

-문인수 시집『배꼽』(창비,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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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남해 여기저기 쉼표처럼 떠 있는 작은 섬들에 동백은 왔을까. 아니면 벌써 왔다가 모두 떠나갔을까. 문인수 시인은 한국 시단의 영원한 형님, 오빠 시인이다. 생물학적 나이와 상관없이 그의 시는 좀체 늙지 않는다. 싱싱하고 푸르다. 주변의 가까운 시인들과 남해 섬으로 나들이 갔다가 얻은 시「동백 씹는 남자」도 그러하다. 1, 2, 3연에 펼쳐 보이는 내용은 또 얼마나 해학적인가. 여행지에서의 장난스런 행동과 대화가 그대로 시로 옮겨져 있다. 그런데 이제 막 눈 뜨는 어린 동백을 아작아작 씹어 꿀꺽 삼켜버려 신문에 대서특필로 날 ‘동백 씹는 남자’는 도대체 누굴까? 시인은 짐짓 “일행 중 좌장께서”라고 딴청을 부리고 있지만 혹 문인수 시인 자신이 아닐까. 위 시에서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본래 의미는 섬에서 벌어진 해학적인 즉흥 퍼포먼스가 아니라 마지막 연의 “그래도 봄날은 올 것이며/씹어먹어도 먹어도/굽은 등 떠밀며 또 봄날은 갈 것이다.”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유한한 우리네 삶의 쓸쓸함과 허무감이 강한 여운으로 남는다. 동백이든 대서특필이든 또 봄날도 분명 왔다가는 반드시 가고 마는 것이다. 아, 봄날은 간다.

-이종암(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