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墨 정원 9

-번짐

 

-장석남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 채 번져서

봄 나비 한 마리 날아온다

 

 

 

-장석남 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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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장석남의 넷째 시집『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읽고 나서 나는 한동안 가슴이 얼얼했다. 시와 노래를 담아두고 가끔 퍼내기도 하는 내 오른쪽 가슴이 불에 데인 듯 십일월의 가을 바람이 들어찬 듯 서늘했다. 통증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노래의 흥분에 휩싸이는 행복한 통증이었다. 다시 그 행복한 통증을 즐긴다. 시집 속에는「수묵 정원」서시를 비롯하여「수묵 정원1」에서「수묵 정원9」까지 모두 10편의 연작시가 있다. 장석남 시인이 물(水)과 먹(墨)으로 만든 그의 정원은 소슬(蕭瑟)하면서도 품격 높은 것이다. 그가 만든「수묵 정원9」에 들어선다. ‘번짐’이라는 말이 이 노래의 매개항이다. 시인은 “번져야 살지” “번져야 사랑이지”라고 노래한다. 또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고,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면서. ‘번짐’이 사랑과 예술, 삶과 죽음을 깁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노래한다. 2연으로 구분된 시의 마지막 두 행이 좀 엉뚱한 소리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옛 노래에 장단을 맞추는 장구 소리처럼 앞쪽 1연의 노래로 잘 번지고 있다. 네게로 번지는 내 노래를 너는 듣고 있는가?

-이종암(시인)